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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장
 밤중소리  01-09 | VIEW : 379

  ≈ 73≈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본문 : 마가복음 12 : 1 - 12)

  서 론 : 유대인들이 버린 예수 그리스도가 만민의 구원의 주가 되게 하신 일은 하나님이 하신 기이한 일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의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들의 회개를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종들을 다 죽이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보내신 그의 아들마저 죽일 일에 대한 유대인들의 패역성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 내시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집을 짓는 거대한 사역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시게 된 사실에 대한 예언적인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포도원 비유의 대략

  예수님의 이 포도원 비유는 그 역사적 배경을 이사야 5장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교훈이나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가끔 비유로 대응하셨는데 비유란 문자적으로 “나란히 놓은”이란 의미의 ‘파라볼레’로 어떤 어려운 문제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 수 있는 이야기와 연결시켜 깨닫게 하려는 화법을 말합니다.

  (1) 이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스라엘은 자주 포도원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리키는 포도원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교회의 상징으로써 처음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 주인에 의해 포도원이 헐리기까지는 이스라엘이 포도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나오는 본문에는 육적 이스라엘인 포도원이 어떻게 무너지며 그 대신 새로운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포도원이 어떻게 세워지는가에 대한 해답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포도원으로 가꾸시고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율법도 주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 가지 제사제도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같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는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그 모든 일을 맡기셨습니다.

  (2) 2절에서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들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포도원의 주인이 추수 때에 그 소출을 거두려는 심정처럼 간절하고 안타까우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종을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종이란 물론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이 종은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여 그들로부터 영적 열매를 거두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종의 외침에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처럼 포도원의 농부로 세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을 잡아 때리고 배척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들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3) 포도원의 주인은 이 같은 포도원 농부들의 배반과 횡포에도 불구하고 큰 인내를 가지고 그들의 열매맺기를 기다리시며 그 후에도 여러 번 다른 종들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종들을 더욱 혹독하게 대접했습니다.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회개를 외치는 많은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의해 학대를 받았으며 죽임을 당했습니다.

  (4) 주인은 최종적인 방안으로 더욱 큰사랑의 방법을 택하고 그들의 회개를 기다렸습니다. 이 비유에 대한 뜻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주인의 아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을 가리킴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이처럼 기대한 그 농부들은 이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조처한 것입니까?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고 하여 결국 그 아들을 잡아 죽여 포도원밖에 던졌다고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인 예수님은 이처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농부들로부터 이 같은 비참한 대접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농부들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26:3-5).

   2.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여기까지가 포도원을 가꾸어온 이스라엘의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비유는 본격적인 본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 9절에서 포도원 주인의 진노의 선언이 내려집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리”고 선언했습니다. 이 같은 포도원 주인의 선언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포도원으로서의 사명을 버리시는 선언이시며 다른 한편 새로운 포도원으로서의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되는 놀라운 선언이십니다.

  이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농부들의 배신에 그 포도원 주인은 이 포도원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주인은 첫째로 농부들을 진멸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농부들의 진멸은 곧 이스라엘의 최후를 말합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예언처럼 하나님 앞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주후 70년경 로마의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의 파멸과 함께 온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으며 이 같은 일이 1948년까지 계속되다가 기적적인 독립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독립은 포도원의 재건이 아닙니다. 예언의 성취를 위한 일이며, 주 재림의 길을 열어놓은 일이며,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특별하신 배려이십니다. 그들은 이 같은 이스라엘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그 아들을 배신하므로 마지막 시기에 가서 이 일에 대한 보응으로 다시 한번 적그리스도에 의한 환난이 70년대와 비슷하게 나타날 것입니다(슥14:1-5).

  (2)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는 말씀은 포도원의 주인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특권은 살아지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포도원으로서의 하나님의 교회가 형성될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요15:1절에서 언급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고 했습니다(롬11:18-19).

  결 론 :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이처럼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118:22-23절에 나온 말씀의 내용인데 이 말씀은 바로 이 비유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들에게 쓸모 없다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버린 돌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교회를 세우는 가장 요긴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몸이 되심으로 모퉁이의 머릿돌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 74≈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본문 : 마가복음 12 : 13 - 17)

  서 론 :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듣고 그 비유가 자기들에 대한 책망인 것을 알게 된 이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심히 분개한 나머지 예수를 책잡으려는 더욱 간교한 책략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납세문제를 들고 말씀의 올무를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로마정부에 대한 납세문제에 있어서 반대입장에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한편 로마정부에 대한 납세문제에 관대했던 헤롯 당원들을 한 무리로 하여 예수님께 파견하여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끌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1. 로마정부에 대한 유대인들의 세금문제

  유대인들의 로마정부에 대한 납세문제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물러선 후 ‘코포니우스’가 로마 총독으로 임명된 A.D 6년경부터 유대인들은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인두세로써 세금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1)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바로 이 유대인의 인두세였습니다. 인두세란 유대인 중 남자는 14세 - 65세, 여자는 12 - 65세까지 각기 한 데나리온씩을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말합니다. 로마정부는 이 같은 인두세 외에도 여러 가지 명목으로 세금으로 착취해 갔습니다. 이런 세금은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 민족임을 나타내는 일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불만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을 죄인시하면서 멸시했던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이런 로마정부의 세금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헤롯당원들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극과 극의 대결상태에 있었는데도 그들이 예수를 책잡는 일에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처럼 로마정부에 반기를 드는 반로마주의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헤롯당원들처럼 친 로마주의자도 아니었으므로 함께 매도하는 일에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가이사’란 그 당시 로마의 황제에게 부쳐진 일반적인 칭호였습니다. 로마의 최초의 황제 이름이 ‘가이사 아구스도’였는데 그 후 로마황제에 대한 칭호를 ‘가이사’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황제는 ‘디베료’였습니다(눅2:1).

  2.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한패가 되어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하는 것이었습니다.

  (1) 아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시험이란 말은 상대방을 넘어뜨리기 위해 사탄이 사용하는 시험으로 ‘페이라조’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주리신 후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받은 시험과 동일한 말로 그들은 사단의 간교로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이 같은 시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질문은 ‘하라’ 혹은 ‘하지 말라’고 대답할 수 없는 함정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 같은 이들의 질문에 대하여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다’고 말씀하신다면 예수님은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친 로마적인 정책을 선동하는 예수를 자신들의 메시야로 영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노리고 있는 책략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불가하다’는 대답을 하신다면 그때는 로마의 가이사 황제를 반역하는 죄인으로 체포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헤롯당원들이 노리는 간교한 올무였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간의 합동작전은 그들의 계획으로 아주 성공적인 작품으
로 만족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질문을 던져놓고는 마음속으로 득의 만만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곳에도 빠져 나올 곳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을 지켜보면서 가부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가 내놓은 시험의 미끼보다 더 온전하신 지혜로 이 함정에 도전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단위로 로마가 지배하는 모든 식민지에서 이 데나리온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의 임금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데나리온은 동전으로 만들었는데 데나리온 안팎에는 로마황제의 화상과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한 답변을 주셨는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데나리온에 적혀 있는 화상과 글은 분명히 가이사의 것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데나리온은 그 주인인 가이사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가이사가 통치하는 지역은 가이사의 명령을 따라 그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국가의 통치는 어느 한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이사의 통치도 실인즉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에 민족이나 지역단위로 국가를 세우게 하시고 임의로 그 국가를 통치할 인물을 세우십니다. 애굽의 바로도 로마의 가이사도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아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데려가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란 말씀을 주셨는데 이 말씀에서 모든 나라를 세우시고 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가이사 황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피통치자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롬13:1).

  ② 만약 예수님이 이 말씀만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바리새인들의 올무에 걸려 그들의 계속적인 공격을 받아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시아에게 바치라”고 하신 말씀과 함께 이 말씀보다 더 중요한 전제조건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란 말씀 안에는 가이사의 통치권도 들어가 있습니다. 가이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앞에 올바른 통치행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이사는 신적인 경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신적인 경배는 가이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이사의 데나리온에는 ‘황제 디베료, 신적인 아구스도, 존엄한 아들’이란 글이 적혀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을 신적 위치에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예수님의 대답 속에 들어가 있는 참 뜻은 무엇입니까?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가이사는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시는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되며,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않을 때 가이사에게 형벌을 받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가 자기의 것으로 사용할 때(신적 경배 행위) 그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경종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가? 궁금히 여겼던 이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대답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뜻을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기 때문에 또다른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으로 책을 잡으려던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을 계기로 그들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대답이 나왔기 때문이며 이런 대답에 감히 항거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75≈           부활한 자의 형체  

  (본문 : 마가복음 12 : 18 - 25)

  서 론 :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알고자하는 여러 가지 궁금한 일들이 이상한 방법으로 해석되어 우리에게 큰 깨달음과 기쁨을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한 몸을 입을 때 어떤 형체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많은 의문을 가져왔었는데 그 해답이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사두개인들의 가시 돋친 질문에 의해 시원스럽게 풀어졌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대단히 곤경한 처지에 몰아넣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1) 사도개인들이란 유대교의 한 분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에는 당시 세 개의 이름 있는 분파가 있었는데 그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전통적인 보수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편적으로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엣세네파가 있었고 이들 사두개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의 역사는 꽤나 긴 편인데 이들은 대부분 사제들과 귀족층에 속한 유대교인들 중에 많았습니다.

  이들의 신앙적 특징은 모세의 오경 이외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은 현세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장래적이고 영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았으며 더욱 부활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말씀을 종종 하셨고 특히 자신에 대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일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부활관을 허물어뜨리려는 악한 의도로 지혜를 짜내어 부활에 관한 괴이한 질문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께 모세의 글에 있는 이스라엘의 특수한 혼인제도를 예로 들어 부활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의 포문은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이란 말로 시작이 됩니다. 이들 사두개인들은 성경 중에 오직 모세의 오경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세가 써주었다는 율법적인 조항에 힘주면서 자기들의 질문에 분명한 성경적인 대답을 해야할 것을 은연중에 압력을 가한 것입니다. 그들이 인용한 모세의 글은 신25:5-10절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혼인제도인데 이 같은 혼인제도를 확대해서 실질적인 사건도 아닌 것을 억지로 꾸며 예수님께 어려움을 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한 여자가 그의 남편이 후사 없이 죽었으므로 죽은 남편의 형제와 살게 되었는데 그도 후사가 없이 죽었고 결국은 일곱 형제들과 모두 함께 살다가 그래도 후사가 없이 모두 죽었는데 이 여자는 부활의 날에 일곱 형제들 중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탄의 간계에서 나온 기발한 질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생각에는 모세가 이 같은 율법을 주었으므로 부활을 인정했다고 보지 않은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이 같은 질문의 배후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해온 부활관이 반영되고 있는데 부활을 믿는 유대인들도 부활의 날에는 어느 정도 현세와 같은 생활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지만 부활 후에도 결혼생활을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만약 그들이 사두개인들로부터 이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이런 부활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어떤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앞으로 올 천년왕국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변화 받은 몸으로 그곳에 들어가고 또 천국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여 그곳에서 살게 될 때 그들은 부활한 몸이지만 어느 정도 육신적인 생활을 겸할 수 있을 것이란 착상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도들이 주 재림시에 모두 변화 받고 모두 부활한다고 믿기 때문에 천년왕국을 믿는다면 그곳에 들어가 살아갈  성도들의 생활이 2천년전의 바리새인들의 부활관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홈페이지 ‘www.bamjoongsori.org'에 있는 ‘첫째부활과 천년왕국’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이 밝히신 부활한 몸의 형체

  이 같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너무나도 한심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책망하시면서 신비스러운 부활한 몸에 대하여 성경적 진리를 밝혀주신 것입니다.

  (1)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나무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성경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26-27절 말씀을 통해서 설명해 주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에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을 때 그들과 같은 오해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는 이 두 가지 요인, 성경을 모를 때와 하나님의 능력을 모를 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오해가 바로 이런데서 나왔음을 주님이 지적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부활한 몸에 대하여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  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장가나 시집을 안 간다는 말씀은 그 몸이 신령체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한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신령한 몸은 마치 천사와 같은 상태의 몸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체에 대하여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5:42-44). 부활의 몸은 육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실제적인 영생의 몸입니다. 이 영생은 종국적으로 우리의 부활한 몸으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역시 고전15장에서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으로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고전15:50-52).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인류의 부활이 인류 역사의 맨 마지막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적어도 전천년설을 따른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은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천년왕국이 지나기 이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전 성도들이 변화체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모두 부활한다면 천년왕국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년왕국은 지상에 천년간 이루어지는 지상의 왕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천국을 옮겨 놓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성경을 모르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므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를 오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장차 우리의 몸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게 됩니다. 죽은 자들은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몸으로 영생을 누리는 새로운 생애를 천국에서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때는 천사들과 같은 몸으로(실제로는 더 영화로운 몸) 우리의 생애가 새롭게 전개될 것입니다. 이 같은 부활이 실질적으로 나의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만 주어진 크나큰 축복입니다.




  ≈ 76≈             산 자의 하나님  

  (본문 : 마가복음 12 : 26 - 27)

  서 론 :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과 일곱 형제와의 결혼으로 인한 부활 때의 그 여인이 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던짐으로 자신을 시험한 사도개인들에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데서온 오해가 아니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 후의 세계에 대하여 천사와 같다고 하시는 영적 영화로운 몸임을 설명하신 후, 그들이 인용한 모세의 글을 인용하시어 그들에게 증거해 주셨습니다.

  1.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부활을 믿지 않고 있는 조상이며 자신들도 그 모세의 글에 의해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모세의 글에 나타난 모세의 증거를 통해서 공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부활의 진리를 계시하셨으며 모세도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므로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자신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출애굽기 3장에 있는 말씀인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 구절을 읽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의 증거로 인용하신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산 자의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기를 썼을 당시에는 이미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모두 육신적으로는 죽어 무덤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기를 소개하실 때 언급하신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있어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죽은 과거의 인물인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는 인물이란 사실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육신이 살아 있다는 뜻의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육신이 죽은 사실은 그들의 무덤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부활이 있다면 육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잠자는 것뿐입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보장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뜻은 아브라함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가운데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육신적으로 지금 잠을 자고 있을 뿐입니다.

  (2) 그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천국에서 하나님과 친히 교제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말은 영원히 죽음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영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이 죽는다고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명은 사람이 죽으면 그 육신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5:8).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신약시대에 와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 혜택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그의 생명까지 땅에 묻힌 것이 아니라 몸을 떠나 주와 함께 하늘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이 같은 사실을 명백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곳에서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이 말씀은 아브라함아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모든 사람들이 장차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부활을 이미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여기서 ‘산 자’란 말은 생존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산 자의 하나님”이란 생존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1) 하나님께는 지금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도 살아 있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잠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만약 앞으로 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그들을 살려내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 있는 여러 계시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주신 말씀이라도 그 말씀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부활에 관한 비밀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출애굽기의 인용은 부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말은 인간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죽음이 없고 오직 영생과 부활만이 있습니다. 영생은 죽어도 그대로 계속되는 생명이요 부활은 이 영생의 생명이 새로운 형태의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견지에서는 모든 인류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고전15장에서 이처럼 증거해 줍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쳤습니다(고전15:54-55).

  (2) 우리는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제자들의 눈에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든 중 모압땅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바라보면서 죽은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 병거에 둘러싸여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갔고 한 사람은 산몸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둘 다 변화산에 똑같이 영화로운 몸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엘리야의 경우는 그의 육체가 영화롭게 되었기 때문에 부활체와 같은 변화체로 지금 하늘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몸은 모압 땅 골짜기에 매장되었지만 그도 역시 영화로운 몸으로 주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하나님 앞에는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기를 나타내신 하나님은 지금도 “나는 모세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모세와 같은 몸이 아니라 예수님이나 엘리야 같은 보다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거나 부활한 몸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모세의 부활은 엘이야에 비해 시차문제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결 론 : 성경에는 어떤 한가지 문제에 대하여 한곳에서 자세하게 보여주지 아니합니다. 부활에 대한 비밀도 성경 여러 곳에 많이 깔려 있습니다. 부활문제는 특히 종말론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사람의 부활은 인류의 종말에 있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최종적인 종말을 어느 시점으로 보느냐하는 신학적인 입장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천년왕국이 없다는 무 천년설의 입장에서는 물론 인류의 최종적인 종말이 주님의 재림시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부활도 그 시점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 천년설의 입장에서는 천년왕국이 끝나는 시점이 사실상의 인류의 종말이 될 것이기 때문에 부활론이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것입니다(이 부활문제에 대해서는 고전15장을 다룬 주석설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77≈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것  

  (본문 : 마가복음 12 : 28 - 34)

  서 론 : 예수님을 곤경 속에 집어넣으려는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의도적인 질문은 흥미로운 질문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의도하는 바가 예수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이런 변론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이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서기관의 질문에 관한 답변에서 유대인들이 복잡하게 생각해 온 그 수많은 계명을 하나로 정리하시고 율법이 명시해 주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를 얻는 일에 지켜야할 조건으로 알고 지켰지만 사실인즉 율법이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제시해 주신 사랑의 법임을 이곳에서 밝혀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계명대로 지키는 것이 참 생명을 얻는 길 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사고방식은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는 한가지 죄를 더 가중시킨 데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근본정신은 오직 두 가지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두 가지 정신을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밝혀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이란 원래 글을 기록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구약시대에는 주로 제사장의 직무를 기록하는 직분 자를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서기관이란 이름이 율법사 또는 율법학자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대한 고도의 지식에서 부쳐진 이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란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주신 말씀 중 첫째로 구분시킨 말씀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나왔습니다.

  율법은 십계명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 계명에 대하여 유대인들에게는 사람 몸의 지체 수에 해당하는 248개의 규정령과 1년의 날 수에 해당되는 365개의 금지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양의 규정령이나 금지령은 모두 십계명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십계명 중 첫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만을 섬길 것과 우상을 섬기지 말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 것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에 대한 명령이며 이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은 부수적인 여러 가지 장로들의 유전을 첨가하여 사람으로 지기 어려운 짐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이 같은 명령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 예수님이 밝혀 주신 말씀 안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가 개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밝히셨으며 이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고 계시며 그분이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2) 예수님은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네 마음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마음이란 인간의 지, 정, 의를 포괄한 전 인격적인 표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인격적인 사랑을 원하십니다. 목숨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목숨이라 ‘프쉬케’로 육체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적당한 한계점을 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는 뜻으로 순교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법규에 얽매어 외식적으로 섬기는 일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이 같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요구에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다 이루는 일이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 이웃에 대한 사랑

  다음 율법의 두 번째 계명인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이르는 계명은 그 내용이 사람들에게 대한 계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의 근본적인 바탕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1)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단정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율법에 무슨 조문이 들어있던 그 사람은 이미 율법을 다 이룬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란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기 동족이나 계약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특정한 민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적인 예화에서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당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인간들에게는 이런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없으며 이웃에 대한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로 이런 사랑에서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고 이웃과도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복수해야 마땅히 여기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조문은 사랑의 조문이 아니라 우리를 정죄하는 조문으로 변했으며 우리에게 생명을 약속한 율법이 우리로 사망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므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고 이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위로는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고 이웃에 대하여 내 몸과 같이 여기며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회복이 인간의 구원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사람들만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같은 사랑의 회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서기관의 지혜로운 대답에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서기관은 외식하거나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의도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에서 한 것이며 또 예수님의 대답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내심으로 고무되면서 예수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사를 던졌던 것입니다. 서기관이 이처럼 대답하는 일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의 율법적인 견해와 다른 것이었으므로 주님을 책잡으려는 무리들 앞에서 서기관의 신분으로 하기엔 대단히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칭찬하신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보장인 아니라 가깝다는 뜻입니다. 그는 분명히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진리를 알려고 하는 진실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대답하심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십계명을 어떻게 알고 있으며 어떤 마음으로 지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율법적인 계명대로 지키는 생활로 우리의 신앙적인 성장을 원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로 계명적인 율법이 아니라 계명보다 우선하고 계명을 능가하는 사랑의 법을 이루어야 합니다.




  ≈ 78≈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본문 : 마가복음 12 : 35 - 40)

  서 론 :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관념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척하게 만들었고 이 같은 메시야관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인식되기 전에는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소망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주시려고 어느 날 성전에서 다윗의 자손과 메시야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 함은 일반적인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육신적인 다윗의 자손으로만 해석하기 쉬운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기관들의 이런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이 소망하는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왕으로 인식되어 왔고 그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

  이 같은 메시야관은 메시야를 이스라엘만의 메시야로 한정시켜 왔으며 그 메시야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만으로서의 존재로 인식시켜 왔습니다. 사도들조차 예수님의 사역을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결시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고 묻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도 많은 군중들로부터 “호산나, 호산나”하는 외침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다윗이 쓴 시를 들어 다윗의 자손과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관계를 인식시키시려고 시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성경은 서기관들이나 백성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시편110:1절에 나와있는 다윗의 시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는 구절입니다. 이 시편에 나와있는 말씀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다윗이 언급한 시편에 기록된 말씀이 성령에 감동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인하셨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이 아니면 이 같은 예언적인 시를 다윗의 임의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윗의 글 내용이 하늘 보좌에서 일어난 일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대화내용이기 때문에 다윗이 자기 생각대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2) 이 시편의 내용 중 두 분이 같은 ‘주’의 이름으로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두 분은 분명히 같은 인물이 아니시며 그 중에 한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란 대화의 내용이 전개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주께서”라고 표현된 주와 “내 주께”라고 표현된 주는 두 분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주께”라고 한 내는 분명 다윗이 자가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성경보다 히브리 원문을 보면 이들 두 분의 존재가 더욱 뚜렷이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께”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공동번역에는 개역 성경보다 더 알기 쉽게 “주 하나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시편은 성부되신 하나님이 성자되신 예수님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을 예언적으로 기록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언적 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내용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과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마지막 심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예언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는 그가 기록한 마가복음 끝에 가서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막16:19). 예수님은 그의 초림의 메시야적 사역을 마치신 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께서 ‘네 원수’라고 지칭된 사단과 그 일단의 무리들을 심판하시게 되는데 그때까지 앉아 계시다가 그가 심판주로 내려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기대해야 할 메시야가 누구이며 그가 하셔야 할 메시야적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다윗의 자손을 훨씬 능가한 메시야의 신적 신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절정에 이르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란 사실을 성경적으로 밝혀주시려는 의도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아니십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 다윗의 위를 이를 왕 등의 표현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1:1절에서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그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계시는 예수님의 육적 부모의 혈통적인 계보를 따른 것이지 결코 예수님의 태어나신 영적 기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므로 다윗의 혈통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다만 다윗의 자손인 요셉과 그와 정혼한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시편의 다윗이 글이 바로 그것을 증거해 주고 있으며 예수님은 이 글을 인용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뿐 아니라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며 그뿐 아니라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섭리하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그의 시작은 끝이 없고 그의 마침도 끝이 없는 그런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주되신 그리스도께” 말씀하신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주”라고 부른 분이 어찌 그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느냐는 최종적인 결론에 그 자리에 있었던 서기관들은 입을 봉했고 백성들은 그의 기이하신 교훈과 가르침에 놀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지금도 역시 그때 그 당시의 이스라엘처럼 그들의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다윗의 혈통적인 자손으로 오실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메시야는 모세와 같은 권능의 민족적 지도자로 혹은 다윗과 같은 왕권을 가진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의 메시야인 것입니다. 이 같은 메시야관으로 인하여 그들은 그들의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스스로 거역하였으며 그들의 이런 인간적 고집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안겨주었으며 앞으로 메시야가 나타나 그들이 그 앞에 회개하여 바른 신앙고백을 할 때까지 그들에게 미칠 환난은 그침이 없이 계속 될 것입니다.

  2. 서기관의 외식과 그들이 받을 판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성경을 잘못 가르침으로 이스라엘로 참 메시야를 배척하게 만들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생활을 삼가라고 교훈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는 서기관들의 행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이 긴 옷이란 서기관들이 입는 흰 긴 두루마기 형태의 세마포로 짠 통옷인데 이 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면서 자신을 과시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또 시장에서 문안 받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시장은 많은 사람이 모이며 왕래하는 곳입니다. 서기관들은 보통 랍비란 이름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왔으므로 시장거리에 나가면 이 같은 존경의 인사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회당의 상좌를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잔칫집에 가면 상석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이처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하면서 모든 사람들 위에 군임하여 존경과 영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삼가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들의 그같은 행동에 동조하거나 부러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이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들 서기관들은 율법적으로 불쌍히 여기며 도와 주어야할 과부의 가산을 오히려 삼키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헌납하도록 위협을 주는 행동으로 그 이익을 그들이 취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외식으로 하는 긴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므로 더욱 존경을 받으려는 외식적인 기도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결 론 : 백성들에게 성경을 잘못 가르침으로 실족하게 하며 외식하는 생활로 영광을 취하는 서기관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대로 바로 가르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비극을 수 천년간 계속시켜 온 사실이라든가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생활이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떠나시게 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백성으로 타락하게 한 책임이 종말에 가서는 모두 이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돌아갈 것임을 예수님은 경종하신 것입니다.




  ≈ 79≈             가난한 과부의 헌금  

  (본문 : 마가복음 12 : 41 - 44)

  서 론 : 하나님의 나라와 헌금에 대한 관계를 아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헌금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우리가 봉헌하는 헌금에 반영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과부는 헌금을 통해서 그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에 대하여 주님의 놀라운 칭찬을 들었습니다. 반면에 외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헌금이 그들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대조시키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헌금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1. 헌금을 살피시는 예수님

  4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연보궤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살피셨습니다. 이 연보궤가 놓여 있던 자리는 여인들의 뜰로 연보궤는 바로 이 뜰을 구분하는 벽을 따라 일렬로 놓여져 있습니다. 인 연보궤는 나팔처럼 생긴 모양의 놋쇠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이곳을 지나시다가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 연보궤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한참동안 유심히 살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같은 태도로 보아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의 헌금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과 그 헌금에 대하여 낱낱이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직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각 절기마다 하나님께 보이되 공수로 보이지 말라고 엄중히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1년 3차 곧 무교절과 77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신16:16).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 그의 어리석은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리석은 부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하였다는 것은 그가 11조에 인색하고 헌금에 인색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눅12:20).

  (2) 예수님은 헌금의 사용처에 대하여 언급하심이 없이 단지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실을 주시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연보궤에 헌금하는 이 돈은 물론 성전의 운영비, 구제비 등으로 사용되는 돈입니다. 그러나 이 돈을 주관하는 자는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과연 이 헌금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했느냐는 문제는 크게 의문시 될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성전을 잘못 운영하고 있으니 헌금을 내지 말라고 하시거나 그 헌금을 그들이 불법하게 사용할 것임으로 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내는 헌금은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하든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 물입니다. 그 헌금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잘못 사용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책망하실 일이지 헌금한 성도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연보궤에 헌금했던 것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일은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이 연보궤에 헌금하는 장면을 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친히 보신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연보궤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헌금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부자들이나 외식하는 자들은 자신의 헌금을 과시했으며 얼마나 많은 돈을 헌금한다는 사실을 보이면서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보궤에 헌금하는 무리들을 낱낱이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눈이 그 헌금뿐 아니라 헌금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 분 앞에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2. 과부에 대한 주님의 칭찬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헌금하는 장면을 보신 후,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칭찬해 주셨습니다. 연보궤에 돈을 넣은 사람은 이 과부만이 아닙니다.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는 부자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는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렙돈은 그 당시 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가장 적은 액수의 동전입니다. 하루 노동자들의 임금에 비교되는 한 데나리온에 비교한다면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극히 작은 돈입니다. 고드란트는 라틴어로 표현한 두 렙돈의 동전으로 아마 이 복음서가 로마인들에게도 읽혀질 것을 예상하고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은 왜 부자들의 많은 헌금에 대하여 칭찬하지 아니하시고 이 가난한 과부의 매우 작은 헌금에 대하여 칭찬하신 것입니까? 44절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희는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는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헌금의 표준이 결코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 그 중심을 보십니다. 이 과부는 가장 작은 액수의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결코 액수로 환산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한 그 과부의 중심을 달아보신 것입니다.

  (3) 부요한 자들은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는 판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부자는 그 헌금이 아니더라도 생활에 궁색함이 없습니다. 그같은 액수는 그들에게 있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헌금이 조금도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도 부자였지만 삭개오의 경우는 이들과 다릅니다.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헌금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액수는 마치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은 인정을 받는 부자의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삭개오에 대하여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는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눅19:9).

  이 가난한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구차한, 다시 말하면 가난하기 그지없는 여인입니다. 그에게 가지고 있는 재산이란 두 렙돈의 동전뿐입니다. 아마 이 동전도 그날 어느 곳인가 일터에 나가 그날의 끼니를 위해 번 일당이었을 것입니다. 그 돈이 아니면 이 과부와 혹 있을지 모를 그의 자녀들의 그날의 생활은 막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이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연보궤에 넣은 것입니다.

  가난한 중에, 구차한 중에 바치는 헌금이야말로 하나님께 값진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이 헌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부자라면 부자로써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헌금해야 합니다. 그럴만한 처지가 아닌데도 주일에 교회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백원이나 오 백원 짜리 동전 하나 땡그랑 넣는 것을 우리 주님은 과연 칭찬하실 것입니까? 한해가 다 가도록 감사헌금 없는 부자들, 감사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도 돈이 아까워 헌금에 인색한 부자들을 보실 때 우리 주님은 어떻게 판단하실 것입니까? 만약 우리 형편이 가난하다면 이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처럼 자신의 힘에 넘치도록 헌금한다면 우리 주님은 그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결 론 : 헌금에는 놀라운 축복이 뒤따릅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은 것을 거두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고후9:6). 그리고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고후9:10).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바는 우리로 이 과부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헌금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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