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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장
 밤중소리  03-02 | VIEW : 5,102
  ≈ 17 ≈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고찰


  (본문 : 마가복음 3 : 1 - 12)

  서 론 :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지켜온 안식일에 대한 관념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지키고 있는 안식일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안식일 문제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이런 방식으로 지켰기 때문에 주님의 신랄한 공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둔갑시켜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15:4-9).

  1.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주장은 바리새인들의 주장이요 사실인즉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 자로써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신 분입니다. 다만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계명에 따라 지켜 왔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지켜 왔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송사 하려고 기회를 엿본 유대인들이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장로의 유전을 표준으로 삼으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들 자신도 스스로 안식일의 규정에 얽매어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송사 하려는 의도에서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가의 여부를 살펴본 것입니다. 엿본다는 말은 망을 본다고 하는 ‘테레오’에서 나온 말로 자세히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그 율법적인 사항을 지키는 일로 의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같은 율법적인 자세는 언제나 그들 스스로가 정죄의 올무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실 때 그 안식일을 지키는 여러 가지 규례를 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20:10). 여기서 말씀하신 일은 ㉮ 밭을 갈거나 거두는 일 ㉯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 ㉰ 나무를 하는 일 ㉱ 집에서 짐을 내는 일 ㉲ 오락을 구하는 일 등에 대한 규례만 있을 뿐, 선한 일, 병자를 고치는 일 등에 대한 규제는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안식일에 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일은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로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12).

  (3)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을 말하고, 악을 행하는 일이란 안식일을 사람의 계명을 따라 지키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사실인즉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귀히 보십니다. 사람의 생명의 귀중함이 천하보다 더 중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짐승까지도 사랑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중히 여기십니다(욘4:11). 병자를 고치는 일은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병의 고통에서 놓임 받게 되며 그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변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도 모순이 없는 합당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잠잠함에는 굴욕에 대한 창피와 이에 대한 복수심이 더욱 강렬하게 불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아시고 근심하셨습니다. 완악하다는 말은 ‘포로시스’로 돌같이 굳어 있다고 하는 ‘프로오’에서 유래된 말로 그 뜻은 맹목적이요 무분별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돌같이 굳어 있는 상태로 이성을 잃고 있었으며 올바른 지식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깨어지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도 녹아지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심판만이 그들이 받을 보응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완악한 마음을 보시고 근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근심한아는 말은 ‘쉴뤼페오’로 함께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침 받을 길 없는 돌같이 굳은 마음에 대하여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4) 예수님은 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네 손을 내 밀라고 하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의 손이 앞으로 내 밀어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명하신 말씀대로 그 손이 내 밀어진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능력 있는 말씀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손 마른 사람은 그의 손을 내 밀었습니다. 그의 손은 앞으로 내 밀어졌습니다. 그의 손이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로 인하여 이제는 예수를 죽일 의론까지 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고찰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고 율법에서 해방되었고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율법을 이룬 사람들이요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율법에 있는 안식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장래 일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2:16-17).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의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한 사실입니다. 안식일은 실체가 아닙니다. 다만 그림자였을 뿐입니다. 그림자는 그 실체가 나타나면 살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 실체는 바로 천국의 안식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제 7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7일에 그의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란 말씀에서 먼저 “하나님이 쉬셨다”고 하신 안식은 제 7일 안식이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안식은 천국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고 하신 말씀에서 더욱 안식의 참 뜻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하여 명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히4:9).

  이런 일은 예수님의 부활로써 그 그림자가 거치고 실체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안식일은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닙니다. 십계명이 우리의 영원한 도덕률이라고들 하지만 여기서 제 4계명인 안식일은 제외되던가 아니면 그림자로만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의 날 혹은 주일은 안식일을 대체한 날이 아닙니다. 율법의 안식일이 완성된 날로 천국 시민이 누려야 할 정말로 안식할 날입니다. 우리는 율법적인 규례나 방법으로 이 날을 지킬 사람들이 아닙니다. 율법적인 안식일은 영원히 살아졌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지침은 오직 예수에게 맞추어져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의 날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날에 안식일의 관념을 깨쳐버리고 이 날을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날로 알고 지내야 합니다.

  결 론 :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실 때 안식일까지 이루신 사실을 알고 안식일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고 우리에게 안식의 실체로 주신 ‘주의 날’을 주님을 섬기며 기뻐하며 참 안식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날로 살아야 합니다.
75 \ 마가복음 주석 설교



  (본문 : 마가복음 3 : 13 - 19)

  서 론 :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세우시기 전에도 여러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 활동과 나중에 이 땅에 복음의 사도들로 세우기 위해 특별한 사명자로 열 두 명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오르셔서 이처럼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제자들로 그들에게는 사도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부쳐졌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도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이 가룟 유다는 자기 선생님이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실 당시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그이 제자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에서 취하신 태도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심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는 산이라고 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자신이 제자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를 부르신 것은 바로 주님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 마음에 원하는 자들을 그의 일군으로 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의 일군 된 사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주님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하며, 이 사명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여 충성스러운 일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들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요6:44, 65).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를 위해 쓰임 받을 주님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에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보내는 자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3) 이들은 창세 전에 이미 부르심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43:1).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부르심은 지명하여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어쩌다가 산에 올라갔다가 예수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운 좋게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런 부르심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자신의 선택과 부르심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고전1:1).

  2.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은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했습니다(15),

  (1)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생활은 버리고 부르신 주님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를 따라 오너나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4:19). 가족에 얽매인 사람이나 세상일에 미련을 가진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9:57-62).

  (2)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도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주님의 권세가 따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 각종 권세를 주십니다. 특별히 열 두 명의 제자들에게는 친히 놀라운 권능을 주시므로 그들의 사도적인 직임을 권위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3. 부르심을 입은 열 두 명의 제자들

  예수님은 산에 함께 오른 사람 중 열 두 명을 지명하여 그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1) 시몬 : 시몬은 어부 출신으로 요한의 아들이며 안드레와 형제지간입니다. 그는 대단히 변덕스러운데다 과격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그에게 베드로란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마16:16-19).

  (2) 야고보 :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로 그도 역시 어부 출신입니다. 야고보는 특히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요한과  한 형제입니다. 이 야고보는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로 등장합니다(행12:2).

  (3) 요한 :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이며 그의 불같은 성격으로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 요한은 요한1,2,3서와 요한계시록의 저자입니다.

  (4) 안드레 :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 그의 직업 역시 어부입니다. 이 안드레가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5) 빌립 :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며 나다나엘을 찾아가 메시야를 소개하고 주님께 인도했습니다(요1:45). 그는 주님께 아버지를 보여주면 족하겠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6) 바돌로매 : 이 바돌로매는 나다나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요1:45, 49, 21:2). 그는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7) 마태 : 마태는 레위하고도 하며 세리 출신으로 세관에서 공무를 보던 중,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랐던 사람입니다.

  (8) 도마 : 도마는 디두모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므로 의심 많은 이름으로 불려지지만 대단한 신앙의 제자로 나타나기도 합니다(요11:16).

  (9) 야고보 : 이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로 작은 야고보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그의 어머니의 신앙도 아름답게 나와 있습니다(마27:56).

  (10) 다대오 : 이 다대오는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불려졌습니다(요14:22).

  (11) 시몬 : 가나안인 시몬이란 말로 나와 있으며 그가 가나안 인이라고 불려진 것은 열광 자, 열심당원을 의미하는 아람어의 별명입니다. 그가 헤롯 당원이었음을 말해 줍니다(눅6:15).

  (12) 유다 : 이자가 가룟 유다로 이 자에 대하여 “이는 예수를 판자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이 자기의 원하는 자들, 열 둘을 부르셨으나 그 원하는 자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가룟 유다를 부르시는 일이 주님께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부르셨습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잠16:4). 우리는 충성스러운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될지언정 가룟 유다처럼 악한 날에 쓰임 받는 자로 부르심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 19 ≈         귀신을 쫓으신 일과 바알세불


  (본문 : 마가복음 3 : 20 - 27)

  서 론 :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이 욕하고 핍박받는 대상이 되셨습니다(마5:11-12). 혹은 친족들에게까지 미쳤다고 하는 소문이 들려 가족이 동원되어 예수님을 찾아오기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방을 듣기까지 하셨습니다.

  1. 분주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공생애는 어찌나 바쁘신 지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시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20). 예수님은 이처럼 식사하실 겨를조차 없는 중에도 그의 전도사업을 쉬지 않고 말씀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습관을 따라 산에 으르시어 밤새도록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많이 댑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일, 사사로운 일, 사업의 일이 아무리 바빠도 주의 일을 함에 핑계를 대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항상 많은 무리들이 따랐지만 그들이 주님의 위로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늘 외로운 가운데 그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는 고난이요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친족들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치 못하고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7:5).

  하루는 주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들어 데려가려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건만 그가 세상에서 받으신 대우는 죄인에 대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일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사53:3).

  2.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하는 서기관들의 모함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신 후,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다고 했습니다. 이에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모든 지경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일을 듣고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산에 오르사 열 두 제자를 세우시고 어느 집엔가 들어가셨을 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1) 바알세불이란 귀신의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알세불이란 말은 ‘똥’ 또는 ‘오물의 주’란 뜻으로 이것은 랍비식 낱말에서 온 표현입니다. 바알은 주란 뜻이고 세불은 오물이란 의미로 주님을 모욕하는 가장 심한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오물과 연결시키므로 크나큰 인격적인 모욕을 주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에 지폈다고 했습니다. 지폈다는 말은 소유하다 또는 잉태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바알세불에게 붙잡혔다, 그가 귀신을 쫓는 능력은 그의 안에 들어가 있는 바알세불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모함인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권세 있는 말씀의 능력과 권위에 시기심이 나서 이런 형태로 예수님을 모함하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사단이 사단을 쫓아 낼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알세불을 사단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리고 귀신도 사단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란 대적자란 뜻입니다. 이런 이름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단의 역사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귀신이란 말은 ‘다이모니온’으로 악령과 같은 뜻으로 해석됩니다. 혹 어떤 사람은 귀신을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말하나 이같은 사상은 고대 헬라 철학자들로부터 나온 잘못된 사상입니다. 헬라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은 신으로 충만해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패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정령설을 주장하여 공기 가운데도 영이 있는데 그 영은 귀신이나 영웅들의 망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 휘하에 많은 타락한 영물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는 편재하지 못하기 때문에(만물 가운데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 영적인 존재들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에 의해 부림을 당하는 존재가 귀신들이며 이를 부리는 사단을 가리켜 귀신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오직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며 역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그의 하나님 대적은 그가 마지막 심판으로 지옥에 들어가지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계20:20).

  사단의 능력은 하늘에 있는 천사장 미가엘과 싸울 수 있을 만치 대단합니다. 악령 중에 감히 이 사단에게 도전할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사단을 내어쫓는 일이나 대적해서 싸우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4)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분쟁에 대한 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며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24-26). 사단의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의 날까지 존속될 수 있는 것은 사단의 권위와 한가지 목적 앞에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분쟁과 가정의 분쟁은 사단의 분쟁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인 예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화평’하는 나라는 흥하고 복을 받습니다. 화평하는 가정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이같은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될 때 가능합니다.

  3. 강한 자의 결박과 침입 당하는 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 강한 자(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일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강한 자의 집이란 사단이 점유하고 있는 집을 말하는 것으로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인간의 마음을 가리킨 표현입니다. 사단은 세상 임금이며 죄와 사망 권세로 인간을 다스리고 있는 죄인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으신 역사는 죄를 소멸하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신 자가 나타나 강한 자를 내어쫓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하신 일은 사단이 가지고 인간을 종으로 다스리고 있는 사단의 권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강한 자보다 더 강하신 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정죄에서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죄에서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강한 자로부터 우리의 죄를 소멸하시고 생명을 찾아주시며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분을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은 사단의 권세에서 놓임 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하신 자유에 이를 수 있습니다.




  ≈ 20 ≈         성령을 훼방하는 죄


  (본문 : 마가복음 3 : 28 - 30)

  서 론 : 성경에는 죄에 관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을 수 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무슨 죄이며 이 죄에 대하여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하심을 얻을 수 있는 죄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밝히신 “사람의 모든 죄”란 율법을 범한 죄를 가리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율법은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밝혀 놓으신 하나님의 규약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편에서 완전하신 것이기 때문에 죄로 타락한 인간들은 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법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자신의 의를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구원의 사역)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일1:9).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 죄는 “사람의 모든 죄”보다 더 악의적인 범죄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도, 바울이 개심하기 전 주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잔해한 일도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죄까지도 사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한다는 말은 ‘아피에미’로 탕감한다, 용서한다, 취소한다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탕감의 비유 중에서 일만달란트 빚진 자에 대하여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하신다는 말은 아무런 대가 없이 무조건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죄는 우리의 생애에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죄악입니다. 이런 죄가 사하심을 얻는다는 말은 성령의 활동에 제한을 주는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죄인들에게 가까이 하셔서 그들로 회개케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이들 모든 죄인들에게 가까이 하시는 일에 있어서 구애받으실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근거에서 주님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 성령을 훼방하는 죄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사하심을 얻을 수 없는 죄’도 있다고 하는 심히 두려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대단히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1) 그들이 성령을 훼방했다는 근거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더러운 귀신이 한 일로 돌려보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셔서 권능을 행하실 수 있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눅4:1, 요3:24).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일은 곧 성령의 역사로, 이같은 사실을 훼방하는 일은 곧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시기한 서기관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으며 예수님은 이런 비방을 듣고 나실 후,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 서기관들은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비방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훼방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행하시는 권능이 하나님의 영의 역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 중에 흠을 잡을만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자들을 시켜 말의 올무를 잡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되었으나 주님에 의해 눈을 뜨게 된 청년까지도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을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는 질문에 분명한 어조로 “선지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나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0-33). 그 당시 외식적으로 나마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생활을 해 온 그들이 더러운 귀신의 역사와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3) 이같은 훼방은 악의에 가득찬 훼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 행하심을 이같은 그들의 음모대로 악의에 찬 말로 훼방하였을 뿐 아니라 트집을 잡아 정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4) 이것은 성령의 분노를 살만한 훼방이었습니다. 이같은 죄는 ‘신성모독’ 그 이상 가는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알면서도 양심을 누르고 고의적으로 악의에 찬 비방을 일삼으며 율법의 흠을 잡으려고 하였으니 이런 일이야말로 성령을 대적한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이유

  성령 훼방죄는 아무나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멸망 받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이에 해당됩니다.

  (1) 이 죄는 복음의 원수들이나 저지를 수 있는 죄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하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행7:15). 이들은 그들의 생애에 나타나는 모든 성령의 감동하심을 소멸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살전5:19). 그들의 양심은 화인 맞아 영적 감각과 방향을 상실해 버린 사람들입니다(딤전4:2).

  (2) 이들이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죄를 회개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성령의 감동하심을 스스로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는 우리의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나님 앞에 회개케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면 그 누구라도 회개하여 사하심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성령 훼방죄’는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의 일반적인 죄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은 죄입니다. 멸망 받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이같은 무서운 죄의 시작은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의 강퍅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3:7-8).




  ≈ 21 ≈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관계


  (본문 : 마가복음 3 : 31 - 35)

  서 론 : 예수님은 어떤 사건에 부닥칠 때마다 그 사건을 발판으로 놀라운 교훈을 주시곤 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많은 무리들에게 둘러 쌓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실 때에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고 하는 전갈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전갈을 들으시자 곧 이 말씀을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가족관계를 이루는 새로운 교훈으로 확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이 외형적인 가족관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교훈에서 이같은 육신적인 가족간계 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새로운 가족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1. 예수를 밖에서 부른 모친과 동생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왜 예수를 찾으려 함께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매우 궁금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1) 이 문제의 해답은 21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때에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는 모함이 사방에 번졌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시고 능력을 행하시며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들의 귀신을 내쫓아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하여 그 소문이 번져 나간 것입니다. 혹은 선지자라느니, 혹은 사람을 미혹하는 자라느니, 혹은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느니, 혹은 바알세불을 지폈다느니 이런 등등의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는 말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같은 좋지 않은 풍문에 휘말려 있는 예수를 붙들려고 나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이곳에 있는 예수의 친속들을 가족이나 친속이 아닌 친구들로 달리 표현하고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무리들에게 피곤하게 시달리고 있는 그에게 휴식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미화하고 있지만 문맥의 전후를 살펴 볼 때에 그런 뜻이 아님이 분명한 것입니다. ‘붙들다’라고 하는 말은 ‘크라테오’로 이 말은 체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쳤다고 하는 말에서 그들의 출동은 결코 호의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31절에서 “때에”라고 하는 말은 어떤 말의 계속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때에”란 말의 헬라어는 ‘운’으로 이 말의 뜻은 그래서, 따라서, 그러므로 라고 해석됩니다. 21절에 나타난 사건은 아직 결말이 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들려고 나오고 있는 계속적인 상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의 성령 훼방죄에 관한 엄중한 경종이 계속되다가 이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들려고 온 그 친속들이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31절과 21절은 한 사건의 계속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다음처럼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려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래서(때에 = 그러므로, 따라서)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 . . ’ 친속이란 말은 가족보다 그 범위가 넓은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모친이나 동생들이나 누이들도 이 친속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곳에는 모친과 동생들 외에도 다른 친척들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친속들이 찾아 온 목적을 여러 가지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좋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많은 군중들 틈에서 시달림을 당하며 그에다 ‘미쳤다’고 하는 소문까지 들리는 예수님께 잠시 동안의 휴식을 갖게 하려는데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붙들러 나왔다’고 한 말이 걸림이 됩니다. 또 다른 견해는 이같은 풍문이 과연 듣는 대로인가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경해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친속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의심하고 절제시키기 위해 붙들려고 온 것이란 견해입니다. 주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에 불신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요7:5). 어머니 마리아 역시, 예수가 메시야라고 하는 생각이 들기 전에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이요 사랑으로 키운 아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아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 속에서 살았으며 이런 소문이 들려 왔을 때,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예수님을 이같은 생각으로 붙들러 나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족들에게는 커다란 실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주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참 뜻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 .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고 하는 무리들의 전갈을 들으시고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예수님은 밖에 나가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말씀을 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족은 혈육의 차원을 넘어 신앙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온 모친이나 동생이나 누이들도 그의 가족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같은 혈연적인 관계에 얽매일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혈연적인 친속관계를 가지고 계십니다. 모친과 동생과 누이들 외에도 친속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이들에게 얽매어 살아가는 일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관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란 하나님의 보내신 그의 아들을 믿는 자를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40). 그러므로 비록 주님의 가족이라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를 자기 동생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일은 이런 뜻에서입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생들이나 누이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적인 면에서 참된 가족관계를 이루고 있는 요한에게 부탁하시면서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고 마리아에게는 요한을 가리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이 말씀은 우리의 가정이 혈연적인 관계에서 보다 신앙적인 관계에서 가족관계를 이루라는 말씀으로 받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한 가족은 참된 의미에서 형제요 자매요 모친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지상에서는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장차 천국에서는 천상의 가족으로 합쳐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 .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천상의 가족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에서 이같은 참된 가정을 이루고 우리들 자신의 가정에서도 모든 가족들이 이같은 신령한 관계에 기초를 둔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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