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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장
 밤중소리  01-11 | VIEW : 463


  (79) 너희도 망하리라

  (누가복음 13 : 1 - 5)  

  서 론 : 사람들은 어떤 불행을 만나 어려움을 당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거나 하였을 때 그에게 어떤 죄가 있기 때문에 그같은 일을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재앙은 물론 죄 값으로 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죄는 인생에게 질병과 죽음과 저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 미쳤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보다 죄가 더 많아서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그 사람보다 외로워서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갈릴리 사람의 경우

  어떤 사람 두어 명이 새로운 뉴스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고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로서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물이란 바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인데 그 제물에 빌라도가 죽인 사람의 피를 섞는 일은 신성 모독이요, 그 사람의 저주인 까닭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이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빌라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은 범죄자였음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로는 예수님이 그 사람에 대하여 정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죽음이 저주스러웠던 것은 제물에 그의 피를 썩은 일입니다. 이 같은 사건은 물론 빌라도의 횡포이기는 하지만 그처럼 저주를 당한 갈릴리 사람의 죄가 매우 저주스러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물론 그들도 죄 때문에 죽임을 당했지만 그러나 너희들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고 죄가 없는 줄로 아느냐고 책망하시면서 만약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처럼 망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처럼 망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과 똑같이 그들의 피가 제물에 섞여질 것임을 의미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은 오히려 그것보다 더 저주스럽고 두려운 것입니다.

  2. 실로암 사건의 경우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최근에 일어난 다른 또 한 가지 사건을 말씀하셨는데 그 사건이란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서 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견실하지 못했던 실로암의 망대가 갑작스럽게 무너졌는데 우연스레 그곳에 있었던 여덟 명의 예루살렘 사람이 죽은 일입니다. 이 사건을 들은 사람들은 아마 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재앙을 받을 만한 어떤 무서운 범죄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건으로 죽지 않는 다른 사람들 보다 의로운 사람들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3.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

  (1) 이런 사건은 다른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알려주시는 하나의 경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나도 죄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런 사건을 당할 사람의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우리는 나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이지만 내가 그들이 당한 것과 같은 환경 아래 놓여 있지 않은 연고로 무사함을 생각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겸손하며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나도 마땅히 그들과 같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받을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보호해주시고 그같은 사건을 유예시켜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이요 은혜임을 알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회개의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나도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80) 어찌 땅만 버리느냐

  (누가복음 13 : 6 - 9)  

  서 론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판이나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일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6:7-8).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과실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5:8). 무화과나무의 비유의 말씀 중에 나오는 등장 인물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에 대한 비유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습니다. 포도원이란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교회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늘날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심은 주인은 하나님을 말씀하고 과원 지기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까지 인도하시는 성령을 비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1.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

  포도원 주인이 자기 밭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은 관상용도 아니요 아무 의미 없이 심은 것도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심은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사람이 보기에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아름다운 면도 없고 재목감도 못됩니다. 그렇다고 꽃의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만약 무화과나무로부터 열매를 딸 수 없다면 그것은 공연히 땅만 허비할 뿐인 쓸모 없는 나무가 무화과나무인 것입니다. 새벽길에 주님이 성안으로 들어가시면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얻을까하여 가까이 가셨지만 열매를 얻지 못하시고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옛사람 그대로 세상에 속하고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에게서 무엇을 바랄 것입니까?

  2. 3년을 구하심

  주인은 이르기를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삼 년이란 세월은 짧은 기간은 아닙니다. 혹시나 금년에는 열매를 맺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연거푸 세 번이나 해를 넘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열매를 바라시지만, 그 열매를 오랜 기간을 두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나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신다면 단번에 찍어버리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인내하신 것입니다. 육에 속하여 항상 넘어지는 우리를 불쌍히 보시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삼 년이란 기간은 무화과나무의 경우, 능히 열매를 맺을만한 충분한 기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만약 삼 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라면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나무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나무에 기대할 것도 바랄만한 소망도 없습니다.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이르기를 “찍어 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가라지들이기 때문에 뽑아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한 가지들이기 때문에 불살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 자리에 놓아두는 일은 땅만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네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2).

  결론 : 과원지기는 주인에게 탄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성령의 탄식을 비유하신 것입니다(롬8:26). 그는 이처럼 주인에게 탄원했습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두루 판다는 말은 우리의 회개를 위해 우리의 신앙생활에 간섭하시고 열매를 맺도록 역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거름을 준다는 말은 말씀으로 양육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의 결과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과연 그 나무가 열매를 맺어 주인의 즐거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끝내 찍힘을 당했는지 그 결과는 우리의 상상에 맡기시고 너희는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경종하신 말씀입니다.





  (8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안식일

  (누가복음 13 : 10 - 17)  

  서 론 :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공생애에서 첫 번째로 충돌된 사건이 안식일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계속하여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의 쟁점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시지 않은 증거를 이 안식일 문제에서 찾았습니다. 성경에 대한 바르지 못한 해석이나 판단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바른 안식일 관을 가져야 합니다.

  1. 안식일과 주일

  우리는 신약시대에 와서 구약에서 지켜온 안식일이 아닌 새로운 날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주일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구약의 안식일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새로운 주일을 정하여 그 날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안식일의 기원은 창세기 2장에서 연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쉬신 일이 바로 이 날이시며 하나님은 이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날에 복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담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날을 거룩한 날로 하나님이 복 주시는 날로 정하고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모세 때 와서 율법으로 규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있는 모든 약속과 예언은 하나의 그림자요, 상징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야 그 모습이 마치 수건을 벗은 것처럼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7일 안식은 그 자체가 우리의 안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안식은 하늘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입니다. 이 안식이 구약에서는 가나안 안식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러나 참 안식은 7일 안식도 가나안 안식도 아닙니다. 이 안식일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은 히브리서에 와서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4:8-11).

  (1) 이 말씀에서 안식일의 뜻을 찾아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해 안식일을 주신 일은 가나안 안식을 누리게 하시려는데 그 뜻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2) 그러나 그 가나안 안식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그들이 얻을 수 없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가나안 안식이 실현되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일의 복은 아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란 하나님이 그의 일을 쉬심과 같이 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율법조문에 있는 대로 안식일을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4) 이미 하나님의 백성 중에는 이런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도 그곳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5) 하나님의 안식은 순종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불순종하므로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을 본받지 말고 순종하므로 약속 받은 안식을 누려야 할 것임을 경종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르면 율법에 있는 안식일은 참 안식의 그림자 일뿐입니다. 히4장에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에 대하여 이미 그곳에 들어간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적 안식으로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14:13에 있는 수고를 그치고 쉬는 안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이 소망한 안식도 이것이었습니다(빌1:23). 이 안식은 부활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의 보증이며, 구약의 안식의 실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되지 않고는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안식은 그의 부활로 나타났으며 우리의 안식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됨으로 완성되며 이때 우리의 참 안식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2. 안식일과 주일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제 안식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완전히 살아집니다. 교회초기에는 율법에 철저한 유대인들이 교회를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명확한 한계선을 긋지 못했습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비취는 곳도 여러 곳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엔 안식일이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활습성으로 정착하고 있었으며 이런 습성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안식일에도 모이고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도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려면 그 당시는 유대인들이 전도의 대상이었는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는 안식일에 예배에 동참하여 주어진 기회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교리적으로 정립됨에 따라 안식일이 폐해지고 주일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에서 이런 안식일의 고정관념이 어떻게 깨어졌으며 주일이 정착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2:16).  

  (1) 주일은 육신의 일을 쉬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구별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들어갈 하늘에서는 육신의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의 일을 쉰다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애를 위하여 힘쓰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이웃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일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한 예로 주님은 안식일이라도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신 것입니다.

  (2) 안식일에는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처럼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가르치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마22:37-40 참조).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안식일처럼 주의 날인 주일에도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란 구제하는 일, 또는 병을 고쳐주는 일등도 포함될 것입니다. 또 이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유대인들처럼 장로의 유전을 따라 지키는 율법주의적인 방법에서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방법에 의하여 지켜야 할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이레 중 하루를 안식하라는 뜻으로 주셨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안식의 한 상징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기 이전, 이미 아담이 안식일을 받았는데 그때 아담은 율법에 기록한 것과 같은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날 안식교도들이 지키는 율법에 기록된 안식일의 구례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안식일을 고집한다면 율법의 정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 안에서 율법적인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참 안식의 약속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8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누가복음 13 : 18 - 21)  

  서 론 :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 가지 비유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곳에서 두 가지 모습의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복음의 생명력을 의미하신 것이요, 누룩은 복음의 번식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이 생명력과 번식력이 없었다면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십자가에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1. 겨자씨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 전파됨으로 이 땅에 형성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아서 적은 씨앗이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가 깃든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복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신 말입니다. 첫째로 복음은 큰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도 가장 적은 씨앗입니다. 이 씨앗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으며 눈으로 보려고 코밑에 갖다 놓으면 코에서 나오는 숨으로 인하여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가벼운 씨앗입니다. 복음은 마치 이 겨자씨와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심히 적은 존재처럼 보여서 문제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을 가볍게 보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너무나도 적어서 아무에게나 짓밟힘을 당해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자 굴속에 집어넣음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칼이나 톰에 찔리고 돌에 맞아 말없이 힘없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겨자씨 같은 복음에는 미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력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처럼 작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 적은 생명력은 오늘날 온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겨자 나무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나무에서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인류가 영적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한국에 처음에 들어온 복음은 마치 하나의 겨자씨였습니다. 누가 이 씨앗이 오늘날 한국을 복음의 대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 내려진 성령의 불은 120문도의 적은 겨자씨에 의하여 온 세계에 복음의 불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이 겨자씨인 복음은 처음에 우리에게 큰 씨앗으로 심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겨자씨로 심겨집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고 진리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우리의 심령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자라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인생관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생활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바로 하늘의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가지고 오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씨앗은 위대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겨자 나무로 성장한 교회는 많은 피곤에 지친 심령을 포근히 안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류를 이 겨자나무에 쉬게 하시려고 이처럼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2. 누룩과 하나님 나라
'  그러면 누룩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상관 관계로 말씀하신 비유입니까? 누룩이란 대개 좋지 않은 부패물이기 때문에 복음의 비유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경우는 다만 복음이 말할 수 없는 능력으로 번식시키는 데 그 번식시키는 모습이 마치 누룩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누룩의 번식력은 가루 서말 속에 넣은 적은 것으로 그 서말 전부 부풀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번식력은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이 적은 누룩이 한번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면 그 사람은 이 누룩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사도 바울 같이 복음의 대적 자도 이 누룩이 그의 마음에 떨어지자 그의 전 인격이 복음화 되었습니다. 뿐 아니라 이 복음의 누룩이 한 가정에 들어오면 순식간에 그 집안이 누룩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화 된다는 말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행16:31). 이 말씀처럼 복음을 받아드린 빌립보 감옥의 한 사람의 간수로 말미암아 그의 온 집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 이 생명의 씨앗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번식의 누룩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신비스러운 겨자씨에 의하여 성장하고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이 누룩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꽉 차게 되고 그 누룩의 번식력은 우리의 가정과 이 사회를 복음화 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적은 겨자씨가 여러분의 그 적은 누룩이 이처럼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룰 수 있기 바랍니다.





  (8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누가복음 13 : 22 - 24)  

  서 론 : 구원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구원의 핵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막연히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구원에 이르는 사람은 적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알아보기 위하여 주님께 질문하게 된 것입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이가 적으니이까.” 이 질문에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 가지 사실에 대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구원을 얻는 무리의 수효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아니하셨다는 것과 다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과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1. 믿음의 두 형태

  우리는 구원이 다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인데 이 선물은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비로소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변화라고 하는 과정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스스로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행함의 열매는 평생을 통하여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언제까지 가도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죽은 믿음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하셨습니다.

  (3) 열매가 없는 믿음은 생명이 없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인데 가지가 그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진실한 신앙고백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진실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가라지들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여기서 좁은 문이란 말이 나옵니다. 주님은 어찌하여 구원에 이르는 문을 좁은 문이라고 하셨습니까?

  (1) 이 문은 구원의 문이요 천국의 문인데 이 문이 좁은 문으로 비유된 것은 첫째로 죄를 벗어버려야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짊어지고는 이 문을 통과할 수 없으므로 좁은 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사랑함으로 좀처럼 죄를 벗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문의 통과가 어려운 것입니다.

  (2) 다음에 이문은 소망을 바라보아야 통과하는 문이기 때문에 좁은 문입니다. 이 소망은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소망을 찾는데 이런 사람에게는 좁은 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이 문이 좁은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이는 끝까지 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좁은 문인 것입니다.

  (4) 다음에 이 문은 순종으로만이 통과되는 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순종 없이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사람에게는 좁은 문인 것입니다.

  3.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 이상한 말 같지만 들어가기를 구하는 사람 중에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왜입니까? 구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1) 재물과 함께 구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에 한 가지 밖에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넓은 문으로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잘못된 진리에 미혹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내가 곧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아니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자들, 모든 미혹 받은 자들은 그들이 원해도 진리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힘쓰라는 말은 세 가지 뜻을 나타냅니다.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굳게 잡으라는 뜻입니다. 순종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지금 과연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인가? 내가 걸어가고 있는 천국 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에 대하여 살펴보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84) 닫힌 문

  (누가복음 13 : 25 - 30)  

  서 론 :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시고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종을 하신 것입니다. 집주인이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주소서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문은 좁은 문을 가리킵니다. 좁은 문이란 곧 구원의 문이며 천국의 문을 말합니다. 이 문은 언제나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인가 닫힐 날이 오는 것입니다. 이 날은 예고하여 이르는 것이 아니라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온다고 하셨으며 임신한 여인에게 그 해산이 갑자기 임함같이 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평소에 이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한번 닫힌 후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준비하지 못한 자들이 두드려야할 문이 성경에는 여러 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 세 가지 문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보호처의 문

   환난 날에는 예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밖에서 두드리는 문이 있습니다. 이문이 보호처의 문입니다. 보호처란 7년 대 환난 기간 중 후 삼년 반의 대 환난에서 보호를 받는 하나님의 예비처를 말합니다(계12:6). 만약 이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무서운 환난에 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때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시기가 늦은 것입니다. 환난이 다 끝날 때까지 그 문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문에는 지팡이 같은 갈대로 측량하는 측량에 합격해야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 측량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자는 말씀의 자요 진리의 잣대입니다. 이 자에 불합격한 자들은 환난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불합격자냐? 바깥마당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외식하는 자, 세상에 속한 자) 불합격자는 마흔 두 달간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짓밟힘을 당하는 것입니다.

  2. 공중휴거의 문

  다른 또 하나의 문은 공중 휴거의 문입니다. 마지막 환난 끝에 가서 이 땅위에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일곱 대접 심판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 대접심판은 인류의 최후의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공중으로 휴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재앙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중 휴거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휴거에서 떨어지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마에 짐승의 표 666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닫혀진 문밖에서 적그리스도의 혹독한 통치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 환난 중에서 죽임을 당하던가 아니면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3. 천년왕국의 문

  그리스도인들은 천년왕국의 축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은 언제나 곧 닫혀질 문입니다. 이곳은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곱째 대접으로 내리는 재앙으로 불 가운데서 멸망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열어주소서

  열어달라고 말하는 그들은 이미 문이 닫힌 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향하여 주여 열어주소서 했습니다. 그는 사뭇 자기는 주님을 잘 아는데 억울하게 왜 문이 벌써 닫혔느냐는 어투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의 선언을 들어봅시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주님은 모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행악하는 자들이란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주님을 섬기고 따른 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먹고 마신다는 말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눅 12:45에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한 악한 종들이 먹고 마시며 취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생활을 말합니다. 다음에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들은 성전과 재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던 자들이 아니요 성전 마당만 밟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친숙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전혀 알 수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그 마음에 영접한 사람 외에는 아실 수가 없으십니다.

  결론 : 이들은 결국 닫혀진 문밖에서 슬피 울 수밖에 없겠지만 이 잔치에 들어가기 위하여 예비한 종들은 그곳에 들어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순서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교회의 직위를 내세우지만, 그것이 상관이 없습니다. 나중 들어온 사람이 먼저 그곳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연유를 말하지만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들어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85) 예루살렘아 !

  (누가복음 13 : 31 - 35)  

  서 론 : 우리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는 탄식 중에서 주님의 애타하시는 심정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비록 멸망 받을 사람에게까지 그 인자하심이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하루가 천년처럼 기다리시며, 99명의 의인보다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사랑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의 최종적인 운명을 생각하실 때 깊은 탄식으로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1. 헤롯의 간계

  주님 곁에 있었던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께 나아와서 말씀하기를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하니 이곳을 떠나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주님을 죽이려는 음모는 이곳 저곳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대로, 사두개인들도 그들대로, 그리고 제사장도 역시 그들대로, 헤롯까지 주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그는 예수님을 세례요한의 부활로 생각한 것입니다.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공연히 피해망상증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 헤롯은 자신의 왕위의 확고한 유지를 위해서는 유대인의 대단한 환심을 사고 있는 예수를 죽여야 하겠다는 피해 의식을 느낀 것입니다.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말에 대하여 주님은 아직 자신이 죽을 때가 이르지 아니하셨음을 말씀하시고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갈 것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고 하신 말씀은 시간적인 일자를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도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하리니 라고 하신 말씀에서 모레라고 표현하신 것은 제 삼일인데 이때는 완전하여 지리라고 하신 삼일에도 갈 길을 가시는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오늘 그리고 내일과 또한 그 다음날도 하나님의 일을 하시다가 때가 이르면 고난을 당하실 것이라고 하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은 자신이 얼마 후에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할 일을 생각하시고 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므로 받을 하나님의 심판을 슬퍼하시고 그들이 고대했던 메시야를 그들은 결국 인류의 종말, 주님이 영광의 재림 주로 오실 때에도 바라볼 것이라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오히려 돌로 쳐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해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려고 힘쓰셨지만, 결국 그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거역하고 하나님 품안으로 돌아오기를 원치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보내신 이들까지 십자가에서 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예언대로 이루어져 70년에 로마의 디도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이 황폐되었고 그들 민족이 버린바 되어 2천년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을 겪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언제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의 메시야를 만날 것인가?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는 주님의 재림시기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대망 하는 메시야를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는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슥 13장에 예언된 것처럼, 재림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그들이 대망 하였던 메시야가 바로 그들이 십자가에 찌른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음을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바울은 롬 11장에서 이스라엘의 회개 시기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마음이 불신으로 완악해 지면 이토록 회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늘 회개하기를 더디 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믿음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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