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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밤중소리  03-02 | VIEW : 6,300


  ≈ 8 ≈         주님의 기도와 전도생활


  (본문 : 마가복음 1 : 35 - 39)

  서 론 :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에 있어서 두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전도와 기도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사 40일간의 금식기도를 하신 일을 기점으로 그의 공생애를 마무리 짓는 십자가위의 마지막 시간까지 계속하신 일이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에 계실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할 수 있는 방법이란 기도외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맡은 사역을 능히 감당하시려면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영적 교통이 있어야 하셨으며 주님은 이것을 기도로 이루셔야 했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기도를 빼놓으실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전도생활 역시 그의 공생애의 모든 일이 바로 전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기도생활 모습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그의 낮아지심의 신분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2:6-7). 이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이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되셨는가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전 인격이 곧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스스로 낮추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일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권능과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계실 동안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뢰해야 했으며 그 분을 향하여 기도하셔야 했으며 그 분의 권능을 힘입음으로서만이 말씀의 능력도 이적의 권능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의 역사도 이루실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주면 족하겠다고 간구하는 빌립을 향하여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은 분명 아버지와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으로 지상에 계실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14:9-10). 그러므로 예수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마땅한 모든 권능이 잠정적으로 유보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종의 자리에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주 재림의 날에 대해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날은 아들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마24:36). 그러므로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통이 필요하셨으며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성령을 물 붓듯 부어 주심으로 아버지의 권능으로 그의 구속 사역을 이루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마3:16, 12:18,28, 눅4:1).

  (1)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새벽기도라고 하는 기도모임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서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혹 이 땅에 처음 복음의 씨를 뿌린 선교사들에 의해 습관적으로 전해져 내려 왔다고 하나 그 기원은 바로 예수님까지 거슬려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셨다”고 했습니다. 새벽은 아직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사면이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최적한 시간이며, 하루 첫 시간을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찾아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은 기도하는 일에 다른 사람이나 어떤 환경적인 요소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을 곳을 말합니다. 이곳이 주님이 말씀하신 골방기도의 장소이기도 합니다(마6:6). 예수님도 그의 사역을 위해서는 이처럼 끊임없이 기도하셔야 하셨거늘 하물며 우리들에게 있어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기도가 얼마나 절실히 요구되는가에 대하여 인식하고 기도생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전도생활

  주님이 기도하고 계시는 곳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뒤를 따라가 만났습니다. 우리는 이들처럼 주님의 뒤를 따라가 만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따라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전도인은 어느 한 곳에 계속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도 다른 마을로 가셔서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셔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한곳에 계속 머물러 교세만 확장하여 나가다가 주의 복음이 사면으로 퍼지게 하시기 위해 핍박을 받게 하심으로 흩어지게 하셨던 일도 있습니다.

  (2) 예수님은 거기서도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곳에 가시든지 전도하시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가까운 마을로 가자고 하시고는 거기서도 전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열은 사마리아성 수가란 동네에서 무더운 여름철 행로에 곤하시어 쉬실 때에도 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 가까이 왔을 때 그에게 그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심령으로 전도하신 사실로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딤후4:2). 우리의 전도야말로 그리스도  인의 전 생애에 걸친 과업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와 복음과 주님의 사역은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도생활이 그의 공생애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심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고 했습니다(눅4:43-44). 예수님이 우리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도 역시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17:18, 마28:19).

  주님이 그의 복음 사역을 갈릴리로 잡으신 것은 그곳이 복음 전도의 가장 적격 지였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외식이 아직 물들지 않은 곳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의 신앙이 순박했으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제자들의 대부분을 이곳 갈릴리 바닷가에서 모으셨습니다. 그의 전도초기에 먼저 하실 일은 제자들을 모아 그들로 주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훈련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는 복음 선포지로 이미 예언된 고장입니다. “스볼론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가”고 했습니다(마4:15-16).

  결 론 :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그가 세상에 머물러 계실 동안은 스스로 종의 모습으로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무엇이건 공급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자기 비하에서 스스로 겪으시는 어려움을 우리들을 위해 참으셨으며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로 오르셨습니다. 우리도 그 분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기도와 전도에 전력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9 ≈         내가 원하노니


  (본문 : 마가복음 1 : 40 - 45)

  서 론 : 문둥병이란 예나 지금이나 부정한 병으로 여겨오는 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병을 하나의 저주를 상징으로 병으로 주신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질병 중, 가장 저주스런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문둥병자들이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모습을 여러 번 볼 수 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병의 고침을 받고 예수님의 칭찬까지 들었습니다. 죽음의 선고를 받은 영적 문둥병자들인 우리들도 이들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간구하면 이 무서운 병에서 놓임을 받을 뿐 아니라 영생의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1. 한 문둥병자의 경우

  예수님을 찾아 나온 한 문둥병자의 경우를 보면 이 사람은 주님 앞에 나온 그의 태도가 매우 아름다웠고 그의 믿음이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1) 그는 예수께 왔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해결은 예수께 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구원의 문제도 응답의 문제도 먼저 예수께 나와야 합니다. 이 길은 어려운 난관이 수반된 길일 수도 있습니다. 문둥병자는 성안에 들어올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 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레13:45-46). 그런데도 그는 용기와 자비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어려움을 물리치고 예수께 나온 것입니다. 12년 혈루병 환자로써 자리에 누어있었던 한 여인의 경우도 그의
병상에서 일어나 많은 무리들을 헤치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의 옷자락을 잡는 결사적인 고투로 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었습니다(막5:26-34).

  (2) 그는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문둥병자의 이 태도는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세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태도를 가지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5:8). 세리가 이런 태도로 성전에서 기고하므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자기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중심으로 나타내 보인 태도가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3) 그는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간구란 말은 ‘부르다’ 혹은 ‘청하다’란 말입니다. 이것은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 부르는 자세를 말하고 청함에 응할 때까지 계속 청하는 끈질긴 간청을 의미합니다. 그의 간구는 이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의 간구에는 두 가지 믿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원하시면 이란 말로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원하시면 이란 말에는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오면 또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어 고쳐 주심을 바라신다면 이란 그의 애절한 호소가 들어 있습니다. 다음에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란 말로 예수님의 깨끗케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믿었습니다.

  2.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은 자신의 문둥병에 대하여 불쌍히 여겨주심을 바라며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간구하는 이 가련한 버림받은 사람을 모른 채 하지 않으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그를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민망이란 말은 ‘스프랑크니조마이’로 이 말은 마음 또는 간장이란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마음으로 감동하다, 측은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간구는 주님으로 하여금 측은하신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같은 기도는 불쌍히 여김을 받고자하는 간절함과 그 마음의 진실과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2)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손길입니다. 끔찍스러운 그의 몸에 손을 대신 주님의 손길은 한량없이 크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이 손길은 긍휼과 자비의 손길입니다. 주님의 이 손길은 또한 치료하시는 창조주의 손길입니다. 그의 손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거늘 그 손길이 임하시는 곳에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실 것임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3)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원한다는 말은 ‘델로’로 현재 바라고 원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① 예수님은 그의 자녀들이 간구하는 기도에 대하여 언제나 “내가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나와 연합이 되신 분이시며 내 속에 들어와 내 안에서 그의 삶을 살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불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8:6-8).

  ② 예수님은 범사에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삼1:2).

  ③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너희 중엔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7:9-11). 그런데 하물며 비참한 자신의 병을 가지고 믿고 주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이 사람의 치료를 왜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4) 예수님은 그에게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창조주의 명령이십니다. 그가 비록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그의 본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하시면 명하는 말씀대로 성취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이 일을 책임지고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결과가 이처럼 나타났습니다.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이처럼 예수님의 치료하시는 권능의 역사가 즉각 나타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엄한 경계와 문둥병자의 전파

  예수님은 그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다만 그의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에게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까? 병자의 치료는 두 가지 면에서 주님에게 큰 곤혹을 갖다 주었습니다. 하나는 많은 이적을 바라본 무리들이 오히려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병자들이 몰려와 사람에 밀려 자신을 드러나게 다니실 수조차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이 몰려오는 일로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에 방해를 받으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둥병자는 자신의 병이 나음을 보고 너무 기쁘고 감격한 나머지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나쁘지만 자신이 새롭게 변화 받은 몸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자랑과 그의 생애에 억누를 수 없는 기쁨, 예수님의 이름을 널리 전파하지 않을 수 없는 그의 뜨거운 열망은 아무도 그의 전도를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무슨 문제이건 이 문둥병자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는 간절함과 주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 앞에 나가 간구한다면 “내가 원하노니 네 믿음대도 되라”고 하시는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 10 ≈         고침 받은 중풍병자


  (본문 : 마가복음 2 : 1 - 4, 11 - 12)

  서 론 : 예수에 대한 소문은 가는 곳마다 이웃과 먼 지역에 이르기까지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면서 가버나움에 이르시게 되어 어느 집에 유하게 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용신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용신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 말은 조금도 발 부칠 틈새가 없었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 중에는 병 고침을 받기를 원하여 찾아 나온 중풍병자가 들것에 실린 채 사람들 틈에 밀려댔지만 조금도 전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의 덮개를 뜯어내고는 그 구멍으로 환자를 주님 계신 방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사람 앞에서 상을 가지고 나가니 이 광경을 바라본 사람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1. 주님을 만난 그들의 노력

  이 중풍병자와 그를 주님께 데리고 나온 네 친구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란 곧 복음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소문을 퍼지게 하면 훌륭한 전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란 이 예수의 소문을 퍼지게 하는 일이며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로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을 듣는 사람이 다만 듣는 일에만 그친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은 그 주인공을 찾아와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만났으며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므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1) 이 중풍병자와 그의 네 친구들은 주님을 꼭 만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7). 동방에서 멀리 예루살렘으로 찾아온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하심을 받아 베들레헴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만나 그를 경배했습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잠8:17). 그들이 심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마침내 주님을 만나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 일은 이런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이들은 문제의 해결을 보지 않고는 그냥 돌아 갈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어려운 난관을 헤쳐 나갔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길에는 난관이 많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소유한 그 많은 물질로 인하여 생명의 길을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리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7:7). 이들 앞에는 도저히 주님을 만날 수 없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붕 위까지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냈다는 사실은 그들의 굽힐 줄 모르는 끈질긴 노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3) 이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온 이 좋은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꽉 차 있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사55:6). 한번 잃어버린 기회는 다시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마 이들이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다면 그 중풍병자는 영영히 병과 그의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일생에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잘 포착하여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자기 인생에 적용하였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나 오랜 대화를 끈기 있게 지속해 나갔으며 마침내 영원히 갈하지 않는 생명의 생수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요4:1-42). ㉯ 나다나엘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고백하므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요1:46-49). ㉰ 니고데모의 경우 역시 그러했습니다. 밤에 주님을 은밀하게 찾아가긴 했지만 그곳에서 중생의 교리를 듣고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요3:1-15). ㉱ 소경 바디메오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므로 눈을 뜨는 놀라운 기적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괴로움을 받던 한 여인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밖으로 쫓아나가 주님의 옷가를 만지므로 고침을 받았습니다(막5:25-34). ㉳ 세리장 삭개오가 그러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의 지나가심을 바라본 그의 앞에 주님이 서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므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눅19:1-10).

  2. 믿음을 보신 예수님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말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집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신약에 쓰여진 믿음의 경우, 두 낱말로 나타나 있는데 ‘피스튜오’와 ‘피스티스’가 그것입니다. ‘피스튜오’는 맡기다, 위탁하다는 뜻이 포함된 말이고 ‘피스티스’는 신실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많은 경우, 영혼의 구원과 상관이 없는 의미에서의 ‘피스티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예수님이 저희 믿음을 보셨다고 한 말은 주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구속적 의미에서의 의미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시고 계시는 사역에 대한 믿음과 질병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만 만나면 꼭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찾아 나온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건 없건 상대편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가 가지고 계시는 전능하신 권능으로 고쳐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대방의 믿음을 아주 귀히 보시고 이런 사람들에게 칭찬하시는 일을 잊지 않으셨고 그런 사람들의 요구를 한 번도 물리치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혹은 소문을 듣고 주님의 치료하시는 권능을 믿게 되었으며 혹은 다른 사람에 나타난 증거를 보고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예수를 만나면 반드시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2) 이들은 또한 예수님을 만나면 그 분의 자비와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주님은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긍휼히 여김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긍휼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결 론 : 주님은 이들에게 그의 마음이 뜨겁게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에 누운 채로 주님의 얼굴을 우러러 바라보는 이 병자를 향하여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제 이 중풍병자는 더 그 자랑에 누어 있을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주님의 입에서 일어나라고 하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의 권능으로 치료받을 수 있을 것으로 이곳까지 찾아온 그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걸어서 나갔습니다. 우리도 이 중풍병자와 같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면 극 체험한 이런 기적의 치료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 11 ≈         죄를 사하시는 권세


  (본문 : 마가복음 2 : 5 - 12)

  서 론 : 예수님은 네 친구에 의해 지붕 위에서 내려진 중풍병자를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는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것은 죄인에 대한 사죄의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밖에 할 수 있는 존재가 이 땅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곳에 있었던 서기관들에게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어떤 서기관들은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친히 권능으로 보여 주심으로 그곳에 있었던 많은 무리들로 다 놀라게 하셨습니다.

  1. 죄를 사하신 예수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중풍병자를 향하여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일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일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사할 권세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별개의 인격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그 본체로는 유일하신 한 하나님을 이루고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며 실상인즉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삼위 모두가 제각기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들로 세상에 내려오셨지만 그의 본질은 언제나 하나님이심으로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권능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선언은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선언이시며 이런 선언을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원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이 보셨다고 하는 저희 믿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이란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회개를 의미한다고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1:9).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한 자백이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병자가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가슴을 치며 통회한 세리와 같은 심정으로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병자는 자신의 병의 원인을 알고 있었으며 비록 입으로 자백할만한 처지에 놓여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그의 마음을 헤아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죄가 사함 받은 사실을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2. 죄를 사하실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신 예수님

  중풍병자에게 선언하신 주님의 사죄의 선언은 순간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1) 서기관들은 참람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속으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속으로 의논했다는 말은 그들이 말로는 표현치는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으로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참람하다고 정죄한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구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하는 그들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사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 있는 분이 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잘못된 점은 그들이 그처럼 말씀하신 그 분이 바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몰랐다는 점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행동으로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제의는 그들에게 위험부담을 안겨준 하나의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은 아무 표적이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사하시는 권세자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의 입에서도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는 말은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 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당장 그 자라에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돌로 침을 당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시고는 중풍병자를 향하여 명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에 누어있는 이 중풍병자에게로 쏠렸습니다.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가 예수의 명하신 말씀대로 상에서 일어나 집으로 걸어갈 것인가? 흥미와 흥분이 교차되는 숨막히는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해답을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 말씀에 분명히 해답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사죄의 권세는 어디서 온 것인가?

  예수님께 사죄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나타내신 이 같은 권세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이런 권세는 하나님으로서의 하나의 표징으로 주신 것일 뿐 예수님이 이 표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그들에게  보이신 것은 아닙니다.

  (1)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며 바로 그가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요1:1-3).

  (2) 모든 죄의 사유함이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라고 했습니다(요일2:12).

  (3)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9:12).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이는 오직 예수 한 분뿐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사유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셨음으로 오직 그 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우리 주님에게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큰 위로와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바로 나를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나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분으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12 ≈         주님을 따른 레위의 자세


  (본문 : 마가복음 2 : 13 - 15)

  서 론 :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야할 제자들에게 대한 태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눅9:62).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눅14:26-27).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레위는 “일어나 좇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마음에 큰 기쁨과 소망을 얻고 자기 집으로 그 일행을 모셔 대접하게 된 것입니다.

  1. 레위를 만나신 예수님

  예수님은 숨겨져 있는 그의 일꾼들을 찾으셔야 했습니다. 12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에게 복음 사역자로서의 훈련을 시켜야 했습니다. 레위라고 불려지고 있는 마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택정함을 받은 사람이며 주님의 12제자로 이미 예정을 입은 그릇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가 근무하고 있는 그 길목을 걸어가진 일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주님께 쓰임 받을 일꾼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불러모으시는 일에 부지런히 활동하셨습니다.

  (1) 주님은 지금도 그의 일꾼들을 부르십니다. 이 세상에는 추수할 곡식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처럼 기도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눅10:2). 우리는 이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일꾼은 어디든 있습니다. 주님이 그의 일꾼들을 부르신 곳은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의 무리들 중에서가 아닙니다. 성경에 능통하고 거룩한 교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중에서 찾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죄인의 소굴인 세관에서 찾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를 아무의 눈길도 관심도 끌지 않는 한적한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어부들 중에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어디든 복음을 전하여 주님이 필요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찾아야 합니다.

  2. 주님을 좇은 레위 자세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어떤 자세로 그의 부르심을 좇은 것입니까? 우리는 그의 태도를 두 곳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눅5:2728).

  (1) 레위는 이미 주님을 따를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곧 주님을 따른 사실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레위는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중에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레위는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며 그의 말씀의 가르침이나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이적과 표적에 대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수님께 발견되어 그의 부르심을 입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2) 레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메시야의 직접적인 부르심은 놀라운 영광입니다. 레위는 이 영광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에게는 이제 더 이 세상에서 바라볼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신 예수님은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① 레위는 그와 그의 온 가정의 유일한 직장도 그리스도를 좇는 일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는 주님의 한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좇으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을 좇은 것입니다.

  ② 레위는 메시야를 따르는 자의 축복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존재는 매우 값진 보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레위의 자세는 마치 모세의 경우와도 같은 것입니다(히11:24-26).

  ③ 레위는 기회를 잘 포착했습니다. 레위가 만약 이때 다른 핑계를 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을 늦췄더라면 그에게는 주님의 사도가 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이 돌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받을만한 때를 잘 알아서 결코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고후6:2).

  ④ 레위는 일어나 예수를 좇았습니다. 여기서 일어났다고 한 말은 ‘아니스테미’로 전치사로 쓰이는 말인데 ‘위를 향하여’ 또는 ‘위로’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레위가 아직까지는 땅엣 것에 얽매인 생활을 해 왔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위를 향하여 새롭게 그의 인생을 출발하는 자세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좇으라고 하신 말씀은 ‘아콜루데오’로 ‘너는 나의 확고하고 친밀한 제자가 되라’는 뜻이 담겨진 말입니다. 이 단어는 주님의 제자가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 처음에 쓰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가 이 말씀을 듣고 주님을 좇은 일은 목자의 부르심에 믿음을 가지고 따른 그의 신앙적인 자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4) 레위는 주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레위의 잔치는 그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의 나타냄이 됩니다. 레위는 이 잔치자리에 자기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친구들도 데려 왔습니다. “많은 레위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세리는 그 당시 두 종류로 구분되었는데 하나는 헤롯 안디바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세리들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로마 정부에 바치기 위해 징수하는 세리들인데 세금을 거두는 세리들은 이방인과 접촉하고 안식일에도 세금을 징수하며 공정하지 못한 액수를 정하여 부정 축재하고 있었으므로 유대인들은 그들을 죄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의 친구들 중에 죄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라고 한 말은 ‘하마르톨로스’란 말로 이 단어는 ‘하마르타노’ 곧 죄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죄란 말은 원래가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과녁이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어긋나갔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원래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창조되었음에도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이 목적의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는 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빗나간 과녁을 바로 맞추어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 론 : 레위는 자기로 말미암아 많은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우리도 레위와 같은 자세로 주님의 소명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 13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본문 : 마가복음 2 : 16 - 17)

  서 론 :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감격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인과 죄인의 구분을 율법의 선에서 구분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랑으로 삼았고 그것을 지키는 생활로 의를 행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이 없는 백성, 이방인들이나 그 율법을 포기한 죄인(세리)들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를 더럽히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세리들과 그들이 범법자라고 말하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신랄히 공격해 온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건강한 자와 병든 자의 비유를 통하여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의인과 죄인

  예수님은 의인과 죄인을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물론 영적인 상태에 대한 의미를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의원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신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 의원 됨이 실증되고 있는 것입니다(사53:5).

  (1) 의롭다하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의란 말은 대인관계에 쓰여지는 말이 아닙니다. 죄인이란 말 역시 동일합니다. 의인 또는 죄인이란 말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는 말입니다. 의롭다, 결백하다, 옳다고 하는 말의 ‘디카이오스’란 말은 ‘디케’란 단어에서 나온 말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리는 일로 인간의 전혀 무죄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이같은 의인은 없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3:10). 우리 인간들은 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담 안에서 모두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롬5:12). 율법을 지키는 조건이 의를 보장해 주고 있지만 이 율법은 두 가지 뜻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율법으로 인간들에게 의를 주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죄를 발견하여 참 생명의 도리를 찾으라고 주셨다는 사실입니다(롬3:20, 갈3:24). 또 다른 한가지는 이 율법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시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율법의 완전한 의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롬3:21).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으로 알고 율법을 지키는 생활로 의롭게 되려 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과 언제나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그 음성을 듣지도 아니하려니와 예수님은 또한 그들을 부르시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3) 죄인이란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의원은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병들었다고 하는 병이란 말은 ‘키코스’란 말로 그 병이 보통 병이 아니라 악한 상태, 곧 흉악히 병든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앓고 있는 영적 질병인 죄라고 하는 병은 흉악한 병입니다. 우리 인간을 정죄하는 병이요, 인간의 생명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병입니다. 이 병은 세상 의원의 능력으로는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이 흉악한 병을 치료해 주실 의원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2.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나?

  죄인을 부르신다는 말씀은 죄인들에게 들려주시는 목자의 음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인이란 율법이나 혹은 양심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자신의 참담함을 깨달아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보여주고 그 치료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갈3:24). 양심도 우리의 죄를 보여주므로 생명을 사모하는 갈급한 마음을 줍니다(롬2:15). 양심의 소리를 듣고 율법을 깨닫는 사람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는 바울의 탄식이 나오게 되며 이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그 아들을 보여주시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하는 감격에 넘치는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롬7:24-25). 죄인이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얻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아무런 의가 없으며 자신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영원히 멸망 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만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죄인의 죄를 사유해 주시기 오신 의원이십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은 그 죄인을 불러 그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병든 자가 의원을 찾아오면 그 의원은 그  병자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병든 자의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인의 죄를 씻어주시므로 죄인의 병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죄인의 친구이시며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주신 죄인의 구주 곧 죄인의 의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내쫓으시거나 버리시는 분이 아니요 나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고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사1:18).

  우리 하나님은 죄인이 죄로 죽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며 예수님은 이 죄인의 친구로 그들을 불러 회개시키시려고 오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겔33:11).

  (2)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그의 의를 주시기 위해 오신 의원이십니다. 의원이란 환자의 완전한 치료에 목적을 둡니다. 죄인을 치료하시는 영적 의원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은 완전무결하십니다.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그의 온전한 의를 주십니다. 하늘의 생명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의입니다. 그의 의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의 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이 의로 우리의 구원을 보장  받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은 이 그리스도의 의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완전한 의인인 것을 알고 자신의 율법적인 의나 양심적인 의는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 의만이 우리를 안전하게 천국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 14 ≈         그리스도인과 금식


  (본문 : 마가복음 2 : 18 - 20)

  서 론 : 그리스도들은 금식이란 말을 많이 듣기도 하며 사용하기도 합니다. 금식이란 하나의 기도의 형태로 음식을 취하지 않고 기도하는 일을 말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금식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도 금식을 정기적으로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같은 금식을 정기적으로 해야 만이 경건한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마치 이방인이나 세리들처럼 멸시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처럼 질문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교훈적인 희한한 답변을 들려 주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유대인들의 금식

  율법에는 금식에 대한 특별한 규정은 없습니다. 다만 매년 한차례 대 속죄일에 금식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민29:7-11, 행27:9). 그 후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여러 가지 금식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40일간 음식을 전폐한 일이 있었습니다(출34:28, 왕상19:8). 사울 왕이 죽었을 때에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칠일간 금식한 일도 있었습니다(삼상31:13).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에 세 이레 동안 좋은 떡을 먹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단10:3).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바라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금식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로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금식을 책망하시면서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을 이처럼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1) 이스라엘은 전쟁이나 국가적 위기가 닥쳐왔을 때 금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한 지파인 베냐민과 싸울 때 벧엘에서 금식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때에도 미스바에서 금식했습니다(삿20:26, 삼상7:6).

  (2) 이스라엘은 자신이나 가족이 병중에 있을 때 금식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가 낳은 아이가 병들었을 때 다윗 왕이 금식했습니다.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보사 아이를 살려 주실 지 누가 알까 함이로다”고 말했습니다(삼하12:22).

  (3) 이스라엘은 심히 애곡할 일이 있었을 때 금식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 왕의 죽음을 애곡하여 칠일간 금식했습니다. 다윗의 신하들도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금식했습니다(왕상21:27).
  (4) 이스라엘은 회개할 때 금식했습니다. 악한 왕 아합이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 금식하므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의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희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21:27).

  (5) 이스라엘은 위험이 임박했을 때 금식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에돔의 위협을 받고 금식했습니다(대하20:3). 이스라엘은 하만이 왕의 조인을 얻어 자기들을 해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금식했습니다(에4:3). 메뚜기 재앙이 임할 때온 이스라엘이 금삭해야 했습니다(욜1:14).

  2. 예수님의 금식관

  예수님은 혼인집에 초대받은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 어찌 금식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금식이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절기나 의식에 따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란 것에 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반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도 스스로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 40일 동안의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나 우리에게 금식을 폐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금식에 대한 보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히 보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는 금식이나 자랑이나 외식적인 금식은 아무런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그같은 금식에는 보상도 없고 금식으로서 인정을 받지도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은 죄의 애통으로 인한 것으로 바리새인들의 금식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요한에게 가까이 왔을 때 요한은 그들에게 이처럼 책망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마3:7-9). 이처럼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은 회개를 위한 죄의 애통을 의미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같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신랑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으므로 신랑과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구원의 감격이나 사죄의 기쁨이 전혀 없었으므로 금식을 자주 해 온 것입니다.

  3.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의 기쁨

  예수님은 사람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1) 혼인집 손님이란 그를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여기서 혼인집이란 말은 ‘뉨프온’이란 말로 신부라고 하는 ‘뉨프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손님이라고 하는 ‘휘오스’는 자손, 아들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혼인집 손님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그 손님을 신부와 동일시하는 뜻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혼인집 손님들이지만 그러나 이 말씀의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인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있는 동안은 오직 기쁨만이 있습니다. 사람이 기쁠 때에 금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실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뼈아픈 날입니다. 이 날에 그들은 금식해야 할 것입니다.

  결 론 :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그 날이 기쁨의 날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근심과 슬픔이 살아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금식은 그 개념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형식과 절기와 외식적인 금식은 영원히 살아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만이 있을 뿐입니다(사58:6-9).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열매를 상징적으로 가리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를 범했을 때 그 마음속에서 울어 나오는 진실한 회개에서 나오는 금식,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어떤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간절한 마음의 금식은 그 아무도 금할 수 없으며 이런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 15 ≈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본문 : 마가복음 2 : 21 - 22)

  서 론 :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집요하게 고소거리를 찾는 무리들은 율법에 열심 있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경홀히 여기는 자로 정죄했으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로 여겨, 율법에 위배되는 허점을 찾아 공박한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적인 공격목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요, 죄인들과 교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식문제도 빼 놓을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율법에 열심 있는 사람들로 그들의 눈에도 유대인의 규례와 장로의 유전을 따라 금식을 안 하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마땅치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들이 주님께 찾아와 이 사실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금식하지 않은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의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율법과 복음과의 병존할 수 없는 까닭에 대하여 놀라운 교훈을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의 복음과 바리새인의 율법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의 강한 도전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므로 예수님의 율법관과 바리새인들의 율법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의문을 따르는 외식적인 생활로 의를 얻으려 했기 때문에 율법의 참 정신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생활은 결국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는 외식자로 전락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대 강령에 의해 움직이셨습니다. 그 강령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한 율법사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는 질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7-40).

  하나님께서 “율법을 이루라 그리하면 그로 인하여 의를 얻으리라”고 하신 그 율법은 바로 이 온전한 사랑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이 율법을 온전히 이르시므로 하나님 앞에 의를 얻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셨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루면 율법의 완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신 말씀에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마5:18).

  2.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의 비유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는 주님의 비유에서 율법과 복음과의 새로운 관계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생베 조각이란 새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라고 하신 이 말씀에서 생베 조각은 새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복음을 의미하며 새 언약을 뜻합니다.

  (2) 새것이란 새 언약을 말합니다. 율법은 새 언약이 아닙니다. 율법은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시기까지만 필요로 했던 편법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갈3:19).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선생 구실밖에 할 수 없습니다(갈3:4). 우리의 의는 율법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낡은 옷이라고 불리는 율법은 새 언약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옷은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이미 쓸모 없는 옷이 되어 버렸습니다.

  옛 언약은 모세를 통하여 중보의 손을 빌려 주셨지만 그러나 새 언약은 주님이 흘리신 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2:20). 그리스도의 피는 능히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온전한 의를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율법을 완전케 하신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3) 새 것이란 새 사람을 말합니다. 새 언약에 들어간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새 사람은 율법의 속박을 받는 사람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속박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4) 새 것이란 새 피조물을 말합니다.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 계명이 필요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율법의 계명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명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그 계명은 곧 사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새로운 것입니다. 율법과는 관계가 없는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병행하여 하나의 옷을 말들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파에 속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서로 꿰매어 하나의 온전한 옷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되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주장했습니다(행15:1).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율법이 아니라)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해 주었습니다(행15:11). 이같은 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 갈라디아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어리석다고 책망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했습니다(갈3:1-3). 이같은 시도는 “새 것이 낡은 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다는 말은 더 나쁜 상태를 말합니다.

  3.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의 비유

  예수님은 다른 또 한가지 비유로 설명을 보충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새 포도주는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성이 대단히 높은 것처럼 복음은 전파되는 능력이 가히 폭발적입니다. 우리들로 새 마음을 갖게 합니다. 새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습니다. 이같은 새 언약의 역사는 ‘낡은 가죽 부대’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은혜의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가 되어 둘 다 간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이 새 언약을 받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두 다 터지게 되어 그 형편이 더 악화될 뿐입니다.

  결 론 : 사람이 율법으로는 새 언약의 축복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율법적인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한다면 그 사람은 은혜에서 떨어질 사람입니다. 복음은 율법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새 언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 16 ≈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본문 : 마가복음 2 : 23 - 28)

  서 론 :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두 가지 놀라운 선언을 듣게 됩니다. 하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마침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인데다 제자들이 길을 열며 밀 이삭을 잘랐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행동은 그들이 몹시 시장하여 밀밭 사이를 지나면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서 먹은 것을 말합니다. 이같은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못할 일을 하나이까? 고 항의한 것입니다.

  1. 바리새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안식일이란 헬라어로 ‘삽바톤’입니다. 이 말은 ‘샤바트’라고 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안식일의 최초의 기원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2:1-3).

  이 안식이 출애굽에 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으로 주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구례가 된 것입니다.

  (1)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여러 가지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어떤 조항들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안식일은 노동으로부터 쉬는 자유로운 휴식의 날이었으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경건한 날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이런 의미의 안식일에 자세한 토를 수도 없이 달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규례를 39조 항목으로 제정하고 다시 그것에 39개 조항의 세목의 살을 덧부쳐 이것들을 안식일에 지키도록 함으로써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으라”는 명령을 안식일에는 1키로 이상 여행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결정하여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일, 안식일에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일, 그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은 일 등, 이런 일들이 장로들의 유전에 위배된다 하여 정죄했던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 유전에 의하여 스스로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이 지키지 못하므로 외식적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인간의 법으로 인하여 죄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에 대하여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어미나 아비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고 하신 것입니다(마15:4-6).

  2.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안식일관을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결코 사람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윗이 어려운 경우에 처해 있었을 때의 경우를 증거로 하여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자기와 또 함께 한 자들이 먹은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21:1-6). 그러면 왜 예수님은 다윗의 경우를 들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근거로 삼으신 것입니까?

  다윗이 취한 이런 행동은 분명히 율법을 어긴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예증은 다윗이 그 진설병을 먹은 것에 문제를 둔 것이 아닙니다. 아비아달 대제사장이 그의 주어진 권한으로 그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비아달의 이같은 일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올바른 일을 한 것이라고 주님이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9:13).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크신 이라고 하셨고, 자기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분이시므로 아비아달이 핍절한 다윗과 그의 일행에게 제사장밖에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먹게 하였어도 하나님이 용인하셨거든 하물며 그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으로 어찌 정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이 예증을 들려주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법도는 그 근본 목적이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법규는 실인즉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셨다는 사실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2-13).

  ① 안식일은 사람들을 땀 흘리는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그 한날을 쉬게 하시려는데 안식일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종신토록 수고하여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살 수 있는 저주받은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하신 은혜로 일곱째 날에 쉴 수 있는 안식일의 복을 주시고 이 날의 식생활까지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인간을 안식일의 종으로 전락시켰고 안식일의 주인이시오 율법의 제정 자이신 예수님까지 정죄한 것입니다.

  ② 안식일은 피곤한 육신을 쉬면서 그 날에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죄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날까지 주신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③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안식일의 제정자란 뜻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그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시면서 인간들에게 그 안식에 동참할 수 있는 복된 날을 주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2:6). 성전보다 크신 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 성전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그것은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은 그 성전에서 거룩한 경배를 받으셔야 할 주인이 되신 분이십니다.

  결 론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율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의를 얻기 위해 안식일을 지켰지만 우리는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는 사람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를 얻은 사람들이요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감사와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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