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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밤중소리  01-12 | VIEW : 511


  ≈ 7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본문 : 요한복음 14 : 1)

서 론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디론가 떠나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더욱이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말한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어렴풋이 나마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가신다는 길을 자신들은 따라갈 수 없는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자신 있는 장담에 제동을 거신 일은 제자들에게 불안한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마음으로 몹시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무엇인가 주님의 위로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마음의 근심은 왜 오는가?

  사람이 마음으로 근심하는 일은 인생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왜 근심이 생기는 것인가?

  (1) 믿음이 없는데서 근심이 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아직까지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그의 부활에 있어야 하며 주님께 대한 소망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2) 근심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없는데서 나옵니다. 마음의 평안은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립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평안을 창조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이 같은 역사가 없을 때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요14:27).

  (3) 근심은 장래에 대한 불안에서 옵니다. 불안은 하나님께 대한 의뢰가 없을 때 생겨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3:5). 하나님은 우리의 의뢰하는 하나님이십니다(시91:2).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나이다”고 말씀했습니다(시 119:42).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견고히 잡고 그 말씀에 내 생애를 맡기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의뢰인 것입니다. 이 같은 의뢰는 우리가 품고 있는 모든 근심을 우리 마음에서 몰아내므로 근심이 머물 곳이 없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우리의 근심은 세상일에 대한 염려에서 찾아옵니다. 염려라는 말과 근심이란 말은 이웃 사촌간입니다. 우리에게서 이 염려를 물리쳐야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인생의 염려는 내일 일 때문에 생겨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34). 인간의 염려는 또 의식주 문제로 찾아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마6:31-33).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하나님의 방법은 주님께 맡기는 일이라고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주님을 믿지 못하고는 주님께 자기 근심을 맡겨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두 가지 근심

  근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근심이고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근심입니다.

  (1) 세상근심이란 세상적인 일로 인한 근심을 말합니다. 세상근심은 우리에게 사망을 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 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고후7:10).

  (2) 그리스도인의 근심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 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이 연약함으로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죄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일으킵니다. 이 근심이야말로 죄에 대한 통회와 자복으로 발전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게 함으로 사죄에 이르게 됩니다.

  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는 골육을 위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골육의 친척을 위한 큰 근심이 있노라고 고백했습니다(롬9:1-3). 바울이 자기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위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비록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의 이런 심정을 가지고 내 골육의 형제의 구원을 위한 간절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는 교회를 위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을 항상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내 속에 눌리는 것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11:28).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근심과 염려의 짐을 함께 져야 합니다.

  3. “나를 믿으라”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할 조건이 주님께 있기 때문에 주님을 떠난 심령은 근심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근심에 잠겨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주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여기에 그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신 말씀의 뜻도 여기에 있습니다.

  (2) 주님은 우리와 동일하게 시험을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2:18).

  (3) 주님은 그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나톨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그의 피로 세운 언약 안에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충만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온갖 축복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이 같은 피의 언약을 믿고 그 앞에 나오는 자들을 하나도 실망시키지 아니하십니다.

  결 론 : 우리 주님은 우리의 근심 중에 나타나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우리의 근심을 맡으시며 우리에게 명안과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낙심 중에 있을 때, 병중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 재앙으로, 실패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 76≈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        


  (본문 : 요한복음 14 : 1 - 3)

  서 론 : 예수님은 장차 자신들의 운명에 대하여 불안함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위로의 말씀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장래 문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심어주며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디론가 가시겠다고 하신 그 목적지가 이 세상에 있는 곳이 아니라 아버지 집임을 밝히시고 그곳에 가시는 목적도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확실한 천국의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1. 우리의 영원한 집

  우리가 신약에서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살펴볼 때 약간의 혼선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그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들 생활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한 말씀인지, 아니면 장차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우리의 처소인지에 대한 분명한 한계를 명시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영생을 가졌다면 지금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을 초월한 생명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이 생명이 삶을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장소적인 처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란 말씀을 하셨는데 이 처소란 말은 ‘토포스’란 말로 그 어떤 위치적인 장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제자들이나 모든 인류가 대단히 궁금히 여기는 이 영원한 처소에 대하여 분명한 말씀으로 밝혀 주셨습니다.

  (1)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천국에 대한 확신은 인생의 어려움이나 고달픔 속에서도 큰 위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1억 짜리 적금에 가입했는데 앞으로 2, 3년 후면 그 돈을 탈 수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앞으로의 2, 3년간 그의 생활의 어려옴이 격심하다고 할지라도 그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즐거움으로 살아 갈 것이 아니겠는가?

  (2) 천국은 우리들이 살아 갈 영원한 본향 집입니다. 그곳은 이 땅위의 그 어떤 곳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영화로운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비록 어려운 인생 길을 살아간다고 해도 천국이 틀림없이 있으며 나의 영원한 처소가 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어떤 괴로움이라도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내가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애게 일렀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이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의 창조주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화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하셨습니다(골1:16).

  2. 거할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

  예수님의 말씀 중에 우리의 눈길을 끄신 말씀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나라는 들어가서는 안될 사람들은 한 명도 들어갈 수 없는 좁은 문이기도 하지만, 들어가야 할 사람들은 그 수효가 아무리 많아도 한 명도 빠트림 없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1) 이곳은 믿음을 지킨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4:7-8).

  (2) 이곳은 간절히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에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니…”(고후 5:1-2).

  (3)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자녀이면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4) 소망을 가진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5)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6)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계21:27).

  3.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우리의 본향 집으로 가는 길이 둘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1) 부활한 몸으로 들어가는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5:34). 이때는 인류의 최후심판이 있을 흰 보화심판에서의 일입니다(계 20:12-15). 계시록 21장에 신부의 단장을 갖추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바로 이런 천국입니다. 이곳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2) 부활한 몸이 아니라 육신이 죽어 영으로 들어가는 곳이 있습니다.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고후5:1-2). 그리고 바울은 담대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12:1-4).

  이 둘은 과연 똑같은 장소냐? 아니면 다른 장소냐? 이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우리는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표현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한 곳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한곳에 있었지만 엘리야의 영광이 모세보다 우세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나 다른 성도들도 마지막 부활의 날에는 더 영화로운 몸으로 그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마17:3-8. 고후5:4).

  결 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주님이 예비하신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있으며 그곳은 말할 수 없이 영화로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 죽어도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영접하실 모든 준비를 갖추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말씀하신 이 같은 예비된 영원한 우리의 집이 있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 나라에 소망을 두는 생활에 큰 보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 77≈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본문 : 요한복음 14 : 4 - 6)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간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이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결론적으로 제자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여러 번 이와 같은 말씀을 들려 주셨으므로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지만 그들 중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 도마가 알고 있는 길은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시는 그 길이 마치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다를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요7:35). 도마는 답답한 나머지 이처럼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 말의 진의는 도대체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그 행방을 모르는 자기들인데 무슨 수로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얄 수가 있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1. 내가 곧 길이요

  예수님은 여기서 놀라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신 길이란 ‘혜호도스’로 그 길을 뜻합니다. 이 길은 오직 하나 뿐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길로 다른 길이 없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라고 하신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오신 참 길이시라는 뜻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요6:63).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은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그리스도는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하신 길이라는 뜻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 우리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 왔습니다. 이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롬6:23). 죄 값으로 가야하는 길이였습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특색은 하나님을 거역하며 진리를 대적합니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평강이 없고 안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11:28). 지금도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친히 그 길이 되셨습니다.

  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이 되신 것은 그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사53:6).

  ② 이 새로운 길이 바로 십자가에서 열린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하셨습니다(히10:20). 그가 십자가에서 그의 육체를 화목 제물로 찢어 드리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산길이 열린 것입니다.

  ③ 그리스도이외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4:12).

  2. 내가 곧 진리요

  예수님은 또한 “내가 곧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곳에서도 진리, ‘혜 알레데이아’란 그 진리란 뜻으로 오직 하나이신 진리, 생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엡4:24).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운 생명을 받아 중생한 사람들입니다(엡1:23). 진리는 죄인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요 17:17). 그 뿐 아니라 진리는 죄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요8:32).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무엇을 진리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성경에 여러 가지 증거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을 들어낸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기도 중에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인 이유 몇 가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이유는 그 말씀의 증거가 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5:39). 성경은 방대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말씀은 오직 한가지 사실에 귀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목적이 생명을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약1:18).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 말씀이 존재할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그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3. 내가 곧 생명이니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하신 생명이란 말은 ‘헤조에’로 그 생명, 바로 예수님의 생명을 가르키는 말씀입니다. 이 생명만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뜻으로 쓰여진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 안에 태초로부터 계셨던 그 생명자체이십니다(요1:4).

  (1) 인간의 생명은 원래가 생령적인 생명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셨습니다(창2:7). 이 생령적인 생명은 완전한 생명이 못 되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게 되자 이 생명은 곧 육신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2)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 같은 인간의 생명보다 훨씬 우위적인 생명이십니다. 그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① 이 생명은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그 아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생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요5:34).

  ②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아무라도 우리의 이 생명을 빼앗을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요10:28-29).

  ③ 이 생명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롬8:17-18).

  (3) 그리스도는 이 생명을 우리에게 더욱 풍성히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요10:10)

  결 론 :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같은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알았삽나이다”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이 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 78≈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본문 : 요한복음 14 : 7 - 10)

  서 론 : 예수님은 아들과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를 알려 주시기 위하여 기회 있으실 때마다 여러 말씀으로 깨우쳐 주신 일이 많으셨습니다. 지금도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가르쳐 준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관계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혹은 비유로 혹은 직설적으로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밝히심으로 삼위일체의 신비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힘 쓰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아들이 없이는 아버지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안에서 모든 것은 계획하셨고 그 아들 안에서 모든 일을 성취하시기 때문에 아들이 없이는 진정한 아버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나를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신비적인 관계이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고전2:9-12).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들을 인간의 지혜나 생각으로는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밝히고 있습니다(고전1:18).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의 심오한 진리를 좀 더 깊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1)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올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인즉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이라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지식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다른 각도에서 자기들의 선생님을 알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영적인 심오한 지식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①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신성을 모르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삼위일체 적인 관념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오직 단일 신적인 한 하나님만을 인정할 뿐. 성부, 성자, 성령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삼위일체의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②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사역을 모르고 믿었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습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는 일이 그가 하실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이 지상에서의 영광의 위에 앉으실 영광의 메시야로 믿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전혀 이해 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그들은 아버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확고한 소망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근심을 하게 되었고 낙섬 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은 했지만 알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못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하 바른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께 드린 사랑이란 인간적인 사랑, 이웃에 대하 사랑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이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마22:23-40). 제자들은 주님을 사랑은 했지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사랑이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대하여 이런 사랑을 가진 것은 아들과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결국을 보려고 몰래 뒤따라갔다가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엄청난 죄를 범했던 것도, 여러 제자들이 주님을 다 버리고 도망친 일도 주님을 잘 모르는데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2.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빌립은 재빨리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말했습니다.

  (1) 빌립의 간청은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봐올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빌립의 이 같은 간청이 성경적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회막 안에서 하나님과 말씀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출33:7-11). 그러나 이런 일은 특별한 경우임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에 있는 일이라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그 당시와 똑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2) 빌립 그리스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어리석은 질문을 하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시는 방법으로 말씀을 택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모습으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히1:1).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 선지자로 말씀하신 그 말씀으로 나타내셨고 오늘날에는 그 아들로 하신 말씀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을 때 빌립처럼 족한 믿음을 소유할 수 없게 되며, 이런 믿음이 있을 때 마음에 만족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너희가 믿지 아니하느냐”

  예수님은 빌립을 향하여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아니하느냐”고 하신 말씀처럼 믿음이 없이는 족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하시는 시간에 하늘에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신 몸이시지만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성삼위의 인격의 신비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의 인격은 각자 별개의 독립성을 가지시지만 그 별개의 인격이, 각자의 그 안에 삼위의 신성이 함께 충만히 거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요1:18).

  (2)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모든 일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성을 지니신 몸을 가지시고 계셨지만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은 아버지가 그의 안에서 친히 이 모든 일을 이루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에게 소망을 두려면,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바른 믿음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라고 말씀했습니다(벧후1:8). 그의 말씀 안에서 그를 깨닫고 그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가질 때 우리의 신앙은 족한 신앙으로 전진하여 나갈 수 있습니다





  ≈ 79≈         더 큰 일도 하리니        


  (본문 : 요한복음 14 : 12 - 15)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헤어짐에 대한 염려와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세 가지 각도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는 자의 범위는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며, 다음에 “내가 시행하리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렇게 행하시는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은 그 일올 행하시는 분이 내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심을 밝힌 일이요, 또 하나는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신 말씀으로 이 같은 일의 전재 조건으로 주님께 구하는 기도가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 “나를 믿는 자”란 누구를 말함인가?

  예수님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지금도 친히 그의 권능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지금도 주님의 역사 하심이 아니시면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대하여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나타내시는 그의 위대한 역사를 교회의 성도들을 통하여 나타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나를 믿는 자”를 통하여 이런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나를 믿는 자란 주의 이름을 믿고 주님과 연합된 성도를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연합의 토대 위에 우리의 믿음을 바로 세워 놓아야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의 영이 이 같은 권능을 나타내시게 되는 것입니다.

  (2) 이 믿음은 주님께 대한 의뢰를 말합니다. 믿음이란 원래가 의뢰를 뜻하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이므로 주님께 대한 의로가 없이는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시는 주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믿음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능치 못하심이 없는 주님의 권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주님을 섬겼던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3) 이 믿음은 약속의 말씀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말을 잘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의뢰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로 어떻게 자기를 의뢰하라고 하시는 것인가? “내가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고 하신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바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의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뢰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시119:42).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며,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하는 일은 곧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의뢰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이 같은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4) 이 믿음은 주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나의 하는 일도 하리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심에 반드시 우리의 기도가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기도란 믿음이 따라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기도와 믿음이 병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응답과 기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약5:15).

  2.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라”

  예수님은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 주님의 이 말씀에는 영적인 의미도 다분히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참 권능은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영적인 권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권능을 믿는 자들에게 주십니다(행1:8). 사실상 복음으로 인한 구원의 권능은 예수님의 생존시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강력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그 많은 군중들도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다 흩어져 제자들만 남게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요6:53-69). 그러나 오순절 날 베드로의 책망 설교에 마음의 찔림을 받아 회개하여 제자가 된 무리의 수가 무려 3천에 달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행2:14-21).

  (2) 또한 이 말씀에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나타나는 실질적인 권능의 역사도 물론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권능의 역사는 주로 치료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하신 권능은 그 대부분의 경우 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치료하시는 권능의 역사가 두 가지 면으로 사도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주님의 이 말씀이 초대교회시대에는 사도적 권능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적 권능이란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권능으로 나타나는 역사를 말합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었던 사람에게 나타난 온존한 권능이라든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의 영을 시험하다가 베드로의 입의 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이라든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낸 일 등,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사건만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심지어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림자라도 뉘게 덮을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5:15-16). 이런 사도들의 역사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② 그리고 다른 한가지면은 그 이후 이 같은 역사가 점차 교회의 은사적인 권능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권능이 은사적인 면으로 변해져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2:8-10).

  결 론 : 우리가 이 같은 위대하고 놀라운 권능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그 근거가 사도들이나 은사 받은 성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행리라”고 말씀하신 주님께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분명히 영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 속에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일에 대한 말씀이십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 보혜사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속에서 그의 전능하신 영으로 우리 육신의 연약에 얽매이심이 없이 그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그의 권능을 따라 이런 일을 능히 행하시는 것입니다(요16:7).





  ≈ 80≈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본문 : 요한복음 16 - 20)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닫기 어려운 영적인 깊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면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보혜사란 말을 처음 듣는 것입니다. 이 보혜사는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실 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8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은 친히 보혜사로 다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성령과 자신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다루시면서 또한 두 분의 관계를 선명하고 뚜렷하게 밝혀 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너무나도 심오한 말씀이기 때문에 성령의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말씀의 전후 관계를 맞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약속하신 보혜사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 성령에 대하여 이곳에서 보혜사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는데 다른 보혜사란 ‘알론 파라클레톤’으로, ‘알론’이란 “다른 종류가 아니라 또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또 다른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일에 대하 말씀을 시사하시는 것입니다. ‘팔라클레톤’은 ‘파라칼레오’에서 유래한 단어로 “법적인 조력자” “변호사” “대언자”란 말로 이 말의 의미하는 바는 다른 이의 소송을 변호하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성령을 보혜사란 표현으로 말씀하셨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보헤사란 뜻이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나와의 법적인 관계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이루실 일에 대하여 이처럼 표현하신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1) 성령은 우리의 법적인 사죄의 대언자가 되시는 분이심으로 우리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요일1:10).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 할지라도 보혜사가 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변호인으로써 하나님께 변호해 주심으로 우리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2) 성령은 우리의 법적인 칭의의 대언자가 되시므로 그분은 보혜사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의를 은사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의가 우리의 행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소멸되기 전에는 우리의 의는 확실한 것입니다. 이 보증이 되신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고후1:22).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앞에서 이 같은 우리의 의를 법적으로 변호해 주심으로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정죄 할 존재란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3) 그 뿐 아니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자비하신 대언자이시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8ㅣ26).

  2.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주님은 이 보혜사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17). 성부 하나님은 진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요17:17). 그리고 성자 하나님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내가 곧 진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6). 다음에 성령 하나님은 이 진리를 증거 하시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영이십니다.

  (1) 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세상이 능히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2:14). 성령은 세상 사람들과는 무관하신 영이십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사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2) 그러나 이 진리의 성령에 대하여 너희는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요 또 너희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깨닫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데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이유는 첫째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에도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말만의 연합인 것이 아니라 그가 친히 내 속에 오셔서 나와 영원히 함께 계심으로 실질적인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중생이란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세상 끝날 까지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나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나를 끊임없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시고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시며 신앙에 유익한 각가지 은사를 가지고 영적인 힘과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3.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18절에서 조심스럽게 성령의 본질에 대하여 자신과 결부시키셨습니다. “내가 고아와 같이 너희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이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보혜사와 예수님과는 다른 존재인 것 아니라 하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19절에서 “너희가 나를 보리니”라고 하신 말씀과 20절에서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신 말씀도 똑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런 말씀은 너무나도 놀라우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논리의 일대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 론 : “그 날에는”이라고 하신 그 날은 성령이 오신 오순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날에 분명히 두 번째 오신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오신다고 하신 말씀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주님과의 연합이요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성령의 임재이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 임재 하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분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 81≈         성령의 약속        


  (본문 : 요한복음 14 : 21 - 31)

  서 론 :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확신에 찬 믿음의 생활, 마음에 큰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생활을 이루는 것만은 아닙니다. 과연 예수님이 나와 함째 계시는가?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혀 영적인 어두움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잘 때도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큰 손상을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생각에 얽매여 스스로 캄캄한 영적인 늪 속을 헤매야 하는 것인가? 이 해답이 21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요, 또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므로 주님이 그에게 나타내시지 않으셨기 때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I.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받을 축복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를 나타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나타내심은 그와 함께 하시는 축복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받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약속을 받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잠 8:17- 18).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누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인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킨다는 말은 ‘테레오’로 이 말은 파수병이란 말의 ‘테레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감시하다, 망을 본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이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고 있는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감시하는 생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왜 이토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하나님의 백성된 첫 번째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첫 열매가 바로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2:20).

  ②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었다고 하는 유일한 표적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말은 거룩한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려지는 은혜로운 명칭입니다. 이처럼 세상과 구별되어 성별된 무리들은 먼저 세상적인 생활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 생활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③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이제 우리는 지난날의 죄로 죽었든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믿음과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자신의 생활과 믿은 후의 자신의 생활이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 사람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하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습니다(갈5:22-23). 그것은 성령이 그 사람의 생활을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② 다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게 하십니다(엡4:24).

  ③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그리스도인들로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의 결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롬6:1-3, 10-11).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생활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생활이 될 것이며, 주님이 우리에게 그를 나타내심으로,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축복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3)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을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의 말씀을 지키는 일이 즐겁고 기쁘고 소망을 주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기란 너무나도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누구든 순종의 생활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먼저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순종의 생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가 될 뿐 아니라 주님이 그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아니하심으로 언제까지나 소망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은혜로운 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2. 성령의 약속

  제자들에게 이르시는 주님의 말씀은 다 영이요 생명의 말씀입니다(요 6:63).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은 주님이 하시는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이에 가룟인이 아닌 유다(별명 다대오, 야고보의 아들, 눅 6:16 행1:13)가 답답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주님께서 자기들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나타내지 않으려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세상에 왜 나타내지 않으시고 또 스스로 자신이 메시야 되심을 세상에 널리 선포하지 않으시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일을 깨달을 시기가 올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리”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보내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이라고 합니다(사61:1, 마 10:20). ㉯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기 때문에 아들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갈4:6, 롬8:9). ㉰ 그는 성령으로 오시기 때문에 영원하신 성령이라고 합니다(히9:14). 성령은 인격을 갖고 계시며(행8:29), 가르치시고(요 14:26), 위로하시고(행9:31), 우리의 연악함을 도우시고(롬8:26), 근심하시고(사63:10, 엡4:30), 훼방을 당하시고(마12:31-32), 명령하시고, 직분을 주시고(행13:2, 16:6-7)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아시고(고전2:10), 사랑하시고(롬15:30), 그리스도를 증거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15:26).

  (2)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나타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한 본체를 이루신 성삼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도 나타내시고 아들의 이름도 나타내십니다.

  (3)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말합니다(요16:31).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가르치실 분은 성령뿐이십니다. 구원의 도리를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참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평안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평안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쫓고 기쁨과 소망을 줍니다. 이 같은 평안은 ㉮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옵니다. ㉯ 사죄의 은총에서 옵니다. ㉰ 하나님의 임재에서 옵니다. 이 모든 축복은 특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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