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마가복음 13장
 밤중소리  01-09 | VIEW : 433



  ≈ 80≈              세상 종말의 징조  

  (본문 : 마가복음 13 : 1 - 9)

  서 론 :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인류의 종말에 관한 징조에서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히 마태복음24장, 마가복음13장, 누가복음21장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하고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같은 종말에 관한 징조와 종말적인 사건에 대해 언급하신 동기가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건축에 매료되어 주님께 자랑하며 동의를 얻으려는 대화 중에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이고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들의 예배가 중단되는 사건이 일어나며 또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적그리스도에 의해 짓밟힘을 당할 것이란 성경적인 예언이 있기 때문입니다(단9:27, 슥14:1-5).

  1. 감란산에서의 대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맞은 편에 있는 감란산에 가시려고 성전에서 나가실 때의 일입니다. 제자 중 하나가 성전 건물을 올려보며 미석으로 꾸민 성전들의 기둥들을 가리키면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고 물었습니다. 이 제자는 이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대하여 예수님도 공감하실 줄로 알고 감탄 어린 말투로 물은 것입니다.

  (1)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근시안적으로 성전의 크기와 미석과 하려함으로 다듬어진 일에 활홀감을 가지고 감탄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성전의 장래 운명에 마음을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루살렘성의 결국과 아울러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이미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예루살렘을 바라라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탄식하신 일이 있으셨습니다(마23:37-39). 예수님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는 말씀은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이 예언처럼 이 같은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한 파멸은 그 후 얼마 안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에 의한 침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유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디도는 이 예수님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성전과 그 나머지  부속건물 전체를 고의적으로 파괴했다고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오르셔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 네 명의 제자가 이 같은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그 제자의 이름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로 나와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요지는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이러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침묵하셨습니다. 이 같은 시기적 문제는 제자들이 알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제자들의 이런 시기를 알려는 욕망은 그치지 아니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 물음에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질문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세상의 종말인 줄로 알고 있었으며 그러면 그같은 일이 일어날 때에 어떤 징조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물음의 요지라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자신들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건인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을 들으면서 아마도 예루살렘의 최종적 환난의 시기를 명시해 준 슥14장에 있는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슥14:1-5).

  2. 종말의 징조

  5절부터의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1)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는 질문을 다시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이 이루려할 때”란 시기는 주후 70년의 로마의 디도에 의한 성전파괴의 시기가 아니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임이 밝혀져 있습니다(마24:3). 그러므로 예수님의 답변은 디도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파괴된 그 시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①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의 출현은 거짓 메시야의 등장과 그의 미혹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일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종말의 징조가 주후 70년경이나 그 이후의 오랜 역사의 기간에 일어날 사건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종말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종말에 이르면 많은 사람이 자신을 메시야로 자처하여 유대인들을 미혹하는 사례가 발생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② 두 번째의 징조로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가서 유대인들은 난리와 난리소문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소식은 그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건입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그것을 의미해 줍니다. 이 같은 난리소문은 인류의 종말에 중동지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날 분쟁일 것이며 이런 분쟁은 이스라엘과 직접 연관된 분쟁일 것입니다. 끝이 아니란 말씀은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의 재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③ 세 번째의 징조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겠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재난이란 유대인들이 종말에 겪어야 할 환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환난은 세상에 임할 환난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말적인 재난은 무엇보다도 적그리스도에 의한 종교적인 핍박과 예루살렘성의 말할 수 없는 피해입니다.

  여기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다”는 말씀은 전대미문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이 전쟁이 요한계시록에는 둘째 화로 나와있으며 이 둘째 화는 유브라데 전쟁으로 이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곡의 침공을 받아 큰 재앙을 만나게 되며 적그리스도에 의한 제사와 예물의 금지가 시작되며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재앙이 마흔 두 달간 계속될 것입니다.

  (2)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라는 말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회와 회당이 등장하는 것은 그 시기가 예루살렘성전의 멸망을 말씀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종말에 있을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공회가 있고 회당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1948년 5월 15일에 있었습니다. 신실한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와 그에게 미혹 받아 추종하는 무리들에 의해 매질과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로마의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이 침공을 당한 70년대의 환난으로 오해하거나 그 시기를 중심으로 해석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해석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이 있을 징조”를 함부로 시대를 뛰어넘어 70년을 인류의 종말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종말의 징조를 성경적으로 잘 연구하여 소망을 가지고 그 날을 바라보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간구를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81≈             견디는 자가 이기는 환난  

  (본문 : 마가복음 13 : 10 - 13)

  서 론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종말의 징조는 일면 광범위한 내용처럼 보여 그 시기를 알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밝혀주신 종말적인 징조는 인류의 최 종말에 있을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코 긴 인류의 역사의 흐름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10절에서 이 같은 종말의 시기가 곧 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종말이 오려면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는 일입니다. 이때가 이방인의 때가 끝나는 시기가 되며 또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의 시기가 되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가진 교회는 인류의 종말에 대한 큰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전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바라보며 복음전파의 사명을 이뤄야 합니다.

  1. 유대인들이 받을 핍박

  11절부터 13절까지에 이르는 말씀은 14절부터 22절까지 이르는 대 환난시기에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세력들로부터 받을 핍박 상황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준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기는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의 무리들로부터 받을 핍박의 시기입니다. 사람들이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그들을 따르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생존을 위한 7년간의 언약(평화조약)을 성사시킵니다. 이 조약은 단9:27절에서 다니엘이 예언한바 ‘한 이레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주체적 인물이 바로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온 인류로부터 평화의 왕이란 칭호를 받게 됩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이 영광의 인물로 유대인의 영광의 메시야로 착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포로시절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기대해 왔습니다. 특히 다니엘의 예언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무찌르고 그들을 구원할 영광의 메시야가 반드시 나타날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같은 메시야로 알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나약한 모습을 보고는 실망했습니다. 그러한 메시야를 고대하는 민족적 염원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때부터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은 고난의 연속 중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5:43절에서 하신 말씀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다른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하신 이 다른 이는 누구를 말합니까? 이에 대해 그가 종말에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인물로 세계적 지도자로 등장하여 유대인들을 위한 ‘한 이레의 언약’을 체결할 적그리스도, 바로 그 인물로 연계시키게 됩니다. 이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게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셨을 때의 “호산나”의 외침이 이때에 아마 실감 있게 재연될 것입니다.

  이 자는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급기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자신과 자신의 우상에게 신적인 경배를 강요하게 됩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를 대적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미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된 많은 유대인들이 있어 적그리스도를 대적하려는 유대인들을 핍박하게될 것이며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죽이기도 할 것입니다. 막13:11-13절에 나오는 핍박이 바로 이 같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이 두터운 유대인들은 아마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며 적그리스도나 그의 우상 앞에 결코 경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일어납니다.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미혹 받은 유대인들은 이런 반 메시야적인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일 수 없습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넘겨줄 것입니다. 이때 이들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가 배설한 법정에서 심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은 너희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미리 준비하지 말고 그 시에 성령이 주시는 그 말을 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고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이 적그리스도를 끝까지 배격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다면 이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되어 구원받을 백성이 될 것입니다.

  (2) 그날에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비록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핍박이 아닙니다. 계9:1-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첫째 화로 불려지는 황충이 환난이 나옵니다. 이 환난 중에도 역시 무저갱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악령들에게 사로잡힌 황충이떼들에 의한 성도들의 다섯 달간의 시한부 환난이 있습니다. 이때에도 무저갱의 악령에 사로잡혀 황충이떼가 된 가족들에 의하여 형제에게 핍박을 받으며 아비가 자식을,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신실한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은 이보다 좀 늦은 후3년 반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때 적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경배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무저갱의 악령들에게 사로잡힌 이들 무리들, 혹은 형제들로부터 혹은 부모나 자녀들로부터 이 같은 무서운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죽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아마 이때 죽임을 당하는 유대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이들의 죽음은 순교로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계명에 따라 다만 적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경배를 거절하고 짐승의 표를 받기를 거절했을 뿐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을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나중까지 견디는 자”란 끝까지 견디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어느 곳에서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적그리스도와 대적하는 유대인의 경우를 말씀해 주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1) “나중까지 견디는 자”란 끝까지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상 앞에 경배할 수 없는 일과 적그리스도에게 신적인 경배를 할 수 없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똑같습니다. 이 같은 일은 십계명 중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이 계명을 율법적인 면에서도 지켜야 할 것이지만 복음적인 면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2) “나중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슥14:8-9절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3분의2는 멸절하고 3분의1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3분의1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유대인들 중에 핍박받을 대상자들인 3분의1의 무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 중에도 종말에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구원받기로 예정된 많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짐승이나 그 우상 앞에 신적인 경배를 드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들은 끝까지 견디는 그들의 신앙의 절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결 론 : 종말적인 환난은 교회의 경우건 유대인들의 경우건 모두 적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전3년 반 마지막 시점에 가서 다섯 달 동안의 황충이 환난을 통해서 오게 되고 유대인들의 경우는 후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와 그 우상 앞에 경배를 거절하는 일로 오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그때에 하늘에서 예루살렘 앞 동편 감람산에 내려오시는 그들의 메시야를 만나게 될 것이며 그들에게 제시된 최종적인 피난처에서 민족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 하나님의 자비하시므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슥14:1-5).




  ≈ 82≈             인류역사 초유의 대 환난  

  (본문 : 마가복음 13 : 14 - 20)

  서 론 : 인류의 역사에는 종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말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밝혀주신 종말의 징조와 사건의 진행을 주로 예루살렘을 구심점으로 하여 말씀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전술하고 있는 인류의 종말은 전 세계적이지만 주로 유대인들이 겪을 징조와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주신 14-20까지의 본문은 이미 영토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회복된 이스라엘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예언이기 때문에 2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1948년5월15일의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독립은 인류의 종말과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제 두 가지 성취되지 못한 일, 즉 이스라엘의 종교적 회복과 10절에 있는 말씀의 성취, “또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면 이 모든 종말의 징조가 급속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1.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예수님의 14절 말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란 말씀은 다니엘이 언급한 종말의 계시를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마24:15절에서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란 말씀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1)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예루살렘성전에 세워질 우상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서에는 우상에 대한 언급이 세 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9:27절에 나오는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11:31절에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12:11절에서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이란 표현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언급 중에 두 번째 사건은 지난날 ‘안티어쿠스’ 4세에 의하여 주전 170년경을 전후하여 예루살렘에서 이미 성취된 사건입니다.

  다만 첫째 번과 세 번째 사건이 종말에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다시금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사건으로 예수님의 예언은 이 사건과 연관된 사건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로부터 메시야적인 환영을 받게 됩니다. 그는 ‘한 이레’의 평화조약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게 될 것이며 그의 출신 형통이 유대계란 점에서 그리고 그가 가히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는 메시야적인 영광을 가지고 세계의 제패자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는 평화의 왕으로, 유대인들이 대망해 온 그들의 메시야로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는 유대인들의 메시야도 아니며 평화의 왕도 아닙니다. 이 자는 미혹하는 자이며 그 미혹에 넘어간 자는 이 자를 살아 있는 하나님으로 추앙하게 되며 그의 우상 앞에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자의 등장 목적이 온 인류들로 이 자와 이 자의 우상에게 경배시키므로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는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 먼저 하나님께 대한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단9:27, 12:11). 그뿐 아니라 이 자는 예루살렘성전에 앉아 자존하여 자신을 하나님이라 칭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살후2:4).

  (2) 이 일이 유대인들에게는 종말의 결정적인 징조로 작용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괄호 안에 말씀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하신 말씀은 다니엘이 언급한 종말에 계시를 읽는 자를 가리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니엘의 이 같은 언급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계시가 어느 시대 누구에게 적용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날에 유대인들 중에 적그리스도에게 미혹을 받지 아니하고 적그리스도에게 신적인 경배를 하지 아니한 신실한 유대인(이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로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된다)만이 다니엘의 말한바 그 계시를 이때에 깨닫게 될 것이며 이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종말적인 피난처를 찾아 갈라진 감람산 줄기를 따라 아셀까지 미치는 그 산골짜기로 도망하게될 것입니다(슥14:1-5).

  (3) 예수님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 받지 아니하고 끝까지 그에게나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살길을 열어주시기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산은 비유적 표현이거나 상징적 의미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냥 산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스가랴로 말씀하신 인류의 종말에 남은 유대인들의 구원의 길에 대하여 그 말씀을 인용하여 이곳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지라 너희가 그의 산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임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슥14:4-5).

  2. 산으로 도망할 때의 유의할 점

  우리는 유대인들 중에 남은 자들만이 최종적인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들의 구원은 곧 주 재림의 날에 하나님이 스가랴로 지칭하신 “그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1) 그들이 도망하는 일에 대하여 유의해야 할 점에 대하여 예수님은 몇 가지로 경종해 주셨습니다.

  ① 첫째는 도망하는 일에 지체해서는 안되며 매우 신속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붕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 말며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고 하신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이 같은 말씀 끝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말씀으로 재물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면 멸망 받을 것임을 경종해 주신 것입니다(눅17:32).

  ②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적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다른 영적인 뜻이 포함된 말씀이 아닙니다. 19절에서 말씀해 주시는 대로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긴급한 상황에서 산으로 도망하는 일에 아이 밴 자들이나 적 먹이는 자들이 신속히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이들은 도망하는 일에서 낙오되거나 지체하다가 롯의 아내와 같은 운명에 빠질 염려가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③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겨울은 여러모로 도망하기가 어려운 시기입니다. 마24:20절 말씀에는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 곁들여 있는 것을 볼 때 유대인들이 산으로 도망하는 장애요인이 겨울과 안식일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같은 말씀을 하신 일에 대하여 19절에서 해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같은 환난은 인류의 종말에 인류에 대한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이시기 때문에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대 환난이 될 것입니다.

  (3) 이 환난의 날에는 그날들을 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가 있을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날들”이라고 하신 그날이 어떤 날이며 감하여 주신다는 말씀이 어떤 뜻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날들”은 만약 감하지 않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그런 날을 가리킵니다. 이 날은 일곱째 대접심판으로 큰 바벨론으로 음녀화된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는 지구 최후의 날입니다. 이 날은 지구 안에 거하는 모든 존재가 하나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멸절 되는 그런 날이라고 하셨습니다(습1:2-3, 계16:17-21).

  예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위해 이 날을 감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공중휴거를 의미해 주신 것입니다.(마24:31, 살전4:17).

  결 론 : 성도들의 공중휴거는 바로 이때에 있습니다. 공중휴거는 이 지상에서 그의 택하신 자들의 구원을 위한 그날들을 감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은혜입니다. 이 공중휴거는 모든 택하신 자들이 다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이나 남은 자로 구원의 혜택을 받을 유대인들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휴거에 누락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83≈             재림의 날에 나타날 일들  

  (본문 : 마가복음 13 : 21 - 27)

  서 론 : 21절에 있는 말씀은 6절에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말씀으로 주 재림의 시기에 일어날 거짓 그리스도의 발호와 그들의 미혹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종말에 일어날 사건에 가장 관심을 끄는 사건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이라고 보겠습니다. 이들의 등장은 유대인들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미혹에 있습니다. 이들은 특별한 능력으로 이적과 기사를 행하기 때문에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1. 종말에 일어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

  이 같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은 인류의 역사상 끊임없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종말에 그같은 양상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1) 거짓 그리스도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짓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와는 별도의 다른 존재를 의미해 줍니다. 거짓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장하여 적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그를 대적하는 성도들을 미혹하는 다른 또 하나의 사단의 간계로 등장하는 사단의 일꾼입니다.

  (2) 이 자들이 등장하는 날은 주의 재림 직전입니다. 물론 이 시기에 이 거짓된 자들의 미혹을 받을 자들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참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이미 등장하여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자존하는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그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되어 주의 재림의 날에 구원받을 신실한 유대인들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핍박을 당하는 유대인들에게 한 가닥의 소망을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적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는 이들 신실한 유대인들은 이때 정말로 자기들의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미혹 받을 무리는 후3년 반에 떨어진 미련한 처녀로 비유된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후3년 반에 떨어진 후, 둘째 화로 등장하는 유브라데 전쟁을 통해서 회개하게 되어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게 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계11:13, 12:17). 이들은 후3년 반기간 동안 말할 수 없는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지만 이때 또 이들을 미혹하는 무리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로 나오는 또다른 무리들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손잡고 또는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미혹하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방해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때 이들에게 미혹을 받으면 안 된다고 경종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미혹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이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행하는 이적과 기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신실한 유대인들이나 후3년 반에 떨어진 모든 성도들의 믿음을 뒤흔들어 이 거짓된 자들에게 넘어지게 할 위험이 많은 것입니다. 그때 그만큼 그들이 당하는 핍박과 영적인 시련이 크기 때문이며 사단은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미혹의 손길을 뻗치는 것입니다.

  2. 주의 재림의 시기와 재림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경종하신 후, 주 재림의 시기와 재림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1) 24,25절에 나오는 말씀은 주 재림의 시기에 있을 천재지변의 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그 환난 후”에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그 환난 후에란 셋째 화 중 다섯째 심판까지의 재앙을 의미합니다. 이 다섯 번째까지의 재앙 중 특히 네 번째 재앙은 해가 권세를 받아 사람들을 태워 죽이는 재앙이며 다섯째 재앙은 세상 나라가 캄캄해지는 재앙이기 때문에 “해가 어두어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환난 후에 곧 여섯째 대접이 유브라데에 쏟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처럼 다섯째 대접까지의 환난 후, 여섯째 대접을 유브라데강에 쏟는 일곱째 재앙으로 오시게 됩니다. 26절에서 “그때에”라고 말씀하신 시기가 바로 다섯째 대접까지의 환난 후, 여섯째 대접의 재앙의 시기를 말합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이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재림을 바라본다고 하신 사람들은 일부 제한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유대인들이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스가랴는 이처럼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이란 말씀을 주 재림의 날에 그리스도를 지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슥14:4-5, 12:10).

  성경에는 주의 재림의 날에 재림의 주를 맞이할 일에 대하여 세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무리는 성도들이라고 표현된 무리들입니다.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신다”고 했습니다(살후1:10). 다른 또 하나의 무리에 대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고 했습니다(살전4:17).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무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들 중에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유대인의 무리들은 그들이 받을 심판을 위해 애곡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인 신실한 유대인들은 이때 갈라진 감람산의 골짜기로 도망하여 그들의 메시야를 바라보게 될 것이며 이때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며 이때 이들도 이방성도들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받을 것입니다.

  (2) 2절에서 예수님은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때에”라고 표현된 연속적인 시기는 거의 주 재림의 날을 가리키는 시기이기 때문에 동시적인 사건으로 혹은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27절에 나오는 “그때에”의 시기는 주님의 재림과 동시적인 시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재림 시에 두 종류의 수반 자들을 데리고 오시게 됩니다. 하나는 하늘의 군대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계19:14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영적 존재인 천사가 육신을 가진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아마겟돈에서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부활하신 몸으로 오시기 때문에 그들과 전쟁하실 수 있으며, 이들 하늘의 군대들은 첫째부활 자들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천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분명 예수님이 데리고 내려오시는 무리들임에 틀림없지만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싸우는 하늘의 군대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는 일”입니다. 이 모으는 일은 주 재림과 동시에 이들 천사들에 의해 모든 성도들이 한 명의 누락자도 없이  하늘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당하는 공중휴거가 있게 됩니다.

  결 론 :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이 말씀들은 말씀 그대로 인류의 종말, 주의 재림의 날에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이 말씀의 전반적이며 체계적이며 결론적인 예언을 위해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보내시어 요한계시록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구약 선지서에 있는 종말의 예언이나 신약에 여러 곳에 나와 있는 주 재림의 날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모든 예언에 대하여 깊이 연구해야 하는데 언제나 그 결론은 요한계시록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한 연구는 홈페이지 CD에 나와 있는 ‘종말의 계시’나 ‘재림의 메시지 101’ 참조)




  ≈ 84≈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종말  

  (본문 : 마가복음 13 : 28 - 32)

  서 론 :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여러 가지로 많은 쟁점을 안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이스라엘의 독립과 연결시킬 때 문제가 제기되며 더군다나 그 아래에 있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을 이스라엘의 독립이후의 한 세대로 해석할 때 시한부 종말관에 빠질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간에 시한부 종말에 대한 여러 가지 미혹으로 한차례 큰 혼역을 치른 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 년대가 1948년이기 때문에 한 세대를 40년으로 잡으면 1988년, 50년으로 계산하는 경우, 1998년을 재림의 시기로 계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시한부 종말관은 우리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해석을 시도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종말에 관한 여러 가지 사건과 징조를 비교적 상세히 들려주신 후,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말씀으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1) 우리는 이 무화과나무의 관한 말씀을 해석하기 이전에 이 말씀이 하나의 비유란 점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유란 말은 문자 적으로 ‘곁에 둔다’는 말로 ‘양자를 비교하기 위해 어떤 하나를 다른 것의 곁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고 그 비유 안에는 또한 심오한 영적 의미가 주어져 실제적인 표현보다 더 큰 의미를 주는 교훈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해석할 때 유념해야 할 일은 이 비유를 너무 확대 해석하여 비유가 오히려 주제를 압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 주제가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특징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도 안 된다는 점입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란 무화과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비유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시기 전에 인류의 종말에 있을 여러 가지 징조를 말씀하셨으며 결론적으로 주의 재림과 그의 보내실 천사들에 의해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말씀을 하신 후,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비유는 인류의 종말과 관계된 것이며 주의 재림과 연관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두 가지 면으로 살펴보면서 이 비유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한가지는 예수님이 아직까지 말씀하신 바 종말의 징조가 이르면 곧 주의 재림이 있을 것이란 의미의 비유로 보는 해석입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무화과나무의 성장과정의 특성을 보는 것으로 종말의 징조와 주의 재림의 관계를 알 수 있다는 의미의 해석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가을에 낙엽이 집니다. 그리고 봄철이 오면 나무의 진액이 오르면서 잎사귀가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중동지역의 봄철은 계절적으로 매우 짧기 때문에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기 시작하면 곧이어 여름철이 올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 절의 비유는 바로 이 같은 무화과나무의 특성을 들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가 너희 중에 나타나거든 그것은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아나는 예와 같으니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으면 곧 여름이 올 줄을 알게 되는 것처럼 인자의 때가 곧 이를 줄을 알라고 하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② 다른 한가지의 해석은 약간 비약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종말과 연관된 비유로써 설득력이 있는 해석입니다. 그것은 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결짓는 해석방법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과 뗄 수 없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은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에 의하여 여러 가지 교훈적인 비유에 많이 사용되어 온 것들이며 또 이스라엘의 민족적, 국가적 상징으로도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같은 면에서 이 비유를 해석한다면 ‘여름’은 예수님의 재림과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는 비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비유를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해석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하신 무화과나무의 상태는 원래가 죽은 상태로 방치된 나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기 이전까지의 상태’는 겨울철의 무화과나무 모양 전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나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운명과정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시장하셨을 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습니다(막12:1-9). 이 나무는 예수님의 저주로  곧 뿌리째 말랐습니다. 이 나무는 마치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2천년간이나 죽은 상태로 버림받아 온 이스라엘을 상징해 주는 것으로 나무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과정은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는 열매를 맺을 시기가 가깝다는 영적 뜻이 함유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예언된 말씀에도 인류의 종말이전에 이스라엘의 회복은 필수적입니다(사11:11-12, 렘31:8-9, 암9:14-15, 갤38:8-9, 슥12:10, 행1:11 등등). 그런데 문제는 29절에 나오는 말씀,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신 말씀 중 “이런 일”이란 과연 무화과나무의 경우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아직까지 주님이 말씀하신 인류의 종말에 관한 징조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이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조심스럽게 다 수용해야 할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견해 모두 타당성을 띄고 있으며 우리에게 종말에 대한 비유로써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세대”란 말의 시기를 이스라엘의 회복으로부터 30년 혹은 40년이라는 식의 시한부적 연대를 부치면 32절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과 정면 충돌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아들도 모르는 주 재림의 시기

  (1) 30절에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세대란 기간은 원어 상으로 한 인간이 사는 날 동안의 기간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 한 세대에 대한 기간을 성경적으로 30년, 40년, 50년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아브라함에게 400년을 4대라고 말씀하시므로 한 세대를 100년으로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창15:13). 그러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이라고 하신 이 세대의 출발점은 어느 시대, 또는 어느 사건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인류의 종말에 대한 징조가 나타난 이후의 어느 시기냐는 등등의 난제들이 많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떤 신학자의 경우는 한 세대를 40년으로 잡고 로마의 디도에 의한 예루살렘 침공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대주의 신학의 종말론적 해석의 경우, 이스라엘의 회복기간으로부터 40, 50년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예수님의 말씀의 전개로 보아 인류의 종말이지 결코 70년대에 있었던 디도의 침공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고 후자의 경우는 시한부적 종말이 되므로 “인자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에 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5절로부터 말씀을 전개하셨는데 바로 그 시점부터 “한 세대”의 기간을 의미하며 그 한 세대의 기간이 얼마인가는 성경에서도 정확한 해답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그냥 말씀 그대로 “한 세대”로 넘기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라고 여겨집니다.

  (2) 예수님이 이 같은 종말적인 여러 징조와 재림에 관한 말씀을 하신 이후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3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큰 오해가 생기게 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자기비하(自己卑下)이신 데 그가 세상에 계셨을 동안에 그는 스스로 하나님으로서의 전지전능하심의 제약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자기비하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스스로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늘보다 더 높아지신 신분을 가지셨으며 만물을 그 앞에 굴복시키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지금도 그런 분이 “그 날과 그때를 모른다”고 하신다면 그같은 주장이야말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잘못된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31절에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시므로 그의 말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종말적인 사건은 반드시 그의 말씀대로 성취될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재림의 날을 소망으로 바라보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 신앙으로 그날을 대비하는 신부들이 되어야 합니다.




  ≈ 85≈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본문 : 마가복음 13 : 33 - 37)

  서 론 : 하나님께서 주 재림의 시기를 우리에게 밝혀주시지 아니하신 일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성경에 주 재림의 일시가 명시도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아마 혼돈에 혼돈을 초래했을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정상에서 이탈하여 기이한 현상을 초래하여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만약 주의 재림이 오랜 미래의 일로 나타났다면 모든 성도들은 아마 주 재림에 대한 소망을 전혀 갖지 않고 안일한 가운데 세속적인 생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날이 밝혀져 점점 가까이 온다면 그 날에 이를수록 사회질서나 국가의 행정력이 완전히 마비되며 생산기능도 정지상태에서 벗어나 온 세계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다만 그날을 소망으로 바라보면서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큰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주님은 종말에 있을 주 재림의 모든 징조를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이르신 말씀은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는 말씀입니다.

  (1)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주의하라는 말씀은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에 대한 모든 일을 주의 깊게 살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중에 일어나는 모든 세계정세에 민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종말의 징조는 이 같은 세계정세 속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로마의 최종적인 멸망이후(1453년)에 나타난 세계 정세의 추이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는 1948년 이스라엘의 회복이후의 이스라엘의 움직임에 대하여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1957년 로마조약에 의해 출발했고 1993년11월1일을 기해 ‘마스트리히트조약’의 발효로 10뿔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EU의 동태에 대해 예의 주목해야 합니다. 주의하라는 말씀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말고 성경에 계시된 예언의 종말의 징조와 무슨 연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연구하며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이 일에 무관심 한다면 우리는 그날을 맞이할 아무런 준비 없이 덧과 같이 도적과 같이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주 재림에 대한 소망 중에 언제나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기도하는 생활과 열매 맺는 생활에 열심을 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인류의 종말에 있으며 이미 성경에 계시된 말씀대로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주의하고 깨어 있는 성도들만이 이런 징조를 바라보게 되며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성도들이 깨어 이어야 할 일에 대하여 타국에 간 주인과 종들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3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타국으로 간 주인은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가 종들에게 권한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종들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주신 권한이란 복음전파의 권한입니다. 이에 대하여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주인으로부터 받은 큰 권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각각 사무를 맡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직분을 의미합니다. 문지기는 종들의 또다른 표현이지만 양들의 문을 지키는 사명자, 교회의 청지기 직분을 맡은 하나님의 종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주인은 언제 온다는 기약이 없이 다만 ‘곧 온다’고 하는 약속만 하고 떠난 것입니다. 비유 중에 나오는 것처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감사할 일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정말로 주님이 예언하신 종말의 징조가 눈에 보이게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 시대 이전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종말에 대한 아무런 징조를 보이지 아니한 것입니까? 이 문제의 답은 하나님께서 그 계시와 징조를 비밀에 부치시므로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도 계시를 받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사도들도,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받은 요한조차, 사도 바울조차 종말적인 징조에 대해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세기 칼빈 시대만 해도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맹목이었기 때문에 계시록의 해석만큼은 유보하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종말의 계시를 주신 후,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봉함하라”는 명령을 주셨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2. 홀연히 오시는 주님

  26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1) 홀연히 오신다는 말은 언제든지 갑자기 오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의 재림에 대하여 항상 “주의하며 깨어 있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에게 홀연히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홀연이란 말은 예상밖에 급작스럽게 들이닥친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성도들이 주의 날을 마지하기 위해 준비하는 생활을 못한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언제인가 홀연히 임하실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노아시대의 사람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신 일이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이들에게 홀연히 임하게 된 것입니다.

  (2)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문제는 잘 때에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항상 깨어있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이처럼 자는 것을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목회를 한 종’들은 악한 종으로 “엄히 때리고 믿지 않는 자의 율에 처하리라”고 하신 심판을 받을 것이며, ‘기름 준비 못하여 신랑을 영접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로 비유된 성도’들은 대 환난 가운데 던져져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마24:48-51, 25:6-13).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문지기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인 양의 문지기들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되어야 하는데 악한 종의 생각처럼 주님의 재림에 관심이 없이(더디 오리리 하여) 세속적, 기복적 신앙을 심어 주므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마24:45).

  (3) 주님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재림 시까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이 같은 종말적인 신앙을 가지고 그들의 한 생애를 살아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종말에 이르러서야 재림 신앙을 가지겠다고 생각하여 아직 그의 오실 날이 멀었으며 먹고 마시는 생활로 살아가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도든 성도들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이 땅에서 복을 받는 생활이 그리스도인들의 최상의 소망인 것처럼 가르친다면 양 무리들을 잠재우는 목회를 하는 문지기밖에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결 론 : 주의 재림에 우리의 소망의 표적을 두는 생활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같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만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으며 비록 주의 재림의 날까지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해도 주님 앞에 가서 칭찬 받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져야 천국에 넉넉히 들어감을 얻을 것입니다.

 PREV :   마가복음 14장 밤중소리 
 NEXT :   마가복음 12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