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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밤중소리  01-08 | VIEW : 634

  ≈ 22 ≈            씨뿌리는 비유


  (본문 : 마가복음 4 : 1 - 20)

  서 론 : 예수님은 천국의 오묘한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경우가 많으셨습니다. 비유란 ‘파라볼래’로 곁에 두다, 비교하다란 의미로 ‘양자를 비교하기 위하여 어떤 하나를 다른 것의 곁에 두는 것’을 가리킵니다. 천국에 관한 해석을 돕기 위해 그것과 비교시켜 이해하도록 하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이 비유를 비유로서 해석하지 못했을 때 진리에서 이탈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특히 두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비유에서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는 특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에 다른 하나는 비유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그 하나 하나에 걸쳐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의미를 주려고 시도하는 일입니다. 이같은 일은 비유의 성격을 훨씬 뛰어넘는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모든 비유 중에도 유명한 비유로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이 각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드려지는가에 대하여 그 과정이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씨뿌리는 자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기 이해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씨뿌리는 비유로 가르치실 때에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씨에는 무한한 생명력이 잠재해 있기 때문에 무한한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는 일은 매우 합당한 일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하신 말씀 속에 있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지극히 작은 믿음이긴 하지만 그 안에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참 생명의 믿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눅17:6).

  씨는 열매를 맺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비유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사55:11).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말씀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씨는 뿌려야 자라나며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의 마음속에 뿌려져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씨는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14절에서 이르시기를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를 밭에 뿌려야 자라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그 말씀을 사람의 마음에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씨를 뿌려야 할 사람을 어느 계층만의 사람으로 국한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씨뿌리는 자의 축복에 대하여 매우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2. 씨가 떨어지는 네 종류의 밭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 씨가 뿌려지는 밭으로 네 가지 종류를 보여 주였습니다. 그리고 그 씨가 떨어진 밭의 토양에 따라 씨가 자라는 모습을 비유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1) 더러는 이 씨앗이 길가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길 가에 뿌리었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해석해 주셨습니다(15). 길가는 열매를 얻기 위해 마련해 놓은 밭이 아닙니다. 그저 단단할 땅일 뿐입니다. 이것은 완악한 마음, 강퍅한 마음, 복음을 거역하는 마음, 회개를 거절하는 마음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머물지 못하고 곧 살아져 버리는 이유에 대하여 주님은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말씀을 빼앗는 역사도 한다는 사실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듣고도 마음속에 머무를 곳이 없으면 즉시 사단이 나타나 그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이제 이 사람에게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수도 없으며 새 사람이 될 수도 없으며 중생할 수도 없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2)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돌밭에 대하여 16절에서 해석해 주시기를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이 얇다는 말은 말씀의 깨달음이 천박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육적으로 깨닫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의 기쁨은 영적인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복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  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 드린 것은 겉으로의 일시적인 모습이요 거듭난 심령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언제인가 때가 오면 넘어집니다.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가 오는데 이때 이들은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는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핍박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뿌리가 없는 신앙은 이때 넘어지는 것입니다.

  (3)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이 씨앗은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았기 때문에 결실치 못하는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19절에서 이 말씀을 다시 설명하시기를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어느 정도 성장하여 얼마간 교회에 나와도 그의 심령 속에 재물에 대한 욕심이 남아 있고 세상에 대한 염려가 살아지지 않고 세상 죄악에 대한 유혹을 받아 드리는 생활을 한다면 그런 신앙은 끝내 결실을 못하고 맙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나”고 했습니다(딤전6:9).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더불어 재물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습니다.

  (4)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씨앗이 떨어지자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밭은 회개한 심령을 말합니다. 믿음을 간직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그 말씀을 순종하기 때문에 그 열매가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여 그의 생애에 놀라운 축복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주님의 이 씨뿌리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비밀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이해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23 ≈            하나님 나라의 비밀


  (본문 : 마가복음 4 : 10 - 12)

  서 론 : 우리는 성경을 특별계시라고 말하여 자연계시와 구별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 어느 정도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까지는 더듬어 알게 되지만 그를 찾는 길과 그의 은혜를 받는 길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오직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길을 보여 주신 성령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리켜 특별계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특별계시는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자연계계시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만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밀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비유는 거의 모두가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을 말씀하시는 중에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교훈적인 말씀이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없이는 비유가 가르치는 진의를 깨닫기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비유는 그 비유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습니다. 진리와 비교될 때 비로써 비유의 의미가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1. 하나님 나라의 비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밀이란 말은 ‘뮈스테리온’으로 세상적인 어떤 신비로운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이해력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 인간의 사고력으로는 깨달아질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 하나님의 영으로 일깨움을 받은 사람만이 이해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란 “계시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비밀이라고 하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주었다고 하신 말씀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이 비유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주님께 물었다고 했습니다. 주었다고 하신 말씀은 깨달을 수 없도록 장벽을 두었거나 비밀에 가리워 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너희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배워야 하며,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의라고 하신 무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는 “너희와 외인”들이 있는 것입니다(11). 너희란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외인이란 그밖에 사람들을 뜻합니다. “창세 전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은 무리들”이 있는 것입니다(엡1:3-4).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고 했습니다(골1:6). 하나님의 백성들은 복음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일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 때문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요16:13).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2:9-10). 하나님의 백성들
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시고 또한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역사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가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2:12).

  (4) 비밀을 깨닫는 일에는 우리의 영적 귀가 열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그 사람의 영적 귀가 열려지지 않고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죄는 우리의 영적 귀를 둔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순종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그의 영적 귀가 어둡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여 말씀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주의 뜻을 따르겠나이다”라고 하는 생활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선생이요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하는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눅5:5).

  2.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춘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신 일이 대하여 “이는 너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들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충격적인 말씀으로 그 해석도 여러 가지입니다.

  (1)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로 이 비유를 통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는 비유로밖에는 해석해 줄 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유적인 해석은 그들로 참으로 깨달아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의 뜻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어느 정도 이해시키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그 비유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더욱 선명하게 깨달음을 주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고, 외인들에게는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는 알 수 없지만 비유 자체에 나타난 의미만은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만 밝히신 것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 심판하시는 그날의 핑계 치 못할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롬1:20).

  (2)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때문에 회개를 스스로 거부합니다. 그들의 심령은 쌓인 죄로 인하여 완악해져 있습니다. 돌처럼 굳어져 있는 그들의 마음을 그 무엇으로도 깰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하늘 끝에 닿았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 대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의 참뜻은 그들 스스로가 그런 길을 즐겨 가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해 두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 같은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여러 번 권고하시고 경종하셨던 것처럼 이들 완악한 무리들에게도 비유로라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이 받을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의 머리 위에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제자들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여 그 해석을 구했습니다. 제자들이 비유를 물은 것은 그 뒤에 나타난 내용을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닙니다. 그 비유가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하여 몰랐기 때문에 그 뜻을 물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을 나무라시고 이 비유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가해 주셨습니다. 이 해석을 통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진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은 사람들은 비유의 뜻을 설령 알았다고 해도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으로 받아 드리는 것이 아니다 비웃거나 거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바리새인들 알 수 있는 비유로 이처럼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시는 비유의 말씀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16:13).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건 비유건 그 뜻을 바로 해석하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그 뜻을 배워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24 ≈            등경 위에 있는 등불

  (본문 : 마가복음 4 : 21 - 25)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잠시 동안 암시적인 말씀으로 그들 자신이 숙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 아니냐” 제자들은 이 암시적인 질문의 말씀에 직각 ‘아,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동경 위해 두려 함이 아니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대답했을 것입니다. 등불은 밤중에 비추는 빛을 말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가정에는 이 등이 있었고 밤이 되면 예외 없이 등불을 켰을 것입니다. 이 등불 빛 때문에 그들은 방안에서 대화도 하고 일도 하며 두루마리로 만들어진 성경으로 성경 공부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부엌이나 혹은 다 마당에서 등불을 가지고 방으로 가져왔다면 아마도 그 등불을 말(쌀 같은 것을 되는 그릇)아래나 평상(침상 같은 것) 아래에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안약 등불을 그런 곳에 둔다면 그 등은 빛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여기서 등불이란 곧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 복음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복음을 받은 후에 그 복음의 빛을 사면에 비췸이 없이 마음속깊이 숨겨 둔다면 그 복음은 이미 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세상을 밝히는 빛인데 그 빛을 자기 혼자만 간직해 두는 일은 마치 등불을 평상 아래나 말 아래 두려는 어리석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해야 빛을 비췰 수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은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요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롬10:13-15).

  (2) 말이나 병상은 빛을 숨기는 온상입니다. 숨기는 말이나 병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전통을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그들은 장로의 유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감추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내세우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여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라는 말씀으로 책망하셨습니다(마15:5-6). 또한 그들의 외식도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마23:23). 우리들 속에 죄악이 들어와 있다면 그것이 이 빛의 통로를 차단하는 말이나 평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실 때 세상을 비취는 빛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마치 등불을 말이나 평상 아래 숨겨 둔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일은 두 가지 모두가 실패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빛이 어둠 속에 갇혀 있다면 그 빛은 조만간 어둠에 삼켜 버리게 될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가려 빛을 발산하지 못한다면 그 빛은 빛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복음의 빛을 세상에 비취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내 속에 있는 빛도 언젠가는 꺼져 버릴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 빛에 빚진 자라고 말하면서 이 빛을 비치는 일에 그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2.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고 말씀하시고는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듣는가 삼가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을 권고하신 말씀입니다.

  (1) 무슨 말씀인가에 대하여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그 말속에도 다른 복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되었고 이 잘못된 복음에 물든 사람 역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갈1:7-8).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위치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조심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는데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단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는 데서 얻는 일은 사망입니다.

  (2) 그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는가에 대하여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들을 귀란 할례 받은 귀로, 회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회개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자신의 생활에 적용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흘려버리게 되며 그렇게 될 때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히6:7-8).

  (3)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헤아린다는 말을 비판이란 말로 해석하여 마태복음 7장에 있는 말씀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7:1-2). 그러나 이곳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 문맥상으로 보아 형제를 비판하는 비판을 의미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헤아린다는 말은 ‘메트레오’로 측량한다, 재어 분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헤아린다면) 하나님의 적격한 측량을 받게 될 것인데 그의 대한 보상은 더 많을 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말씀의 자로 측량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계11: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의 측량에 합격할 수 있도록 말씀을 배우며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3)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진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문장의 표현이 해석하기가 매우 애매 모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쉬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감추인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드러나게 마련이다”(현대인의 성경에서 발취). 모든 비밀은 그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로서 아직까지 숨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이 예수님에 의하여 밝혀진 것입니다. 숨진 것이 없이, 감추인 것이 없이 드러난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 아래나 평상 아래와 같은 어두운 곳에 감추지 말고 사면에 빛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3.  있는 자와 없는 자에 대한 보응

  주님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는 하나님의 측량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앞으로 전진이냐? 아니면 제자리걸음이냐의 두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전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열매가 30배로, 60배로, 100배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세속적인 신앙으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것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생활을 가져야 하며, 봉사하는 생활을 가져야 하며, 구제하는 생활을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소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좋은 것을 받을 것입니다. 더 풍성한 은혜, 더 놀라운 축복, 더 즐거운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그나마도 그가 가지고 있는 그 약간의 은혜마저, 평강마저, 축복마저 걷어 가시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우리의 복음의 빛을 동경 위해 두고 그 빛을 사면에 힘있게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듣고 그 말씀을 따른 생활을 통하여 더 많이 받는 축복된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25 ≈            하나님 나라의 성장 과정

  (본문 : 마가복음 4 : 26 - 29)

  서 론 :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말씀의 씨앗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가에 대한 신비적인 역사에 대하여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해 주십니다. 이 비유는 두 가지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들 마음속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심령의 천국에 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 복음의 씨앗이 이 세상에 떨어진 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추수의 계절을 의미해 주는 교훈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위에서 알곡을 추수가 있을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와 땅에 뿌려진 씨앗

  예수님은 씨앗을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씨를 복음이라고 하면 사람은 그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을 의미합니다. 땅이란 좀 전에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1) 씨를 뿌린 땅이란 열매를 맺을 만한 좋은 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되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4:8).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충실한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의 책임을 의미합니다.

  (2)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랐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씨앗이 떨어진 밭에서의 성장 과정을 가르쳐 주시려는데 있습니다.

  ① 먼저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야 합니다. 이씨는 물론 영생의 씨앗입니다. 마치 겨자씨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도 다른 이에게도 발견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구원과 영생과 천국의 완전한 생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바로 이것이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이 씨는 반드시 자라납니다.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그것이 땅에 떨어진 후에는 큰 나무를 이루는 것처럼 복음의 씨앗은 그 떨어진 밭에서 결실을 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7:4).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1:43). 이 씨가 자란다는 말은 그 자라남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 자체에 있는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1:6).

  ③ 이 씨는 사람이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자라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점진적이요 계속적임을 의미해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급격한 완성품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복음이 들어갔다고 그 즉시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로부터 찾으려고 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복음의 씨앗을 받은 사람의 성장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성장은 결코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점진적 과정이 따르는 법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자라남과 같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하나에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을 완성하기까지는 계속적이고도 점진적인 성장 과정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로부터 어른들의 사고력을 바랄 수 없는 것처럼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분량의 결실을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② 그 자라남의 과정에서 어떻게된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씨앗의 신비적인 능력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농부들이 밭에 뿌린 씨앗은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뿌리는 씨앗은 자연의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비밀을 농부들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하나님의 영적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말씀의 영 적 활동상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에 속히 달리는 도다”고 말씀했습니다(시147:15). 씨에 농부로부터 아무런 능력이 들어가지 아니했지만 씨앗 자체의 신비적인 능력에 의하여 자라며 결실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된 것을 알지 못하지만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말씀의 신비적인 역사에 대하여 예수님은 바람의 원리를 예로 들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3:8).

  2. 땅이 열매를 맺는 순서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일은 그 원인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에 있는 것입니다.

  (1) 처음에는 싹이라고 하셨습니다. 씨가 처음에 땅을 헤치고 머리를 내밀 때 처음부터 온몸을 드러내 놓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나오는 것은 싹입니다. 우리가 싹을 보는 것만으로는 결실의 가능성은 보이지만 그 싹으로부터 당장에 열매를 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싹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에 때로는 크게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싹은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처음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다음에는 이삭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은 열매를 맺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기초적인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열매는 싹에서 맺는 것이 아니라 이삭에서 맺게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졌다면 싹이 나온 후 이삭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삭이 다시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싹이 돋아나면 오랜 기간 잘 가꾸고 다듬어 그 싹이 줄기차게 잘 자라나서 열매를 맺을 만한 이삭의 자리에까지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이 이삭이 아래로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점점 뻗어나며 옆으로는 많은 가지들을 처서 풍성한 결실을 걷을 수 있도록 성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다음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곡식이란 ‘시토스’로 알곡이란 뜻입니다. 충실하다는 말은 가득하다, 채우다에서 나온 말로 ‘프레레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열매를 원하시되 충실한 열매, 가득 채운 알곡을 기뻐하십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하신 말씀은 충실하게 맺은 알곡을 보면 그에게서 이 같은 결실을 가져오게 한 씨앗이 어떤 씨앗인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3.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추수 때란 종말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씨의 비유를 개인의 신앙성장의 과정을 설명하심과 아울러 또한 이 땅위에서의 복음의 결실과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하여 짐작케 합니다. 열매가 익는다는 말씀은 복음의 땅 끝까지 전파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수효가 다 채워 진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때 이 백성들 알곡으로 추수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 재림의 목적이 악인에 대한 심판에 있다기보다 그의 백성들을 알곡으로 추수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3:11-12, 계14:15).

  결 론 :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맺는 과정을 일일이 관찰하거나 살펴볼 수는 없지만 싹이 이삭으로, 이삭에서 충실한 알곡으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비유에서 이 기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 26 ≈            겨자씨에 비유된 천국

  (본문 : 마가복음 4 : 30 - 35)

  서 론 :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관한 교훈에서 계속적인 비유로써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겨자씨의 자라나는 모습을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하시면서 강론 하셨습니다. 모든 씨앗이 작지만 그 중에서도 더 작은 씨앗이 바로 겨자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의 크기에 비하여 그 결실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이 비유는 복음이 세상에 나타내는 성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그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이 비유는 복음의 능력을 가리킨다.

  어느 목사님이 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겨자씨 얼마를 종이에 싸서 조심스럽게 가지고 왔습니다. 교회 성도들에게 그 겨자씨를 보여 주면서 실물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도들이 그 겨자씨를 보려고 종이에 쌓여 있는 겨자씨를 눈 가까이 가지고 갔습니다. 너무 작아 잘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코에서 나오는 숨결에 그만 그 씨앗이 날려가 아무 것도 구경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겨자씨는 미미하고 작은 존재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를 이처럼 겨자씨 같은 작은 존재로 비유하신 것인가? 그것은 복음이 사람들이 보기에 심히 미미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결과가 엄청난 결실을 가져온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식되고 있는 복음이 어떻게 큰 나무를 이루는가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복음이 매우 작은 것으로 보여지지만 겨자씨 안에 미지의 생명력이 있어 그토록 큰 나무를 형성하는 것처럼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신비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복음을 볼 때 미미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마치 겨자씨처럼 작은 것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8). 예수님을 피고로 심문했던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이에 대하여 대단스럽게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을 심문하고 있었던 베스도는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행26:24).

  그러나 이 복음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으로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16). 하나님은 복음으로만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요, 인간의 공로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겨자씨처럼 보는 복음에 이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오직 복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에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은 율법으로도 선행으로도 의로워 질 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3:10).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의를 얻을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언약인데 이 언약이 예수 그리스를 믿는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롬3:21-22). 이 믿음이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1:12-13).

  2. 이 비유는 신앙의 성장을 말해 준다.

  겨자씨는 작지만 땅에 심겨진 후에는 자라나서 심히 커집니다. 심령의 땅에 떨어져 심겨진 복음의 씨앗은 처음에 마치 겨자씨 모양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 씨앗은 놀랍게 자라나서 크나큰 나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이 우리들의 신앙을 성장케 하는 것입니다.

  (1) 씨앗은 심는 일이 중요합니다. 심지 않은 씨앗은 한 알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씨앗은 땅에 심겨질 때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복음의 씨앗 역시 심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씨를 심는 밭이란 사람의 심령입니다. 베드로에게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복음의 씨를 뿌리는 전도자의 사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 씨앗을 뿌리는 일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보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요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롬10:14-15).

  (2) 심겨진 씨앗은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만약 땅에 씨앗이 심겨진 후에 자라나지 못한다면 아무 결실도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심령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이 자라나지 못하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결에 대 해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12:24). 죽는다는 말은 육신의 생각을 죽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합니다. 육신의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갈6:8). 죄는 영적 성장의 장애물이기 때문에 언제나 회개로 그 심령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과 육이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3.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확장을 말해 준다.

  이 겨자씨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된 교회의 부흥을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처음에 복음은 단 한사람에 위하여 심겨졌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란 청년에 의하여 갈릴리로부터 전파된 것입니다. 이 복음은 또한 주님의 12제자들에 의해 뿌려졌습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떨어진 성령의 불이 시발점이 되어 온 세계에 전파되어 오늘날의 교회를 이루게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경우를 보아도 처음에 한 겨자씨 같은 지극히 작은 복음의 활동으로 시작된 것이 오늘날 이처럼 세계 선교에 전초 기지가된 것입니다. 서상륜에 의하여 세워진 소래 교회가 우리 한국 교회에 뿌리를 이루었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변에 뿌린 순교의 피는 적었지만 한국 교회 의 큰 부흥의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개 교회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한두 사람의 피나는 노력으로 세워진 교회들이 오늘날 말할 수 없이 큰 교회로 성장하여 한국 교회는 물론 세계 교회를 향하여 복음 전파의 높은 기치를 들고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 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교회의 방주적인 사명을 가리킨 것입니다. 성장한 나무에는 새들이 모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뭇 심령들이 깃들여야 합니다. 그늘에 깃들인다는 말씀은 영혼의 안식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1:28).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위대한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 있는 복음이 내 마음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내 마음을 주장하므로 내 심령을 새롭게 하며 내 인생을 새롭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 27 ≈            어찌 믿음이 없느냐

  (본문 : 마가복음 4 : 36 - 41)

  서 론 :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그대로 배에 태우고 바다를 건너가던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에는 물이 들어찼으며 배가 침몰 직전에서 위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풍랑에서 건지기 위해 힘껏 노력했으나 힘에 겨워 사태가 악화되자 아우성을 치면서 수라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살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면서 나무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 항해에 커다란 교훈을 주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저편으로 건너가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을 교훈으로 주시고 그곳을 떠나시기를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저편으로 가는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우리 인생 항해에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저편이란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말해 줍니다. 이편은 떠들썩한 세상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아우성치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생존경쟁으로 싸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은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저편이란 우리가 달려갈 곳, 우리의 소망의 땅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저편을 바라보는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저편을 바라보는 생활은 소망의 생활이지만 이편에만 집착하는 생활은 세상적인 생활입니다. 이 같은 생활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둔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생활이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합당치 못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의 사람들, 롯의 시대의 사람들이 이처럼 이편만 바라보고 이편에만 집착하는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든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눅17:13-14). 넓은 길은 가기는 좋지만 멸망의 길입니다. 육신대로 살아온 지난날의 생활에서 벗어나 영으로 육의 생각을 죽이는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야 합니다.

  (3) 저편은 미지수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저편을 향해 노를 저가든 제자들에게 갑자기 광풍이 불어 왔습니다. 물이 배에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심한 위험을 느껴 죽는 줄로까지 알았습니다. 항해에는 위험이 따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을 바라보고 우리의 인생 길을 걸어가는 일은 위험한 항해와 같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는 것처럼 크나큰 시험이 오기도 합니다. 무서운 광란이 일어나는 것처럼 환난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중도에 파산이 되거나 되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했습니다(히11:8). 그러므로 땅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가지 못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골3:2). 안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갈 수 없습니다.

  2. 광풍을 만난 제자들

  제자들이 저편을 향하여 출발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부딪혀 물이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나는 길이라 이 같은 어려움은 뜻밖이었습니다. 그저 순조롭게 갈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 일어났으니 광풍을 만나 생명의 위험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1) 이 광풍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적 생활을 벗고 영적 생활에 들어가려면 믿음의 시련이 필요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약1:2-4).

  (2) 이 광풍은 그리스도인의 가는 길에 만나는 환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에도 환난이 있습니다. 환난이 따르지 않는 인생들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에게 찾아오는 환난의 짐을 지고 그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빌1:29).

  (3) 이 광풍은 그리스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징계 없이 성장하는 자녀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징계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히12:7-12). 하나님의 징계는 그 징계를 받을 그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깨신 예수님

  이 같은 큰 광풍의 위험 속에서 제자들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광풍으로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것입니다.

  (1) 우리 생애에 풍랑을 만났을 때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어려움을 만난 그리스인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헤어 나오기 위하여 인간적인 방법으로 노력하는 일은 무의미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주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간구하기 전까지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일이 간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무시는 예수님을 빨리 깨워야 하는 것처럼 재빨리 간구해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의 간구를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했을 때에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간구는 늦을수록 받는 피해가 크며 받는 어려움이 큽니다.

  (2) 잠에서 깨신 예수님은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을 우리 주님은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어려움을 아십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히4:15). 잠에서 깨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쌍히 보시고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심에 아주 잠잠해졌다고 했습니다.

  결 론 : 배를 큰 풍랑의 위기에서 구해 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나무라셨습니다.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의지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의지했었다면 이 같은 두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알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더라면 두려움 없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즉시 깨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간구하여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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