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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장
 밤중소리  01-11 | VIEW : 516
  (102) 기도의 두 가지 원칙
  (누가복음 18 : 1 - 8)  

  서 론 :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날부터 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일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원칙을 두 가지로 밝혀주셨습니다. 하나는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기도하되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기도에 대하여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님은 한 재판장과 한 과부의 경우를 예로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1. 재판관과 과부
  어떤 도시에 있는 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 주님은 이 비유에서 불의한 한 재판관을 하나님과 비교하여 말씀하셨는가? 이 말씀은 ‘하물며’에서 해결됩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하나님 일까보냐”는 논법으로 적용하시기 위하여 그러하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이 재판관이 얼마나 방약무인하며 불법적이며 몰인정하며 교만한가에 대하여 강조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원한이 있는 한 과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하고 의뢰할 곳이 없으며 무력한 사람으로 등장시키셨습니다. 두 사람의 인간성과 그 처지가 이러하므로 이 과부가 그 재판관에게 간구하는 것은 도저히 응답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과부가 한 간구의 특징
  주님은 이 비유에서 불의하고 교만한 재판관이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비결에 대하여 이 과부의 계속적인 간구를 들었습니다. 이 재판관은 “내 원수에 대한 내 원한을 풀어주소서”하는 이 과부의 간구를 얼마동안 듣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의 끊임없는 간구는 그를 심히 괴롭게 만들기에 족했던 것입니다. 그 재판관은 이처럼 스스로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이 과부의 간구는 재판관을 번거롭게 해 준 것입니다. 사람은 번거로운 것을 싫어합니다. 그는 자신의 직책상 이 과부를 만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부는 억울한 사정을 고소한 사람이요 재판관은 그 문제에 대하여 판결을 내려 주어야 할 사   233 \ 누가복음        

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 간구를 듣지 않으려고 해도 이 여인은 막무가내 자신의 간구를 그치지 않고 늘 찾아와 올리기 때문에 귀찮아 죽을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재판관은 이 같은 일을 통하여 많은 괴로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 재판관은 이 같은 일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과부의 소청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입니다. 그것은 재판관이 의롭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 여인의 사정을 들어주고 싶은 불쌍한 생각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자기가 번거롭고 괴로움을 당하기가 싫어서 들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자세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과부와 같이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번거롭게 해 드리는 기도란 기도를 하되 항상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응답이 더디면 기도의 자세가 움츠러듭니다. 이 문제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의심을 품게 되며 기도의 힘을 상실하고 그만 그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한번 하나님께 간구하리라고 결정했으면 그 문제의 응답을 받기까지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과부의 기도제목을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이 기도 제목은 이 여인의 절박하고도 절실한 호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꼭 반드시 하나님께 응답 받지 않으면 안될 필수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원한을 풀 분은 재판관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이 문제를 재판관에 들고 간 것처럼 우리가 반드시 해결보지 않으면 안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문제 해결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면 기도가 응답 받기까지 끊어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 드릴 정도로 기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음에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괴롭혀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열정적으로 간구하는지, 어찌 쉬지 않고 간구하는지 그 간구를 듣는 일 조차 괴로움을 당하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응답이 더디다고 하여 낙망치 말고 괴롭혀 드릴 정도로 기도를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거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또한 괴롭게 여기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다만 그 같은 자세로 간구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3. 하물며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이처럼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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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하신 말씀에서 택하신 자들이라고 하신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의 자녀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을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밤낮 부르짖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기 위해서는 밤낮 부르짖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원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간절한 호소를 말합니다.
  결론 : 주님은 풀어주시라고 하셨습니다.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래 참으시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치고 넘어지기까지 물리치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의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찾아 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악이 관용된 세상에서 세속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만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대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저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부르짖어 응답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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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누가복음 18 : 9 - 14)  

  서 론 : 주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지나치게 자기의 의를 나타내며 남을 정죄하고 자기를 높이는 일을 서슴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1. 바리새인의 기도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따로’란 말은 별도로 란 의미로 그는 기도할 때에도 세리 같은 죄인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따로 기도한 것입니다. ‘바리새’란 말은 원래가 분리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들은 기도할 때까지라도 분리를 철저하게 보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란 것이 자신들은 의롭다고 하는 감사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잃은 양의 비유에서 하늘에서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회개한 죄인 한 명을 인하여 더 기뻐하라고 하셨는데 그 의인이란 바로 이런 바리새인들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기준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의로운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종교적 행사를 빠짐 없이 실시하고 있는 일을 의로운 행실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의의 조건으로 여겼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 자신은 그 같은 죄인이 아닌 사실에 대하여 감사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회개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는가 짐작이 가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의인들에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가 어찌 필요했겠는가 너무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의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란 흠과 티가 없는 완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으로 태어나는 인류 중에는 의인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표준으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표준  236 \ 누가복음        

에 미달하는 죄인들은 오직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 감사할 자가 있겠는가. 다만 그 앞에서 송구할 뿐이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회개만이 나올 뿐이 아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의 온전한 의를 이룰 수 없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찾아야 할 것이었지만, 그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 의를 이루려는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의 의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도 얻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3. 세리의 기도
  우리가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으려는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요 세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으려는 이방인을 가리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리가 기도한 그의 태도와 결과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갈보리에서 바라볼 때 누가 감히 눈을 우러러 바라볼 자가 있겠습니까? 죄 값은 사망이요, 나의 이 같은 죄와 허물이 결국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이 같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 앞에 감히 눈을 우러러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감사 때문입니다. 감격 때문입니다.
  (2) 세리는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가슴을 친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참을 수 없는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입니다. 죄인들이 이때 가슴을 치는 애통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회개입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밑에 엎드린 심령이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기도는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는 고백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 자기 의를 주장하며 다른 형제를 판단하여 자신의 선함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4. 하나님의 판결
  하나님은 이 두 사람 중에 과연 누구에게 의의 선포를 내리셨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란 세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리에게 의를 주셨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237 \ 누가복음        

죄를 통회하여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의를 선고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 주님은 결론적으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스스로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주십니다. 구원을 주십니다. 평안함을 주십니다.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면 하나님은 그를 낮추십니다. 음부에까지 낮아질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세리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낮추는 방법이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통회하며 그의 자비와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은 이 아침에 세리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오셔서 하나님의 찾으신 바 되어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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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천국과 어린아이
  (누가복음 18 : 15 - 17)  

  서 론 : 천국은 어린아이들에게도 필요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들은 종교에서 예외적으로 제외되어 왔습니다. 우리 주님은 기독교와 어린아이들과의 관계를 명시하심으로 어린이들도 믿음으로 의를 얻으며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인격이 교회에서 존중되었고 오늘날 교회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유년 주일학교의 부흥은 참으로 놀랄만한 것입니다.

  1. 제자들의 꾸지람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주님께 가까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안수하심과 축복 기도를 받기를 원해서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음으로 주님 곁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가뜩이나 분주하고 번거로운 선생을 어린아이들로 말미암아 더 귀찮아 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말하자면 어른들도 제대로 가까이 오지 못하며 말씀을 듣거나 기도 받는 일에 심히 어려운데 얘들까지 달라붙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과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신 줄로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인격적으로 상대가 안될 대상이라고 여겼으며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인 줄로 알았으며 복음을 전할 대상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생각과 행동은 즉각적으로 주님의 심한 꾸중을 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금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이제 교회에서 어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엿한 성도로서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주님의 놀라운 말씀은 다시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이 들어가는 나라이며,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못하면 어른들이라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신 점입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어른들만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어린이들도 들   239 \ 누가복음        

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역시 어린이들의 마음  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들도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귀히 여기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대접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 주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구원하신 백성들이며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이신 것입니다.
  어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똑같이 어린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생명만 귀중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생명도 똑같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복음을 듣는 기회가 어른들의 경우에 비하여 적기 때문에 믿는 사람의 가정에서 자기 자녀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신6:6-8).
  (2) 주님은 어린아이를 가까이 세우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신 것은 그후에 말씀하신 것처럼 비록 어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라를 어린아이들과 같이 받들지 아니하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뜻입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들의 성품과 복음을 듣고 믿는 일에 있어서 단순하며 듣는 대로 잘 받드는 태도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① 어린이들은 전하는 대로 믿는 영적 단순함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세상 재물이나 정욕이나 탐식이나 음란의 죄악성이 아직 깊이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는 대로 믿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어린이들은 무엇이건 단순하게 받아들입니다. 진실을 말하면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거짓을 말하면 또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잘못된 것을 가르치면 잘못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복음을 전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③ 그들은 일단 복음을 받아들이면 믿음으로 잘 자라나며 하나님의 나라를 잘 섬깁니다. 잘 받드는 것입니다.
  결론 : 여기서 주님이 우리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심령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믿고 그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며 그 나라를 받드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고 하시는 교훈이십니다. 이런 심령은 어떻게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회개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 질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잘 대우해 주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심령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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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 한가지 부족한 것
  (누가복음 18 : 18 - 23)  

  서 론 : 한 부자 청년이 큰 번민에 싸였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관원이란 아마도 ‘산해드린’ 의원을 가리키고 있는 듯 싶습니다. 그는 큰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해온 견실한 모범적인 청년으로 보입니다. 그가 하루는 주님을 찾아 와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 모든 사람이 똑같이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청년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해답을 받았으며 그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1. 영생을 갈망한 청년
  이 청년은 영생을 갈망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하는 영적인 기갈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돈만 가지고서는 인생의 만족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돈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돈이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로 알지만 실상 돈이 들어오고 보면 인생의 갈증은 더한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지켜오고 자기 자신은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영생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보여주고 그 죄를 정죄하는 것이지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의 마음에 영생의 확신을 주거나 평안함을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의 고민은 견딜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는 처신은 참으로 잘 한 일입니다. 그는 바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참 생명의 길에 들어 설 수 있는 해답 자를 만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이 청년과 같은 애타는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 나오는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으로 찾아 나온 것입니다.

  2. 청년이 생각한 예수
  그런데 이 청년은 처음부터 무엇인가 잘못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던진 질문 중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이처럼 예수님을 부른 것입니다. 이 청년은 예수가 참으로 누구이신 지 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은 들었고 그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들었지만 그가 생각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선한 선생님으로 서였습니다. 그는 예수야말로 자기보다 더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의 교훈에는 무엇인가 뜻깊은 것이 있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선하신 분이시고 그의 교훈은 인생들에게 새로운 교훈으로 아마 영  241 \ 누가복음        

생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바른 해답을 줄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계실지 모른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질문했습니다. 여기서 이 청년은 특히 구원 문제를 행위에 결부시키고 있는 사실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하나이까? 그는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그 행함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보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모순인 것입니다.

  3. 주님의 답변
  주님은 이 청년을 사랑스럽게 보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래도 이만한 인생의 고민을 안고 영생의 길을 찾아 나선 그를 대견스럽게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생이 어떤 행함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 전에는 영생의 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네가 계명을 아나니” 하시면서 율법의 조항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은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대인관계의 계명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리 하셨습니까? 대개의 경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완벽하다 시피 잘 지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자기는 어려서부터 그런 것은 잘 지켜오고 있다고 대답하면서 뭐 다른 교훈이 없는가? 자기 마음의 갈증을 해갈해 줄 수 있는 참된 교훈이 업는가? 이런 식으로 다음 답변을 기다린 것입니다.

  4. 한가지 부족한 것
  주님은 이때를 놓치지 아니하시고 “네가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그 청년에게 부족한 한가지 사실을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을 풀이하는 학자들마다 그 견해가 형형색색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든지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에서 보이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청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부족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돈 때문에 영생을 갈망하는 주님의 바른 해답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옳다고 여기면서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생의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실상인즉 율법의 참된 정신을 저버리는 생활을 해왔다는 것을 주님은 그에게 가리키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242 \ 누가복음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22:37-39). 이 청년의 경우 이 같은 율법의 정신을 저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그의 재산을 버리게 하는 길 외는 없었습니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사랑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침륜에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할 때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청년은 우선 돈의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 : 결국 그 청년은 돈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에게 부족한 한가지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알면서도 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눅13:24). 그는 자기의 부족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돈의 위력은 막강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시고 하나님과 겸하여 돈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생을 사모해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의 길이 막혀져 있고 하나님 나라의 문에 굳게 닫혀져 있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43 \ 누가복음

  (106) 부자와 하나님나라
  (누가복음 18 : 24 - 34)  

  서 론 : 부자가 하나님이 나라에 들어가기가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 적인 역사를 시사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진의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재물이 많은 한 부자 청년이 영생을 바라보고서도 그 길을 버린 사실을 바라보시면서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실물교육이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왜 어렵다고 하셨습니까? 물론 이 말씀은 아직 믿지 않고 있는 중생이 안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가 소유한 재물이 하나님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재물이 곧 그들의 하나님입니다. 말하자면 재물이 그들의 섬기는 주인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 자신의 절대적인 주인을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같은 사실을 방금 부자 청년의 경우를 통하여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해석하는 일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문제가 따릅니다. 이 말씀을 어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는 ‘침공 문’이라고 하는 작은 문이 있는데 약대를 가지고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짐을 부리고, 다음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통과되는 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같은 문이 있건 없건 이 주님의 말씀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강조하시는 비유적 설명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비유적 설명은 간혹 성경에 나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겨질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시는 하나의 비유적 설명이신 것입니다(마17:20).

  2.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천국에 들어갈 자가 누구이겠느냐고 즉각적으로 묻게 된 것입니다.   244 \ 누가복음        

그들이 이렇게 물은 것은 그들이 부자여서가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부자 되기를 바라고 살아가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한결 같이 천국에는 들어 갈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은 부자 되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에 혼선을 빚은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부자라고 무조건 다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어가게 하시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천국에 들여보내실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는 일입니다. 회개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회개케 하지 아니하시면 회개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회개시킵니까? 이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전권 적인 주권에 속하신 문제일 뿐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그 사람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다 흩어버리게 하시는 방법으로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방법도 하나님만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실 수 있는 방법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재물과 가족을 버리는 자의 축복
  이때 베드로가 재빨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물을 버리고 주님을 뒤쫓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그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말씀하셨습니다(29-30).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다는 말씀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축복을 받게됩니까? 금세의 축복으로는 여러 배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영육간의 복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가족의 구원, 가정의 평안, 온 가정의 축복 등 여러 가지로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 내세의 축복으로는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인생 최대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적으로 일한 사람들의 상급은 분명하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멀리하면서까지 부자가 되려는 욕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가장 귀중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모든   245 \ 누가복음        

것을 버리고서라도 주님을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집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버리고, 가족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버릴 수 있는 신앙적인 자세나 결심은 우리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데 이 세상에서도 여러 배의 축복을 받고 내세에는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당하실 고난을 알려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바치는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으셨습니다. 그는 죽으시고 그후에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을 깨닫는 제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고난으로 그에게 어떤 보상이 온 것입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빌 2:6-11). 우리도 주님이 말씀하신 이 언약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고난을 짊어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롬 8장에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246 \ 누가복음

  (107) 한 소경거지의 간구
  (누가복음 18 : 35 - 43)  

  서 론 : 주님이 여리고로 가실 때의 일입니다.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 자신의 인생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 받은 사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거지의 이름이 이곳에는 없지만 막 10:46에 보면 ‘바디매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길가에서 구걸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육신이 멀쩡한 사람은 구걸을 못하고 소경 같은 병신들만 허락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소경거지가 어떻게 기적의 체험을 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예수의 소문이란 곧 복음을 말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는 일은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면에 예수의 소문이 퍼집니다. 우리도 이 소문을 펼치는 소문 꾼 들입니다. 곧 전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교회에 나오는데 어떤 사람은 이 소경 거지처럼 예수를 만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냥 따라 다니는 많은 군중들 모양으로 구경만 하다가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 이 사람은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거지는 행복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소경인데다가 구걸하는 신세였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대상은 모든 것이 풍족한 중에 행복한 살림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생의 가장 비참한 고난에 처해 있는 사람, 질병 중에 누워 있는 사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의 소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의 이름은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2) 누구에게나 예수를 만나는 기회가 있습니다. 이 소경은 자기가 만나보고 싶을 때 언제나 예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난 것은 자기 일생의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는 일은 흔하게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만날 만한 절박한 시기는 그의 인생 가운데 얼마 안 되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 만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부자 청년은 만나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기는 했지만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린 후 그는 다시는 예수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6:2). 각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푸실 때가   247 \ 누가복음      

있고 구원받을 만한 날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날과 이 기회를 잘 포착하여 생명을 얻고 은혜를 받으며 응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2. 소경의 간구
  이 소경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예수를 붙잡기로 한 것입니다.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 행운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직접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를 자기에게 머물도록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길은 그를 향하여 외치는 길입니다. 이 외침은 그의 간구를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1) 그는 외쳤습니다. 그가 간절히 간구한 기도를 말합니다. 간절한 기도만이 예수님의 귀에 들립니다. 이 기도 소리만이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실 수 있습니다.
  (2) 그의 기도는 주위 사람들에 의하여 방해를 받았습니다. 시끄러우니 잠잠 하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더욱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3) 그의 기도는 계속적이었습니다. 계속적인 기도는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십니다.
  (4) 그는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호소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의 의를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한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호소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비참한 처지를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내 놓고 그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기도의 응답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경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기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목적이 불분명한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이때 소경은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원하는 분명한 목적을 제시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명하심으로 그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소경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이 소경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겨자씨 같이 살아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주님의 기적을 창조한 것입니다.
  결론 : 이제 이 소경은 완전한 변화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경이 아니기 때문에 길거리에 앉아 거지 노릇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248 \ 누가복음        

육신의 일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이 소경처럼 그 자리에서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눈을 떴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영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의 영의 눈은 세상의 눈에 감겨질 때 열리는 것입니다. 두 눈이 동시에 열려질 수는 없습니다. 이 소경 거지는 그 거리에서 일어났을 때 새로운 눈이 열린 것처럼 세상에서 여러분의 눈을 주님께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신령한 눈이 열릴 것입니다. 이 소경은 새로운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거지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을 따르는 생활에 들어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소경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능력을 체험하고 신령한 눈이 열려서 세속적인 우리의 생활에서 일어나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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