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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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
 밤중소리  01-12 | VIEW : 1,018


  ≈ 69≈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        


  (본문 : 요한복음 13 : 1 - 11)

  서 론 : 예수님은 자기가 아버지께로 가실 기간이 가까워지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십니다. 주님으로부터 한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 끝날 까지 주님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버리심을 당하지 않습니다(요6:37). 하나도 잃어버리신 바 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6:39).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20).

  1.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예수님의 사랑은 먼저 자기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신 그 사랑의 대상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자기 사람들”이란 주님의 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양들을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셨으며, 예수님은 이 양들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요 10:14-15). 예수님은 자기 양을 분명히 아십니다. 그것은 이미 창세 전에 자기로 말미암아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자기 양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끝까지란 말씀은 무한정의 기간을 말합니다. ‘에이스 탤로스’라 불리는 이 끝까지란 말은 마지막까지, 무한정한 기간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혼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고 말씀하신 끝없는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자기 사람들”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그로부터 무한정한 사랑, 끝없는 사랑을 공급받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받는 사랑이며 언제라도 추호도 변함없이 받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3)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은 영원 불변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하시니라의 ‘에가페 센’이란 말은 한번 주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이 다시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불변적인 그런 사랑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어떤 죄라도 사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어떤 죄인이라도 용납하시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하시는 사랑이시며 하나님은 이 사랑을 “자기 사람들”이라고 하신 주님의 양들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나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롬8:31-34).

  2. 유월절 만찬에서 일어난 일

  이미 예비된 다락에서 유월절 만찬이 무르익어 가는 그런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같은 행동은 너무나도 놀라우신 일이며 제자들도 어리벙벙한 가운데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세 가지 모습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1) 가룟 유다의 모습입니다. 이 자는 “마귀가 벌써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깨끗지 못한 마 속에는 언제나 마귀의 생각이 출입합니다. 원래가 도적으로 주님을 따라 다닌 이 가룟 유다는 이제 더 주님께 소망을 둘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스승을 팔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런 생각은 마귀가 넣어 준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생각을 가지고 유월절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2) 다른 제자들의 철없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겸손함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높으냐? 는 벼슬자리로 인하여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눅22:24). 그들은 식사 전에 먼저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려야 할 터이나 제각기 미룰 뿐 누구 하나 수건을 들고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었으며, 서로간의 봉사도 낮아지는 일로 생각하여 꺼려했습니다.

  (3) 선생이 되시어 본을 보이신 에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이 얼마 후에 대제사장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부활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실 것입니다. 그 일을 주님은 만찬 석에서 곰곰이 생각하시면서 자신의 고통에서가 아니라 주님이 아버지께로 떠나시면 제자들이 고아처럼 남게 될 일에 대하여 측은히 생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대야에 물을 담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이 대야의 물로 씻기시고는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제자들에게 형제 사랑과 봉사와 겸손에 대하여 가르치시려는 솔선수범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모든 일에 본을 보이셨으며 섬기시는 일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3. 발을 씻기신 교훈

  예수님은 이처럼 발을 씻기시면서 시몬 베드로가 있는 자리까지 이르셨습니다.
  (1)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행동이 전혀 가당치 않다는 표정으로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 씻기지 못하리이다”고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일이 도리 상 어찌 있을 수 있겠느냐? 는 생각에서 이처럼 사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에 두 가지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혹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 후에 알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깨달아 알 때가 오며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말씀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의 하시는 일을 통하여 먼저 정결케 하시는 사죄의 은총을 밝히셨습니다. 베드로의 더러운 발(죄)은 예수님에 의하여 씻겨진 것입니다. 이 같은 사죄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베드로는 자신의 더러움을 씻는 일에 자기의 의나 자신의 공로가 하나도 들어가지 아니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신 대야의 물은 바로 그의 피를 말하며 그가 베드로의 발아래 낮아져서 친히 발을 씻기신 일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화에서 얼마나 낮아졌는가에 대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발 아래까지 낮아지셨습니다.

  (2) 베드로는 그러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는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왜? 그의 사랑의 줄이 베드로의 온 몸을 풀 수 없도록 묶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또 하나의 다른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란 “중생의 씻음”을 말합니다(딛 3:5). 이미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구원의 단회성(일회성)을 말합니다.

  결 론 : 구원받은 자들에게도 그의 일상생활상에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다시 목욕해야 할 죄가 아니라 발만 씻으면 되는 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우리 주님이 친히 우리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일1:9).






  ≈ 70≈          서로 발을 씻기라        


  (본문 : 요한복음 13 : 12 - 20)

  서 론 :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은 두 가지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한가지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날마다 죄를 범하는 일에 대한 회개를 말하고, 다른 한가지는 주님이 하신 일을 본 받아 서로 섬기는 생활올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또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며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이 몸소 그토록 비천한 일을 행하셨으니 너희가 그런 일을 해야할 일은 당연한 줄로 알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너희가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주님은 제자들의 스승으로 그들의 선생이십니다. 주님은 또한 그들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생이요 주가 되셨지만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 일을 주님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

  (1) 이것은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약4:6).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요 으뜸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0:26- 27).

  (2) 이것은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서로간에 인격을 존중하여 존대해 주거나 자기보다 훌륭하게 보지를 못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본이야말로 자기 형제들 앞에 겸손히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라는 교훈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했습니다(빌2:3).
  (3) 이것은 또한 서로 죄를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발을 씻는 일이 죄 사함의 뜻이라면 서로 발을 씻겨 주는 일이야말로 형제들 서로가 죄를 용서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마18:21-22).

  2.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알고 행하면”이란 말씀은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말씀 끝에 하신 것으로 주님은 우리의 상전으로, 우리를 보내신 분으로 이 같은 일을 행하신 것을 알고 이 일을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주님은 보내신 분으로 우리의 발을 씻기셨으니 우리는 종으로서 이런 일을 행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 11:29).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려고 할 때에 우리는 언제나 제자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빌2:5).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말할 수 없이 낮추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높아지려고 하는 자신의 교만을 말씀으로 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서로가 연약한 그릇임을 알리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연약에 싸인 몸들입니다. 서로가 사랑해 주며 죄를 용서해 주며 격려해 주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보내심을 받는 자

  예수님은 주님이 보내신 자들에 대한 놀라운 축복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 나타나 있는 대로 주님이 보내신 자를 영접하면 그같은 영접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인정을 받으며 그 뿔 아니라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란 인정을 받게 된다고 하신 놀라우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인가?

  (1) 이들은 곧 사도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마땅히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 인정을 받았으며 그런 영접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고을에 대하여 화를 선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의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0:14-15).

  (2) 이들은 또한 주님의 양 무리들을 맡은 주의 종들을 말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45).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은 주인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양 무리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들입니다.

  (3) 이들은 또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0:15). 복음 전도자는 자신이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확신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예수님은 그 중에도 예외자가 있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택하셨지만 그러나 그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는 구원의 선택에서가 아니라 성경의 응함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양의 목자 중에서 사도들처럼 부르심을 받은 충성된 종이 있는 반면에 가룟 유다같은 악한 종이 있는 것입니다(마24:45-51).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 중에는 수다한 이단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귀가 심어 놓은 가라지 입니다.

  결 론 : 주님이 보내신 자를 영접한다는 말은 ⓐ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대접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이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수냄여인은 자기 남편에게 엘리사 선지를 영접하는 일에 이처럼 말했습니다.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왕하 4:8-12). ⓒ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를 말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위험한 생명을 구원해 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 자기 집에 유하게 하는 자를 말합니다(마10:11). 주님의 보내신 자를 합당하게 영접하여 유하게 하는 사람은 그 집을 위하여 빈 평안이 그 집에 머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어려운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공궤해 주는 일을 말합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그처럼 영접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보내신 자를 영접함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아름다운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71≈           주여 누구오니이까?        


  (본문 : 요한복음 13 : 21 - 30)

  서 론 : 주님은 자기 제자 중에 자기를 팔 사람이 있음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셨습니다. 물론 이 같은 일이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고 한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인 줄을 알고 계셨지만 그 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심히 괴로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유다가 멸망치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셨기 때문에 회개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여러 번 기회를 주셨건만 그는 끝내 멸망의 지식으로 종말을 고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1.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말씀의 진의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알게 하실 필요가 계시기에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19)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실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분명하게 밝혀 두셔야 나중 제자들이 바로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심령에 민망히 하시면서 들어 내 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너희 중 하나란 말은 주님을 팔 자가 12명의 제자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팔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선생님께 대한 배반이기 때문에 주님의 이 말씀이 충격적인 말로 들려졌으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중에 그런 배신자가 있다니” “도대체 그 자는 누구냐”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면서 확인하려는 듯 큰 동요의 빛이 보였습니다.

  (2) 베드로의 반응이 가장 민감하게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다른 제자(요한)를 향하여 그가 누구인지 말씀하시도록 하라고 머리 짓을 보냈습니다.

  (3) 요한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여 뉘시오니이까”고 물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을 보면 제자들이 제각기 자기의 결백을 나타내려고 “주여 내니이까”고 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26:22). 그가 누구인지 이제 점점 좁혀 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입에서 결정적인 말씀이 나왔습니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신 후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스승을 팔 자가 누구인지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가룟 유다에게로 쏠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같은 말씀에 대하여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 그가 누구인지 제자들에게 그 순간은 숨기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가룟 유다를 정죄하시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거듭되는 지적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시키시고자 하는 사랑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뻔뻔스러운 배신자는 “랍비여 내니이까”고 물으면서 주님이 찍어 주시는 떡 조각을 받은 것입니다(마26:25). 여기서 우리는 회개함이 없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죄의 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먹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1:27-29). 유다는 이 떡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 먹 조각을 받고 밖에 나가니 밤이었습니다. 그의 심령의 어두움을 상정해 주는 범인 것입니다. 유다의 밤은 그가 목메어 죽는 그 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2.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 같은 모든 일은 너무나도 의외로 갑작스럽게 된 일들이라 제자들은 아연실색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으로부터 떡을 받았을 때 그 떡을 먹기 전에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지 아니했다고 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일이 지연되거나 포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회개했어도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그 죄로 죽는 것을 원치 아니하고 회개하여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유다에게 떡을 집어 주신 일은 두 가지 면에서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로 그 장본인이 바로 자기임을 뉘우쳐 회개시키려고 하심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일이 이루어졌을 때에 주님의 말씀이 응해진 사실을 알게 하시려 함입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때가 임박하셨음을 아셨습니다. 유다는 회개하기를 거절한 이상 성경대로 자기 선생을 파는 일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서 떡을 받은 유다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회개치 못한 자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교훈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1) 가룟 유다는 처음에는 돈주머니 속에서 얼마간의 돈을 도적질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당장 에라도 버릴 수 있는 죄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버릇을 고치지 아니했습니다. 이 작은 죄가 그의 마음을 점점 어둡게 하고 완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유다는 신앙이 성장치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많이 듣고 기적 행하시는 일도 수도 없이 많이 보고 자신도 주님의 이름으로 전도도 하고 기적도 행했지만 그의 신앙은 병들고 거듭나지 못한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적은 일들이 우리로 가룟 유다를 만드는 것입니다.

  (2) 가룟 유다는 소망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달리 영리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후 돌아가실 것을 말씀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부활은 믿지 아니했습니다. 주님이 죽으시면 자기의 이익의 소망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불의한 청지기처럼 간악한 마귀의 지혜를 짜냈습니다(눅16:1-8).

  (3) 이 같은 유다의 마음속에 사단은 예수를 팔고자 하는 생각을 심어 주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2). 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자는 언제나 마귀가 그 악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와 담력을 줍니다. 그는 이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만찬 석에 참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유다가 끝내 회개치 않고 떡을 받자 그만 마귀가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27). 마귀가 이미 유다의 전 인격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일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향하여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유다는 예수를 파는 일을 실천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으며 그가 밖에 나가니 그의 가는 길은 흑암이 싸인 어두움이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요3:20-21). 우리 중에 혹 가룟 유다처럼 빛을 등지고 어두움에 사로잡혀 캄캄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인가? 가룟 유다의 결국이 되지 않도록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 72≈          주님이 얻으신 영광        


  (본문 : 요한복음 13 : 31 - 33)

  서 론 :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일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은 서로 깊은 연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로 인하여 영광을 얻고 아버지는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을 얻으신다고 하는 영광이란 말은 ‘독사조’로 영화롭게 하다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영광이란 말은 하나님의 인격이 찬연한 빛으로 나타남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실 때부터 그 아들 안에 이 영광으로 채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1.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

  예수님은 미래적인 사건이나 사실에 대하여 현재적으로 표현하실 때가 많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어 사람으로 세상에 계시지만 그의 존재는 하나님이심으로 시간이나 공간이나 역사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표현방법으로 이 같은 말씀을 사용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하신 그 영광은 그의 부활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의 가장 낮아지심이십니다. 이 부활로 주님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시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이 영광을 얻었다고 하신 그 영광은 그의 높아지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그의 부활과 승천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승천은 곧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16:19).

  (3) 예수님이 영광을 얻었다고 하신 말씀은 만물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사실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8:18).

  2. 하나님이 얻으신 영광

  예수님은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1) 하나님은 그 아들로 인하여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영광은 얻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8).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죄인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셨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그의 뜻을 이루셨으므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40).

  (3) 하나님은 그 아들로 인하여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심으로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롬3:25-26).

  3.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적인 영광관계

  예수님은 이곳에서 아들과 아버지와의 영광을 연결시킴으로 이틀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와 동등의 영광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밝히신 영광은 아들과 아버지와의 동등한 영광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들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영광을 하나님으로 얻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예수님께 영광을 주시게 된 연유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1) 예수님은 그 영광의 보좌를 스스로 포기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의 모습인 인간으로 태어나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예수로 말미암아 창조함을 받았고 또 그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일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골1:15-17).

  그 분이 이 세상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 태어나신 일, 시련과 고난을 당하시되 묵묵히 참으신 일, 비방과 모함 속에서 그의 생애를 지내신 일, 죄 없이 정죄하심을 받아 십자가 형틀의 처절한 형벌을 받으신 일, 그의 이 같은 낮아지심이 하나님으로 영광을 얻으시게 하셨으며 또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게 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만을 하여 드리므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서 이처럼 아뢰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4).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4:34).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야말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외침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2:8). 예수님은 아버지로 영광을 얻으시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자기에게 올 아버지의 영광을 소망으로 삼고 이처럼 놀라운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히12:2).

  결 론 : 우리가 이 말씀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신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영광을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우리에게도 같은 영광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①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독생자를 믿을 때, 우리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시고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주시는데 이 영광이 곧 영생의 면류관입니다(요5:24).

  ②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이 같은 영광을 얻으시고 우리에게도 그의 영광을 주십니다(마5:10-12).

  ③ 우리가 우리에게 오는 시험을 잘 참을 때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약 1:12).

  ④ 우리들이 많은 열매를 맺을 때 또한 이런 영광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요15:8).





  ≈ 73≈          새 계명        


  (본문 : 요한복음 13 : 34 - 35)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이란 말을 쓰셨습니다. 새 계명이란 말은 분명히 옛 계명이란 말과 구별된 말입니다. 계명이란 말은 율법에 적용되며 특히 십계명을 연상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고 율법의 정죄에서 놓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계명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는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써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에게는 새 계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옛 계명은 인간에게 의를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죄함을 주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제 의문에 쓴 율법적인 옛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의에 합당한 새로운 계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새 계명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1. 율법에 나타나 있는 두 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새 계명은 예수님이 새롭게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명의 숨겨진 면을 들어내신 것입니다. 율법에는 겉으로 드러난 면이 있었고 속에 숨겨진 면이 있었습니다. 나타난 면을 율법 혹은 계명이라고 부르고 숨겨진 면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이 새 계명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들어 나게 되었습니다.

  (1) 이스라엘은 율법에 숨겨진 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나타난 면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서 얻고자한 의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 율법 때문에 정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이룰 수 없으며 오히려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내 놓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율법에 얽매어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2) 그러면 율법에 숨겨진 면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참 뜻이 정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었다는 점을 들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톰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새 계명을 밝혀 내신 것입니다(마22:37-40). 이 같은 율법의 강령이 구약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이런 하나님의 참 뜻을 보여주셨지만 눈이 가려진 이스라엘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신6:4-5, 레19:18).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겉으로 나타난 면을 바라보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사실을 발견하고, 나타나지 아니한 또 다른 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속죄의 제사로 나타났고 신약에 와서 속죄 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의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의 역할에 대하여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갈3:24-25).

  2. 새 계명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이란 말씀으로 계명 앞에 “새”자를 불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새롭다라고 하는 이 새란 말은 ‘카이노스’로 새로운, 신선한, 전에 없었던 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는 보복적인 요소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새 계명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란 단서를 부침으로 우리가 나타내야 할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임을 밝히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랑을 율법에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세상에 비로소 나타내신 것입니다.

  (1) 새 계명이라고 주신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낮추신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기까지 낮추셨고(요1:14)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시기까지 낮추셨습니다(빌2:7).

  (2) 새 계명이라 하신 주님의 사랑은 원수 되었을 때 오히려 사람을 나타내신 그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신 그 사랑이십니다(롬5:8).

  (3) 죄인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당하신 그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신 그 사랑이십니다(사53:5).

  (4)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의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한 회생이셨습니다. 그의 회생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용서해 주시기 위하신 것이었습니다(히 9:12-14). 예수님의 이 사랑이야말로 율법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한 사랑입니다. 전에 없었던 놀라우신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사랑을 가지고 네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나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사랑에 한정된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이란 내 주변에서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수들이란 우리에게 까닭 없는 욕과 핍박을 가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나타내기 위한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랑 중에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1) 이 사랑은 서로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혼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21-22).

  (2) 이 사랑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라고 하셨으며,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고 하셨습니다(잠10:12, 17:19).

  (3) 이 사랑은 서로 자신을 낮추고 서로 대접해 주는 사랑입니다. 형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남을 대접하는 일은 형제들간에 아름다운 사랑의 극치인 것입니다(마25:35-36).

  결 론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내 형제들에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인가? 첫째로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주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오직 십자가가 아니면 찾지를 못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의 사랑을 찾고 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랑을 내 형제들에게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세상에 냄새를 풍깁니다. 예수님은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74≈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본문 : 요한복음 13 : 36 - 38)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디론가 떠나가실 것 같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 같은 주님의 태도에 대하여 매우 근심스러워 했습니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  이르노라”고 하신 말씀에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 가실지도 모를 주님의 향방에 대하여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33). 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의 뜻을 더욱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때 주님을 향하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그가 잠시 후에 받으실 십자가의 고난으로 그들에게서 떠나시게 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에 대하여 전혀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짐작으로 안 것은 다음 몇 가지 점입니다.

  (1) 예수님은 어디론가 가실 계획을 세우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를 찾는다” “나의 가는 곳”이란 말씀은 분명히 어느 곳으로 떠나실 계획이 있으심을 나타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이 가시려는 곳은 자기들이 따라 갈 수 없는 곳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는 말씀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려고 계획하신 곳은 매우 위험스러운 곳으로 예수님은 자기들을 따돌리고 가시려고 생각하시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3) 예수님은 함께 갈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곳에 혼자 가시려는 마음을 굳힌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인데 아직 육신에 속해 세상일을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이해 될 리가 없었습니다. 궁금하고 답답하여 마음이 터질 듯한 베드로가 노골적으로 질문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주여 지금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장담했습니다.

  2.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장담한 베드로는 나중에 주님을 배신한 일에 가슴을 치며 통회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무슨 일로 이처럼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엄청난 장담을 하게 된 것일까?

  (1) 베드로의 장담은 예수님이 가신다고 하신 그 길이 무슨 길인지 모른 데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주님이 가신다고 하신 그 길이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길이었음을 알았더라면 결코 이 같은 장담을 입밖에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십자가를 지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며,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 그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영광의 길이요 형통의 길 인줄만 알고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쫓으리이다”고 말한 어느 한 제자를 향하여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말씀하심으로 잘못된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그의 생각을 막으셨습니다(눅9:57-58).

  (2) 베드로는 예수님이 지셔야 할 고난의 잔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어디든지 따라가겠노라고 장담했습니다. 자기가 한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경솔히 서원 하거나 맹세하는 일은 삼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잠20:25). 이스라엘의 시사 입다의 서원이 이러했습니다. 자신의 서원이나 맹세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거나 자신의 힘으로 이행할 수 없을 때 입다와 같이 더욱 패역한 죄를 범하지 말고, 사죄의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레5:4-6).

  (3) 베드로는 육신의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에 장담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영의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으로 주님의 길을 따르겠다고 장담한 것은 육신의 생각으로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영의 일을 하기에 무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능력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나타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여 내 목숨까지도 버리겠다고 한 말은 믿음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성품은 과격하고 의협심이 강합니다. 그리고 조급하기조차 했기 때문에 그의 이 같은 말은 육신의 생각으로는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말이었지만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엉뚱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4)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과 영적 능력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무지가 자기의 교만을 불러왔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계기로 은혜를 받으면 “자기는 주를 위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자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 사람은 반드시 넘어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16:18). 그러므로 바울은 경계하기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10:12).

  3. 주님의 대답

  “자기 목숨까지”라도 버릴 것이라고 하는 베드로의 맹세를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가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처럼 무력하게 그들의 손에 붙잡히고 십자가에 달리게 되실 줄을 몰랐습니다.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은 그의 권농으로 원수의 무리들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자신도 주님 편에서 죽을 각오로 싸워 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오리라고 말씀하심으로 그가 나중에 주님을 위하여 주님과 같은 고난을 받아야 할 일에 대하여 예언해 주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닭소리는 새벽에 시간을 알리는 소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시간을 6시로부터 9시, 자정을 9시-12시, 닭 우는 시간을 12시-3시, 아침 시간을 3시-6시까지 잡았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나중에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말씀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신 길을 겸손히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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