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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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밤중소리  01-12 | VIEW : 942


  ≈ 29≈          오병이어의 기적


  (본문 : 요한복음 6 : 1 - 15)

  서 론 :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 가운데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기적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특이하신 점은 그의 기적에는 창조적인 권능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때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는 드리셨지만 기적을 위하여 기도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바로 창조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기적으로 나타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은 창조주로서의 권능이 있기 때문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3). 그의 권능이 혹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을 도우심으로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1. 주님이 권능을 행하신 특징

  주님은 그의 공생애 중에 이루 헤아려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적과 권능을 행하셨지만 그러나 단 한가지라도 자신을 나타내시거나 자신을 위한 일에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길목에서 시장하시어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셨지만 자신의 시장기를 채우시려고 이적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제사장의 무리들에게 잡히셨을 때도 열두 영이나 더되는 천사의 보내심을 받을 수 있으셨지만 그같은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실 수 있는 일에만 사용하셨습니다. 가나 혼인집에서 있었던 최초의 기적을 비롯하여 모든 기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반듯이 있어야 할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은 불쌍한 병자들을 위하여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건 없건 간에 가까이 와서 병 고침을 원하는 모든 병자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권능이나 기적의 행하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들어내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5:41). 우리가 은사로 받은 능력을 자신의 명예나 어떤 정욕적인 욕구만족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이는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 그같은 일로 인하여 오히려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마7:22-23).

  2. 주님을 따른 큰 무리
 
 주님이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 가셨을 때 큰 무리가 주님을 따라 그곳으로 찾아갔습니다.

  (1) 이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는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들 양 무리들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셨건만 그들은 자기만 먹는 목자가 되었고 양 무리는 먹이지 못하는 목자가 된 것입니다(겔34:2-4). 하나님은 진리로 가르치지 아니하며 사랑으로 싸매지 아니하는 목자로부터 버림받은 양 무리들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는 자가 없었도다”(겔34:5-6). 주님은 이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2) 이들은 표적울 보고 주님을 따라다닌 무리들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2절에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대개의 경우 표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따라다니기는 잘 하지만 그들의 동기가 표적에 있기 때문에 진리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으며 신앙적으로 자라나지를 못합니다.

  (3) 그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약속의 메시야를, 표적으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한눈에 메시야로 믿을 수 있게 하는 어떤 결정적인 표적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결국은 오병이어의 기적도 메시야로서의 충분한 표적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는 (메시야로)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이니까”고 물었습니다(요6:30).

  3. 빌립과 안드레와 한 아이의 경우

  예수님은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이 큰 무리들이 굶주려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실 계획을 이미 마음에 세우셨습니다.

  (1) 주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같은 물으심은 주님이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빌립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을 듣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과연 주님을 따르며 말씀을 배우며 여러 가지 표적을 보는 가운데서 그에게 얼마만한 믿음이 들어갔는지를 아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빌립은 그의 명석한 머리로 다가오는 큰 무리의 수효와 그들에게 조금씩 떡을 나누어주게 될 때 들어가는 비용을 재빨리 계산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주님은 빌립의 업에서 이 같은 대답을 기대하신 것은 아니십니다.

  계산에 빠른 사람, 세상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계획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주님이 그들에게 먹이실 양식을 준비하신 줄로 압니다” 그의 업에서 이 같은 대답이 나왔더라면 그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난관에 부딪혔을 때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세상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이미 예비하신 하나님을 의뢰하여 믿음으로 해결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때 안드레가 주님이 하시는 걱정을 듣고 군중 가운데 나아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안드레는 무엇인가 주님께 가져다 드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하는 의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주님이 무엇인가 이것을 가지고 행하실 수 있다고 하는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안드레와 같은 적은 믿음이라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3) 주님이 기적을 나타내실 수 있었던 결정적인 동기는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칭찬 받을만한 점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때 그의 먹을 양식을 준비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로써 주님을 따라 먼 곳인 빈들에까지 쫓아왔다는 것이요 또 한편 그가 가지고 있는 도시락을 온전히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주님이 받으실만한 제물이었고 하나님의 기적을 낳기에 합당한 제물이었습니다.

  4. 오병이어의 기적

  주님은 이 어린 소년의 티없는 제물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자리에 앉은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떡과 물고기가 오 천명이 넘는 그 많은 군중들을 배불리고도 12바구니를 남기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을 드리면 주님은 그 제물을 가지시고 축사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충만한 축복입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는 축복”입니다(눅6:38). “넓게 연 입에 가득 채우시는 축복”입니다(시81:10).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시는 축복”입니다(잠8:21). “하늘 문을 여시고 창고에 부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축복”입니다(말3:10).

  결 론 : 주님은 이 기적을 보고 그를 왕으로 세우려는 군중들을 피하여 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왕이 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맡은 사명을 이루시는 일에 방해되는 그 어떤 유혹도 단연 물리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내 생활 가운데, 내 생애 가운데, 축복을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믿는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그 드림대로, 하나님은 그 그릇에 차고 넘치게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언제나 기대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할 때 이루어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 30≈          주님이 타지 않은 배


  (본문 : 요한복음 6 : 16 - 21)

  서 론 : 인생은 소망의 항구를 향하여 항해하는 배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고 항해하는 소망의 항구란 곧 천국입니다. 우리는 어느 화가가 그린 성화에서 우리 주님이 선장이 되셔서 배의 키를 잡으시고 격랑의 파도를 해치시며 운항하시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 그림 속의 주님은 바로 우리의 험한 인생 길을 친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요16:33).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28:20).

  1. 그들은 왜 고난을 당했나?

  디베랴 바다 건너편 광야에서 오 천명이 넘는 많은 군중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의 역사를 나타내신 후, 예수님은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는 군중의 움직임을 바라보시고는 이 잘못된 군중들의 요구를 물리치시기 위하여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신 것입니다. 날이 저물매 제자들은 바다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배를 띄어 떠난 지 얼마 안되어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이토록 풍랑을 만나 고난을 당해야 하였나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들은 주님을 태우지 아니하고 떠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예기치 아니했던 풍랑이 갑작스럽게 불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바다는 바다라기 보다 하나의 거대한 담수호로 지중해 바다표면보다 무려 207 미터나 낮은 호수입니다. 지형과 산세의 영향에 의해 이곳은 예로부터 갑작스럽게 바람이 몰려와서 바다표면을 격동시킴으로서 풍랑이 이는 곳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 바다에서 대대로 어부로서 그 잔뼈들이 굵어진 사람들이라 어지간한 풍랑은 그들의 노련한 기술과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에 그같은 그들의 자신감이 그들로 이 바다를 건너갈 담대함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그들의 실패의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리고 그 배에 태운 후 떠났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없이 자기들끼리만 떠난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큰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만이나 교만한 마음이나 넘치는 자신감으로 자기자신의 힘으로 자기 인생 길을 간다거나 어떤 계획을 세운다면 그 길은 반드시 고난의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길을 걷던지 예수님이 내 인생의 키를 잡으시고 운전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순탄한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해야 평탄한 인생 길을 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2) 그들은 주님이 없이도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이도 내가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인생을 실패로 이끕니다. 모든 문제를 어려움의 함정으로 이끌어갑니다. 제자들은 어부로 자라온 자신들의 경험을 의뢰했습니다. 한평생 갈릴리바다에서 배를 타본 자신들의 실력을 믿었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생각은 주님 없이도 주님이 가라고 하신 목적지까지 이를 줄로 믿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은 험하고 협착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가지 않으면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3) 그들은 어두울 때에 떠났습니다. 어둡다는 말은 빛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빛이 없고 어둡다면 우리는 한치도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바다에서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자기 인생의 항로로 삼고 노를 저어 나간다면 우리 주님이 그 키를 잡으시고 안전하게 운행하여 주심으로 소망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인 줄을 몰라보고 유령인줄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때 고난 중에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가까이 오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이 나를 도우시려고 가까이로 다가오고 계심을 바라보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쳐야 합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으며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바다에 빠져갈 때 소리를 지르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했을 때 즉시 예수님의 손이 그에게 나타나 불잡아 주셨습니다.

  2.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제자들을 떠나 있었던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나?

  (1) 그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하신 대도이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제자들이 탄 배는 비록 광풍으로 인하여 바다 한가운데서 고난을 당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배는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의 고난을 불쌍히 보시며 아버지께 간구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본의 아닌  불 신앙이나 실수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고난의 풍랑을 바라보고 무서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새 힘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에서 건지시고 일으키시는 능력이 오직 그분에게 있기 때문에 빛이 없는 흑암 중에라도 그만 의지하면 도우시는 그분의 손길을 잡을 수 있습니다.

  (2) 다음에 예수님은 친히 산에서 내려오셔서 바다위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을 그 고난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친히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세상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언제 우리 가까이 계시는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친히 위로해 주시고 그 고난에서 건져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사 55:36). 언제 만날만한 때인가? 우리가 고난을 당하여 실의와 낙망에 빠져 있을 때입니다.

  3. 주님을 배에 영접하니 목적지에 이르렀더라

  그렇게도 바람이 사납게 불어대며 풍랑을 일으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은 항해였건만 주님을 그들의 배에 맞이하자마자 이상스럽게도 바다가 잔잔하여지고 배에는 사랑과 평안과 즐거움이 되돌아오고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1) 주님은 인생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고난을 물리치시고 우리의 인생 속에 평안과 즐거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을 우리 인생항로에 영접하여 그의 인도하심만 받으면 우리의 모든 문제점들을 해결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배에 주님을 모셨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들은 이제 바다를 건너는 일에 있어서 자신들의 노력과 경험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만을 의뢰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계획과 마음으로 원하는 소원과 앞날의 미지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잠16:3).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하셨습니다(시37:5).

  결 론 :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항로를 과연 누구에게 맡겼습니까? 내가 운행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손에 의하여 운행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지금 우리의 배가 세상 풍랑으로 말미암아 심한 고난을 당하는 생애를 보내고 있다면 우리를 돕기 위하여 가까이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분을 여러분의 배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 31≈          하나님의 일


  (본문 : 요한복음 6 : 22 - 29)

  서 론 :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그들의 동기는 한결같지가 아니합니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바라본 많은 군중들은 그들의 생에 새로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광야에서 조상들이 먹었던 바 만나와 유사한 양식을 먹게 될 줄로 알았고 이런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메시야관이야 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찾아 나선 무리들은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겨우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 나온 그들의 심령을 감찰하시고 멀리까지 따라 찾아온 그들에게 칭찬은 고사하고 오히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1. 인생이 취해야 할 두 가지 양식

  예수님이 금식기도 후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돌들이 떡 덩어리가 되게 하라는 첫 번째 시험에서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시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표적을 육신의 떡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내 보라고 하는 사단의 간교한 유혹을 물리치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그의 메시야 된 표적을 떡으로 바라보고 떡을 먹고 배부른 연고로 주님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참으로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으로부터 취해야 할 양식을 잘못 취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이 취할 양식은 하늘의 양식이었는데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땅의 양식을 취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계속적으로 찾은 것은 이런 육의 양식을 취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1)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표적을 바라보는 눈은 두 가지입니다.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이사야의 예언을 들려주시면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마3:14-15).

  마음이 완악한 사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는 그의 표적으로부터 찾을 것이 오직 육신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표적이란 ‘스에메이온’으로 이 말의 뜻은 주님의 표적이 하나의 단순한 요술쟁이의 이적 같은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서의 신적 권위와 위엄의 증거로 증명되는 표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이적으로부터 그의 신적 권위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표적 속에서 찾은 것은 그들의 육신의 정욕을 채워주는 떡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주님을 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육적인 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눈은 신령한 것을 바라보기에는 너무 어두운 것입니다. 육신의 소망이 끊어졌을 때 주님을 떠나는 사랑들은 다 이처럼 육신의 것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전혀 일하지 말라고 하신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의 목적을 육신의 양식, 썩어질 양식에 두지 말라고 하신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먹고 마시는 것까지라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고전10:31).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엿새동안 부지런히 일을 해야겠지만 그러나 그 양식을 먹는 우리의 생애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는 것입니다.

  (2)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영적인 양식을 의미하신 것으로 영생의 떡을 가리킵니다. 에수님으로부터 우리들이 취할 양식이란 바로 이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생의 양식으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든 표적은 바로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임을 보여 주시는 표적들로 이 표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로부터 영생의 양식을 얻기를 바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몬 베드로의 고백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

  그러면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알고 이 떡을 취하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를 영접하는 일을 말합니다. 먹는다는 말의 영적인 뜻은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것과 영접하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똑같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2).

  2.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주님은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양식은 우리가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심으로 우리는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뿐입니다. 이 은혜의 순서를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엡1:3-4). ②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다”고 했습니다(롬8:30).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으로) 반드시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함을 받음으로 그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③ 이처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한 명의 누락자도 없이 온전히 구원함을 받게 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39).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시기 위하여 참으로 놀라운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16).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떡이 되신 것입니다. 이 같은 떡은 너무나도 고귀한 것이기 때문에 은이나 금으로도 살 수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따라 은혜로 주셔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가?

  주님 곁에 모인 많은 무리들은 먹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영생을 위하여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대답을 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하나님의 일 인줄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우리의 생활이나 우리의 손이 미치기 어려운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믿음이상 더 훌륭한 일의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은 그를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를 믿는 것 이상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아름다운 믿음을 가지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 론 : 우리는 과연 육신의 떡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영생하도록 있는 참된 양식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지 우리의 위치를 분명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생활을 통하여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32≈          하늘에서 내려온 떡


  (본문 : 요한복음 6 : 30 - 36)

  서 론 : 바울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의 성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고전1:23). 예수님으로부터 사람들이󰡒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러면 우리로 당신을 보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줄 믿게 하는 표적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믿는데 있어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확실한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이 같은 표적은 성경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 선지자가 방자히 말한 것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말지니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신18:22).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할만한 충분한 증거를 바라보았지만 다만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연고로 주님을 배척했기 때문에 이 말씀으로 그들의 불신의 죄를 덮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1. 모세가 보인 표적

  그들은 모세의 경우를 들어 모세는 하늘에서 조상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인정받은 일은 이처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림으로 되었으니 당신도 모세와 같은 움직일 수 없는 표적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표적을 구하는 잘못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메시야를 배척하기에 이르렀고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표적을 구하고 따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 받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한가지부터 열 가지에 이르도록 표적만을 구했던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표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사랑은 결국 하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에 대하여 의심하고 시험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세가 보였다고 하는 하늘의 만나에 대하여 그들은 바른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일에 대하여 주님은 그 떡이 의미하는 영적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밝히셨습니다.

  (2)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의하여 이적이 나타났을 때 마치 그 사람이 그같은 일을 행한 것처럼 그 사람에게 신적 권위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나를 하늘에서 내리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로써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에게 그같은 사실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떡이 모세로 말미암아 내려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세와 예수님의 경우의 표적이 그것을 행하신 일이나 그것을 행하신 이의 권위에 있어서  얼마나 현격한 차이가 있는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 3:5-6). 모세는 아무 것도 그 스스로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행한 것이 없습니다. 홍해를 건넌 일도, 반석에서 물이 솟은 일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온 일도,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이 그의 창조적인 능력
으로 스스로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같은 능력을 행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이스라엘에게 내린 떡은 만나였습니다. 그들은 이 만나를 다만 그들의 육신의 떡 이외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유대인은 육신을 쫓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육신의 일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롬8:5-6). 하늘에서 내려진 만나에 대하여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의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떡은 그들로 사람이 사는 일이 떡으로만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고 하신 일이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먹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신8:3).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무리들은 다만 떡을 먹고 배부른 연고로 쫓았을 뿐 그 표적에서 그들의 메시야를 찾고 생명을 얻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주님은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신 만나가 실인즉 하늘에서 내려 주신 떡이 아니심을 말씀하심으로 이 문제를 영적으로 설명해 주시려고 그들의 생각을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이 먹었다고 하는 만나는 그것을 먹은 사람들이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먹은 만나는 생명을 주는 하늘의 양식도 아니요 그 떡을 먹인다 고해도 메시야 된 참 표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하나의 모형으로 보여주셨을 뿐 참 하나님의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들은 “이 떡을 우리에게 항상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영적인 설명에 대하여 그들은 알아들을 리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설명마저도 육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간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요구는 예나 지금이나 육신의 것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입니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이 생수를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에 “주여 이 물을 내게 주어 물을 길러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뜻을 모르고 육신의 요구를 바라며 표적을 구하는 무리들은 지금도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의 목적은 오직 이 땅위에 있습니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늘 배부른 떡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주님을 따른 이유는 표적으로 육신의 것을 얻으려는 흥미와 욕심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2) 주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적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생명의 양식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폭탄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심히 놀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들에게 이해가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떡이란 다만 입으로 들어가는 양식으로만 알고 있는 터에 생명의 떡이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더군다나 예수 자신이 자기를 가리켜 그 떡이라고 하니 더욱이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고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나타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분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떡이십니다. 생명의 떡이란, 그 말에 나타난 것처럼 생명의 양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생명이 영적인 것처럼 이 양식은 영의 양식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자는 이 양식에 결코 주림이 없으며 영원히 목마름도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영생을 얻는 일에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떡이기 때문입니다. 주리지 아니 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다시는 영생에 관하여 걱정이 없이 생의 만족을 누리는 것이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누리는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가리킨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따르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가? 육신의 것을 위하여 따르고 있다면 그로부터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내려오신 하나님의 떡이십니다. 이 떡을 찾는 사람만이 예수로 만족한 인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떡을 먹는 사람만이 영생을 소유하며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강처럼 흐르며,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된 생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33≈            아버지의 뜻


  (본문 : 요한복음 6 : 37 - 40)

  서 론 : 예수님은 자주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함이니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부터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은 제각기 하시는 일이 계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모든 일은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그 뜻을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아들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시고, 그를 믿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심으로 구원을 완전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제한구원과 온전한 구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많았지만,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이적을 바라보며 체험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를 배척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매우 어렵지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구원(制限救援)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예수께로 올 수 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만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고 그들에게만 믿음이 주어지며 그들에 한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로 오는 자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보내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구원임을 알려주시는 많은 증거를 제시해 주고 있지만 두 가지만 예로 든다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또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도 하셨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3:2).

  (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예정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자기백성’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십니다. 인류 중에 특별히 하나님의 성별된 백성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아니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요10:26). 구원을 선물로 받을 사람들의 선택에 대하여 에베소서에서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엡1:3-5).

  복음은 온 세상에 누구에게나 전파되지만 하나님은 이들만을 세상에서 불러 예수님께로 인도하시여 구원의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고 하신 대상은 바로 이들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예정된 백성은 한 명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빠지지 아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 중에 누락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생명록에 기록된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어쩌다가 누락될 수도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권능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인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이들을 한 명도 내어쫓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어쫓지 아니하신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버려짐이 없다는 의미로 그리스도 앞으로 오는 모든 사람들의 절대적인 구원의 보증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얼마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에 의하여 내어쫓긴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가라지 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 중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핍박 중에 믿음에서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환난에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에 의하여 내어쫓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을 배신한 것으로 이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에게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2. 아버지의 뜻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는 일을 마치 주님의 양식으로 삼으신 것입니다(요4:34).

  (1)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메아폴레소’로 이 말은 영원히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견인(堅忍)이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우리의 모든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죄도 문제가 안됩니다. 우리가 혹 범하는 죄악도 문제될 것이 못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회개시키시므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씻어 주실 뿐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해주시는 것입니다(요일1:9).

  또다른 한가지는 성도의 견인인데 성도들은 어떤 시험과 고난과 핍박과 환난 중에서라도 끝까지 이기며 구원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8:36-37). 이 같은 견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고후2:14).

  (2)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요3:16).

  (3) 아버지의 뜻은 마지막날에 다시 이들을 살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이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다시 살리시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이 부활은 영생을 이루는 온전한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영생의 증거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보증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습니다(고전15:19-20).

  결 론 :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며 내어쫓지도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날에 나를 생명의 부활에 참여시키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하시며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그의 말씀은 결코 없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구원의 확신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워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34≈         예수님의 살과 피


  (본문 : 요한복음 6 : 41 - 59)

  서 론 : 예수님을 따라다닌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한사람들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가르침이었지만 이 말씀을 듣는 많은 무리들은 그 말씀을 육적인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요6:63).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지성과 큰 갈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실 때 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1. 그리스도에게로 올 자는 누군가?

  예수님은 수군거리는 군중을 향하여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신 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많지만 그들이 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을 자에 대하여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1)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만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로 올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선행적인 역사가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인간의 자유의지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끄시지 아니하시면 그리스도에게로 올 자가 없는 것입니다.

  ② 다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이미 예정한 자들을 이끄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할 그의 백성들을 예정하셨다고 하는 사실은 하나도 무리가 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셔야 할 그의 백성들을 미리 선택하시고 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일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십니다.

  ③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예정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 중에는 아무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구원받았을 때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인줄로 알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이 이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하시는 은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역사로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이끄심을 거역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반항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얼마나 무력하고 미약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끄심에 굴복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끄시는 백성들에게 지식으로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고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들려주었습니다(호3:6). 아무든지 지식이 없이는 망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듣고 배움으로 생명의 떡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나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원의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배우는 사람에게 생명의 떡이 되며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연히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영적인 지식이나 약속도 배움으로 깨달아 알게되는 것입니다.

  2.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신 후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좀더 깊은 영적인 경지에 들어가셔서 내가 세상에 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여기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실 영생의 떡이란 바로 예수님의 살이라고 밝히신 후 53절에 가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같은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심히 놀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인 말씀으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육적인 생각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셨으니 그들이 놀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같은 표현을 육적인 생각으로 듣는다면 식인종이 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의 선재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 비로소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품속에 영원히 계셨던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 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기 이전에 하늘에 이미 계셨던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은 이 같은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지식에서만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인자의 살은 참된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이 우리의 양식이 된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구원을 위한 생명의 양식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살이 어떻게 하여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고 하신 것처럼 그의 몸이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고난 당하심을 인하여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살이 아니고는 생명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인자의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피라고 하신 것은 주님이 우리의 죄 값으로 인하여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그의 피 흘림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없다면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에서는 오직 그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하였습니다. 먹었다 혹은 마신다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 해석을 주님의 입으로 밝히셨는데 47절에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신 말씀에서 분명한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사실을 믿어야 하며, 그의 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이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는 이미 영생이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에서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두 번째는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안에 거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사람의 삶에 대하여 그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삶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 35≈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본문 : 요한복음 6 : 60 - 71)

  서 론 :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 있으나 그 말씀을 이해하는 일은 누구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말씀하시는 중에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들은 사람 가운데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결코 육신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들을 수 없는 귀

  이 말씀을 들은 제자 중 여럿이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들으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고 영적으로 들으려니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나온 말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많은 제자들이 물러갔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모으는 역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흩으는 역사도 동시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쫓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되기 때문입니다(고후2:16).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전부가 영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임으로 영의 일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느 한가지라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들에게는 영의 말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나 보편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3)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육신의 길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들의 특정은 눈에 보이는 소망을 따라간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망은 오직 이 세상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처럼 말씀에 걸림이 되어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그에게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자만이 끝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는 그 말씀을 받는 일에 다음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① 듣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순종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양으로 그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요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보내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목자의 음성을 사모하여 간절히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기를 기뻐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영생에 이르는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② 듣고 깨닫지는 못하지만 가르치심을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혜가 자라고 영적인 분별력이 성장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좋은 열매를 맺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은 생수에 대한 영적인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주님과의 꾸준한 대화를 통하여 그 생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마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③ 다음에 듣기는 하지만 어리석게 생각함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말한 그 무리들이 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영적인 깊이 있는 말씀은 도저히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할 때 더 이상 깨닫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으며 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주님의 곁을 떠나는 것을 현명한 처세술로 여겼습니다.

④ 그리고 주님의 영적인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말씀에서 흠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모함하기도하며 반항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2. 영생의 말씀의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는 66절에 있는 말씀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결국 육신의 것을 위하여 주님을 따른 모든 무리들은 다 물러가고 이제 다시는 주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 들지 아니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동안의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의 곁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육신의 것을 바라보고 따라다녔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함으로 소망을 견고히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셨지만 그들의 이 같은 배신에 그 마음이 심히 아프셨습니다.

  (1) 주님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12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생명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참 생명의 도리를 가르치셨건만 세상으로 등을 돌리는 그들을 보고 섭섭함을 금치 못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듣자 자기 선생님의 그 심정을 헤아려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결단을 주님 앞에 밝힘으로 주님의 마음에 위로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많은 무리가 다 떠났어도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고백에 기뻐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결단으로 이제는 영생이신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곳에도 갈 곳이 없으니 자신들은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을 다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은 주님이 누구이신가 에 대하여 이제 확실히 믿고, 알고 있다는 신앙적인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2)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드린 이 말 중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직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영생의 떡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확실히 깨닫지는 못했어도 주님의 피와 살은 영생의 양식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3)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다른 또 하나의 그의 신앙고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떡이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자기들이 대망한 참 메시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조건이 완전히 구비되신 분이 곧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믿고 알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먼저고 안 것이 나중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것은 언제나 믿음이 먼저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이 믿음이 우리의 생명을 구원합니다. 다음에 아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지혜로 그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아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혹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주님의 곁을 떠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처럼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는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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