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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장
 밤중소리  01-11 | VIEW : 743


  (86) 높이는 자와 낮추는 자

  (누가복음 14 : 1 - 11)  

  서 론 :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 집으로 들어가셔서 떡을 잡수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바리새인인 이 사람이 떡을 대접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동정을 살피면서 어떤 결정적인 고소 거리를 찾고자 하는데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주님은 어느 곳이건 어떤 장소이건 구애되심이 없이 가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누구에게든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1. 안식일에 관한 바른 관념을 알리심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하여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그 이상의 안식일의 요구 조항을 장로의 유전이라 하여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안식일 관념이 이상했던 일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주님의 일에 일제히 반기를 쳐들고 나온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는 절대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잘못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주위에 있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의 무리들을 보고 주님 앞에 서 있는 고창병이 든 한 사람을 세워놓고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합당치 않다고 말하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어보셔야 할 일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누구하나 분명한 답변을 못했습니다. 그것도 그런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는 근거를 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잠잠하자 주님은 그들이 답변했을 때 들려주시려고 하신 한가지, 그들이 안식일에 행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반문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누가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을 못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 타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을 향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일이라고 하는 그들의 비난이 얼마나 큰 모순임을 그들로 스스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사람에게 주신 목적은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은 반드시 사람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해로운 방향으로 이끄시고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려는 의도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안식일은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시키시려는 축복이기 때문에 이날에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하는 일은 결코 안식을 범하는 일일 수 없습니다. 일을 금했다고 해서 자기 아들이 우물에 빠진 것을 그대로 두었다가 죽인다면 이런 처사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논리도 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수혈을 하지 않으면 죽을 생명을 눈앞에 두고 율법에서 피를 먹으면 안 된다는 규례에 얽매어 수혈을 거부하여 그 아들을 죽게 했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2. 높은 자와 낮은 자

  주님은 아마 이 바리새인의 집에 주님과 함께 떡 먹을 사람들을 많이 청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주인의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제각기 상좌로 앉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의 교만과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공명심에 대하여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청함을 받았을 때 결코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약 그 자리에 더 높은 사람이 들어왔을 때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결국 아랫자리로 밀려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자신이 맨 뒷좌석, 말석에 앉으면 나중에 주인이 그를 불러 더 높은 자리에 올린다면 그는 그 많은 무리 가운데서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께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며 높여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라는 뜻입니다. 이 낮아짐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찢는 회개, 통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심령에 통회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높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나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높이는 일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겸손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하나님은 나를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높임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힘씁시다.




  (87) 하나님나라 잔치의 초청

  (누가복음 14 : 12 - 24)  

  서 론 :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지침을 장래 우리에게 나타날 소망에 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현재에 갚음을 바라고 선행이나 어떤 행동을 한다면 안 된다는 데 대하여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이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잔치에 대하여 말씀하심으로 잔치에 청한 자와 잔치에 합당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1. 상급이 약속된 초청

  예수님을 잔치에 초청한 바리새인 중, 한 두령은 아마 그 잔치에 예수님을 비롯하여 이름 있는 명사급 인사들을 초청한 모양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르시기를 “네게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갚음을 받는 잔치의 초청은 하나님 나라의 상급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보응 받는 선행에 관심을 두지 말고 갚음이 없는 선행에 힘쓰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하신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웃이나 친척이나 성도들끼리의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 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 이웃에 있는 가난한 형제에 대한 사랑을 잊지 말라는 것과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힘쓰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의 참뜻은 잔치에 국한된 의미로 하신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 복되다고 하는 말씀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복에 대하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상급이나 축복에 대하여 조급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 잔치의 초청 자는 의인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상급에 기대를 걸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구제는 또한 은밀한 선행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은밀하다는 말은 자기가 한 선행에 대해 나팔을 불어 선전하지 않는 일을 말합니다. 마 25장에서 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가 본 일에 대하여 이 지극히 적은이에게 한 일이 곧 주님께 한 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마25:34-40). 이들은 갚음을 바라지 않고 형제들을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시에 받는 상급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 잔치의 초청

  주님은 이 같은 말씀을 하신 후, 어떤 사람이 베푼 큰 잔치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배척함으로 그들에게 돌아갈 구원이 이방인에게 돌아가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이 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말씀하신 것으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베푸시는 잔치로서 교회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란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큰 잔치를 배설하시고 많은 사람을 청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신 일은 하나님이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것으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일을 의미합니다.

  이 잔치에 초청한 사람은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인류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들 초청 받은 자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다 일치하게 이 잔치의 초청을 사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핑계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소를 샀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장가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육신의 일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마24장에 있는 노아 홍수시대의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37-39).

  결론 : 주인은 이들의 이 같은 핑계에 노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큰복을 주시려는 일로 초청하셨는데 이를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결국은 이들은 복음에 합당치 않기 때문에 버림을 당하고 사거리에 나가서 강권하여 병신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와서 잔치 자리를 채운 것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을 말하며, 세상에서 버림당할 수밖에 없는 미련하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 시에 받을 하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꾸준히 선행을 해야합니다. 낙심치 않으면 때가 이르는데 그때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자가 되어 열매 맺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열매 맺는 백성이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88)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

  (누가복음 14 : 25 - 35)  

  서 론 :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일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함께 그 책임도 무겁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제자가 된다고 해도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은 제자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생존 당시에도 제자들의 수효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다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6). 12명의 제자 중에도 갸롯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제자란 말은 Μανθανω(만 다노)라고 하는 헬라어의 동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에서 Μαθητής(마 테테스)란 단어와 Μαθητωύω(마 테튜오)란 단어가 파생되었는데 전자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뜻이고, 후자는 가르치다. 훈계하다의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란 말은 헬라어 원어의 내용 중에는 반드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선택받지 못한 무리 가운데도 제자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참 제자가 아닙니다.

  1. 제자가 될 자의 각오

  이곳에서 주님이 제자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불러서 친히 세우심으로 제자의 사명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의 선택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일단 선택  받은 사람이건 안한 사람이건 결심은 자기 스스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 자의 각오는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1) 육신 적인 혈연 관계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은 주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말의 반대되는 표현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혈연적인 관계로 인정이나 사랑에 연연해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한 자에게는 합당치 않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자기 생명까지라도 버릴 만한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앞서서 먼저 자기 부친을 장사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로 먼저 가족과 작별하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결 같이 그들의 제자가 되려는 자세가 바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눅9:59-62). 그리스도인들이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일해야 할 일에 방해를 받거나 지장을 초래한다면 그런 자세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란 주님의 일을 하는데 따르는 자기 일신상의 고통이나 시련을 가르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 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제자가 되려는 사람이 영광만을 바라본다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제자들만이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 영광을 누리려는 자는 갸롯 유다처럼 되어 버리고 맙니다.

  3. 망대의 비유

  주님은 제자가 되려는 자가 그 자세와 결심을 단단히 가져야 할 일에 대하여 두 가지 비유로서 말씀하셨습니다. 망대를 쌓는 비유에서 망대를 세우고자 할 때에는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 족한지 아니한지를 잘 분별해서 예산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깊이와 주님을 향한 진실함을 스스로 시험하고 측정하고 확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초만 쌓고 이루지 못하는 공사처럼 제자가 된 후에 도중 하차하거나 그 사명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했을 때 얼마나 부끄럽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비유는 싸움을 작정하고 전장에 나갈 때 승산의 자신이 없이 나간다면 패배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차라리 화친하여 화평을 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치 못할 바에는 차라리 일반 성도로서 주님을 섬기는 일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약3:1).

  결론 : 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제자의 이름은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제자 된 자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다면 그 같은 제자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린바 되는 것입니다. 직분을 맡은 자는 소금처럼 짠맛을 내야 합니다. 자기 희생과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충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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