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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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밤중소리  01-12 | VIEW : 920


  ≈ 40≈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본문 : 요한복음 8 : 1 - 11)

  서 론 :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 가운데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공감하는 무리들도 많았고 그 말씀을 선지자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홈을 잡아 고소하려고 따르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들이 보낸 하속들이거나 바리새인들이나 혹은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어느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누구에게 잡혔는지는 모르지만 그 여인은 바리새인들에게 끌려 예수님께 오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이 저지른 간음죄에 대하여 예수님은 과연 어떤 판단을 내랄 것인가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예수님을 소송하는 고소 거리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1. 주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새인들의 간계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처벌하는 율법적인 조항을 몰라서 예수님께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입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들은 간음죄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적인 해석을 듣고 고소할 조건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마침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그들의 수중에 있었던 사실에 대하여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간음이란 엄연한 죄입니다. 죄 중에도 율법에서 가장 엄하게 다스리는 죄입니다. 특히 여자의 경우 이 죄에 대한 자비나 용서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이 여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들에게는 심히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간음죄가 죄가 된다면 마땅히 율법적인 처벌이 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그 여자를 모세의 명한 대로 돌로 치라고 한다면 그 여인이 그들의 손에 의하여 죽게 됨으로 살인방조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도 분명히 위배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마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 이 가련한 죄인을 돌로 치라고 하신다면 이 일이야말로 그곳에 있었던 많은 군중들에게 크나큰 실망을 주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한다면 간음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 되어 주님은 그들에게 무 율법주의자란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아야하셨던 것입니다. 이 답변도 그들의 올무에 걸리는 것이었고 저 답변도 그들의 올무에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험은 마치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일이 합당하니이까 하고 물었던 시험과 비슷한 시험으로 이것은 사단의 간계에서 나온 지혜인 것입니다.

  2.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끈질겼습니다. 기어코 분명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다그쳐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1) 이들의 이런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고 몸을 굽히시고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때 주님이 과연 무슨 글을 땅에 쓰셨는가에 대하여 궁금해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때 예수님은 그 여인을 고소한 바리새인들의 죄명과 그들의 이름을  쓰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다른 해석자는 아마 율법적인 처벌을 들먹이는 그들에게 율법의 계명을 일일이 쓰심으로 그들의 양심을 비추어보도록 하였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땅에 무엇을 쓰셨던지 그것은 이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땅에 쓰여진 글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슬금슬금 그 자리를 피하여 도망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억지로라도 대답을 들으려고 강압적인 자세로 공격을 취해오기 때문에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던 그의 견해를 밝혀주지 않으실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몸올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2)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질문에 하나의 율법적인 도전을 시도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너희들이 율법으로 이 여인을 정죄하여 돌로 쳐죽이기를 원한다면 그러면 너희 중에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는 자가 있거든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들어 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3)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인 군중들에게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 여인을 고소한 바리새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듯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이처럼 해석할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분명한 죄인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돌로 치라고 하신 말씀은 그 여인은 마땅히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할 죄인임을 인정하신 말씀입니다.

  ② 그리고 이 말씀은 바리새인까지도 양심상으로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에 대하여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들은 양심상으로는 율법으로 자기들의 죄를 깨닫기는 했지만 외식으로 지키는 척했던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③ 율법의 정죄는 비록 간음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약 2:10-11). 하나님이 그들의 죄에 대하여 심판하심이 늦은 것은 그들로 죄를 깨달아 회개케 하시려는 자비에서임을 그들은 깨달아야 했습니다.

  3.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어온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 권위 있는 말씀에 그들의 양심에 가책을 받고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물러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 있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련한 여인을 측은히 바라보시면서 사랑에 넘치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의 깊은 뉘우침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곧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앞으로 그 여인이 행해야할 바 그의 생활태도를 밝혀 주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이란 말은 ‘아포투툰’이란 말로 지금부터란 뜻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 시간부터 그 죄를 버려야 하고 그 죄에서 떠나야 하며 그 죄를 다시는 짓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죄인을 정죄해 버리려는 잘못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나도 죄인이었으며 나도 그들과 같은 죄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죄인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이 여인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할 때 그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죄에서 떠나 하나님 앞에 열매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 41≈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본문 : 요한복음 8 : 12 - 18)

  서 론 :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는 놀라운 선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곳에 모여있는 군중들에게 놀라움을 주었고 한편 바리새인들에게는 비웃음을 샀습니다. 예수가 나사렛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이라고 확실히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 하시는 여러 가지 말씀에 반기를 들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 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메시야의 참 증거를 찾으려 하지 않고 사람의 증거를 원했습니다. 예수에 대하여 사람의 증거를 찾으려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생명의 빛을 얻지 못함으로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하신 말씀대로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I. 빛으로 오신 예수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했는데 이 빛이란 말은 곧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으로 어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요1:4).

  이 빛은 세상의 사물을 비취는 유형의 빛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비취는 영적 빛입니다. 이 빛은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첫째 날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역사에서 먼저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세상을 밝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의 창조는 그리스도안에 계시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말씀하신 것으로 그 빛을 이 세상에 비취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의 빛 아래서 그의 창조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온 후 빛은 사라지고 죄와 사망으로 어두움이 깔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빛을 영접하면 빛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2. 빛을 받은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한다.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합니다.

  (1) 빛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목적이 우리에게서 어두움을 쫓고 우리 안에 빛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살전 5:5).

  (2) 이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을 받은 사람은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고후4:6).

  (3) 이 빛은 무리를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합니다. 빛이 우리들 마음속에 들어오면 죄와 의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그 빛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을 보여줍니다. 빛을 받으면 어두움이 살아지기 때문에 죄의 길에서 떠나 언제나 빛 가운데로 걸어갑니다.

  (4) 빛을 받은 사람은 신령한 것을 바라봅니다. 빛은 우리의 영적인 눈올 밝혀 줍니다. 영적으로 소경이었던 우리의 눈이 열려지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 매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된 모든 하나님의 언약은 영의 눈이 열려진 사람이 아니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신령하다는 말을 잘못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신령한 사람은 환상이나 어떤 영적인 이상은 보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약속하신 바를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11:32).

  (5) 빛은 빛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엡5:8-9).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했습니다(롬13:12). 이런 생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3. 빛으로 오신 증거

  그들은 빛으로 왔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에 분격한 나머지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다”고 공박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빛을 바라보는 눈이 소경이 되었음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증거를 예수님께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알지 못하는 책임은 바로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1) 내가 나를 증거해도 내 증거가 참되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세례요한 한 사람 뿐입니다(요10:5-8). 예수님은 말씀으로 자기를 증거 하셨습니다. 그의 행하시는 이적도 그를 증거 하는 표적으로 보여주셨지만 언제나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외롭게 투쟁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했던 그 많은 무리들까지도 주님을 향하여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고 다그쳐 묻기까지 한 것입니다(요6:30). 예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받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증거는 참됩니다.

  (2)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율법적인 증인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자신의 증거를 자기와 아버지로 증인을 내세우심으로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증거와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증거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많은 수효의 증거보다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증거라고 하신 하나님의 증거는 바로 성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요5:39).

  결 론 : 우리는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빛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찬연하게 비취입니다. 그의 말씀을 따라 우리 인생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1:35). 우리는 이 빛을 내 마음속에 충만히 받아 이 빛을 사면에 비취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 42≈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본문 : 요한복음 8 : 19 - 27)

  서 론 : 예수님은 그의 말씀에서 아버지란 말씀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물론 주님이 아버지라고 하신 대상은 육신에 속한 혈육적인 관계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목수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시는 아버지란 말의 참뜻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네 아버지가 누구냐”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많이 던졌습니다. 예수님을 땅에 속한 사람인 줄로 알고 “네가 누구냐”는 질문을 그에게 던진다면 그 사람은 예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며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1.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다”고 공박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내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들은 종국에는 예수님이 자기의 아버지라고 지칭하시는 분이 다른 분이 아닌 그들이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줄을 안 후에야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죽일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그 말씀이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낸 것으로 알아듣고는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느냐”고 물으셨는데 그들은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올 죽이려고 증거를 찾을 때에도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고 물었으며, 예수님의 그렇다고 하시는 대답을 듣고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외치기를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고 하는 사실은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안다면 그를 보내신 자비의 아버지, 독생자를 사랑으로 보내셔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사랑의 아버지를 알았을 것이며, 그들이 참으로 예수가 어떤 분이심을 그의 말씀이나 그의 이적이나 그의 권능을 통해서 알았더면 그들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것을 알고 깨달을만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외식과 그들의 교만과 그들의 율법은 그들의 이 같은 신령한 눈을 감기게 하여 소경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9:39).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를 따르는 무리는 적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지 못하는 믿음은 헛된 믿음입니다.
  물질의 축복을 소망으로 삼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수효는 떡을 먹고 주님을 따른 무리만큼이나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되 지식을 따라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를 통하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한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만이 바르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설교에서, 묵상에서 그리스도롤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를 자세히 배워서 그가 누구이신가 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2. 네가 누구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 엄청난 말씀에 대하여 하도 어이가 없음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누구냐”

  (1)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네가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이 메시야를 찾다가 결국은 참 메시야이신 예수를 찾지 못하고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가 그들이 찾는 메시야인데 다른 메시야를 찾으려고 하니 그들이 메시야를 찾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역하고 믿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으며 믿는 자에게 약속된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2) 예수님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네가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란
하늘을 가리키고 아래란 땅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는 위에서 났다고 하신 말씀은 그의 근본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 영원히 계셨던 독생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위에 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위에서 나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래서 난 사람들입니다. 아래서 난 사람은 모두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의도 없고 생명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죄 값인 죽음뿐입니다(롬5:12).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그는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땅에 속하였기 때문에 땅에 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 수 없었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고 물은 것입니다.

  (3)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네가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나를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말하는가? 그들은 극도로 분노하여 대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할 수 없고 믿지 못하는 말이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인줄로 믿지 않으면 누구든 저희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사실은 진리인 것입니다.

  결 론 :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심히 아쉬운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알았더면 그들은 결코 예수를 배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알았더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알았더라면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여 생명의 구원함을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천국도, 생명도, 부활도, 부요도, 치료함도 모두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은 이 모든 부요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 이 비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풀려집니다. 깨닫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비밀이 드러날 때에 마음에 찔림을 받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행2:37).





  ≈ 43≈         인자를 든 후에 알리라

  (본문 : 요한복음 8 : 28)

  서 론 : 예수님이 그를 믿지 않는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23)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이 땅에서 난 사람이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이 땅위에 속한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같은 특권을 그를 믿는 사람에게도 주신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마땅히 소망으로 살아야 하며 이 세상 풍조를 따르거나 세상에 속한 생활올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롬 8:24, 12:2).

  1. 인자란 말

  예수님은 ‘인자’라고 하는 말씀으로 자신을 즐겨 나타내셨습니다.

  (1) 인자란 말의 정확한 해석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4). 여기서 가리킨 인자는 사람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이 인자란 말이 신약에 와서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외 아무도 인자란 말을 쓴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자란 말의 거의 전부가 주님이 친히 자신을 나타내실 때 스스로 사용하신 말입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야적인 사명이나 신적인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려고 하실 때 인자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인자란 말은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통칭으로 사용하셨음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인자란 표현에 대하여 알듯 모를 듯 엉거주춤 하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처럼 물었습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고 했던 것입니다(요12:34). 인자에 대하여 우리가 가장 잘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주님이 나타내신 말씀은 요한복음 3:13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 간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인자라고 하신 자기 표현은 그의 신성을 입증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3) 우리는 성경에 나타내 보이신 인자의 모습을 세 가지로 살필 수 있습니다.

  ① 하나는 비하(卑下)의 인자이십니다. 그가 말할 수 없는 천하신 몸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하의 인자로 세상에서 고난과 시련을 겪으신 것입니다.

  ② 다음에는 구속의 인자이십니다. 이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의 구속의 인자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③ 그리고 영광의 인자이십니다. 이 인자의 모습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후의 주님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농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6:64).

  2. 인자를 든 후에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 알고”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후에야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를 그들의 메시야로 믿을 것임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인자를 든 후에란 말은 그들이 예수님올 십자가에 못박을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1) 인자는 반드시 들려야 하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인자로 오신 예수님은 그의 첫째 되는 사명이 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의 들리심은 마치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만나로 오셨습니다. 죄 값으로  죽게 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의 이 같은 사명은 들리는 일로 완성하시기 때문에 들리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2) 인자는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의하여 들려야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입은 축복 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의 축복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메시야를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스스로 메시야를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받은 축복과 영광만 바라보았지 그 책임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두 가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두려운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내려집니다. 그 아들을 배반하는 자들이 받을 긍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은 한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거나 그를 떠난 사람들이 받을 것이라고는 오직 심판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가 무한한 감사를 돌리는 것은 그가 나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예정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엡1:3-5).

  (3) 주님은 들리셔야 하셨지만 그를 드는 자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들리심을 받는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드는 일로 인하여 화를 받을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마23:37-39).

  3. 내가 그 인줄 알리라

  예수님이 들리심을 받은 후에야 모든 사람들은 그가 그 인줄 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아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이 없으셨거나 그가 죽지 아니하시고 계속 살아 계셨다면 그를 믿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이들이심을 믿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죽으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가 죽으신 이후에야 그가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느냐? 그 이유는 주님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6:13).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26).

  예수님은 또한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을 보낼 터인데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역사가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던 많은 유대인들은 성령의 강한 역사로 인하여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물론 인자를 든 무리들에게만 국한시킨 말씀이 아니십니다. 모든 인류는 어느 면으로 보면 모두 인자를 든 자들입니다. 그는 내 죄로 인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함으로 성령의 감동 하심을 거역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참으로 그 인줄을 알고 그들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그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44≈         아버지와 함께 하신 예수님


  (본문 : 요한복음 8 : 29 - 30)

  서 론 :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비결을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이 같은 믿음은 그의 예언된 사역을 이루시는 일에 결정적인 힘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만약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만 가질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으며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함이 없는” 승리적인 생애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우리에게 약속하신 예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그의 임재 하심은 영적이십니다. 영적인 임재를 깨닫는 일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주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향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8:20).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거짓이 없으신 예수님의 약속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하란으로 향하던 야곱이 루스더란 곳에서 돌을 베개 하여 잠을 잘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을 때 신앙이 어렸던 야곱은 그의 일상생활에서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이 장성하여 하란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의 외삼촌과의 다툼에서 그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 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고 말했습니다(창31:42).

  우리는 세상 끝날 까지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확신을 가지고 믿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생활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나 말씀의 확신은 저절로 생기거나 아무에게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는 엉뚱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하거나 권능을 나타내어도 그런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위대한 일은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빼놓고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 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일이란 없습니다. 순종에는 다음 세 가지 점이 따릅니다.

  (1)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들려주신 씨뿌리는 비유에서 오직 깨닫는 자만이 결실 한다고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23). 말씀을 듣고 깨닫는 심령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순종이 생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은 처음에 얼마간은 순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내려지기도 전에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오랜 시간 그 순종이 계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은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5). 순종은 사랑의 동기에서 나와야 합니다. 정욕을 이루고자 하는 생각에서, 어떤 축복이나 바라는 얄팍한 마음에서 생기는 순종은 그 동기 자체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 평생 주님을 순종하려면 우리의 사랑이 주님을 향하여 한평생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순종이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이것이 순종의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불순종한 사울왕을 향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를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음으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 책망했습니다(삼상15:22-23).

  우리는 신명기 28장을 축복의 장으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의 장이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저주의 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1절로 14절까지는 축복의 말씀이 금싸라기처럼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말씀 전후에는 이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처럼 순종에서만이 하나님의 축복이 따른다는 분명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15절부터 무려 마지막 68절에 이르기까지 무서운 저주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15절 처음에서 밝히시기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의 축복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어떤 축복을 받게 되나?

  (1) 첫째로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평안은 주님을 의뢰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우리의 마음에는 평안이 깃들고 우리의 생활은 즐거움과 기쁨으로 들어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가 계시는 곳에는 오직 평안만이 넘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나의 시련 중에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인도해주심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내의 능력을 주심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감당할 능력을 주심으로 승리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심으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평안이요 축복이요 우리의 장래에 소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결코 혼자 두지 아니하십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 하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101:6).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그 일을 순종으로 열매를 맺는다면 우리 주님과 함께 하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나의 생애에 무한한 축복을 안겨 주실 것입니다.





  ≈ 45≈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본문 : 요한복음 8 : 31 - 32)

  서 론 : 우리에게 왜 자유가 필요하냐?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무엇이냐? 자유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오늘날 교회 안에서조차 자유란 말이 오용되어 자유를 인권이나 어떤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해석하여 복음의 진리를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자유란 사람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죄의 속박을 받아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 종의 멍에에서 해방되어 죄의 멍에를 벗는 일이야말로 우리 인생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자유는 이미 에덴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스스로 이 자유를 상실하며 죄의 종으로 팔려 그 결과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7). 이 죄의 멍에는 인간이 벗어버릴 수 없으며 사람이 그 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일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자유를 주리라고 여겼던 율법도 더 무거운 종의 멍에를 메게 했을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죄의 종에서 놓아주려고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은 인간의 참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것을 빼앗을 수 없으며 우리는 이 자유를 아무에게도 빼앗겨서도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5:1). 모든 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값은 비싸게 지불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신을 우리의 죄 값으로 지불되는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이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아간다고 해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나 권세자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그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현실적으로 어떤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만약 죄에서 자유 함을 얻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가장 비참한 종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들에게 이와 같은 자유를 얻게 하는 방법은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멍에를 끊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를 몇 가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진리를 소유한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골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로 자유를 얻으려면 먼저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올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올 소유하는 일은 그를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죄에서 자유 함을 얻은 것입니다.

  (2)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무엇이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이 아무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 그 말씀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그들의 메시야를 그들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3) 진리를 배운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진리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배워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올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6:45).

  (4)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내 말이란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들린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들리는 생활올 해야 합니다. 다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내 말에 거하면 이라고 하신 거한다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메노’란 단어로 이 말의 뜻은 남아 있다, 머문다, 거주 한다를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그가 어떤 환경 속에 있다고 해도 말씀을 떠나지 않고 그의 말씀 안에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야 진리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죄에서의 자유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떠나면 그곳에는 다시금 죄의 멍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은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말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을 것이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눅9:23). 우리들의 육신은 죄를 따르기를 원하는 연약성이 있습니다. 지난날 죄의 종노릇으로 인하여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입에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는 탄식이 나오는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3.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

  많은 그리스도인 중에는 진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서도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아직도 죄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멍에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로 인한 기쁨도 그에게는 없고 자유에서 얻는 마음의 참된 평안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 있는 것인가?

  (1) 자유에는 자유를 누리려고 하는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이 자유를 빼앗으려고 눈독을 드리고 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공격을 가해 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인간은 죄의 종이 되던가? 아니면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되던가? 어느 한가지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롬6:16).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의 생활이야말로 죄에서 자유 함을 얻는 비결인 것입니다. 순종을 못하는 사람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순종치 못하는 이유가 그의 몸이 죄의 종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2)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방종입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이란 죄를 멀리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하면서 그 자유가 죄로 나타난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자유를 모독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이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려는 모든 비 진리에 대하여 과감하게 투쟁하는 일입니다. 이단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진리만이, 그 아들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우리는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자유를 지키며 수호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결 론 :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처럼 권면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우리에게 자유 함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닫고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가운데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랍니다.





  ≈ 46≈           아들이 자유케 하리라


  (본문 : 요한복음 8 : 33 - 47)

  서 론 : 유대인은 사실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육적인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의 구원의 조상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갈데아 우르땅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육신적인 조상으로 모신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일이 자기 민족적인 입장에서 영광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그들의 메시야가 태어나신 일에 대하여는 말할 수 없는 은혜요 민족적인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그들에게 구원을 주거나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안겨주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죄의 멍에를 벗고 아들이 주시는 자유를 얻어야 했습니다.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는 아브라함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1.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진리, 자유 또는 종이란 말씀을 사용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이 귀에 거슬렸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지손이라 남의 종이 된 일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그들은 비록 육선적으로는 로마의 지배 아래서 고통을 받는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은 하나님의 백성인 사실에 근거하여 그들 자신이 자기들은 자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말씀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거룩한 백성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종이란 말은 가당치도 아니했으며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말이 그들에게 이해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생각을 송두리째 뒤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에 대하여 몇까지 들려주셨습니다.

  (1)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행사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인 점에 대해서는 인정해 주셨습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고 하신 것입니다(37).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계약적인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혈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부르셨습니다(창1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혈통으로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언약의 씨로 약속하셨습니다(롬9:7-8).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의를 주실 때에도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언약관계로 주셨습니다(창15:6).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려면 먼저 아브라함의 행사를 해야 그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사란 바로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후손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4:18-22).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합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갈3:9).

  아브라함의 다른 하나의 믿음은 순종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1:8). 유대인들은 언필칭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순종의 행사가 없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자손은 진리를 대적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란 곧 복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주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인 예수님 그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참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올 대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에게 증거한 주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마귀의 행사를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는 말하면서 그들이 하는 일은 마귀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귀는 거짓을 말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거짓으로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마귀는 진리를 대적합니다. 마귀는 그 자체가 진리의 대적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끝까지 진리를 대적했습니다. 마귀는 살인자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 존속했습니다. 아담을 유혹하여 영적인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가인으로 아벨을 죽이게 했습니다. 그 이후 계속하여 하나님의 참 종들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유대인의 일당을 향하여 무서운 포문을 여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8:44). 예수님은 이 한마디 말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완전히 허시고 비록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그의 영적인 뿌리가 바로 마귀임을 천명하셨으며, 이들이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이라 할지라도 실상인즉 마귀가 그들의 아비라고 규정하셨습니다.

  2.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은 죄의 종의 멍에를 메고 있는 죄의 종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모두 죄의 종들입니다. 이 종의 멍에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젊어져 있는 짐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의의 표준인 율법을 이루지 못함으로 율법의 정죄함을 받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누구든지 이 죄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하면 그의 인생은 절망적입니다(롬5:2). 예수님은 이 같은 비참하고 절망적인 인생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지 못하면 종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결 론 : 자유란 말의 원어의 뜻은 고소 당한 사람이 무죄가 선언될 때 얻는 자유를 말합니다. 이 자유는 다시는 침해될 수 없는 영원한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자유를 주시려고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으며 이 자유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죄를 선언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내가 과연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는 아브라함의 자녀인가 아니면 마귀의 행사를 본받아 행하는 마귀의 자녀인가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 47≈       하나님께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


  (본문 : 요한복음 8 : 47 - 59)

  서 론 :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안다고 하셨습니다. 듣는다고 하신 말씀은 즐거움으로 듣고 깨달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그의 생활의 지침으로 삼아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나 그의 말씀을 듣기를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무시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1. 누가 하나님께 속한 자냐?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증표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1-2).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은 옛날에는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났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그 아들로 말씀하셨으며 이 두 형태의 말씀이 성경을 이루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한가지로 일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5:39).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니라”고 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은 곧 그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이 친히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 그 말씀을 듣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전2:9-12). 이 말씀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예수님 자신이 여러 가지로 증거 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은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요8:46).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십니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이냐?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말씀하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곧 진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의 신분을 가리키신 것이며 그리고 그의 입의 모든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이 같은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전혀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하신 이사야 선지의 말이 그대로 응하게 된 것입니다(고전2:9).

  (2) 예수님은 자기의 말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14:24). 이 말씀은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이 없으신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말에 대하여 그 말이 자기 스스로의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은 진리요 조금도 어김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 예수님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요8:51).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으며 그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11:25).

  (4) 예수님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 시라고 하셨습니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영광을 예수님이 받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조차도 아들이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신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엄청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같은 사실을 그 스스로의 입을 통하여 증거 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계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5) 예수님은 그 자신의 존재가 아브라함보다 이미 그 이전에 계셨다고 하셨습니다. “너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56).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고 하신 것은 그의 태어나심의 연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의 선재성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 볼 것을 보았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으로 주신 것을 믿음과 소망으로 바라본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유대인의 반발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그들에게 크나큰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기들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나타내는 일이야말로 신성모독 죄에 해당하는 참람된 말이 아닐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1)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정면 도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장 멸시했음으로 예수님올 사마리아 사람과 비교하면서 공격했습니다.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그들의 말은 예수님이 스스로 허황된 말을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요8:52-53).

  (2)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를 불잡아 재판에 회부할 가치도 없는 존재요 더 이상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줄 필요성이 없다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이성을 앓고 손에 굵직한 돌들을 찾아 들었습니다. 돌을 들어 쳐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셔서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 아직 그의 고난의 때가 안되신 것을 스스로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피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 말씀을 얼마나 깨닫고 그 말씀의 열매를 얼마나 맺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셨습니다(고후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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