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마가복음 5장
 밤중소리  01-08 | VIEW : 480


  ≈ 28 ≈            군대 귀신 들린 청년

  (본문 : 마가복음 5 : 1 - 17)

  서 론 :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이 살고 있는 한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올라오실 때 무덤에서 나온 더러운 귀신 들린 한 청년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은 어떤 연고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군대 귀신들에게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지배하고 있었던 귀신들과의 대화와 그의 권능의 말씀을 통해서 그 귀신을 내어쫓으심으로 영적인 세계의 여러 가지 감추어진 비밀을 들어내 놓으셨습니다.

  1. 귀신들린 청년의 등장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을 괴롭히는 귀신의 존재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거라사 땅에 살아가고 있는 이 청년의 경우는 대단히 심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더러운 귀신이라고 했습니다. 귀신과 마귀, 타락한 천사들 간에는 서로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근래에 와서 어떤 사람들은 귀신이란 마귀나 타락한 천사들과 동일하게 볼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 살아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도전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면 이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히9:27). 죽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면 논리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이라 말이 원어에는 ‘아카다르토스 프뉴마’ 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더러운 혹은 부정한 영이란 뜻입니다. 성경에는 귀신이란 말이 ‘다이모니온’ 이런 말로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또 다른 표현으로 ‘프뉴마’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프뉴마’란 영적인 실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인데 성령도 이 ‘프뉴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귀신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말한 것이 아니요 원래부터의 영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마귀와 함께 타락한 하늘에 영적인 피조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 이 귀신은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했는데, 들렸다는 말은 그 귀신이 이 청년의 속에 들어가 거주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악령의 거처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몇까지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늘이라고 했습니다(계12:7-9). 이곳은 잠정적으로 만들어진 악령들의 왕국입니다. 이 왕국은 장차 주님의 재림의 날에 미가엘 천사가 이끄는 하늘에 군대에 의하여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또 어떤 악의 영은 어두운 구덩이로 비유된 지옥에 던져 넣었다고 했습니다(벧후2:4). 그리고 이 악한 영들은 사람 속에 들어가 그의 거처를 삼기도 합니다(막7:26, 눅8:27). 이 악한 영들은 또한 짐승 속에 들어가서 활동하기도 합니다(창3:1). 귀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며, 세상에 질병과 재앙을 가져다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귀신에 사로잡히면 극심한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 것 뿐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이 악의 영들이야말로 인간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도적입니다.

  (3) 이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사탄의 권세를 보여 줍니다. 이 청년은 우리 인간의 죄를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을 지배하고 있는 귀신의 존재는 인간을 죄로 지배하고 짓밟고 불행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지옥의 사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극도로 허약하여 그의 의지력이 상실되고 죄나 어떤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분열 상태에 이르게 될 때 이 악한 영은 사람들 속에 들어가 거주하면서 그의 육과 영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건강하고 의지력이 강하다고 해도 이 악의 영들은 우리들의 주변에서 죄로 유인하고 악으로 유혹하며 의심을 심어주며 죄악을 행하도록 충동하는 등 여러 가지 영적 감화를 주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적 생활에 등한하며 기도생활에 나태하며 순종의 생활에 게으를 때 강한 공격을 시도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악의 영을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엡6:11-17).

  이 악의 영은 또한 우리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다. 옛날에 욥이 받은 고통도 이 악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악의 영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결단코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험하거나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인들은 용기를 가지고 악한 영을 대적해야 합니다(벧전5:9).

  2. 귀신의 간구

  귀신들린 청년이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이 악한 영의 태도는 제법 온유하고 겸손한 듯했습니다. 그는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간구했습니다. 그는 이 간구의 서두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1) 여기서 귀신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했습니다(약2:19). 사탄이나 악령들은 예수가 하나님이신 줄 알기는 하지만 그의 이름을 믿고 구원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영적인 피조물들은 한 번 타락하면 회개하여 회복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천사보다 얼마나 더 좋은 지위를 가진 존재인가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천사들은 단순한 피조물들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타락할 여지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로 값 주고 당신의 아들로 삼으신 귀한 존재들입니다. 지금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들은 아무런 뜻이나 의미도 없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구속에 대한 찬양을 드리고 있지만 우리는 장차 그곳에 들어가 우리들이 받은 구속의 은혜에 대하여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2) 귀신이 예수께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악한 영이라도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긍정적으로 말씀해 줍니다. 음부에 들어간 자색 옷 입은 부자의 영도 아브라함을 향하여 간구했다고 했습니다(눅16:22-23). 욥을 괴롭힌 사탄도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욥1:10-11). 그러나 이 같은 악한 영들의 기도는 괴로움에서 나오는 울부짖음에 불과합니다. 응답이 없는 기도입니다.

  이 청년의 간구에 예수님이 하락하셨다는 것은 응답이 아닙니다. 아직 악령을 무저갱 속에 놓으실 때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20:10).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인 잃어버린 양을 악한 영의 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이 없는 거라시인에게 경종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결 론 : 이 청년에게 들어가 있었던 귀신은 2천 마리나 되는 떼 귀신이었습니다. 귀신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 군대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불쌍히 보시고 그 귀신에게 명하여 이 청년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은 군대를 이룬 귀신의 떼를 그 청년으로부터 내쫓으시어 사탄의 권세에서 이 청년을 건지셨습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목격한 거라사인들은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그 마을로부터 쫓아냈습니다.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건져 주실 분은 오지 이 예수이심을 알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 29 ≈            네 친속에게 고하라

  (본문 : 마가복음 5 : 18 - 20)

  서 론 : 군대 귀신이 들렸던 이 사람은 자기를 고쳐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의 생애를 주님을 위하여 바칠 것을 각오하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따라오는 것을 금하시고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서 주께서 행하신 이 큰일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각자가 각기 은혜를 받은 대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명을 맡던지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아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1. 함께 있기를 허락지 아니하심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귀신을 좇은 그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그에게 복음을 위하여 더 좋은 사명을 주시려고 함께 있기를 원하는 그의 간구를 물리치셨습니다.

  (1) 누구나 다 사도의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내어쫓고 온전해진 사람은 크나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곁에 그의 제자들이 둘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도 그들 중에 하나가 되어 주님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는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가 되는 사명만이 은혜를 보답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데 있어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명의 직분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세우신 직분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거나 경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안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지 자겠느냐 다 방안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2:27-31).

  (2) 각기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주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을 지나쳐 봉사한다거나 주의 일을 하면 분쟁과 다툼이 생깁니다. 영적 교만이 이 같은 곳에서 생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복음의 거치는 돌이 되며 평화를 해쳐서 교회의 질서가 파괴되어 버립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2:3).

  (3)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은사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자신이 어떤 재간이나 특별한 특기를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사인 줄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마술사가 예수를 믿은 후, 그 마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고전12:11).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교회를 위해 봉사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신 은사를 분별하여 유용하고 덕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원치 않는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해 버리면 안됩니다. 내가 원치 아니하고 내가 원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더 좋은 은사로 활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대로 복음을 위하여 자신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쓰는 일입니다.

  2. 내에 친속에게 고하라

  예수님은 군대 귀신이 나간 그 청년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시는 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이 사람이 받은 사명은 자기 친속에게 가서 주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크신 일을 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잘 감당하므로 큰 결실을 얻었습니다.

  (1) 복음은 적은 것으로부터 시발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겨자씨로 비유된 적은 씨앗이 큰 나무를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가져야겠지만 첫 걸음은 겨자씨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의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1:8). 오늘날 땅 끝까지 전파된 복음은 그 시발점이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자기의 친속에게 고한 결과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가에 대하여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한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행16:31). 한사람의 믿음이 그 가정을 구원하는 것처럼 복음은 놀랍게 그 세력이 확산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롬1:16).

  (2) 친속이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제일 좋은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친속은 무엇보다도 나에 대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군대 귀신 들렸던 이 청년의 경우만 해도 그 집안 친속들은 이미 그 같은 증상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온전해진 몸을 보여 줄 때 무엇보다도 신임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청년과 같은 병은 사람의 힘이나 의사의 의술로 어찌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런 그가 온전한 몸으로 돌아와서 주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크신 일을 전할 때 그들에게 믿음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일은 나에게 아무런 변화된 모습이 없을 때는 어떤 효과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지만 자신이 변하지 못하므로 인하여 복음의 거치는 돌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 청년은 분명히 자신의 변화된 확실한 모습을 친속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전도의 결실을 가져 올 수 있었습니다.

  3. 데가볼리에 복음이 전파된 결과

  군대 귀신 들렸던 이 청년은 주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데가볼리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 친속을 찾아다니며 주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크신 행사를 전파했습니다. 그가 자기 친속에게 나타나 주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간증하는 일은 참으로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받은 은혜가 크면 클 수록 감사가 크며 헌신이 크며 증거가 큰 것입니다. 그가 자기 친속에게 전한 복음은 어느 사이에 데가볼리 전 지역에 전파되어 모든 사람들로 기이히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전파한다는 말은 ‘케륏소’로 포고자 또는 전령이 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전령입니다. 전령이라는 말은 군대에서 중대한 작전상의 공문을 전달하는 사명자를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지라도 반드시 그 공문을 목적지에 전달해야 합니다. 복음도 이처럼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올 것이라고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전달해야 할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겼다는 말은 그의 온전해 진 몸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이전보다 영적으로 무엇인가 새롭게 변화 받은 사실을 바라보고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사단에서의 놓임과 주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인하여 새사람으로 변화 받은 모습으로 친속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의 증거는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에 믿음과 확신과 뜨거운 열심히 따랐습니다.

  결 론 : 데가볼리에 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한 그는 참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증인이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 받은 사실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면 되는 것입니다. 과장도 필요 없고 허식도 필요 없으며 다만 자기가 받은 은혜를 그대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훌륭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잠잠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받은 은혜야말로 귀신을 내쫓은 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은혜에 잠잠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친속들에게 전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기이히 여기도록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 30 ≈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본문 : 마가복음 5 : 21 - 43)

  서 론 : 죽게 된 딸의 구원을 위하여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이 예수님께 찾아와 많이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집으로 따라가실 때 그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실망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릴 수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회당장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딸이 죽고 절망에 쌓여 있는 이 야이로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는 데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십니다.

  1. 야이로의 믿음

  야이로는 회당장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처소가 회당인데 이 회당의 관리책임자가 바로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은 존경받는 직분이요 특히 야이로는 유대인들간에 신망이 두터운 사람입니다.

  (1) 그가 문제를 안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그의 생애 동안에 문제점을 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야이로의 인생에 찾아온 문제점은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병으로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점이 있을 때 이것을 해결하려면 해결해 줄만한 대상을 찾아가야 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제대로 잘 찾아간 것입니다. 야이로 뿐 아니라 누구이든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인생은 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는 권능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권능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간구하는 말을 응답해 줄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 야이로는 바른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간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으려면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실하게 간구히는 자를 만나십니다(시145:18-20).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만나십니다(잠8:17).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를 만나십니다(히5:9).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자세로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의 서원을 들으십니다(10:17).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기도가 겸손한 기도입니다((눅18:13). 야이로는 많이 간구했습니다. 한두 번의 기도로 응답 여부를 결판 내려는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끈질긴 계속적인 기도여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응답 받을 때까지 그치지 아니하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다. 야이로의 기도는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치 않는 기도는 주언부언의 기도입니다. 간구는 하나의 요청입니다. 대상이나 목적이 없는 요청이 어디 있습니까?

  (3) 이에 예수님이 그와 함께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이 같은 간구에 움직이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야이로처럼 간절하고 목적이 분명하고 불쌍히 여기심을 원하는 기도라면 예수님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응답해 주십니다(엘2:18). 야이로의 기도는 주님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아니치 못할 능력의 기도였습니다. 그의 간구의 결과가 매우 아름답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라고 말씀했습니다.

  2. 믿기만 하고 두려워 말라

  예수님은 이제 야이로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가시려는 길입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며 에워싸며 밀었기 때문에 행보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했습니다.

  (1) 그들이 가지고 소식은 흉한 소식이었습니다. “당신 딸이 죽었사오니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 소식은 야이로의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었습니다. 딸이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그의 소망 이 완전히 살아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옆에 계셨지만 야이로의 마음은 몹시 흔들렸습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 중에는 두려워해야 할 사건들이 생겨납니다. 더욱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때 그 문제가 해결되기는 고사하고 더 악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기도에 회의를 가집니다. 절망한 나머지 기도를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 같은 흉한 소식을 접했을 때 그때 우리의 믿음의 자세가 정말로 요청됩니다.

  (2) 이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을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만약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주위환경만을 바라본다면 실망할 일뿐입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경우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에 대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야이로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조건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요는 예수님께서 이미 야이로의 간절한 간구를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가고 계십니다. 이런 경우, 우리들의 어느 것을 또 믿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환경을 믿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 벌어진 현실 앞에 굴복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 앞에 굴복하느냐 어느 편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권고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당하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 주며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그에게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옆에 계십니다. 그를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병을 고쳐 주실 때 언제나 “내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그 자체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그 믿음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3) 예수님은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안에 들어가셔서 훤화함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울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잔다고 말씀하신 일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다시 일어날 가망이 전혀 없지만 자는 사람은 얼마 안가 깨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주검을 잔다고 표현하심으로 주검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잔다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 아이가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 수 있는 사람을 보고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 주님의 명령에 의하여 다시 죽지 아니하는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5:28-29).

  결 론 :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모두 내 보내시고 믿음의 사람들만 남기셨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할 곳에 불신적인 요소가 개입되면 기도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람어인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명령을 하시자 죽었던 야이로의 딸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면 이처럼 크게 놀라운 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31 ≈            혈루증 여인의 믿음

  (본문 : 마가복음 5 : 25 - 34)

  서 론 : 우리는 본문에서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을 받아온 한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아무런 방법으로도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에게 병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이 여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께 찾아 나가 그의 그 두렵고 무서운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의학상 혈루증은 유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자에게는 해당의 안 된다고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혈루중으로 진단된 변명이 없었으며 여자가 계속적으로 피를 흘리는 병으로 하나의 위험스러운 부인병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1. 이 여인의 절망적인 상태

  이 여인은 그의 생애 중 위험한 고비를 맞이했습니다. 그가 앓고 있는 병은 그 당시 치료가 불가능한 절망적인 병으로 살 가망이 전혀 없는 병입니다.

  (1) 이 여인은 12년간이나 이 병으로 고통을 받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열 두 해란 결코 짧은 해가 아닙니다. 이 여인은 그 많은 세월 동안 삶의 보람을 상실한 채 투병하는 일에 전력을 썼습니다. 그가 병의 종이 되어 병으로 그의 인생이 사로잡힌 일은 마치 우리가 죄 중에 사로잡혀 그 죄로 인하여 우리의 인생을 망쳐 놓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이 여인은 기진맥진한 인생의 고비에서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율법으로도 선행으로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그의 모든 노력은 오히려 그에게 더 큰 괴로움만 안겨 주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불행한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도 받았고 있는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였다”고 했습니다. 병을 고쳐줄 의원이 그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괴로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그들에게 의를 줄줄 알고 열심히 지켜 왔지만 율법이 그들에게 선사한 것이란 의가 아니라 정죄였습니다. 이 여인이 의원으로부터 받은 것은 치료가 아니라 괴로움이요 그 괴로움이 더욱 중하여진 일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그가 가진 재산마저 다 허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될 것입니다.

  2. 이 여인에게 찾아온 소망

  이 여인이 구원받은 역사를 보면 그의 인생 중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 여인은 그의 생애에 가장 어려움에 처했을 때 새로운 인생길이 열렸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는 시기는 그의 생애에 가장 어려움을 당한 결정적인 순간일 때가 많은 있습니다.

  (1) 주님께는 절망적인 병이란 없습니다. 절망이란 인생에게는 위기지 만 이 절망이 예수님께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님께는 모든 일에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그 여인이 그의 절망적인 인생의 절벽에서 예수님을 찾은 일은 그의 새로운 인생의 열리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늦게 주님을 찾아 나온 아쉬움은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아쉬움 속에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그 같은 무서운 병이 주어지고 또한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고침을 받지 못한 일은 그에게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이를 인하여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절망적인 그 시기가 주님을 찾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여인은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 그 이전에도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예수의 소문이 그에게 절박하게 여겨지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돈이 있었고 찾아가야 할 의원이 있었고 아직도 기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의 소문이 복음으로 들려진 것은 자기 자신이 폐인처럼 되어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된 후입니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해볼 여망이 없었을 때였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는 말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믿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 여인의 믿음은 병을 고침 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인가 이 가련한 여인에게 예수의 소문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의 소문을 들려준 사람은 훌륭한 전도인의 사명을 다 이룬 사람입니다. 우리도 소망이 없어 자기 인생을 탄식하며 절망에 빠진 불행한 사람을 찾아가 예수의 소문을 들려주므로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소망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말씀했습니다(롬10:14-15).

  (3) 이 여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초등단계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 같은 믿음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구원의 믿음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말은 ‘소조’란 말로 이 말은 영적인 사역에 쓰여질 때는 생명의 구원을 의미하지만 질병과 관계되었을 때에는 성함을 얻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고 한 말씀 중에 성함을 얻으리라고 하는 말에도 ‘소조’라고 하는 같은 구원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막6:56).

  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여인의 믿음은 자신의 손을 주님의 옷가에 대어도 나음을 얻을 것이다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같은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치료받은 여러 가지 사실을 예수의 소문으로 들었을 때, 이 여인은 이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무리 가운데 섞였습니다. 이런 이 여인의 결단은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녀는 지금 중병을 앓고 있는 처지입니다. 실의에 가득 차서 자리에서 일어설 기록조차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무리 가운데 섞였습니다. 주님을 찾아 만나야겠다는 결단이 이 여인으로 이처럼 큰 힘과 용기를 얻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가려면 누워 있었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난 사람은 이 여인처럼 예수를 만나려는 일념으로 어려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자기 앞에 거슬리는 모든 장애물을 무시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드디어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믿음대로 자기 병이 나음을 곧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결 론 : 이때 예수님께서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줄을 스스로 아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라”고 하신 말씀처럼 믿음의 기도가 위대한 것은 그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만들어 냅니다. 주님이 자기를 만진 사람을 찾으실 때 이 여인은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모든 사실을 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면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고 하시는 축복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 역경 속에서 이 여인의 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PREV :   마가복음 6장 밤중소리 
 NEXT :   마가복음 4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