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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밤중소리  01-12 | VIEW : 557


  ≈ 57≈          마르다의 가정과 예수님


  (본문 : 요한복음 11 : 1 - 4)

  서 론 : 우리는 한 아름다운 가정과 그 가족들을 바라봅니다. 신약성경에 묘사 된 가정 중에 마르다의 가정만큼 아름답게 보이는 가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가정이 부유해서가 아닙니다. 베다니라고 하는 적은 마을에서도 가장 가난하게 지내고 있는 가정이 그들의 가정이였습니다. 그 가정에 남다른 행복할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삼 형제가 서로 의지하며 고아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복된 가정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 가정을 이루고 있는 그들 삼 형제가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 또한 주님의 큰사랑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복이나 축복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가정에 있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그 심령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어려움이 왔습니다. 가장 격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던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1. 나사로의 가정

  우리는 여기서 나사로의 병이 어떻게 해결을 보게 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에 앞서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섬겨 왔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들은 없는 중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정성껏 영접하고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약 오리쯤 떨어져 있는 이들의 가정에 자주 들르셨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정성어린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찾아가는 하나님의 일군들을 영접할 때 이들의 심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오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10:40-41).

  (2) 이 가정의 가장 나이 어린 동생인 마리아는 값진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던 여자였습니다. 이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날이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말씀을 듣는 일을 큰 기쁨으로 여겼던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 향유로 예수님께 부어 드린 일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진실한 사랑에는 자기의 물질이 따릅니다. 그녀는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고귀한 물질을 주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3) 마르다란 언니는 봉사와 신앙에 있어서 대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을 찾아오실 때마다 좋은 음식을 마련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오라비가 죽은 후 예수님이 찾아 오셨을 때 그 앞에서 놀랄만한 신앙고백을 한일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이 신앙고백은 오히려 베드로의 신앙고백보다 차원이 높은 신앙고백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 같은 믿음의 바탕 위에서 샘솟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가졌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4) 예수닙은 나사로를 부르실 때 “우리 친구”라고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이 나사로는 그의 행실이나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나온 것이 없지만 그를 가리켜 우리 친구라고 부르신 것을 볼 때 그의 신앙이나 주님에 대한 사랑에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가정은 누구의 가정이든 주님의 큰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2. 병든 나사로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병은 어떤 때는 죽음이 동반하기 때문에 그 가정에 근심과 슬픔이 따르는 것입니다. 고아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냈던 마르다의 가정에 기둥 같은 가장이 병들어 죽게까지 이른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럴 때 그들은 과연 어떻게 이 일을 처리했느냐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그 누이들은 먼저 사람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급히 보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의 병은 예수님이 계셔야 살릴 수 있는 병인 줄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나사로의 병을 고철 수 있는 예수님올 데려오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가까이 모셔야 합니다.

  이것은 마르다가 예수님올 만났을 때 그의 입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예수님을 가까이 늘 모시는 생활은 우리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26:41).

  (2) 다음에 그들은 문제가 있율 때 먼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유일하신 문제 해결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내 이룸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13).

  (3)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문제를 아뢰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보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마르다의 말을 전갈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우리의 기도가 논리적으로 예수님을 이해시키려는 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도록 있는 그대로를 아뢸 뿐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마르다는 이 간구만을 전하고 나머지 이 일의 처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맡겨 버린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져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3. 예수님의 응답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후 며칠 지나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은 최종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났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최종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이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리시기 때문에 그 영광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 이는 또한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그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똑같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아들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은 예수님 자신에게도 영광을 받으실 기적인 것입니다.

  결 론 : 마르다의 가정은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안돼는 가정으로 언제나 주님과 가까운 교제를 가졌습니다. 우리들의 가정도 마르다의 가정처럼 예수님을 제일로 삼고 살아가는 가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문제 해결의 근본자를 예수님으로 알고 예수님을 문제해결의 핵심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 58≈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본문 : 요한복음 11 : 5 - 16)

  서 론 : 나사로를 사랑하신 주님은 그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으시고도 나사로가 있는 곳에 가지 아니하시고 계시던 곳에 이들을 더 유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사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나사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인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대로가 아니라 가장 온전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그의 방법에 따라 처리하십니다. 이 같은 일이 나사로의 가족들에게는 일시적으로 큰 슬픔과 어려움을 안겨 주었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더욱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으며 이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은 이처럼 그 당시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심으로 우리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1. 이틀을 더 유하신 예수님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는 말씀을 들으셨다면 예수님은 즉시 나사로에게 달려가셨어야 했습니다.

  (1) 주님은 이런 전갈을 들으신 후에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시각이 급하셨다면 구태여 베다니까지 가시지 않고서도 다만 말씀으로 병든 나사로를 고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가버나옴에  사는 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그같은 방법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딸이 흉악하고 귀신 들린 가나안 여인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런저런 방법을 쓰시지 않으시고 이들을 더 유하셨던 것입니다.

  (2)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의 생각이나 방법을 기준으로 응답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잠16:1).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명심해야 할 일은 첫째로 기도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응답 받기까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에 그 응답의 시기와 방법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3)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응답은 나사로가 죽은 후 무덤에서 살려내시는 일이셨습니다. 이같 은 주님의 의중을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사55:8-9). 다윗은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시135:17).

  2.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하여 그곳을 떠나 유대로 가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얼마 전까지 유대에서 바리새인들에게 돌로 침올 당할 뻔하였는데 왜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아 세상의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에수님이 하신 말씀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고 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일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실질적으로 유대지방에서는 하루의 시간이 열 두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영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낮 열 두시란 정오를 의미합니다. 이 시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을 나타내는 시간입니다. 여기서 낮 열 두 시를 가리키는 가장 밝은 빛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예수님 자신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시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실족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요8:12). 그리고 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요1:9). 예수님은 빛 바로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빛을 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사명을 위하여 스스로 담당하시는 일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7-18).

  (2) 다른 하나는 우리로 빛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면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오의 빛과 같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그 빛을 따라 다니는 이상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요한복음 12:35절에서 가장 적절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모신 사람은 언제나 그의 인생이 낮입니다. 그가 빛으로 걸어가는 길을 막을 장애물이 없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옴 없이 빛을 따라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은 우리로 우리의 소망의 나라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43:3).

  3.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궁금해하는 제자들에게 실상을 이야기 주시기 위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들었다고 표현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병자가 병상에서 잠들어 쉬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 것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나사로를 깨우는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뿐 아니라 한편 제자들에게는 큰 믿음을 주게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능을 제자들로 보게 함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때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고 말했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로 이름 있는 도마는 그 이름이 아랍어이고 헬라어로는 디두모입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예수님올 따라 유대로 갈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의 결심은 실제로 그들 앞에 위기가 왔을 때 스승을 버리고 도망하는 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빛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올 모시고 살아가는 생활은 우리에게 기쁨과 축복과 소망을 줍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실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빛이 우리의 마음에서 떠난다면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 59≈          마르다의 신앙고백        


  (본문 : 요한복음 11 : 17 - 27)

  서 론 : 성경에는 여러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베드로와 마르다의 신앙고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으로 주님의 칭찬을 받았고 그의 이름이 반석인 베드로라 불려졌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분명히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비하여 수준이 높은 신앙고백이라고 보겠습니다. 이것은 마르다의 신앙이 베드로의 신앙보다 더 성숙한 자리에 있었다는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셨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신 후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어 장사지낸바 되었고 무덤에 있은 지 사흘인지라 썩은 냄새가 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1.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는 슬픔 중에도 예수가 오신다는 말을 전해듣고 곧 나가 맞았습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일은 모든 일에 우선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올 맞으러 나간 일은 자신이 어떤 환경에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불변을 말해 주는 일입니다. 마르다는󰡒예수님이 소식을 들으신 즉시만 오셨어도 살 가망이 있었을 것을, 예수님이 원하시면 자기 오라비 나사로가 죽지 않을 수도 있으련만“ 이 같은 원망이나 불만을 가질만한 그였지만 그녀는 그 어떤 역경이나 어려옴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믿음이나 의뢰는 여전했습니다. 여기 마르다와 주님과의 대화에서 마르다의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신앙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1)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기 오라비의 죽을 병을 고쳐주실 분임을 믿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말한 마르다의 원망 섞인 말은 예수님은 그 어떤 병도 그의 권농으로 고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나 마리아가 사람을 예수님 계신 곳으로 보내어 병든 나사로를 고쳐주십사고 전달한 일도 이런 믿음에 기인했던 것입니다.

  (2) 다음에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그의 놀라운 신앙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제라도”라고 한 마르다의 말은 “이미 나사로는 죽었지만”이란 뜻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권능이 예수님께 있음을 마르다는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같이 말한 마르다의 심정을 두 가지 면으로 고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으로는 이 일을 믿었으면서도 너무나도 엄청난 그런 기적이 참으로 자기 앞에 나타날까? 하는 의문을 품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같은 일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간질병 들린 아이의 아비로부터 듣게 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안타깝게 부르짖은 그의 심정과 비슷할는지 모릅니다(막9:24). 다른 하나는 예수님만 원하시면 지금도 분명히 살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이 어떤 것이 되었건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을 믿는 그의 주님에 대한 믿음은 위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즉각적으로 이처럼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시 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① 예수님의 말씀은 마르다에게 있어서 나사로의 최후의 부활에 관한 말씀인줄로 잘못들은 나머지 답변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남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고 말한 마르다가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하신 말씀을 의심했을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다른 견해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분명한 뜻을 잘 깨닫지 못한 나머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지금 살리시겠다는 말씀인지 아니면 마지막 때 부활 시에 있을 일을 말씀하시는지 그 분명한 해답을 듣기 위하여 마르다가 마지막 부활의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③ 다음 세 번째 견해는 마르다에게 부활신앙은 있었지만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마르다의 생각이 어떠하든 그가 마지막 성도의 부활을 이처럼 분명히 믿었다는 사실만도 그의 놀라운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마지막 부활 시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마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된 것만도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나는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부활의 근본(원인자)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신 말씀대로 모든 부활의 근원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고전15:45).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그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39).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이 된 자는 부활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54).

  그리고 나는 부활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자신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사실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에서 승리하신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2) 나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 역시 생명의 근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올 가리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요일1:1).

  (3)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육신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죽어도 라고 하신 이 주검은 육신의 주검을 말합니다. 그리고 산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부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그것은 마지막날에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5:28-29).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부활은 물론 생명의 부활입니다.

  (4)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어도 산다고 하신 이전의 말씀과 모순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이 죽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가진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므로 영원히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가 소유한 영원한 생명과 육신이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생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요6:54). 이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육간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결 론 : 주님의 이 같은 말씀에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고 하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마르다는 어떻게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을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 60≈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        


  (본문 : 요한복음 11 : 28 - 46)

  서 론 : 언니 마르다의 전갈을 듣고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가시지 않고 마르다를 맞았던 그 곳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우는 모습과 그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사 자신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에는 인간의 죽음을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깃들여 있으십니다. 이처럼 죄인을 불쌍히 보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롬5:7-8).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 아픔, 가난, 죽음을 몸소 체휼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 4:15). 이 예수님의 눈물은 잠시 후에 주검의 권세를 말씀으로 이기심으로 무덤에서 나사로를 살려내신 일로 인하여 큰 기쁨을 선사하시게 된 것입니다.

  1. 통분히 여기신 예수님

  우리는 마르다가 왜 집으로 돌아가 가만히 마리아를 불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는 말을 전달했을까하는 의문을 안게 됩니다. 이 일은 기록된 문맥을 잘 살펴볼 때 자명해집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죽은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 수 있다고 하는 놀라운 힌트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신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주님이 나사로를 살릴 수 있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마르다는 이 일을 마리아로 하여금 더욱 주님께 부탁하기 위하여 평소에 지극히 주님의 사랑을 받는 동생 마리아를 예수님께 보낸 것입니다. 과연 마르다의 예상했던 것처럼 마리아의 말에는 더욱 큰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슬퍼하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울었을 때 예수님은 그 마리아의 슬퍼하며 우는 모습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무덤에 따라가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눈물의 간구에는 호소력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사38:2-3). 다윗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시39:12).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하신 말씀은 답답하고 분하고 원통한 마음의 상태를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몹시 안타까워하신 모습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통분히 여기시며 민망해 하실 정도로 몹시 안타까워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이로 인하여 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겠습니까?

  (1)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며 우신 일은 그의 온전한 인성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면으로 생각하시면 우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잠시 후에 죽은 나사로를 자신이 살려내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살리심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시지만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일은 사람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주검 앞에서 슬퍼하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애절한 슬픔과 눈물에 마음이 움직여 함께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눈물은 나사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죄로 죽게 된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의 표시입니다. 세상에 죄악이 관용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 지으셨음을 근심하시고 한탄하셨습니다(창6:5-7). 그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사망권세에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 2:14-15).

  (3) 또한 예수님의 통분은 사망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단에 대한 공의의 분노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앞에서 죽음의 슬픔과 이 권세를 휘두르는 사단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강렬하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분노는 잠시 후에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그와 말씀의 권능으로 살려내심으로 승리하시게 되며, 예수님 자신의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여 사단의 머리통을 치셨습니다.

  2.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마리아의 안내로 나사로가 묻혀있는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돌로 막아놓은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 뒤를 따라온 마르다가 주님을 향하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확실히 믿었다가도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태를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다도 사람이었기에 그의 아름다운 신앙도 썩은 냄새가 풍기는 시체 앞에서 흔들리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보겠습니다.

  인자하신 예수님은 그의 흔들리는 믿음을 다시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때 마르다는 즉시 불 신앙을 뉘우치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무덤의 돌을 옮겼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믿음과 확신과 감사에 넘치는 기도였습니다.

  ① 주님은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을 그의 최상의 목표로 삼고 계시는 예수님은 이미 주님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시면서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처럼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② 예수님은 다음에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간구였기 때문에 항상 들어주셨고 주님은 그같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하시려는 일도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함이심을 나타내셨는데 그곳에 둘러선 무리들로 이 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이며 영생을 얻는 비결입니다(요6:28-29). 참으로 이 일을 통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예수님의 음성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나타내셨던 그 창조적인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거늘 어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지 않겠는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 무덤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음성은 지금도 들려와서 죽은 많은 심령들을 살려내고 있습니다(요5:25). 그리고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 음성이 들려올 때가 올 것입니다(요5:28).





  ≈ 61≈         악인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        


  (본문 : 요한복음 11 : 47 - 57)

  서 론 : 예수님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셨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예루살렘에 번졌습니다. 죽은지 사흘이 지난 냄새나는 송장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인 군중 가운데 여기 저기서 수군거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 일에 더욱 당황한 무리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으로 긴급 회의를 모았습니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완전 합의를 보고 구체적인 모의로 들어갔습니다.

  I.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이 미친 영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은 많은 파문을 던져주었습니다.

  (1) 나사로의 가정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원망 어린 호소도 했습니다. 슬픔과 애통의 많은 시간이 경과되었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무덤에 누워 있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참 소망을 안겨주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에는 그 죽음 뒤에 이처럼 놀라운 기쁨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올 사랑하는 가정에는 언제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술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합니다(시30:5).

  (2) 많은 무리들로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엄청난 표적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관념을 여지없이 부셔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나타난 표적이 크면 클수록 그 표적에 매료되어 더 믿으려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표적은 유대인들로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요, 오실 그 메시야로 믿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 것입니다.

  (3) 이 소문이 순식간에 온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민심이 이 일로 예수께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일로 심히 당황한 나머지 그들은 공회를 소집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 종교지도자들의 모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공회는 중대한 종교적인 재판이나 어떤 긴요한 일이 있을 때에 수시로 모일 수 있었습니다. 산혜드린 공회는 그 당시 7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 제사장들로 구성되었고 대세사장이 주관하여 이 회의를 이끌어 나가는 유대인들의 절대적인 결의 기관입니다. 그들이 다급한 나머지 모이기는 했어도 예수에 대하여 고소하거나 재판할만한 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허물이나 죄를 책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긴급하게 모인 그날의 회의에서도 “예수가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피고 없는 재판은 결론이 나지 아니했습니다. 이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간단했지만 그의 그 말로 재판의 결론이 났습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이 가야바란 인물은 주후 18년에 대제사장에 임명받고 36년에 퇴위 당한 자로 그는 주전 6년-15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안나스의 사위였습니다. 이날 산혜드린 공회에서 논의된 이야기는 세 가지 문제점이었습니다.

  (1) 이 사람이 이처럼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의 활동을 방관하고 민중들이 그를 따르는 일을 바라만 본다면 예수의 인기로 결국 자신들의 설 땅이 없어진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어떤 종교적인 변혁의 징    (2) 만약 이 일을 그냥 내버려두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일개 무명 청년이 온 이스라엘의 민심을 모으고 있는 일은 참을 수 없는 일이며 그의 손에서 큰 표적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 이 마당에서 그를 방치해 둔다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그를 믿고 따를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기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3) 그렇게 되면 로마사람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중심으로 종교적인 소요가 일어난다면 로마정부에게 새로운 핍박의 구실을 줄 위험성이 있으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기들은 망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증한 일은 실인즉 나라와 민족에는 생각이 없었고 자신들의 권세와 영화에 집착된 나머지 애국을 가장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가야바의 결론이 공회에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론은 ⓐ 예수를 죽이는 일은 이스라엘이 사는 길이다. ⓑ 한 사람이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게 하는 일은 옳은 일이다. ⓒ 우리는 온 백성들이 살 수 있는 유익한 길을 택해야 한다. 이처럼 의견의 일치를 보고 예수를 죽이려는 적극적인 모의가 시작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뜻

  그런데 가야바가 말한 말끝에 놀랍게도 이런 말씀이 첨가되어 있음을 볼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힘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것은 악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참으로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이십니다. 사단은 가룟 유다로 예수님올 팔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시는 일이 되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요나를 태운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이방인들이 하는 대로 누구 때문에 바다에 풍랑이 이는지 알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그들의 미신적인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었으니 이로써 요나가 뽑혀 바다에 던져짐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고 하신 말씀은 악인도 하나님의 뜻올 이루기 위해 쓰임 받을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잠16:4).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의 완고와 교만과 시기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고 예수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강력히 발언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모든 일의 작정 속에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당신을 핍박하여 희롱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서 주신 바 되지 아니하셨다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당하셔야 할 일은 모두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마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악인들이 예수님의 이 여러 잔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하나님께만 의뢰하면 언제나 무슨 일에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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