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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장
 밤중소리  01-11 | VIEW : 651


  (52) 칠십 인의 전도대

  (누가복음 10 : 1 - 12)  

  서 론 : 예수님께 가장 긴요하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일군을 양성하고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몹시 바쁘고 피곤하신 중에도 이 동리, 저 동리로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으며 때때로 제자들을 보내어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전도의 훈련과정으로 가끔 제자들을 선정하여 각 동, 각처로 보내신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12명의 제자들을 보내시더니 이번에는 70인의 제자들을 선정하여 전도대로 보내시면서 주의 복음을 전하면서 명심하고 유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들려 주셨습니다.

  1. 추수할 일군을 보내소서

  전도대로 70인의 제자들을 선정하시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일할만한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더니 그의 말이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하면서 어렵다고 뒤로 슬그머니 물러서는 것이었습니다.

  (1) 그래도 예수님은 70명의 일군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뽑으신 이 70명의 전도대는 복음 전도의 정예부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일군을 찾다보면 속이 답답한 일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군들을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낯을 피하여 호렙산에 이르러 하나님으로부터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하는 물음에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자들은 다 죽음을 당하고 오직 자기만 남았노라고 불만을 토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7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않고 입을 맞추지 아니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만 일군인줄로 착각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 외에도 자기와 같은 일군을 얼마든지 예비해 놓으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주여, 가장 못나고 미련한 주의 종이 여기 있사오니 주의 뜻대로 사용하여 주옵소서”라고 겸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경우처럼 불의한 소문이 주인에게 들려 네가 네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와서 계산하라“고 하는 노여움을 사서 그 직분을 빼앗기는 날이면 이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용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눅16:1-2).

  (2)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곳에 파송할 제자들의 수효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타까운 나머지 그들을 향하여 추수할 일군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그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절에서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혼자 하겠다고 하는 욕심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일군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추수할 일군은 전도의 사명 자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추수할 것은 많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일군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들이 추수할 일군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효과 있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생명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뿐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의 도움 없이 가만히 그 앉은자리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인가 그에게 찾아가 복음을 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추수할 일군들입니다. 우리들은 이 추수할 일군으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2. 갈지어다

  예수님은 이들 70인을 향하여 두 명씩 전도 팀을 짜시고 각 동 각처로 보내면서 “갈지어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보내신 일터로 가야 합니다. “갈지어다”라고 하신 이 주님의 명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 반드시 적용시켜야할 명령이 되는 것입니다.

  (1) 주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전도대로 보내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염려입니다. 이 세상은 이리가 들끓는 곳입니다. 이리란 양을 실족시키거나 잡아먹는 사단의 권세를 말합니다. 이들이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사단은 그의 전 병력과 권세를 동원하여 전도자를 넘어뜨리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파송하는 이들 전도인들은 마치 어린양과 같은 순결함으로 이들 이리가운데로 들어갈 것입니다. 우는 사자 같은 모습으로 달라붙는 마귀의 권세가 그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미 이런 사단의 계교와 도전을 아시며, 또 그들보다 능력과 권세가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그들 가운데서 보호해 주실 것이며 지켜 주실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이들 전도대원들로 전도의 사명을 띄고 세상으로 나가는 일에 있어서 마치 이리 가운데로 들어가는 어린양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할 일에 대한 경종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양은 순결함에 그 생명이 있습니다. 전도인들이 비록 이리떼 같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신의 신분이 양임을 알아서 그의 순결함을 지켜야할 것을 교훈 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고 하셨습니다.

  3. 전도인의 자세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세상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전도인들에게 예수님은 몇 가지 알고 지켜야 할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1)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인이 자신의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전도해야 하는 것인가? 7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보면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이 삯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주께서 명하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고전9:14). 이 같은 일을 예수님은 그 복음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을 통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7절에 있는 말씀을 다시 한번 보면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 6장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받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의 생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그와 함께 누려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쓸데없는 곳에 귀중한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을 위하여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평안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의 평안이 복음입니다. 가정의 참된 평안은 복음으로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어느 곳에 가든지 차려 놓은 음식을 대접받고 병든 자를 고쳐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일은 그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떤 융숭한 대접을 받아도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사실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접치 아니하는 동리에서는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지금도 예수님은 추수할 일군을 찾으십니다. 부친의 장사나 가족과의 이별을 핑계하는 약하고 나태한 자가 되지 말고 복음전도자로 보내심을 받는 70인의 전도대의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53) 참 기뻐할 조건
  (누가복음 10 : 13 - 20)  


  서 론 : 예수님이 처음에 걱정스럽게 여기시면서 각 마을로 보냈던 70인의 전도대원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하시면서 보낸 그들이 기쁨으로 돌아와서 주님께 자랑스럽게 그들의 행한 전도사역을 늘어놓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들의 전도사역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 귀신의 항복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시면서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의 소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벳새다와 고라신의 화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과 기적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고장이 오히려 주님을 배신하여 복음을 거역한 지역에 대한 화를 선언하심으로 전도의 사역을 분부 받고 떠나려는 70인의 전도자들에게 경종을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경종은 몇 가지 우리의 교훈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1) 비록 심판을 받아 마땅한 고장이라 할지라도 복음은 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는 가버나움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고을들로 이 근방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 기간인 공생애 중 가장 많은 활동무대이셨습니다. 그 어느 고장보다도 이곳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고 이적과 기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런 벳새다, 이런 고라신 인줄 아시면 서도 그들의 회개를 위해 그곳을 찾으셔서 복음을 전하셨고 기적과 이적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전도자들은 죄악이 관용한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교훈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2) 이 말씀의 또 다른 교훈은 주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그가 베푸신 기적이나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그의 결과가 주님을 거역하여 믿음에서 떨어졌을 때 그들이 받을 화가 크다는 사실에 대한 교훈이란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만약 우리에게 행하신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회개의 가망이 없을 것이라고 바라보이는 다른 죄인들에게 전하셨다면 오히려 그들은 회개했을 것이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두려운 심정으로 우리의 구원을 견고히 잡아야 하며 축복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감사하는 마음과 보답하는 심정으로 주의 사업에 열심을 내야 할 것입니다.

  2.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나의 말을 드는 것이요

  예수님은 전도대원으로 파송될 70인의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의 사명이 중대함을 알려 주셨고 또한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권위가 얼마나 높은가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라”로 하신 말씀이십니다.

  (1) 전도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목자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일에 전도자를 보내시는데 그들에게 자기의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하는 모든 말은 주님을 대신한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자라고 말씀하심으로 전도자와 주님과의 일체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과 같은 심정으로 영접하고 대접해 주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고 주의 이름으로 심방 하는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대우는 우리 주님의 인격이나 대접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환을 어느 가정으로 심부름 보냈을 때 그 집에서 그 사환을 무시하여 욕설을 퍼붓고 냉대해 보낸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환을 그 집에 보낸 주인데 대한 냉대요 모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갈6:6).

  3. 참 기뻐할 조건

  드디어 각 마을로 파송되었던 70인의 전도대원들이 기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고 보고를 올렸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활동 중 가장 감동 깊은 기적은 귀신이 쫓겨가는 것인 듯 했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기쁨에 찬 보고에 주님은 세 가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1)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렵습니다. ① 나는 사단의 우두머리가 하늘에서 추방되는 것을 보았다. ② 광야에서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사단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③ 장차 사단이 받을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다 등의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때까지 사단은 공중권세 잡은 자로 활동하면서도 하늘의 보좌에 출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의 타락과 하늘보좌에서의 추방은 이미 사단이 범죄 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사14:12-15, 겔28:13-17). 그러나 그같은 사단이 그 후에도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에 오르락내리락하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욥1:6). 욥을 시기한 사단은 천사들과 함께 그 대열에 서서 욥을 참소한 것입니다. 그러던 그 사단이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곳으로부터 조차도 쫓겨나 공중권세자로서만이 그의 활동이 축소된 것으로 하늘에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그 순간, 이 같은 일이 있었다고 보아지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전도인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복음초기에 주셨던 사도적인 권세요, 또 마지막 인류의 복음의 추수시기에 두 증인에게 주시는 권세로 여겨집니다. 뱀과 전갈을 밟는 권세란 사단의 권세에 대한 승리로 말합니다. 사단의 권세가 복음의 권능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의 능력을 막을 권세를 말합니다. 이 모든 악의 세력들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전도활동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결론 : 다음에 예수님은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엡1:3-5). 그 이름이 기록된 책이 어린양의 생명 책이라고 했습니다(계20:15). 이곳에 기록된 사람은 선택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에 감격하여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뻐하는 생활은 순종으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하늘에 상급을 쌓는 생활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54) 그러면 살리라

  (누가복음 10 : 21 - 28)  

  서 론 : 한 율법사가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 율법사는 아마 바리새인들에 의해 보낸 율법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시험을 위한 질문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영생을 분리시킬 수 없었습니다. 영생은 바로 율법을 지키는 일로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은 율법을 경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안식일에도 바리새인들이 금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질문에서 예수님의 영생과 율법 관을 알아보고 고소의 재료를 얻으려는 함정으로 묻게 된 것입니다.

  1. 성령으로 기뻐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율법사와의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은 돌아온 70인의 전도 대원들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뻐하시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기뻐하실 만한 생활조건이나 주위 환경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기뻐하실 수 있었는가? 21절에서 이르시기를 “성령으로 기뻐하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기뻐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성령으로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한 기쁨이 영원한 기쁨이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1) 성령으로 인한 기쁨은 순종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순종에는 기쁨이 따릅니다. 순종이 없는 생활에 참 기쁨이 없습니다. 순종에는 마음에 평안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 같은 평안과 감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인한 기쁨은 소망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소망은 현실적인 우리의 생활에 기쁨을 심어주는 활력소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대한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현실적인 생활의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그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망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은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성령으로 인한 기쁨은 봉사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주의 일에 힘써 봉사하는 성도들에게는 언제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에서 얻는 기쁨은 값진 기쁨입니다. 이 같은 기쁨의 체험자는 어떤 봉사라도 감사함으로 잘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그 봉사하는 중 그리고 그 후에 오는 기쁨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4) 성령으로 인한 기쁨은 기도의 응답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기도에 힘쓰는 사람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일에 게으른 사람들이 보기에 괴로운 일인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기도하는 그 사람은 남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은 그 응답에서 오는 기쁨이 언제나 값진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

  예수님은 하나님께 간구 하시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고 아뢰셨습니다.

  (1)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 슬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세상의 지혜와 슬기로서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란 육신 적인 지혜를 말하는데 이 지혜는 모든 사물을 인간적인 지혜로 연구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영적인 신령한 일에 대하여는 오히려 어리석은 지혜가 된다고 하셨습니다(고전1:18-21).

  (2) 어린아이들이란 세상 지혜에 미련하고 어두운 사람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영적 세계의 깨달음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 되지 아니하고 영적인 지혜로서만이 가능합니다.

  (3)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일,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아는 일에 있어서 어린아이들의 지혜로서가 아니면 진리를 깨달아 알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하여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오직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지식은 아들만이 아시고 그리고 “그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의 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도 온전한 자식이 못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시험한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이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물으신 이유는 이 사람은 율법사였으며 예수님으로부터 율법적인 해답을 얻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요 이방인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라고 확신했던 근거가 바로 율법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을 잘 지키는 생활을 통해서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데 있으며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에 영생이 없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율법 이외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바대로 율법적인 해답을 해 드리기 위해서 이처럼 물으셨습니다.

  (2) 이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의 대답은 지혜로운 대답임에 틀림없었지만 그러나 이것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율법 관에는 전혀 변동이 없었습니다. 이 율법사는 ‘예수님의 경우 과연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대답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율법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답변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행하면 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행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육체가 한 명도 없다고 성경에서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2:16).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지키므로 의를 얻게 하시려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마음이 완악함으로 인하여 예수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고 율법으로 인한 의를 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율법의 저주 아래 처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이 이 율법사에게 이를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 율법사로 하여금 네가 말한 그 율법을 네가 그대로 행함으로 그 가운데서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한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예수님을 잃었는데 이 율법사는 과연 그 후 어떤 길을 택했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55) 내 이웃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10 : 29 - 37)  

  서 론 : 영생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려든 한 율법사가 이제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고 물었습니다. 이 율법사는 하나님께 대한 관념은 분명한데 그러면 네 이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그 이웃의 대상은 누구인지? 어려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같은 질문을 한 까닭은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그들의 이웃이 바리새인들이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며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 파 유대인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행하여 “당신은 그 이웃이 누구로 보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1. 비유로 말씀하신 이웃

  예수님은 이 율법사의 질문에 매우 지혜로우신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율법에서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그들의 허구성을 책망하심으로 율법사와 예수를 송사 하려고 따라 다니는 다른 바리새인들로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1)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27㎞ 정도입니다. 과히 가까운 거리도 아니지만 이 길은 여행자들에게는 가파른 길이며 위험스러운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해발 9㎞나 되는 높은 지대인데 비하여 여리고는 지중해보다 오히려 3㎞나 더 낮은 저지대임으로 길의 경사도가 심했습니다. 이 사람은 동행인도 없이 그를 보호해 줄만한 사람도 없이 험한 고갯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런 곳에는 강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가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강도는 이 사람을 붙잡고 소지품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그 옷까지 벗겼습니다. 그리고 때리기까지 하여 거반 죽게 만들고는 그 사람을 고갯길에 버려 둔 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2) 마침 그 길로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후 처음으로 이 길을 지나간 사람이 이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이란 이스라엘의 가장 거룩한 어른입니다. 하나님 앞에 백성들의 속죄 제물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자비해야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당장에 누가 손을 써 주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한 사람인데도 그대로 피하여 지나친 것입니다. 이 제사장은 율법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으면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율법의 강령을 내 던져버린 것입니다.

  (3) 그 후에 다른 한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레위인이였다고 했습니다. 레위인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하며 이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중에서 장자로 간주되었습니다(민3:21-27). 이 레위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으며 서기관들이나 율법사 등 많은 사람이 레위인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도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레위인들 조차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 비유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갈3:10-12).

  2. 어떤 사마리아인의 등장에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뜻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 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먼저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달랐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돌보아 주었을 뿐 아니라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1) 어떤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인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천히 여기는 존재입니다. 이곳에 등장시킨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히 여기지 않다고 비방하며 지금도 율법을 가지고 시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마리아인처럼 천히 여기심을 받고 계시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죄 가운데서 구원받아야 할 비참한 죄인들에 대한 놀라우신 사랑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런 사랑을 가지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교훈 해 주시는 것입니다(요13:34).

  (2) 이웃에 대한 사랑은 불쌍히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그냥 가 버린 이유는 그들에게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심에서 출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불쌍히 여기심에서 비롯되셨습니다(막5:19, 눅7:13). 우리들에게 이르시기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엡4:32).

  (3)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 가까이 갔다고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그 대상자에게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간다는 것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불쌍히 여기면서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마음의 원하는 바를 막는 사람으로 스스로 속이는 사람입니다(요3:17).

  (4)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실천적인 사랑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줬을 뿐 아니라 돈까지 주었으며 더 소용되는 여비까지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사랑의 첫째 조건입니다(약2:26). 그뿐 아니라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4:17).

  3. 내 이웃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과연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정의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비유에서 나타내 주는 내 이웃이란 어느 한정된 범위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돌보아 주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내 보내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이들을 피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내 이웃이란 내 주변에서 곤경을 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내 주변에 곤경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이웃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또한 내 이웃이란 내 주변에 있는 잃은 양들입니다. 제사장은 잃은 양을 발견했지만 그를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사람의 생명의 중요성을 외면한 것입니다. 레위인도 잃은 양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정성을 기우려 그의 생명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로 그 상처에 부었습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새 힘을 공급해 준 것입니다. 상처를 싸맸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도움까지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주막까지 데려와서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까지 인도하여 하나님의 종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율법사에게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으심은 오늘에도 나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56) 더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

  (누가복음 10 : 38 - 42)  

  서 론 : 예수님의 전도여행은 피곤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하여 쉬게 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럴만한 보금자리도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눅:9:58). 이제 예수님 일행은 한 촌에 들어갔습니다. 지명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여기 한 촌이란 동리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는 동리인 점으로 보아 베다니임이 분명합니다. 이 집에는 삼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이 집에 들어가셨을 때 형제간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다툼은 신앙적인 면에서 아름다운 다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툼에서 마리아가 더 좋은 태도로 인정받은 일은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영접한 마르다 형제

  38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르다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옵니다.

  (1)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 동리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맞으러 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들어가셨을 때 그 소문을 들은 베다니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소문만 들었을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혹은 병자들이 나왔을는지 모릅니다. 혹은 예수가 누구이신가 구경 삼아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기 위해 예수님을 길가에 찾아 나가 맞은 사람은 마르다 뿐이었습니다.

  (2)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은 크나큰 영광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에 대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반기어 영접한 것입니다. 마르다와 같은 사랑과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할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1:12). 우리가 복음서를 연구해 보면 예수님은 가끔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르다의 집에 들르신 것으로 보아집니다. 그것은 마르다의 형제들이 사랑과 믿음과 정성으로 영접하고 반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마르다는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그를 영접할 수 있는 제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날도 마르다가 예수님의 대접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모습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심령으로 그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2. 마리아가 한 일

  예수님이 마르다의 영접으로 집에 들어서시자 의자에 앉으셨습니다. 마리아는 언니처럼 마중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예수님을 대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가 남은 일은 언니에게 미루고 예수님 발아래 앉았습니다.

  (1) 마리아는 주의 말씀에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기뻐한 이유 중 하나가 그의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분주하신 일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집에서 오래 지체치 못하실 줄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하면 그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초조한 마음으로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시19:10).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갓난아이들 같이 순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벧전2:2).

  (2) 마리아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아름다웠습니다. “발아래 앉았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이 같은 태도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이런 자세로 말씀을 듣는 사람이 말씀을 깨닫고 열매를 맺습니다(마13:23). 마리아의 말씀을 듣는 자세는 “말씀만 하옵소서 내가 따르겠나이다”고 하는 순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한마디도 놓칠 새라 고개를 쳐들고 입을 주목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말씀을 듣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3. 예수님의 판단

  마르다의 집안은 갑자기 붐볐습니다. 갑작스런 방문이라 누구의 도움을 받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일손을 던지고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만 분주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있는 동생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1) 마르다는 신앙적으로 성숙한 여자였습니다. 주를 위한 봉사는 신앙의 성숙에서 옵니다. 참으로 말씀을 갈급히 사모하는 사람들은 또 봉사에도 열심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일에 많은 준비를 혼자 담당한 마르다는 칭찬 받을 만한 봉사자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한가지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생 마리아에 대하여 시기하는 마음으로 다투었다는 사실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서 투정을 부렸습니다. 자기는 분주스레 일하고 있는데 동생 마리아는 한가로이 방안에서 말씀만 듣고 있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왜 주님은 마리아로 언니를 도와주라는 명을 내리지 아니 하시나이까?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항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2) 예수님은 마르다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마르다의 봉사는 주님을 위한 것이므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하시는 정다운 음성에서도 마르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봉사에 대한 평가절하가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봉사는 반드시 거창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자기 처지에 합당한 대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많은 것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일로 인하여 마음만 분주한 나머지 불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같은 방법의 봉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란 주님을 대접할 음식이었습니다. 그것을 장만하는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많은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과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대접은 적은 것이라도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많은 것으로 염려하고 근심할 것이 아니라 적은 봉사라도 진심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리아의 경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분명히 좋은 편을 택한 것입니다. 그가 언니를 도와 봉사하는 일보다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일이 마리아에게는 분명히 좋은 일이었습니다. 마르다가 자기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해도 아마 마리아는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움직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렸고 마르다는 대접해 드릴 음식 준비로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일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하며 자신의 은사를 그런 방법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의 교회에는 제각기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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