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누가복음 9장
 밤중소리  01-11 | VIEW : 633


  (44) 권세를 주신 예수님

  (누가복음 9 : 1 - 6)  

  서 론 :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전도의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곁을 떠났을 때 그들 스스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를 대비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부지런히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익혀주고 복음을 전하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1. 능력과 권세를 주신 예수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려고 전파하려 나갈 때에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1) 능력과 권세를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마28:18). 예수님은 만민을 지배하시는 권세 자이십니다(요17:2). 예수님은 그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분입니다(히1:3).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요1:3-10).

  예수님은 이처럼 능력과 권세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시므로 모든 능력과 권세는 그 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어떤 능력과 권세가 있다 해도 그것을 나에게 주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며 그것을 주신 이유는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청지기의 사명으로 주신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마7:22-23).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런 권세는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떠나는 그 때에만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언제나 귀신을 제어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권세와 능력이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한 간질병 들린 어린 소년을 고쳐주는 일조차 실패했습니다(마17:16).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에 우리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 혹 놀라운 권능이 우리의 기도나 손길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능이 항상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3) 복음을 전할 때에 능력이나 권능을 따르는 일은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지 반드시 따르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에 기적이나 이적이 일어났다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2:3).

  복음을 받아드리는 일은 이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령의 나타나심에 있습니다. 복음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복음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능력이요 권세인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했습니다(롬1:16). 우리는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권능을 받아 복음을 전하여는 생각보다는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케 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2.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자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시면서 그들이 각 고을에 파송되어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취해야 할 전도자의 자세를 몇 가지로 일러주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려고 여행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다는 것과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신 일입니다.

  (1)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지팡이의 종류나 그 사용도에 대한 말씀이 여러 가지로 나오지만 이곳에 나와 있는 지팡이는 여행을 위한 보신도구를 의미합니다. 중동지역은 사막이 많은 지방이라 각가지 해로운 짐승이 출몰합니다. 나그네들은 이 같은 해로운 들짐승의 피해로부터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지팡이를 필수적인 여행 휴대품으로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런 일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주머니나 양식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머니란 물건이나 옷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챙겨 넣는 가방을 말합니다. 양식은 식생활에 필요한 음식입니다. 전도인은 이런 의식주에 대한 염려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십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나그네들을 성심껏 대접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는 일꾼이 자기 일에 대한 정당한 삯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3) 돈이나 두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는 호화로운 여행이 아닙니다. 만약 전도인이 돈을 많이 가졌다거나 여러 벌의 옷을 가지고 다닌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딤후1:8).

  (4) 어느 집이든지 유하든 곳에 머물다가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인이 대접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유숙하는 곳을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성껏 맞이한 가정이면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결론 :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거든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영접치 아니한다는 말은 노골적으로 핍박하는 일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로 그 마을에서 내쫓는 일을 말합니다. 이들이 그 성에서 떠날 때까지 회개치 아니하고 계속하여 핍박한다면 그 성에서 떠날 때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같은 주님의 당부를 듣고 복음을 힘있게 전했다고 했습니다.




  (45)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누가복음 9 : 7 - 17)  

  서 론 : 벳세다 들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벳세다란 곳으로 떠나가셨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이 사실을 탐지하고 그곳까지 따라왔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마지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들려주시면서 병든 자의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덧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어두어지자 제자들의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것은 이 많은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먹여야 할 일이 걱정스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라고 여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태연한 자세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헤롯왕의 두려움

  그 당시 헤롯왕은 갈리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이었는데 그에게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과 그의 제자들의 기적적인 전도활동의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헤롯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심히 당황했는데 그것은 혹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말하며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중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분봉왕이란 자기의 통치권이 미치는 어느 특정지역의 통치자를 말합니다. 헤롯은 한가지 걱정이 생겼는데 그것은 예수란 사람이 자기 주변에 갑자기 나타나 세례요한과 똑같이 불의를 책망할 뿐 아니라 기사와 이적을 행하며 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른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 헤롯의 마음에 두려움을 안겨준 것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만약 이런 소문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생명과 왕권에 크나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은 큰 군중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을 제외하고도 오 천명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유하게 하며 그들에게 배불릴 음식을 제공해 준다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건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하셨습니다.

  (1)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먹을 것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중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리고 명하셨을 때 주었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너무나도 부족한 사실에 집착한 나머지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않고는 할 수 없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라고 하신 말씀에 그들의 믿음이 따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어라”고 하셨을 때 말씀을 따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라고 명하신 것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군중들을 먹일 수 있는 양식으로 넉넉했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이 줄 수 없었던 것은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먹여야 할 대상은 무려 남자만 오 천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불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인간적인 생각이 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3) 기적은 순종에서 나옵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들의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더라면 예수님의 손에서 이룩하셨던 그 놀라운 기적이 그들의 손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전혀 미칠 수 없는 일이라도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가 하겠나이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선지자의 아내가 엘리사의 말을 듣고 동네에서 빈 병을 많이 빌려왔습니다. 그리고 한 병밖에 없는 기름을 그 수다한 빈 병에 붓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이때 이 여인이 ‘엘리사님,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어찌 한 병의 기름으로 이 많은 빈 병에 채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고 이의를 제기하고 따르지 않았다면 그 여인에게는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왕하4:1-7).

  (4) 이 말씀의 교훈은 네가 가진 것으로 네 이웃의 가난을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한 이후에 구제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네 그 많은 것 중에서 얼마간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네게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는 더욱 부하게 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잠11:24). 그는 후히 주시고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눅6:38).

  결론 :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쳐야 합니다. 가장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므로 봉헌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기적은 여기서 나옵니다. 넘치는 보상도 여기서 받게 됩니다.  





  (4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누가복음 9 : 18 - 22)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올바른 메시야 관을 심어주시려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유대인의 메시야 관은 영광의 메시야 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시는 메시야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메시야 관 역시 그러했습니다. 다만 다른 유대인들과 달랐던 것은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메시야인 줄 믿고 따랐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고난의 메시야로서가 아니라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왕으로 등극하실 영광의 메시야로 믿고 따랐습니다.

  1.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들으시기 위해 먼저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실인즉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로 알고 있건 그런 일엔 별로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처럼 묻게 된 이유는 제자들의 대답이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해 그들 자신이 알도록 하시기 위해 먼저 이처럼 물으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세간에서 퍼지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평판을 세 가지로 줄여 말씀드렸습니다.

  ① 더러는 세례요한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빨리 공생애에 들어갔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유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세례요한이 헤롯왕에 의해 죽음을 당한 후, 통분해 하다가 이어 예수님의 권능 행하심과 권위 있는 말씀 선포로 많은 사람들에게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난 것이란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인데 이 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잘 먹혀 들어간 것입니다. 헤롯왕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② 더러는 엘리야라고 알려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란 아합왕 시대 선지자 엘리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전 엘리야가 먼저 나타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마17:10-13).

  이 엘리야에 대한 예언은 말라기에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신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말4:5).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는 생각지 않고 이 엘리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영광의 몸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③ 다음에 더러는 옛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옛날에 등장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와 같은 그런 선지자의 사명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겠느냐는 관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관점은 대단히 다양하고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알고 싶어하신 것은 제자들이 입에서 나올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먼저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1) 그리스도란 말은 히브리어 메시야의 역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부른 것은 왕으로서의 기름부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로서의 직분도 함께 가지고 계시지만 그의 기름부음의 근본은 왕으로서의 직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단9:24절에서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이 예언은 예수님의 천년왕국에서의 왕으로서의 기름부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단9:25,26절에서 예언되어 있는 기름부음은 예수님의 초림의 메시야적 사명의 직무로 받으실 기름부음이십니다.

  (2) 제자들이 바른 메시야 관을 고백은 했지만 메시야의 사역을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   시 잘못된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53장에 예언된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사야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는 영광의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자기 선생이 메시야라고 알려 준다고 해도 메시야 관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믿어지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만약에 메시야 관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예수님을 환영한다면 아마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는 민중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메시야의 사역에 많은 지장을 초래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이 받으실 고난에 대하여 숨김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그들로 이사야로 예언한 사53장에 대한 예언을 깨닫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7) 참 생명의 가치

  (누가복음 9 : 23 - 27)  

  서 론 :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 당하심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따르는 일은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수조건입니다. 이것을 교회에 넘겨주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골1:24).

  1.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의 태도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무든지 나를 다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걸림돌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참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1)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의 자세는 첫 번째로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말씀한 자기란 육신의 사람으로 자기 본위로 살았던 옛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이 사람을 날마다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생각대로 살아도 안되고 육신대로 살아도 안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롬8:6-8).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롬8:13). 영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육신대로 살면 죄를 범하게 되지만 영을 좇아 살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것은 육신의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롬7:4).

  (2)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십자가란 고난과 시련을 말합니다. 자기가 잘못하고 그 일로 자신에게 찾아오는 시련을 십자가란 말로 포장해서는 안됩니다(벧전4:15). 십자가란 자기 생애의 억울한 일, 받지 않아도 될 일 때문에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이 같은 자기의 십자가를 제각기 짊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는 일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질병도 오고 사고도 오고 실패도 오고 죽음도 옵니다. 우리는 이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지는 방법이 세상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벧전5:7). 다음에 우리는 주를 위해 져야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노라면 이런 일은 때때로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마5:10-12).

  2. 목숨을 잃는 일과 얻는 일

  예수님은 다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여기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하는 목숨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숨은 자신의 육신의 위한 풍요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어야 할 옛 사람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생애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결국은 자기 생명을 잃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을 것이라고 하신 이 생명은 영적 생명,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2) 그러나 여기 또 하나의 경우가 있는데 이 사람은 주님을 위해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목숨이란 순교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딤후1:8). 자신의 생애를 주님을 위해 바치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처럼 주를 위해 자기의 육신 적인 목숨을 바치면 구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구원은 영적 생명의 구원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풍성한 축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3) 예수님은 인생의 생명의 가치를 높이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어도 그 가치는 생명의 가치만 못한 것입니다. 천하를 얻는 인생을 살아가도 자기의 생명을 잃는다면 그의 생애는 결과적으로 인생의 파멸뿐입니다(눅12:15).

  결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①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육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말합니다. ②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기피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③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당하는 일을 싫어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지막 주 재림의 날에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의 날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날에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48)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누가복음 9 : 28 - 36)  

  서 론 : 예수님의 공생애의 정점은 그의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로 많은 시간을 기도하셨으며 잡히기 전날 밤에도 밤새도록 이마에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그 용모가 영광의 광채로 변모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시는데 그 대화의 내용이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에 대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기 전,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자기의 참 생명을 찾는 일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결론적으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시면서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에 나온 27절 말씀에 대한 해석이 구구합니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라고 하신 말씀은 그곳에 있었던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제자들이 다 죽었는데도 아직 예수님은 영광 중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그의 실제적인 재림이 아니라 다른 각도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오순절의 성령의 임하시므로 성취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 같은 성령의 보내심은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이행이 되십니다(요14:18-19).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오순절을 기점으로 당신의 교회를 이 땅위에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너희가 본다고 하신 점으로 보아 “너희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고 하신 말씀이 그의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측근에 있었던 세 제자

  예수님 곁에는 열두 명의 제자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은 그 중에서도 특히 세 제자를 더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입니다.

  (1) 이들은 주님의 기도를 돕는 기도의 동반자들이었습니다. 밧모섬에서의 사도 요한의 깊은 기도를 볼 때 이들 세 제자들은 주님 곁에서 주님의 기도를 도와 두릴 수 있는 기도의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그들이 이 산에서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가 졸며 자기고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는 으뜸으로 손꼽을만한 제자였습니다.

  (2) 이들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 담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유약한 계집종들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결박당하여 끌려가신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들어갔었다는 사실과 요한은 끝까지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담대한 믿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로 복음을 위해 피를 흘린 사도입니다.

  이들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그 용모가 변화되셨다고 했습니다. 이 변화는 변형으로 일반적인 변화란 뜻과는 다릅니다. 이 변형은 다른 곳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변화가 아니라 스스로 가지고 계시는 자기 모습의 영광을 그때 나타내신 것입니다.
엘리야의 영광의 모습은 살아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 받을 종말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고전15:5
1). 엘리야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의 하늘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띠고 주님을 찾아온 모세와 엘리야와의 상면을 위해서입니다. 영광의 모습으로 주님을 찾아온 그들과 대면하시려면 예수님도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어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께 나타나 하마께 나눈 대화의 내용은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에 대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주님의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므로 주님으로 하여금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지시고 대비하게 하시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세 제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이 같은 광경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너무나도 황홀한 나머지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여 초막 셋을 지을 것을 제의했으며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간청은 받아드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모세와 엘리야를 덮었습니다. 이때 구름 속에서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결 론 :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서을 듣고 있었던 이들 세 제자들 앞에는 어느덧 모세도, 엘리야도, 구름도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았던 이 모든 일들은 “오직 예수만 보이기 위함”이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신비에 치우치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초점을 다른 곳에 돌려서는 안됩니다. 영생이신 분은 오직 예수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은 오직 예수이십니다. 예수만 바라보는 성도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됩니다.





  (49)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누가복음 9 : 37 - 43)  

  서 론 :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에 오셨고 패역한 세대에 오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계실 동안 끊임없이 탄식하셨으며 그런 어둠 속에서 그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세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던 예수님이 이튿날 산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이 있는 동리로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아들의 병을 고침 받기를 원하는 한 아버지의 간절한 간청을 받으시면서 이 같은 탄식의 책망을 주신 것입니다.

  1. 제자들의 실패와 주님의 탄식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제자들을 둘러싸고 그 주변이 떠들썩했습니다. 제자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려 경련을 일으켜 고통을 당하는 한 어린아이를 가운데 놓고 쩔쩔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아비가 자기 외아들의 병을 고쳐보려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탁했지만 귀신이 물러가지 않고 여전히 병 증세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 제자들은 왜 귀신 들려 고통을 당하는 그 아비의 아들을 고쳐주지 못한 것입니까?

  (1) 제자들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주님과 떨어진 심령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권능은 주님과 함께 하실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입니다.

  (2) 그들은 기도생활에 나태했습니다.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실 때에도 그들은 동행치 아니했습니다. 기도를 시켜도 그들은 졸거나 잠자는 일이 일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이나 주님의 권능을 받고 그 권능의 힘으로 될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마17:21절에 있는 난하주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류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한번 받은 은혜나 몇 번 행한 권능을 믿고 기도생활에 나태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제 아무 일도 주의 이름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무리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권능을 보여주시고 권능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건만 그들은 그것을 간수하지 못하고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올바른 믿음이나 주님이 주신 권능이나 능력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심히 탄식하십니다(롬8:26).

  (4) 주님은 그 아들의 아비와 그와 함께 있는 무리들의 불 신앙을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좋은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어떤 결정적인 기적을 원했습니다. 적어도 메시야된 권능이나 기적이라면 홍해를 가르거나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했던 모세의 권능쯤은 나타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유대인들의 지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먹게 하였다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0-31). 이 말씀은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이 메시야라면 더 큰 이적을 보여야 우리가 믿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불 신앙적인 요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저들의 불 신앙에 마음을 아파하시면서 탄식하신 것입니다.

  (5) 예수님은 패역한 세대를 탄식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참 신앙을 버리고 외식하는 신앙으로 회칠한 무덤을 만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율법을 외쳐댔지만 그들이 지킨다는 율법으로 그들 자신이 스스로 정죄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을 지키는 태도에 대해 “화 있을진저”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앞에 조상 대대로 대망 해 온 메시야를 바라보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로 귀신을 쫓아내고 각가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그 증거들을 믿으려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의 일을 한다고 모욕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가슴 터지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네 아들을 데려 오라

  예수님은 그들을 이처럼 책망하시면 서도 그들이 당하고 있는 처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아비에게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비는 자기 아들을 주님께 데려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아비의 끈질긴 간구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에게 부탁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산에서 예수님이 내려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신앙은 응답을 받습니다. 이 아버지는 믿음이 없었지만 주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호소했습니다(막9:24). 우리는 우리의 문제점을 가지고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믿음이 없을지라도 믿음을 구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결 론 : 지금 우리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이 패역한 세대에 물들지 말고 거룩하므로 의의 세마포로 단장해야 합니다.





  (50) 누가 크냐

  (누가복음 9 : 44 - 48)  

  서 론 :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계급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어느 곳이건 사람이 모이는 곳엔 큰 자와 작은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각기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간에도 이 작은 자와 큰 자에 대한 말이 오고 갔습니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그들 자신의 심각한 문제라고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이 되실 터인데 그때 가서 우리 중에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서 과연 누가 높은 사람, 큰 자의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이 땅위에서조차도 교회에서 누가 큰 자냐는 문제를 가지고 시기하고 싸울 때도 있는 것입니다.

  1. 숨김이 된 말씀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깨닫지도 못하는 말씀을 자주 들려주셨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이해도 못하고 잘 깨닫는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말씀을 왜 하시는지 의아심을 가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는데도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니엘도 하나님으로부터 종말에 관한 많은 환상과 되어질 일에 대한 예언을 받았지만 그때 그 자신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주신 환상과 예언은 종말에 되어질 일이기 때문에 종말에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에 의하여 해석이 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씀을 적절히 주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믿음의 분량과 은혜의 깊이에 따라 주시기 때문에 뜻을 모르고 듣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시기에 가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남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만약 전도 초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들의 선생님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고난의 메시야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직접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야 이 말씀을 깨달았던 일은 주님의 사역이나 제자들 자신을 위해 대단히 유익한 일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숨김이 되는 말씀도 있습니다. 구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전혀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대한 메시야의 고난은 아직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숨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장차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실 때 그때 비로소 그 숨김이 벗어져 드러날 것입니다. (슥12:10) 숨김이 되는 말씀은 그때에 이르러야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장차 당하실 고난이나 부활에 대한 것은 철저하게 숨겨진 말씀입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제사장들에게도 바리새인들에게도, 사두개인들에게도 숨겨진 말씀이었습니다. 사단에게도 숨겨진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그 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 종말에 관한 숨겨진 말씀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연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 숨겨진 것을 벗겨 주심으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누가 큰 자냐?

  주님을 따르고 있는 열 두 명의 제자들은 그들의 심중에 언제나 누가 높으냐? 는 잠재적인 의식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각에 예수님이 왕으로 오르실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올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표면에까지 드러내 놓고 다투는 양상을 띄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다른 제자들을 제쳐놓고 “우리의 구하는 것을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아뢰면서 한다는 소리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간청을 올린 일도 있었습니다(막10:35-45).

  (1)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앞에 세우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여기서 주님은 어린아이의 영접에 대한 말씀으로 누가 크냐고 하는 그들의 변론에 교훈을 주셨는가? 어린아이란 그의 신분의 비천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이처럼 소외당하는 비천하고 낮은 사람들을 영접하는 사람이 참으로 큰 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란 뜻입니다. 어린아이란 낮은 자리에 있는 형제를 말합니다. 신분이 낮고 가난하고 멸시 당할 수밖에 없는 약한 자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해 주는 사람이 교회에서 큰 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 해 주신 것입니다.

  (2)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가 되기를 원하면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가히 역설적인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역설적인 말씀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신분의 고하, 재산의 차등, 인격과 인품의 차이, 학식의 유무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제각기 자신들이 스스로 크다고 자부하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중에서 가장 작은 자로 생각하고 인정받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작은 자가 되려면 겸손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란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에 비하여 쓸모 없는 사람으로 낳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여기고,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귀히 여기며, 바르고 의로운 일에 자신의 견해를 꺾고 올바른 주장을 따르는 자세를 말합니다. 만약 겸손에 진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겸손이야말로 위장된 겸손이요 외식 적인 겸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이란 말에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가장 작은 자가 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스스로 비천한 자의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존귀한 줄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비천히 여김을 받을 사람입니다. 마리아처럼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하는 겸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눅1:38). 예수님의 비천은 우리의 본 받을 바가 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빌2:6). 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빌2:8).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취할 태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언제나 자기를 비천한 존재로 낮추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5) 다음에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부족과 죄인 됨을 바라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을 안다는 일은 자기 발전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 앞에서도 자기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자신의 부족과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가운데 자신의 비천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 됨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교회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높은 자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가장 작은 자의 위치에서 헌신하시고 봉사하십시오. 그러면 가장 큰 자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51) 세 종류의 사람

  (누가복음 9 : 49 - 62)  

  서 론 :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같은 마음은 세상에 얽매인 줄로 인하여 우리의 원하는 바를 가로막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모두 마음으로는 주님을 따르기로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주님을 좇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이들 세 사람의 경우를 잘 살펴보는 중에 우리들도 그들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1. 주님의 두 가지 책망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되어진 일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달려와서 자신이 본 한가지 사건에 대한 보고를 올렸습니다.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일을 행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일은 사실로 보아집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금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을 구태여 금할 필요가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로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나 주의 일을 행하는 일에 그런 일이 우리의 독점 물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하는 일의 공과는 주님께 맡기고 너희는 너희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면 된다는 의미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 중에 시장하신 지라 제자들을 사마리아 고을로 식사 준비차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마리아인들이 이들 일행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그들로부터 나그네 대접을 받지 못하고 시장 끼를 참아가며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이때 화가 치민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요한을 돌아보시며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혹 요한과 같은 경우를 만나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저주를 부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이처럼 관대치 아니하셨다면 아마도 그 당시 유대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멸망을 당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일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다른 촌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2. 세 사람의 경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제자들도 흥분에 쌓여 있었고 주님을 따르는 군중들도 많은 흥미를 가지고 따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지금 올라가시는 그 길이야말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는 길 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기양양했던 것입니다.

  (1) 그런 중에 어느 한사람이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일을 안이하게만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즐거운 일이요 기쁨이 충만한 길이요 축복을 받을 길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이 사람의 경우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기쁨으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3:20-21).

  예수님은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육신적으로 결코 평안하고 즐거움이 따르는 일이 아님을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5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영광의 길 인줄 알고 제의했다가 어처구니없는 말씀을 듣고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는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2)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고 있는 다른 한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부르심은 너무나도 놀라운 축복의 소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소명에 곧 응하지 못하고 다른 토를 달았습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마4:18-22). 그러나 이 사람의 경우는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기회는 언제나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잃어버리면 영원히 놓쳐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서의 경우가 그러했고 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물론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우선적인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 부친을 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 주님을 좇는 영광의 대열에서 밀려났습니다.

  (3)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가족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가족에 대한 작별이란 가족을 이해시키고 가족에 대한 모든 준비를 갖추고 그리고 나서 가족에 대한 거리낌이 없도록 만들어 놓은 후에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마10:37-38).

  예수님은 “이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대한 경종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눅17:33) 가족에 연연하여 주님 따르기를 더디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는 뗄 수 없는 끄나풀에 얽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롯이 소돔 땅을 택한 것도 뒤를 돌아본 연고입니다. 뒤란 세상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뒤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는 사람들입니다.”(빌3:13-14).

  결론 :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군사들입니다. 군사들은 그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 드리는 목적이 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고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딤후2:3-4).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군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REV :   누가복음 10장 밤중소리 
 NEXT :   누가복음 8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