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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장
 밤중소리  01-09 | VIEW : 488


  ≈ 65≈                 인자가 온 목적

  (본문 : 마가복음 10 : 41 - 45)

  서 론 :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간구는 당장에 제자들 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에는 선생님이 당하실 고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곳에서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에서 높은 벼슬자리를 설계하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야고보와 요한의 특출한 행동에 그들은 시기하는 마음으로 분히 가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중에서 누가 높으냐는 문제로 다툰 일이 있었던 그들은 이제 그 기선을  요한 형제에게 빼앗긴 것을 보고 분격한 것입니다(막9:34). 예수님은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으며 인자의 오신 목적에 대하여 다시 한번 밝혀 주셨습니다.

  1. 크고자 하는 자의 자세

  예수님은 제자들 간에 서로 크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교훈을 가르쳐 주심으로 그들이 참으로 높고자 할진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잘못된 영광을 바로잡기 위해 세상 권세 자들이 누리는 영광과 비교하시면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도 알고 있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집권자는 백성의 왕으로 군임하고 있는 자요, 대인들이란 왕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권세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자기 임의로 집권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누구의 제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그렇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이 같은 역설적인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크고자 하는 자란 두 가지 뜻이 담겨진 말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크고 작은 일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를 큰 자로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미래 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을 바라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마땅히 남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크다는 말은 교만과 상통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야말로 겸손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더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말씀을 더 강조하시기 위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겸손과 낮아짐과 희생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란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적인 생활에서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급을 위한 공로를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높은 자리가 많이 있으며 영광을 누릴 복된 자리도 많습니다. 요한이나 야고보가 간구한 것처럼 주님 좌우 편에 앉는 영광의 자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현세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은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자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 사람”이 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소망이 있을 때, 섬기는 생활도 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의 종의 자리에서 헌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 자들은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모두 이 같은 의미에서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참 영광을 누리려면 섬기는 일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철없는 제자들처럼 영광만을 누리려는 교만과 세상 집권자들처럼 남을 지배하려는 교만함이 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인자의 온 것은 섬기려 함이라

  다음에 예수님은 인자의 오신 목적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

  (1)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생이요, 또한 장차 나타날 메시야 왕국의 왕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제자들의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의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빌2:6-8).

  그러면 이처럼 자신을 낮추시고 남을 섬기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신 예수님은 지금 어떤 자리에 이르게 되신 것입니까? 그 다음에 이어진 말씀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한평생 섬기심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이처럼 섬기심의 생애를 사신 일은 그가 하늘보다 더 높아지실 수 있는 자격을 갖추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생활로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기는 성도들에게 이처럼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11).

  (2) 예수님의 섬기심의 절정은 그의 대속의 죽으심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최상의 도달점은 그 사람의 위한 죽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바치셨다는 사실은 남은 섬기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야말로 최상의 일을 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하셔야 할 메시야의 사명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으로 섬기심을 받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하실 일은 예루살롐에 올라가 왕국을 건설하고 왕위에 오르시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죽으셔야 할 일입니다.

  대속물이란 빚진 사람의 빚을 대신 갚아주므로 노예의 몸에서 해방시켜 주는 일을 말하며 구속적 의미로는 대속 제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전날 밤에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에 바른 일은 장자의 피 값을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를 위한 피 흘리심을 의미하는 대속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 값으로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 제물로 삼은 일도 대속의 뜻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그의 피 흘리심을 의미하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유념해야 할 일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라고 하신 점입니다. 많은 사람이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구속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그의 백성들만이 이 같은 구속의 대상이 되며 그 효과가 미치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말은 먼저 자격이 분명해야 합니다. 죄인은 대속의 대상이 될지언정 대속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속해 주시는 어린양이 보이지 않았을 때, 요한은 크게 울고 있었는데 장로 중 하나가 나타나 그를 위로하면서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해 주었습니다(계5:2-6). 오직 죄가 없으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속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수 있으며 예수님은 그같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철저하게 그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 같은 예수님의 섬기심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땅에서 우리의 생애동안에 주님의 섬기심과 종의 본을 본받고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 66≈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

  (본문 : 마가복음 10 : 46 - 52)

  서 론 : 성경에는 여러 사람의 여러 가지 믿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중에 본문에 나오는 바디매오의 믿음은 가히 칭찬 받을만한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끊임없이 부르짖는 믿음, 주변의 핍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끝내 주님을 만나는 믿음, 오직 한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목적을 관철한 믿음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불신의 오늘의 우리 시대에 가히 본 받을만한 믿음이라고 보겠습니다.

  1. 바디매오의 간구

  예수님과 그 일행이 여리고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24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m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무려 1km나 되는 높이의 경사길이 계속되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힘겨운 언덕길이었습니다.

  (1) 바디매오는 여리고에 살고 있는 거지로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그의 신분에 대해 소경 거지였다고 했습니다. 그의 신분은 이처럼 너무나도 미천했습니다. 소경인데다 기지로 길가에 앉아 동냥질을 하고 있었으니 누가 그에게 사람대접을 해 주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침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여리고에서 나가실 그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바디매오는 바로 그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주변이 굉장히 시끄러운 것을 느꼈습니다. 사면에서 많은 군중들이 몰려오면서 그들의 말에 의하여 시끄러운 원인이 나사렛 예수가 그 길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벌써부터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많은 병자를 고쳤다는 말도 들었고 그는 또한 병자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을 말씀으로 치료해 주신다는 소문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그는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다윗의 자손이란 말도 들었습니다. 바디매오의 귀가 번쩍 열렸습니다. 바디매오는 그 예수를 만날 수 있기를 얼마나 사모해 왔던 것입니까? 그를 만나면 자기의 소경된 눈을 고침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소경인 그에게 그런 기회를 잡기란 여간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 바로 그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자신이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그 길로 지금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2)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습니다. 소경인 바디매오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그에게 들리게 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르기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고후6:2). 바디매오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구원여부가 이 기회에서 판결 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복음을 받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디매오처럼 자신의 구원이 지금 이 시기란 사실을 깨달아 주어진 그 기회를 붙잡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바디매오처럼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이러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처럼 부르짖은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야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바로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표현하는  말이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에게 이 같은 고백을 할 경우, 출회하기로 결정하므로 예수를 메시야(그리스도)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바디매오의 간절한 간구의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호소였습니다. 바디매오의 이런 호소는 두 가지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에게는 지금 ‘주님의 도우심만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아니시면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를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란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회개했습니다. 세리의 이 같은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했습니다(눅18:13).

  (3) 바디매오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한번의 기도로 응답을 받을 줄로 여기면 안됩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도 밤낮 부르짖어야 합니다(눅18:1-8). 바디매오의 간구는 즉시 방해에 부딪쳤습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향하여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그의 간구를 제지했습니다. 기도하면 그 기도를 방해하는 각가지 요소들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그때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가 어려울 줄 알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인즉 이때가 중요합니다. 바디매오가 방해꾼들의 제지에 굴복하여 기도하는 일을 포기해 버렸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과 바디매오의 관계를 살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바디매오의 간구를 분명히 들으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이미 그곳에서 바디매오의 간구를 통하여 그를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면 우리의 기도를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다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같은 믿음은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낙심케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경우 바디매오는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회가 지나가기 전 열심히 부르짖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하고 뜨거워졌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로 이 바디매오의 이 같은 기도여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응답

  바디매오의 두 번째 간구에 시끄러운 군중 속에서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셨던 예수님의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많은 병자들도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보다 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 뵙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길거리에서 걸인으로 동냥질을 하고 있는 소경 바디매오에게만 응답의 축복이 내려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머물러 스셨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의 발걸음을 머물러 서게 한 일은 모세가 홍해를 가른 기적보다도, 여호수아가 궁창의 해와 달을 멈추게 한 기적보다도 다 위대한 역사인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의 기도가 그같은 이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오직 소경 거지인 바디매오 뿐입니다. 바디매오는 누구의 부름을 받고 그 앞에 나갈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몸이 불완전한 소경입니다. 그에다 만인이 천시하는 길가의 걸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에게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그에게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 신분을 보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바디매오는 주님이 자기를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겉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바디매오가 걸치고 있었던 그 옷은 그의 옛 생활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옛 사람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활에서 일어나 이제 주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께 나가는 생활은 세상에서 걸쳐 입었던 추한 옷을 벗어 던지고 이제 새 사람의 새 옷을 입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이처럼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예수님과의 대화는 분명해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도 분명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죄나 구하는 요구 조건이나 모두가 구체적이고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분명히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디매오의 기도는 탐심의 기도가 아닙니다. 정욕을 위해 구하는 잘못된 기도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증언부언의 기도는 아닙니다. 자신의 신체가 온전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결코 탐심일 수가 없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이처럼 선언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의 눈이 뜨임 받은 주님의 기적은 바로 바디매오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그에게 영적 구원을 이루게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다음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기도로 자신의 죄인 됨과 무익함을 아뢰고 주님의 자비에 호소한 기도였습니다. 비디매오는 그의 눈이 밝게 뜨임 받아 이제 이후의 그의 생애는 오직 주님을 위한 새로운 생활로 들어갔습니다.




  ≈ 67≈                 호산나 !

  (본문 : 마가복음 11 : 1 - 11)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부터 그의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절정에 이르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그의 인류 구속사적 모든 역사가 이 기간에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메시야 왕국의 왕으로서의 입성인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과 죽으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세워질 메시야 왕국(천년왕국)은 먼저 그의 대속의 사역에서 완성되어 이 땅위에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이 나라(교회)를 세우시고 이 나라의 왕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셨을 때에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겸손한 왕으로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1)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 그곳에서 약 25km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안식일을 베다니에서 쉬시고 다음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벳바개와 베다니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베다니는 감람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며 예루살렘에서는 약 3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벳바게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베다니 주변에 있는 마을로 짐작됩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마음 맞은 편으로 보내시면서 그 마을로 들어가서 “아직 나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러 끌고 오너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을 이미 마음에 작정하시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대로 나귀 새끼를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었다고 했습니다.

  (2)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마음은 흥분의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나귀 새끼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가져오게 하시고 그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려는 자기들의 선생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입성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생각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것은 자기들의 선지자가 메시야의 등장에 대하여 이미 예언한바 있기 때문에 더욱 흥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슥9:9). 이 같은 스가랴의 예언을 유대인들은 영광의 메시야가 나타나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부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호산나

  이런 흥분은 비단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온 무리들과 예수님이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까지 딸려온 예루살렘 시민들도 제자들과 같은 생각으로 왕의 길을 예비하느라 주변이 떠들썩했습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는 찬양을 드높이 불렀습니다. 군중들의 이 같은 찬양의 외침은 그 안에 네 가지 의미가 들어가 있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호산나”란 말의 히브리 뜻은 ‘호시아나’의 음역으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의미입니다. 이 호산나는 어려운 가운데서 구원자 메시야를 갈망하는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호소요 간구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메시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들이 갈망했던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질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란 말은 왕으로 입성하시는 메시야에 대한 환영의 찬양입니다. 그들의 앞에는 자기들의 눈에 메시야로 비취는 예수님이 그들이 대망한 구원자인 줄 알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는 하나님을 가리키며 메시야는 하나님이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란 말입니다. 이 대목은 메사야 왕국의 도래를 바라는 유대인들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처럼 외쳤던 것입니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란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장차 올 다윗의 나라로 메시야 왕국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아는 이처럼 예언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렘23:5). 이곳에 나오는 다윗은 옛날의 다윗 왕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레미아 시대엔 다윗은 이미 죽었고 그 시체를 장사한지 이미 오래 지낸바 된 그 시대였습니다. 그는 바로 다윗의 뿌리, 다윗의 자손, 다윗의 위를 이을 자로 표현된 메시야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음 네 번째로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란 말은 이 같은 구원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메시야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으며 그들은 예수가 바로 이 같은 메시야로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처럼 대대적으로 환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은 그의 메시야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영광의 메시야로 나타나실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백마를 타시고 만 왕의 왕으로 그의 하늘 군대로 더불어 예루살렘 앞 동편 감란산에 임하실 것입니다(슥14:4). 그날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나약한 몸으로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이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청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다”고 하신 심판주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계19:11-16).

  ①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말합니다. 세상의 군왕은 준말을 타지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겸손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모습으로 나타내 사람으로 오신 분입니다(빌2:6-8).

  ②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평화를 말합니다. 나귀는 전쟁에 필요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죄로 심판 받을 인생들에게 속죄와 구원의 소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③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은 그가 받으실 고난을 보여 준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몸으로 예루살렘에 그의 왕국을 세우실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필경 그를 왕으로 환영했던 많은 군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것이며 그들의 배척을 받을 것이며 예수님을 핍박했던 무리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평정하여 그곳에 메시야 왕국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분명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도 예루살렘은 평온했습니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들로 예수님을 따라 성전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환영하고 신이 나서 따라다녔던 무리들은 이제 지쳤습니다. 실망이 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 둘씩 예수님 주변에서 물러갔습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가져 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 군중들은 얼마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발견 될 것이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고 조롱하는 무리들 중에서도 발견될 것입니다.




  ≈ 68≈             무화과나무에 내린 저주  

  (본문 : 마가복음 11 : 12 - 14)

  서 론 : 예수님은 이튿날 베다니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길입니다. 이튿날은 수난 주간의 둘째 날을 의미하기도 하며 이 날은 월요일에 해당되는 이른 아침입니다. 주님은 시장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잎사귀가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러나 기대하셨던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했는데 주님은 이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는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주님의 저주에는 여러 가지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적 외식신앙을 책망하시는 의미,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의 회복에 대한 예언적인 의미, 그리고 넓게는 오늘날 교회에서 외형적인 모습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의 생활에 아무런 열매가 없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심판의 경종의 의미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1.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의미

  마가복음에 기록된 이 장면의 사건은 영적인 교훈의 의미와 연결짓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이 있습니다.

  (1)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닌데 어찌하여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셨으며 그 나무를 저주하셨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셔서 저녁을 드셨다는 말씀도 없고 또 이른 새벽에 베다니에서 나오시게 되었으므로 시장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멀리 잎이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시고 혹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하여 가까이 가 보셨습니다. 그러나 잎만 있을 뿐 기대하신 열매는 없으므로 그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말미를 보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던 일에 대하여 “이는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님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면 예수님은 아직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시기가 아니었음을 알고 계셨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혹시 열매가 있을까하여 그 나무를 찾아 가셨으며 아직 무화과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 나무를 향하여 저주를 내리신 것일까? 이런 의문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분명히 문맥에 의해서도 해석하기가 어렵고 그 내용자체로도 모순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처럼 모순된 행동을 하셨으며 마가는 이 사실을 왜 소상히 기록했을까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영적인 깊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문맥에 나타난 모순에서 눈을 영적 교훈의 시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2) 이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알고 있지만 아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때가 아님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의 결실은 여름이 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있어 여름은 아직 요원한 일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그들이 기대해 온 메시야 왕국의 시기가 오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처럼 때가 이르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그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육신적으로 시장하신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시장하심은 또한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열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참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기를 원하셨으며 자기들의 메시야를 영접하므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주님의 열망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인 예수를 배척했고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직 그들에게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섭리가 그처럼 되신 일에 대하여 안타까이 여기시면서 탄식하신 것입니다.
  
  2. 무화과나무에 내리신 저주

  14절에 나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보여주는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내리신 저주는 시장 끼를 채워줄 열매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시장하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시장 끼로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셨던 것처럼 기록된 것은 마가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그 나무에 열매가 없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그 저주하신 까닭을 영적으로 교훈하시려는 의도로 그 나무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잎이 무성했다면 그 나무에는 당연히 열매가 달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화과 열매는 무화과 잎사귀와 함께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마가가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말해 주는 것은 수확의 때를 말하는 것이지 무화과 열매가 맺어야 할 그 나무를 정당하게 인정한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에는 잎과 함께 달려 있어야 할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아마 이 나무는 무화과가 결실 할 때가 와도 수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잎과 함께 달려있어야 할 결실 할 수 있는 열매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이 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는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상속자라 하여 잡아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의 말씀을 말씀하시면서 그 결론으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1:43).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은 마땅히 그 나라를 빼앗기고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이방인들이 오히려 그 나라를 상속받게 될 일에 대한 교훈으로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의 넘어짐에 대하여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희는 믿음으로 섰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1:20). 20절에서 예수님의 저주대로 이 무화과나무는 뿌리로부터 말랐다고 했습니다. 이 교훈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린바 되어 주후 70년에 뿌리째 말라 뽑힌바 되어 그 후 2천년간이나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3) 성경은 뿌리째 마른 이 무화과나무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열매”의 시기가 온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종말에 되어질 모든 징조에 대한 말씀에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영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막13:28-29).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까지 말씀하신 모든 종말의 징조가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수 있듯이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는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나무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 나무는 새롭게 움이 돋아나는 무화과나무입니다. 그러면 이 나무의 뿌리는 어디에 박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열매를 구했으나 구하지 못하시므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이유는 “아직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무화과나무는 영영히 버림받은 나무는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었습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고 했습니다(롬11:23).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열매를 맺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날이 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시기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23:39). 바울도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들의 회복에 대한 비밀에 대하여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대하여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킬 때”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롬11:26-27).

  그리고 무화과나무로 등장하여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시기는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이 영토 적으로 회복된 역사적 시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기는 인류의 종말의 징조라고 예언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사11:11-12, 렘31:8, 암9:14-15, 겔38:8-9, 슥12:10-14, 행1:11, 롬11:25-27).

  결 론 : 또한 이 말씀은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자들과 오늘에는 교회의 외식주의자들에게 주시는 경종이 되겠습니다. 나무에 잎사귀가 많은 것은 겉모양의 꾸밈을 말합니다. 형식이요 외식적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내부에는 값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잎사귀를 보고 판단하심이 아니요 그 열매를 보고 판단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백성만이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 69≈             예수님의 성전 청결 작업  

  (본문 : 마가복음 11 : 15 - 18)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지 이틀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고난 주간의 이틀째 되는 날이 되겠습니다. 주님은 이 날도 어제와 같이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은 유대인들을 격분케 하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성전 청결 작업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의 공생애의 초기에도 이 일을 하셨습니다(요2:13-22). 그러나 이번에 하신 일은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이 일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꾀하고 이 일을 시발점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갔습니다.

  1. 교회를 살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이처럼 성전 청결 작업을 하신 일은 우리들에게 교훈해 주시는 의미가 큰 것입니다.

  (1) 예수님은 교회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에 의해 건축되었고 불의한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에 의해 운영되어 왔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이곳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여러 가지로 더럽혀 있는 성전까지도 사랑하셔서 그곳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청결의 채찍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교회를 부지런히 살피시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계2:1절을 보면 주님은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지상의 모든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고 일곱 별은 그 교회에서 주님을 대신하여 주의 양 무리들을 양육하는 주의 사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일은 주님의 교회를 부지런히 살피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처럼 교회를 살피시는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그 교회로 온전함을 보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 주님의 이름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그의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회를 살피신 후, 행한 대로 갚으시는 일을 하시는데 악을 행한 자는 심판하시고 선을 행한 자는 칭찬하시며 보상해 주십니다.

  (2) 예수님은 성전에서 바른 예배를 드리는가의 여부를 살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면을 살피시고 구석구석을 살펴보셨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한 명도 없음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을 위한 분노의 채찍은 여기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장소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더럽고 추한 모습을 보였을 때 참으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곳은 마땅히 청결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왔을 때 그들의 재물에 나타난 그들의 마음의 더러움과 추함을 보시고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이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사1:1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지 않고 그저 몸만 보이러 오는 형식적인 경배를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물을 헛된 제물이라고 책망하시면서 다시는 내 앞에 가지고 오지 말라고 거절하셨습니다.

  (3) 주님은 성전에서 악을 행하는 여부를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한다고 하셨습니다(사1:13-14). 절기 때마다 성전에 모여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도모하는 일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의 하는 일이었습니다. 악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의 교훈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외식적인 행실과 가식적인 가증한 허례허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헛된 그들의 경배를 탄식하시면서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말1:10).

  2. 성전 청결 작업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시기는 유월절을 몇 일 앞두고 있었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분비는 혼잡 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외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도 이 민족적인 절기를 고국 땅에서 지내기 위해 몇 일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그 모이는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 그 구심점이었기 때문에 유월절을 지내기 위한 준비로 예루살렘 성전은 대 혼잡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벌어져서는 안될 일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유월절을 마지하기 위한 경건한 준비로 분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안에는 제물로 사용할 각가지 짐승들을 매매하는 자들, 외국에서 돌아와 성전세를 바치기 위해 돈을 바꾸려는 사람들과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 비둘기파는 자들로 분볐는데 성전은 완전히 이들 장사치들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신성한 곳으로 이 같은 장사터전으로 허용될 수 없는 곳입니다. 감람산 주변에 외국에서 돌라온 나그네들을 위한 환전이나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매매하기 위해 서너 곳의 시장이 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시장에서의 수입의 일부는 산헤드린의 관할에 두었다고 하는데 이런 장사에서 얻어지는 이익이 많은 것에 탐심을 품게 된 대제사장 가야바가 성전 뜰 안에 시장을 개설하도록 허락해 주므로 매매의 허가에서 오는 많은 이권과 이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의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장사꾼들의 시장터전이 되어버려 각종 짐승의 냄새와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의 흥정과 고함소리로 시끄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발을 드려놓으시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더럽혀진 성전의 청결 작업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쫓으셨는지는 몰라도 그들을 내 쫓는 엄위하신 주님의 모습은 뭇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을 것이고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또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지만 이것도 성전에서 파는 일을 용납 받을 수 없었습니다.

  (3) 예수님은 이처럼 분노의 청결 작업을 하시면서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는 주님의 책망은 지나친 말씀이 아닙니다. 장사꾼들은 속여 팔았고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장사꾼들로부터 돈을 수탈했습니다.

  결 론 : 이 광경을 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너무나도 놀랬으며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엄위하신 권위 앞에 감히 도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곡 비상회의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의제는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하는 모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멸할까하는 말은 그들의 거짓된 모함과 불법적인 음모가 개재된 것을 들어내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때부터 그들에 의해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시게 될 계획이 착착 진행되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 70≈           받은 줄로 믿는 기도의 능력  

  (본문 : 마가복음 11 : 20 - 24)

  서 론 : 복음서를 보면 한가지 사건은 그 한가지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다른 또 하나의 교훈을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경우도 이곳에서 기도의 능력과 연결되는 교훈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주님이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는 베드로가 아침의 일이 생각나 주님께 묻게 되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주님의 저주가 인간이 아닌 식물에까지 미친 사실에 놀라면서 신기한 듯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을 주님께는 이상할 것도 신기할 일도 아닙니다.

  1.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되어진 일을 들으시고 기도의 권능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뜻은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이시므로 그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그대로 임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먼저 우리의 기도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후, 곧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자이십니다. 그 능력이 또한 믿는 자의 기도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 앞에 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능치 못하게 이루실 대상을 비유적으로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같은 일을 능히 행하실 수 있다고 믿는 자에게도 이루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는 하나의 비유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면 하나님은 정말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홍해를 바람으로 갈라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모세의 기도, 해와 달을 중천에 멈추게 하신 여호수아의 기도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해 주는 실제적인 사례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기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이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으로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기도는 아무 때나 되는 일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는 믿음”은 먼저 그 기도부터 자신의 정욕적인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표적을 맞추는 기도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른 또 한가지를 더 첨가하셨는데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의심이란 말의 원어적 의미는 ‘혼돈된 결정’ 또는 ‘사리 분별이 엇갈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구하는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구하지 못하는 상태의 마음가짐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의 믿고 구하면 이란 ‘믿고’란 원어는 한번 믿은 믿음을 계속적으로 지속하는 상태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약1:6-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의심이 나쁜 것은 의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심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믿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음이 결여된 간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의심은 하나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사탄의 최대의 무기입니다. 의심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뢰입니다. 말씀을 믿고 그 말씀으로 사탄과 싸우는 일입니다.

  2. 결정적인 승리

  주님은 결론적으로 기도의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1)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은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해도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는 즉각적인 응답의 기도와 미래 적인 응답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산을 초월하고 계시는 분이심으로 그 기도가 언제 응답되어도 하나님 편에서는 동일한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늦을 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늦은 것도 아니요 빠른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에 대한 기도의 응답은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믿음으로 결과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처럼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롬4:18-21).

  (2)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응답의 시기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실 가장 좋은 시기가 언제인가를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시기에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못한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받은 줄로 믿는 기도란 어떤 기도입니까? 낙망치 않는 기도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에 대한 어느 가난한 과부의 간구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8:6-8).

  다음에 받은 줄로 믿는 기도란 계속하는 기도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도란 응답 받기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로 받은 줄로 믿는 기도는 감사가 따르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빌4:6-7).

  결 론 :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그 무한하신 능력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만 그렇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좁은 믿음으로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지 못하면 우리의 생애는 사탄의 공격으로 얼룩져 많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면 능력의 원천이 되신 그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아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71≈               기도와 죄  

  (본문 : 마가복음 11 : 25)

  서 론 :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본 베드로로부터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고 한 말을 들으신 주님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기도의 능력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믿음의 기도를 드리려면 상대방의 혐의에 대한 용서가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여러 가지 방해요소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근원적인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방해를 받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과 연계시킨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내 형제나 이웃의 혐의에 대한 용서와 결부시키신 것입니다.

  1. 죄와 용서

  우리의 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므로 은혜로 사하심을 받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먼저 선행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곧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올바른 처리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이 죄에 대한 바른 처리문제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죄의 용서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만이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말씀에서 죄의 용서에는 양면성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마6:12).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이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생활 중에서 우리들의 죄만 처리되었다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바른 처리를 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죄까지도 처리되지 못한 상태로 있다는 사실을 경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일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더욱 상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빚을 갚아야 할 임금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사정해서 탕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 죄에 대한 회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회개를 통해서 죄의 사유함을 받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관 하나를 만났을 때 그 동관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줄 것을 그 사람에게 빌었지만 그 사람은 그같은 동관의 간구를 무시하고 그 동관을 붙잡아 빚을 갚으라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자기의 빚을 탕감해 준 임금에게 들렸습니다. 임금은 옥졸들에게 명하여 그 사람을 붙잡아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붙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8:22-35).

  이런 주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과 매일 부닥치는 생활에서 서로 범하기 쉬운 죄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인 바른 지식을 가지고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에는 형제와 나와의 죄에 관한 문제가 많은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 본문에 나온 말씀을 보면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원어의 뜻은 ‘자신이 누구와 불화 하거든’이란 말입니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마음 상한 일이 있거든’ 또는 ‘서로 적대관계에 있거든’ ‘등진 일이 있거든’이란 등등의 여러 해석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범죄한 일이 있을 때의 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혐의가 있거든”이란 말씀과 “너희 허물”이란 말씀을 동일하게 보시는 것으로 본문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 같은 일이 왜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느냐는 문제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죄는 세상사람들의 죄와 분명히 한계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의 죄의 관념은 양심이나 율법적인 면에서의 죄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대요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용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만약에 용서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그 자체가 하나의 범죄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가 됩니다. 이 같은 죄악을 마음에 품은 상태로 하나님께 간구해 보았자 믿음의 기도가 나올 리 없는 것입니다. 죄악을 품고 기도하기 때문에 응답이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2.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려면 우리 마음속에 죄악을 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1)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혐의라고 나와 있는 죄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된 혐의를 말합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거나 오해된 일, 어떤 언쟁이나 다툼에서 나온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용서한다는 말은 피차에 감정을 풀고 화목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에 어떤 재산상에 중대한 피해가 있을 때, 그것을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빚은 갚아야 하고 받아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은혜롭게 해결해야 하며 결코 세상 사람들의 방법으로 싸워서는 안됩니다.

  다른 또 하나의 혐의란 자신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우리는 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용서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일이지 근본적인 죄의 사유는 아닙니다. 죄의 사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요8:11). 비록 하나님이 정죄한 죄인이라도 우리는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악한 누룩이 우리 중에 퍼질까 경계하되 불쌍히 여겨야 하며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2) 용서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독생자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데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8). 우리의 사랑의 생활은 우리에게 죄지은 자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4:8).

  여기서 주님이 말씀해 주시는 의도는 우리가 이처럼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그 혐의를 용서해 주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생활을 하면 우리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우리가 구하는 바의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용서의 확신은 바로 형제의 혐의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확실한 증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같은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중생한 후의 생활에 나타나야 할 열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죄든지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방해하며 우리의 기도에 믿음의 능력을 빼앗고 하나님과 원수의 담을 쌓게 하는 악한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레미아 선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책망했습니다(렘5:25). 잠28:1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그 어떤 죄라도 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죄가 나를 정죄하고 그 죄가 나에게 부끄러움을 주고 그 죄가 나를 하나님 앞에 송사하는 것입니다. “서서 기도한다”는 말은 기도하는 일반적인 자세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서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기도이건 그 어떤 응답을 받기 위한 기도이건 기도에는 먼저 죄의 사유함을 받아야하며 이때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에 대한 혐의의 용서도 그 중에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누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먼저 용서하므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의 기도에 작용할 것입니다.





  ≈ 72≈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권세  

  (본문 : 마가복음 11 : 27 - 33)

  서 론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호산나’를 외치는 찬송소리와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나귀를 타시고 메시야로서 입성하신 일과 성전을 청결케 하시기 위해 입성하셨던 일과 본문에서 다시 세 번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날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시며 “기록된 바 내 집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제사장들은 채찍을 드시고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엄위하신 모습과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어안이 벙벙하여 미쳐 대책을 세울 겨를도 없이 넘어갔지만 그들은 이 일을 계기로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다음날에도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성전에 나타나신 것을 본 그들은 이 좋은 기회에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거리를 만들려는 의도로 예수님을 향하여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고 따진 것입니다.

  1.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냐”는 그들의 질문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습니다.

  (1) 첫째는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당신에게 무슨 권세가 있기에 그같은 일을 행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질문은 물론 함정이 깔려 있는 질문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 채찍을 들고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며 신성한 성전을 강도의 굴혈 운운하는 언동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라 할지라도 감히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 일을 당신은 무슨 권세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권세를 행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의 몸과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요2:18-20). 그는 성전에서 친히 경배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못해도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자신이 이 같은 권세를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의 의도대로 예수의 입에서 그같은 말이 나왔다면 그들은 아마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 이유로 그들은 예수님을 산헤드린 법정에 세우고 주님을 죽이려던 그들의 음모를 성사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2) 다음에 두 번째는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권세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받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 같은 질문을 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이 같은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대답할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에 만약 그같은 대답을 들을 경우, 그들은 예수님을 참람하다는 죄명으로 고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입에서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빨리 듣기를 원했습니다.

  2.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질문의 저의를 아시고 이 질문에 담겨있는 함정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모함하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간계에서 나온 모든 질문에 예수님은 지혜를 쓰셨습니다. 이 같은 경우에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의 음모에 그들 스스로가 올무에 걸려들게 하시므로 그들이 파 놓은 함정에 그들 스스로 빠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인다”고 하셨습니다(시18:26). 이들은 주님께 사특했으므로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1) 이런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그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이상한 질문을 그들에게 던지셨습니다. 그 질문이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무르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예상외의 질문에 어리둥절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이에 그들은 아직까지 득의 만만하여 예수님을 고소하려든 공격적인 방향에서 자신들에게 어려움의 화살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심히 난감한 입장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을 미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이 자신들을 매도하며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란 표현으로 그들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의 선지자임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에 대하여 물으려고 찾아온 유대인들을 향하여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는 요한의 증거를 그들은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으므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로서 온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난감해 한 것은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자신들이 요한을 믿지 않고 요한의 세례를 거부한 일에 대하여 변명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만약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는 유대인들의 질타를 받을 것이 확실하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 서로 의논한 결과 가장 무난한 답을 모색해 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2) 예수님은 그들의 알지 못하노라는 대답을 들으시고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원래가 예수님으로부터 올바른 답변을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서 책을 잡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성사시키려는 악의적인 의도에서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메시야관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의 명예와 지위와 이권이 그들의 신령한 눈을 멀게 하여 눈앞에 둔 메사야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물론 이제 잠시후면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마지막을 마칠 것인가에 대하여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까지 실로 하실 일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로 그때가 이를 때까지 예수님은 그의 남은 사역에 충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들도 진리의 말씀에 어두우면 우리의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바리새인들처럼 명예나 세상 물질에 눈이 어두우면 신령한 주님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지도자이면서도 믿어야할 세례 요한을 배척하므로 회개의 기회를 상실해 버렸고 끝내는 그가 증거한 메시야까지 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주님에게 그들과 같은 자세를 가지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가면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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