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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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밤중소리  01-12 | VIEW : 804


  ≈ 82≈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        


  (본문 : 요한복음 15 : 1 - 6)

  서 론 : 예수님의 이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열매와의 관계를 심오하게 말씀하신 것으로 그 뜻이 매우 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가룟 유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다음에 하신 말씀으로,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 가지란 곧 이 유다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나오는 우리는 이 말씀을 거울로 삼아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로 점검하여 이 거울에 비취어 보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 꺾어진 가지처럼 불에 던져지지 않으려면 적어도 과실을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하는 말씀의 바른 해석은 “내가 그 참된 그 포도나무요”란 뜻입니다. 여기서 포도나무란 생명의 과실을 맺는 생명의 나무로 하늘의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내려오신 둘째 사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고전15:47). 그러므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새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나무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하신 예수님 밖에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4:12).

  (1) 예수님은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표현하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심에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밝히셨습니다. 아버지는 사랑으로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보내신 것으로만 그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두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이를 제해 버리시고 다른 하나는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이 다섯 종류로 나와 있습니다. 한 분은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님이요, 다른 한 분은 내 아버지라고 하신 농부이신 하나님이요, 그리고 세 번째는 열매 맺는 가지로 비유된 그리스도인들이며, 네 번째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이며 마지막 존재는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들을 불에 던져 넣는 자들로 이 존재는 천사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특별히 유념해야 할 일은 이곳에서 가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존재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매우 가까운 자리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이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측근에서 생활했던 그의 제자요 주님으로부터 권능과 능력을 받아 복음도 전했든 경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실을 맺지 못하여 제해 버림을 당했으며 불에 던져 사름을 당했습니다.

  2. 농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서 열매를 맺으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7:4).

  (1) 하나님은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이를 제해 버리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은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에 모순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한없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롬5:8).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었고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이 같은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 후의 생활에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아니해도 된다고 하는 보증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① 중생은 새로운 영적인 생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이전에는 육적인 생명 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롬8:5-8).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새로운 생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이 같은 가지는 하나님께는 필요가 없는 가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② 나무와 열매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7:16-18). 우리가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인 영적인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가지는 아직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지 못한 사람으로 아직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눅13:7). 더 두어 보았자 과실을 맺을 가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구원도 없이 교회에 나왔다가 결국에는 생명도 얻지 못한 채 제해 버리심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과실을 맺는 가지에 대하여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똑같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맺는 사람도 있고 적게 맺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과실은 자신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이 받은 사명의 달란트 대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③ 과실은 깨끗한데서 열립니다. 여기서 깨끗하다는 말은 ‘카다리조’로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생활, 도덕적인 순결함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마음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합니다.

  ④ 과실을 더 맺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맺는 작은 열매는 하나님의 더욱 풍성하신 축복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30배로, 60배로, 100배로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고후9:10).

  결 론 : 하나님을 향한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빌1:6).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는 거짓 없는 순종의 의지만 간결히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으로 따라 사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의지적인 노력이 뒤따를 때 과실을 많이 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 83≈         기도 응답의 비결        


  (본문 : 요한복음 15 : 7 - 11)

  서 론 :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참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신 교훈은 그리스도인들의 필연적인 열매를 강조하신 점에서 우리의 신앙을 한번 뒤 돌이켜 바라볼 수 있는 경종이 되기도 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승리의 비결을 나타내셨다는 점에서 이 비유의 가리키는 바 깊은 뜻을 살펴 보아야합니다. 또 한편 우리는 이 비유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놀라운 기도 응답의 약속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신 이 말씀은 너무나도 엄청나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처럼 응답이 된다면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놀랍도록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기도의 응답 받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주님의 해답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도응답의 두 가지 조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은 기도 응답의  두 가지 필수적인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1)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 안이란 뜻으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계속적으로 접목되어 있는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나무와 가지란 원칙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와 우리는 언제나 하나로 연합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헬라어의 뜻은 머무르다, 체재한다, 오래 지속한다,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잠시 동안만 거하는 동거생활이 아닙니다. 오래 지속하고 계속하여 머무르는 영원한 연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과 연합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말씀 안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하여 머무르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생활은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그 가지를 살리고 그 가지로 열매를 맺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 힘의 근원이 우리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힘이 곧 “내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열매 맺는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첫째로 마음이 열려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열어 주십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자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두절됩니다.

  둘째,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려면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곳은 귀지만 그 말씀을 받는 그릇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간직되고 마음에 심겨집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자라나서 우리의 생활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려면 말씀을 주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함이 없는 분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누가 말씀을 사모하게 되는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 드리는 사람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려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은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따라야 합니다. 한가지는 듣는 사람에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히11:1). 다른 또 한가지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 마음에 가득 찬 사람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기 때문에 그의 생활이 순종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러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주님은 기도에 제한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주님은 기도를 응답하심에 제한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기도로 무엇을 구할 것이기에 우리 주님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는가?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정욕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약4:3).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요일5:14).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0:31).

  예수님은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룬다는 말은 생기다, 만들어지다, 일어나 다의 의미로 이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일,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생기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일어나거나 생기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과실을 많이 맺는 자의 축복

  예수님이 이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교훈 하시려고 시도하신 바는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의 생활에서 오는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을 알려 주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일은 우리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원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까다롭거나 어려운 조건이 아닙니다. 다만 과실을 많이 맺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목자는 거짓 선지자요, 순종이 없는 성도는 외식하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2) 주님의 제자가 될 조건도 우리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의 자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제자란 주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많은 과실을 맺는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긴요하고 아름다운 일은 많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로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시고, 주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84≈          예수님의 계명        


  (본문 : 요한복음 15 : 12 - 17)

  서 론 : 예수님은 계명이란 말씀을 자주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사랑과 결부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이 계명이란 말씀이 혹 율법적인 것이 아닌가 하여 그 참 뜻을 알기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적인 계명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마5:17). 율법의 완성은 곧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랑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의문의 율법이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심을 밝히시고 계명의 참 뜻은 오직 사랑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결론 지으셨습니다(마 22:37-40).

  1. 우리가 나타내야 할 주님의 사랑

  예수님은 그의 입에서 계명을 말씀하실 때에는 내 계명이란 표현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계명올 지칭하는 것이 아니요 그 율법보다 고차원적인 영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은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에게 물 붓듯 부은바 되었기 때문이며, 그 사랑이 내 마음과 내 생활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우리의 사랑의 푯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사랑의 계명은 지킬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어야 그 분명한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종의 모습으로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사랑입니다(빌2:5-7). 이 사랑은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랑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2) 다음에 이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위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섬겨졌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의 씨앗에서 이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열매는 물론 주님의 사랑을 닮은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는데 그것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형제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요구하시는 이 같은 사랑의 결실을 맺으려면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확실히 심겨져야 합니다. 씨앗이 없이는 열매가 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아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가장 위대한 사랑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사랑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왜 이 같은 말씀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에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친구로 보시고 그의 생명을 버리신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15절에서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리”란 말씀으로 우리로 주님의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구로써 우리를 위하여 그의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의 사랑이야말로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는”위대한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들을 그의 친구로 삼아 그의 목숨을 버리는 큰사랑을 베푸셨나?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일은 종으로써가 아니라 친구로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과 친구의 차이는 대단히 큰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부리는 노예로써 다만 주인이 시키는 일에 무조건 복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즐거움이 없고 고역만이 따릅니다. 이것은 마치 율법의 종으로 율법을 지키려는 자들의 태도와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순종은 아버지의 유업을 함께 나눌 형제로써,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친구로써 대하기 때문에 그 순종에 억지가 없고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로서의 도리를 다 하셨습니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비밀을 다 우리에게 낱낱이 나타내 밝히셨으며, 그 일을 친히 이루시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3) 예수님은 우리로 그의 친구로 삼으시기 위해 나를 택하여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나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택하여 세우심을 받은 사람만이 그의 친구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일은 주님이 택하여 세우심을 받은 주님의 친구들은 반드시 과실을 맺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과실이란 사랑을 말합니다.

  (4) 예수님은 이런 친구들에게 아버지의 응답을 받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계명올 지키는 친구들에게 더 많은 사랑의 과실을 맺게 하시기 위해 무엇을 구하든지 다 얻게 하여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결 론 :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이시며 그리스도인의 열매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사랑의 열매가 받드시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의 형제를 사랑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생활이 되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 85≈         가도 응답의 비결        


  (본문 : 요한복음 15 : 18 - 27)

  서 론 :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은 어두움을 사랑하는데 그리스도인은 빛을 발산하여 어두움을 내어쫓기 때문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어두움은 원래가 빛을 미워하는 것입니다(요3:19). 만약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에서도 환영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어두움에 동화된 사람이지 빛을 나타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빛을 발산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마5:14-16).

  I. 세상 것을 사랑하는 세상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15:19). 주님의 이 말씀으로 볼 때 세상은 세상에 속한 것만 사랑하고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것은 오히려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란 말은 ‘코스모스’로 이 말은 질서, 치장, 우주, 세계란 뜻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창1:31). 그러나 이 코스모스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같은 아름다움은 상실되고 오히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저주의 세계로 변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코스모스’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마지막날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소멸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코스모스는 죄와 어두움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소망이 없는 세상에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는 이 빛으로 어두움을 밝히셨습니다. 여기서 코스모스는 빛과 어두움이 나뉘어진 것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코스모스는 빛을 미워하게 되었고 세상 것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없고 세상에 속한 자로 있었다면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세상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이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주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라면 세상에서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란 멸망 받올 이 세상과 운명을 함께 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지혜를 가지지 아니했습니다. 세상 지혜로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영을 가지지 아니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율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2:12).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다 세상의 영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 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서 온 명, 골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세상풍조와 세상 죄악에 따르는 생활을 해 왔지만 이제 우리는 이 같은 생활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엡2:2).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요일2:15).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따르는 자가 이니요 세상을 이기는 자입니다(요일5:4).

  (2) 다음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인 사단은 시기와 질투의 존재입니다. 그가 가장 미워하는 존재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인데 그 대상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며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택자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로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단으로 진리에서 떠나게 하며, 죄로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며, 의심케 하는 일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확실히 믿고 우리의 입으로 확실히 고백하여 우리들이 하나님의 택자임을 분명히 나타내어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과감히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넘어지는 자가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21절 말씀에서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가장 미워하는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이 이름을 믿고 이 이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이름은 세상을 심판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이름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죽음의 권세를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구원을 주시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임금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이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 이름을 힘입어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3. 핑게할수 없는 죄

  주님을 미워하는 일이나 또 그의 택하신 자를 미워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일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심판을 곁들여 받게 됩니다. 주님은 이미 자기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내려질 무서운 심판에 대하여 경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는 그들은 그 불신의 죄를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의 기적은 그들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시려고 보이신 기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면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그 후로도 성령을 통하여 계속 나타내셨으며 사도들이나 하나님의 종들의 입을 통하여 수도 없이 증거 되었습디다. 그러므로 불신의 죄는 그 어떤 구실로도 씻음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택한 백성임을 기뻐하며, 더욱 이기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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