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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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
 밤중소리  01-12 | VIEW : 969

  ≈ 24≈        네가 났고자 하느냐


  (본문 : 요한복음 5 : 1 - 9)

  서 론 :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은 ‘베데스다’라고 불리는 연못에 찾아가셨습니다. 베데스다란 말은 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병을 고침 받기 위하여 모여 있었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등이 행각에 누워서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왜 이 같은 이름이 부쳐질 수 있었을까? 이 비참한 곳에 은혜의 주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1.주님이 찾아오신 베데스다

  베데스다는 마치 병자들의 아비규환의 장소인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길을 모색해 보려고 아우성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이 장소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물이 동할 때에 그곳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나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기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다만 앞에 있는 육신적인 정욕만을 이루기 위하여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과는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이곳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1) 주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45). 어둠에 잠겨 있는 세상에서 빛을 바라볼 수 있는 죄인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데스다 못에 나타나셨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주님을 빛으로 마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2) 주님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게만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 잃은 양을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 베데스다 못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 중에 이 한 사람만이 주님이 찾으셔야 했던 잃은 양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실 수도 있었으며 또 그들의 병을 다 고쳐 주실 수도 있었지만 38년 된 그 한사람에게만 나타나셨고 그만을 고쳐주셨습니다.

  (3) 주님은 가장 비참하고 도움의 손길이 없는 절망적인 병자를 찾으셨습니다. 이 사람의 그의 무서운 병은 죄 값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후에 이 사람을 성전에서 보셨을 때 이처럼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 이 사람은 자신의 무서운 병이 자신의 죄 값으로 당연히 받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38년간이나 중풍병으로 누워있으면서도 아무의 도움도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이제 소망이 없는 자리에서 지난날의 죄과를 뉘우치면서 마음으로 통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주님이 그 사람을 찾아가셨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백성은 병든 사람, 찢긴 사람, 가난한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는 대상에 대하여 분명히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부르심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하나님의 백성들이 찢기고 상한 가운데 처해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와 베데스다

  베데스다는 교회로도 상징됩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베데스다인 것처럼 교회 역시 세상에 소망을 등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지만 주님이 계시기에 교회는 은혜의 집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도 베데스다 못의 경우와 같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은혜의 집에는 나왔지만 아직도 주님께만 소망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힘으로 무엇인가 힘쓰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제일 먼저 물 속에 들어가 보겠다고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병자만 있었지 고침 받고 돌아간 사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베데스다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 표적을 맞추는 일은 무익한 일입니다. 사람을 믿으며 혈육을 의뢰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렘17:5-8).

  교회에는 자기 스스로는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성도들을 찾아오셔서 베데스다 못에서 만난 38년 된 병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듯 자기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3.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

  우리는 주님이 베데스다를 찾으신 일을 통하여 여러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1) 주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찾으십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만이 주님이 구원하시는 대상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믿음을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의 대화 속에서 그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데스다에 가신 목적은 다만 이 병자만을 만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믿음도 없고 반신불수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어서 구제 불능한 사람처럼 보일런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절망적인 그를 찾으실 때가 있음을 알고 전도 대상자에 대한 구원의 은혜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2)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주님은 그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심으로 그의 병이 고쳐질 수 있다는 소망을 그에게 안겨주셨습니다. 낫고자 하느냐의 하느냐는 말은 ‘텔레이스’로 네가 원하느냐? 네가 희망하느냐? 는 말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치료에 대한 밝은 비전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 병자는 아주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있지는 아니했습니다. 다만 자기 힘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고백했습니다.

  결 론 : 그는 주님의 얼굴을 우러러 뵈면서 그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에게 주님의 결정적인 말씀이 내려졌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들어갔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으로 인하여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생겼다기보다 주님이 말씀으로 그의 마음속에 심어주신 것입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처럼 이 말씀을 믿고 일어나 걸어가면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제 그는 어둠에서 빛으로 걸어갔습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생명의 길로 걸어간 것입니다. 새사람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새로운 인생 길로 걸어간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을 물이 동하는 세상에 두지 말고 은혜의 집으로 나를 찾아오신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망의 자리에서 일어났으면 우리도 이 사람처럼 빛을 향하여, 생명의 길로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 25≈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본문 : 요한복음 5 : 10 - 18)

  서 론 : 38년간이나 자리에 누워있었던 병자는 베데스다에서 주님을 만난 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먼저 자기가 누워있었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리에 누워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난 후 그의 말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자리에 누워 있었던 죽은 행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나가는 새로운 생활입니다(롬12:2).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나가는 영적인 생활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 앞으로 전진하는 생활입니다. 이 생활에는 새로운 싸움이 시작됩니다. 생존경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해야할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주님이 그에게 들려주신 말씀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 받은 후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1. 주님의 경종

  38년된 병자는 병을 고침 받은 후에 성전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님을 만난 일은 고침 받은 후의 그의 생활에 한 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가 죄에서 돌이킨 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만나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에게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가 감사를 모르는 아홉 명의 문둥이들처럼 세상에 묻혀있었다면 주님을 만나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긴요하고 복된 경종의 말씀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1)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시는 경종이십니다. 우리의 병은 죄 값으로 오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물론 아담의 범죄로 인간에게 저주로 나려진 것이 병이지만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그의 생애에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병은 죄의 보응으로 오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일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생활을 하면 그 보응으로 무서운 질병으로 칠 것이라고 경종하셨습니다(신28:20-22).

  (2) 이 사람은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하심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의 병을 어떤 형태로 고침 받던, 고침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나오신 은총인 것입니다.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은 그의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의 역사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떠나는 생활입니다. 만약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이 다시 죄에 물든 생활에 빠져 버린다면 그는 얼마 안 가서 그의 고침 받은 병이 더 무섭게 재발될 것이라고 하는 경종입니다. 우리는 질병과 죄와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야고보 사도가 말한 대로 병들었을 때에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해다가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약5:14-16).

  2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침 받은 병자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쳐주신 이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그들에게 고발한 것이 아니라 베데스다 못에서 자리를 들고나올 때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다니는 그를 향하여 책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가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다고 했을 때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병자는 자기의 병을 고쳐주신 이가 누구인지 알지를 못했기 때문에 알게되면 알려주기로 약속하였다가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자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그들에게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려주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좋게 선전하기 위함이요 예수로 자랑하려는 뜻에서 알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관념이 철저함으로 예수가 다른 이에게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에 분격하여 주님을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을 절대시해온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셨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지킨 안식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안식일의 준행이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러 차례 유대인들의 안식일과 충돌하셨고 그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들이 지킨 안식일은 외식적이었으며 장로들의 유전을 첨가함으로 하나님의 바라시는 근본취지를 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하나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휴식을 주시려는데 있고 다른 한가지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안식일의 목적이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속하는 것 같은 제도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막2:27). 주님의 이런 말씀은 인간의 필요성이 안식일의 요구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가리킨 것입니다. 이런 연고로 주님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사이를 지날 때 손으로 밀을 까불어 먹은 일을 용인하셨고 가시는 곳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제 7일에 하나님이 안식하신 일은 창조역사를 마치신 후 쉬신 것을 뜻하신 것이지 하나님이 그의 모든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주무시는 것처럼 푹 쉬신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는 일에 추호도 쉬심이 없으십니다. 아버지는 죄인들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계속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죽이려한 두 가지 이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핍박했습니다. 범한다는 말은 헌다, 깨뜨린다, 파괴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율법을 헐어버리는 올법의 파괴주의자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이처럼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이때부터 죽일 기회를 찾으려고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동등이란 말은 ‘이손’으로 그 수와 크기와 질에 있어서 동일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던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심으로 그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다 하여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지만 유대인들은 이런 표현을 참람하다고 하여 죽이려고 계획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포착된 것이 바로 이 죄명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
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마26:63-65). 이것이 그들의 최종판결이 된 것입니다.

  결 론: 예수님은 갖은 핍박을 받으시면 서도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생명을 다하여 힘쓰셨습니다. 한 병자의 병을 고쳐주시는 일로 인하여 이처럼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 26≈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본문 : 요한복음 5 : 19 - 23)

  서 론 :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아들과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②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5:23). ③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8:19). ④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⑥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9). 우리가 이런 말씀에 나타난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바로 인식할 때에 아들과 아버지는 절대로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아들과 아버지는 그의 존재와 권능에 있어서 동등이심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안식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

  (1)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일은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율법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시는 그가 메시야일 수 없다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심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친아들을 사칭하므로 하나님과 동등의 권위를 낸다하여 죽이려는 음모까지 꾸미게 된 것입니다.

  (2)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말씀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에 들어가셨지만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인간이 죄로 멸망하게 되고 사단이 세상의 권세를 잡게 되었을 때 인간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일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일하셨고, 독생자를 보내신 그 아들 안에서 끊임없이 일하고 계셨으며, 지금도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의 구원의 역사를 하루도 쉬심이 없이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일에 안식일이라고 조금도 구애받으심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주님의 창조적인 역사가 어떻게 나왔는가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 될 수 있습니다.

  (1)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을 때 하나님이 하신 사역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잠언 8:32절 이하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잠8:27-30).

  (2) 주님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아버지의 창조적인 역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셨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2, 3).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진리는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본체로 나누일 수가 없으므로 아들이 아버지의 모르는 일을, 아버지가 아들이 모르는 일을 별도로 행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아버지와 아들의 결합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20). 아들과 아버지는 한 본체이시며, 이 한 본체의 구성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한 본체는 분리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결합이기 때문에 삼위의 하나님은 영원히 한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대략 다음 세 가지 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아들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무한하신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시고 우리를 또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일4:10).

  (2) 아들에게 보이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신 일은 바로 사랑의 전달입니다. 사랑에는 비밀이나 장벽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하나를 이루는 요체입니다. 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이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그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3)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참으로 기이하게 나타났습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죄인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재물이 되신 일 역시 너무나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주시는 일은 기이하고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아들도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21절에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의 권능에 속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권능이 아들이신 예수님께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들이신 예수님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으며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과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

  5. 아들도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모든 심판은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 심판을 아들이 하신다는 일은 아들에게 심판권세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맡기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은 심판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동등하신 모든 권능을 소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의 아들에게 그의 모든 권능을 위임하시고 함께 역사 하시게 한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 가장 두드러진 이유의 하나로 이는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을 공경하게 하신다는 것은 첫째로 아들을 믿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믿는 것은 곧 아버지를 믿는 것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한다는 말은 아들을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한 순종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공경하라는 말은 아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는 사랑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확실히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우리 주님을 공경하고 섬기며 붙잡아야 합니다.




  ≈ 27≈          사망에서 생명으로


  (본문 : 요한복음 5 : 24 - 29)

  서 론 :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새롭고 놀라운 것뿐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말씀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 중에도 오늘 주신 말씀은 더욱 놀라운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I. 이미 얻어진 영생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가 누리는 영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영생의 성격에 대하여 참으로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많은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독단주의자, 독선주의자들이라고 비방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에만 영생이 있다고 주장하는 일에 대하여 배타주의 종교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진리는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진리이심을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그에게만이 영생이 있음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생은 오직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이 가리키는 몇까지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내 말을 듣고” 영생을 얻는 첫째 조건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데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롬10:17).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생명을 주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만이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습니다. 듣는다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 ‘아쿠에인’은 단순히 육신의 귀로 듣는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받아드린다는 뜻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 깨달을 뿐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하는 사람은 얼마 안돼는 것입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예복을 입은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2)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셨는가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아들을 믿는 자는 아버지를 믿는 자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들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곧 아들을 믿는 자는 아버지를 믿는 자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만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영생의 상태

  주님은 그의 말씀에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영생의 시발점과 그의 종착점을 알게 됩니다.

  (1) 이미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얻었다는 말은 이미 얻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앞으로 소유할 대상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주검을 거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로 영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을 때” 바로 그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아들과 연합하는 자는 아들이 가지고 계시는 영원한 생명과 연합이 되
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과 동시에 그 즉시로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2)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영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 해당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을 받았다고 성경에서는 끊임없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재창조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망과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결별을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영생을 부여받았을 때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3)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습니다. ‘옮겼느니라’는 원어는 ‘메타베베켄’으로 옮긴다, 건너간다, 이사한다, 자리를 옮긴다의 뜻으로 현재완료형입니다. 이 말은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처럼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다시 사망으로 옮겨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영적 부활의 상태

  영생을 말씀하신 주님은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의 상태를 밝히셨습니다. 25절에서 하신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이 영생을 얻는 영적인 부활의 상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우리 주님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갖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죽은 자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죽음이 선언된 죄와 허물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엡2: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3:18).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복음은 이처럼 죽은 자들에게 전하는 생명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원칙적으로 죽은 자들은 영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고 하셨습니다(요6:37). 우리는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의 귀에 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면 살아날 수가 없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인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육적 부활의 시기

  다음에 우리 주님은 마지막심판의 권세가 주님의 손에 쥐어져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부활의 시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육적인 부활도 말씀으로 된다고 밝히셨습니다. 부활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하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뿐 아니라 심판의 부활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심판의 권세가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악한 일을 행한 사랑이란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여 그의 아들을 믿지 않은 사람, 그 아들을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육신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결 론 :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뿐임을 확실히 믿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영생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결코 이와 같은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 28≈          심판주로서의 증거


  (본문 : 요한복음 5 : 30 - 47)

  서 론 : 예수님은 자신이 온 세상의 심판주이심을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가 생명과 사망의 표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그리고 주님은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에 있어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신 자신의 증거에 대하여 스스로 해답을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의 심판이 의로우신 증거

  주님의 심판은 의로운 심판이 되십니다. 그 증거로는 주님의 심판은 자신의 원대로 하는 심판이 아니며, 듣는 대로 행하는 심판이며,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는 심판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1)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그가 사람으로서의 어떤 단독적인 방법이나 생각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아버지를 떠나서는 존재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단독적으로 행동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일하신 본체이심으로 그의 생각과 아버지의 생각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삼위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창조역사에서 이 같은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27). 이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라고 하는 복수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삼위 곧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님의 한 본체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성자 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종의 형상으로까지 낮추시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의 종국적인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데 있습니다.

  (2) 주님은 다만 듣는 대로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그의 행한 대로 받는 심판을 말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① 사람은 말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완악한 죄악이 그들의 입의 말로 나오는 것입니다(말3:13). ② 사람은 말로 성령을 거역합니다.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12:32). ③ 사람의 의는 그의 입의 말로써 구별이 된다고 하셨습니다(마12:37). ④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2:36).

  (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생활해 나갈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일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

  다음에 우리의 입으로 사람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시인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 우리는 늘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3:16).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4).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장차 하나님 앞에 나가 놀라운 상급을 받는 보증이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시는 증거

  예수님은 자기가 메시야 되심과 그가 심판주가 되시는 일에 대하여 스스로 증거 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1)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이가 따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32절 말씀에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분은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를 증거 하시고 성령은 성자를 증거 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째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5:36).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영이십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았을 대 비로소 그스도의 사람으로 중생하게 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세례 요한의 증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앞서 오실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나타냈습니다(요1:19-39).

  (3) 요한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메시야로 행하신 그의 수많은 기사와 이적과 권능의 역사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일, 오병이어의 기적, 문둥이를 깨끗케 하신 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일 둥은 주님을 세상의 메시야와 심판주로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증거였습니다.

  (4) 주님은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버지의 증거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요 변화산에서 친히 들려주신 음성이십니다.

  (5) 주님은 자기를 증거 하는 결정적인 증거로써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왔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경에서 영생으로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만 율법만 찾고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 성경을 바로 알고 깨닫는 사람은 그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6) 주님은 유대인들이 숭상하는 모세도 자기를 증거 했노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믿었지만 그의 증거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모세가 증거한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세도 메시야를 증거 했다는 말은 율법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롬 3:21).

  결 론 : 사람이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합니다. 로마서 1:28절에서 증거하기를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데 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을 구함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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