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이메일 : bamjoongsori@bamjoongsori.org

 

  
요한복음 10장
 밤중소리  01-12 | VIEW : 1,032


  ≈ 52≈              양과 목자


  (본문 : 요한복음 10 : 1 - 6)

  서 론 : 예수님은 참된 목자와 참된 주님의 양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모습을 가지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지방은 목축업이 예로부터 성행해온 곳입니다. 목축 중에도 특히 양을 기르는 일은 일반적인 생업으로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는 마치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적절한 비유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1. 양의 우리

  양의 우리는 양이 거처하는 장소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양의 우리는 대개의 경우 지붕이 없으며 들판에 있는 돌로 담의 둘레를 쌓고 또 양이 출입하는 든든한 문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양이나 목자와 관계된 여러 가지 비유적인 명칭들이 나옵니다.

  (1) ‘우리’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16절에서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먼저 이스라엘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4:22). 교회도 오순절날 성령이 예루살렘에 임하심으로 이스라엘 땅에 먼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도 전해져서 하나님의 구원이 온 누리에 퍼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육적인 이스라엘에 얽매여 계실 분이 아닙니다. 그가 지불하신 속죄의 대가는 유대인이 아니라 온 인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다른 양이라고 표현하신 그의 양이 있음을 암시하셨는데 이 양은 이스라엘 이외의 이방인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교회는 이 같은 ‘우리’의 구별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한 우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를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갈3:27-29).

  (2) 양이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로 하여 자신을 양이라고 부르고 목자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영감으로 기록한 시편입니다. 양이라고 하면 우리는 좋은 짐승으로 생각하지만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에 비유되어 있는 것을 빼 놓으면 칭찬들을 만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가장 어리석은 짐승이 바로 이 양입니다.

  ① 양은 길을 잃고 유리하기 쉬운 짐승입니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고 하셨습니다(겔34:6). 목자가 없는 양은 길을 잃고 유리합니다. 우리 인생들이 죄로 말미암아 양처럼 길을 잃고 방황했었습니다. 길이 되신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영원히 길을 잃은 양이 되었을 것입니다.

  ② 양은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히기 쉬운 짐승입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고 하셨습니다(겔34:5).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은 그의 왕위가 그리스도에게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에서 그의 이름이 구약에서 때때로 주님과 동일하게 불려지기도 합니다(겔34:23-24, 37:24-25 ; 호3:5). 다윗은 그의 아비의 집에서 양을 치고 있었을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를 해치면 그 사자를 쫓아가 사자와 곰의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다고 했습니다(삼상17:34-37). 예수님은 그의 양떼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그의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③ 양은 그릇 행하기 쉬운 짐승입니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53:6). 이처럼 약하고 길을 잃으며 그릇 가기를 잘하며 사나운 짐승 떼들에게 잡아먹히기 쉬운 양은 반드시 목자 아래서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문이란 바로 그리스도, 그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8절에서 친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양의 문이란 말은 천국의 문을 가리키며, 구원의 문을 가리키며, 생명의 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문이 되셨는가?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20).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그의 사명을 다 마치셨을 때 그는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과 함께 성소의 휘장 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하나님께로 가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길의 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2.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양의 목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양 무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원 전에 이미 한 목자를 예비하셨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겔34:23-24). 여기서 말씀하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던 이새의 아들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왕위를 받아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이 예언을 할 때에는 다윗은 이미 죽어 장사된 지 오랜 시기였습니다.

  (1)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참 뜻을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몸으로 휘장을 찢으심으로 친히 문이 되신 분이시지만 그가 또한 처음 그 문을 통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참된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친히 문이 되시고 예수님이 친히 그 문으로 처음 들어가셨기 때문에 예수님 이전에는 하나님께로 이끄는 목자, 생명을 주는 목자가 존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문으로 들어가신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에는 이처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자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2) 양은 목자의 음성만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양은 그의 음성만을 듣습니다. 그 이유는 이 양들은 이미 아버지에게서 듣고 배웠기 때문입니다(요6:45).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0:27).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사람은 그를 믿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요10:26). 그러므로 양은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결코 따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5절).

  (3)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이 누구인지 이미 아십니다. 그의 양들은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 받았기 때문입니다(엡1:3-5). 목자가 양을 인도하여 낸다고 하신 말씀은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복된 양육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결 론 : 교회에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담으로 넘어온 절도요 강도인 거짓 목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목자처럼 생겼지만 그의 입에서 용의 말이 나온다고 했습니다(계13:31). 하나님은 거짓 목자들을 대적하신다고 경종 하셨습니다(겔34:1-11). 이들은 사단의 종들로 회개 없이 교회에 들어온 자요, 예수 없이 목자가 된 자요, 생명 없이 일꾼으로 가장한 자요, 양들에게 쑥물을 먹이며 독을 마시우게 하는 주검의 사자들입니다. 양들은 이런 거짓 목자의 음성을 잘 분별하여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 53≈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도적이 온 목적


  (본문 : 요한복음 10 : 7 - 10)

  서 론 :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양과 목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혹은 “양의 문”이라고 하시고 “양의 목자” 또는 “문지기” “선한 목자” 등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이 여러 가지 비유는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된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교회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불러모으시는 양의 “우리”입니다. 교회란 말 자체가 세상에서 불러모았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시며 자기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골1:18,행20:28).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교회 이외에는 양의 ‘우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피로 우리를 사셔서 이 ‘우리’에 속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1.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놀라운 폭탄적인 선언이십니다. 세상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인에게만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무엇이라 하든지 구원과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 그 분, 오직 그 한 분 뿐에게만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만이 양이 문이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양의 문이 되신다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속죄제물로 그의 몸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다 이루었다”고 하신 선언과 함께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길은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산길을 의미합니다(히 10:20).

  (2) 예수님은 이 길의 문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로 가는 다른 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4:11).

  (3) 이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립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7-8). 두드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 문을 두드릴 때, 문이 되시는 주님은 또 자신이 친히 문지기가 되시어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4) 이 문에 들어간 양들은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됩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말씀은 양 무리들이 그들의 목자의 손에 인도되어 혹은 푸른 초장으로, 혹은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2. 나보다 먼저 온 자란 누구인가?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곳에서 “나보다 먼저 온 자”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말씀은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이래 그 누구도 인류를 생명의 문으로 들여보낼 자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 그는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 절도요 강도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복음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 생명을 노략하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도적이요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이스라엘 민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거짓 선지자들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역대로 거짓 선지자로 말미암아 많은 하나님의 양떼들이 주검의 길로 오도되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도 그런 부류에 속한 도적이요 강도들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분격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3:15).

  (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양들에게 쑥물을 먹이는 이단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잘못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에 의하여 이단과 다른 복음이 독버섯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마귀가 와서 덧뿌리고 가는 가라지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마 13:24-30).

  3. 도적이 오는 목적

  도적이 오는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도적은 “생명의 도적떼”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이같은 도적떼들이 너무나도 많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너울을 쓰고 우리 앞에 다가오기 때문에 진리에 굳게 서야 합니다.

  (1) 인간의 의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자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중생되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가장 타당하게 보여집니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불가피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인간적인 수양을 쌓으며 의로운 일을 하려고 무던히 애씁니다. 그 이유는 단지 그같은 의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2) 도덕적 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양심은 이런 방법이 가장 생명을 얻는 일에 가까운 줄로 알게 합니다.

  (3) 거짓 진리로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바른 구원관, 바른 예수관을 발견하지 못하고 잘못된 지식으로 사단의 종이 된 자들이며 이들의 손길이 늘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4. 주님이 오신 목적

  예수님은 그가 오신 일에 대하여 스스로 증거 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는 일이란 그가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일을 말합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의 양 무리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2) 양으로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일이란 그를 목자로 따르는 양떼들에게 주시는 약속된 모든 축복을 말합니다. 그는 그의 양떼들에게 구하는 것을 주십니다(요15:7). 그는 또한 자기 양들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요15:5). 하늘의 놀라운 상급을 주십니다(마5:10-12).

  결 론 :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그를 따라가는 생활을 한다면 이 같은 축복,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 54≈          선한 목자


  (본문 : 요한복음 10 : 11 - 18)

  서 론 :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증거 하셔야 할 분이시기에 자기의 신분에 대하여 스스로 말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자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목자는 “예수” 뿐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을 목자 되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 분의 양떼를 칠 그의 제자들이나 주님이 교회에 세우신 주님의 종들에 대해서도 그 안에 함께 언급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21:15-17).

  1. 선한 목자의 자격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가 되시는 이유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양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죄로 스스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성소에 막힌 휘장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아무에게도 열려있지 않음으로 길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들은 이제 영영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죄 값은 사망인데 이 죄 가운데서 구원해 줄자가 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참하게 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분이 양들의 참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몸을 십자가에서 찢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까지 얻게 하셨습니다. 길을 잃은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분, 예수야말로 진실로 우리의 진정한 목자이시며 이 같은 양의 목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처럼 그가 양을 위하여 그의 목숨을 버린 것은 유대인들이나 빌라도의 재판에 의해서 부득이하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버린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가 자기 목숨을 버린 것은 목숨을 얻기 위함인데 그의 죽으심의 결과 자신도 영화로우신 폼으로 다시 사셨을 뿐 아니라 또 많은 양 무리들의  목숨을 얻으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은 오직 자기 양들을 위해서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의 양이 아닌 무리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단의 유대인을 향하여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27). 예수님이 양들을 위한 제물이 되신 것은 자기 양들만을 위하신 제한 속죄제물이심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양들은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을 받은 무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목자이신 예수님도 그가 누구인지 다 알고 계심으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이 같은 그리스도의 양들을 그 목자이신 그 아들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66).

  2.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언급하시는 말씀 중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 들지 않았다고 하는 말씀은 무엇이며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1) 이 ‘우리’란 좁게는 그곳에 있었던 제자들이나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가 있는 양들은 이미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양이 되어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해석은 아직도 많은 양들이 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며 그 양떼들도 역시 예수님의 소유로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할 다른 양들입니다.

  (2) 또한 이 우리란 이스라엘을 상징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특권이 주어진 민족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구원도 이스라엘에게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요4:22).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른 양”이라고 표현하신 양은 이방인 중에 있는 주님의 양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다 한 우리 안에 들어가 한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우신 말씀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우리에 속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갈3:28-29).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유대인이나 유대교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양의 우리가 형성되므로 육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은 이미 그 의의가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복음은 역사에, 지역에, 종교에, 인종에, 국가에 매여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3. 삯군 목자

  예수님은 12절에서 삯군 목자에 대하여 교훈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삯군 라고 말씀하신 거짓 목자는 절도나 강도와는 좀 다른 유에 속하는 거짓된 종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우리 안에 자기 양들을 키우고 보살피시기 위해 양들을 돌보는 목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이 땅위에 주님으로부터 세우심을 받은 교회의 목자는 마땅히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올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 가운데는 바르게 양떼들을 돌보지 않는 거짓 목자들이 있는데 주님은 그들을 삯군이라고 힐난하셨습니다.

  (1) 삯을 위해 일하는 목자들을 가리켜 주님은 삯군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양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그들이 일하는 목적이 삯에 있기 때문입니다. 삯군이란 말은 ‘호미스도토스’로 먹을 것을 위해 부득이 일하고 있는 품꾼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2) 삯군 목자는 양들을 돌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돌아본다는 말은 ‘멜레이’로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며 근심 걱정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삯군에게는 이런 목자의 심정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양이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삯군 목자의 정체는 언제 나타나는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하셨습니다. 이리가 온다는 말씀은 자기 몸의 위험이나 교회에 오는 시련이나 양 무리가 당하는 환난을 의미합니다. 이때 진실한 주님의 종들은 양떼들을 위하여 자기 소임을 다하며 자기 생명을 바쳐 양들을 지킬 것이지만 삯군은 그러하지 못하고 달아난다고 하셨습니다.

  결 론 :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은 또한 자기 목자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양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만을 듣고 그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만을 따를 때 이런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 55≈          그리스도와 그의 양


  (본문 : 요한복음 10 : 19 - 29)

  서 론 : 빛은 어둠을 들어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언제나 분쟁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 주셨을 때 이 말씀을 인하여 그들 서로간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 중 많은 무리들이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주님이 그들에게 들려주신 이런 말씀은 그들로 전혀 깨닫지 못할 말들이었고(6절) 이런 말씀을 듣고 있었던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올 향하여 귀신들려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또 하나의 무리들은 이것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고 논박했습니다. 비록 그 말씀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그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을 본 까닭에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귀신이 들렸다고 비방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심으로 주님과 그의 양과의 관계를 나타내셨습니다.

  1.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무리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가?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들은 끝까지 믿지 아니합니다. 믿음을 끝까지 가질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사야로 예언하신 말씀이 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3:14-15). 그들이 듣기는 틀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열어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신령한 눈이 감겨져서 신령한 말씀의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양이 되지 못하게 하심에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2) 그들은 끝까지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에 끝까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들만이 말씀의 열매를 30배로, 60배로, 100배로 맺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에서 주님의 이적을 보았건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청년의 눈을 뜨게 하신 놀라운 이적을 바라보았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저가 귀신들려 미쳤다”고 비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들은 끝까지 순종치 못합니다. 순종은 오직 깨닫는 심령만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끝까지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는 것은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 그를은 끝까지 회개치 못합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의 양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무리들은 회개할 수 없습니다. 회개란 그리스도를 믿지 않든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런 역사는 성령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16:7-11). 그들도 어떤 경우에는 초청객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로 쫓겨나게 됩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는 임금의 선언이 내려질 때 그의 운명은 수족을 결박당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는 슬픔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마22:1-14).

  그들도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 오랜 세월 다닐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 때에 가서 주인의 손에 추려져서 불사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들이기 때문입니다(마13:24-30). 그들도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날에 있을 그들의 형편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진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2.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양은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며 목자는 그의 양을 알고 양은 또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1)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양이냐? 누가 그의 양이 아니냐는 오직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구별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르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은 오직 그의 말씀을 통해서만 그들의 목자를 알아보고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신 말씀은 그 말씀을 깨닫고 확실한 믿음을 가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입니다.

  (2) 내 양은 나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다른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다른 곳에 귀를 기울이거나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아니합니다(4,5절). 그리스도의 양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음성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이 목자의 음성만 따르는 이유는 그 음성을 따르지 않으면 잃은 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은 양은 가장 처참합니다. 그들의 목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리에게 쫓기고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찢기는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3) 나는 내 양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의 양을 안다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십니다. 그의 양 무리들은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정하셨기 때문입니다(엡1:3-5). 그 뿐 아니라  주님은 자기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15절). 자기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버리셨다면 어찌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그의 양 무리들을 모를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이처럼 귀한 자기의 양에 대한 특별하신 은총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계셨습니다. 자기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음에 당신의 양은 단 한 마리라도 아무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다윗의 열쇠가 쥐어져 있기 때문에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자가 없는 것입니다(계3:7).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마28:18). 그뿐 아니라 아버지의 손도 그리스도의 양을 보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43:1). 내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은 나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내 것이라고 그의 소유권 안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만 따르는 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56≈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본문 : 요한복음 10 : 30 - 41)

  서 론 :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이란 이름으로 깊이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시고 핍박을 받으셨지만 그런 일에 구애받으심이 없으셨습니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천명하시면 서도 28절 말씀에서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풀이하시는 중에 오묘하신 삼위일체에 관한 전리를 밝혀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으로 요한복음 1:1말씀에 대한 진리를 친히 풀어주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라고 하는 뚜렷한 성경구절은 없지만 예수님은 친히 이 삼위일체에 관한 이해할만한 진리를 많이 밝혀 놓으셨습니다.

  1.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격동케 한 하나의 폭탄선언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참 뜻을 몇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말씀은 본질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라는 뜻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한 본질 말하자면 한 본체가 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셨습니다(빌2:6). 한 하나님의 본체는 그 안에 세 인격적인 위가 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십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분명히 다른 인격으로 계십니다. 두 인격이십니다. 그러나 이 두 인격(아버지와 아들)은 한 본질(본체)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다면 “나와 아버지는 한 본체이니라”고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이 말씀은 권능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아버지의 일이심을 분명히 하심으로 그가 행하시는 모든 권능은 아버지와 동등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권능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권능은 아버지와 한 본체이신 아들의 권능이기도 하신 것입니다.

  (3) 이 말씀은 또한 그의 위치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라는 뜻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한 본체이시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동등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위치에서도 동등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신 말씀에서 아들의 위치가 아버지와 동등하심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이 지상에 계실 때에는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다시 동등하신 자리로 올라가심으로 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나와 하나님은 똑같은 분이시다”는 말로 그들은 듣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이처럼 듣기는 잘 들었지만 이 말씀을 영적으로 소화시키지 못했으므로 이로 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손에 돌들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손에 돌을 들고 있었던 것은 그로 예수님올 쳐죽이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레24:16).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나 그가 가르치신 말씀이나 그의 생활에는 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라고 한 대답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칭찬 받올 만한 이런 일에 대한 관심은 그들에게 전혀 없었고 오직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올무로 잡아 그들의 생각에 참람하다고 여기는 말씀만을 큰 사건으로 취급하게 된 것입니다.

  2. “하물며”

  예수님은 참람하다고 하여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판단의 불합리성을 성경을 들어 공격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이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82:6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는 재판장들에게 신들이란 칭호를 부쳐서 부르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이란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한 대행자로써 백성들을 재판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신이 그들을 주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온 인류의 심판주로 재판하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런 분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다고 그것이 어찌 하나님 앞에 참람한 말이 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다 지존자의 아들이라”고 하신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왜 신이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이들의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이런 분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다고 하여 참람되다고 정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3) 재판장이건 지존자의 자녀들이건 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피조물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창세 전에 선택하신 분이요 그들의 창조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고 하여 어찌 참람 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3.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예수님은 자기를 참람 되다고 공박하는 유대인들에게 자기들의 판단이 얼마나 모순에 찬 이론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해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시고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질문작전은 그들을 궁지에 몰아 넣었으니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결론이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선한 일을 하고 계심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고 시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고 인정한다면 결국은 사람은 못 믿더라도 그 일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하신 일이 아버지의 일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야말로 하나님이 아들이심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그곳에서 벗어나 사 다시 요단강 저편에 이르러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주님이 계신 곳에 왔다가 요한이 예수를 가르쳐 증거한 것이 다 참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증거를 가지고 그를 믿으며 그를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PREV :   요한복음 11장 밤중소리 
 NEXT :   요한복음 9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