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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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밤중소리  01-12 | VIEW : 691


  ≈ 94≈          아버지께서 주신 잔        


  (본문 : 요한복음 18 : 1 - 11)

  서 론 : 예수님이 잡히신 곳은 기드론 시내 저편에 자리잡고 있는 동산입니다. 이 동산은 감람산이라고 불리우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다니셨던 곳이며, 마지막 밤에 자신이 마실 잔을 옮겨 주십사고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바로 그 산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다른 사람이 찾아오기 힘든 그런 은밀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승과 함께 몇 번인가 가 본 일이 있으므로 관속들을 거느리고 쉽게 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의 당하실 일을 이미 다 아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시면서 순순히 그들의 손에 결박을 당하신 것입니다.

  1. 가룟 유다의 배신

  12제자 중 하나로 주님을 따르다가 그 주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는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영원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을 두고 주신 경종인 것입니다(히6:4-6).

  우리가 성경에서 가룟 유다에 대한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돈을 사랑한 사람이요, 어떤 때는 돈주머니에서 돈을 훔쳐간 도적이요, 그리고 그가 아주 거짓에 능한 이중 인격자 임을 알 수 있습니다(요22:1-6).우리는 그의 선택에 대하여 그가 복음의 사명자로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올 원수의 무리들에게 팔아먹을 배신자로서 선택받은 사실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요6:64, 13:11, 13:38, 17:12). 중생되지 못한 가룟 유다는 언제나 세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혔고 신령한 영적인 일에 반감을 가졌었습니다.

  마귀는 이 가룟 유다를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마귀는 먼저 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요13:2). 그리고 이어 27절에서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했습니다. 먼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준 마귀는 다음에는 자신이 직접 그 마음에 들어가 그 일을 진행해 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마음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품고 언제나 주님을 향한 소망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마음이 기우러지거나 그 마음에 탐심을 품으면 마귀에게 기회를 주게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죄 가운데 빠져 버리게 됩니다.

  2.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유다를 앞세우고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속들이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주님에게로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아셨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지셔야 할 그 때임을 아시고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때를 안다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모든 때는 그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활 줄 모르면 자신에게 주어진 때를 잘못 활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가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피하기도 하셨으며 자신을 숨기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하실 때가 아님을 아시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를 찾느냐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직 날이 새지 아니하여 어두울 때라 그들은 주님을 잘 분별치 못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로라”고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너희가 찾고자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로라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순교자적 신앙고백이라고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시인하는 일에 우리는 어디서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예수님의 이 “내로라”고 하는 정신을 본 받아야 합니다(마10:32-33).

  (3) 예수님은 끝까지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자신을 잡으러 온 그들에게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일은 주님이 하실 일이지 제자들의 분야는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이 어려운 형편에서 구해 주실 것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질 십자가는 자기가 져야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됩니다. 참 사랑이란 어려운 짐을 자기가 지고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사랑을 끝까지 나타내신 것입니다.

  3. 아버지께서 주신 잔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어려운 국면에서 그 처신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큰 용기를 내어 가지고 있던 검을 뽑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동에 대해 예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힘으로 쟁취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요 그의 행동은 만용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검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사명을 잔, 또는 세례란 표현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잔이라고 나타낸 ‘포태리온’은 무엇을 담는 그릇으로 이것이 주님이 받으실 고난의 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받으신 사명을 내게 주신 잔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이 잔을 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잔은 참으로 마시기 어려운 잔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잔을 자신에게서 떠나게 하시기 위해 피나는 기도를 하시기도 하셨습니다(눅21:41-46).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빌2:8).

  결 론 : 우리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 있습니다. 물론 이 잔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잔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잔을 마시기에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잔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잔을 마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무한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우리에게 지워 주신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 95≈          베드로의 실패        


  (본문 : 요한복음 18 : 12 - 27)

  서 론 :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시고 대제사장의 하속들에게 끌려 안나스의 집 뜰로, 가야바에게로, 공회로, 빌라도의 뜰로, 헤롯에게로, 다시 빌라도에게로 이처럼 시달리시다가 드디어 빌라도의 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형언도를 받게 되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은 손이 결박된 채 끌려 다니셨으니 그 시달리심이야 이루 형용할 수 없으며, 하루 종일 굶으신 후라 그 시장하심이 얼마나 하셨겠는가?

  1.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요한과 베드로

  가룟  유다의 인도를 받아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하속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이때 주님의 제자들은 한 명도 남지 아니하고 다 그 자리에서 도망쳐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구 중에서 주님의 두 제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먼 발길로 슬금슬금 결박된 채 붙들려 가시는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 두 명의 제자가 바로 요한과 베드로였습니다. 비록 먼발치로 뒤를 따랐지만 이들은 가히 칭찬 받을 만한 용감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 한 명 베드로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 요한이 성공한 이유는 그의 담대함에 있었습니다. 이 곳에는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15)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 다른 제자는 요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안나스의 집에 들어가실 때 주저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 자신도 그 안 뜰까지 들어갔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당하시는 모든 일을 시종 지켜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아픔을 그의 심령으로 나누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그의 신상에 어떤 결정적인 위기가 올 때 주님에 대한 사랑의 척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평소에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도 없었고 어떤 용감한 믿음의 사역을 이룬 일도 없었지만 그는 주님이 당하시는 어려운 시련 중에 그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의 뒤를 따른 것입니다.

  (2) 요한이 성공한 이유는 그의 사랑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였습니다. 요한이 자신을 표현할 때에도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었는지라”고 했습니다(요13:23).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는 요한에게 주님이 그의 모친을 부탁하실 때에도 요한은 자신을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라고 나타냄으로 자신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요19:26). 요한이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입은 것은 그가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는다”고 하셨습니다(잠8:17).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했습니다(아8:6). 요한의 신앙과 주님을 향한 충성심은 이런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실패

  베드로는 12제자 중 주님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과 그가 받은 사명과 그의 적극적인 성품에 힘입어 늘 다른 제자들 보다 앞장섰기 때문에 이런 칭호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그의 평생에 한을 품게된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일이 대제사장의 뜰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의 뒤를 따른 주인공은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뒤를 따라갔을 뿐입니다. 요한은 담대함과 사랑으로 따랐지만 베드로는 조그마한 양심상의 가책으로 따른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그 전 날밤 다른 제자들 앞에서 주님을 향하여 담대한 어조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에 이 일이 그의 양심을 두들겨 요한의 뒤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마26:33). 이 같은 사람의 인정이나 얄팍한 양심은 자신의 생의 위험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1)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문안에 들어가는 일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잘못하면 주님과 한패로 몰려 잡히게 될는지 모른다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위험 앞에서 주춤거렸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에 대하여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2) 베드로는 요한에게 끌려 안 뜰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라고 했습니다(16). 끌려 다니는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고 억지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3) 베드로는 첫 관문에서 그의 두려워했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7절에서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올 것이 왔습니다. 그가 염려하고 두려워한 일이 그 앞에 찾아 온 것입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중 하나”라고 지적하는 문지기 계집종의 물음에 베드로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즉각적으로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사람의 올무에 걸렸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29:25).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고 사람을 두려워한 베드로는 하나님에 의해 사람의 올무에 걸린 것입니다.

  (4) 베드로는 그 집 종들과 하속들이 쬐는 숯불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그 불을 쬐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고 했습니다(18). 베드로는 하나님의 불, 성령으로 충만해야 할 사람인데 사람의 불을 찾아갔습니다. 계집종에게 지적 당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의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쬐고있는 숯불 있는 곳으로 가 함께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심중은 어떠했겠는가? 예수고 무어고 빨리 이 위기를 모면했으면 하는 간절한 초조감이 그를 지배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곳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대 제사장의 다른 종 하나가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이렇게 지적한 이 종은 하필이면 베드로의 칼날에 귀를 베임바된 말고의 일가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역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또 부인했습니다. 이 때 “곧 닭이 울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 나타낸 베드로의 부인의 소리는 절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4).

  결 론  : 베드로가 이처럼 주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심문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속의 손바닥에 의해 맞으시는 수모를 당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를 측은히 보시고 그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때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 통곡한 것입니다. 이 일이 베드로에게는 오히려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한 평생 주님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순교의 자리에서도 십자가를 거꾸로 짊어졌습니다.





  ≈ 96≈          내가 왕이니라        


  (본문 : 요한복음 18 : 28 - 38)

  서 론 : 예수님은 식민지를 통치하는 유대의 총독에게 끌려갔습니다. 그 당시 총독은 ‘빌라도’였습니다. 이 발라도는 주전 26년경 디베료 황제에 의해 유대의 제5대 로마인 총독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이 빌라도 총독의 관할 구역은 사마리아, 유대, 및 가사와 사해까지 미치는 여러 지역이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문제나 율법적인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허용하였으나 사형집행에 관한 판결은 총독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산혜드린’은 각종 재판상의 기능을 소유하고 있었으면서도 사형선고만큼은 빌라도의 승인을 얻기까지는 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올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죽이려고 음모하는 유대인들은 십자가 위에서 죽일 수 있는 법적 최종집행자인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1. 빌라도의 심문

  빌라도는 솔직한 심정으로 예수라고 하는 이 젊은이에 대하여 재판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정죄 하는 일에도 가담하기 싫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처럼 수모를 당하고 배척을 당하는 일이 그의 범죄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시기에 기인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마17:18).

  (1) 빌라도는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예수의 대한 재판을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잡아온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빌라도에게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고소 사실을 그의 행악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행악자란 ‘카코포이오스’로 악을 행하는 자란 뜻으로 이런 악은 사회 안녕 질서나 국가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최대의 범죄행위를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의 로마 법정의 재판통념상 이런 죄인들에게는 십자가에서의 중한 형벌을 선고해 왔던 것입니다.

  (2) 빌라도는 예수께 대하여 그 첫 심문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왜 예수님을 향하여 이 같은 심문을 시도한 것일까?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된다고 벌라도에게 고소한 유대인들의 고소내용이 이 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리가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는 내용이 그들의 소송 내용이었습니다(눅23:1-2). 빌라도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왕이란 이 세상의 최고 통치자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무명청년, 나라도 없고 백성도 없으며 아무런 통치력이나 정치적인 능력도 없는 청년이 자기 스스로 왕이라고 자처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한 것입니다.

  피고의 심문에서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백올 해도 그 사실을 믿을 빌라도가 아니었지만 자기 앞에 묵묵히 서있는 이 예수란 청년이 유대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핍박과 배척을 받으면서도 어찌하여 자신을 왕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에 대하여 가장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친히 이 같은 대답을 듣기로 한 것입니다.

  2. 내가 왕이니라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에서 분명한 어조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먼저 빌라도에게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가 한 말이뇨”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이와 같이 되물으신 이유는 빌라도의 말의 올무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이 같은 심문이 빌라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이런 심문이야말로 “네가 가이사를 반역하여 왕이 되려고 음모를 꾸민 죄인이 아니냐”고 하는 물음이 되기 때문에 빌라도의 묻는 말에 무조건 대답하실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으심으로 자신의 왕권이 세상의 왕권에 도전하는 반란죄가 아님을 빌라도에게 명시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이 물음에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2)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왕권과 왕으로서의 성격이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별다른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3)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권세를 잡고 다스리는 세력은 사단으로, 이자를 가리켜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2:31, 14:30, 16:11). 물론 인류의 역사를 운행하시며 모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단은 이 세상 임금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 권세를 쟁취하여 그들의 왕이 되시려는 의도에서 오신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를 향하여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정권은 싸워서 이기는 자가 지는 자의 손에서 빼앗는 정권이기 때문에 만약 예수님의 사역이 이 세상에서 그의 왕권을 이루시는 일이었다면 그들과 싸워서 그 의도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메사야로 약속된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야는 이 세상에 속한 왕국의 왕이었지만 이 같은 그들의 생각은 잘못된 메시야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는 인류의 죄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실 메시야, 그리고 주검을 정복하시고 온 인류에게 참 생명을 주실 메시야, 그리고 그 백성들을 영원토록 다스리실 메시야가 참 메시야의 모습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로 더러워진 이 세상의 정권을 잡고 왕이 되실 분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하여 예수님의 심판으로 멸망 받을 땅인데 예수님이 이런 세속적인 땅위에서 왕 노릇을 할 것이란 생각은 큰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그들의 메시야를 기다렸으며 예수로부터 아무런 힘이 없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거나 로마정부를 때려부술 능력도 없는 것을 바라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고 배척하기에 이른 것입니다(요6:66).

  (3)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왕이십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이 해답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판결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바로 이를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일을 하는 단계에서 빌라도의 심문대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얼마 후에 세상을 심판하시는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계19:11-16). 그는 이 세상의 심판을 마치신 후 새 하늘과 새 땅의 천년왕국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단2:34, 계 20:6).




  ≈ 97≈         바라바를 선택한 무리들        


  (본문 : 요한복음 18 : 39 - 40)

  서 론 : 빌라도는 피고로 자신의 재판석에 서 있는 예수란 청년에 대하여 가부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예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마음으로 결정을 내린 빌라도는 이제 예수를 살려 보려는 최종적인 시도를 꽤했습니다. 유대인의 민족적인 절기인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별사면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같은 관례를 이용하면 필연 이 예수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빌라도가 생각해 낸 기발한 계책은 옥에 갇혀 있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인 바라바를 등장시켜 예수와 바라바 이 두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석방시키는 것이 좋을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들은 필연 바라바는 재판의 결과대로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수를 놓아주라고 외쳐 댈 줄로 알았습니다.

  1. 유대인들이 찾은 두 가지 죄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았지만 그에게 적용시킬 죄명이 분명치 못했습니다. 적어도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아 내려면 그에 해당되는 죄목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겨우 찾아낸 죄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했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든 자들을 고쳐 주었다는 구실입니다.

  (1)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신 것이 안식일을 범한 죄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 같은 주장은 즉각적인 주님의 반격을 받았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신 말씀에 어느 한 사람도 이 말씀에 이의를 제기치 못했습니다(마12:11-12).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그들의 규례에 얽매어 외식적으로 지켜 왔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도록 안식일을 지키신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참람되게 하는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셨지만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밝히시는 말씀에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습니다(요10:30-33).

  예수님을 결박하여 잡아 온 유대인들은 그들의 재판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댔지만 서로 합하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었던 차에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다시 묻게 되었습니다. “네가 찬송을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간의 침묵을 깨치고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같은 말씀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외쳐댔습니다.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이때 유대인의 무리들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 했다고 했습니다(막14:61-64). 그러나 이런 그들의 예수에 대한 정죄야 말로 자신들의 정죄 받음을 스스로 밝히 드러낸 증거가 되었으니 그것은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이 아들이셨고 진실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2. 바라바냐? 예수냐?

  언도를 앞에 놓고 벌라도는 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예수는 유대인의 무고에 의하여 회생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은 빌라도의 앙심의 가책, 그 아내로부터 이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 일에 상관하치 말라고 하는 전갈, 곧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 억눌려 이성을 잃고 있었습니다. 이 빌라도가 최종적으로 할 수 있었던 양심적인 그의 행동은 유월절이면 전례에 의하여 옥에서 내 주는 사례를 이용하여 이 의로운 청년을 석방시켜 줄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1) 빌라도는 군중들 앞에 나와서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랴”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그 전에 물론 “내가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바라바는 강도로 붙잡혀 이미 십자가 형틀의 사형언도를 받은 기결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생각은 적중하지를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2) 이처럼 된 일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을 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는 선한 사람들의 손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악인을 통해서 그의 일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잠16:4).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그러했고, 요셉에 대한 일도 그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곧게 하신 일인데 빌라도가 그의 권세나 계책이나 지혜로 굽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사53:10). 이미 모든 인류 구원의 시나리오는 작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 양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도 바리새인들도 유대인들도 그리고 빌라도까지라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속죄 양으로 십자가에 못박는 연기를 연출해야 했습니다.

  (3) 바라바를 선택케 하신 일은 그들의 완악함을 드러내 놓으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완악한 자를 악한 일에 사용하실 뿐 아무 일에나 절대로 불의 하심이 없으십니다. 그들이 불의를 저지른 일에 쓰임 받은 일은 그들 스스로가 불의해서이며 그들이 그 일을 좋아하여 그들 자신이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예정교리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섭리하시고 역사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일을 행하심에 조금도 불의가 없으시고 의롭게 행하십니다. 결코 의로운 자를 불의한 자리에 올려놓으시는 일도 없고, 불의한 자를 의로운 자가 차지할 자리에 올려놓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악한 일에 쓰임 받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악하였기 때문이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제외된 무리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외된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에서 나온 완전하신 뜻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뜻을 우리 인간의 지혜로 밟혀 낼 수는 없습니다. 언제인가 완전한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고전13:9-12).

  (4)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는 바라바를 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택하느냐? 바라바를 택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바라바란 존재는 십자가 위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들의 육신적인 죄악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갈5:24). 우리들 몸 안에서 언제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죽이려는 강도 같은 바라바가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택해 줄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같온 바라바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이처럼 탄식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7:22-23).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롬6:6), 그리스도는 내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 신 것이라”고 했습니다(갈2:20).

  결 론 : 유대인들은 생명의 주를 버리고 강도범인 바라바를 선택함으로 그들의 생애에 천추의 한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육신의 사람 바라바를 버리고 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택하는 올바른 신앙생활올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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