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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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장
 밤중소리  01-12 | VIEW : 744


  ≈ 48≈         하나님의 하시는 일


  (본문 : 요한복음 9 : 1 - 7)

  서 론 :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한 거지 청년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화제가 이 소경된 청년에 쏠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이처럼 질문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뭐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인간의 모든 질병과 저주는 그 근원이 바로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 죄가 없다면 질병이나 각가지 저주도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나면서부터 눈먼 천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났으니 자기의 죄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그 부모의 죄인가? 그러면 어찌하여 그 부모는 멀쩡한데 그 아들에게 죄 값의 저주가 나타났을까? 이 같은 의문을 풀어보겠다는 심산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질문하게 된 것입니다.

  1.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우리는 성경(특히 구약)에서 죄와 저주가 우리에게 오게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그 하나는 우리의 조상인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저주는 이러했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환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여기서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란 말씀은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사망, 질병, 고난 등 모든 저주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는 모든 사람의 죄와 동일시되어 있는 것입니다(롬 5:12). 그리고 죄 값으로 인생이 받게된 사망이란 인간 최대의 저주로 이 안에는 질병이나 육신의 모든 장애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2) 다음에 하나는 인간의 저주가 부모의 죄로도 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6 ; 민14:18).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미워한 자의 부모의 죄가 자식의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은 인간의 저주가 부모의 죄로부터 연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다른 또 한가지는 인간의 저주는 자신의 죄로 인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신28:15).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신학척으로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류의 저주가 왔다는 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율법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에 의하여 부모의 죄와 자신의 죄에 의하여 인간의 질병문제와 저주를 다루어 왔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같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참으로 깜짝 놀랄만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청년이 소경으로 태어난 일은 자신의 죄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저주에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아직까지 알고 있는 율법적인 지식과 모순되는 일이었음으로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의 뜻을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저주가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신 말씀은 아니십니다. 인간 사회에는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하여 저주가 왔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경우는 모든 인간이 겪어야하는 이 같은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의 소경이 그 부모나 그의 죄로 인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 가지 구원섭리로 죄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이 청년이 예수님과 만남이 되어 그의 눈이 떠졌다는 사실은 눈이 떠졌다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빛을 보았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사망에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형태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경우는 난쟁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그가 또한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섭리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한편에 함께 못 박힌 흉악범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기로 섭리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이와 같은 그들의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낸 것입니다. 이 소경 청년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예수님은 이 청년을 고쳐 주시는 이유에 대하여 4절에서 이처럼 밝히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때가 낮이란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때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일할 수 없는 밤이 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밤이란 우리 인생들의 종말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도 오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우리가 일하고자 하여도 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때를 잘 활용한 사람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딤후4:7-8).

  예수님은 이 소정의 눈을 뜨게 하시는데 색다른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능히 말씀으로 고치실 수 있으셨지만 그의 눈에 진흙을 침에 묻혀 바르신 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처럼 하신 뜻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청년과 우리에게 순종에서 오는 하나님의 축복과 위대한 능력을 보여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는 자기 눈에 발라진 진흙을 그대로 둔 채 상당한 거리에 있는 실로암 못에까지 간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 힘든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 결과 그가 갈 때에는 소경으로 더듬거리며 갔지만 돌아올 때는 밝은 눈으로 온 것입니다.

  결 론 : 이것은 영적인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기적은 순종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순종은 이치적으로 납득할 수 있어서 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명령이시기 때문에 순종한 것입니다. 이 순종이 그에게 눈올 뜨게 하는 기척을 가져온 것입니다.

  ② 이 청년 소경은 죄로 소망이 없는 죄인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빛을 보지 못하고 소망이 없는 생애를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실로암 못에 찾아가 눈을 씻으니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정합니다. 이 연못의 물은 예수님의 사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우리들의 눈올 실로암 못에 가서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을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떠져서 신령한 세계를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49≈           소경의 확실한 증거


  (본문 : 요한복음 9 : 8 - 12)

  서 론 : 그리스도인이 된 첫 번째 역사는 그의 변화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을 이룹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4:15).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을 이룬 사람은 그의 생활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소경이었다가 예수님올 만나 소경 되었던 눈이 떠진 이 청년은 그리스도인의 한 모형입니다. 이 청년은 구원받은 사람의 한 모형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소경 청년의 근본적인 변화

  소경이었던 이 청년의 변화는 결정적인 변화입니다. 자기 자신이 고의적으로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변화였습니다. 인격적인 수양이나 교육적인 배움으로 닦아진 변화가 아니라 어떤 권능에 의해 초래된 강권적인 변화였습니다. 이 같은 변화를 막을 자도 없고 이런 변화를 거역할 자도 없습니다.

  (1) 그의 변화는 자신의 소경 되었던 눈이 떠진 것입니다. 이 변화는 자신이나 자기 부모나 이 청년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변화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헤어 나와 밝은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소경된 눈은 예수님올 만났을 때 뜨이게 되며 이 눈이 열려질 때 비로소 밝은 빛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밝은 빛이란 생명의 빛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빛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빛을 말합니다. 이 빛이 이미 이사야로  예언되었음을 마태는 이처럼 증거 했습니다. “스불론 땅파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고 했습니다(마4:15- 16). 이 빛은 생명의 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죄인들의 신령한 눈이 뜨여질 때 바라볼 수 있는 빛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빛을 바라보는 눈이 뜨여진 사람들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는 먼저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 사람들에게 밝히 보여지는 변화입니다. 이 청년이 눈이 뜨인 다음에 제일 먼저 수군거림이 있은 것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그를 알고 있는 이웃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고 묻게 된 것입니다.

  (3) 그런데 여기서 세 가지 견해가 나왔습니다.

  ① 하나는 “그 사람이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소경 되었던 그 청년은 과연 소문대로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 인물은 거리에 앉아서 구걸하던 그 청년임이 분명했음으로 “그 사람이라”고 확인했습니다.

  ② 두 번째 견해는 “아니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그의 모든 것이 새로워졌음으로 그를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멀쩡해진 일도 믿을 수 없거니와 결인으로 길거리에 앉아 있던 그 자가 이처럼 의젓한 모습으로 자기들 틈에 서있는 것을 보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③ 다음 세 번째 견해는 “그와 비슷하다”는 견해입니다. 되어진 일로 미루어 보면,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을 자세히 보니 그 사람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는 견해입니다.

  (4) 이때 문제의 소경 되었던 그 청년이 그들 앞에 서서 “내가 그로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눈올 떠서 여러분 중에 서있는 나는 다름 사람이 아니라 그 전에 거리에서 걸인으로 앉아있었던 소경이요 “내가 바로 그 사랑이요”라고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이전의 신분을 밝히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말했습니다(담전1:13).

  2. 소경의 간증

  그들 둘러선 많은 사람들은 “내가 그로라”고 하는 그 청년의 말에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하여 눈올 뜰 수 있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우리의 변화를 보여주어도 믿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 그 사실을 밝히 보여주어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느냐고 따져 묻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이 같은 군중들의 질문에 어떤 말로 자기에게 나타난 일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나?

  (1) 예수를 만난 사실을 먼저 분명히 밝혔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예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와의 만남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영적인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 앞에서나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예수를 만남으로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분명한 답변을 해야 합니다. 그는 “예수라 하는 이 사람이” 대답 초두에 예수를 만난 사실을 말했습니다.

  (2) 다음에 이 청년은 예수가 자기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발랐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하여 알고 그 사실을 다른 이에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3) 이 청년은 예수가 자기에게  무엇을 명하셨는가에 대하여 말해 주었습니다.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약 그의 명하시는 명령을 거역하면 그에게서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4) 이 청년은 자기가 한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그의 간증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 이 청년이 엄청난 일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소경의 눈이 떠질 일을 하려면 굉장한 대가를 치렀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답변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가서 씻었더니”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명하신 그 말씀을 따랐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응답은 혹은 이런 모양으로 혹은 저런 모양으로, 순리적으로도 기적적으로도 나타나는데 이 모든 응답의 역사가 다만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이 한가지로 그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5) 이 청년은 그 결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보게 되었노라” 군중들이 요구하는 것은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는 문제였음으로 “내 눈이 이렇게 떠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청년은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훌륭한 그리스도의 중인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체험한 경험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증거 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이 같은 간증은 체험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말의 재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증거에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청년의 말을 군중들은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확실한 사실 앞에 입을 더 이상 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 론 : 그들은 드디어 예수를 만나보려는 충동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이런 이적을 나타내실 수 있는 분이라면 그 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그 청년에게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때 나다나엘을 찾아간 빌립처럼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했지만 그 청년은 아직 신앙이 어림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그들을 인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과연 이 청년과 같은 확실한 변화를 받은 것입니까? 이웃 사람들에게 기이히 여김을 받을 만치 그들 앞에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 50≈           담대한 증인이 된 소경


  (본문 : 요한복음 9 : 13 - 34)

  서 론 :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심문과 박해를 당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막13:9).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소경으로 있다가 눈이 뜨인 이 청년은 자기나 자기 부모의 죄로 소경으로 태어났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셨기 때문에 이 청년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이 청년은 바리새인들에게 끌려 다니면서 아주 훌륭하게 이 같은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1.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간 증인

  이 청년을 누군가가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이 청년을 바리새인들 앞으로 데려가게 된 동기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병 고침을 받은 이 청년과 그를 고쳐준 예수를 고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생각은 소경의 눈이 떠진 기적적인 사건을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를 심문하는 가운데 그들 가운데서도 두 가지 논쟁으로 설왕설래했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정죄하고 있는 무리들은 그 청년에게 분명히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라고 하는 증언을 들었지만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혹 선지자가 아닌가? 조심성 있게 존경하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는가”고 맞서 피차 쟁론이 된 것입니다.

  2. 그의 확실한 증언

  증인이란 말은 순교자란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른 말을 하려면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라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어떻게 그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는가?

  (1) 그는 자기가 경험하여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 만을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과장해도 안되고 그 말씀을 경시해도 안됩니다.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30:6). 이 청년의 대답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사실 그대로만을 증언하면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바리새인들은 이 청년이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먼저 알고자 한 일은 그가 참으로 소경으로 있었던 사람인가? 하는 것과 그 소경이 정말로 눈올 뜨게 된 것이냐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거듭거듭 증인들과 접촉했으며 사실여부를 밝히려 했지만 믿지 아니하는 그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줄 근거가 없었습니다. 본인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의 대답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의 부모를 소환했습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원인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심문했습니다.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물음에 그 부모는 매우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요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이런 그 부모의 말은 비겁한 말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말하지 않더라도 자기 아들의 입에서 더욱 분명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 그들이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출교 당할 일을 두려워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아직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그 소경 되었던 청년을 두 번째로 소환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부정적인 대답을 틀을 수 없음을 알고 그의 눈이 뜨여진 일은 하나님의 권능이지 예수로 말미암은 이적이 아님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고 예수를 모함했습니다.

  그 청년은 이 같은 그들의 말에 결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받은 은혜는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한 말은 바리새인들이 정죄하는 그 죄에 해당하는 지의 여부는 자기의 알 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고 말하는 이 청년에게서 우리는 이 사실적인 증거를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이나 핍박을 받아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굳은 결의에 찬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3) 이 청년은 믿음이 없는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이 청년에게 재차 삼차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심문은 어찌하든 예수의 사기성과 미혹하는 증거를 잡아 고소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그 증거를 삼으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의 입에서 예수를 정죄할 근거를 얻어내려고 광분했습니다. 이 청년은 이제 그들의 의도를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똑같은 심문에 진저리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나쁜 의도를 알고는 그들의 완악한 마음과 예수를 정죄하려는 그들의 의도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 청년은 이처럼 그들에게 모욕적인 말로 응수했습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4) 그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가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임을 증거 했습니다. 한 거지 청년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받은 이들 바리새인들은 그 청년을 향하여 욕설을 퍼부으면서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이제 그들로부터 완전히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바리새인들의 재판에서 정죄함을 받은 것입니다. 출교의 충분한 근거를 잡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제자됨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인즉 그들은 모세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5:45-46).

  이 청년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시는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예수가 죄인일 수 없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 이후로 소경의 눈올 뜨게 한 일이 없을진대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 아니시라면 어찌 이런 큰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증거 했습니다. 그의 이 같은 말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말입니다(막13:11).

  결 론 : 그들은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수모를 하나의 이름 없는 거지의 신분인 청년으로부터 듣고 분노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청년을 그들의 판결대로 정죄하여 출교함으로 내쫓았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과 같은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증거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51≈       보는 자들을 심판하여 오신 예수


  (본문 : 요한복음 9 : 35 - 41)

  서 론 : 소경으로 있다가 눈이 뜨여진 청년은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고 생각하면서 이상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세상 사람의 방법으로는 예수님올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신 줄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신 줄 알려면 그의 신령한 눈이 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된 사람이 눈올 뜬 사건을 영적인 신령한 눈과 연관시켜 아직도 신령한 일에 소경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면서 “보지 못하고 본다”고 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임을 경종 하셨습니다.

  1.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은 언제나 그를 위하여 핍박을 받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멀리하지 아니하시고 가까이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6:33). 예수님은 그 청년이 바리새인의 재판에서 출교조치를 당하였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는 이제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교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이 금지 될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종교적인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가 박탈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유대인들로부터 영원한 이단아가 되어 유대사회에서 완전히 소외 받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 청년이 이런 핍박을 당하는 이유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참으로 장한 일을 한 것입니다.

  (1) 그의 신앙을 본받으면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이름이 부인 받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32-33). 우리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박해나 환난에 굴하지 말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그의 신앙을 본받으면 이 땅위에 임할 환난에서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은 그의 이름을 배반치 않은데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계3:8). 그리고 그들에게 보장하시기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시인하며 그 말씀을 지키면 이처럼 시험의 날에 하나님의 건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그의 신앙을 본받으면 하늘의 많은 상이 예비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0-12).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셔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청년은 아직 믿음이 어렸습니다. 그가 인자란 주님의 말씀에 그 인자가 누구이며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하여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묻고 계시는 인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하신 분을 가리키신 말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 청년은 아직 자기의 눈을 뜨게 하신 이를 만나본 일이 없으므로 그가 예수이신 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마 직감적으로 자기를 찾아오셔서 대화를 나누시는 이 분이 자기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가 아니신 가에 대하여 마음에 무엇인가 와 닿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청년은 “주여 그가 누구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인자라고 말씀하신 그 분이 누구이신 지 알려만 주신다면 그에 대하여 믿을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 청년은 지금 그의 머리에 자기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를 믿을 것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이 청년은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분이 자신의 눈올 뜨게 해주신 분이시며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반가운 상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더욱 확신에 찬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고 하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4) 우리는 이 청년으로부터 신앙성장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지만 아직 그분을 만나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이름은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가 자기의 눈올 뜨게 해주신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의심치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은혜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았으며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아직 예수를 만나보지 못하였고 아직도 그에 대한 믿음이 초보적인 상태였습니다. 이때 주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친히 그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그에게 더욱 돈독한 믿음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2. 보는 자들을 심판하러 오신 예수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실인즉 소경들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눈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이미 이사야선지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마13:14). 제자들이 하루는 떡 가져오기를 잊었을 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는 자기들에게 먹이 없음이로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막8:14-21).

  율법에서 의를 얻고자 하며 자신을 의인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들의 육신의 눈은 분명히 떠 있지만 실인즉 소경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란 지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오직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눈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눈을 뜬 청년처럼 생명의 빛 되신 예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심으로 그에게 소망을 주시고 그의 삶을 보람 있게 하실 것입니다.

  결 론 : 바리새인들의 죄는 씻음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이 소경이면서도 자기들만이 빛을 바라보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앞으로도 뜨여질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 중에 해메이다가 결국은 멸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21). 우리가 소경 되지 않으려면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빛을 따라 우리의 인생 길을 살아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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