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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장
 밤중소리  01-11 | VIEW : 880
  (112) 모퉁이 돌이 된 버린 돌
  (누가복음 20 : 1 - 19)  

  서 론 : 서기관이나 제사장들에게는 예수가 그들 눈의 가시만큼이나 미웠습니다. 이젠 직접적으로 성전에 들어오셔서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뿐 아니라 장사꾼들을 내어쫓고 강도의 굴혈을 만든다고 책망하시는 일에 이르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내어쫓을 심상으로 한가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온 것입니다.

  1.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냐
  그들은 일단의 무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리키시는 주님께 왔습니다. 군중들에게 옹위 되어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해를 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이 분노하신 모습으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 말씀을 군중들에게 가르치시는 일, 기적으로나 이적으로 병을 고치시는 일 등, 이런 것들이 그들의 눈에도 하나의 권세인 양 느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권세를 준 근원을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대답을 통하여 말의 올무를 잡아 곤경에 빠뜨리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 물음에 예수님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대답이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그들이 미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엉뚱한 질문을 오히려 그들에게 던지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의 대화에서 이 같은 반문 법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고 물어보는 상대방으로 문제의 해답을 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묘한 토론 법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이 같은 주님의 반문 적인 토론 법을 적당하게 활용한다면 퍽 유익할 것입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 이처럼 물으신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 역시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하신 일만큼이나 골치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압적으로 말릴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 많은 군중이 따랐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세례 요한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이 그들이 세례요한을 잡아죽인다면 그들은 또 자기들의 조상들 모양 선지자를 잡아죽이는 무리들로 낙인을 찍힐 것이기 때문에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헤롯왕의 손에 의하여 순교를 당하여 유대땅 안에 존재하지 아니했지만 그를 사모하는 마음은 가시지 아니하였으며 그들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지자로 확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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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이 같은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대답하기가 매우 거북해졌습니다. 서로 의논하여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의 합치를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만약 세례 요한이 하늘로서 온 선지자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의 반격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왜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한 명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거나 회개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요한이 증거 하신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너희는 왜 그가 증거한 예수를 믿지 않느냐고 물으신다면 오히려 역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일 사람에게 서라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말하자면 하나님이 보내신 이가 아니라 가짜 선지자요 군중을 혼란케 한 위선자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군중들의 매서운 돌팔매질이 겁이 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은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 같은 모욕적인 언동에 대하여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로서 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듣기 원하는 대답을 이처럼 하셨습니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자신들이 대답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왜 대답을 피하느냐고 따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지혜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이처럼 그들의 간계를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2.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비유로 그들이 장차 당신을 죽이실 일에 대하여 예언적인 교훈을 하시고 그 결과 그들이 선민의 자리에서 떨어지고 그들이 받을 특권이 이방인에게 넘겨질 일에 대하여 경종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한사람이란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포도원이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을 가리켰습니다. 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새로 주었다고 하신 것은 농부들로 비유된 이스라엘 민족으로 그들에게 이 포도원 밭을 맡기신 것입니다.
  잘 가꾸어서 기름지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그리하여 만민 중에 뛰어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의 축복을 주시려고 기대하신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포도원의 소출을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때가 이르매 그의 종들인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환대한 것이 아니라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그들의 경종을 듣지 않고 이방 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난 악한 행위를 말한 것입니다. 이 같은 그들의 일은 계속적으로 나타나 마지막에는 종 대신 아들을 보내시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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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의논한 내용을 보면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자신들이 서기관으로 제사장으로 포도원을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이 아들을 죽이면 이 같은 그들의 생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포도원 밖에 내어 좇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서 죽이는 그들의 살인적 행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그런즉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주님은 무리들에게 그런즉 그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대답을 기다릴 것이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시는 심판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심판은 주님이 돌아가신 후 40년만에 로마군에 의하여 이루어 졌습니다. 그들은 진멸을 당하여 2천년간이나 방랑하는 집시 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된 언약은 하나님께서 열매 맺는 백성에게 돌려졌는데 이방인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이때 무리들은 결코 이런 일이 있지 않기를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이 같은 일이 시편에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함이 어찜이뇨.” 건축자들이란 바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버렸다는 말은 십자가에 죽인 것을 말합니다. 돌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결론 : 이 돌은 두 가지 심판을 이루십니다. 하나는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들은 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파멸을 말합니다(요3:18). 그리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재림하실 때 이 세상 인류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건축자들이 오히려 요긴한 모퉁이 돌을 버림으로써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다 이 돌 위에 떨어짐으로써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이 포도원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뒤를 따라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하는 건축자들로 이 모퉁이의 머릿돌을 소중히 여기며 그 돌 위에 우리의 믿음의 터전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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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누가복음 20 : 20 - 26)  

  서 론 :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모함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최후적인 간계를 생각해 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여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꾸며낸 올무는 납세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으로 반로마 적인 언동을 하게 함으로 로마 총독의 법적 제재를 받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예수님은 그의 기발한 기지로 그들이 의도하는 올무를 능히 벗어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 주님의 대답을 기이히 여기게 하였던 것입니다.

  1. 그들의 질문
  그들이 주님께 한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속에 숨겨진 올무는 이렇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아래 있었는데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그들의 지배국인 로마에 일정한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일에 대하여 많은 반항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리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었던 이유도 그들이 로마정권에 아부하여 그들의 관리로써 동족의 세금을 거두어 그들에게 바쳐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질문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대답을 듣기까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다고 하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때는 바리새인들이 모든 선지자들만도 못한 위선자요 겁쟁이라고 공박하고 모략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많은 무리들과의 관계를 멀리 띠여 놓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만약 예수님의 입에서 불가하다고 하시는 말씀이 나오면 이 같은 일이야말로 그들이 노리는 함정인 것입니다. 그들은 당장에 현행범으로 총독에게 고소하여 로마정부에 세금을 내지 못하도록 선동하는 이 사람을 처벌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든 여하튼 예수는 넘어지게 되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를 아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칭찬을 잔뜩 치켜올려 논 다음에 그 입에서 말이 나오게 하려는 작전을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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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예수님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이란 그 당시 로마에서 사용했던 화폐를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 화폐에 있는 화상과 글이 뉘 것이냐,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가이사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이사란 그 당시 로마의 황제를 말합니다. 주님은 이때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도 기묘하고 의미 심장하며 무엇이라 판단하기가 난감하면서도 그렇다고 올무에 걸 수도 없는 그런 답변이셨던 것입니다.
  (1) 가이사의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화상과 글이 적혀 있는 것은 그것이 분명 가이사의 것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가 로마 황제요 그가 많은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사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롬 13:1에서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 2:37-38에서도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왕에게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는 로마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세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데나리온은 자신이 발행한 돈입니다. 그는 자기의 것을 다시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자신의 권한에 속한 문제요, 또 하나님이 허락하신 바입니다.
  (2)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란 말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는 가이사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까지라도 실인즉 하나님의 소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령한 예배는 결코 가이사의 것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가이사는 자칭 신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경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예배를 받는 존재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배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일을 간접적으로 견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아무리 로마의 지배권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가이사의 권한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이사의 것과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야 합니다. 이것은 말 3:10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론 :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권력은 가이사에게 속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그 국민들에게 세금을 부과시키며 여러 가지 의무 조건을 내세웁니다. 우리는 이 가이사의 권력인 국가권력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265 \ 누가복음        

주는 생활이 한 국가의 백성으로서 응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원칙에 대해서 분명한 선을 그려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에 세금을 낼 줄을 알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어기는 일은 바른 신앙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것을 바치지 않거나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이사가 자기의 것을 반드시 법률로서나 강권적인 방법으로 찾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바치기를 꺼리는 것에 대하여 당신의 것에 대하여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모순되는 듯하면서 그렇지 아니한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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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부활에 관한 논쟁
  (누가복음 20 : 27 - 40)  

  서 론 : 예수님이 살아 계셨던 당시, 유대교는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보수적인 바리새파이고 다른 하나는 혁신적인 사두개파입니다. 성경에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와 있으며 특히 예수님과의 모든 논쟁의 대상이 된 사람들 역시 이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래도 성경대로 믿으려는 사람들이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옹호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신앙적인 면에서는 이들과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에는 부활에 대한 어떤 뚜렷한 말씀이 나와 있지 아니합니다. 그런 중에 부활을 믿고 부활의 신앙을 갖는다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말씀하실 때, 그의 제자들까지도 그 같은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신 25:5 말씀을 근거하여 부활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도 바로 이 같은 근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두개인들에게 부활 신앙은 하나의 신비적인 신앙으로 비 성경 적이라 하여 배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예수님을 성경 적으로 곤경에 집어넣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기 위하여 한 가지 질문을 짜낸 것입니다. 이 질문은 신명기 25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임으로 매우 성경 적이었으며 무엇으로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는 혈통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형이 후사가 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기업으로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부터 막내까지 자식이 없음으로 한 여인을 그들의 아내로 삼고 마지막에는 그 여인마저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한 여자에 남편은 일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면 부활 때에 이 여인은 어느 남자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 질문이야말로 참으로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이 질문을 던져 놓고 아무리 예수라도 이젠 꼼짝없이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답하는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놀라운 부활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만약에 이들의 이 같은 질문이 없었던들 우리는 우리 주님의  267 \ 누가복음        

이 주옥같은 진리에 대하여 듣지 못했을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1) 부활의 상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활의 상태가 첫째로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는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집 장가가는 일은 인류의 번식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혼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의 위로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은 인류의 번식이나 위로가 필요 없습니다. 다시없이 영화로운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다시 죽을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한 몸은 다시 죽을 수 없는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은 곧 부활을 말합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몸으로 영원히 삽니다. 천국은 부활한 몸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3) 천사와 동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영광과 존귀는 천사보다 월등히 앞서며 다만 그 존재가 동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천사는 분명히 영적 존재입니다. 그들에게는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인간적인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많은 신학자들은 창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여 천사와 사람의 딸과 결혼함으로 세상에 죄악이 관용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모순도 이만 저만이 아닌 것입니다. 영적 존재인 천사에게는 임신하는 일에 필수적인 남성의 정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부활의 몸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놀라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천사와 동등한 존재로 영원히 영화롭게 할 수 있는 확실한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3. 부활에 관한 구약의 증거
  주님은 부활이 있다고 하는 성경 적 근거를 출애굽기 3장에서 찾으시고 하나님을 칭하기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기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칭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 있는 사람이 아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비록 육신 적으로는 무덤에 누워 있지만 그들에게는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 죽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구속당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사람을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육신이 무덤에서 잠자는 상태를 하나님은 죽었다고 보시지 않는 것입   268 \ 누가복음      

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죽은 자를 가리켜 잠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 5:28에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는 분명히 부활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증거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적 자들에게 공격하거나 증거 할 무기는 반드시 성경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들어내심으로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의 논증은 위대했습니다. 어느 누가 이처럼 명백하게 그들의 질문에 답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이런 대답을 들은 서기관들은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이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성경 적인 진리 면에서는 예수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과 죄로 인한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사두개파 사람들과 손을 맞잡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진리에 굳게 서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69 \ 누가복음

  (115) 다윗의 자손이냐, 다윗의 주냐
  (누가복음 20 : 41 - 48)  

  서 론 :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만 육신 적인 신분에 관해서만 알고 있을 뿐 영적인 신분에 관하여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만 다윗의 육신 적인 자손으로 오실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애굽에 갑자기 나타나서 하나님의 권능과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출해 낸 것처럼 다윗 왕의 혈통으로 오는 메시야는 이 같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메시야의 왕국을 세울 줄로 알고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사상은 끝내 그들 앞에 나타난 진짜 그리스도를 가짜로 여기게 되었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런 사상을 뜯어고치기 전에는 바른 메시야 관을 가질 수 없다는 뜻에서 영적으로 깊은 진리에 속하는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1.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
  마태는 그의 복음서 1: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이곳에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했습니다. 혈통을 존중하는 이스라엘에게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 성경에 언약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려고 벽두에 족보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같은 기록은 사실인즉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눅1:27). 요셉은 분명히 다윗의 혈통적인 자손이지만 그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은 그의 혈통적인 자손이 아니십니다. 아내인 마리아가 처녀인 때 이미 잉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족보상으로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다윗의 자손에 대한 약속은 성경 여로 곳에 나와 있는데 두드러진 기록을 보면 사 11:1-4에 있는 이 말씀입니다. 이새란 다윗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며 그 줄기에서 나온 다는 말은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실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3:5에서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킨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30: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아예 다윗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당시에 다윗 왕은 죽은지 벌써 오랜 때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13:22-23에서 예수를 다윗의 씨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언은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바른 세상을 가지지 못하게 한 하나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로 예언하신 임마누엘의 참뜻을 이해  270 \ 누가복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사7:13-14). 처녀가 잉태하는 일에 대하여 그들의 메시야와 전혀 관련을 짓지를 못한 것입니다. 다윗의 왕권으로 오실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나다나엘이 말했고 예수를 가리켜 목수 요셉의 아들이냐고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으며 베들레헴 땅에서 메시야가 태어난다는 예언을 알면서도 그 당시 그곳에 메시야가 나타날 만한 신통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이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해하기는 고사하고 네 나이가 아직 오십이 안되었는데 미친소리가 아니냐는 투로 조롱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그리스도 관이 바뀌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기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성경적 인 바른 신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다윗이 주라 부른 그리스도
  성경을 삶의 경전으로 여기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바른 해답을 주려면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관한 바른 해답을 다윗이 직접 성령의 감동으로 받은 예언을 통하여 증거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시 110:1에 있습니다. 내 주에게 라는 말에서 '주'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주란 말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십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예언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일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해 왔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의 인용은 그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반문했습니다.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인성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나타내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성이 그의 성품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이 그의 원래의 성품이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찬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의 위대하심과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서기관들을 경계하라고 하심
  이 말씀을 듣는 무리에게 서기관들에 관한 경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교만과 탐심과 외식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오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그들의 오도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긴 옷을 입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이유는 그 옷깃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다니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가  271 \ 누가복음        

장 성경을 많이 읽는 것으로 자랑하였고 존중히 여기는 것으로 과신한 것입니다.
  (2)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남에게 존경받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3) 그들은 회당의 상좌에 즐겨 앉았습니다. 교회에서 높임 받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가 되는 길은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는 원리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4) 잔치 집에 가면 상석에 않기를 즐겨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세상 영광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실상인즉 과부의 가산에 눈독을 들여 탈취하며 기도할 때도 길거리나 회당에서 길게 하는데 그 기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기도라고 신랄히 비난하신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세상 사람들을 나무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를 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며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지도자이기 때문에 이처럼 책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들을 때 속히 깨달아 죄악의 길에서 돌이킬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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