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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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
 밤중소리  01-12 | VIEW : 1,145


  ≈ 19≈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생수

  (본문 : 요한복음 4 : 1 - 19)

  서 론 : 우리는 생에 지친 한 여인을 봅니다. 만족을 찾았지만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낙오된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노라고 생을 포기한 한 여인의 가련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참으로 우연하다고 볼 수 있는 그런 인생의 시점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기서 그녀의 생은 새로운 변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야말로 만족과 행복과 보람을 한꺼번에 되찾는 놀라운 생애를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1. 사마리아사람

  주님은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리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란 곳은 원래 북쪽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사마리아의 역사를 간단히 간추려 말씀드린다면 솔로몬 왕의 이들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부친의 무거운 명에를 벗기를 바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은 더욱 강력한 정치를 강행할 것이라는 망언을 함으로써 등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다윗 족속을 반대하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을 반대하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 이스라엘 북쪽에 한 왕국을 세움으로써 남쪽은 유대나라, 북쪽은 이스라엘 나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못하도록 신당을 세워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이처럼 패역한 길을 걷고 그 길에서 돌이킬 줄을 모르더니 앗수르의 강한 군대에 의하여 사마리아 성이 3년간이나 포위를 당한 끝에 함락됨으로써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영원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마리아를 점령한 앗수르 왕은 이곳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의 전부 포로로 잡아가고 다른 나라의 이방인종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얼마간 이곳에 남아 살아가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들 이족들과 의무적으로 잡혼을 하게 함으로써 순수하고 순결한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혈통을 더럽혔습니다. 남쪽에 살아가고 있었던 유대나라는 이들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한 이후 100여 년 간 정권이 계속되어 오다가 그후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간에는 서로 미워하는 감정관계로 충돌이 많았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민족적인 감정은 사라지지 아니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들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미워한 것은 그들의 혈통이 순수한 아브라함의 자손의 자리에서 떠났으면서도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한 가지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성경적이 아니라 이방 신을 섬기는 혼잡종교로 둔갑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는데 있었습니다.

  2. 주님의 전도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땅 수가성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마련하기 위하여 동네에 들어갔으며 예수님은 행로에 피곤하시어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신성의 면으로는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그분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어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긷기 위하여 예수님이 앉아 계시는 우물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유명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1) 죄인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상봉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잃은 양인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 이 사마리아 여인도 그가 부르시는 죄인이었습니다(마 9:13). 주님은 이처럼 피곤하심이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에게 맡겨주신 아버지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쉴 사이조차 없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의 대화는 여인과의 가장 가까운 사실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전도는 철학적인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토론에서 전개되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 생활의 가장 평범한 사실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전도의 비결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당신은 죄인임을 아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알고 있느냐”고 물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은 이 여인으로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지혜롭게 대화를 유도해 나가셨습니다. 이런 대화 중에 주님은 이 하잘것없는 여인으로부터 모욕적인 여러 가지 말을 들으셨지만 그 때마다 주님은 더욱 큰사랑으로 이 여인을 대하시면서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화제를 발전시켜 나가셨습니다.

  (4)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서 결정적인 기회를 포착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으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자백하게 만드셨으며 그에게 생수가 필요하다는 말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전도 방법을 배워서 잃은 양을 찾는 일에 가장 유효하게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3. 생수란 무엇인가?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갈 하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이 여인은 이 생수를 마셨습니다.

  (1)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생수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이냐? 우리는 요한복음 19장에서 이 생수에 대하여 쉽게 그 말씀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 참 뜻을 보여 주셨습니다(요 7:37-38).

  (2) 생수는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내게 주었으리라” 이 말씀은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일치된 것입니다(눅11:13).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전에도 성령은 끊임없는 감화와 감동의 역사로 우리로 하나님께 회개하게 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간구를 드릴 수 있도록 하십니다.

  (3) 생수를 받는 일은 주시는 이가 누구인줄 알아야 합니다.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죄인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을 향하여 생수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아직 그가 누구이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한 것으로 그의 영의 눈이 열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인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여인은 그를 믿음으로 생수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4)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그리스도 앞에 드러내 놓았을 때 비로소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이 여인의 눈이 어두워 주님을 바라 볼 수 없게 하였던 것은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가 주님 앞에 드러나 이 여인이 그 죄에서 놓임 받았을 때 그의 눈이 열려 주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성령을 생수라고 하신 이유는 그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만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만이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생수를 마신 사람의 생애는 변화 받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생수를 마심으로 변화 받은 성도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2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본문 : 요한복음 4 : 20 - 26)

  서 론 : 우리는 주님과의 대화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인 각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처음 주님을 대하여 말할 때에는 하나의 평범한 유대인으로 대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그 다음에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생수에 대한 말을 듣고 나서는 ‘주’라고 불렀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주라고 표현한 말은 ‘큐리에’로 당시 일반적인 존경어로 사용된 말입니다.

  1. 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태도

  이 여인은 다시 주님으로부터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자기의 속에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셨을 때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선지자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이 여인은 자기와 대화하는 이 유대인을 선지자로 높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내가 그로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후 이 유대인이 자기들이 기다려온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대화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를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려면 이 여인과 같이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대화로 그를 아는 지식 가운데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적 예배와 신약적 예배와의 차이점을 밝힌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구약적 예배는 예루살렘 중심이었습니다. 이방 땅에 가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니엘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적 예배는 지역에 관계없이 어느 곳에서든 어느 방향이건 상관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으며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장소적인 일에 예배의 중심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지성소가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계시는 것입니다(히9:11-15).

  (2) 구약적 예배는 제물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적 예배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제물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회생되심으로 온전히 드려졌기 때문입니다(히 924-28). 이스라엘이 드린 어린양의 회생제물이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은 이 같은 제사의 참 뜻을 모르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의식으로 했을 뿐 그들의 이런 희생제물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완성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제물은 외식으로 흘렀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2).
 
 그들의 외식적인 제물에 진저리 내신 하나님께서는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그들의 제물을 거절하셨습니다.

  2.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드린 예배란 의식적인 것이었으므로 시일이 갈수록 외식에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은 이 같은 외식적인 예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식이나 의식이나 육신에 속한 예배를 받지 아니 하십니다. 인정해 주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면으로 사물을 보시거나 겉으로 사람을 판단치 아니하십니다. 언제나 그 중심에 진실하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밖에 나타나는 것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예배가 아니라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실존을 아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일입니다. 이런 제사는 바로 믿음의 제사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히11:6).

  (1) 신령의 예배란 성령 안에서의 예배란 뜻입니다. 신령이란 말은 ‘엔프뉴마티’로 이 말의 뜻은 성령 안에서란 말입니다. 신령한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만이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있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다. 기도하는 일에도, 찬양을 부르는 일에도,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도, 성령의 역사가 따라야 합니다. 신령의 예배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빠져서는 안됩니다. 모든 예배의 중심이 바로 십자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 이 사랑 역시 십자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진정한 예배란 진리 안에서의 예배란 뜻입니다. 진정으로란 말은 ‘엔알레데이아’로 진리 안에서란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호3:6). 말씀을 떠난 예배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모세가 40일간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아론을 앞세우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여 경배하며 섬겼던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말씀의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기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버림을 받았습니다. 바른 지식이 없이 드리는 제사는 이처럼 드린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진정한 예배에는 그 드리는 사람이 영적인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은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롬12:1-2 ).

  (4) 예배란 말은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예배란 헬라어는 ‘라트레이아’인데 이 말의 뜻은 봉사한다, 섬긴다는 말입니다. 섬김이 없이는 참된 예배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봉사가 없는 예배는 예배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이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유는 그같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보상을 해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겸손함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잠22:4).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눈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신령과 진정이 결여된 예배는 하나님 앞에 무익한 예배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 바로 예배할 때입니다. 영적인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영적인 생활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이 찾으신 바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21≈        그리스도인의 양식

  (본문 : 요한복음 4 : 27 - 38)

  서 론 : 예수님은 가끔 제자들이 잘 깨달을 수 없는 영적인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육신적인 문제를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영적인 답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하셨는데 그들은 아직 신령한 것을 깨달을만한 영적인 성장이 없었던 것입니다(고전2:13). 주님이 우물가에서 기다리시는 동안 제자들은 수가성에 들어가 주님이 잡수실 음식을 사왔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주님 앞에 내놓으면서 “랍비여 잡수소서” 권했을 때 주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시고 의아해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풀이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1. 주님의 양식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양식에 대한 가르치심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언제나 시기를 잘 포착하셨고 듣는 이에게 영적인 풍부한 암시력을 주었습니다. 자기들도 배가 고프고 선생님도 대단히 시장하리라고 생각했을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노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심적 충동을 일으켜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람에게는 입으로 먹는 양식만이 양식이 아니라 참으로 취해야 할 참된 양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했습니다.

  (1) 주님은 사단의 시험에서 이미 이 말씀으로 승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여기서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사람이 취해야 할 영적인 양식을 말씀하신 것인데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이야말로 인생이 취할 참된 양식이라고 하신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주님이 그의 참된 양식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잃은 무엇인가?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9- 40).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하실 일은 죄인을 위하여 회생제물이 되시는 일입니다. 그는 죄인의 속죄 제물로 오셨고 하나님이 그런 사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명으로는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양식이란 사람이 먹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은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란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있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일은 그가 취하실 일용할 양식보다 더 긴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잡수실 육적 양식은 다만 그 일을 이루게 하시는 일에 삶을 이루어나가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 삼으셨습니다. 장로교회 대 요리문답 제1문에는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했습니다(고전10:31).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같은 인생의 본분을 스스로 솔선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4)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을 양식처럼 여기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양식을 일정하게 취해야하듯이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 양식처럼 생각하시어 그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생활을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시간까지 계속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2. 우리의 양식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 새로운 양식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신 목적은 그들로 그같은 양식을 취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 양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양식으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길은 그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둥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하셨습니다(시119:105).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등으로 여겨 말씀으로 자신의 주위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빛으로 삼아 자기 인생 길을 비취게 하여 어둠에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2) 이 말씀은 순종을 양식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듣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함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듣고도 행치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음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4:17).

  (3) 이 말씀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마치 육의 양식을 취하는 것과 같은 당연한 사명으로 여겨 충성해야 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충성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목적을 스스로 거역하는 사람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4)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육신적인 일에 치우치면 그의 영적 생명이 죽는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육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는 생활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할 것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생활입니다.

  3. 눈을 들어 발을 보라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밭이야말로 우리의 신령한 양식을 심고 거두어 드리는 전도의 밭인 것입니다. 밭이란 말은 ‘코라’로 이 말의 뜻은 지방, 마을, 밭이란 말의 낱말로 복음을 전할 복음의 터전을 가리킨 것입니다. ‘보라’라는 ‘데아사스데’는 찾아가서 만나보라는 뜻입니다. 전도란 말씀을 전할 지방이나 촌을 두루 찾아가 그 대상자를 만나는 일임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전도의 결실에는 세 가지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뿌리는 일이요, 하나는 거두는 일이요, 하나는 자라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결 론 :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눈올 들어 밭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 앞에는 넓은 밭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거두어 드려야 활 곡식들이 익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두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참 양식인줄 알고 이 일을 온전히 이루는 생활을 통하여 추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22≈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

  (본문 : 요한복음 4 : 28 - 42)

  서 론 : 야곱의 우물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속에는 이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은 두기지 형태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쫓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했습니다(고후2:15-16).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지만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사마리아 여인

  주님은 남편을 다섯 명이나 가라치운 이 여인의 마음속에서 죄로 인한 괴로움을 발견하셨습니다. 죄악된 자신의 생활을 통회하는 모습과 인생의 허무한 막다른 골목에서 메시야를 대망 하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주님과의 대화에서 이 여인의 마음의 밭에 떨어진 씨앗은 생명에 이르는 냄새로 나타났으며 “내가 그로라”하신 결정적인 말씀을 믿음으로 그의 심령에는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같이 변화 받은 심령은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심겨진 기쁨은 그대로 담아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중인이 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가 바로 메시야이심을 발견하고는 너무나도 놀랬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속에서 이 여인을 지배해왔던 좌절감과, 죄책감과, 인생의 허무감이 일시에 사라져 버리고 말 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샘솟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죄의 용서를 받고 사죄의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지난날의 죄책으로 좌절감에 사로잡히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 변화 받은 사람은 지난날의 생활을 부끄럽게는 생각하지만 숨기려들지 않습니다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으니 지난날의 죄악된 생활은 하나의 간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이 여인은 물동이를 우물에 그대로 놔둔 채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이유는 동네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인의 생각에는 그리스도가 언제 다른 곳으로 가실지 모릅니다. 이 좋은 기회에 동네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뜨거운 소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동네 사람들에 대한 생명의 파수군의 사명감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에게서 처음 찾을 수 있는 증거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분은 아직 죄인을 구원하시는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 마음에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주님을 만남으로 얻은 이 기쁨을 마음속에 눌러 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이제 물동이 같은 존재는 자신의 사명에 비하여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의 육신적인 갈 함을 채워주는 물동이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는 일에 방해가 됩니다. 베드로도 그물과  부친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도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 때문에 영생의 길에서 돌이킨 부자청년의 어리석음을 따라가서는 안되겠습니다.

  (2) 이 사마리아 여인은 다른 곳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로 뛰어갔습니다. 복음은 멀리 가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잘 알고 있는 이웃에 전해야 합니다. 자기 생활환경에 비추어 전하기 쉬운 곳을 택하는 일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 여인은 어느 한집만 전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동네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3) 이 여인의 전도방법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체험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에게 일어난 체험입니다. 그것을 증거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일은 그 동네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을 자신에게 말해준 사람이 있으니 “와 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효과 있게 전하는 좋은 방법은 그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증거입니다. 이 여인은 그들에게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줌으로 모든 동네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게 했습니다. 자신의 어두운 생활이 부끄러워 사람들 앞에 얼굴을 쳐들지 못했던 이 여인이 거리에 나타나 자신의 죄악된 생활을 들추어가면서 그리스도를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화력을 주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미 변화 받은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는 먼저 자신이 새 사람으로 변화 받아야 하며 변화 받은 자기의 모습을 똑똑하게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없으며 전도의 효력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사람들에게 보여줄 증거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이며 이것이야말로 그 체험을 간증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거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와 보라”고 한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방법은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유능한 전도인은 그들을 그리스도 앞에까지 오도록 잡아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증거 하는 이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증거하고 좋은 말로 흥미를 주었다 해도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지 아니했다면 그같은 전도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습니다. 다른 이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지혜를 써야하는 것입니다.

  2.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의 걸실

  (1)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들은 수가 성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신가 알기 위하여 예수께로 왔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30).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고 그 심령의 변화를 받으며 그의 인생이 새로워지면 전도의 능력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전도의 능력이 없고 전도의 의욕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 사실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수가 성에 거주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다고 하는 그녀의 뜨거운 열의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끔 만들었습니다.

  (2) 이 여인은 그들을 예수님 가까이로 모으므로 그들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의 전도인의 사명만 했을 뿐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스도를 믿게 할 은사는 주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전도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게 하므로 구원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았다”고 했습니다(41).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이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도인인 그 여인에게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42).

  결 론 : 사마리아 여인은 전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완벽하게 이루었습니다. 사람의 믿음은 우리의 간증이나 경험이나 체험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 23≈        왕의 신하의 믿음

  (본문 : 요한복음 4 : 43 - 54)

  서 론 :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각계 각층의 여러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을 때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간구 했습니다. 아들이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가버나움까지 내려오셔서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의 간절하고 끈기 있는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아들을 병에서 살려냈습니다.

  1.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흘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전 9:12). 이 헤롯왕의 신하도 이 같은 재앙이 흘연히 그의 인생 길에 임한 것입니다. 이때 그는 재앙을 만난 인생이 찾아가야 할 바른 길을 간 것입니다.

  (1) 그는 모든 문제의 해결 자이신 주님을 찾아 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나가는 생애 중에 어떤 문제가 찾아와도 그 문제를 가지고 달려갈 곳은 예수이십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시146:5).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인생 길에서 만나는 어떤 일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갈 곳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생활에 승리를 거둔 사람인 것입니다.

  (2)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하여 주님을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초청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의 해결 자되신 예수님을 문제가 있는 곳으로 청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약5:14). 오늘날은 주님을 청할 수는 없지만 주의 종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아야 합니다.

  (3) 이 왕의 신하는 응답 받기까지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한번 간구하는 기도에서 절망적인 말을 들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자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에 가장 두려운 대적은 낙심입니다. 낙심은 기도를 좌절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낙심하지 말 것을 이처럼 당부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눅18:1-8).

  2. 표적과 기사의 신앙

  주님은 이 왕의 신하의 간구를 들으면서 책망 비슷한 탄식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표적물 직접 보기를 원하는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그의 이 같은 간구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뜻입니다. 백부장의 경우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은 표적을 원치 않고 말씀으로 명해주실 것을 간구 했습니다. 표적을 보여달라는 믿음은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2) 기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는 믿음이 표적 위주의 신앙입니다. 유대인의 신앙이 바로 이런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모세가 광야에서 행한 것과 같은 표적을 보여주면 메시야임을 믿겠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마12:39). 표적을 구하는 신앙은 표적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 큰 표적을 다시 요구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5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를 남긴 사실을 역력히 바라본 많은 군중들은 다시 모세와 같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는 표적을 바랐던 것입니다. 주님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그 몸을 보이신 후에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에 표적을 가지고 믿는 신앙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인류의 종말에는 하나님께서 그 시험의 도구로 이 표적을 사용하십니다(살후2:9-12). 표적은 진리를 증거 할 수 있는 하나의 적은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3) 주님은 사람이 죄로 인한 영혼의 병은 모르고 육신의 병만을 고치려는 불 신앙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 왕의 신하인 경우만 해도 주님 앞에 나와서 안타깝게 호소한 것은 자기나 아들의 영혼의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질병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질병에 관한 두려움을 알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진실한 믿음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3. 왕의 신하의 믿음

  왕의 신하는 그의 간구함을 통하여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은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가 응답을 확인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제 이 왕의 신하는 과연 주님께 대한 믿음이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대하여 알아 볼 수 있습니다.

  (1) 그는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향하여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왕의 신하는 주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의 신앙이 성장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주님께 자기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자기 집까지 가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으로부터 자기의 원하는 대로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원하는 대로 집에까지 가시지 않고 다만 말씀으로 응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왕의 신하는 주님의 이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말씀을 믿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2) 왕의 신하는 그 말씀을 믿고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자기 아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았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기도의 응답은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입니다. 말씀이 곧 응답인줄 알고 그 말씀을 믿고 기다리면 응답의 결실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3) 왕의 신하는 응답의 증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집에 내려가는 길에 아들이 나았다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그 집 하인들이 올라오는 길에 주인을 만났습니다. 왕의 신하는 하인들로부터 아들이 나은 시간을 물었습니다. 그 시간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신 시간과 일치됨을 알고는 더욱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결 론 : 왕의 신하의 집안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 갔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그리스도를 믿는 복된 가정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 가정은 아들이 살아난 기쁨이 처음에는 컸겠지만 그 후에 그들은 아들로 말미암아 온 집이 구원받은 일에 더욱 감사하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왕의 신하의 이름이 구사가 아니었나 짐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아내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인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2-3). 기도의 응답은 감사로 열매를 맺어야 하며 감사는 입술만의 감사가 아니라 이처럼 몸과 시간과 재물을 바쳐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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