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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밤중소리  01-09 | VIEW : 691


  ≈ 86≈             옥합을 깬 마리아  

  (본문 : 마가복음 14 : 1 - 9)

  서 론 :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수난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으로서의 죽으심이기 때문에 유월절 절기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의 희생은 우리에게 죄와 사망에서 유월시켜 주셔야 하기 때문에 그의 희생의 시기도 유월절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1절 초두에서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다른 절기지만 이 절기는 모두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연관된 행사이며 또 시기적으로 하루가 겹쳐지므로 이곳에서 한 절기로 묶었습니다.

  출애굽 직전에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그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세워주신 뜻 깊은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급히 나올 때 겪은 고생을 기억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무교절은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지키며 이 기간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지냅니다. 이 같은 이유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하나의 절기로 간주되어 왔으며 그 기간은 니산월 14-21일까지 8일간을 지켰습니다.

  1. 사건의 경위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을 맞는 그런 시점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유대인들의 살해음모에 의해 계획적으로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고의 지도자들이요 모든 종교적인 재판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들이 주관하고 있는 이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베다니에 살고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오늘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1)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했는데 이 시몬이란 사람은 이전에 문둥이었다가 이제는 나음을 받은 사람이거나 예수님에 의하여 고침 받았거나 아니면 그의 별명이거나 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를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 여자에 대하여 요12:3절에서 마리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마리아는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베다니에 살아가고 있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형제 마리아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늘 예수님 곁에서 그의 말씀을 즐겨듣기를 기뻐하며 또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대접하기를 즐겨했든 마리아야말로 능히 이 같은 놀라운 사랑을 주님께 나타낼 수 있는 여자였습니다.

  (2) 이 나드향은 “매우 값진 향유”라고 했습니다. 이 나드향은 ‘나르도스타카스 비타만시’라고 불리는 향나무의 뿌리에서 빼내는 정액성의 액체 향으로 원산지는 히말라야 산맥이나 인도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로 대단히 비싼 값의 향유입니다. 3백 데나리온이라고 했으니 노동자의 거의 일년 치의 임금과 맞먹는 고가 품입니다. 이 향유는 중동지역의 처녀들이 자신의 결혼지참 물로 시집가는데 가지고 가는 필수품으로 이 향을 온몸에 발라 향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 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처럼 소중하고 매우 값진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다고 했습니다. 옥합은 값진 나드 향유를 담은 호리병인데 부드럽고 반투명한 그릇으로 만든 대리석 비슷한 광물질입니다. 그 주둥이가 좁고 길게 올라간 병이기 때문에 그 주둥이를 깨면 적은 구멍이 생기고 그곳으로부터 향유를 부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사건으로 빚어진 시비

  이 여인이 향유가 든 옥합을 깨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나드향으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사건은 주변에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으며 즉각적으로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이 분을 내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분을 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첫째는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여인이 한 행동을 허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엔 허비라고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한번 부어드리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생각에서입니다. 더군다나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진 향유를 쏟아 한번에 그것을 없애는 일은 그들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간에는 유월절이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가 습관적으로 실시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의 1년간의 노임이니 큰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면 그들의 말처럼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런 일이야말로 보람된 일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은 사람의 견지에서는 당연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치판단을 잘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일은 그 액수의 다과에 관계없이 매우 좋은 일이며 잘한 일입니다. 이 여인은 그 일을 했습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 것으로 바치고 적게 사랑하는 사람은 적은 것으로 바칩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컸으므로 많은 것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인색했습니다. 그들은 짐승의 십일조를 드릴 때에도 병든 것, 발 저는 것, 약한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도 그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물건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지치셨고 누가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노라고 탄식하셨습니다(말1:8-10). 이 여인은 그들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주를 위해 핍박을 받는 일은 비단 반대자에게 서뿐 아니라 내 이웃으로부터도 이처럼 받는 것입니다.

  (2) 이때 예수님은 무리들을 향하여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일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 때문에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상으로 보상해 주시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들을 괴롭힌 자들에게는 보응으로 갚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십니다.

  주님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일이 왜 주님께 좋은 일이라고 하셨나?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일보다 더 값진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은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하나님께는 네 생명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제쳐놓고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요12:6절에서 밝혀 주기를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있는 것을 흠쳐감이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많은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외식에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외식에 대하여 사람이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그만 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부모를 공경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린바 되지도 아니한 사실을 책망하셨습니다(막7:10-13).

  (3)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하여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향유를 부어드린 일은 힘을 다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일,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일을 할 때에는 이 여인처럼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마리아는 이미 주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큰 슬픔의 표시로 옥합을 깨어 힘을 다하여 주님의 몸에 부어 드린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죽으심 후에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와서 장사 지냈지만 이 여인은 이미 그의 죽으심의 고통과 슬픔을 안고 미리 그의 몸에 그들보다 더 귀하고 값진 나드향으로 그의 몸에 부어드린 것입니다(요19:38-40).

  결 론 :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참으로 놀라운 축복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처럼 이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하여 기념하는 말씀을 말하여 이 여인을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여인처럼 주님께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 주님의 이 같은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87≈              가룟 유다의 배신

  (본문 : 마가복음 14 : 10 - 11)

  서 론 : 베다니에 살고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은 여러 가지로 많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일과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느냐에 대한 교훈을 주셨고 한 여인이 부은 나드향 한 옥합은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으로 그 여인의 그 놀라운 믿음을 보게 되고 또한 예수님이 이 여인을 위해 하신 말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의 제자들은 스승에게 큰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특히 그 중에 가룟 유다가 지목된 대상이었습니다. 이 사건 직후, 유다는 곧장 대제사장에게로 달려가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음모를 꾸미고 이미 돈까지 받기로 약속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요12:6).

  1. 유다의 배신은 어디서 온 것인가?

  성경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룟 유다의 배신이야말로 의문 중에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1) 그의 배신의 동기에 여러 견해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견해가 유다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기대했었는데 자신의 판단에는 예수님께 그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난, 장사, 부활에 대하여 강조하시므로 실망했기 때문이라는 견해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견해는 유다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반드시 메시야적인 권세 있는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려는 의도적인 뜻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심으로 울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배신했다는 견해 등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동기를 살펴보면 그의 탐심이 많은 작용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유다는 애초부터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12:6). 유다의 도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이전부터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제자가 된 후, 돈궤를 맡게 되었으니 그 돈궤에서 많은 돈을 훔쳐갔을 것이란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이 같은 돈에 대한 욕심과 도벽은 탐심을 가져왔고 예수님의 책망으로 이제 그것마저 소망이 끊겼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께 당한 모욕의 보복으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그의 몸  값을 흥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이 같은 인간성을 아심으로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팔아 고난을 받게 하시려는 적격자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그같은 적격자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롬9:17). 우리는 악한 일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선택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같은 그릇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에 그 종말이 유다처럼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롬9:22). 잠16:4절 말씀에는 “여호와께서는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바로 이 악한 자로써 쓰임 받기 위해 선택된 자였으니 참으로 비참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유다는 주님의 견책을 싫어했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견책이셨습니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 지목된 대상이 유다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들먹이면서 그 여자를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잠15:12절 말씀을 보면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같은 자에게는 견책도 하지 말라고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욕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좋은 칭찬 듣기만을 좋아하고 견책을 듣기를 싫어하면 이 같은 일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 위대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견책을 들었을 때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람들을 그의 능력 있는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유다가 이때 주님의 책망을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고 나쁜 버릇을 고쳤다면 그의 생애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유다는 진리를 분별할만한 지혜가 없었습니다. 유다는 주님을 3년 반이나 따라다녔지만 주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메시야는 왕으로 오시는 영광의 메시야여야 하는데 나사렛 청년의 이야기는 자신은 많은 고난을 받고 대제사장들에게 잡혀 죽어야 한다고 하니 유다는 예수를 메시야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는 인간적인 면에서는 영리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왕이 되실 줄로 알고 있었는데 이 유다만큼은 예수님이 왕이 아니라 죽는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의 사역을 알 수 없습니다. 진리 안에 그리스도의 비밀이 있는데 진리에 눈이 어두우면 교회에서 유다의 역할밖에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은 유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3키로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1)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넘겨주려고 했다는 말은 그때 대제사장들은 이미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일 방책을 강구하고 있었던 처지였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죽일 계획을 세우고 진행 중에 있었고 그 가장 좋은 기회가 명절(유월절)로 생각했지만 그 날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명절을 지내는 날이므로 민요가 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방책을 구하고 있는 그런 시기에 그들 앞에 가룟 유다가 불쑥 나타났으니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뜻밖에 좋은 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넘겨주려는 유다의 제의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기뻐했습니다. 사람들이 없는 가장 한가한 장소에서 은밀히 체포할 수만 있다면 민요는 염려치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일 일을 미룰 까닭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의 진행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으실 일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져 나가는 일이 되는 것으로 유다의 배신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2)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돈을 받기로 약속 받았습니다. 여기서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준 동기에 돈이 작용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은 30량은 한 노예의 몸값밖에 안 되는 돈이었지만 가룟 유다에게는 그만한 돈이라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원래가 도적인 유다는 아마도 그들과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고와 세심한 배려로 틀림없이 예수를 잡게 해 줄 것을 장담하고는 그 대가로 은 30량을 약속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돈을 한푼도 써보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유다는 이 시간부터 예수님을 잡으려는 대제사장들의 체포조의 안내인으로 다시금 예수님 곁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유다는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여 떡을 떼어먹을 때 사단이 결정적으로 그에게 들어가 잠시후면 감람원 은밀한 기도의 장소로 가는 사실을 알고는 그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와서 스승의 몸에 포승을 묶이는 저주스러운 일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누구나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탐심을 품고 있으면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탐심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인하고 주의 뜻을 거역할 때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우리들도 책망 듣기를 싫어하면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교만한 자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고후13:5). 자기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일에는 선한 열매와 순종과 감사가 그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예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생활을 못하면 우리는 능히 가룟 유다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유다가 되지 말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88≈              다락방에서 있은 일

  (본문 : 마가복음 14 : 12 - 21)

  서 론 : 유월절 하루 전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이면 유월절이며 예수님은 이 날에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셔야할 바로 그날입니다. 12절에 나오는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이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양을 잡기 시작하는 전날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이날이 중요한 의미가 주어지는 날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고난을 당하실 예수님께 있어서 이 날은 그의 죽으심에 대한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신약적인 유월절의 행사를 이행해야 하므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 준비된 다락방

  이때까지 제자들은 유월절에 이루어질 선생님의 고난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유월절 행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대하여 주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고 물은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의 제안을 받아드려 두 명의 제자를 성내로 보내시기로 하셨습니다. 이 두 명의 제자들은 눅22:8절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시면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은 이미 그의 죽으심을 준비하시는 일에 유월절 행사까지 예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그 기록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유월절을 먹을 방이 어느 곳에 있는 누구의 집인지 언급된바 없지만 “그 집주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유월절을 지내실 객실을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장소를 찾는 일에 기적적인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 가서”란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제자들이 성내로 들어가는 그 시간에 과연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었는지?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어느 집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이 할 일은 순종하는 일뿐입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 그 집 하인들에게 돌 항아리에 든 물을 담아 연회석에 가지고 가라는 말씀에 그 하인들이 순종했더니 최상의 포도주로 변하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한 많은 양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2. 너희 중에 한사람이 나를 팔리라

  제자들이 말씀하신 대로 성내로 들어가 예비된 객실을 찾았고 제자들은 그곳에서 유월절을 예비했습니다. 유월절에는 양만 잡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누룩을  제거하고 무교병과 포도주와 쓴 나물과 양념들을 준비하였으므로 이 같은 일을 제자들이 담당했을 것입니다. 준비하는 일이 다 마치고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와서 다 앉아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였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자리에서 비로소 당신을 팔 가룟 유대에 대한 언급을 하신 것입니까? 지금 다락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월절 행사는 놀라운 의미를 지닌 행사입니다. 구약적인 유월절 행사가 영원히 살아지고 이제 새로운 신약적 의미의 유월절 행사를 세우는 순간입니다. 구약의 유월절 행사는 바로 왕 밑에서 노예생활을 해온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어린양이 피로서 그들의 생명을 대신하고 이스라엘을 탈출하게 하신 행사입니다.

  물론 이 같은 구약적 의미의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의 백성들을 그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나 대속제물로서의 어린양이 되셔야 했으며 이 일로 그의 백성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직접 집례하시는 유월절 행사는 그의 죽으심으로 구약적 의미의 유월절 행사는 영원히 사라지고 그의 피를 마시고 그의 살을 먹는 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새로운 유월절 행사를 창시하는 의미 깊은 행사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주의 성만찬’이 바로 이 같은 새로운 형태의 유월절 행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주님을 팔 인물이 동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여 이 자라에 참사하던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나가던가? 어느 한가지만을 택해야 할 것이므로 예수님은 나와 함께 먹는 자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 이때 제자들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고 묻기를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이 같은 물음에는 자기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두려움이 깔려 있었고, 도대체 자기들 중에 그럴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근심하여 묻게 된 것입니다. 이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받으실 일을 모르는 상태였고 스승을 파는 일이 무엇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대상이 가룟 유다인 줄은 전혀 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도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는 말씀으로 정확하게 그 대상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릇이란 나물이나 무교병이 담겨있는 접시종류를 말하는 것으로 아마 이때 물론 가룟 유다도 주님과 함께 손을 넣었겠지만 다른 제자들의 손도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팔 자를 제자들 앞에 공개하려는 뜻이 아니라 본인이 자신을 지적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21절에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가룟 유다가 회개할 수 있었을는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지 못하므로 오는 책임은 모면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의 죽음은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정 사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시41:9). 그러나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의 예정과는 관계없이 당사자가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대가의 화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이 같은 화를 곧 받게 되었으며 그의 생명은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함만 못한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유다는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가 물러난 후, 새 언약에 의한 축복의 새로운 유월절 행사인 ‘주의 성만찬’이 시작되었습니다. 요13:30절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도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도 사단이 어두움의 밤을 심어주었고 세상에 나가니 캄캄한 밤이 역시 그를 마지하고 있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유월절을 의미하는 ‘주의 성만찬’을 매년 몇 차례씩 거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마다 깊이 생각할 일은 가룟 유다의 배반입니다. 은 30으로 스승을 배반한 유다는 결국은 회개치 못하고 차라리 나지 아니함만 못한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실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한 후, 성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주어진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유다처럼 놓치면 생명의 길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 89≈              주님의 성만찬

  (본문 : 마가복음 14 : 22 - 25)

  서 론 :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이든 주님의 성만찬을 멀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월절의 성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하셨습니다(눅22:19). 주의 성만찬은 교회의 예배의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행사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희생되셨기 때문이며 출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이 계속해온 유월절 행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새 언약에 동참하는 새로운 행사로 계속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떡을 가지사 축복하신 예수님

  우리는 주의 성만찬에는 주님의 축복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복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낼 때에 먹는 떡은 누룩 없는 떡으로 이 떡을 먹는 이유는 쓴 나물과 함께 애굽에서의 고난의 생활을 회고하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락방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의미의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몸을 유월절의 누룩 없는 떡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누룩이 없다는 말은 순수하고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떡이 고난을 상징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구속사적인 면에서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육체의 찢기심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서의 죽으심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은 속죄제물로서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두 가지 의미에서의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가리켜 자신의 몸이라고 하신 것은 그 떡 자체가 예수님이시란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표현하시고 떡을 먹는 일은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의 몸인 떡을 떼어먹는 것입니까? 희생제물은 우선 어린양을 잡아야 합니다. 살이 찢기고 각을 떠야 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희생제물로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기셨습니다. 이제 새 언약으로서의 유월절 행사이기 때문에 양의 고기로서가 아니라 찢겨진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으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떡으로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의 몸을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언약의 상징입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1:22).

  (2) 또한 이 떡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영생의 떡임을 상징해 주는 것임으로 이 떡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하셨습니다(요6:52-55).

  그러면 우리는 이 떡을 어떻게 먹는 것입니까? 주의 성만찬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유력하게 주장되는 설이 개신교 측에서 주장하는 영적 임재설이요 다른 하나는 천주교 측에서 주장하는 화체설입니다. 화체설이란 우리가 교회에서 성만찬을 거행할 때 예수님이 실제로 임하신다는 주장으로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다는 주장입니다. 이 설은 9세기초에 대두되었고 16세기 트랜트 회의에서 확정시킨 천주교의 정설입니다. 그런데 영적 임재설은 15세기 칼빈이 주장한 것으로 성만찬식에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을 부인하는 반면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화체설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떡이 실제로 예수님의 살로 변하고 포도주가 피로 변한다는 주장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먹으라고 하신 것은 영적인 뜻입니다. 요6:63절에서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영적인 사실을 예수님은 마지막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대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일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방법에 따라 친히 영적으로 임재하시고 영적인 연합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잔을 가지사 사례하신 예수님

  떡을 떼는 순서가 끝났습니다. 아마 이때 제자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년에 집에서 해온 유월절 행사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곧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1) 성만찬의 잔은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유월절에는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랐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유월절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24절에서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언약이란 ‘은혜의 언약’을 말하며 이 언약은 옛 언약에 대체시킨 새 언약을 의미합니다. 옛 언약이란 짐승의 피로 세운 율법적인 언약입니다(출24:8). 이 짐승의 피가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를 의미해 주며 예수님은 이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그의 피를 영원한 속죄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세우신 유월절 성만찬은 짐승의 피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적 제물인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온전히 사유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구약적 짐승의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만의 잠정적인 관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졌습니다. 주님은 이 피를 마시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셨습니다.

  (2) 우리는 포도주가 어떻게 주님의 피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예수님이 친히 그런 법도를 세우시고 우리에게 명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포도주로 주님의 피를 대신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마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의 피는 영적인 의미를 두신 말씀이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그의 피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피를 마신다는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가 입에 들어갔을 때 실제로 주님의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야만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의 성만찬에 그의 살을 대신하여 떡을 떼며 그의 피를 대신하여 포도주를 마시는 것으로 주의 성만찬을 치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성만찬에서 이처럼 떡을 먹고 피를 마시면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되어 예수님이 세우신 새 언약의 동참자가 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만찬에 참여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 같은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에게만이 이 같은 영적 유익과 새 언약의 동참자로서의 크나큰 축복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일에 대하여 엄히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3) 25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락방에서 있은 유월절 행사가 구약적 절기로서의 마지막 유월절이심을 밝히신 것이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희생제물이 되시어 새 언약을 이루셔야 할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는 포도나무도 있으며 그 포도에서 마실 것도 나온다는 사실을 가리켜 주신 것입니다. 주 재림 시에 주님과 함께 거처할 천년왕국의 하나님 나라에도 이 나무가 있어 우리는 그때 그 포도나무에서 난 새로운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올라가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마실 포도주는 성만찬으로서가 아니라 생의 즐거움으로 마실 것입니다.

  결 론 : 다락방에서 있었던 주의 성만찬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행사입니다. 우리는 관습에 의해서나 전통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님의 새 언약에 동참하는 축복의 의식으로 주의 명하심에 따라 주의 오실 날까지 이 행사를 행하면서 주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 90≈              베드로의 맹세

  (본문 : 마가복음 14 : 26 - 31)

  서 론 :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마친 후 마지막으로 찬미를 불렀는데 이 노래는 할렐의 후반부(시115 - 118편)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감람산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이 산에 오르신 목적은 제자들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요 또 자신은 앞으로 져야할 무거운 십자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마지막으로 확인하시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때 산으로 오르시면서 베드로와 나누신 말씀이 인상깊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왜 주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는가에 대하여 베드로의 경우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주와 함께 죽기까지 하겠노라고 맹세한 그가 힘없이 시험에 들게 된 것입니다.

  1.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이제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제자들도 숙연해 졌습니다.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님의 태도에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감이 잡힌 것입니다.

  (1)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슥13:7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스가랴서에 있는 이 말씀은 분명히 주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목자를 친다는 말씀은 하나님에 의하여 당하실 주님의 고난을 말씀하시며 그 결과 양들이 흩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얼마 후면 이 예언과 같이 이루어질 것을 아시고 이 같은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흩어진다는 말은 그들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영히 배신할 것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이 잠시동안 시험에 들것이지만 주님이 그들을 돌이키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장차 되어질 모든 사실에 대하여 이미 아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계획에 따라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2) 이때 베드로가 재빨리 주님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의 이 같은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진심으로 마음에 있는 자신의 생각과 각오를 이처럼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충정어린 고백을 받아 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앞으로 이 같은 자신에 찬 맹세를 뒤엎고 주님을 부인할 일에 대하여 이미 낱낱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진실에서 나온 말인데 주님이 어떻게 그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오히려 의심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한번 힘있게 자기의 각오를 주님 앞에 거침없이 토로했습니다. 그의 새로운 맹세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한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왜 실패한 것인가?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거짓말로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진심에서 나온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왜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하신 말씀대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일을 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1) 베드로가 주님을 향한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계속 유지하려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결심이야말로 제자들 중에서도 모범적인 일로 보여준 일이지만 그같은 결심이 사단의 시험에 의해 무너질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의 이 같은 굳은 결의에는 반드시 기도가 따라야 했습니다. 맹세는 잘했지만 맹세로 일이 다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맹세한 사항을 다 이루기까지 베드로는 그 맹세를 이루기 위한 영적인 투쟁에 승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에 패자가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동안 베드로가 무엇을 했느냐에 대한 사실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은 원했었지만 기도하지 못하므로 육신이 약하여 사단의 시험에 넘어진 것입니다(막14:37-38).

  (2) 베드로의 맹세에는 자기만이 할 수 있다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이 교만이 그로 걸려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했습니다. 다 버린다는 말은 다른 제자들의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구별했습니다. 자기의 믿음은 그들의 믿음보다 우월하다고 여겼습니다. 자기는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두 두텁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 다 도망간다 해도 자기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는 결심과 각오가 확고히 서 있다고 자만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생각은 물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작용한 것이지만 그의 교만을 나타낸 말입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5:5). 베드로는 이 교만의 올무에 걸려 사단의 시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3)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에 베드로는 무엇인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께 의뢰했어야 했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든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좀더 심각한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참으로 발견하고 주님께 자기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도우심을 간구했어야 했습니다. 귀신들려 간질병 걸린 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주님께 찾아 나온 아버지는 주님을 향하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막9:24).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과신한 나머지 주님의 도우심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런 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자기 과신으로 결국 교만한 마음을 자지게 되었으며 시험을 주는 사단의 좋은 미끼가 되어 그 덫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능력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은 기도의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게 됩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과 함께 죽기 위해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주님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스스로 자만한 나머지 자신의 마음을 믿었습니다. 기도가 없어도 자기가 생각한 바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마음가짐이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결실 해야 합니다. 기도가 없는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사단은 계획이나 장담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두려워합니다. 기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의 주언 부언하는 기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실하고도 간절한 기도를 두려워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 함께 간절하므로 아뢰는 기도로 깨어 있었더라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 론 :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이 같은 적은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들의 기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 91≈              시험에 들지 말라

  (본문 : 마가복음 14 : 32 - 42)

  서 론 : 이제 결정적인 시각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그가 당하실 모든 일을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그는 자신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온갖 수모와 수치와 고통을 당하실 일에 대하여 인간적인 면에서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일을 만나셨을 때 평소에도 기도하시는 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산에 올라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그의 사역을 이루셔야 할 최 정점에서 최후적인 승리를 위한 피나는 기도를 위해 겟세마네로 향하신 것입니다.

  1.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신 후 제자들을 둘로 구분하셨습니다. 열 한 명 중 여덟 명에게는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먼 곳에 남겨 두셨습니다.

  (1)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세 명만을 데리시고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세 명만의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실 곳으로 가셨나? 이에 대해 두 가지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앞으로 얼마 후 곧 찾아올 시험을 앞두고 그들로 시험에 이기도록 기도를 시키시려는 뜻에서입니다. 이들은 모든 제자들 중 핵심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만이라도 시험에서 이길 수 있다면 다른 제자들을 능히 시험 중에서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주님이 당하실 고난에 그들로 기도의 협력을 얻고자 하시려는 주님의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해 줄 기도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기도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 세 명은 그 기도의 사명자로 선발된 제자들입니다.

  (2) 예수님은 이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마음이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는 말씀은 주님이 죽게 되신 것으로 고민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란 뜻으로 앞으로 주님이 겪으실 일에 대한 마음의 괴로움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죽을 지경으로 답답함과 괴로움과 고민스러운 모든 마음의 괴로움을 안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이 같은 마음의 번민을 해결하지 않고는 십자가를 지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결사적인 기도의 시간을 가지시려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올라온 세 제자들과도 떨어진 거리에서 기도하시려고 그들보다 조금 나아가셨다고 했습니다.

  (3) 예수님의 기도는 처절할 정도로 간절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이 35절 이하에서 몇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①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에는 여러 가지 자세가 있지만 예수님처럼 땅에 엎드린 기도는 자신을 낮춘 겸손한 기도, 순종을 나타내는 기도로 볼 수 있습니다.

  ② 예수님은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때”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당하실 고난의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때를 향하여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이 매우 고통스럽고 괴로우신 것입니다. 빨리 그 때가 지날 수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기도의 시작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아바’란 말은 아람어로 아버지란 뜻인데 이 표현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 대하여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개의 유대인들은 불경스럽다고 하여 이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의 품속에 영원 전부터 계신 독생자이시므로 이처럼 ‘아바’란 칭호로 하나님을 부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아버지란 말은 ‘아바’란 아람어를 다시 해석해 주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④ 예수님은 다음에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잔이란 예수님이 짊어지실 십자가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옮겨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이 잔이란 말에 함유된 뜻은 단순히 죽음의 고통만을 의미해 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전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가 인류의 죄를 지고 그 죄 값의 심판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인류의 죄를 짊어진 죄인으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 달으시며 오직 죄인으로서 그에게 무자비하신 죽음의 채찍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 잔에 대한 주님의 괴로움이 십자가에서 메아리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막15:34).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그렇게 해 주시리라고 믿어서 이런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자신의 그런 사명 때문에 이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일에 대하여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극한 상황에서 마음의 번민과 갈등을 해소하고 승리하는 일에 이처럼 애써 고민하신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란 기도로 자신이 하셔야할 일에 다시 한번 마음의 결심을 가졌습니다.

  2.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하고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당하실 일과 또 당차 자신들이 당해야 할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고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베드로에게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그가 자신이 맹세한바와는 달리 곧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그런 큰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도 한시 동안도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할 수 없었던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측은히 여기시면서 의미 있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마음은 원어로 ‘푸뉴마’로 곧 영을 뜻합니다. 베드로의 영은 이미 중생한 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은 무엇이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간절함이 있었으며 주를 위해 죽는 일에도 함께 하겠다는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육신이 약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깨어 기도해야 할 때에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은 그의 육신의 약함에서 온 것임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2) 예수님은 세 번째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때까지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는 말씀은 그 표현상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잤으면 됐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아직도 자고 있으며 쉬고 있느냐 이제 그만했으면 됐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곧 닥쳐올 고난을 대처하시려는 영적인 무장을 갖추시기 위한 기도의 싸움을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곧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은밀한 그곳으로 밀어닥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므로 인하여 비참한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 92≈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본문 : 마가복음 14 : 43 - 52)

  서 론 :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마치신 후 ‘성경을 이루려’하시려는 결연한 자세로 무리들 앞에다가 스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곤하여 잠을 자고 있는 제자들 앞에 오셨을 때에 가룟 유다가 이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들을 거느리고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시려고 대항치 아니하고 그들에게 순순히 잡히셨는데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태어나심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직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하심이었음을 최종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1. 가룟 유다의 입맞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스승을 파는 일에 입맞춤으로 신호를 삼았습니다.

  (1)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무리들 앞에는 가룟 유다가 앞장섰습니다. 유다가 데리고 온 무리들에 대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라고 했는데 이 같은 표현은 이 무리들이 바로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무리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이 의장이었고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로 구성된 72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기관을 ‘산헤드린 공회’라고 부르는데 이 기관은 구약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할 당시인 70연대까지 존속해온 유대인들의 최고 재판기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공회는 주로 모세의 율법을 수호하며 이를 어기는 자들에 대한 형벌을 가하는 절대적인 기관이었으나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정부로부터 파송된 총독 관활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에 관한 한,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 전에 벌써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체포하고 사형에 처할 것을 결의하여 이 같은 결의에 따라 파송된 무리들이 유다의 뒤를 따라온 것입니다.

  (2) 유다는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짰는데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고 일러주었다고 했습니다. 날이 아직 밝지 않아 어두웠을 때입니다. 매우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얼굴의 식별이 어려웠습니다. 더군다나 여러 명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빨리 구별하여 체포하지 못하면 혹 놓칠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이 일에 누구보다 가룟 유다가 잘 알았으므로 그가 앞장서서 체포의 대상인 예수님께 입맞추는 것으로 군호를 짠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 곁에 가까이 와서 아주 친절한 어투로 랍비여 하면서 예수님 얼굴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맞추는 일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나타내는 그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인사였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로부터 역사상 가장 간교한 입맞춤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승을 파는 일에 입맞춤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거짓된 배신의 입맞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예수님을 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49절에서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후에도 날마다 성전에서 많은 군중들에게 가르치시기도 하셨으며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꾼들을 채찍으로 내어쫓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잡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같은 일로 인하여 혹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은밀하게 체포하기로 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그들에게 찾아와서 선생을 팔 것을 흥정하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이려는 일에 쾌재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일에 대하여 “이는 성경을 이루려함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경을 이루려함이니라 고 하신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이 말씀은 가룟 유다에 대한 성경적인 예언성취를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보겠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성경을 이루시는 일이셨습니다. 이사야53장은 주님이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한 예언인데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3장에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나오는 메시야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슥13:7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하셨는데 이 모든 일들이 이처럼 성경에 가록된 대로 다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붙잡히셨습니다. 이때 그 곁에 들러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무리들이 다가와 주위를 둘러 진을 치자 제자들은 임전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허리에서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잠시 서로 대결한 상태에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리라”는 말씀과 함께 그 종의 귀를 다시 부쳐주셨습니다(마26:25).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그들의 손에 붙잡힌바 되셨습니다. 일이 이쯤 되자 제자들은 도전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은 그곳에서 도망치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선생을 원수의 손에 맡긴 채 도망치게 되었는데 그들이 도망한 일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이 이 같은 처지에서 그들을 대항하여 싸우실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이 싸움이 발단이 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새로운 왕국이 건설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싸움을 포기하고 스스로 체포되는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왕국에 대한 소망이 살아졌습니다. 한편 예수님이 힘없이 붙잡히는 장면을 바라본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바라던 꿈이 살아지고 예수님이 평소에 말씀드렸던 고난의 시기가 온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같은 일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위급한 처지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도망치는 일이었습니다. 죽어도 주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도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계2:13절에서 버가모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을 바라보게 됩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안디바가 교회를 핍박하는 집권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그런 위급한 상황이 버가모 교회에 닥쳐왔습니다. 그런데도 그 교회 성도들은 안디바와 함께 주를 위해 죽는 길을 택하므로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처럼 쉽게 그들의 선생을 악한 무리들의 손에 내어 맡긴 채 도망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벗은 몸으로 도망친 한 청년에 대한 모습을 보여 주므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51,52절 말씀에서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도망친 청년이 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지만 예수님이 잡히시는 현장에 따라갔다가 이런 일을 당했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결 론 :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일에 대한 소망은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일에 대해서는 준비를 못했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해 분명한 신앙적인 자세를 가지고 미리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롬8:17). 고난이 따르지 않는 영광은 없습니다. 안이한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고난은 주님이 모두 지셨으니 우리는 그 영광만 누리고 영광에만 동참할 것이란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어려움이 올 때 이들 제자들처럼 예수를 버리고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 받는 고난은 그 고난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경미한 고난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롬8:18). 이 영광을 바라보고 지난날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자진하여 고난의 대열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순교의 잔을 기쁘게 마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들처럼 주님을 위해 어려움이 올 때 그 고난의 대열에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93≈               “내가 그니라”

  (본문 : 마가복음 14 : 53 - 65)

  서 론 :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붙잡은 무리들은 먼저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 끌고 가 예비심문을 마치고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가시 끌고 갔습니다(요18:12-14).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이었으나 현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으며 실력자였으므로 산헤드린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뱌의 집 뜰에서 공회의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불법적인 재판이었습니다. 증인이 없었으며 피고의 해명의 기회도 전혀 주어지지 않고 일사천리로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중, “내가 그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여 회개했어야 했지만 오히려 참람하다고 정죄하므로 자신들이 받을 심판을 더욱 중하게 했습니다.

  1. 증거를 찾지 못한 재란

  54절까지 잠깐 베드로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치다가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31절에서 말한 자신의 맹세와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들을 섬멸하고 그의 권세를 보이는 그런 기적적인 일은 없을 것인가? 이런 궁금증을 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혹 무리들에게 들켜서 붙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멀찍이 쫓아가 결국 가야바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신분은 철저히 숨긴 것입니다.

  (1) 대제사장의 집 뜰에 모인 무리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산헤드린 회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이 처음에 큰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55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증거를 얻지 못한 이유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재판에는 그들의 율법에 의해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피고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일치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민35:30, 신17:6). 이 재판은 애초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로 시작된 재판이었으므로 거짓 증인들을 여러 명 세워 증거들을 조작하려고 했지만 급작스럽게 꾸며진 연극이었으므로 거짓증거 자체가 일치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58절에 나오는데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하더라”는 거짓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 거짓증거의 정확한 내용은 요2:19절에 나와 있는데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관한 예언이셨습니다. 이처럼 이 말씀은 영적으로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었으므로 그 깊은 뜻을 헤아려 알 길이 없는 유대인들은 그 말씀에 대한 증거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답답하고 조급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일이 계획대로 진척이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자신이 직접 심문하리라고 마음먹고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증거가 어떠하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아무 말씀도 없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었던 대제사장이나 다른 공회원들은 매우 놀랬으며 이상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재판정에 나온 피고는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변명하는 것이 통례였지만 예수님은 전혀 동요되는 기색 없이 사형언도를 가다리는 사람처럼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조급해 졌을 것입니다.

  (2)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입을 열지 않을 수 없는 핵심적인 질문으로 심문을 유도했습니다. 61절에서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습니다. 찬송 받을 자란 바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는 일을 송구스럽게 여겨 이처럼 간접적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곧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뜻입니다(마26:63). 그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신적인 의미의 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탁월한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지도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윗의 왕국을 건설할 다윗의 위를 이을 왕으로서의 표현을 그처럼 부른 것입니다.

  메시야는 반드시 자신의 메시야된 증거를 나타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메시야된 증거’를 보여달라고 졸랐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기도하고 직접 그 떡을 먹기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먹게 하였다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는 말로 당신이 메시야라면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요30:31).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메시야와 연결시키는 방법을 취하므로 혹 그 답변을 통해 결정적인 어떤 증거를 예수님 스스로의 입을 통해서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사형언도를 내릴 합당한 방법을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그 입을 지켜보았습니다.

  (3)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심문에 “내가 그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의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연해서 더 많은 사항을 그들에게 자세히 들려주셨습니다. 62절에서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대제사장의 행동은 대단히 기민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는 일은 극한 분노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의 증언을 참람되다고 판정한 대제사장은 예수가 하나님께 모욕을 가한 것으로 간주하여 분노의 표시로 옷을 찢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배심원격으로 앉아 있는 공회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찌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고 물었습니다. 판결은 지체되지 아니했습니다.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공회로부터 정죄를 받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사형언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참람죄’였습니다. 대제사장이 흥분하여 자기 옷을 찢으며 외친 말이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레24:16, 민15:30). 그러면 예수님의 이 같은 증언이 왜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죄’에 해당된다는 판정을 내리게 된 것인가? 첫째로 메시야로서의 아무런 증거도 없이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는 심문에 거침없이 “내가 그니라”는 말씀으로 메시야를 자처하므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증언입니다. 권능자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씀인데 예수님이 권능자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다는 표현으로 하나님과 동격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이 되기 때문에 ‘참람하다’는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구약적 표현은 하나님을 가리킨 말입니다. 단7:13절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을 다스린다는 말씀은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왕국의 건설을 의미하신 예언입니다.

  결 론 :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처럼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심으로 그들로 사형언도를 내리게 하셨던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그같은 죽으심으로 죽으셔야 할 시기이심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증언하시므로 그들로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함이십니다. 정죄 받은 예수님은 재판석에 모여 있었던 무리들, 공회원들과 대제사장들의 하속들과 종들로부터 수모를 당하셨는데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했습니다.

    <14장 94번 설교는 15장으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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