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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밤중소리  01-11 | VIEW : 667
  (124) 빌라도의 판결
  (누가복음 23 : 1 - 25)  

  서 론 : 공회를 소집하여 죽이기로 결의를 한 유대의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이제 더 지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피고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지방의 정치적 지배 판도는 예루살렘에는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부가 있었고, 빌라도가 그 책임자인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인 갈릴리와 대가볼리 지방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은 헤롯이란 인물이 분봉왕으로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들 두 명의 지배자 사이에는 서로의 다툼과 시기가 있어 좋은 사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빌라도로부터 사형언도를 얻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죄목을 조작하여 사형에 처할 수 하도록 꾸몄던 것입니다.

  1. 빌라도에게 고소한 유대인들
  그들은 빌라도에게 세 가지 죄목을 붙여 고소했습니다.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였으며 또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형에 처하는 언도를 내려 달라고 고소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했다는 말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일을 모함한 말이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도록 금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요,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왕이란 말을 강조함으로 빌라도나 가이사 황제에게 위협을 주는 존재로 인식시킴으로 중벌을 내려 줄 것을 은근히 기대한 중상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주님이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시는 피고가 되셨지만 온 인류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시는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 되시는 주님 앞에 빌라도가 머리를 조아려 엄중한 심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빌라도의 심문은 이러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는 이미 여러 가지 정보에 의하여 예수님의 동정을 알고 있었으며 가이사에게 반기를 들거나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도모할 만한 위험한 인물로는 생각지 않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일도 죄로 정하려는 뜻이 아니요, 예수님의 처지와 그 당하고 있는 모든 형편을 보고는 한번 그 대답을 들어보려고 물은 데 불과한 것입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주님은 담대한 자세로 네 말이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에 빌라도가 위협을 느끼지 않은 것은 그의 대답이 종교적인 의미의 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왕이라면 왕다운 체모도 갖추고 군사와 백성도 있으며 위기에 처했을 때 싸움도 일으켜야 하는데 예수  296 \ 누가복음          

의 경우는 전혀 이 같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사형으로 정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빌라도는 정의감이 있는 사나이요, 자기 아내의 권면을 듣기도 해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죄 없는 청년을 석방해 줄 것을 내심으로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고소하는 무리들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함으로 일차적으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 같은 빌라도의 태도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 상황이나 민중의 호감을 사야 말썽 없이 지배할 수 있는 조건들에 미루어 볼 때 군인다운 용기였던 것입니다.

  2. 헤롯의 심문
  빌라도는 고소하는 무리들로부터 피고인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사실을 발견하고는 이 골치 아픈 사건에서 손을 떼고자 하는 생각으로 그 지방의 통치권자인 헤롯 관할이니 그리로 데려가라고 하여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헤롯이란 인물은 간교하고 인격적으로 저열하고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은 불의한 위인이요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장본인이기도 하며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셔서 각가지 이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두려워했던 자입니다.
  이자는 뜻밖에 예수님이 자기의 재판을 받기 위하여 피고로 데려오는 일에 대하여 심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한번 예수를 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된 일에 대하여 기뻐했던 것이요 그의 이적 행하심을 직접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왕의 의장을 갖추고 피고로 자기 앞에 서신 예수에게 여러 가지로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죄로 석방되기를 바라시거나 그들의 자비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이 뱀처럼 간교하고 불의한 헤롯의 질문에 대답하실 리 없었던 것입니다. 대단히 기뻐하고 기대했던 헤롯은 만나보니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요 기적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못하는 위인인줄을 알고는 당장에 태도를 돌변하여 업신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조롱하고는 빛난 옷을 입힌 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고 했습니다.

  3. 빌라도의 판결
  빌라도는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 예수에 대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판결할 것을 결심하고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무리들을 불러모으고는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죄를 찾지 못했으며 헤롯도 죄를 찾지 못하여 도로 보냈으니 그를 죽일 일이 없은즉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되면 사형수 중에 한 죄수를 석방해 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를 내어줄 것을 제의했습니다.   297 \ 누가복음        

그러나 그들은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바라바란 위인은 민란을 꾸민 살인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빌라도는 세 번째 그의 무죄를 주장하여 석방하기를 바랐지만 군중의 소리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결론 : 우리는 여기서 빌라도의 입장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세 번이나 예수를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군중들의 함성에도 그는 그의 의지를 관철해보려고 애쓴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더군다나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살려줌으로 자신에게 오는 어떤 정치적인 이익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공회의 높은 사람들과 마찰만 생길 뿐입니다. 이 같은 일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도 불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를 살려보려고 끝까지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의 동태가 경직하고 자기가 숙어지지 아니하면 어떤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불리한 정황 속에서 그는 할 수 없이 저희의 구하는 대로 언도하고 그들의 손에 넘겨준 것입니다. 죄는 빌라도에게 보다도 그를 고소하고 사형을 외친 무리들에게 있었습니다. 전해진 로마의 고대 문서에 의하면 이 빌라도가 이 재판의 결과를 가이사 황제에게 보고한 문서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따르면 빌라도가 후에 예수를 영접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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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해 울라
  (누가복음 23 : 26 - 31)  

  서 론 : 드디어 사형 선고를 언도 받은 예수님은 빌라도가 넘겨준 그들의 손에 끌려 멀고도 긴 골고다의 언덕길을 향하여 이끌려 가시게 되었습니다. 거리로 보아서는 얼마 안 되는 곳이지만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등에 채찍을 맞으시며 끌려가는 예수님에게는 하늘 보좌에 가시는 길보다 오히려 더 먼 길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1.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진 십자가
  예수님은 너무나도 힘에 겨운 일이었습니다. 하룻밤 동안에 몇 군데나 끌려 다니시며 재판과 심문을 받으신 것입니까? 안네스의 집에 끌려간 후, 다시 대제사장 집으로 그리고 공회에 끌려가고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빌라도에게, 그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 하여 분봉왕 헤롯에게 보내고,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무려 빌라도에게 다시 넘겨질 때까지 여섯 번씩이나 왕래하셨습니다. 그는 피곤하신 몸을 이끄시고 겟세마네동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심히 피곤하고 배고프시며 목마르신 그런 처지에 계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등위에 무거운 십자가형틀이 짊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힘에 겨우셨고 피곤하고 무거워 견뎌 내실 수 없었습니다. 그에다 그를 강제적으로 끌어가는 군병들은 재미있다는 듯 채찍으로 그의 등을 내려쳤습니다. 넘어지면 또 후려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 몇 번인가 되풀이되니 이제 더 이상 견디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신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도 더 이상 그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심은 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 짊어지게 해야 했습니다.
  그때 시골에서 올라와서 마침 이 광경을 바라보기 위하여 무리들 틈에 끼어 골고다로 올라가던 시몬이라고 하는 구레네 사람이 그들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제법 힘을 쓸 것 같은 시몬이란 이 청년을 잡아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 형틀을 억지로 지게 했습니다. 이 난데없는 곤욕을 당하게 된 시몬은 속으로 오늘은 참으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목하면서 혹은 조롱도 하고 혹은 격려도 하면서 따라오는 것을 보고 창피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비록 십자가를 억지로 지기는 했어도 무익한 십자가는 아니었습니다.
  (1) 주님을 잠시나마 편하게 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주님이 지셔야할 십자가였지만 시몬이 대신 지게됨으로 주님이 편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299 \ 누가복음    

위한 십자가를 졌습니다. 주님을 위한 십자가는 좋은 것입니다. 나에게 힘겨울는지 모르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십자가를 각기 져야 하지만 때로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쓸데없는 고난을 당한다고 불평하거나 힘겨워 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1).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했습니다(벧전4:14).
  (2) 시몬은 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예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이 같은 체험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돌이켜 바라보게 되고 뿐만 아니라 주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의 옆에는 다만 바라보면서 따라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십자가를 진 일로 인하여 그후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의 온 집안까지 주님을 섬기는 가정이 되었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몬의 아들이 알렉산더루포였는데(막 15:21) 롬 16:13에는 이 루포에 관한 기사가 나오며 그는 사도 바울에게 사랑을 받은 성도였음이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에는 영육간에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져야 할 것입니다.

  2. 우는 여자의 모습
  주님이 가시는 골고다 길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주님의 행렬에 낀 것입니다. 그 중에는 로마 군병, 단순한 구경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무리, 흥미 있는 모습으로 따라가는 백성들, 그런데 일단의 무리가 주님의 주변에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평소에 주님을 섬겼던 여인들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오늘, 이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다만 이 여인들만이 슬피 울며 주님의 고난에 가슴을 쳤습니다. 그들은 주님께는 아무런 죄도 없으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의 그 여위신 모습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군병들의 채찍에 얻어맞아 등에 흐르는 피를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피곤하고 힘겨워 넘어지고 쓰러지신 모습을 보고 슬피 울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하여 이 같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과연 얼마나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때 그 모습은 지금도    300 \ 누가복음  

생생하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때 그 여인들처럼 우리는 주님의 그 모습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는 슬픔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애통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결론 : 주님은 그 괴로우신 중에서 슬피 울며 따라오는 이 여인들을 향하여 눈을 돌리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의 심각한 경종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예루살렘에는 주님을 죽이는 피 값으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경종이시며 그때를 위하여 지금부터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날이 반드시 이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그 성의 장래를 위하여 눈물 흘리시며 우신 일이 있었는데 날이 이른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을 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날에는 원수의 무리가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안에 있는 백성들을 다 죽일 뿐 아니라 아이를 밴 여인의 배를 가르고 철없는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무참히 살해할 것입니다.
  이러한 날을 바라보신 주님은 그 여인들에게 이날을 대비하여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처럼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하리요 하심으로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그들(마른나무)이 받을 죄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크고 중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언대로 그후 40여 년만에 이루어져서 민족적으로 수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2천년의 긴 세월동안 그들의 수난이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와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요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면서도 이 이방인의 권력자만도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무리들처럼 주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자신들이 분리할 때면 주님을 여지없이 거역하고 원망하는 무리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자세를 바로 잡아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기를 다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01 \ 누가복음

  (126) 갈보리에서 있었던 일
  (누가복음 23 : 32 - 43)  

  서 론 : 예수님이 끌려간 곳은 해골이라 이름하는 산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사형장입니다. 이곳 이름이 해골이라고 나와 있는 것은 그 산의 모양이 마치 해골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혹은 사형장임으로 실제로 사람의 해골이 뒹굴고 있다하여 붙여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곳 이름이 여러 가지로 일컫는데 히브리어로는 골고다요, 헬라 말로는 크라니온이요, 라틴말로는 갈바리아입니다. 영어의 갈보리는 라틴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1. 두 행악자와 예수님이 함께 달린 갈보리
  갈보리 언덕에는 예수님 한 분의 십자가만 선 것이 아닙니다. 행악자 둘이 함께 끌려갔는데 이 둘이 예수님 좌 우편에 못 박혔고 주님은 그들 가운데 못 박히신 것입니다. 이 같은 갈보리의 십자가 형틀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두 명의 행악자들은 죄의 저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인류를 상징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와 사망의 종으로 팔린 존재들입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나와 여러분들 한사람, 한사람들입니다.
  (2) 두 사람의 행악자 중에 한 사람은 회개를 했지만 한 사람은 회개치 못했습니다. 한 행악자는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 여든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나 다른 한 행악자는 그 사람을 꾸짖으며 이처럼 말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을 것이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죄로 멸망 받게된 인류 중에는 회개하는 사람과 회개치 못한 사람들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사람은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는 것입니다.
  (3) 이 두 행악자는 구원과 버림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수 없는 무리들도 많이 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궁극적으로 회개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버림받을 사람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죄대로 조금도 자비가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두 행악자가 받을 똑같은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들 두 명의 행악자들 틈에 끼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도 완전히 죄인 중 하나로 죄인과 똑같은 심판을 받은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302 \ 누가복음    

서이십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행악자는 구원함을 맡았지만, 조롱하며 회개를 거절한 한 행악자는 영원히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이 아무리 크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넓어도 죄를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원치 않는 자에게는 가장 준엄한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5) 낙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행악자였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은 놀라운 축복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최초로 받고 이루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십자가 위의 행악자였습니다. 그는 잃은 양이었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구원의 예정자였습니다. 그의 회개는 의인이 되고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두 행악자는 모든 것이 다 똑같았지만 다만 회개하는 일과 그를 영접하는 일만이 차이가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런 것입니다.

  2. 갈보리의 여러 모양
  우리는 갈보리 언덕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모양의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위에 못 박혀 고난의 잔을 마시고 계십니다.
  (2) 두 행악자들도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못박은 무리들은 그 아래 앉아서 희희낙락하며 벗어진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사단의 졸개들입니다.
  (4) 많은 백성들은 이 광경을 재미있게 구경거리로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의 고난이 자기와는 아무런 연관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관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무리들이 지금도 많은 군중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5) 관원들은 주님을 희롱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 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오늘날에도 이처럼 주님을 희롱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 여든 내가 너를 구원하라고 외쳐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의 생의 마지막에 있도록 참담한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결론 : 그러면 우리 주님은 이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셨는가? 이 원수의 무리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으셨는가? 아닙니다. 그분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그의 교훈을 이곳에서까지 용서, 실천하심으로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같은 죄인들의 죄까지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  303 \ 누가복음  

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의 이 기도는 지금도 온 땅 끝까지 이르러 메아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알지 못한 연고로 하고 있는 그들의 그 무지한 죄의 용서를 위하여 오히려 아버지께 기도를 드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로 이 두 행악자 중에 하나에 해당하는 죄인들입니다. 내가 달려야할 그 자리에서 고통을 받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는 두 행악자 중의 하나라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대했을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들 많은 무리들 가운데 있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무리 중에 섞여서 주님을 대했을까?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원수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본 받는 사랑의 생활을 이루어 나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04 \ 누가복음

  (127)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누가복음 23 : 44 - 56)  

  서 론 :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피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이 고난의 잔을 마시느라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괴로움이 그토록 처절하시기에 그는 아버지, 하실 수 있으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진 죄패 아래서 정말로 이스라엘의 왕이시오 만 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패에는 세나라 말로 그 분의 죄명이 기록이 되었습니다. 히브리말로 유대인들에게 볼 수 있게 하였고, 헬라말로 세계의 모든 문명권에 살아 나가는 인류가 보게 하였고, 라틴말(로마 어)로 기록함으로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다스린 정복자의 나라, 로마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1.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임함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제3시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은 오전 9시경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제6시에 해가 빛을 잃고 9시까지 어둠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온 세상에 어둠이 깔린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뜻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고통에 모든 그의 피조물들도 얼굴을 가리운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식이나 집 어른이 중한 병고나 사고로 중상을 당했을 때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길 뿐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얼굴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에 괴로워하시는 주님의 모습 앞에 만물이 얼굴을 들어 바라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이 같은 일은 하늘의 한 징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태어나실 때에도 하늘의 별의 징조가 있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 징조를 보고 베들레헴으로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간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는 하늘의 여러 징조로 보여주시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이 같은 놀라운 일에 어찌 하늘의 징조가 없겠습니까? 이런 현상은 갈보리에 모여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갑작스런 어둠에 놀람과 두려움이 그곳에 가득 찼습니다.
  백부장은 이 같은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의인이었도다”고 탄식했습니다. 백부장이란 로마 군대에 속한 고급장교입니다. 그는 로마 사람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아닙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갈보리까지 끌고 온 군관들의 책임자 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향하  305 \ 누가복음  

여 의인이라고 탄성이 나왔고 그의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에게 고소한 자기들의 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갈보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징조를 바라볼 때 그들의 마음속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슴을 친 것입니다. 이런 징조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다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갈보리에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무리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2. 주님의 운명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모두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것을 십자가상의 7언 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맨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하신 외치심입니다. 이 마지막 말씀을 마치신 후 그는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드렸습니다. 사람에게는 죽어도 그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셨습니다(히9:27). 전도서에는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하셨습니다(전3:21).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유언은 바로 주님이 마지막 남기신 이 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성소 휘장이 찢겨짐
  주님의 운명과 함께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가운데가 찢겨진 것입니다.
  (1) 이처럼 성소 휘장이 찢겨진 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살 길이 열린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의 육체의 죽으심으로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휘장을 찢으신 그리스도의 피로써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히10:19-20). 우리들이 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이처럼 옛날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만 들어간 지성소에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항상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며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2) 이 일은 이제 구약 시대는 막을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시대에 들어갔음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성소의 휘장이 없어진 사실은 제사  306 \ 누가복음  

장이 필요 없다는 것과 희생 제물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하늘 보좌로 옮겨져서 우리 주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그의 희생은 우리의 영원한 제물이 된 것입니다.
  (3) 또한 이 같은 일은 주님이 하셔야할 아버지의 명령을 온전히 이루신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빌2:8). 주님은 그의 온전한 죽으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결론 : 모든 일은 이제 끝났습니다. 그는 죽으심으로 그의 사명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공회원인 요셉이란 사람이 빌라도에게 말하여 주님의 시체를 장사 지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그를 가리켜 의롭다고 말하고 주님을 정죄 하는 결의에 반대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쳤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주님의 장사 지내실 일을 위하여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준비해 놓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며 의로운 제자가 주님이 죽으신 후에 등장한다는 것은 퍽 큰 의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요셉 같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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