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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장
 밤중소리  01-11 | VIEW : 492



  (67) 참으로 두려워할 자

  (누가복음 12 : 1 - 5)  

  서 론 : 우리는 참으로 두려워 할 자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하고 세상 죄악에 물들어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시면서 두려워할 자를 알고 신앙적으로 바르게 살아갈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1. 바리새인의 누룩

  주님 주위에는 서로 밟힐 만큼의 실로 많은 수만의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종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님은 누룩이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누룩은 악한 번식물입니다. 그리고 누룩은 물건을 썩히는 데 필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누룩이란 주로 잘못된 교훈을 말합니다. 이것에 물들면 그 심령이 썩고 그 생명이 죽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을 붙였습니다. 외식이란 겉으로 꾸미는 거짓된 모양을 말합니다. 심령의 변화 없이 그의 행실로 변화 받은 것처럼 거짓되게 꾸미는 행실이 외식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식 자들에게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누룩이 위험한 것은 누룩은 놀라운 번식력을 가지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고전5:6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 했습니다. 누룩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라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를 심는 자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심어주지만 마귀는 미혹의 영으로 우리의 심령 속에 가라지를 심어줍니다. 이 가라지는 욕망으로, 탐심으로, 음욕으로, 물질로 우리들 생활 속에서 자라게 되고 죄를 조장하며 급기야 우리들로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누룩이 들어오면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이 살아집니다. 말씀에 대한 의심이 생깁니다. 기도생활에 나태해 집니다. 교회와 목회자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더 깊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을 썩히기 전에 우리는 우리들 심령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애를 잠식하는 누룩을 뽑아내야 합니다.

  2. 외식은 드러난다

  외식 자들은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깊이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들의 마음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짓된 것, 감추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들어 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을 숨기려고 마음을 감추어도 하나님은 겉  모양을 보시지 않고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앞에 여지  없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시기 때문에 거짓된 것을 들추어내어 심판하십니다. 히브리서 4:12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것을 자랑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심령을 살피시고 나무라셨습니다. 실인즉 그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고 다만 겉으로 보기에 부자로만 꾸민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영적인 외식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죄도 숨기지 못합니다. 자기 혀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자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숨김없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진실해야 합니다.

  3.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자

  이 세상에는 권력자들이 있지만 이들의 권세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몸을 죽일 권세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권세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두려워하고 이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거짓을 행하고 이들 앞에서 외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겨우 몸만을 죽일 수 있는 세상 권세 자들 앞에서 외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앞에서 거짓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두려워 할 이에 대해서 주님은 몸도 죽이고 영혼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그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지옥이란 인간의 최종적인 심판인데 그 권세는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 몸의 생사 여탈 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사람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죽었다해도 그런 방법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취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짐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주의 신비와 이 대자연의 법칙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누구도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과 능력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결코 권세 있는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2) 몸을 죽이는 자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그를 심판하시는 그 분이 두려운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히9:27). 사람은 한번 죽는 것으로 소멸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죽은 후에도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최종적인 심판이 죽은 후,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 심판이 두려운 이유는 이 심판으로 최종적인 인간의 운명이 좌우되는데 여기서 지옥의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해야 합니다. 주님과 진실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는 자는 성밖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워 할 자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68) 두려워 말라

  (누가복음 12 : 6 - 12)  

  서 론 :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르는 죄 중에서 특별히 경계해야 할 죄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인 받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권세 잡은 자들 앞에 끌려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부인을 강요당할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여러 가지 형태

  (1) 두려움에서 부인하게 됩니다. 장차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세대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시인하는 문제가 자기 생명과 직결되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로마의 여러 황제들이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는 생명 잃는 것을 두려워하여 부인했었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면 이 자가 세상 인류로 하여금 적그리스도에게 경배케 합니다. 이 일에는 이적으로 미혹하는 일이 따릅니다. 만약 이때 적그리스도에게 경배치 아니하거나 그를 따르지 않을 때는 누구든지 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계13:11-18). 이런 경배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이 일에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계3:8).

  (2) 부끄러움에서 부인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신앙고백이 부끄러워 친구나 친지들 앞에서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의 어린 초기에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복음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왜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까?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곧 “예수”이신 데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그 예수를 부끄럽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 신앙이 자라야 하며 구원의 확신을 가짐으로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이해 타산에서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직장 관계로, 사업관계로, 상관이나 거래손님에게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관료 직에 있는 사람이 직속 상관 앞에서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에는 그 앞에 어떤 장애물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는 이해타산을 초월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치 아니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4) 미혹으로 부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미혹합니다. 물질로 미혹하고 권세의 위엄과 협박으로 미혹하고 이단으로 미혹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거나 그 이름의 명예나 영광을 더럽혀서는 안됩니다.

  2. 정사 잡은 자 앞에 끌려간다

  11절에서 사람들이 너희로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시인이냐? 부인이냐? 결단을 내야 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주님은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주님은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언제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가 해야 할 말을 가르치신다고 우리를 기계처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우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지 그 말이 곧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셨나? 그 이유로서 참새의 경우를 예로 드셨습니다. 돈에 팔려 가는 미미한 참새의 생명까지라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참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아주 귀하게 다루시는 분입니다. ‘참새보다 얼마나 귀하냐’는 말씀에는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 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참새에게는 구주가 없습니다. 참새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진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많지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피를 흘리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기업을 주신 것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새나 다른 모든 동물들의 생명을 주관하시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기업의 약속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에게, 그 인간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이토록 귀한 생명을 하나님은 얼마나 소중히 다루실 것이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털까지라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리고 어떤 권세 자 앞에서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주를 위하여 바칠 때 나의 참 생명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69) 탐심을 물리쳐라

  (누가복음 12 : 13 - 21)  

  서 론 : 신약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골3:5). 우상숭배란 하나님이 아닌 존재를 하나님처럼 섬기는 행위를 말하는데 돈을 사랑하는 일을 비록 우성처럼 절은 안 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귀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일은 동일하기 때문에 이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무리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주님께 한가지 부탁을 드렸습니다. “내 형에게 명하여 유업을 나누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상속문제로 형제끼리 다툼이 일어나 동생이 불리한 입장에서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의 동정을 받을 것으로 알았지만 주님은 그의 요구를 거절하시기를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책망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앞에 부딪힌 문제를 가지시고 즉각적으로 주옥같은 교훈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1. 탐심을 물리 치라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탐심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이 사람도 평소에 주님을 잘 알고 따르고 있는 사람인양 인상을 주고 있지만 주님은 그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탐심이란 무엇입니까?

  (1) 부당한 이익을 욕심 내는 마음을 탐심이라고 말합니다. 저울추를 속이고 버는 이익은 무서운 탐심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거짓말하며 장사하는 일은 탐심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또한 기업주가 삯군에게 품삯을 제때에 주지 않는 일도 탐심입니다. 이에 대해 약 5:4에서 부한 자들에게 경종하시면서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른다고 했습니다.

  (2) 다음에 탐심이란 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돈을 자기 인생의 위주로 삼는 생활을 말합니다. 돈 때문에 형제의 우애를 해치는 일도 역시 탐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유혹을 받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주로 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2.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하는 자의 결국

  주님은 탐심을 경종 하시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밭에 소출이 풍성한 어느 한 농촌 부자의 경우였습니다. 이 사람을 주님은 탐심의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시키셨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소출에 도취되어 자신의 재물을 위해 그 쌓을 곳을 짓기를 원했으며, 앞으로 자기 인생의 계획을 설계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날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람이 왜 어리석은가에 대하여 주님의 말씀에 비취어 알아보면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말 중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한마디도 안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생활은 소망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생애의 목적을 자기 즐거움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아무런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적하신 대로 이 사람은 자기에게는 부요했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십일조도, 감사도 없었습니다.

  (1) 하나님께 부요한 생활이란 그의 살아가는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마음에 탐심을 가지면 그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활은 자연스레 자기 본위의 생활이 되며 하나님을 향한 열매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부요한 삶이란 물질을 하늘에 쌓아두는 일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그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이 부자는 이 두 가지 가져야 할 일에 모두 실격했습니다. 오직 자기 욕심을 따라 자신의 삶을 경영했으며 그런 방법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탐심을 가진 사람의 삶의 철학입니다. 그러나 결국 탐심은 자기 생명을 죽입니다. 이 부자는 그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그 날밤 그의 영혼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자신이 거둔 것조차 누리지 못했으며 그의 육신의 생애는 허망하게 끝났고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그의 영혼에 대한 심판에서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곰곰이 생각하고 이 부자와 같은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70) 탐심을 이기는 비결

  (누가복음 12 : 22 - 31)  

  서 론 : 주님은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탐심이 없어야 할 이유에 대하여 이곳에서 자세히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만약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자신의 생활 철학으로 삼아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는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생애를 주안에서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1.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염려치 말일에 대하여 주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음식의 염려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며 의복의 염려는 결국 자기 육신을 죽이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까마귀의 경우를 들어서 교훈 하시기를 “까마귀는 곡식을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셨습니다. 까마귀가 자기 양식을 위하여 농사를 짓는 일이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 기도하는 골방에 들어가 양식 때문에 기도하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까마귀를 기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이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온 세상을 주고도 능히 바꿀 수 없이 귀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처럼 중하고 값진 우리들이거늘 어찌 그까짓 까마귀에 비교가 될 것입니까?

  2. 염려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인생이 그의 염려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아마 너희는 기도하지 말고 염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염려로 자신의 키 한자도 더할 수 없는 연약한 인생이 무엇 때문에 염려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극히 적은 것 하나 능치 못하면서 어찌 더 큰 일에 염려하는 가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3. 백합화를 보라

  주님은 사람이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하여 자연 속에서 자라나는 백합화의 경우를 예로 드셨습니다. 백합화가 자기를 꾸미기 위하여 길쌈도 하지 아니하고 짜지도 않지만 그가 입은 것이 솔로몬의 영광 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입히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한낱 들풀의 존재, 하루 있으면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조차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기늘 너희가 무엇 때문에 염려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하는 일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적은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염려하는 생활을 하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에게는 믿음이 적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믿음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적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전폭적인 믿음을 가지고 의뢰하지 못하는 신앙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람들은 그의 생활이 항상 염려로 뒤덮여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염려는 불신과 의심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염려를 물리칩니다. 기도하면서도 과연 하나님은 이 일에 응답해 주실까? 하나님은 이런 일이 가능하실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 염려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3) 염려는 우리로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마13:22절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이 마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 같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내가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염려의 처리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벧전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염려를 주께 맡기면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어 주님이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권고(眷顧)란 말은 맡겨준 일에 대해 돌보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4..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근심하지 말라

  의식주에 대한 근심은 세상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같은 근심이나 염려쯤은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생활의 염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 주 재림의 날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못하므로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할 것이라고 경종 하셨습니다(눅21:34).

  결론 : 하나님은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근심이나 염려가 아니라 그의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복 받는 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여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71)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누가복음 12 : 32)  

  서 론 :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무리는 많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같은 일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이 결코 넓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구원의 문은 좁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지극히 적은 무리에 속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너희는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시고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왜 적은 무리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은 그리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택한 무리는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2장의 어느 임금의 아들 혼인 예식의 비유를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실 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1) 노아 시대의 경우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세상에 죄악이 관용할 때에도 그 많은 인류 가운데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만을 택하시고 의의 후사로 삼으셨습니다.

  (2) 모세의 경우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고 불순종할 때 이스라엘의 많은 수효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광야에서 다 멸망케 하셨습니다.

  (3) 기드온의 경우 : 하나님은 대적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데 이스라엘의 많은 군대를 원치 아니하시고 기드온의 3백명을 쓰셨습니다. 적은 수효로서 그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자 흥미를 잃은 많은 무리들이 물러가고 주님 곁에는 몇 명 안되는 적은 수효가 서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적은 무리들만이 영생의 말씀을 따라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5) 주님은 그의 12명의 제자들 중에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택하여 변화산에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6)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성도들도 많은 수효가 아닙니다. 120명의 문도들이었습니다. 인류의 종말에도 믿는 사람이 결코 많은 수효라고 말씀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2. 무서워 말라

  주님이 이들을 향하여 무서워 말라고 하신 이유는 이들 무리들에게 무서워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어려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1)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이 고난을 벗어버리고는 주님의 사명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은 어둠으로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둠을 빛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빛된 사명에 대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5).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등불을 말 아래 숨겨두려고 합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두어야 빛을 비췰 수 있습니다. 등경 위에 둔다는 말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바람이 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바람을 이기지 못하면 빛을 제대로 비췰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가정에서 빛을 발휘하려면 고난이 따를 때도 있습니다. 사회에서, 직장에서 활동할 때도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명예를 위해서 받아야 할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2) 의롭게 살려는 자에게는 핍박이 겸하여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의롭게 생활하면서 세상의 핍박을 받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의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타당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의 핍박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핍박이 두려워 세상 사람의 관습을 따르거나 그들의 생활에 동조하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무서워 말라고 하셨습니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16:33).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41:14).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잠11:8).

  결론 : 두려움은 우리 마음에서 믿음을 추방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두려움을 물리치는 길은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의뢰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일에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72)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

  (누가복음 12 : 33 - 34)  

  서 론 : 성경에는 주머니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학 1:6에는 구멍 뚫어진 전대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폐허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살기 위한 완벽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 경종하신 말씀입니다. 열두 제자들을 둘씩 묶어 전도대로 보낼 때 주님은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눅 12:33에 있는 말씀은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표현으로써 하나님의 축복과 이들의 상급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1. 주머니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주머니란 돈주머니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주머니 속에 세상 재물을 담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애쓰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능히 주머니에 돈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이 바라는 돈주머니의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는 주머니가 아니면 허사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시 127:1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울지라도 그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고 하셨습니다(잠16:1).

  (2) 하나님은 우리의 경영하는 바를 세우기도 하시며 헐기도 하십니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말1:4). 인생들이 바라는 주머니는 자기가 원하는 소원 한마디로 그리 쉽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허영과 탐심으로 주머니를 채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주머니는 구멍 뚫린 전대인 것입니다. 이 전대를 소유한 사람들은 비록 힘써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아니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학1:6). 이것은 불의한 재물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재앙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의 전대를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헛된 사욕과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주머니를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머니는 누구에게 주십니까?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를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고 하셨습니다(시편128:1-2). 우리의 손이 수고한대로 먹는 축복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복입니다.

  (2) 순종하는 자에게 이 주머니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여 네게 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에게 이 주머니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말3:10).

  (4)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6:33)

  3. 낡아지지 않는 하나님의 주머니

  주님은 우리들에게 권고하시기를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주머니는 하늘에 간직해 두는 주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돈주머니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곳에 우리의 재물을 쌓는 방법입니다. 이 주머니는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구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제의 상급은 너무나도 확실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제가 그저 구제로 끝나는 줄로 알면 안됩니다. 구제는 넘치는 보상이 따릅니다.

  (1) 구제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2) 특히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본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잠28:27).

  (3) 구제는 선한 일이며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의 초보적인 열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4) 구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일이지만 외식적으로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 착한 일에 대한 상급은 오래 기다리는 중에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고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결론 : 이 주머니를 만듭시다. 그리스도인은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이 이곳에 채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73)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

  (누가복음 12 : 35 - 40)  

  서 론 :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지침을 여러 가지로 교훈적으로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소망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들의 구원의 완성이 되며 부활과 영생의 시작이 되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재림에 대하여 시간이 있으신 대로 혹은 교훈적으로 혹은 경종으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 깨어 있는 영적 상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다고 하는 말은 영적인 의미로 들려주신 말씀인데 그 깨어 있는 상태를 몇 가지 비유로 표현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어야 할 일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셨습니다. 허리란 사람의 중심 부분입니다. 사람은 허리가 온전해야 그의 활동이 정상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신 허리란 영적인 뜻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속 사람의 중심인 허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띠란 무엇을 말합니까? 엡 6:14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적 사람의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신 띠란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진리로 말미암아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로 속 사람의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진리로 우리의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진리로 우리의 속 사람을 성장시키라는 말씀이십니다.

  (2) 다음에 등불을 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등불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비취어야할 빛을 말합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고 사람이 등불을 켜서 발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고 하시고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6:14-16). 주님을 맞이할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등불의 빛을 세상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 25장에는 미련한 처녀와 지혜로운 처녀들이 가진 것으로 등과 기름이 나옵니다. 이것은 등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등은 구원을 상징하며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만이 빛을 세상에 비췰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서 있다고 하는 말은 일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깨어 있는 신앙생활의 태도를 말하는데 기도생활, 봉사생활, 전도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서 있는 상태의 반대는 잠자는 상태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잠을 자는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2. 깨어 있는 사람

  주님은 깨어 있는 모습을 하나의 비유로 표현하셨습니다. 36절에서 “너희는 마치 혼인집에서 그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은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돌아올 시간에 대하여 언제인지 모른다고 하시고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를지 모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려도 그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같은 종은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종은 집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주인으로부터 올 때까지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종은 마땅히 주인이 곧 올 것으로 알고 기다리는 자세로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 종처럼 주님이 오실 것을 소망으로 삼는 자세로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종은 그 시각이 언제라도 혹 이경이나 혹 삼경이라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자세로 그 주인이 오실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자세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혼인집에 간 주인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은 주 재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곧 돌아갈 것이라고 그 집 종들에게 보내신 편지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 중에 주인이 다시 돌아올 일에 대한 모든 비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을 기다리는 그 집 종은 마땅히 이 예언의 말씀을 잘 읽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록된 말씀대로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 재림에 대한 소식을 모르고서는 제대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제 모든 성도들은 아직까지 멀리했던 재림에 소식이 담긴 요한계시록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결론 : 주님은 결론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기는 마치 도적의 경우와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고 예비하고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곧 문을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은 자세로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노아 시대나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세상일에 취하는 생활에 젖어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하는 밤중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그 대상이 될 것입니다.




  (74) 두 종류의 청지기(지혜로운 청지기)

  (누가복음 12 : 41 - 48)  

  서 론 : 예수님은 재림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상급 받을 종과 징계 받을 종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종말에 대한 주 재림의 교훈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이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주님의 말씀이 주로 양 무리를 맡아 치는 청지기들에게 대한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종들을 청지기로 비유하시고 그 청지기 중에는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 선한 청지기의 경우

  주님은 선한 청지기는 어떤 종이어야 하느냐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동서고금의 모든 하나님의 종들을 향하여 경종으로 들려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1) 선한 청지기는 지혜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사람들로 세상에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심으로 세상에 지혜 있는 사람을 쓰시지 아니하십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이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음으로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은 성령이 주시는 지혜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이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같은 지혜는 기도할 때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시119:99-100).

  (2) 선한 청지기는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군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이 빠져버리면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그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진실이란 마음에 간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나다니엘을 만나셨을 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요1:47). 진실한 사람은 그의 입에 거짓이 없습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5). 십 사만 사천의 하나님의 종들의 자격으로 진실한 종을 선택하십니다.

  (3) 선한 청지기는 그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줍니다. 주님은 이 같은 종들에게 양떼를 맡기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자기 양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양을 당신의 종들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종들은 이 양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을 감당합니다. 때를 따라 준다는 말은 육신의 양식을 시간을 따라 먹이는 것처럼, 시간 따라 영의 양식을 먹이는 일을 말합니다.

  다음에 양떼들에게 시대의 징조를 따라 양식을 공급하는 것을 말합니다. 때라는 말은 주로 주 재림의 시기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재림의 시기를 말씀하시는 가운데 때란 말씀을 많이 쓰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하셨는데 인자의 때란 바로 주님의 재림의 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2. 선한 청지기가 받을 복

주님은 선한 청지기가 받을 복에 대해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하셨습니다.

  (1) 주님께서는 이들 진실한 청지기를 통해서 그의 신부들에게 밤중의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마태복음25장을 보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유감스럽게도 신랑을 맞이해야 할 신부들이 신랑이 더디 오므로 졸며 자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경성하고 주인 맞기에 단단히 준비해야 할 사람들이 잠이 들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세상에 깊이 잠들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잠에서 깨워 신랑을 맞이할 수 있도록 진실한 청지기를 세워 그들로 밤중에 나는 소리로 나팔을 불게 하십니다.

  (2) 이들이 종말에 주님을 대신해서 교회의 추수를 위해 활동하는 두 증인들입니다. 요한계시록11장의 두 증인들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했습니다.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고 감람나무는 진실한 종으로 인정받은 선한 청지기들, 밤중의 소리로 주 재림의 복음을 외쳐 잠자는 주님의 신부들을 깨우는 사명을 이루게 되며 그들에게 신부가 입을 흰옷을 입혀 신랑을 맞이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 주님은 이런 사명을 모든 종들에게 주지 아니하시고 선한 청지기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3) 이들이 받을 상급에 대해 “주인이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추수군의 사명을 이루는 중, 적그리스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곧 부활 승천하게 되며 주님 오실 때 하늘 군대로 흰말을 타고 주님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첫째부활자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며 천년왕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주님은 이 같은 종들에게 놀라운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사명을 부끄러움 없이 제대로 감당하려면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75) 두 종류의 청지기(악한 청지기)

  (누가복음 12 : 41 - 48)  

  서 론 : 청지기 중에는 선한 하나님의 종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청지기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물론 주님이 세우신 종들이 아닙니다.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원수가 와서 심었다고 하셨습니다(마13:28). 그러면 이들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명한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악한 종들에 대하여 주님이 경종하신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자.  

  1. 악한 청지기의 경우

  (1) 악한 청지기는 주 재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종들입니다.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재림을 원치 아니합니다. 그날은 자기들의 거짓된 모습이 드러나는 날이요 그 대가를 받을 심판의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그들의 메시야가 베들레헴 땅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은 알고 있었으나 그 예언을 전해들은 동방박사들은 그곳을 찾아갔지만 그들은 가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메시야를 바라는 마음이 없었으며 메시야가 필요하지도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는 지혜도 진실도 없습니다.

  (2) 이들은 때를 따라 양식을 주는 목회가 아니라,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는 일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때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양들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 종들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이들은 생기기는 양처럼 생겼지만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숨어 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주님은 삯군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의 목회는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직업적인 목회입니다. 사명자적인 목회가 아닙니다. 자기 이익을 구하고 육신의 평안을 원하고 영광을 바랍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생활을 합니다. 취하는 생활이란 세상에 물든 생활을 의미합니다.

  (3)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어떤 조치를 취하십니까? 이에 대하여 반드시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의 머리 위에 내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지라. 그가 준 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라”고 하셨습니다(계18:5-6).

  엄히 때리시는 일은 그들은 환난 시기에 누구보다도 먼저 환난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기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이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곳”인데 이곳은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대 환난 시기를 말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회개해도 그 기간 동안 대 환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그 환난의 기간을 거쳐야 구원받은 자라면 구원에 이르고 받지 못한 자라면 짐승의 표를 받고 멸망 받게 될 것입니다.

  2. 많이 맞을 종과 적게 맞을 종

  이 악한 종들도 두 종류로 나뉩니다. 알고도 행한 종의 경우와 모르고 행한 경우의 두 가지입니다. 알고도 행치 않는 종에 대해서는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동일하지만, 알고도 행치 아니한 죄는 더욱 그 책임이 무거운 것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1)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주 재림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 무리들에게 재림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 성령의 강한 감동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같은 성령의 감동이나 자신의 성경 지식이 자신의 목회에 절실한 문제로 생각지 아니했습니다. 현실적인 생활에 안주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주 재림의 문제보다 심판의 설교보다 축복에 관한 문제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했고 양 무리들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목회 하다보니 어느덧 임기가 끝났습니다. 알지 못하는 시간,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런 종들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알지 못했다는 말은 주 재림에 대한 지식이 없어 재림 문제가 절실한 문제임을 깨닫지 못했을 경우입니다. 이들은 성경적인 종말의 징조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도 재림의 준비를 못하고 있는 처지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가 맡은 양 무리들에게 올바른 재림의 사상을 심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원하지만 깨닫지를 못하는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르치기를 원하지만 알지 못해 가르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에 대해 적게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적게 맞는다는 말은 아마 환난 중에 이들에 대해 많이 배려해 주시므로 그 고통을 감해주실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환난 중에 회개하여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통치아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경종하신 주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받은 일에 대하여 그 책임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많이 받았다는 말은 은사 적인 사명을 의미합니다. 많이 맡았다는 말은 재물이나 양떼들의 수효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사명이나 책임은 적게 받은 자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76)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

  (누가복음 12 : 49 - 50)  

  서 론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이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불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불은 주님의 사명의 완수를 말합니다.

  주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이 이 땅위에서 이루실 그의 사명을 말씀하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아직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그의 목적을 이루시지 못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던지러 오셨다고 하는 이 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불은 복음을 상징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나의 받을 세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 세례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불이 땅에 던져짐을 시사하신 것으로 보아 그의 세례란 그의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난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는 이 고난을 통하여 복음을 완성하시기 때문에 아직 이 고난을 겪으시지 않으신 주님은 그의 답답하심이 심하셨던 것이며 이 같은 답답함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2. 불은 왜 복음인가?

  복음은 인류의 구원과 심판의 동시적인 역사를 이루는 일을 합니다. 구원의 역사도 불로하시고 심판의 역사도 불로하십니다. 불로 구원의 역사를 하시는 일은 구원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불로 상징됩니다. 그 뿐 아니라 심판도 이 불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습1:18). 신 2:24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요3:18에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을 것이니라.” 복음은 이처럼 구원과 심판의 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불을 이 땅에 던지러 오신 분입니다. 이 불이 이미 붙었다면 주님이 원하실 일이 없으시지만 이 일을 위해서는 주님의 세례가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 세례란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가 답답하다고 하신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그의 인간적인 고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고민은 마26:38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이 같은 그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명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의 사명감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 같은 사명을 이루시기까지 답답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 이 불은 이제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그의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원의 불은 이미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는 120 문도에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임하여 지금까지 훨훨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불은 온 세계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도 이제 조만 간에 내려질 것입니다. 계15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히 담긴 금 대접 일곱이 예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 : 불은 복음입니다. 이 불은 지금 우리의 심령에서 불붙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성령의 불을 이 땅 위에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77) 복음과 분쟁

  (누가복음 12 : 49 - 53)  

  서 론 : 우리는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심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화평의 복음이 분쟁의 원천이 되느냐?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바른 견해를 알아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1. 우리가 누리는 화평

  복음은 분명 화평을 주는 일을 그 사명으로 합니다. 주님이 전하신 복음은 화평의 복음이심입니다(행10:36). 그러면 이 화평이란 말과 그 화평이 이루어지는 일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화평의 복음이란 말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을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22:21). 욥기에 있는 이 말씀은 인생이 하나님과 화목할 때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생과 하나님과의 화목의 방법인 것입니다. 죄인과 하나님과의 화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골1:20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로 죄의 용서함을 받게 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화평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롬5:1에서 이르시기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화평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요4:10).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화평의 결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2) 너희도 서로 화평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복음이 말하는 화평은 서로 화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로란 말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가 된 사이를 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 형제의 화목이 더 중하다고 하셨습니다(마 5:23-24). 우리의 화목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소금이란 사랑을 가리킨 것입니다(막9:50).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3) 다음에 복음이 말하는 화평은 사람들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라는 것입니다. 고후5:18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직분이 곧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들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고후5:19).

  2. 분쟁

  이와 반면에 복음은 요소 요소에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이요, 복음은 빛입니다. 우리는 이 빛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두움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미워하는 이유는 자신의 어두움이 복음의 빛 앞에 나타나기를 원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 것을 사랑합니다. 어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빛을 미워합니다. 주님은 세상이 나를 미워하였으니 너희도 미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 안에서 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처신에 대하여,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덕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비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태복음5:16).




  (78) 시대의 분변

  (누가복음 12 : 54 - 59)  

  서 론 : 외식하는 자들은 영의 눈이 어두운 법입니다. 그들은 시대의 움직임에 대하여 영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떤 때이냐? 하는 것을 아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그들의 영적 어둠으로 시대를 분변치 못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구약의 율법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메시야가 그들 앞에 서 계심을 바라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일에는 눈이 어두웠고, 교만과 오만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천지의 기상을 분변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1. 천지의 기상

  주님이 천지의 기상을 예로 드신 것은 그곳에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일기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본다는 말은 지중해가 그곳에서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쪽에서 바람이 일면 그쪽에 있는 수분을 날아다가 비를 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편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곳 사람들은 곧 소나기가 오리라고 생각하게 되며 그들의 이 같은 예측은 들어맞았습니다. 남풍은 남쪽에서 심히 더운 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남풍이 불어오는 것을 보면 곧 더워질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천지의 기상을 알아내는 지혜는 있으면서도 이 시대의 분변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시대의 분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언의 말씀을 연구하기도 하며 남을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예언을 통하여 마치 천지의 기상 같이 시대의 분변을 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된 메시야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세대가 메시야가 태어나는 세대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낡아진 언약의 시대는 지나고 이제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시대는 바야흐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은혜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그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통하여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분변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앞에 가까이 왔지만 그들은 그것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하여 주님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그들에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 받을까 두려우니라”(마13:14-15).

  3.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못하느냐?

그들은 이처럼 옳은 것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왜 옳은 것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하는 것입니까? 진리를 알기를 힘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파수하기를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 그 마음이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4. 화해하기를 힘쓰라

  주님은 이들의 완악한 마음을 마치 자기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관에게 끌려가는 비유로 비교하셨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재판관에게 끌려간 후에는 화해하는 시기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고소할 자가 되시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과 화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시대를 분변치 못하면 영적 소경이 됩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분별을 올바로 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시대는 주 재림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시대는 우리의 살아가는 역사적 무대 위에 전개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예언해 주신 주 재림의 예언에 나타난 시대상을 잘 분별하는 영적 지식과 감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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