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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1장
 밤중소리  01-11 | VIEW : 572
  (116) 과부의 헌금이 보여주는 것
  (누가복음 21 : 1 - 4)  

  서 론 : 예수님이 헌금에 대하여 말씀하신 곳은 성경 중 몇 군데 안됩니다. 그러나 하신 말씀이 많건 적건 일단 그 입에서 말씀이 나왔다면 그 말씀은 우리 생활의 거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헌금을 주시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헌금에 대하여 절대 무관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보시고 관찰하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린 헌금에 축복해 주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과 관계가 없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고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은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하나님의 적수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많은 물질을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적은 사람은 물질을 드림에 심히 인색합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들어가는 데 반 세겔을 성전세로 바쳐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를 바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17:27).
  하나님께서는 헌금의 최소의 액수를 분명히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말 3:10에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헌물이란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예물입니다. 말하자면 양의 첫 새끼, 농산물의 첫 열매 등입니다. 잠 3:9에서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십일조를 바치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고 책망하셨습니다. 신앙 생활 하는데 이 같은 일은 초보적이요 기본적인 일입니다.

  2. 부자의 헌금과 과부의 헌금
  주님 앞에서 헌금한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무리는 부자들로 그들은 남보라는 듯 많은 은전을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잘못했다고 책망  273 \ 누가복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음에 한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의 돈을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렙돈이란 돈의 단위를 말하는 것으로 동전 중에 가장 적은 액수의 화폐를 가리킵니다. 생활비 전부라고 하셨으니 아마 기 천원은 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이 과부의 헌금은 주님의 눈길을 끌었고 주님으로 이 과부의 헌금을 통하여 우리에게 헌금의 자세에 대하여 교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르시기를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 보다 많이 넣었도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헌금 액수로는 지극히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칭찬을 받은 이유는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차하다는 말은 몹시 가난하고 궁색한 처지를 말합니다.

  3. 과부가 칭찬 받은 이유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란 말에서 우리는 과부의 지극히 적은 헌금이 어찌하여 주님에게 그토록 칭찬을 받을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훌륭한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풍족한 중에서 자기들의 생활에 비하여 볼 때 얼마 안 되는 헌금을 드렸지만, 이 과부는 그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하신 데 대하여 주님은 강조 점을 두신 것입니다.
  (1) 정성을 다하여 헌금했습니다. 하나님은 헌금한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것입니다. 과연 정성을 다한 헌금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헌금액수 보다도 그 헌금을 바치는 하나님께 대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드려 헌금해야 하겠습니다.
  (2)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고후9:7).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낸다는 일은 억지로는 안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색함이나 억지에는 즐거움이 따를 수 없습니다. 즐거움이 없이 억지로 많이 내는 헌금에는 시험이 뒤따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억지로 내다가 큰 시험을 받았습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사랑에는 무엇이나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는 적은 것도 아깝고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많은 것도 적어 보입니다. 이 과부의 헌금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바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둘이다 똑같은 생활 수준이요 같은 수입이라면 하나님을 누가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헌금 액수가 달라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과부는 이런 관점에서 주님께 합격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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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 누구나 하나님께 헌금할 때에는 액수의 많고 적음에 부끄러움이나 자랑을 느낄 것이 아니라 내가 드린 헌금이 얼마였든 내가 과연 이 과부와 같은 정성으로, 즐거움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드렸는가를 살펴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이 비록 적은 것이었다고 해도 이 과부처럼 드려졌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을 드린 것이며 우리 주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하나님의 기적이나 축복은 큰 것에서 일어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친 기드온의 삼 백 명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큰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떡 한 덩어리의 정성이 그들의 가정 위에 삼 년 반 동안의 먹을 양식을 공급받는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어린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려 오 천 여명의 굶주린 군중들에게 배불리 먹이는 복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 과부의 본을 본받아 바른 헌금을 드리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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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 예수님의 재림과 징조
  (누가복음 21 : 5 - 28)  

  서 론 :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더 명확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직접적으로 들려주신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연구함으로써 비록 때와 기간은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하늘의 징조로 날씨를 알아내듯 성경 적인 징조로 주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고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먼저 우리가 알아야할 사항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에 대한 것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거의 비슷한 논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4:15-31, 막13:14-27). 그런데 이 예언의 말씀 중에 특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 나오며 제자들의 질문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언제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고 하는 질문에 관한 답변형식으로 들려주신 말씀이므로 이 예언 중에는 반드시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른 70년의 로마의 디도에 의한 파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예언의 말씀을 깊이 연구해 보면 이 말씀 가운데 70년에 있었던 디도 장군에 의한 멸망사건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연구한 많은 신학자들은 대개의 경우, 이 말씀은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을 복합적으로 예언하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학설이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기존 적인 학설에 하나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연고로 서냐? 그 이유는 예수님의 예언하신 징조는 너무나도 명백한 논리에 의하여 전개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논리의 비약이나 이중적인 예언의 복합성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로마에 의한 70년대의 멸망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 전적으로 세상의 종말에 관한 예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의 분명한 질문 내용을 들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관심사인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질문을 통하여 온 인류가 알아야 할 세상 종말에 관한 예언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전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성을 바라보시고 우시면서, 날이 이를 때 원수들이 와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예언을 이미 그들에게 들려 주셨던 것입니다(눅19:41-44). 그리고  276 \ 누가복음        

주님의 징조 예언에는 예루살렘 성전 기둥에 관한 말씀은 전혀 없으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밝히신 세상 종말
  주님은 세상 종말에 나타날 여러 가지 징조에 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1)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미혹이냐?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때가 가까이 왔다고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와서 성도들을 미혹함으로 영적으로 그 생명을 죽이는 역사가 있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미혹에 대하여 성도들이 할 일은 그들을 쫓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무리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잘 분별하여 그들을 좇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전쟁과 지진과 온역 등이 전세계적으로 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이 나는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동족 상잔과 비참한 국지적인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 처처에서는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 재림 시에 있을 무서운 아마겟돈 전쟁의 모습과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는 사상 미증유의 혼란을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밝히신 이 같은 예언은 종말 예언의 총론 적인 말씀이었습니다.

  3. 주 재림 전에 받아야할 성도들의 시련
  이처럼 말씀하신 후에 주님은 주 재림 전에 받아야 할 성도들의 시련과 실질적으로 주님의 재림 시에 일어날 구체적인 사건과 그때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대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1)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는 무서운 시련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핍박을 받는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간다고 하셨습니다. 회당과 옥에 넘겨주는 일을 당할 사람은 이스라엘 경내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을 말하며 임금들과 관장들에게 끌려가는 성도들은 세계적인 성도들이 받을 핍박을 말합니다. 성도들을 핍박할 무리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며 계 9장에 나오는 첫째 화에 등장하는 황충이 들입니다. 이때 이 황충이 사상이 들어간 사람은 부모이든 형제이든 원수가 되기 때문에 성도들을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의 손에 넘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순교자도 생길 것입니다(계2:10). 그러나 이때 우리는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음으로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보호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인내하는 일입니다(계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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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예수님의 재림
  여기서 우리는 20~24절까지의 말씀을 70년대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해석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침공이(70년대)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 예언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밑도 끝도 없이 예언의 중간에 그림자처럼 비췰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 예수님의 재림과 짝을 맞출 수 있는 너무나도 명백한 성경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먼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 의하여 에워싸인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은 원수들에 의하여 여러 번 에워싸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씀하신 에워싸임은 세상 종말에 관한 일입니다.
  (2) 이 같은 환난에서 살 수 있는 길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3) 그날에는 아이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4)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백성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이방에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5)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치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연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슥 14장을 보면 여호와의 날은 주 재림의 날입니다. 내가 열국을 모아 열국과 싸우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싸움이 유브라데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이 싸움에서 적그리스도의 군대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됩니다(겔38:8-9, 14-16절). 이때 성읍이 함락된다고 했습니다.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밴 자와 젖먹이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 잡혀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에 사로 잡혀 갈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은 이 적그리스도의 군대들이 강점할 것이며 그들이 물러날 때까지 짓밟힘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계11:2).
  결론 : 이때에 일어날 자연계의 징조에 대하여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을 것과 세상 사람들이 이 같은 징조로 인하여 목도하게 될 일에 대하여 곤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 구속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속의 날이란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온전한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예언의 말씀에 나타난 징조를 통하여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종말에 심히 가까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깨여 경성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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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 무화과나무의 비유
  (누가복음 21 : 29 - 38)  

  서 론 : 예수님은 이제 종말에 있을 징조에 관한 예언을 마치시고 이런 시기를 바라보고 경성하고 기도해야 할 그리스도의 신앙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말씀 중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주 재림의 시기와 징조를 삼으신 것과 이 날을 능히 맞이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그 잎이 여름에 핍니다. 마치 우리 나라에 버들잎이 봄에 피고 살구꽃망울이 여름에 피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1) 하나는 이 말씀 그대로의 해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면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마치 무화과나무 잎이 돋우면 반드시 계절적으로 여름이 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런 징조가 나타나면 반드시 주님의 예언이 적중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증거니 그리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은 남을 속일 수 없습니다. 잎이 나면 반드시 여름이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가 세상에 나타나면 오래지 않아 세상 종말이 오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2) 또 다른 한가지의 곁들인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가정하여 그 잎이 피는 비유를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뿌리로부터 말랐지만 이제 그 싹이 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합니다. 1948. 5. 14일에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세상 종말이 이르렀다고 하는 하나의 경종 신호입니다.
  그런데 난해한 문제는 32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대개의 경우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하셨을 당시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들이 이 말씀을 듣는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세상 종말이 올 것이라고 하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적중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다음에 이 세대라고 말한 세대는 이스라엘이 회복한 후로부터의 한 세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며 이 한 세대의 길이는 약 30년이나 40년쯤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아무 무리가 없는 해석처럼 보이지만 30, 40년이 지나도 세상 종말이 오지 않는다면 이 해석도 옳은 해석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해석을 예수님 당시의 세대나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기로부터의 한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신 말씀, 이런 일이란 예  279 \ 누가복음        

언하신 종말의 징조를 말합니다. 이런 징조가 일어나는 일이 분명히 나타나면 그때로부터 세상 종말, 주님의 재림의 시기까지는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런 예언의 말씀은 진실 되며 앞으로 이 세상에 반드시 징조로써 나타날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이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히 1:1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토록 분명하게 약속하신 예언에 대하여 전적으로 믿음으로 이를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경성 하여 기도하라
  주님은 이 같은 세상 종말의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시고 다만 이 날에 임하는 모습에 대하여만 경종 하셨습니다. 이날에 임하는 상태에 대하여 주님은 그 날이 뜻밖에 덫같이 임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생활은 스스로 조심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심하지 않을 때 범하게 되는 죄 때문에 마음이 둔해지고 이로 인하여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심하지 않는데서 오는 죄는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방탕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방탕이란 사치나 세상 적인 허황된 생활을 말합니다. 자기 분수에 지나친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방탕은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둔해진다는 말은 영적인 감각이 무딘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은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다음에 술 취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술을 취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말로 술에 취하는 분별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고 또 세상 술(오락, 세상 재미)에 취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술 취하는 생활은 그 사람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생활의 염려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에 대하여 염려하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이런 염려는 그 사람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생활에 얽매이게 하고 물질에 눈을 어둡게 하고 신령한 것을 바라보는 눈이 점점 감겨져 버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처럼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언제 오신다고 할지라도 덫과 같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 종말은 어느 한구석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280 \ 누가복음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늘의 별들 사이에 깃들 지라도 그곳에서도 취하여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에는 이 땅에 병든 사람, 약한 사람, 무력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만 남아 있고 다 미국, 캐나다 등 이민을 가장한 피난들을 가지만 그러나 세상 종말에 오는 재앙은 온 지구상 모든 인류에게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슥 14장에 기록되기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며 다른 곳으로 간 사람들은 다 멸망을 받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이 땅위에 남아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 종말의 판단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해 주시라고 믿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자 앞에 서도록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인자 앞에 서도록 다시 말하면 주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란 말입니다. 마음이 둔해지지 않으려면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얼마 남지 아니한 사역을 마치시기 위하여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감람원이라고 하는 산에서 쉬시곤 하셨는데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성전에 나갔다고 말했습니다. 낮에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간다면 그 사람의 수효가 얼마인가를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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