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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
 밤중소리  01-11 | VIEW : 816



  (31) 어떤 백부장의 믿음  

  (누가복음 7 : 1 - 10)  

  서 론 :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어떤 백부장의 믿음은 경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이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믿음이 예수님의 칭찬을 들을 것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었다는데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 말씀의 권능에 의해 자기 하인의 죽을병이 고침 받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믿음의 사람 가버나움의 백부장

  본문에 기록된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로마군의 장교입니다. 그는 식민지 관할 하의 장교로서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야할 이유도 없었지만 유대인들에게 필요 이상의 선을 베풀었고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1) 이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지극히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이 백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찾아 나온 가버나움 회당의 장로들은 예수님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백부장이 유대인을 사랑했다는 말은 유대인들을 위해 그가 베풀 수 있는 호의를 베풀어 온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웃에 대한 진실한 도움의 뜻이 들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그의 생활을 통해서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생활이 유대인을 사랑하는 생활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임을 알 때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백부장이 유대인의 회당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고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의 안식일에 그들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구약적인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하나님의 교회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이 같은 그의 하나님께 대한 열매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2.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행과 함께 자기 집 가까이 오실 때 이 백부장이 급히 벗들을 보내어 주님이 자기 집에 오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백부장의 이 같은 간구가 의미해 주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아 보아야 합니다.

  (1) 백부장의 이 같은 간구는 그의 진실한 신앙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과 메시야에 대한 바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으로까지는 믿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이 곧 하나님의 권능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누구보다도 예수님께 대한 바른 인식과 메시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백부장은 자신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존재를 비교해 볼 때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일개 로마군의 백부장이요 상대방은 위엄과 권능이 많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두려워했습니다.

  (3) 백부장은 자기 일로 말미암아 주님이 수고하시는 일에 대하여 죄송하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에게 수고하지 마실 것을 아뢰고 주님이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고 또 자기가 주님께 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백했는데 이처럼 자신과 주님과의 신분의 차등을 알고 두려워한 진실한 고백은 백부장의 놀랄만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이 백부장의 이런 훌륭한 믿음이 7절에 극적으로 나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한 그의 말입니다. 백부장은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일진대 그의 말씀이야말로 창조적인 권능의 말씀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자기 같은 백부장의 지위에 있는 신분조차 그의 말의 위력이 자기 부하들이나 자기 집 종들에게 권능으로 나타나 순종케 하거늘 하물며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그 어떤 말씀이라도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백부장의 이 믿음을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이 같은 백부장의 말을 전달받은 예수님은 주위에 있는 무리를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많나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이 백부장의 착한 인간성을 나타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의 집 노예로 부리고 있는 종의 중한 병을 안타깝게 여겨 주님께 장로들을 보내어 간구하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이 놀라운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주님의 놀라운 칭찬을 받을만한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임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32) 울지 말라  

  (누가복음 7 : 11 - 17)  

  서 론 : 누가복음 초두에는 예수님이 해결하신 두 가지 기적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한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오더니 이곳에서 다시 나인성에 살고 있는 한 불쌍한 과부에 대한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그의 믿음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종의 죽을병을 고침 받았을뿐 아니라 그의 기이하리 만치 놀라운 믿음에 주님의 찬사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나인성에 살고 있는 이 과부는 자신의 믿음이나 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죽은 아들을 살리심으로 큰 기쁨과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1. 나인성의 과부

  예수님은 나인성으로 들어가시는 길목에서 비극적인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과부요 그에다 하나뿐인 그 아들의 시체를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통곡하면서 아들의 관을 메고 가는 일단의 무리들과 함께 막 성 길을 빠져 나오려는 그 길목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1) 누구에게나 그의 인생 길에는 비극이 있습니다. 나인성에 살고 있는 이 과부의 인생은 참으로 기구합니다. 남편을 잃고 여인 홀로 살아온 것만도 슬프고 고달픈 생애였지만 그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온 아들마저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여인에게 이처럼 혹독한 생애가 주어진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우리의 생애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전7:13-14).

  (2)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이런 비극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자기 생애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불행을 당한 이 여인이 그 비극 중에서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일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슬퍼하며 탄식하는 인생을 찾으시고 그런 인생에게 새로운 삶의 보람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나인성 과부와 같은 인생들에게 복음을 정하여 그들로 그들의 인생의 비애 속에서 주님을 만나 위로를 받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2. 울지 말라

  예수님이 나인성 성문 어귀에서 이 불쌍한 과부를 만났을 때 훤화하는 무리, 자기를 위로해 주는 이웃들과 함께 성문을 나오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슬픔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큰 것은 그가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고난과 슬픔을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히2:18, 4:15).

  (2)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라기보다 하나의 명령으로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과부의 주위에는 훤화하는 무리들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 과부는 그들의 울음과 위로 가운데서 더욱 애처롭게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울면서 위로한 것이 아닙니다. “울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그 과부에게 울음을 그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예수님이 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예수님이 그 여인의 울음을 그칠 수 있게 하실 권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능히 우리의 생애를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청년아 일어나라

  예수님은 청년의 시체가 있는 관 위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곳에 많이 운집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관 위에 손을 얹으신 예수님께 쏠렸습니다.

  (1) 예수님은 관속에 죽어 누어있는 청년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청년의 어미인 과부의 부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성에서 나오면서 과부와 함께 슬퍼하는 무리들의 간구를 들으신 것도 아닙니다. 이미 청년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주님의 명령에 관속에 죽어 누워있었던 그 과부의 아들이 관속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2) 예수님은 그 살아난 아들을 슬퍼하며 울고 있었던 어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되 그 기쁨과 즐거움과 축복을 우리에게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 가정에는 새로운 기쁨이 생겼습니다.

  결 론 : 이 일로 인하여 그 둘레에 있었던 많은 무리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고 하기도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33) 세례요한의 질문  

  (누가복음 7 : 18 - 23)  

  서 론 : 세례요한이 헤롯왕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혀 있었던 그 즈음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로 파송하여 이상한 질문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질문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일을 기다리오리이까”란 것입니다. 이 질문의 요지는 ‘우리가 당신을 우리의 메시야로 믿어도 좋으냐, 그렇지 않으면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세례요한에게는 의외의 질문이요 예수님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물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경우에서 메시야의 잘못된 지식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성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세례요한의 처지

  사람이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보면 이런 저런 시험에 들게 마련입니다.

  (1) 요한이 이런 의심을 품게 된 것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롯왕의 패륜적인 사생활을 책망한 것이 동기가 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의 이복 동생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사랑하여 자기 아내로 삼았는데 이 일에 대하여 왕을 책망한 것이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예수가 과연 이스라엘의 메시야라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기대일 뿐 오래 기다려도 소망이 실현되지 않자 예수가 메시야인가에 대한 그의 확신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2) 요한은 자기의 사명과 자기의 최종적인 운명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사명은 분명 이사야가 예언해 주고 선지자였으며 메시야의 증거자였습니다(마3:3).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주신 사명을 잘 이루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고 그가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줄을 알았습니다(요1:31-34). 그는 예수님께 대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증거하기도 했습니다(요1:29).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그는 흥하여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가야 할 처지에 있었지만 이에 대하여 그는 잘 몰랐고 옥에 갇혀있는 일에 대하여 괴롭고 비통하게 생각했습니다.

  2. 세례요한의 확인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메시야의 여부를 본인에게 직접 확인해 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되었습니다. 스승의 보내심을 받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고 했습니다.

  요한에게 닥쳐온 일은 분명히 시험입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이런 시험에 든 것입니까? 요한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초림의 예수는 너무나도 유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영광으로 오셔서 그들을 다스릴 메시야로 인정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영광의 모습으로 오셔서 혁명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그 위기에서 구원해 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메시야관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초림과 재림의 사역에 대한 메시야의 분명한 지식을 자기고 있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시험에 들게 된 것입니다.

  3.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 왔을 때 마침 예수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고쳐주시며 소경을 보게 하는 그런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요한에게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의 사역에 눈을 뜨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다분히 이사야35:5-6절에 있는 말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메시야 왕국에서의 인간의 온전한 회복과 아울러 메시야의 사역에 있어서의 예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요한이 이사야로 증거된 메시야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자라면 깨닫고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이른 말씀이라고 보겠습니다.

  (2)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는 메시야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권능이심을 이처럼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 이 모든 일을 고할 때 세례요한의 눈이 열려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믿으신 것입니다(요10:37-38).

  결 론 :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실족치 않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인내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 때문에 위로를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어려운 환경, 고통 가운데서 그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복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34)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  

  (누가복음 7 : 24 - 30)  

  서 론 : 예수님은 이곳에서 세례요한에 대하여 변명하고 계십니다. 그가 받은 사명과 그의 인간적인 위대성에 대해 극구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부각시켜 주시려고 시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요한이 증거한 메시야에 관한 관심을 가지게 하시며 자신이 요한이 증거한 그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시려는 의도가 있음을 다분히 볼 수 있습니다.

  1.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은 세례요한과 무관한 사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세례를 받으려고 요한에게 갔었으며 예수님은 지금 바로 그들에게 그들이 지난날에 요단 들에 나갔던 일을 회상시키면서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고 물으셨습니다. 광야에는 갈대가 많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갈대라고 하신 표현은 한편 이스라엘의 지조 없는 지도자들, 세파에 흔들리는 변절된 제사장,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비유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강렬한 인산을 주시기 위해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고 질문하는 형식을 통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답도 예수님이 스스로 내리셨습니다. “보라 화려한 못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고 말씀하신 후 그들이 마음속에서 부르짖고 있는 바를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이처럼 예수님이 스스로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의 결론을 내리시므로 듣는 사람으로 모든 답답했던 마음의 맺혔던 바를 일시에 폭발시킨 것 같은 시원함을 주신 것입니다.

  2. 요한이 증거한 메시야

  요한이 요단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을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메시야를 기다렸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하여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회복기가 이른 줄을 알았습니다(단(9:1-2).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출현시기를 다니엘의 예언을 통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다니엘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70이레의 예언을 주시면서 메시야가 일어날 시기에 대하여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7이레와 62이레가 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날 것이요 그리고 이후에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단9:24-26).

  (1)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메시야인 줄로 알았습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3:15). 요한은 여기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자기가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밝혀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요한의 증거 자로서 무리들에게 자신을 증거한 요한을 증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요한은 이스라엘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를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그리스도, 곧 그들의 메시야인 줄을 몰랐습니다. 메시야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메시야의 증거자가 나타나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할 것이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마3:3). 요한은 이 같은 자신의 사명을 잘 수행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바로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3. 선지자보다 나은 세례요한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이처럼 세례요한을 소개하면서 그의 위대성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명자들을 말하는데 선지자들의 종국적인 증거는 메시야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증거는 초림의 메시야와 재림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들 많은 선지자들의 경우와 다른 위치에서 메시야를 증거했는데 그것은 자기 눈으로 메시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메시야를 증거하는 사명자로 선택받은 선지자였습니다.

  (2) 예수님은 또 세례요한에 대해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야말로 인류 중에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위대하고 복된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처럼 그에 대해 칭찬해 주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천국 백성 된 자의 놀라운 특권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해 문맥을 잘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극히 작은 자란 그 안에 있는 극히 미미한 존재라도 란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요한보다 크냐? 이들은 여자가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요1:12-13). 피로 값 주고 사신 값진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하나님의 후사들이기 때문입니다(롬8:16-17).




  (35) 영적으로 무감각한 세대  

  (누가복음 7 : 31 - 35)  

  서 론 : 예수님은 영적으로 무감각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한 비유를 들어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책망은 또한 오늘날 영적으로 무감각한 이 시대의 경종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은혜로운 복음을 들어도 기뻐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트집을 잡아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지난날에 세례요한의 회개의 책망을 들었을 때도 회개하기는커녕 귀신이 들렸다고 비방했습니다.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는 세대

  예수님의 비유는 어린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동심으로 소꿉장난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 소재를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인용하신 이 같은 이야기는 그 당시 속담 비슷하게 인용되었던 내용으로 보여집니다. 이 아이들은 그 나름대로의 열심을 다 해 한편쪽에서 피를 불어댔습니다. 그러나 상대편이 그 피리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춤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만이 되어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한다”고 항의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상대편에서는 “우리가 애곡해도 너희는 왜 울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모습으로 재미있어야 할 이들의 놀이가 결국 싸움과 파국을 맞는 사실을 비유로 인용하여 경종하신 것입니다.

  (1) 피리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비유에서 말씀하신 피리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복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피리를 부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피리를 부실 때 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이 피리소리에 기뻐하며 함께 춤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기뻐할 줄을 몰랐습니다. 춤추기는 고사하고 피리를 부는 주님을 향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방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춤을 추게 하는 피리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함께 춤추어야 할 놀라운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리소리를 듣고도 춤을 추지도 않았습니다.

  (2) 비유는 또한 기쁨을 상실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종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야 합니다. 오히려 유대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죄인들과 세리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지만 정작 기쁨으로 받아야 할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을 상실한 백성은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에게 외쳤습니다(느8:10).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늘 피리소리를 들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은 기쁨을 상실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세상근심과 염려로 인하여 그 기쁨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이 기쁨이 세상 기쁨에 빼앗겨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3) 피리소리에 춤추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 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뻐해야 할 사람이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쁨을 나타낼 수 없는 병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병은 죄로 인한 마음의 강퍅입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며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막아 그리스도안에서 누려야 할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돈에 미혹된 마음 때문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딤전6:9-10).

  2. 애곡해도 울지 않는 세대

  예수님은 애곡해도 울지 않는 세대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세례요한의 회개의 경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외치는 회개의 외침은 애곡이었습니다. 그의 책망은 회개할 줄 모르는 유대인들에 대한 애곡의 외침이었습니다.

  (1) 세례요한의 애곡에 그들은 울어야 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예언된 세례요한의 등장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애곡소리를 듣고 운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영접해야 할 일에 대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들은 이를 비웃고 거부했습니다.

  (2) 사람이 회개를 외칠 때 가슴을 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은 한가지뿐입니다. 그 길은 바로 회개입니다. 애곡해도 울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개를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축복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평강의 소리에만 귀를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소리는 듣기 싫어합니다.

  결 론 :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고의적으로 비방하고 거역하므로 스스로 실족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기뻐할 때 기뻐하고 슬퍼할 때 슬퍼할 줄 아는 영적 감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6) 탕감과 사랑  

  (누가복음 7 : 36 - 50)  

  서 론 : 예수님은 죄사함에 대한 비유를 빚진 자의 탕감과 결부시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임금과 회계하는 빚진 자의 탕감문제를 다루므로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들의 형제들에 대한 용서의 윈칙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일만 달란드의 빚을 진자가 임금의 자비로 무조건 탕감을 받았음에도 자신에게 일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관을 붙들어 그의 목을 잡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는 모습을 보여 주므로 빚진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마18:24-35).

  1. 어느 한 여인의 등장

  문제의 발단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입니다.

  (1) 시몬의 행동이나 그 마음의 생각으로 비추어볼 때 그에게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에게 보여야 할 정중한 예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시몬은 아마도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과연 메시야인가? 그 여부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에서 초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고서도 주님을 대접하는 태도가 불손했습니다. 귀빈 중에도 귀빈이신 그 분께 발 씻을 물도 내 놓지 아니했습니다.

  (2) 초청은 받았지만 아직 음식이 들어오기 전, 좌석에 앉은 채 담화가 진행되어 가는 바로 그때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없습니다. 다만 동리에 죄인인 한 여인이라고만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4복음서에서 모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26:6-13, 막14:3-9, 눅7:36-50, 요12:1-8). 그런데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나와있는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에 베다니에 가셨을 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일임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누가복음에 나와있는 사건은 같은 향유를 부은 사건이지만 동일 인물이 아니며 시기와 환경도 베다니나 마리아가 아닌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3) 이 여인의 행동으로 보아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평소에 예수님의 소문뿐 아니라 친히 그의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 여인은 동리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죄인이면서도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를 만나기를 소원한 여인이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그 마을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소유한 물건 중, 가장 값진 향유를 가지고 주님이 계시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여인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침과 감사하는 뜨거운 심령으로 머리를 풀어 주님의 발을 눈물로 씻기시고 발에 입을 맞추며 그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2. 탕감과 사랑에 대한 교훈

  이때 시몬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예수가 메시야이신가의 여부를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지자라면(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로 메시야를 의미함) 이 여인에 대하여 죄인임을 알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시몬에게 네게 이를 말이 있다고 하시고는 탕감의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둘이 있는데 한 명에게는 500데나리온, 다른 한 명에게는 50데나리온의 빚을 졌는데 둘 다 탕감하였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질문을 시몬에게 던지셨습니다. 이때 시몬은 상식적인 선에서 바른 대답을 했지만 그의 답변이 자신에 대한 책망으로 나올지는 몰랐습니다.

  (2) 주님의 이 두 명의 빚의 차이를 보인 액수는 죄의 다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많은 죄, 적은 죄가 없습니다. 죄값이 사망인 것은 죄의 경중이나 죄의 많고 적음에 기준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와 자기의 죄를 구분하여 자기의 죄는 50데나리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3) 이 말씀은 사죄의 은혜를 받는 사람의 자세를 말해 줍니다. 50데나리온이라고 하여 덜 사랑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참된 뉘우침이나 사죄의 은총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많은 빚의 탕감인줄 알고 더 사랑한다는 말은 은혜에 대한 진실한 감사와 감격을 말합니다.

  (4)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시몬에게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음에 그는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사랑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이란 사죄의 참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그 사죄의 은혜를 간절히 바라고 뜨거운 심령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을 씻기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시몬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대접에 대해 이 여인과 비교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사랑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죄사함의 은혜에 참으로 감격하고 자신의 귀중한 것을 드릴 때 생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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