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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
 밤중소리  01-09 | VIEW : 501
  ≈ 57≈               주님께 속한 자의 특권

  (본문 : 마가복음 9 : 38 - 42)

  서 론 : 주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의 축복에 대하여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는 말씀으로, 아무리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청중이 맞아들이고 존중하며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같은 일이야말로 주님을 영접한 것과 똑같은 크나큰 축복이란 사실을 강조하신 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란 이름 때문에 그에게 비록 사소한 대접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같은 일은 결과적으로 주님을 대접한 일이기 때문에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귀신을 내쫓은 사람에 대한 논란

  요한이 주님께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일에 대한 경과를 말씀 드리면서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 ‘그 어떤 사람’은 분명히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은 일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신 들린 어린아이로 말미암아 큰 창피를 당했고 믿음이 없는 세대란 책망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제자들마저 내어쫓지 못한 귀신을 주의 이름으로 내어쫓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에게는 제자들보다 훌륭한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모르셨을까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은 그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나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경우 그 여인이 믿음으로 뒤에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을 때 혈루 근원이 곧 말라 고침을 받았는데 이때 주님께서는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셨다”고 했습니다(막5:30). 제자들은 전혀 몰랐지만 주님은 이미 귀신을 쫓은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인즉 예수님의 제자의 이름에 오르지 아니한 사람 중에 제자들이 많았으며 그들 중에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은 제자들보다 더 큰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같은 일을 금하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배반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주의 이름으로 하는 일을 금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얼마 전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는데 이 사람은 주님이 인정해 준 사람들이었음을 밝혀 주고 있으며 그들의 믿음의 능력은 능히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하도록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 하나는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능한 일을 했다면 어찌 그 사람이 나를 비방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일꾼이기 때문에 그들을 비방하거나 그들로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다음에 다른 또 한가지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심으로 그들은 분명히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인데 왜 금하게 했느냐는 책망 조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42절 말씀에서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한 엄중한 경종을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41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대단한 고무가 되며 또한 주님을 믿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사랑의 헌신이 얼마나 놀라운 상급이 되는가에 대한 분명한 약속입니다.

  (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의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고서도 형제로서 대접은 고사하고 냉대한 일에 대한 책망 겸, 주님을 섬기는 형제들에 대하여 주의 이름으로 잘 섬겨야 할 일에 대한 교훈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하여”란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들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루고 있는 형제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사람에게 형제의 사랑으로 선대한다면 이 사실을 우리 주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고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하나 믿는 형제들에게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섭섭하게 대하면 안되지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그 같은 일을 하면 더욱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대접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급이란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며 소중히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다면 부모 된 우리는 응당 그 보답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대하심으로 우리를 대접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까지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약속은 또한 하물며 우리들이랴! 얼마나 귀히 여기시겠느냐는 고마움의 감격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물 한 그릇’이란 대접의 한계가 나옵니다. 물 한 그릇은 어느 곳에서나 구할 수 있는 값싼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이란 너무나도 갈급하고 시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대접은 생각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 생활은 멀리 우리의 손이 미치지 못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상급은 우리가 실천하기 어려운 선행이나 덕행에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일에도 이같이 놀라운 상급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고무적인 일입니까? ‘물 한 그릇’이란 참된 위로를 의미합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는 갈급한 심령 속을 촉촉이 적시는 ‘물 한 그릇’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물 한 그릇이란 매우 작은 헌신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형제에게 그도 한 주님의 형제란 이름 때문에 함께 그 어려움을 짊어지고 적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이 같은 일이야말로 그 사람에게는 목마른 그의 인생이 가뭄을 해갈시키는 ‘물 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주의 이름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란 말을 사용하시므로 새로운 의미를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생각은 귀찮고 싫지만 그러나 주님께 속한 사람의 일이 되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한다고 하는 그 사실 귀중함의 초점을 두시는 것입니다.

  (2) 주님은 42절에서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좀 전에 예수 이름으로 대접하는 경우와는 정 반대적인 입장에서 하신 경종입니다.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미천하고 어리석고 존재 가치가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만약 그를 실족시키는 경우에는 이처럼 두려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실족케 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 또는 ‘죄를 짓게 한다’ ‘배반하게 한다’의 의미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속한 자 중 아무리 미천한 자에게라도 그를 미혹하므로 그로 그 죄로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주님을 배반하게 하므로 믿음에서 넘어지게 한다면 그처럼 미혹한 자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리운다는 말은 나귀의 힘으로 돌리는 대형 맷돌과 같은 무거운 것으로 목에 매달아 바다에 던진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그 사람은 영영 그 바다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 론 : 연자 맷돌은 그 사람의 무거운 죄를 말합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 죄 값으로 받을 하나님의 형벌로써 지옥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에게 대접하는 우리의 적은 헌신이 말할 수 없는 하늘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고,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지극히 미미한 형제라 할지라도 그를 실족시키는 일을 하면 무서운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이 엄중한 경계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거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58≈               죄에 대한 투쟁

  (본문 : 마가복음 9 : 43 - 50)

  서 론 : 예수님은 우리가 범하는 죄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지옥과 인간의 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죄로 말미암아 들어가야 할 지옥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언급과 그 지옥의 두려운 심판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심각성과 두려움을 실감케 하고 있습니다.
  
  1. 지옥과 범죄의 두려움

  예수님은 42절에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후, 본문에 와서 범죄하는 자들이 받을 지옥의 심판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인간의 범죄 도구로 ‘손과 발과 눈’이란 신체 기관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 기관은 분명히 우리 인간들의 범죄도구로 씌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 기관은 우리의 마음과 연결된 것들이며 우리의 영혼과 상관되는 것들입니다. 손이나 발이나 눈이 저지른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범죄의 도구로 만들어 자신의 인생의 불법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하나님께 범죄를 조장한 그 사람의 인격,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영혼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지적하신 찍어버리라 빼어버리라는 말씀은 범죄한 그 손과 발과 눈의 절단이나 빼어냄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자세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찍는다는 표현은 다시는 범죄치 않도록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찍혀 없어진 손은 다시는 범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범죄와의 절단은 손을 찍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손이 행한 범죄에 대한 온전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란 말은 그 죄에 대한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히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일1:9). 여기서 자백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동반되는데 하나는 그 죄에 대한 마음을 찢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마음의 고백이 ‘죄에 대한 자백’인 것입니다. 다른 또 한가지는 이제 자백한 죄에서 돌이키는 일입니다. 자백은 왜합니까? 다시는 그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는 고백으로 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손을 찍어 버리듯이 다시는 그 손으로 죄를 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손으로 또 범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육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일흔 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무한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만약 손을 찍어 버리는 일을 범죄와의 절단 수단으로 안다면 아마 몇 일이 못 가 우리 손이나 발이나 어느 하나도 남아 날 것이 없을 것입니다.

  (2) 발이나 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같은 뜻의 표현입니다. 비록 우리가 절뚝발이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영생에 들어갈 때에는 그 절뚝발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에 들어갈 때나 지옥에 들어갈 때나 우리 신체적인 조건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죄에 대한 회개와 결연한 의지에서 나오는 결단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사실인즉 하나입니다. 결단력이 따르지 아니하는 회개란 회개의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 같은 결단력을 가지고 죄를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① 먼저 우리는 내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다는 사실에 대한 뜨거운 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난날의 우리의 죄로 족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을 위해 우리를 우리의 죄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7:4).

  ② 죗값은 사망이란 사실을 말합니다. 이 같은 죗값을 주님이 대신 갚아 주셨는데 주님의 갚아주신 죄를 또 짓는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알고 죄와 결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했습니다(롬6:11).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는 분명히 죽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 앞에서 우리는 마치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같은 심정으로 죄에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하면서 죄 앞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④ 다음에 우리는 육신의 정욕에 이끌리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롬8:13-14). 우리는 매일 매일의 생활을 바라보면서 발이나 팔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어버리는 뼈아픈 회개의 생활을 해야 죄를 이기는 생활이 가능합니다.

  2. 지옥의 두려움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께서 범죄자가 최종적으로 갈 곳으로 명시된 지옥에 대한 명백한 언급을 듣게 됩니다.

  (1) 43절에서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서 지옥에 해당되는 ‘게헨나’란 낱말은 ‘힌놈의 골짜기’해서 유래된 말입니다(느11:30, 왕하23:10, 렘7:23). 이름의 유래는 그렇지만 힌놈의 골짜기를 가리켜 지옥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지옥은 장소 적이요 실질적인 처소로 하나님께 범죄한 사탄과 그 무리들과 그 세력을 따른 모든 인류들의 영원한 심판 장소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지옥의 형편에 대하여 예수님은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간다”는 말씀으로 그곳은 꺼지지 않는 불 도가니임을 명시하셨습니다. 이 같은 지옥 상은 계시록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계14:10, 19:20, 20:15).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죽음이 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말씀 역시 형벌의 영원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에 두신 영원한 형벌의 장소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마25:41).

  (2) 우리는 이 말씀을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론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어느 한 곳에 나타난 표현만으로 성경의 전체적인 해석을 시도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진리를 밝혀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을 경종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처리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그 죄 값으로 지옥에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죄에 대한 심각성을 들려주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올바른 생활을 찾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율법적인 심판의 두려움을 나타낸 것이며 우리는 그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으니 더더욱 죄를 멀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본문의 결론으로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구절은 대단히 난해한 구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결론적인 말씀은 지옥 형벌의 두려움을 언급하면서 그곳에서의 형벌의 모양으로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내용으로 수용되기 때문에 그런 방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불 속에 소금을 넣으면 그 소금이 몹시 튑니다. 이것은 마치 지옥에서 당하는 괴로움이 불 가운데서 소금이 튀듯 하는 괴로움일 것이라고 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50절의 소금의 비유는 예수님이 지옥의 형벌의 두려움으로 인용하신 소금의 유용 도에 대하여 교훈해 주신 비유이십니다.



  ≈ 59≈               그리스도인의 이혼문제

  (본문 : 마가복음 10 : 1 - 12)

  서 론 : 옛부터 부부간의 이혼 문제는 사회적인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하며 결혼하면 서로간의 불화나 의견의 상충이나 성격적인 차이 등으로 이혼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 중에 이혼의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한평생을 평탄하게 살아가는 가정이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이혼 문제는 우리들 인생이나 가정에 실감 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시대가 종말에 이를수록 인간의 윤리 생활이 퇴폐해지며 성도덕이 무너져 갑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은 이혼율이 날로 높아져 가는 추세를 보이므로 가정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성경에서는 과연 부부의   결합이나 이혼 문제에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으며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가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우리들의 가정을 이혼으로부터 지키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1. 바리새인들의 시험적인 질문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의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갈릴리 지역을 통과하시어 베레아 지경에 이르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어느 곳에서도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이처럼 전례대로 말씀을 가르칠 때,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새인의 일당들이 이 예수님 주위에 둘러서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1) 바리새인의 질문은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이 같은 질문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는 순수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2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라고 했습니다. 이 물음은 예수님께 대한 율법적인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율법적인 올무에 매이게 하여 그의 교훈을 무력화시키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시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끔 엉뚱한 질문으로 대답을 난처하게 하는 시험을 시도  했는데 이 이혼 문제 역시 답변하기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의도하는 바는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과연 무슨 대답을 하실까? 그 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혼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예수님은 도덕성이 결여된 분으로 인식시킬 수 있으며, ‘이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모세의 교훈에 모순되는 것으로 매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난처한 문제를 선정하여 질문 공세를 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이 같은 그들의 시험의 저의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을 피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정공법으로 그 문제에 대한 율법적인 해답을 제시해 주심으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전적인 율법의 모순을 깨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율법의 진실성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자들로 답변하게 하심으로 교훈의 인상을 깊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시험에 요지는 바로 ‘모세의 이혼증서’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배우고 또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편견을 파헤쳐 율법이 말씀해 주고 있는 율법의 참모습을 보여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질문에 말려든 것으로 생각하여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하락하였
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인용한 모세의 허락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라고 한 신명기 24:1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는 여기서 “여자에게서 발견한 수치 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바리새인들 간에도 학파에 따라서 해석이 달랐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음행’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힐렉’ 학파는 이 해석을 ‘아내에게서 남편이 보기에 어떤 좋지 않은 면’이 있으면 이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는 아내가 남편의 음식을 태웠을 경우도 이에 해당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은 ‘힐렉파’의 견해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2.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율법이 의미하는 정신과는 대단히 모순된 해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율법의 창시자로서의 해석을 그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그들의 해석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으시고 이 같은 모세의 명령은 “너희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이한 답변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남성들의 아내에 대한 폭군적인 태도로 인하여 허락했다는 뜻입니다. 너희의 마음의 완악이란 아내를 지배하는 남성들의 우월적인 본성과 아내를 자기 소유로 인식하는 그릇된 자세를 의미합니다. 지금도 이 같은 풍조가 사회 일각에 깔려 있는 형편이거늘 그 당시 사회에서의 남성들의 횡포는 어떠했겠느냐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약에 여성들이 남성에게 무조건 종속되어 살아야 한다면 남편이 몇 여자를 자기 아내로 얻건 여자가 남자로부터 그 어떤 학대를 받건 한 평생 종살이하듯 불행하고 눈물겨운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남성들의 이기적인 횡포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어버리게 허락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받은 그 아내는 이제 그 남편의 학대에서 벗어나 다른 남자에게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문구에 나타난 것만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좋아하지만 실상인즉 그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마음의 완악하므로 그같은 명령을 내리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은 그들은 예수님의 답변에서 더 이상 트집 잡을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 후에 부부의 결합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창조섭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임의의 이혼은 하나님의 용납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른 교훈을 주셨습니다.

  (2)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여기서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여자는 남자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임을 강조하신 말씀이며 인간의 혼인은 인격대 인격의 결합이지 남성이 위주가 되고 여자가 종속이 되는 불평등한 만남이 아니란 사실을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여자가 남자의 몸에 붙어서 비로소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동등하게 결합하므로 한 몸이 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이런 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몸이란 말의 표현은 온전한 결합으로 헤어질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한 몸은 육체적인 결합으로서의 한 몸뿐 아니라 영적 결합으로서의 한 몸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인격적인 결합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결합입니다. 그 결혼이 비록 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지라도 모든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결혼을 사람이 나누어 남자가 싫어하는 사유가 있다는 이유로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보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에 예수님을 둘러서 있던 바리새인들은 그만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집에서 이 문제를 다시 묻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의 비유로써 일방적이고 인위적인 이혼은 간음죄에 해당된다는 경종으로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란 말씀에서 시사해 주는 바와 같이 간음죄 외에는 아내나 남편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셨습니다(마5:32).



  ≈ 60≈               어린아이와 하나님의 나라

  (본문 : 마가복음 10 : 13 - 16)

  서 론 : 예수님 곁에는 많은 여인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드렸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자녀들이 주님의 손길로 안수를 받으므로 축복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어머니의 자연스런 마음입니다. 평소에도 그런 일이 있었겠지만 이날에는 많은 사람에게 둘러 쌓여 매우 혼잡스러운 중에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말린 것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이때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분별없는 행동에 대해 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엄히 이르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들에게 축복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1.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어느 사회이건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성인들과 똑같은 입장에서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거나 용납해 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가까이 데리고 오는 것을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데려온 것은 만져주심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져주심을 바란 이들의 행동은 그냥 ‘만져주다’ 또는 ‘쓰다듬다’의 의미가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의미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고 하심으로 그 의미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안수를 통한 축복은 유대인들에게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해 주었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했을 때도 손을 얹고 안수하여 축복해 주었습니다(창48:13-20).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랍비들을 통하여 이 같은 안수를 받는 관례가 있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제자들에 의하여 제지를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꾸짖음은 아마도 그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들에 대한 책망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왔거나 품에 안겨온 매우 어린아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 가까이 따라 오면서 만져주심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은 아마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기 위해 너무나도 분주하고 피곤하신 주님을 어린아이들의 만져주심을 원하는 여인들의 몰지각한 일로 자기들의 선생님께 더욱 피곤함과 귀찮음을 주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사회적으로 어린아이들은 한 인간으로의 올바른 인격적 대접을 받지 못했던 때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린아이들과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겼을 것이며 전도활동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2) 이 같은 제자들의 행동을 예수님은 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분히 여기셨다는 표현은 노여워하시는 분개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런 노여움을 표면에 나타내신 일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마음으로 분개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분개는 제자들의 어린아이들에 대한 인격적인 푸대접,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의 어린아이들을 무시한 것, 그리고 이들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주님의 사랑의 대상인가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함에 대한 탄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분히 여기심을 두 가지 교훈으로 표현하셨습니다.

  ①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선언은 어린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해 온 이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른이나 어린아이들이나 그 구성원에 구별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교회는 어른들의 독점적인 존재가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어린이 주일학교’가 탄생한 일도 그 근원이 주님의 이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어린아이들도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라고 하는 선언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의 구원이 그 부모의 신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면 우리는 결코 어린아이들의 신앙생활을 경히 여기거나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도 교회에서 어른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결코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② 다음에 주님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런 자’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란 뜻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리키신 말씀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신앙을 본받은 자’란 뜻이 되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본받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교훈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1)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에 대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격자란 뜻이 내포된 말씀으로 보아야합니다.

  ① 어린아이들은 그 마음에 순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는 있겠지만 어린아이들은 아직 장성하지 못한 나이에 있기 때문에 악에 물들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세상에 오래 살면서 사회생활에 깊숙이 물들고 세상지식이나 학문에 물들면 복음을 어리석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복음을 진지하게 들으며 열린 마음으로 받아드립니다.

  ② 어린아이들은 생각이나 성격이 단순합니다. 단순하다는 말은 마음의 생각을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쉽게 들어갑니다. 마치 백지에 그리듯 쉽게 받아드려지며 한번 마음에 받아드리면 쉽게 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③ 어린아이들은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을 섬기는 자세는 순수하며 진실합니다. 이처럼 어린아이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교회를 섬기는 일이나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진지하며 순결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들 어린아이들처럼 순결하고 단순한 마음과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현재적인 나라로써 예수님에 의해 전파되고 확장되고 있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받든다는 말은 이 나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일을 의미합니다.

  (2)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심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어린아이들도 주님의 잃은 양들입니다. 이들의 생명이야말로 어른들과 다름없이 아주 존귀한 생명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잘 받들어 복음을 잘 받아드리는 대상이란 점은 그들에게 복음이 얼마나 절실한 사실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결 론 :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가에 대하여 이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타산적이요 기복적인 어른들의 신앙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어린아이들로부터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 61≈               한가지 부족한 것

  (본문 : 마가복음 10 : 17 - 21)

  서 론 :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신원은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는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권세도 있는 청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마19:22, 눅18:18). 그가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꿇어앉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청년은 율법을 지키는 생활에 열심이었던 점으로 보아 바리새파 사람이었을 것이며 그가 꿇어앉았다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 예수님을 존경하며 자신이 해결 받고자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생인줄로 믿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께 물은 말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란 영생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의 물음과 예수님의 대답에서 주님을 따르는 일에 걸림이 되는 하나의 커다란 장애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재물이란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경종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6:24).

  1. 영생을 갈망한 청년의 경우

  이 청년은 영생을 갈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생활 면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사모하는 그에게 영생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생문제를 해결하려는 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1) 그가 영생에 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일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아마도 이 청년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많은 사람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이 문제를 율법에서 찾아보려고 율법에 따른 선한 사업이나 생활에 열심을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시원스러운 대답을 주기는 고사하고 그에게 더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열심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갈급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이 같은 갈등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은 잘한 일입니다. 이 청년이 안고 있는 고민은 비단 그에게만 있는 고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위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청년처럼 예수님께 나온다면 그는 문제의 정답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이 청년의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사람들의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청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영생 관은 이 청년의 경우와 같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바로 이곳에 실족하는 인생의 함정이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바로 이 행위에 기초해서 만들어졌으며 제가끔 이 행위를 따라 영생의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생이 결코 인생들이 추구하는 선행에 있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그에게 나타내 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 중에는 ‘선한 자’가 존재할 수 없고 선행으로 구원 얻을 자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인 선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런 선의 기준만이 영생에 합당한 선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이 같은 선의 소유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3:1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선한 이’가 아니라거나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란 사실에 기초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을 찾아 나와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된 동기가 예수님을 절대적 선의 대상이신 하나님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인간들의 선보다 한 계단 차원이 높은 선행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청년의 잘못된 선에 대한 관념을 깨우쳐 주기 위해 선의 기준을 하나님과 연결시켰던 것입니다.

  인간은 불순종으로 타락한 이후, 이 선의 자리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왔으며 전부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선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게 되었으며,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롬5:16-21).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도 없고 의로운 이도 없습니다. 그가 참으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을 이루게 하시고 의로움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어야 했습니다.

  2. 한가지 부족한 때문에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그가 원하는 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이 교육에서 그는 “한가지 부족한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 한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자신이 선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선의 표준이 계명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십계명 중에 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 사람에게 관한 계명들입니다. 왜 전체적인 계명을 거론치 아니하시고 도덕적 행위에 속하는 후반부에 속한 부분만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이 청년은 유대인으로 하나님께 대한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에 이 청년은 자신 있게 “선생님이여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이 청년이 이런 율법적인 계명들을 완벽하게 지켰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젊은 청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사람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큰 고민 속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롬7:21-24).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 청년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기서 이 청년에게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신 그 부족한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의미해 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부족한 한가지란 그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율법의 정신을 따라 지킨 것이 아니라 외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켰다는 율법은 결코 사랑의 바탕에서 지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증거를 그에게 밝히 보여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이 청년의 이웃을 말합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원래가 그 율법을 행하므로 의를 얻어 영생에 이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오히려 우리의 죄를 들어내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예수님께 나와서 그의 은혜를 구할 수 있으며 그를 믿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 론 : 이 청년은 자기의 부족한 것은 알았지만 그의 그 부족한 것을 채우지 위해 주님께 은혜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재물 때문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매우 가까웠지만 그 문턱에서 재물 때문에 실족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원하셨던 것은 재물의 포기가 아니라 선행으로는 절대로 영생에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청년은 이 같은 사실을 깨닫고 선행으로 영생을 원했던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을 영생의 구주로 믿고 영접했어야 했습니다. 그는 아마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던가, 아니면 “주여 나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고 자신의 무지를 회개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더라면 그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근심하며 떠났다고 했습니다.




  ≈ 62≈                 부자와 천국


  (본문 : 마가복음 10 : 23 - 27)

  서 론 :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에서 대단히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놀라고 또 심히 놀라워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충격적인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이 많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말씀과 그 말씀을 뒷받침해 주는 비유로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심으로 전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재물이 많은 부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인가? 다시 말하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의 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된 동기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부자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는 재물이 많은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도리를 묻게 된데서 시작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율법적으로는 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해 주심으로 그에게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한가지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1) 이 한가지 부족한 것은 사실인즉 그가 영생을 얻을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사랑스럽게 보셨습니다. 21절에서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키는 생활을 해 왔다는 것과 그가 영생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에게 영생이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구원은 율법적인 의나 어떤 선한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 곧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1:12-13). 그런데 이 청년에게는 율법적인 생활은 칭찬 받을만했어도 그리고 영생을 얻고자 하는 의욕은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영생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눅13:24).

  그러면 이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것이라면 이것은 또한 예수님을 영접하기에 부족한 조건이라고 보겠습니다. 그것이 그 청년의 그 많은 재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러면 네게 영생이 있으리란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늘의 보화는 영생이 아니라 신령한 은혜를 말합니다. 이 청년에게 이 같은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내려져야 주님을 영접하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막10:21). 그 청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이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로 근심하며 가니라”고 한 이 청년이 돌아간 후, 제자들에게 이 같은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 말씀에 놀랐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의 교훈에 감명 받아서가 아니라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 대한 충격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충격은 한층 고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에서 그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고 서로 말하면서 심히 놀란 것입니다.

  ① 그들은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성경에는 그같은 말씀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욥1:10, 42:10, 시128:1-2 등).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같은 축복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시고 약대가 바늘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비유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② 인간들에게는 누구나 재물을 탐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자들도 자신들도 속으로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셨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고 서로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동향을 보시고 부연해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1)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할 수 없다는 말은 불가능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단정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돈과 영생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밝혀주신 바는 돈이 믿음을 가지게 하는 일에 결정적인 방해요인이 되는 것을 밝혀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이 얻는 일에는 돈이 있고 없고 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이 재물이 많은 고로 그의 마음으로는 영생을 사모했지만 그 길을 포기치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 사람의 재물은 그 사람이 영생을 갖게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① 사람은 모두 죄인들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 아무라도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그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는 돈이 있고 없고 가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많아도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돈이 없어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이 있는 자는 그 재물 때문에 믿음을 갖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재물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합니다. 즉 내 안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많은 자는 그 재물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이 돈으로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24).

  ②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가시넝쿨로 만듭니다. 말씀이 그 마음에 들어가도 그 말씀이 마음에 자리잡고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마13:22).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대단히 고무적이요 소망적인 말씀입니다. 만약에 하나님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면 이 세상에 재물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영생의 소망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삭개오의 경우가 그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한쪽 편에 달린 살인가도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재물이 있는 부자도 하나님으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다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탕자의 경우에서 그는 재물이 많았을 때 아버지의 집을 떠나 외국에 가서 허랑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재물이 떠나가고 가뭄이 찾아오고 되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 없는 기근이 왔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와 아들의 대접을 받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하셨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이미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잃은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은 율법을 지키는 생활은 해왔지만 그리고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 못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부자라도 그에게 구원을 베푸실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혹은 연단으로 혹은 그의 인생실패로 혹은 질병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자에 대한 전도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십니다. 이 같은 재물은 영생의 길을 막는 재물이 아닙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생활을 통해서 더 하여 주시는 물질의 축복을 받는 일은 영생의 길에서 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장구한 재물’이라고 말씀해 줍니다(잠8:17-19).




  ≈ 63≈                 복음을 위한 보상

  (본문 : 마가복음 10 : 28 - 31)

  서 론 : 세상 적인 부요를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쉬울 것이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제자들은 심히 놀라면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있느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으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힘을 얻은 베드로는 자신들의 경우를 주님께 내 세우면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하면서 과연 주님의 반응이 어떠하실까? 주님께서 자신들의 부르심과 복음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실 것인가? 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1. 주와 복음을 위해 희생한 자의 축복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같은 말을 들으시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자의 현세와 내세의 축복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1)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한다는 말은 한가지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대상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재물에 관한 것이요 하나는 혈연에 관한 것입니다. 집과 전토는 재물, 형제나 자매 등으로 나오는 가족관계는 혈연관계입니다.  이 둘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삶의 뿌리요 목적이기도 합니다. 재물에 관한 말씀은 이미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으로 언급하셨고 혈연관계는 이 세상 누구에게나 본능적으로 귀히 여기는 가족관계로 이 두 가지를 희생한다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해 이 두 가지를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 여기서 버린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버린다는 말은 무조건 유기 한다거나 포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이냐? 가족이냐? 그리스도냐? 재물이냐의 선택에 있어서 어느 곳에 더 비중을 두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나 복음을 위해 부득불 집이나 전토를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택하느냐, 아니면 재물을 택하느냐에 있어서 주를 위해 단연 집이나 전토를 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재물을 위주로 사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주로 사느냐에 있어서 그 해답이 명확하고 분명히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선택하느냐, 복음을 선택하느냐에 있어서 가족보다 복음을 선택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 같은 사람의 생활은 언제나 가족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위주가 되며 복음위주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3) 이런 그리스도중심의 생활은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의미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 . 너희가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을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24). 재물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을 저해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오히려 주를 위해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드립니다. 이런 일을 큰 보람으로 알고 기뻐합니다.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복음을 위한 일이라면 가족들의 유익을 희생할 수 있으며 가족들과 떨어지거나 혹 그리스도를 위해 가족의 생활을 전혀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마10:37-38). 이것이 집이나 전토나 형제나 자매나 아비나 어미를 버린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자기가 희생한 재물이나 가족관계의 축복을 백 배나 더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절에서 ‘금세’란 말씀을 쓰심으로 이 같은 상급의 약속이 내세적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통상적인 법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법칙을 따라 주를 위해 헌신하거나 자기 희생을 아끼지 않으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백 배의 축복을 누리는 생활을 이루어 왔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먼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나타나야 합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신 대로 우리 주님과 복음을 위해 재물이나 가족을 희생하는 자들에 대한 보상은 가장 값진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현세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현세에서 누리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내세의 상급으로 더욱 풍성하게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중 현세에서 심은 모든 영적 씨앗이 현세에서 축복으로 거두는 일보다는 오히려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씨앗으로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 배라고 하신 표현은 숫자적인 의미의 백 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집이나 전토의 백 배란 말도 이론적으로 부적절하고 더욱이 형제나 자매나 부모의 백 배란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같은 보상의 약속은 하나님의 풍성하고 넘치는 축복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들이 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인생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언제나 핍박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활 중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재물이나 가족을 희생하는 일에는 사회적인 핍박이나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핍박이 따르고 시련이 따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면 그 일에 대한 결실의 날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축복에 대한 결론으로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세란 말은 오는 세상으로 우리의 생애가 이 땅에서 마친 후에 오는 새로운 세계, 곧 천국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복음이나 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의 최종적인 축복은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적어도 복음이나 주를 위해 이처럼 자신의 재물이나 자신의 가족을 버릴만한 희생적인 생활을 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의 상속자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영생이란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약속하신 것은 다만 영생, 그 자체만을 의미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영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나라에서 받을 상급까지 포함된 말입니다(고전15:58).

  2.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예수님은 31절에서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1)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란 신앙의 열매를 나중에 맺은 자를 의미합니다. 이 자는 마치 탕자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의 아들이요 상속자였지만 오랜 세월 동안 창기와 더불어 탕진한 후, 회개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또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을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일찍 그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포도원에 보내는 두 아들의 경우를 비유로 들려주시는 말씀 중,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마21:31).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 맺는 자가 유업으로 받기 때문에 먼저 된 자라 할지라도 열매를 나중에 맺었다면 그는 결단코 먼저 된 자가 못되고 나중 된 자가 될 것입니다.

  (3)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늦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도 먼저 될 자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중 되고 먼저 된다고 하신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순서를 의미해 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기를 희생하는 자들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신 후에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나중 된 자들이라도 그의 신앙적인 열매에 따라 먼저 된 자들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도 먼저 된 자들이라고 나중 된 자들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신 말씀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적인 연한으로 인정을 받거나 그것이 상급의 표준인 줄로 오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을 주님을 위해 바칠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 64≈              제자들이 요구하는 영광

  (본문 : 마가복음 10 : 32 - 40)

  서 론 : 예수님은 그의 발길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예루살렘 행은 그가 받으실 고난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언어행동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어떤 결의에 찬 듯한 인상을 보이셨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인상을 받지 못했던 제자들이나 수다한 무리들은 예수님의 그같은 모습에서 놀라움과 어떤 두려움마저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놀라고 좇는 무리들은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의 이런 충격이 예수님이 당하실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이해해서도 아니며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이란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친히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그의 고난에 관한 자세한 언급을 하셨건만 뒤이어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의 철부지 같은 진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밝히신 고난의 의미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그의 열 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자기가 당하실 일을 일러 주셨다고 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란 말씀으로 시작하신 주님의 고난의 말씀은 33절과 34절에서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운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운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이 주축이 되어 있는 ‘산헤드린 공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기관은 72명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유대의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과 시기관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형 집행권은 그들의 권한 밖의 일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로마 총독의 재가 없이는 어떤 피고에게도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넘겨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이방인인 로마인에게 넘겨줄 것임을 가리킨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처럼 로마인인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 그의 최종적인 재판에 의해 산헤드린에서 죽이기로 결안한 그들의 결안대로 십자가에서 죽이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을 넘겨받은 로마군병들에 의해 수모를 당하시는 주님의 고난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빌라도의 재판 중에 그리고 사형언도를 받으신 후에 이 같은 능욕과 채찍질을 당하시며 골고다에 올라가셨고 급기야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저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부활이야말로 고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새로운 소망을 주시는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된 사건입니다.

  (2) 예수님은 이처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처럼 자세히 말씀해 주셨건만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로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 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는 메시야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광의 메시야인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그들은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야 왕국영광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있었으나 이 복음을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를 안타까이 여기시고 재차 삼차 자신이 겪으셔야 할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실 부활사건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가를 올바로 가르치셔야 나중에 제자들이 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낙심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신 이유는 다음 몇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첫째로 진리는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므로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45). 누구를 가르친다고 해도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 따라 깨닫는 속도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늦게 깨닫는다고 가르치기를 포기하면 안됩니다.  반복해서 가르쳐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에 배우는 사람이 끝까지 깨닫지 못해도 그래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는지 모릅니다. 끝까지 깨닫지 못하여    멸망 받을 사람에게도 이 구원의 복음이 필요합니다(고후2:15-16).

  다음에 지금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지만 그 말씀대로 그 일이 성취되는 날이 곧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그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며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 후에 이 모든 말씀이 생각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그들의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는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2. 요한과 야고보가 소망한 영광

  예수님이 열심히 들려주신 고난과 부활의 교훈은 깨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조차 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 일에 관심을 갖는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이루질 것으로 알고 마음이 조급해졌고 흥분하기조차 했습니다.

  (1) 그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밝히고 있는 간구란 무엇입니까?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하는 내용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주의 영광 중이란 말은 예수님이 곧 이루실 메시야 왕국에서 왕의 자리에 오르실 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요구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곧 세워질 그의 왕국에 자기 형제들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앉혀 달라는 요구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 같은 요구에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고 나무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간구는 바른 간구가 아니란 뜻입니다. 그들의 간구는 분명히 곧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서의 높은 자리를 의미하고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구한다고 하신 책망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간구하는 야고보 형제의 기도는 잘못된 메시야 관에서 나온 정욕적인 기도였기 때문에 자기들의 구하는 바를 자기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례란 이 역시 잔과 동일한 의미의 표현이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실 혹독한 모든 고난을 통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대답은 사실인즉 주님이 말씀하신 “잔과 세례”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심결에 대답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내용을 알건 모르건 장차 그들은 주님을 위해 이 같은 “잔과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야보고는 헤롯에 의해 사도들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므로 주님의 “잔과 세례”에 동참한 것입니다(행12:2). 그리고 요한은 순교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순교자의 생애를 보냈습니다.

  결론 : 예수님은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던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누릴 영광의 자리를 이 땅위에서 이루러질 메시야 왕국에서가 아니라 하늘의 보좌에서의 영광과 연결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장차 주를 위한 큰 고난의 동참자로 하늘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좌우 편에 앉는 상급은 이미 그 자리를 주시기로 예비된 자를 위한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누구든지 가장 충성스러운 그리스도도의 제자가 그 자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0장 65,66번 설교는 11장으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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