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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장
 밤중소리  01-11 | VIEW : 554
(119) 가룟 유다의 배신
  (누가복음 22 : 1 - 6)  

  서 론 : 유월절은 의의 깊은 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할 어린양입니다. 그의 희생은 이런 의미에서 유월절과 때를 맞춘다는 일은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의 속죄양이 되려면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져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에게 배신당하는 일로부터 모든 고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1.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마귀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유다의 마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그를 조종했습니다. 우리는 왜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면…
  (1) 유다는 언제나 불만 자였습니다. 베다니 동리의 마리아가 예수님 머리 위에 향유를 붓고 그의 머리털을 씻길 때 이 유다는 이 같은 일에 대하여 불만을 털어놓았던 것입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 같은 시기와 불만은 사단에게 항상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런 기회를 엿보아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2) 유다는 원래가 도적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요12:6). 도적은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사단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3) 이 갸롯 유다는 돈을 매우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넘겨줄 것을 의논할 때 저희가 돈을 주기로 언약할 때 유다가 허락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애초에 돈으로 팔 생각까지는 가지지 아니했지만 돈을 주기고 언약했을 때 마음이 크게 움직이며 좋아하여 허락했던 것입니다. 딤전 6:10에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범죄의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혹을 받는 일 중에 돈이 가장 으뜸인 것입니다. 결국 돈을 사랑하는 유다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유다는 원래 간교한 인간성의 소유자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선생 가까이 가서 신호를 짠 군관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선생님이여, 안녕하시옵  282 \ 누가복음        

니까”하며 천연덕스럽게 입맞추기까지 한 간교한 자였던 것입니다. 간교한 존재는 마귀입니다. 창 3장에 나타난 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한 자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처럼 간교한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2. 마귀가 들어간 유다
   일단 사단이 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니 그는 그의 결심을 굳히고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사단이 들어가면 사람의 마음이 강팍해 지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의 계획을 그 사람을 통하여 추진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들어간 사람은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룟 유다를 회개시키시기 위하여 만찬석상에서 여러 번 기회를 주셨건만 강팍한 마음이 녹아지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유다가 이처럼 스승을 팔아먹기까지 타락하게 되었던 것은 그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했을 것이지만 우리의 속죄 재물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셔야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대하여 신앙고백이나 어떤 선한 생각을 가진 사실이 전혀 없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도 전혀 변화 받지 못했습니다. 육신 그대로의 사람이었습니다.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은 결국에는 주님은 배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 받는 것을 원치 아니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그의 심령이 성령으로 변화 받지 못하는 한 사단의 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그것이 구원의 보장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나 믿음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믿음에 서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기와 불만이 신앙생활에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마음은 사단이 심어주는 마음이기 때문에 시기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불만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을 배신하는 일에 한 몫을 가진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예수를 믿고 그를 따르고 순종하는 일에 결정적인 방해를 받는다면 그는 이미 사단에게 그의 종으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유다와 같은 인간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늘 자기를 돌아보아 나는 과연 예수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믿음에 굳게 서 있는가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83 \ 누가복음

  (120) 마지막 유월절
  (누가복음 22 : 7 - 23)  

  서 론 : 유월절 행사가 성만찬으로 변모하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는 이 사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주인이십니다. 그의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서 모든 이스라엘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서 구원하는 확실한 표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와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주님의 피와는 하나는 그림자요 하나는 본체일 뿐 똑같은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유월절 행사를 해마다 행했지만 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유월절 행사를 성만찬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유월절은 한 그림자요 신약의 성만찬은 본 모습입니다.

  1. 유월절을 예비할 장소
  이제 유월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일행도 유대인들인지라 유월절 행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유월절을 지낼만한 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성내로 보내시면서 “너희가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주인에게 말하기를 선생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이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다락방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다락방일 것이라고 말합니다(막11:12).
  예수님이 과연 마가의 다락방을 예상하시고 베드로와 요한을 동리로 보내셨는지는 몰라도 그때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아는 바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일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미리 아셨건 또 말씀의 권능으로 그렇게 하시도록 명하셨건 이런 일에 대하여 문제 삼을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사실을 바라보고는 심히 놀랐을 것입니다.

  2. 유월절 행사의 새로운 의의
  드디어 모든 제자들과 주님은 베풀어진 다락방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주님은 이 자리에서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날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잔치를 함께 치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야말로 주  284 \ 누가복음        

님의 최종적인 제자들과의 유월절 잔치요 또 조용히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제자들과 행하신 행사는 유월절 행사뿐 아니라 신약시대에 우리가 실행해야할 새로운 유월절 행사인 성만찬을 최초로 행하신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최종적인 유월절을 지키신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16~17절). 예수님은 이 성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이 유월절이 마지막으로 맞이하시는 유월절이 되신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제 유월절 행사가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행하시는 이 행사로 끝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뜻이 감겨져 있습니다. 과연 이 말씀대로 이제 후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유월절 행사는 없었습니다. 이제 실체가 오셔서 다 이루셨는데 그림자를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19~20절에서 우리는 새로운 유월절의 뜻이 담긴 행사를 주님이 몸소 행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떡을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실 몸은 어린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셨습니다. 그의 몸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바 된 속죄 제물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사53:5).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신 일이야말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보여주신 그림자의 실체입니다. 사람들은 실체가 온 후로는 그림자는 버리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어린양을 잡는 일에 대한 기념이라면 주님의 성만찬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몸소 당하신 일에 대한 기념입니다. 성만찬에서 떡을 떼는 일은 나를 위하여 그 몸을 버리신 주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일로서 이로써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을 우리가 기념하는 것입니다. 떡을 떼신 후에 잔도 이처럼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실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 하나님은 이 피로써 우리와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새 언약이란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로운 언약을 주신 일을 말합니다.
  옛 언약이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적인 언약이신 데 이 언약은 우리 인간들에게 의와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의와 생명을 주시는 새 언약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 언약에 동참자가 되려면 주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하신 일을 믿고 그를 영접하  285 \ 누가복음        

는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같은 새 언약에 동참자임을 주님이 행하라고 하신 성만찬을 통하여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서 성만찬을 반드시 행해야할 이에 대한 주님의 명령이십니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이 성만찬은 크게 둘로 그 뜻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행사로 우리가 주님의 새 언약의 동참자임을 확인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이 같은 일을 행함으로 주님이 나를 위하여 고난받으신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함으로 기념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행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영적인 유익을 주는 행사입니다.
  결론 : 그런데 이 자리에 앉아서는 안될 인물이 그들과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새 언약에 들어 갈 수 없는 인간이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갸롯 유다가 이 성만찬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의 회개를 바라셨지만 유다는 끝까지 그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지 못하고 저주받은 바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무한한 영광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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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주님과 함께 한 자의 상급
  (누가복음 22 : 24 - 38)  

  서 론 : 이제 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얼마 남지 아니한 기간에 제자들에게 이르고 가르쳐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의중도 모르고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베드로는 선생이 당하실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와 함께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제자들은 긴박한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혹은 교훈 하시고 혹은 경계하시고 혹은 위로를 주셨습니다.

  1. 섬기는 자가 되라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끔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토론도 잘하고 다투기도 잘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났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서열 다툼입니다. 이 문제가 이때 거론된 것은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곧 왕이 되실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서로 시기하는 마음으로 누가 크냐는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철부지 제자들을 향하여 이방인의 임금들처럼 사람들을 주관하며 높임을 받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적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찌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큰 자가 되고 남을 섬기는 자가 높임을 받는다는 뜻으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표본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가장 큰 분이시지만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남보다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며 남을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하늘의 상급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우리 중에 계셨더니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이름을 가지신 분이 되셨습니다.

  2. 하늘에서의 상급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그들이 주님을 섬긴 일에 대한 보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상급을 받을 이유에 대하여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주님과 함께 영광이 약속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약속이요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   287 \ 누가복음      

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하셨습니다(마5:11). 사도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8:18).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에 낙심할 것이 아니고, 슬퍼할 것도 아니요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생각함으로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1) 내 나라에서 내 상에서 먹고 마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축복을 가리킨 것입니다. 한 상에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축복이란 더할 나위 없는 위대한 상급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다음에 그들이 주님의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다 똑같지만 그곳에서 누릴 영광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3. 베드로에 관한 경계
  사단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에 대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사단의 역사를 이미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에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일은 바로 베드로의 이 같은 기도도 한 제목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베드로가 사단의 시험에 빠져들 것을 아셨지만 또한 돌이켜 회개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이시냐는 듯이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는 예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기도했어야 할 터인데 기도하지 못했고 영적으로 무장하여 조심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자기 믿음과 자신의 힘만 의지함으로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4.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더냐?
  유월절 행사에서 보이신 주님의 말씀이나 베드로를 향하신 말씀을 따라 정세가 절박한 줄을 알았습니다. 우리 중 누가 높으냐고 하는 분위기는 순간에 공포 분위기로 바뀐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주시기를 원하셨습니  288 \ 누가복음        

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을 전도대로 하여 각 고을로 보내셨을 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그들은 “없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다음 말씀에 이상한 여운을 남기셨습니다.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직도 신학자나 설교자들간에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37절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는 말씀으로 그의 받으실 고난이 얼마 남지 않으셨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잡히시고 그들에 의하여 죽으심을 받으실 때 제자들은 이 같은 시험을 견뎌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에게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기까지는 역시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전대나 주머니나 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시는 명령 투로 말씀하신 것으로 나와 있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의 강조점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명을 받기까지에는 전대 없이는 다닐 수 없을 것입니다. 돈 없이 어디 가서 누구의 영접이나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막을 지날 때나 나그네길을 행할 때 필수품인 칼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곁을 떠나는 일은 곧 주님의 권능이 떠나는 일과 한가지임으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심히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늘 주님의 의뢰하고 그분만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을 부인할 위험이 있습니다.













289 \ 누가복음

  (122) 주님의 마지막 기도
  (누가복음 22 : 39 - 46)  

  서 론 : 주님의 공생애는 기도로 시작하고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도 기도로 끝내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고난을 당하셔야 할 시기가 가까이 이르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편적인 인성을 가지신 사람이셨기 때문에 고난 앞에서 괴로워 하셨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육신 적으로 받는 시험은 우리의 경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산에 자주 올라가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는 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가 감람산에 올라가신 일도 고난과 시험을 이기시기 위한 기도 때문이셨습니다.

  1. 예수님의 기도 생활
  예수님은 시험에 들만한 일이 생기셨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으로 왕을 삼고자 했을 때 산에 오라가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당하실 고난을 앞두고 시험에 들지 않으시려고 기도하시려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3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 올라가시는 일은 하나의 생활 습관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기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날도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신 것입니다.
  습관은 제2의 인간 창조의 방법입니다. 사람은 습관에 따라 그의 영적인 생활이 좌우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습관에 젖어 있으면 기도와는 영영 멀어지는 것입니다. 주일을 못 지키는 습관에 빠지면 주일을 지키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생활을 참으로 많이 하셨습니다. 그의 기도 생활은 하나의 생활 습관화가 된 것입니다. 기도의 습관화란 바람직한 일입니다. 기도생활을 항상 계속적으로 반복함으로 자기 생활에 필수적인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습관을 따라 기도 하셨거늘 우리들에게 있어서야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기도의 자세
  (1) 예수님은 산에 데리고 올라간 제자들과 얼마간 떨어져 기도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는 하나님과 나와 그 문제 해결에 대한 간절한 호소가 있어야 함으로 개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개인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2)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하는 자세는 무릎을 꿇는    290 \ 누가복음        

것이 정상적인 자세라 보겠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일로 겸손을 나타내는 태도입니다.
  (3)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명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영적 노동”이라고 말했습니다. 힘쓴 기도가 상달됩니다. 힘쓴다는 말은 기도의 노력입니다. 사람이 기도를 힘쓸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애쓰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애쓴다는 말은 기도의 집념에서 나온 끈기입니다. 기도에는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끈기가 없으면 기도를 오랜 시간 끌고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열의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간절하셨습니다. 기도에는 더욱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하신 그의 모습이 어떻게 비취어 지고 있는가? “땀이 땅에 떨어져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실 때 주님의 얼굴에 땀이 흐르는 모습을 이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지극히 슬픈 사연이 있어 마음으로부터 흐느낄 때 피눈물을 흘린다는 말을 쓰는 것처럼 주님의 힘쓰고 애쓰시며 더욱 간절히 간구하시는 그 모습은 피눈물 나는 모습이며 그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그 땀이야말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이처럼 간절함으로 애쓰고 힘쓰는 간구를 드릴 수는 없지만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기도할 때에는 이 같은 주님의 기도의 본을 본받아야 닥쳐오는 시험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기도는 십자가에서의 그 무서운 시험을 그처럼 장하게 이기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3.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
  예수님이 하나님께 간구하신 기도의 내용이 간단히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 여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제목은 뚜렷했습니다. 이 잔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잔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얼마 후에 자신이 짊어지실 고난의 십자가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이 같은 잔이야말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쓴 비통한 잔이 아니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잔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당신이 당하실 모든 일에 대하여 손바닥에 올려놓은 듯이 낱낱이 알 수 있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지 않으실 수 없는 그 처절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통이 완전히 두절되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걸머진 죄인의 대표로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신 것  291 \ 누가복음        

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이런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가까이 올수록 그의 마음이 착잡해진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의 인생이 당하실 큰 시험이 아니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의 육신 적인 생각은 ‘아버지, 이런 고통이 없이도 인류 구원의 사업을 하실 수 있으시거든 그 방법을 하게 해주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에게는 완전하신 인성이 계십니다. 우리의 육체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사람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이 엄청난 사건을 앞두고 고민하셨다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신 일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 사건을 당하시면 서도 아무렇지 아니하시고 마음이 평안하실 수 있으셨다면 아마 예수님을 육신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심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자기의 뜻을 밝히면서 기도하셨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이때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예수님의 기도를 도와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서 자기의 생각이나 뜻을 아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에 승리를 얻도록 천사를 보내시어 힘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도 천사가 내려와 기도를 도와주는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 예수님은 이 기도에서 아버지의 직접적인 음성으로 응답 받지는 못하셨습니다. 왜 그러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은 이 일에 관하여 아버지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민으로 인하여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기도는 하셨지만 그 기도 중에 성경에 예언된 아버지의 뜻과 자기의 할 일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깊이 깨달으시고는 큰 위로와 힘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결단하시고 기도하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기도하는 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해야 할 제자들이 피곤함과 슬픔을 인하여 그 자리에 엎어져 잠들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시며,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토록 힘써 기도하심으로 시험을 승리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지만 제자들은 시험을 앞두고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잔 연고로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요소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92 \ 누가복음

  (123) 베드로의 통곡
  (누가복음 22 : 47 - 71)  

  서 론 :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전도서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제 관원들에게 잡히시고 예언된 고난을 받으실 때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기의 때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 초대받으셨을 때 흥겨운 잔치 자리에 포도주가 떨어져 그 어머니의 말, 포도주가 없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요2:4). 이제 주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모든 일을 예언대로 이루시기 위하여 그 고난을 향하여 돌진해 나가신 것입니다. 유다가 군관들을 데려오고 제자들이 다 도망하고 베드로가 배신하고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고 주님이 골고다로 향하시는 길이 급속도로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1. 유다의 배신
  가룟 유다가 자기 스승을 판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배신을 진작 아셨지만 그가 대제사장이 보내는 군관의 무리를 거느리고 주님이 계시는 곳으로 인도해 오는 것을 보셨을 때 주님의 마음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과 애처로움이 뒤섞이셨을 것입니다. 유다는 이때까지도 자신의 배신을 숨겼습니다. 그는 지난날과 같은 모습으로 자기 스승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입맞춤으로 다가왔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그를 배신하는 일은 참으로 가증한 일이며 가룟 유다 같은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그래도 주여 주여 하면서 세상과 완전히 짝짓는 생활을 하는 일, 예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일은 차라리 덥지 않을 바에야 차라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을 모르는 일이 더 그에게 나았을 뻔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진실을 가집시다. 입으로는 유다 처럼 입맞추고 행위로는 팔아먹는 유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잡으러 유다를 따라온 무리는 대제사장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그 전날까지 만도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잡을 수 있었지만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는 고로 잡지 못하고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유다의 인도함을 받고 잡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검을 가지고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지만 주님은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주시면서 이것까지 참으로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  293 \ 누가복음        

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고 하심으로 그들의 때가 이르신 줄로 아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실패
  누가는 22장에서 베드로의 실패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에 대하여 밝히 보이시기 위해서이며 영적인 자랑이나 교만을 경계하시는 하나의 교훈 때문입니다.
  (1)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한 후였습니다. 베드로는 도망가다가 자기가 주님께 다짐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주와 같이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그는 차마 양심상 도망가기가 괴로웠습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멀찌감치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주님이 잡혀가셨으니 어찌 되시려나?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몸의 신변을 보살피는 일이 중요했으므로 자기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는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멀찌감치 뒤에 따라 부치는 것이 상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왜 이처럼 비겁해졌습니까? 그의 생명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항상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두터울수록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2) 베드로는 하속들 틈에 섞여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시 1:1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 편에 서서 주님과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옆에서 하속들에게 욕설과 놀림을 받으며 구타를 당하고 계실 때, 베드로는 자기 신변이 드러날 것이 염려되어 하속들 틈에 섞여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가든지 우리의 설자리와 우리의 앉을 자리는 분명해야 합니다. 비 신앙적인 자리에 앉아서도 안되고 세상을 따르는 무리 중에 섞여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고난의 자리든 외로운 자리든 환난의 자리든 주님이 계신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우뚝 서서 요동함이 없이 주님과 함께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3) 베드로는 드디어 자신의 연약함을 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어느 계집종 하나가 베드로를 주목하여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한번 부인한 것입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그를 보고 너도 그 당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고 부인했습니다. 두 번 부인 한 것입니다. 또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사람의 입에서 “저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다급했습니다. 더 우물쭈물 하다간 잡힐 것이 뻔합니  294 \ 누가복음        

다. 그는 힘주어 단연코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지켜보시는 앞에서, 주님이 들으시는 주님의 면전에서 이쯤 말했다면 베드로의 뻔뻔스러움도 이만 저만이 아닌 것입니다.
  이때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때 그 주님의 눈에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베드로는 불쌍히 여기시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음이 찔리고 아팠습니다. 이때 또한 닭이 세 번째 울음을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귀에 닭의 울음소리는 뜨거운 참회의 회오리바람을 몰아왔습니다. 네가 세 번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말씀은 이처럼 회개시키실 주님의 때가 이르면 우리의 마음을 찢게 하며 통회하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자신을 위장하면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이 베드로의 통곡은 귀한 통곡입니다. 그 통곡으로 회개하여 그의 믿음을 굳게 한 것입니다.

  3. 공회에서의 재판
  예수님은 재판을 받기 위해 공회로 끌려가셨습니다. 공회란 유대인들의 의회라고 불리는 종교적 최고 의결 기관입니다. 그 구성원은 백성의 장로와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으로 되었습니다. 장로와 서기관은 바리새인들이며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이요 대제사장은 공회의 의장이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논쟁으로는 서로 원수처럼 지냈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마음이 하나로 통한 것입니다. 그들의 심문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라는 것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란 곧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율법 재판에 의하여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근거를 잡은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짧은 말씀에서 주님을 판 유다의 모습을 보고,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배반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며,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였다 하여 참람한 자니 죽일 죄에 해당된다고 판결을 내리는 바리새인들의 일단의 공회원의 무리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 오직 베드로만이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는 죄에서 돌이켜 크게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베드로처럼 죄에서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눈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위하여 통곡하며 회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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