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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장
 밤중소리  01-09 | VIEW : 440



  ≈ 94≈               생각하고 울었더라

  (본문 : 마가복음 14 : 66 - 72)

  서 론 : 72절에서 베드로는 주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것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주님이 사형선고를 받고있는 대제사장의 뜰, 주님이 보시는 그 면전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주의 이름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습니다. 이 울음은 베드로의 회개로써 그의 새로운 생애를 여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때로는 자신이 한 맹세를 자신이 짓밟는 경우도 있습니다. 베드로도 연약한 인간이었으므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회개는 그의 허물을 용서받았고 수제자의 위치도 확고히 할 수 있습니다.

  1. 베드로의 부인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보낸 하속들에게 잡히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내버려둔 채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54절을 보니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고 했습니다.

  (1)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요한의 안내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뒤를 따라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마침 대제사장과 잘 아는 처지였으므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으며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머뭇거리는 베드로를 보고 요한이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들어오게 했습니다(요1:15-16).

  베드로가 이곳까지 예수님을 뒤따라 좇아온 것은 과연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 될 것인가? 그 추이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저들에게 정죄 받아 사형언도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어떤 기적적인 권능을 나타내시어 새로운 돌발적인 국면이 일어날 것인가? 이 문제는 베드로에게 꼭 알고 싶은 문제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앞으로의 처신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들의 재판에 의해 정죄를 받는 날이면 베드로는 곧 도망치려는 생각을 가지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2) 베드로에게 첫 번째 시험이 왔습니다. 베드로는 한 비자의 안내로 대제사장 집 아래 뜰에 들어섰습니다. 베드로는 그곳에서 그 집 종들이 모여 불을 쬐는 무리 중에 섞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제는 자신의 신분이 철저하게 숨겨진 사실에 대하여 마음을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한 비자가 불을 쬐는 베드로에게 다가와 그를 주목하여 보고는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말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켜 천하게 부른 말로 나다나엘도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말로 빌립의 전도를 무시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어릴 적에 자라나신 고향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이유는 나사렛에서는 선지자가 나올 고장도 아니요 더군다나 메시야가 나올 수 있는 곳은 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란 호칭 속에는 예수님은 선지자도 메시야도 아니라는 뜻이 함유되어 있습니다(요1:46).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비자에게 자기의 신분이 노출된 사실에 심히 놀랬습니다. 이제 이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베드로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숨기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비자가 한 말을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라고만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고 시치미를 뗀 것입니다. 네가 정신이 있느냐? 네가 언제 나를 보았다고 생사람 잡으려느냐? 나는 예수란 사람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네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항변을 한 것입니다.

  (3) 베드로에게 두 번째 시험이 왔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한고비 넘겨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될 수 있는 대로 그 자리에서 빨리 빠져 나오려고 앞뜰로 걸어 나갔습니다. 이때 그 비자가 또 베드로에게 다가와 베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이 사람은 그 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그 당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을 보고 재차 확인하므로 주변 사람들에게 이 자를 빨리 체포하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이 같은 비자의 말에 베드로는 “또 부인하더라”고 했습니다. 한번 거짓말한 베드로는 두 번째는 좀더 적극적으로 부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양심에 어느 정도의 가책을 느꼈지만 두 번째는 그 양심의 소리도 무뎌졌습니다.

  (4) 베드로에게 세 번째 시험이 왔습니다. 그후 약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70절에 있는 말씀을 보니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그 당이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으며 갈릴리 사람들의 말은 그 표현상 사투리가 두드러졌으므로 그 말의 발음의 억양으로 쉬 알 수 있었는데 베드로의 말을 들으니 갈릴리 사람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당이라고 확정지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단히 난감했습니다. 더 이상 변명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은 그 당의 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유대인들은 그들의 증거를 세우는 일에 최종적으로 맹세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에게 닥쳐온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긴급하게 사용한 방법이 이 방법이었습니다. 72절에 나와있는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이곳에서 베드로가 한 맹세나 저주는 예수님에 대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다만 베드로는 자신에게 닥쳐온 위기를 면하려는 생각에서 자기는 맹세코 그 사람을 모르며 자기가 만약에 그 사람을 알고도 모른다고 한다면 자기는 저주받을 것이란 뜻의 말입니다. 이로써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 베드로의 회개

  베드로가 이처럼 세 번에 이르도록 예수님과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노라고 부인하자 그때에 마침 닭이 곧 두 번째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 닭소리는 베드로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 닭소리가 베드로에게 충격을 주게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30절에서 예수님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 회개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회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두 번째의 가룟 유다가 되었을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깨닫게 되고 그 말씀의 권능으로 회개케 된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기억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 베드로는 “생각하고 울었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생각하고 자신의 행실을 말씀의 거울에 비취어 회개하는 사람이 진실한 회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울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흘린 눈물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원통히 생각하는 눈물, 견딜 수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통분의 눈물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회개는 베드로로 새사람을 이루게 했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고 평생 주님 앞에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충성하는 진실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결 론 : 베드로가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 중 한 명도 잃지 않으셔야 할 일에 대하여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주님은 제자들의 신변을 염려하시어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18:8-9). 베드로가 이처럼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때 예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그들의 눈을 피하여 밖으로 도망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을 것입니다.




  ≈ 95≈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본문 : 마가복음 15 : 1 - 15)

  서 론 : 예수님에 대한 불법적인 재판을 감행한 유대인들은 ‘참람한 말을 하였다’는 죄로 사형언도를 내렸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재판대로 예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면 빌라도의 재가가 필요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에게 종교적 행사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으나 사형집행에 관한 권한은 식민지를 관할하는 총독의 재가를 필요로 했습니다. 공회원들은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빌라도의 사형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유대교의 중진들이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함께 긴급히 모여 의논하고 예수님을 결박하고 끌고 가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

  1.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죄과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사형에 해당될만한 아무런 죄과도 없었던 것입니다.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았지만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하므로 재판의 증거로 채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제사장이 최종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예수님을 메시야와 연결시켜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에 대제사장은 쾌재를 부르며 당장에 자신의 옷을 찢으며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고 묻고 전원일치의 판정으로 사형을 언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 그러나 이 사형언도는 로마법정에서 인정받기가 어려운 죄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성모독은 로마인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나 ‘찬송 받을 자의 아들’ 등의 죄명은 유대인들의 종교재판에서나 유죄언도를 받을 사건이지 로마법정에서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제이기 때문에 상관할 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스스로는 참람죄를 적용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사형언도를 내렸지만 그 죄명을 가지고 빌라도에게 가지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드른 먼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므로 로마의 황제를 거역하는 죄를 범했다고 고소했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3절에 있는 대로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했던 것입니다.

  (2) 빌라도는 그들의 여러 가지 고소하는 죄명 중에 뚜렷하게 부각된 한가지 죄명에 관심을 가지고 결박된 채 피고 석에 서 계시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가 정말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겨서거나 유대인의 왕의 행세를 한 것으로 믿고 이 같은 심문을 한 것은 아닙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대제사장들에 의해 고소되기 이전에도 예수란 청년에 대한 많은 보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란 청년에 대한 많은 보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는 로마의 통치에 도전하거나 반란을 꾀할 인물이 아님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가? 흥미를 가지고 듣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이런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잔을 마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이 사건을 그같은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사야로 예언된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주신 그 한 말씀 한 말씀의 성취를 위해 기꺼이 빌라도 앞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중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신 자신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그곳에 서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시인하는 답변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그 답변이 종교적인 메시야로서의 위치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심문의 진행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되자 대제사장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여러 가지로 계속적으로 고소했습니다. 아마 그들의 고소내용 중에는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문제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군중들을 선동하여 로마정부에 반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는 내용의 무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을 때 그들은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고 위협적인 압력을 가하여 결국 그들의 손에 넘겨줄 수밖에 없게 만든 것입니다.(요19:12).

  이 같은 고소가 증거도 없는 엉터리 죄명이란 사실을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입을 다물고 계시는 예수님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아니하셨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침묵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피고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무죄를 위해 변호하며 심지어는 거짓말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입니다.

  2. 바라바냐?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들의 명절이 되면 죄수 중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전례에 따라 유대인들은 사법권을 행사하는 빌라도에게 나아가 죄수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빌라도의 머리에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죄수를 놓아주되 이 예수란 청년을 놓아줄 것을 마음에 다짐하고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의 충동을 받은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쳤습니다. 이 바라바는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흉악한 범죄자였습니다. 민란에 살인했다면 아마도 로마정부에 반역하기 위해 반란을 주도한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인기가 있었고 많은 동정을 샀습니다.

  빌라도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변호하기도 하고 석방시켜보려고 애도 써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는 저들이 이 청년에 대해 과연 어떤 판결이 내려지기를 원하는가에 대하여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15절에서 “빌라도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고 했습니다.

  (2) 그러면 빌라도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에게는 주님의 재판에 대한 어떤 죄과가 있는 것입니까? 빌라도는 식민지 통치자로서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정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의 미미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소신을 위해 끝까지 책임질줄 아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재판장으로서의 인격을 갖춘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협박에 위축되는 비겁한 인물이었으며 정의로운 재판보다는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를 민란에 대한 책임문제가 그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한 명의 무명 청년의 생명에 대한 책임문제는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곧 마음을 돌이켜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정반대의 판결을 아주 쉽게 내렸습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손을 씻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모면하려 했지만 자신이 내린 판결이 손을 씻는 것으로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 론 : 우리가 성경적인 답을 내린다면 빌라도란 인물은 예수님의 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총독으로 예비하신 그릇입니다(롬9:17). 그의 등장은 가룟 유다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는 멸망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함만 못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빌라도의 손에 의해 다시 십자가에 목 박히게 로마군병들에게 넘겨졌습니다.




  ≈ 96≈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  

  (본문 : 마가복음 15 : 16 - 23)

  서 론 : 빌라도의 임무는 이제 끝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는 유대인들의 협박에 가까운 고함소리에 질린 빌라도ㅓ는 정의로운 판단이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를 위급한 시점에서 하나의 무명청년을 옹호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드디어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려는 마음으로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무리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주님은 로마병정들에게 온갖 수모와 모욕을 당하시 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많은 무리들 틈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이 로마병정들에게 붙잡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1. 희롱 당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빌라도의 일이 아닙니다. 빌라도의 사형언도가 내려지면 그것을 집행하는 일은 로마병정들이 담당하게 됩니다.

  (1) 사형언도를 받은 예수님은 로마병정들에게 이끌리어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끌려 들어가셨습니다. 이 뜰은 총독 관저의 뜰로 이곳에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갖가지 희롱을 자행하게 됩니다. 로마군인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유대인들이 말하는 메시야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로마황제만이 살아 있는 신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 예수에 대해서 그들에게는 하나의 조롱의 대상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온 군대가 그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를 소요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예방조치이며 많은 군중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들 로마군인들은 자기들의 몫을 이행하기 전에 자기들대로의 또 한차례의 희롱 재판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수들에게는 그런 일이 하나의 관례가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왕의 모습으로 꾸미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죄명이 ‘유대인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왕은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자색 옷으로 만들어진 왕복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어디선가 로마군인들이 입었던 더러운 홍포를 얻어다가 주님의 몸에 걸쳤습니다. 왕으로서의 한가지 모습을 갖춘 그들은 아마 기괴한 함성을 지르면서 좋아라 떠들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왕에게는 왕관이 씌어져야한다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러나 왕관이 그들에게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누구인가의 제의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만들었습니다. 왕관은 금으로 만들지만 예수님께 씌운 면류관은 가시로 엮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가시 면류관을 주님의 머리에 씌우고는 이제 왕의 모습이 만들어졌다고 흡족해 했습니다. 누군가의 제의로 그들은 왕으로 꾸민 예수님앞에 머리를 숙여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행위는 로마황제에게 행하는 충성의 예의를 본받아 예수님께 적용한 희롱입니다. 그들에게는 왕이 사형수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도 우습거니와 왕의 모습을 꾸며 그 앞에서 희롱하는 일에 큰 재미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갈대(왕이 가지고 있는 홀로 예수님의 손에 쥐어준 것)로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가시관이 이마 밑으로 내려오면서 주님의 얼굴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얼룩졌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그 앞에 꿇어 절하는 흉내를 냈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이 같은 일은 거의 광적인 광란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이처럼 모욕적인 희롱을 가했지만 그분은 언제인가 그들 앞에 왕이 되시어 왕의 권세를 가지고 나타나실 것입니다. 슥12장에서는 유대인들이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애통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부르지 못하는 많은 무리들은 그때 가서 자기들을 멸하려오실 진짜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2) 주님은 이 같은 수모를 받으시면 서도 아무런 항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당연히 받으실 일을 받으시는 것처럼 그 모든 일을 순순히 당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사53:7). 20절을 보니 그들은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몸은 피에 젖어 있습니다. 채찍질로 살이 찢기고 온 몸에 핏줄이 시퍼렇게 서 있고 전신에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몸 위에 자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이런 처절한 상태에서 그들 로마병정들은 좋아라 박장대소하면서 미친 사람들처럼 희롱을 한 것입니다. 이제 그 일도 지쳤는지 자색 옷을 벗기고 그의 옷을 도로 입힌 것입니다.

  2.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

  로마병정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에 끌고 올라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그곳에 올라가실 기력이 없으십니다. 유월절을 지내시면서 입에 드신 약간의 떡과 포도주를 마셨을 뿐 그때까지 입에 대신 것이 없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로마병정들에게 가혹하리 만치 심한 희롱을 당하신 후의 일이라 목도 갈 하시고  매우 힘드셨습니다.

  (1) 그때에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로마군병들에게 발견되어 예수님이 지고 가시는 십자가를 그에게 지웠습니다. 물론 시몬이 진 십자가는 로마군인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지운 것이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진 십자가는 아닙니다. 시몬의 주변에는 시몬 외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시몬이 걸려 이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선택을 의미합니다. 시몬은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는 후에 교회에 큰 일꾼이 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중요 도시인데 오늘날의 리비아 수도 트리풀리를 말합니다.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유월절을 당하여 시몬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서 시몬의 이름 위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표현한 것은 초대교회에서 이들 이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의 문안 인사 중에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는 말에서 시몬이 예수를 영접한 후 온 가족이 주께로 돌아온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롬16:13).

  (2) 다음에 시몬은 자기가 짊어진 십자가가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억지로 졌다고 했습니다. 결국 시몬의 십자가는 하나님에 의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시몬의 힘으로서는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지게 하시는 십자가는 그 어떤 것이건 내가 물리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이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십자가를 인위적인 방법으로 물리치려는 생각을 버리고 그것을 조용히 짊어질 수 있어야합니다.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참아야 합니다.

  시몬이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간 후에야 그의 십자가를 벗을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벗은 후 그는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를 그의 마음에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약1:12).

  결 론 : 우리는 시몬의 십자가를 우연한 십자가로 여기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가 그 십자가로 인하여 그의 생애가 새로워졌고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십자가를 잘 지는데서 오는 결과가 영광스럽게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 97≈                몰약 탄 포도주  

  (본문 : 마가복음 15 : 22 - 32)

  서 론 : “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제 삼 시란 로마식 시간 환산법으로 계산하여 오전 9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구레네 시몬이 지고 골고다에 올라간 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역사적 고증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잔혹한 형벌인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십자가 형틀의 모양이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의 †형틀이며, 다음에 T자 형틀, 세 번째가 X자 형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통나무형인 1자형 형틀을 고집하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이런 주장은 십자가로 인한 인류의 구원의 사역을 부인하려는 이단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2절에 있는 말씀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는 말씀에 관심을 갖으려고 합니다.

  1. 몰약을 탄 포도주를 물리치신 예수님

  몰약이란 복숭아 과에 속한 나무에서 추출해 낸 액체로 환자의 통증을 없애주는 마취제 역할을 하는 약제입니다. 이 몰약을 먹을 때, 포도주에 혼합하여 먹은 이유는 그 쓴맛을 포도주의 알코올 성분으로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1) 예수님은 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아니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형틀의 사형은 극심한 고통이 오랜 시간 계속됩니다. 아마 유대인들의 어떤 경건한 여성들이 이 같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사형수들에게 이것을 마시게 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같은 자비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사형집행권자인 총독이나 유대인들도 묵인해준 것입니다. “독주는 죽게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잠31:6-7).

  다만 이 같은 몰약을 탄 포도주가 언제 주어졌느냐의 시기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의 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포도주를 거절하셨습니다.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기를 거절하신 이유는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주신 잔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곳에는 심판에 대한 고통이 따라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고통이 없는 십자가를 지셨다면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②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심은 자신의 고통을 덜어보려는 의도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합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이 따르는 십자가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이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는 말씀 등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아들이 당하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전제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롬5:8).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세 명중 유독 예수님만이 많은 고통을 당하신 듯한 모습은 다른 죄수들은 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셨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③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은 죄인들에 대한 대속의 십자가였으므로 주님은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이 십자가를 지시고 끝까지 인내해야 하셨습니다. 그가 당하신 고통은 죄인의 죄에 대한 징계에서 오는 마땅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 그가 징계를 맞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셨는데 이 같은 메시야의 고통은 그가 지실 십자가에서 이루셔야 하셨던 것입니다(사53:5).  

  (2)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온전히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이 따르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들의 죄 값을 갚으시는 일에 예수님은 그 어떤 어려움도 이미 각오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때때로 십자가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과연 어떤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고 괴로움이 따르지 않는 십자가란 없습니다. 몰약을 탄 십자가란 사단의 유혹입니다. 이 같은 십자가를 찾는 일은 적당한 타협이 따르게 되며 결국 사단의 함정에 빠져 헤어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고통과 괴로움이 수반하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더 많은 유익이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벧전4:12-13). 우리가 당하는 십자가의 고난 속에는 무한한 축복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벗고자하지 말고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벧전4:16).

  2. 두 명의 강도의 경우

  27절에서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린 강도 둘은 심판 받을 인류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강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백에 따르면 자신들은 마땅히 정죄 받을 조인들이라고 했습니다(눅23:40-41). 이들의 십자가 형벌은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한 마땅한 보응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들은 마땅히 저주스러운 심판을 받아야 할 인류를 의미해 줍니다. 그런데 그들 중간에 계신 분은 아무런 죄 없이 그곳에서 저주스러운 형벌을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순간에도 둘 다 예수님을 욕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죄악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이들 중 하나가 자신의 죄를 돌이켜 회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에는 없지만 누가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달린 행악 자 중 하나는 그 사람을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응한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자신의 구원을 탄원했습니다(눅23:39-42).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이 강도의 회개를 받으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2) 십자가상의 이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는 구원과 심판을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십자가의 저주스러운 심판을 받아야할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제 인류는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구원을 얻고 끝까지 거역하는 자는 멸망을 받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3:18).

  두 번째는 사람의 회개는 결코 늦음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두 명의 강도 중 하나는 죽을 그 순간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길이 참으시면서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전도는 꾸준한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절망적인 죄인은 없다는 사실을 믿고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명 중 한 명만이 회개했다는 사실은 성령의 감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 없이는 사람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예정된 자들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예정이 누구에게 미치느냐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의 고유한 권한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죄인들의 죄를 밝히는 죄패가 있었습니다. 그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 같은 죄명은 빌라도가 임의로 부친 것입니다. 빌라도가 이처럼 죄패를 쓰게된 이유는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했을 때 예수님이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하셨는데 이 말에 근거한 죄명으로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이 죄패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냐, 너희들의 왕의 이 초라한 모습을 보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을 조롱하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일은 예수님은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시며 그같은 왕의 권세를 가지고 정말로 이 세상에 오실 일에 대한 예언적인 증표도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98≈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본문 : 마가복음 15 : 33 - 41)

  서 론 :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오랜 시간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제 3시(9시)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3시간 후인 제 육 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깔렸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식 현상이 아닙니다. 이 어두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계된 현상으로 죄인을 위한 대속의 죽으심의 고통과 수치스러움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보아야합니다. 이 어두움은 제 9시(3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니 무려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골고다를 중심한 예루살렘 주변에만 지역적으로 있었던 현상으로 그때까지 십자가 곁에 있었던 로마군인들이나 많은 군중들은 한편 놀랬을 것이나 그러나 영적으로 깨달음이 없는 그들에게는 일시적으로 일어난 자연계의 현상쯤으로 넘겨버렸을 것입니다.

  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목 박히신 후,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서 무리들에게 조롱을 당하시면서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3시간이나 계속된 어두움이 막 걷히려는 순간, 그때가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1) 바로 그때에 예수님은 크게 소리지르시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엘리’란 말은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엘리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그대로 음역하므로 헬라어로 기록한 마가복음을 유대인들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마가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친절하게도 그 말씀의 뜻을 번역해 주었는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처절한 외침은 십자가에서 겪으신 예수님의 고통의 함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것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음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통은 영적 괴로움까지 겹친 것으로 온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을 그곳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예수님의 외침은 지옥에서 당해야할 인류의 고통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에 대하여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세히 보여주셨습니다.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계14:9-11).

  그리고 이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한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난에 대한 예언은 주로 시22편에서 보여 주는데 1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는 고통의 외침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이 말씀의 성취를 생각하시면서 외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이 같은 고통의 외침을 들은 주변의 유대인들과 로마군병들은 잠시 멈췄던 조롱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엘리란 말은 엘리야란 말로 잘못 들은 모양입니다. 엘리야란 인물은 유대인들에게 생소한 인물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모르는 유대인은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에 대한 기대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엘리야를 부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말3:5-6).

  그리고 어떤 자는 해융에 머금게 한 신 포도주를 갈대에 달아 예수님으로 마시게 했습니다. 해융이란 스펀지처럼 수분을 흡수시키는 해초로 그들이 음료수로 사용하는 신 포도주를 그 해융에 머금게 한 후 갈대에 달아 예수님으로 그것을 마시게 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 같은 일은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죄수들이 목 말라할 때 마시게 하기 위해 관례적으로 하고 있는 행습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인도적인 측면에서 한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한 무리들이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주나 보자”는 말로 조롱을 계속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운명

  37절 말씀에서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고 했습니다. 이 큰 소리가 무슨 의미의 소리인지 마가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 말씀 중 마지막 말씀인 “아버지요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큰 소리로 불러 외치신 후 운명하셨는데 아마도 이 말씀일 것으로 여겨집니다(눅23:46).

  (1)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이상한 일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사건입니다. 이 성소 휘장은 성전의 지성소 옆에 쳐있는 휘장을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이 휘장은 인위적으로 찢겨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찢겨진 것입니다. 지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한 가운데가 찢겨졌다는 사실은 예사로운 징조가 아닙니다. 이런 일은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에 의해 극비에 부쳐졌지만 그러나 복음을 기록한 기자들은 그같은 사건을 이미 영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① 이 같은 일은 하나님께로 가는 새로운 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열렸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일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그의 육체니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히10:19-20). 구약적 제사는 오직 대제사장을 통해서 1년에 한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이 허락되었으나 예수님이 이 같은 장벽의 휘장을 그의 육체로 찢으시므로 누구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직접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새롭고 산길입니다. 구약적인 제사는 실상인즉 죽은 제사였습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열어놓으신 새로운 길입니다.

  ②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인류의 속죄사업을 완성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양을 대신하여 제물로 받치고 그의 피로 속죄의 제물로 삼는 구약적인 제사제도는 이제 필요 없게된 것입니다. 양이나 소나 염소의 피로 속죄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제도는 십자가 이전까지의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의 그림자로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 이후에도 새삼스럽게 이 같은 제물로 제사를 드린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짓밟는 죄를 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 후에도 계속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구약적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0년에 이르러 로마의 디도로 예루살렘을 공격케 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화시켜 구약적 제사제도를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종말에 이르러 회복된 예루살렘에 구약적 제사를 위한 성전을 건축하게 되며 적 그리스도부터 이 같은 유대인의 제사에 대한 혹독한 핍박을 받게 하실 것임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2) 이 사건을 끝까지 주시했던 한 백부장이 주님의 운명하심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했습니다. 백부장이란 로마군병을 거느리는 중견장교입니다. 약 백 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인물입니다. 아마도 이 자는 예수님을 사형 집행하는 일에 책임자로 파견된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골고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범상치 아니한 인품, 그의 행하시는 일과 말씀, 자연계의 이변 등을 보았을 때 그는 예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살펴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운명하시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스스로 중대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고백은 십자가에 달려죽은 이 청년이야말로 참으로 유대인의 왕이었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되는 것으로 이때 이 청년 백부장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회개하고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서 일을 했으며 후에 순교로 생애를 마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 론 : 주님이 십자가에서 겪으신 사건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최대의 정점입니다. 구약과 신약시대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구약적인 제사제도가 막을 내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무너지며 한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비로소 명백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제사장보다 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시고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주시므로 우리에게 미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 99≈              장사를 지낸 요셉
  
  (본문 : 마가복음 15 : 42 - 47)

  서 론 : 우리는 오늘 요셉이란 인물을 대하게 됩니다. 이 요셉은 아리마대 지방 사람인데 그가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한 사람이었던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지 아니한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사람 중에 이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훌륭하고 진실한 제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새삼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신분에 위험과 생명까지 버리기로 각오하고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사람입니다. 이 일은 니고데모도 구 그곳에 나타나 요셉에게 협력해 주었지만 실제로 장례를 주관한 사람은 요셉이었습니다(요19:38-42).

  1. 아리마대 요셉의 등장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오랜 시간 고통을 겪으시면서 유명한 십자가상의 일곱마다 말씀을 남기셨지만 제 9시가 되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시고 그 후 또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1)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다고 했습니다. 예비일이나 안식일 전날은 같은 날입니다. 안식일 전날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특별히 예비하는 날이기 때문에 예비일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 날은 금요일입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기 때문에 금요일이면 안식일에 쓸 물건이나 안식일에 필요로 하는 것들을 미리 이날에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엔 절대로 일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행된 장로의 유전에 따르면 안식일에 걷는 거리도 제한되어 있었고 죽을 환자가 생겨도 치료가 불가능하며 손에 아무 것도 들고 다닐 수 없는 엄격한 조항들을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이 안식일 전날이 저물었다고 했습니다. 제 9시 곧 오후 3시경이었으니 이미 이른 저녁에 다다른 시간임을 말해줍니다(3시부터 6시까지를 이른 저녁, 6시부터 9시경까지를 늦은 저녁으로 간주하고 있었음). 유대인들은 해지는 시간인 오후 6시경을 기준으로 하루의 시차가 바뀌기 때문에 예수님이 운명하신 시간은 예비일이 되는 금요일 저물었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아직 주님의 시신은 골고다 언덕위 십자가에 그대로 달려있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나무에 달려있는 시체는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지내란 말씀이 있습니다(시21:22-23). 뿐만 아니라 예비일에 시체를 장사하지 않으면 다음날이 안식일이므로 장사를 지낼 수 없으며 시체가 나무에 계속 달려 있다면 짐승이나 악한 무리들에 의해 시체에 손상을 받을 염려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반드시 예수님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2) 이 요긴한 시각에 골고다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란 뜻인데 지금은 이 아리마대 지방이 어느 지방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예루살렘 북쪽 약 30키로 지점에 위치한 ‘라마다임’이란 고장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이 요셉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아리마대 요셉에 관한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① 43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라고 했습니다. 공회원이란 산해드린 의원이란 뜻입니다. 산해드린 의원이란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명예로운 지위를 말하며 율법적인 재판의 최고법정이기도 했습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도 요셉과 같은 공회원이었으며 요셉은 예수님의 재판에서 가타아니하고 그들의 사형선고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특히 마가는 요셉이란 인물을 평가함에 ‘존귀한 공회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회원 중에도 존귀한 자란 의미로 그가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인품 있는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누가는 요셉을 “공회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눅23:50). 그는 다른 공회원들과 달리 선하고 의로운 사람인 점에 있어서 유대인들로부터 존귀한 자란 칭호를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② 요셉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교회시대나 또는 이 땅에 새롭게 탄생할 ‘천년왕국’을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관은 독특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장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모세와 같은 메시야가 나타날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타나면 이  세상에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오며 이 시대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야가 왕이 되며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 새롭게 전개되는 왕국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런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이 같은 메시야로 오신 분이신 줄로 믿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실망했습니다(눅24:21). 이 요셉이란 사람도 역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메시야 사상에 따른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③ 이 같은 요셉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한 것입니다. 당돌하다는 말은 요셉의 대담한 행동을 표현한 말입니다. 요셉은 그의 신분이 산헤드레 의원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공회원이요 또한 부자였으므로 그가 취한 이런 처신은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였고 실질적으로 예수를 십자가 틀에 못 박은 산헤드레 공회인데 그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장사를 치른 사실이 드러나면 그가 어떤 처분을 받을는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로 빌라도를 찾아간다는 것도 하나의 큰 모험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무도 거리끼지 않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고 결단한 바를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요셉이야말로 정말로 진실한 주님의 제자요 존귀한 유대인이요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2. 장사를 지낸 요셉

  뜻밖에 요셉의 방문을 맞은 빌라도는 놀랬을 것입니다. 요셉은 공회원이요 그에다 부자였으므로 이전부터 빌라도와는 여러 번 면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1) 평소에 요셉을 존경해온 빌라도는 요셉을 정중히 맞았습니다. 빌라도는 시간적으로 아직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 시체를 요셉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시체를 인계 받은 요셉은 부지런히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시간은 점점 안식일로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예수님의 제자 중 그곳에 나와서 예수님의 장사지낼 일에 대하여 걱정하고 서두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2) 요셉이 새로 마련한 세마포에 주님의 시체를 쌌다고 했습니다. 세마포에 싸서 장사지내려면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야 합니다. 누가 요셉의 이 일을 도와주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 그 주변에 있었던 여인들이 협력했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고 했습니다(눅23:55-56). 이들 여인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미니 마리아도 있었다고 47절에서 말해 줍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는 것으로 장사를 모두 치렀습니다. 바위 속에 판 무덤이란 아직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으로 이 무덤은 자신의 장례를 위해 요셉이 미리 예비해 두었던 것입니다(마27:60).

  결 론 : 요셉은 이처럼 예수님의 장사를 치르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생명의 위험까지도 무릅쓰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려울 때에 도움이 된다는 일은 큰사랑의 증거입니다. 요셉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증거를 이처럼 적절한 시기에 가장 보람있게 나타냈습니다. 그의 숨겨진 사랑이 이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과 같은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여 그 사랑을 주님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요셉처럼 나타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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