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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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장
 밤중소리  01-12 | VIEW : 815


  ≈ 98≈         예수를 넘겨 준 빌라도        


  (본문 : 요한복음 19 : 1 - 16)

  서 론 : 빌라도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 예수를 자기 힘으로 건져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는 소리가 빌라도의 법정 안에 함성처럼 메아리쳤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라”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군중들의 이 같은 소리가 빌라도의 귀를 따갑게 하여, 이제 더 이상 재판을 지연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상황을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가이사의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부득불 이 피고를 그들의 손에 넘겨 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고 했습니다.

  1. 빌라도의 석방노력

  빌라도에게는 사태를 파악하는 눈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이처럼 재판자리에 까지 이르게된 것은 죄로 인함이 아니요 그들의 종교적인  시기심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끈질긴 고소에도 여전히 예수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1) 빌라도가 생각해 낸 한가지 지혜는 예수를 고문한 후에 군중들의 동정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고 했습니다. 채찍질은 죄인들에게 가하는 무서운 고문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로마병정들이 가지고 다니는 채찍은 짧은 나무 손잡이에 몇 개의 가시가 있고 그 끝은 납이나 혹은 놋쇠. 날카로운 뼈가 달려 있는 것으로 이 채찍에 맞으면 살이 찢겨지고 살림이 떨어져 나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한 것은 이 같은 고문으로 예수의 모습을 사람들이 보기에 처참하게 만들어 그들이 동정심으로 마음을 돌이키게 하려는데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빌라도가 모진 채찍의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예수를 그들 앞에 데리고 나와서 그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며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다시 무죄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신 모양은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런 모습은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올 희롱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피고에게 채찍질의 고문을 지시하고는 안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군병들은 왕이라고 말하는 예수를 고문하는 방법에 있어서 채찍질만 한 것이 아니라 희롱 섞인 가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왕이 쓰신 관을 대신하여 희롱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는 인류의 죄 때문에 번식된 저주의 식물입니다(창3:18).

  예수님은 이처럼 죄와 저주로 말미암은 가시면류관으로 왕의 면류관을 대신했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이 낯선 청년의 몸에 자색 옷을 입힘으로 왕의 우스운 모양을 꾸며 희롱했습니다. 자색 옷은 왕이 입는 옷 색깔을 표방한 것이지만 이것은 영적인 갚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곧 자색이란 인류의 죄를 상징해 주는 표현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라고 하셨는데 이 주홍빛이란 곧 자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인류의 죄로 왕복을 삼으시고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 앞에서 희롱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으로 아우성치는 유대인들의 앞에 다시 서시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처참한 모습으로 군중들 앞에 선 피고를 가르키면서 “보라 이 사람이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로써 빌라도는 예수의 유죄 여부를 엄밀히 취조했다는 사실상의 증거를 삼으려고 했으며, 적어도 이 정도의 채찍으로 응징했다면 이제 그가 받아야 할 책벌의 량은 넉넉히 치른 것이 아니겠느냐는 태도로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오히려 그가 기대한 반대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들은 마치 먹이를 본 사자가 사정없이 물어뜯기 위하여 달려드는 자세로 아우성쳤습니다.

  (2) 유대인들의 내세운 예수님의 죄는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증거한 여러 가지 죄는 수용이 되 수 없었습니다. 증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유대인에 의해서도 아무런 죄를 찾아 내지 못했으며 빌라도의 재판에서도 무죄가 증명되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이 내 세우는 죄는 “저가 자기를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함이니라”고 한 바로 이 한가지 죄임이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있어서 죄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입니다. 실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었고 시대의 징조를 모르고 있었으며 예수에 대하여 알려고도 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용케도 이 한가지 사질에 대해서만은 확실한 증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올 심문할 때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하셨을 때 이들은 쾌재를 부르면서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사형에 해당하는 언도를 내렸던 것입니다(마26:49-66).

  2. 예수를 넘겨준 빌라도

  빌라도는 무리들의 고함 속에서 “저가 지기를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는 죄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이유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정말 이 청년이 신의 아들일는지 모른다고 하는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조차도 신의 아들에 관하여 알고 있었으며 두려워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극력히 타는 풀무 가운데 들어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뱃느고를 바라보았을 때 심히 놀라며 이처럼 말했습니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냐 …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고 말했습니다(단3:24-25).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제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노골적인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이같이 빌라도에게 협박한 무리들의 공격은 제대로 먹혀 들어갔습니다. 가이사란 그 당시 로마 황제인 디베료를 가리킨 말입니다. 만약에 이 무리들이 이 사건으로 황제에게 탄원을 하거나 혹 고소를 제기한다면 빌라도는 엉뚱한 피해자가 될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총독의 자리를 박탈당할는지도 모릅니다. 벌라도는 이제 이쯤해서 자신의 손을 때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 론 : 빌라도는 드디어 분개한 듯한 그의 말투로 “보라 너희 왕이로다󰡓고 말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명예와 권세를 빼앗길 두려움 때문에 양심과, 나타난 사실을 외면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역사에 씻지 못할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는 유대인의 죄에 비하여 가벼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하셨습니다(마11:37-39).





  ≈ 99≈          십자가 위의 죄패        


  (본문 : 요한복음 19 : 17 - 22)

  서 론 : 빌라도 총독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올 십자가에 못 박는 판결을 내리고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 십자가 위에 패를 써 붙여 놓았다고 했습니다. 패란 말은 라틴어에서 기원된 ‘티롤로스’란 말로 표제 혹은 제목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패는 죄인들의 그 죄목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죄패라고 불려졌습니다(마27:37). 예수님의 죄패에 기록된 죄목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이 죄목은 빌라도가 그렇게 쓰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유일하신 죄목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로부터 이 죄목외 다른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빌라도도 유대인들이 최종적인 죄명으로 고소하는 이런 죄명을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 위에 붙이게 된 것입니다.

  1.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유대시간으로 제 삼 시경인 오전 9시경입니다. 그리고 제 육 시(12시)에 세상이 어두워졌고, 제 구 시(3시)에 최종적인 운명을 마치셨습니다(막15:25-37, 마27:45-46). 그런데 여기서 이 시간적인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19:14에서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 시란 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시간이 제 육 시라면 유대시간으로는 12시로 이 시간은 온 세상에 어두움이 깔린 그 시간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시간의 차질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했을 때 그 유대사람의 시간 계산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시간으로 표기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로마의 시간 표기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근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과 어느 정도 일치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로마시간으로 제 육 시라면 오전 여섯 시를 전후한 아침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예비일에 이 일의 완결을 보려고 부지런히 서둘러 날이 새어갈 즈음 공회에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재판을 마치고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으며 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침 6시경에 빌라도의 사형언도를 얻어내고 골고다까지 올라가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2) 십자가 형틀이 어떤 모양이었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란 말은 ‘스타우로오’로 이 말은 ‘스타우로스’란 말에서 기원된 것인데 “곧추선 말뚝”이란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타우로오”란 말뚝을 박다란 의미로, 죄인에 대한 잔인한 형벌의 형태를 의미해 준말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말이 뜻해 주는 대로 십자가 형틀을 말뚝처럼 생긴 일자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다만 십자가란 말의 기원일 뿐 그 형태를 의미한 것이 아니며, 아직 나타난 고고학적인 견지에서도 말뚝형의 십자가는 입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십자가 형틀의 모양을 X자형, T자형, 그리고 十자형 등으로 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메고 간 일이라든가, 십자가 위에 죄패를 붙였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十자형 틀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3) 십자가 처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무서운 저주에 속한 사형방법입니다. 율법에는 돌로 쳐서 죽이는 사형방법은 있어도 십자가에 매 달아 죽이는 사형 법은 없습니다. 로마에서조차도 이 십자가 형틀의 사형은 로마인들이나 자유인들에게는 사용치 않고 이방인들이나 종들이나 국가 전복이나 반역 등의 죄인들에게 적용시킨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는 벗은 몸으로 그곳에 달리기 때문에 하나의 큰 치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못이 박힌 상처로 인한 심한 고통을 견뎌내기 어려웠으므로 신 포도주를 먹도록 허락했습니다. 다음에 못에 찔린 근육이 찢겨지는 괴로움, 그 부분의 부풀어오름, 피가 서서히 흐르는 데서 오는 갈증 등은 능히 지옥의 고통을 말해 준다고 할 것입니다.

  2 세 십자가가 말해 주는 것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 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고 했습니다(17,18).

  (1) 다른 두 사람의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저주를 말합니다. 두 사람은 아담의 후손들인 온 인류를 상정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이 두 사람들처럼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저주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들인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3:10).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롬5:12).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롬5:17). 우리 인생들은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아니셨다면 한결 같이 모두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그런데 그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가 사람으로 행한 일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는 그 시간까지도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자비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간 사람으로 우리에게 확인되었습니다. 이 한편 강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우리들을 상정해 줍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은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상실하고 정죄 받은 그대로의 운명의 길을 갔습니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3)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로 우뚝 섰습니다. 그가 받으신 저주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가운데 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이 예수, 한 가운데 서 계시는 이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롬5:19).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3:14).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한편 강도 모양 구원을 얻지만 그를 외면하는 사람은 다른 한편 강도모양 영영히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4) 빌라도가 패를 써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붙인 죄패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내용이었습니다. 이 패를 히브리와 로마(라틴어)와 헬라말로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각처에서 모여든 모든 유대인들이 이 패를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죄패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항의했습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마치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죽인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그 서두에 “자칭”이라는 말을 써넣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에 대하여 빌라도는 단연 거절하면서 “나의 쓸 것을 썼다”고 했습니다.

  결 론 : 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패는 영원히 지워짐이 없이 그 글에 나타난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을 죽였으며, 빌라도 역시 유대인의 왕을 죽이도록 내어 준 장본인이 되었으며, 우리는 대속의 주이신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100≈          십자가에서 있었던 일        


  (본문 : 요한복음 19 : 23 - 37)

  서 론 :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세상시간으로는 짧은 시간입니다. 단지 여섯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에게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외치셔야하셨을 정도로 참기 어려운 시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한 인류의 심판을 받는 인류 구속사의 역사적인 장면이 이 시간에 골고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간은 우리의 옛사람이 영원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사람으로 탄생시키실 해산의 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은 로마군병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그의 옷을 벗겼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는 주님이 입으셨던 옷을 취하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도박을 벌렸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계셨던 옷은 겉옷과 속옷이었는데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 부터 통으로 짠것이라고 했습니다. 속옷까지 벗기우신 주님은 몸에 아무 것도 걸치신 것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 같은 일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수모를 당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위하여 그 고난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로마군병은 이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는데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은 증거하기를 이런 일은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22:18에 기록되기를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당하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써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이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사실을 증거해 준 것입니다.

  2.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신 일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가 바로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해산한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이 말씀은 일곱 마디 말씀 중 세 번째 말씀입니다. 요한은 이 복음서에서 일곱 말씀 중 세 말씀만을 기록했습니다.

  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④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⑤ “내가 목마르다”(요19:28).
  ⑥ “다 이루었다”(요19:30).
  ⑦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과 모친을 번갈아 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라고 지칭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요한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모친을 “여자여”라고 하신 말씀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달고 있지만 이 말씀을 우리는 다음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1) 모친 마리아로 자신을 육신의 아들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여자란 말의 ‘귀네’는 평범한 여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존칭어는 아닙니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심정은 시므온이 말한 대로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고 예언한 그 고통을 지금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눅2:35).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아들로 생각하지 말라는 위로의 뜻이 다분히 들어가 있는 말씀입니다.

  (2) 이 말씀은 또한 마리아의 잉태 시에 그에게 계시한 천사 가브리엘의 전한 말을 상기시켜 주신 말씀입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전해주었습니다(눅1:35).

  (3) 예수님이 이 말씀하시는 순간은 구세주의 위치에서 죄인의 대속 제물이 되시는 때이심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당하고 계시는 위치는 아들과 어머니가 아닙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이 같은 말씀은 마리아로 그 아들이 메시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당하고 계심을 충분히 깨닫게 하심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그의 어머니에 대한 갚은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우리로 그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려는 뜻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3. 내가 목마르다.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일의 하나는 갈증을 참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은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의 참기 어려운 고통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목마르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는 다음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그가 우리를 위하여 그 몸의 모든 것을(피와 물) 다 흘리신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그의 몸의 피와 물을 다 흘리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은 전신의 갈증은 예수님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시는 괴로운 외침을 하시게 하였습니다.

  (2) 28절 말씀에서 이르시기를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셔야 했던 모든 시련은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심에서였습니다. 그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는 중에도 길이 인내로 참으신 것은 성경으로 응하게 하시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검으로 말고의 귀를 내리치는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6:53-54).

  4.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의 일곱 말씀중 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하시는 기도로 운명하셨습니다.

  (1)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빌2:8). 주님은 이처럼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그에게 맡겨주신 아버지의 사역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2) 다음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메이야적인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모든 일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예수님이 메시야 되신 확실한 증거를 가질 수 있는가? 구약에 예언된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님의 고난에서 일치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에 의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좌우 편에 있었던 죄수들은 발을 꺾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셨으므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찌른 자들로 정죄받기 위한 예언적인 표적이었습니다(계1:7).





  ≈ 101≈          장례를 치른 숨은 두 제자        


  (본문 : 요한복음 19 : 38 - 42)

  서 론 : 이제 해가 기울면서 그렇게도 요란했던 골고다 언덕은 정막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좌우 편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들은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구경하러 올라온 백성들도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했던 무리들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던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도 다 흩어졌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던 로마군병들도 내려갔습니다. 끝까지 골고다에서 되는 모든 일을 바라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한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자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만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염려했던 몇 명의 여인들만이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밤에 예수님께 나왔던 니고모데가 어둠이 깔려 가는 적막한 골고다 언덕 위로 올라온 것입니다.

  1. 요셉과 니고데모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언 듯 열 두 제자들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이들 열 두명의 제자들 외에도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도 알려져 있지 아니한 제자들입니다.

  (1) 아리마데 사람 요셉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는 부자라고 했습니다(마25:27). 이 사람은 또한 경건한 자라고 했습니다(눅23:51). 이 사람 요셉은 하나남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막25:43). 요셉은 예수님올 사랑하고 그 진리를 따른 참 제자였지만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제자임을 은휘해 왔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이처럼 숨긴 이유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이미 산헤드린 공회에서 공식적으로 결의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요9:22).

  그러나 그는 공회에서의 재판과정에서 가타고 하는 찬성표를 던지지 아니했습니다. 이 일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신앙의 진실함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이 사람 요셉은 마치 옛날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이 숨겨오신 주님의 제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왕상19:18).

  요셉은 골고다에서 되어진 모든 일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핍박이라도 받을 각오를 했습니다. 그는 신앙적인 용기를 가지고 자신이 이 문제를 해야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을 빌라도에게 옮겼습니다. 평시에 빌라도와는 면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부자요, 산혜드린 공회의원이라는 존귀한 직분을 가진 이스라엘의 랍비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혹시 공회에 알려져서 이로 인하여 출교 당하면 당하리라고 하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2) 니고데모는 주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니고데모에 대하여 친근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밤에 예수님올 찾아 온 것을 인연으로 하여 중생에 대한 귀한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 니고데모 역시 요셉과 함께 산혜드린 공회의원이었습니다. 이 니고데모는 이날 밤 이처럼 예수님올 만난 이후 예수님올 믿었고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올 잡고자 하여 공회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토의할 때, 예수님올 무조건 정죄하려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는 발언을 하는 일로 인하여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고 하는 핀잔을 받았습니다(요7:45-52).

  이 니고데모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주님의 시체에 대하여 요셉과 협의하여 제각기 자신들이 할 일을 분담하기로 한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분담한 일은 시체에 바를 몰약과 침향이였는데, 그는 이것을 백근쯤 가지고 주님의 시체가 있는 요셉의 무덤으로 갔습니다(몰약이나 침향 100근은 72파운드에 해당됨).

  2. 진실한 두 제자들의 모습

  이들이 시체를 처리해야 할 시간은 안식일 전 예비일이었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을 위해 예비하는 금요일로 대단히 분주한 날입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유대인들의 장례법대로 예수님의 시체를 처리했습니다. 이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그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53:9).

  (1) 이들이 주님께 바친 사랑은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진실과 거짓은 자기 위험이 올 때 그 양상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주님께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주님을 위해 핍박을 당할 때, 그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이들의 사랑은 물질을 드린 사랑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입으로는 주님을 잘 섬기지만 물질로 섬기는 일에는 너무나도 인색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21). 아리마데 요셉은 장차 자신이 사용할 새 무덤을 제공했습니다. 그 무덤은 부자의 무덤이었음으로 호화스럽게 다듬어진 무덤입니다. 요셉은 그 무덤을 예수님께 빌려 드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무덤으로 제공해 드린 것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값진 몰약과 침향을 준비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정성어린 장례는 주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3) 두 제자의 사랑은 실천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실천이 따르지 아니한 사랑은 위선입니다. 말로만 보내는 사랑은 가치 없는 사랑입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고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약2: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술만의 사랑에 대하여 깊이 탄식하시면서 이사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사39:13).

  결 론 : 요셉이 자신의 무덤에 주님을 장례한 일은 영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죽은 것입니다. 자신의 죽을 몸 대신 예수님의 죽으신 몸이 들어갔으니 예수님은 요셉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또한 이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육신의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롬6:4-9). 그뿐 아니라 주님은 요셉의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는 또한 요셉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부활에 연합되는 사실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제자들의 주님께 대한 사랑의 장례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남이 두려워 할 때 자기가 나타나고, 남이 기피할 때 스스로 위험한 일을 담당하며, 남이 주저하는 일을 자신이 선 듯 나서는 일은 주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 거짓이 없는 사랑, 이들처럼 희생적인 사랑을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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