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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장
 밤중소리  01-11 | VIEW : 431
  (108) 세리장 삭개오
  (누가복음 19 : 1 - 10)  

  서 론 :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잃어버린 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이 기록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무엇이며 참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사모한 삭개오
  삭개오란 사람은 원래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가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에게 죄인이라고 경멸 당한 이유는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로마정부의 세관에서 일했을 뿐 아니라 높은 벼슬을 가지고 있었고 그같은 직분 덕에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데 있었습니다. 그는 처세와 돈을 버는 일에 대단한 재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게 한가지 신체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는 아주 키가 적은 난쟁이 측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토색한 재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항상 마음에 걸렸고 가난한 자를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한 일에 있어서 그 세리는 아마 이 삭개오의 경우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부자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마음에 평안을 얻지는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때마침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시게 되었는데 이 소문이 온 여리고에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보기 위하여 길거리로 나왔으며 세리장 삭개오도 나온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보기를 얼마나 갈급했으며 그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는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그는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많고 키는 작아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조급했습니다. 이때 한번 뵙지 못하면 한평생에 예수를 볼 기회가 없을 줄 알고 결사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입니다. 여리고 성에서 삭개오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세리장으로도 유명하거니와 부자로서도 이름이 나 있고 더군다나 난쟁이로서도 심심지 않게 알려져 있어 그의 이름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삭개오가 그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그리고 어린이들도 많이 있을 그 자리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뛰어 다녔으니 그의 모습을   250 \ 누가복음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씩씩거리며 웃음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사모하는 사람은 그까짓 남의 비웃음이나 이웃의 웃음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라 그를 위하여 죽는 것도 내가 유익함이라”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그까짓 주위의 동정에 신경쓸 것이 없는 것입니다.

  2. 삭개오를 부르신 주님
  삭개오는 길가에 있는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체면이나 인격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를 만나려는 심정이라면 자신의 사회적인 체면이나 남이 판단하는 인격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를 만나려고 하는 일념만이 있을 뿐입니다. 삭개오가 그러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대로 지나쳐 가시지 않으시고 삭개오가 있는 쪽을 우러러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과 삭개오와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미 삭개오가 그 뽕나무에 올라가 있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길을 걸어가시던 주님이 뽕나무 위를 우러러 보셨다는 것이 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내 양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인 삭개오의 이름을 모르실 리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양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 역시 우연히 뽕나무에 올라간 것은 아닙니다. 이에는 성령의 역사가 따랐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간절함을 주시고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로 그리스도 앞에까지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삭개오는 이처럼 필연적인 연유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만남도 이런 것입니다. 그곳에는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있었고 잃은 양을 목자에게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따랐던 것입니다.

  3. 삭개오의 태도
  이 같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삭개오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한 것입니다. 나를 찾으시려고 이 뽕나무 밑으로 나오신 주님의 그 은혜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생각할 때 어찌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급히 내려오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는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평생 처음 마음에 기쁨이 넘쳤고 평안이 깃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게 되면 이 삭개오와 같은 기쁨과 평안이  251 \ 누가복음        

깃들 줄로 믿는 것입니다. 다음에 삭개오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삭개오의 영접은 그의 심령의 영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집에 모시고 가서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해 드린 것입니다.

  4. 삭개오의 회개
  주님을 영접한 삭개오는 기쁨으로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19:8). 세리란 남의 것을 토색하지 않을 수 없는 직업입니다. 아마 삭개오는 많은 사람에게 4배씩이나 갚을 보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돈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주님이 돈보다 더 자기에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주며 평안을 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결단이야말로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 회개한 회개의 열매인 것입니다.
  회개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삭개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원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만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양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을 만나 다시 아브라함의 자손의 자격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데 삭개오는 이런 믿음으로 회복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삭개오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일에 있어서 주님을 영접하는 일에 있어서 회개의 열매를 맺는 일에 있어서 그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삭개오의 기쁨과 평안이 우리에게 깃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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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 하나님나라에서의 상급
  (누가복음 19 : 11 - 27)  

  서 론 : 구약 적인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이나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하여 전혀 구별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장에 영광 중에 나타나는 메시야를 기다리고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하나님의 큰 권능을 가지고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축으로 하는 메시야 왕국이 이 땅위에 세워질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드려도 제자들은 그 말씀의 참뜻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당하실 고난을 생각하시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디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제자들도 그들의 선생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그들의 왕국이 세워지는 것으로 알고 몹시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한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비유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세워지는가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교훈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를 액면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은 말씀의 시초부터 한 비유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1. 예수를 따른 자들의 하나님 나라 관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 가지 형태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재 하시며 그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심판 후에 이 땅에 세워지는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이 만 왕의 왕으로 친히 온 땅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천국 역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는 영원토록 그를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이 바라고 금방 나타날 줄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먼저 고난을 받으신 후 그 다음에 오시는 메시야가(재림) 영광의 메시야로써 그들의 왕국의 지배자인 사실에 대하여 캄캄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어두운 눈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셨으니 이제야말로 정말로 하나님  253 \ 누가복음        

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알고 승천하시려는 주님께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고 물었던 것입니다(행1:6). 주님이 이곳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땅위에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왕국, 다시 말하면 천년왕국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2. 주님의 비유
  주님은 이 같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 중에 몇 가지 상징적인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귀인, 먼 나라, 왕위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귀인이란 주님 자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먼 나라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온다는 것은 주님이 왕권을 가지시고 심판 주로 오실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많은 나라의 왕들은 로마황제에게 가서 왕권을 받아와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헤롯도 그러했고 헤롯왕의 사후 그 아들 아켈라오가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 유대왕의 직위를 받아온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 나라인 하나님께로 갔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주의 자격을 얻어 만 왕의 왕으로 올 때 그때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입니다.

  3. 종들에게 각각 사명을 주심
  주님은 그때까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열심히 주님의 명하신 일을 해서 그날에 이르러 주님을 만났을 때 상급을 얻을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할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종 열 명을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열 명은 완전수로 혹은 하나님의 종을 가리킬 수도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각기 은 한 므나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므나는 은전의 명칭인데 헬라의 화폐를 가리킵니다. 데나리온은 그 당시 로마의 화폐를 가리켰습니다(원, 엔, 달라 등과 같은 이치).
  한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가 하루 일한 삯으로 받는 대가를 말합니다. 하루에 만원을 받는다면 한 데나리온은 만원을 가르킵니다. 그런데 한 므나를 데나리온으로 환산하면 100데나리온이며 약 100만원에 해당된다고 보겠습니다. 마 25장에 나와 있는 달란트의 사명에 비하여 그 내용은 같아 보이지만 화폐의 이름이나 그 액수의 차이가 많으며 막 25장에는 제각기 재능대로 준 액수가 다른데 그곳에서는 다 똑같이 나와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슷한 비유를 겹쳐서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주시면서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주님의 재림 시까지 장사하는 것 같은 정성과 충성으로    254 \ 누가복음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사란 말을 해석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 주님의 양을 치는 일, 죽도록 충성하는 일 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돌아온 후의 내릴 상과 심판
  그 귀인이 왕권을 가지고 돌아온다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은 만 왕의 왕의 왕권을 가지시고 반드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돌아오시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장사하라고 명을 내린 그 종들에 대하여 반드시 회계한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5:10).
  (1)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하여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주의 일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의 많은 열매는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에게는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가 상급으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입니다.
  (2)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인생을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간 사람입니다. 맡은 사명을 소홀히 함이 없이 충성했습니다. 그에게는 다섯 고을 다스리는 상급이 떨어졌습니다. 주님의 상급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고전15:58).
  (3) 그런데 그중 한 종은 한 므나 그대로 내 놓았습니다. 이 사람은 한평생 주님을 위하여 아무런 보람있는 일도 못했습니다. 맡은 사명을 고의적으로 피하기도 하고 탐탁지 않게 여겨 육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는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주님 앞에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는 있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결론 : 주님은 결론적으로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있다는 말은 열매를 말합니다. 순종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받는 축복이 찾아갑니다. 그러나 없는 자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원치 않는 모든 자들, 주님이 왕 됨을 바라지 않던 모든 불신자, 복음을 거슬리는 유대인들, 이들 모두는 그날에 주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고야 말 것임을 경종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장사하여 몇 므나를 남겼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한 일을 잘 헤아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칭찬 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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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누가복음 19 : 28 - 48)  

  서 론 :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 따르는 무리들에게 크나큰 관심과 흥분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을 비롯하여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진행된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입성에 대하여 이토록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것은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했다”했다고 했습니다(37절). 그리고 그들의 찬양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란 것이었는데 이 말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영광의 메시야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지만 그들이 예상한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 정죄 받아 빌라도의 법정에 선 모습을 보고는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눅23:21).

  1. 예수님의 입성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먼 나라로 가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셔야 했으며 그곳에서 다시 오실 때야  말로 만 왕의 왕으로, 심판 주로 다시 오시게 될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은 영광의 메시야로 영접했지만 그러나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만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평의 상징입니다.
  (1) 주님은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는 뜻에서 나타낸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나귀 새끼를 탄 겸손한 왕은 영광의 메시야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광의 메시야의 모습은 엄위하신 심판주의 모습이어야 합니다(계19:11-16, 슥14:1-9).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미 모든 일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수 백년 전에 스가랴를 통하여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응할 줄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라 하거든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의 말씀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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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일은 감람산에서 가까운 벳바게와 베다니 동리에 가까이 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벳바게란 무화과나무 집이란 뜻이고 베다니란 어부의 집이란 뜻입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나사로와 그의 형제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동리로 이 동리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 형제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주님은 그들을 가끔 찾아가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귀가 바로 이들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누구의 것이건 이미 성경에 예언된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참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2. 무리들이 환영함
  주님은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환영한 동기야 어떠하든 주님은 장차 만 왕의 왕으로 오실 영광의 왕이시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받으시기에 당연하고 합당한 환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그들의 환영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받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바리새인들은 시기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주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끊임없이 찬양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찬양이 끊기면 길가의 돌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찬양할 것입니다.

  3. 성을 바라보시고 우신 예수님
  주님은 성 가까이 오시자 성을 바라보시고 우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시면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9:41-44).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아직 영의 눈이 어두워서 성경에 기록된 평화에 관한 일을 몰랐던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일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야 할 평화란 사죄의 은총이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요, 영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워 이 같은 사실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마음은 완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받을 무서운 재앙에 대하여 예언하셨습니다. 장차 원수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키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예언은 이 말씀을 하신 지 40년이 채 못되어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하여 문자 그대로 이루어짐으로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의 비운을 당하게 되   257 \ 누가복음      

었고 그후 계속 2천여 년간 세계에 유랑하는 슬픈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같은 심판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시어 그들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셨지만 그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역하고 오히려 그들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하시는 날입니다. 이날을 우리가 소홀히 여겨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저버린다면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주님을 평화의 왕으로 우리 마음속에 진심으로 환영합시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찬양으로 노래하며 영광을 돌립시다. 지금은 은혜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 이 권고하시는 날에 우리가 주님을 거역하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장차 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날 그의 무서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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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성전 청결
  (누가복음 19 : 45 - 48)  

  서 론 : 성전이 더럽혀지면 그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연유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 생활의 기초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더럽혀 질 때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말할 수 없는 손상을 입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내리시는 진노가 우리들의 가정 생활에까지 미친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교회는 깨끗하게 보존하고 거룩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강도의 굴혈이 된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후에 그들의 부패상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예언하신 대로 그 성이 원수들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1. 성전이 왜 더러워지는가?
  지상에 존재하는 성전은 천사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곳이 아닙니다. 언제나 더렵혀질 여건이 생깁니다. 주님은 가라지의 비유에서 교회에는 원수가 심어 놓은 가라지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뽑지 말고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세속화나 부패는 그 시초가 이 가라지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마13:24-30).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악한 누룩과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헌데 바리새인, 서기관들, 제사장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함께 썩은 것입니다. 그 부패의 양이 채워지면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집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하는 작업을 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는 마치 멸망 직전의 예루살렘 성전 모양 타락의 길을 내닫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향해 자랑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은 이 성전의 기둥하나도 남김이 없이 무너지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모든 교회는 물량주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 매머드 교회, 초 현대시설의 웅장한 교회를 자랑삼고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정 수입을 교회 운영의 제일로 삼고 있습니다. 물권주의입니다. 서로 사랑으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분쟁으로 교단마다 싸움질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본위가 아니라 돈과 인물 중심의 모임으로 파벌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기도의 불이 꺼져 있습니다. 기도하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성령의 등불이 꺼져 있습니다. 주님이 이 같은 교  259 \ 누가복음        

회에 오셔서 둘러보신다면 무엇이라고 표현하실 것입니까? 아마 2천년 전 예루살렘 성전에 들르셔서 채찍을 가하실 때 하신 것처럼 “너희는 하나님의 교회를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책망하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3.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주님은 성전을 가리켜 내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은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의 성전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지리적 처소를 말합니다. 우리들의 예배처소인 교회도 하나님께서는 내 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집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어떤 곳이 되기를 주님은 바라십니까?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영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우리는 성전이야말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장 적합한 장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산에서 하는 기도도 좋고 골방에서 하는 기도도 좋지만 가장 바람직한 기도 장소는 하나님께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성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애초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을 때 그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처소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왕상8:30-40).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변질시키면 안됩니다. 기도하는 집을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는 일은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일입니다. 강도란 곧 마귀를 상징합니다. 기도가 없는 교회, 기도의 목적에서 이탈된 교회, 세속에 물든 교회는 이미 마귀의 소굴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결코 강도의 굴혈이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는 집으로서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날마다 가르치심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주간에 성전에서 모인 무리들을 향하여 날마다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가르치시는 선생이십니다. 우리들도 다 그분 예수께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공부입니다. 세상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배우는 곳도 아닙니다. 말씀의 가르침이 없는 교회는 교회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결론 : 우리는 기도하기 위하여 얼마나 교회를 찾아 나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하여 얼마나 사모합니까?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고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말씀의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은 이 같은 교회에 내려주시며 이런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가정 위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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