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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밤중소리  01-08 | VIEW : 472

  ≈ 49≈              예수님의 변형

  (본문 : 마가복음 9 : 1 - 3)


  서 론 : 성경에는 사람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1절에 있는 말씀도 그 중에 하나가 되겠습니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의 이해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문체적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얼마인가는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1.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그러면 이 같은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신중한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1)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실제로 그의 제자들이 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직도 재림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 말씀이 성취된 다음에 그 진실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주의 제자들 중에 볼 자들이 있다고 하는 해석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2) 어떤 분은 이 경우의 해석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2절에 나온 말씀대로 이 말씀을 들은 후 엿새만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산에서 놀라운 광채의 몸으로 변형되셨는데 하늘에서 내려 온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말씀하는 광경이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바로 이때 제자들이 친히 본 변화산에서의 이 같은 광경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죽기 전”에 라고 그 시기를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하신 지 불과 엿새 후에 일어난 사건이란 점에서 시기적으로 너무 빠르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높은 산에 내려와 예수님과 함께 대화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장면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데도 문제가 있습니다.

  (3) 다른 또 하나의 경우는 그 후 오랜 시일이 지나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의 경우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은 또한 그 후 온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의 형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도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란 말씀에서 아마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그곳에 있었던 제자 중 얼마는 이미 죽은 상태에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을 제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 강림 때는 가룟 유다만 제외하고 모든 제자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4) 마지막으로 한가지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이 받은 종말적 계시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후 95년경 복음을 위해 유배되었던 밧모섬에서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주 재림의 영광이 그것입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서두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 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주 재림의 영광을 바라보았고 그는 그 기쁨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간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의 경우와,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의 경우를 가장 합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지만 요한의 경우가 더욱 본문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변화산에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

  예수님이 먼저 영화로운 몸으로 변형되사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후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의 변형은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변형이란 단어는 다른 형태로 변화되었다는 뜻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일시적으로 제자들 앞에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의 몸뿐 아니라 그의 옷까지도 완전히 변화된 상태를 말하며 이것은 아마도 부활의 몸의 영광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지금 하늘에서 이런 모습으로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이 같은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하늘에서 내려 온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려면 그들보다 더 우위적인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엘리야와 모세가 내려와 예수님과 말씀을 나눈 일은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살아 있는 몸으로 승천한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가 하늘로 올려 갔을 때 그의 몸은 물론 변화 받아야 했습니다. 썩어질 육신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살아갈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세는 몸은 세상에서 죽고 땅에 묻혔지만 영으로 하늘에 올라간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모세는 어떤 사람들의 견해처럼 영의 대기소라고 말하고 있는 낙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와 함께 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낙원과 천국은 같은 뜻으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낙원은 영의 대기소요, 천국은 하나님 나라로 부활한 몸으로 들어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바울이 가본 셋째 하늘이라고 한 낙원이란 바로 천국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차라리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사모했던 그 장소도 천국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엘리야나 모세가 똑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들의 보기엔 같은 영광의 몸이지만 하늘에서 보기엔 엘리야의 몸이 모세의 몸보다 더욱 영화롭게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변화 받은 몸, 말하자면 신령체인 부활한 몸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이 같은 놀라운 광경을 바라본 사람은 예수님의 세 제자들이란 사실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들 세 명의 제자들은 항상 주님 곁에 있었습니다.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주님 가까이 있다는 말은 그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 서서 기다리며 문설주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잠8:34).

  이들 세 명의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웠습니다. 비록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허물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바른 신앙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식은 부족하고 비록 어부들로 무식한 처지에 있었지만 주님을 아는 지식이나 지혜는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이들은 또한 높은 신앙 차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땅에 속한 신앙에 가까웠지만 이들은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밝음이 있었습니다.

  결론 :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님을 남달리 사랑하면 이들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땅의 것에 얽매이고 신령한 은혜를 소홀히 하면 우리는 언제나 어리석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신앙적인 단계를 높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다른 제자들이 볼 수 없었던 신령한 세계,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 50≈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본문 : 마가복음 9 : 4 - 8)

  서 론 :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이 계시는 산에 나타난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이곳에는 없지만 눅9:31절에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였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세분의 대화는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그것은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자 이스라엘이 원하고 바라는 메시야의 예표 인물로 자기를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리야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의 대표자로 이 두 인물이 예수님이 계시는 산에 내려온 사실과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대화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의미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1. 베드로의 초막론

  갑작스럽게 이 같은 황홀한 광경을 바라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1) 아마 이들 두 명의 하나님의 전권 대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타났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환상이나 이상으로 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나타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같은 사건은 제자들의 육안으로 분명히 볼 수 있는 체험적이며 실질적인 사건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실제로 그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그들의 생명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죽은 자에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여 야곱의 하나님으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마22:31-32).

  둘째는 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 (영혼)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말하는 것처럼 영의 대기소에서 부활의 날까지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곧장 천국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거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똑같이 천국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천국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이들은 이미 육신의 옷을 벗고 신령한 생명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영이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신령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었으며, 엘리야는 그의 육신이 신령 체로 변화되어 부활한 몸과 동일한 신령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 11장에 등장하는 두 증인에 대하여 그들의 하는 사역이 모세나 엘리야의 사역과 같다는 점을 들어 종말에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에서 내려와 두 증인의 사역으로 예언을 하다가 순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죽기 이전의 육신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내려올 수 없으며 설령 모세와 엘리야가 신령 체로 세상에 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순교 할 수는 없습니다. 변화산에 내려온 그들은 이미 죽을 수 없는 영화로운 신령한 몸으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2) 세 제자중 하나인 베드로가 이 광경을 바라보고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면서 흥분과 감격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당장에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 왕국이 실현될 줄로 알고 있는 터에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고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까지 동원되어 함께 대화하시니 흥분 할 만도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메시야관은 신약의 교회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들의 메시야가 오시면 그분에 의하여 곧장 이 땅에 그들의 왕국이 실현 될 줄로 알고 있었던 그런 메시야관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신약시대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고 복음으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는 신약시대는 철저하게 비밀로 가려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이나 복음 전파로 인한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지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초막 셋을 짓되”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높은 산인지라 날씨가 내우 쌀쌀했을 것입니다. 세 분이 밖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할 최선의 예우는 아마 그분들을 위해 초막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아마도 이 같은 영광스러운 광경이 그대로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원했을 것이며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일에 모세나 엘리야도 그들과 합세하여 도와 줄 것으로 여겼을는지 모릅니다.

  (3) 이 일에 대하여 마가는 “이는 저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하늘의 생명체를 바라볼 때는 무서워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도 그랬고 종말의 계시를 받은 사도 요한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는 세 제자들은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광경을 황홀하게 바라보았으며 이 같은 영광스러운 광경이 계속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이 무서울 때는 헛말이 나오거나 말에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2. 예수만 보이더라

  이때 마침 하늘에서 구름이 그들에게 내려와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1)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그들에게 내려왔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곳에 나타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현이기도 하며 하나님은 구름 속에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출24:16). 이 구름이 저희를 덮었을 때 그들 중에 있었던 모세와 엘리야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임무를 마치고 구름에 덮여 하늘로 올려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마 제자들에게 변화산의 사건을 보여 주신 것은 모세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이 모세가 예언한 메시야 이심을 확인시키기 위함이며 엘리야를 통해서는 지난날 그들의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외치고 약속한 메시야 이심을 나타내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모세는 일찍 이스라엘을 향하여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 지니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신18:15).

  (2)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이 같은 영광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에서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 얼마 후에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실족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뿌리가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처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심으로 이 같은 믿음을 그들의 마음속깊이 심어 주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으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참 메시야 이심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누구의 말을 들어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만을 들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 하셨다”고 했습니다.

  (3) “이때 제자들이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다시 바라본 예수님은 변형된 황홀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야 자기들의 선생이 보통 분이 아니심을 알고 더욱 두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 론 : 제자들의 변화산에서의 이런 경험은 그들의 마음에 한평생 간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 51≈              먼저 온 엘리야는 누군가

  (본문 : 마가복음 9 : 9 - 13)

  서 론 : 변화산에서 일어난 황홀한 사건은 이들 세 제자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요 또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왜 엘리야가 나타났을까? 그리고 그 엘리야는 말라기에 있는 엘리야의 예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점 등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 중에 엘리야의 사역을 이루는 한 명에 대하여 그가 엘리야이며 인류의 종말에 모세와 엘리야가 직접 하늘에서 내려와 예언을 하다가 순교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경계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1)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되셨던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시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유대인들이 기다려 온 메시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고난의 메시야에 대한 계시는 이해하지 못하고 영광의 메시야의 출현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이 같은 메시야로 알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곧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 왕국이 건설될 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같은 처지에서 산에서 본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에 관한 사건을 소문낸다면 그야말로 이제 당장에 메시야 왕국이 임할 줄로 알고 소동이 날 것이기 때문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경계의 말씀을 들려주시게 된 것입니다.

  (2)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의논은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는 “인자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의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메시야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메시야를 기다려 왔지만 결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메시야를 기다려온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면 모세와 같은 큰 권능을 가지고 먼저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메시야는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영원한 왕으로 앉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온 세계를 영원히 다스릴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 같은 기대와 소망 가운데서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은 그때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메시야로 확신하고 있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인자가 죽는다”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메시야가 죽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씀입니다. 메시야가 죽다는 말씀도 이상하거니와 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인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니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의논하게 된 것입니다.

  2. 엘리야는 누군가?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분명 메시야이 신데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씀을 하시는가? 이에 대하여 해답을 얻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엘리야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1) 제자들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고 물었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은 성경을 베끼기도 하고 해석도 내리는데 그들이 메시야가 올 때의 상황에 대하여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의 경우를 들어 메시야가 올 때에는 먼저 엘리야가 와야 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질문이 제자들에게서 나오게 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한데 그러면 엘리야는 누구며, 만약 엘리야가 와서 이스라엘로 회개시켜 메시야를 영접하게 한다면 메시야가 왜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엘리야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은 이러합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고 하셨습니다(말3:5-6).

  이 말라기의 예언에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문장을 보면 마치 엘리야의 등장이 재림의 예수의 시기로 보는 듯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으로 보아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등장의 시기를 인류의 종말로 알고 있었으며 이 종말에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메시야의 등장에 앞서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회개시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분명 주 재림의 시기가 되는 인류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이 해석에 있어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이 예언은 주의 초림에 관한 예언이며 세례 요한의 등장과 주의 초림으로 이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의 이르기 전에”라고 한 말은 마지막 인류의 심판이 있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그의 아들을 보내실 것과 엘리야를 보내실 일에 대하여 예언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바로 대목의 경우에 적용시켜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엘리야를 세례요한과 결부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세례요한이라고 지적한 것은 아니지만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요한인 줄을 깨달았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마17:13).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임의로 대우를 받아 그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끝내는 헤롯왕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처럼 예수님도 그들의 손에 고난을 당하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마17:12). 예수님은 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기록하기를”이란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로 먼저 온 세례요한도 기록된 대로 사람들에게 임의로 대우받았으며 예수님 자신도 기록된 대로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셔야 했습니다.

  ② 우리는 이 엘리야의 등장해서 초림의 메시야의 경우가 아닌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란 말을 주 재림의 시기가 되는 인류의 종말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이 말라기의 예언을 이중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초림의 메시야의 경우에는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지적했다면 재림에 메시야의 경우에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초림의 메시야의 영접을 위해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림의 경우는 어떠한가? 재림의 경우는 세례요한과 같은 회개의 사명을 가지고 등장하는 또 다른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두 증인”들입니다. 두 증인은 종말에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습니다. 이 권세에 대하여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06일을 예언하리라”고 하셨습니다(계11:3).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을 책망하면서 회개를 외치며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메시야의 초림의 길을 예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 재림시의 엘리야는 지팡이 같은 갈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므로 그리스도의 신부들에게 흰옷을 입혀주며 신부가 입을 세마포로 단장을 시킵니다(계7:9-14).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거역한 자들이 다 패역한 자들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었던 것처럼, 두 증인이 외치는 회개의 예언을 거부하는 무리들은 후3년 반에 온 세상에 임하는 저주의 대 환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들 종말의 엘리야는 144000명의 순교자들로 종말에 하나님에 의해 세례 요한의 사명처럼 쓰임 받을 하나님의 종들을 의미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 적인 깊은 지식을 전달해 주셨지만 그들에게는 깨달음이 부족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은 모세의 얼굴에 씌운 수건을 벗지 못하고 성경을 상고하기 때문에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숨겨진 계시의 비밀을 깨달아 바른 지식을 가지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 52≈                귀신의 존재

  (본문 : 마가복음 9 : 14 - 22)

  서 론 : 변화산에서 일어났던 일은 이제 막이 내리고 새로운 사건으로 장면이 옮겨집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내려온 곳은 남은 제자들이 머물러 있었던 장소입니다. 산 아래에 남아 있었던 제자들은 무리에게 둘러싸여 서기관들과 변론하는 일, 귀신들린 아이로 인한 난처한 처지 중에서 쩔쩔매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때 선생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 온 무리는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놀랐다는 말은 제자들의 난감한 처지를 안쓰럽게 보고 있었던 주변의 무리들이 문제의 해결 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는 반가워한 표정을 말합니다. 달려와 문안한 것은 평소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늘 예수님을 선지자와 같은 훌륭한 선생님으로 존경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1. 제자들과 서기관들에 변론

  예수님의 눈에 비춰진 것은 제자들의 난감한 모습입니다. 그들은 서기관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적인 질문을 받고 있었으면서도 그 공격을 막아낼 답변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을 민망히 보시고 그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의논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님의 질문에 그들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모를 당한 일을 말씀 드리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때 무리 중의 하나가 주님께 나왔는데 그 사람이 곧 귀신 들린 아들의 아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그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내용을 설명하기를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고꾸라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2) 이 대답에 따르면 주님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비의 아들을 고치지 못한 사건으로 인하여 변론이 벌어졌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그들의 변론을 추론해 본다면 제자들은 서기관들로부터 “너희가 무슨 권능으로 귀신을 내어쫓느냐” “너희 선생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너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냐”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이 율법에 어긋나거늘 왜 너희 선생은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느냐” “너의 선생이 전하는 복음은 반 율법적인 것이거늘 그것으로 어찌 죄인을 구원한다 하느냐 ”는 등, 이런 안건을 가지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을 것이며 제자들은 어떤 결정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고 궁색한 처지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던 그런 시기에 주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2. 귀신의 존재와 귀신의 사역

  성경에는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분명한 언급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의 근원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1) 악한 영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탄입니다. 이 사단은 악한 영의 근원 자로 등장합니다. 이 사단은 뱀의 모습으로 에덴에 나타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뱀은 사단의 자기 표현의 수단에 불과할 뿐 뱀이 곧 사단은 아닙니다. 사단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적 존재인 인간을 미혹하기 위해서는 어떤 물질 형태의 생명체에 들어가 활동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단에게 이용당할 만한 타락한 피조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가장 간교하게 만들어진 뱀에게 들어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첫 번째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자에 대하여 계시록 12장에는 “한 큰 붉은 용”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인류의 종말에는 이 자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온 세상이 미혹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자는 하늘의 첫 번째 반역자로 성경에 계시 되어 있습니다(사14:12-15, 겔28:14-16). 이 자는 하늘 보좌에서 내어쫓긴 후, 공중 권세를 잡고 이 세상 흑암의 권세 자로 활동하다가 인류의 종말에 미가엘 천사에 의하여 땅으로 내어 쫓기게되며 1천년간 무저갱 속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가 궁극적으로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계20:1-3, 10).

  (2) 그런데 성경에는 악령의 존재에 대하여 사단에게만 국한시킨 것이 아닙니다. 악령, 귀신, 더러운 영, 미혹케 하는 영 등으로 불리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이에 대한 성경 적인 바른 규명이 있어야 합니다.

  ① 어떤 사람들은 이 귀신이 존재를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불신자의 영혼은 어느 일정 기간 동안 세상 영계에 머무르는데 그 사람들의 영혼이 이 귀신의 존재로 인간계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이 자기를 사람들에게 나타낼 때는 반드시 죽은 사람의 이름을 대며 그 사람에 생존시에 모든 언행, 성품 등을 너무나도 흡사하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어쫓는 어떤 축사 자는 바로 그 귀신의 이름을 대며 내어쫓음으로 실효를 거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라고 말하면서 그 귀신을 쫓으신 것을 보고 벙어리 되고 귀먹은 사람이 죽은 귀신이 그 사람에게 들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귀신 쫓는 사람들이 이 같은 귀신론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귀신을 내어쫓는 사역을 복음 사역의 제일로 삼고 있습니다.

  ③ 악령 들린 사람들의 증상을 보면 이들은 자기의 조상, 또는 다른 사람의 흉내내며 그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불가사의적인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악령 들린 자에게는 투시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라사인의 악령 들린 경우를 보면 생전에 한 번도 주님을 본 일이 없었는데도 예수님을 만나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악령 들린 자의 악령이 주님의 권능에 의하여 내어쫓기며 다른 짐승에게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3) 귀신이나 악령, 또는 더러운 영 등은 별개의 구분된 존재들이 아니라 한 존재에 대한 여러 갈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존재입니다. 이들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란 주장은 비 성경 적인 해석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생명은 모두 끝납니다. 끝난다는 말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영원히 갈 장소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자색 옷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밝혀 주고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죽으면 그의 육신적인 생명은 땅에 묻히고 영적 생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장소로 옮겨지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히9:27). 만약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의 영적 생명이 살아남아 이 세상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다면 성경의 진리는 일시에 무너져 버립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구원의 소망이 있을 것이며 죽어서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고 하나님의 교회나 성도들을 괴롭힐 수 있다면 아마도 믿는 성도들의 영혼도 이 세상 영계에 남아 있어서 이들과 계속적으로 싸워야 할 것입니다.

  (4) 사단에 관한 성경의 증거는 사단의 허다한 무리들이 사단과 함께 존재하며 사단과 함께 활동한다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존재에 대하여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마25:41). 그리고 사단이 미가엘에 의해 공중에서 땅으로 내어쫓길 때에도 “저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했습니다(계12:7-9).  이들은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과 함께 세상을 미혹하는 사단의 사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외에도 다른 일단의 사단의 사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무저갱 속에 갇혀 있는 범죄한 천사들이라고 했습니다(벧후2:4). 유다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그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했습니다(유1:6). 이들이 왜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악령들과 구별된 무저갱 속에 갇혀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성경에 공급한 일은 없지만 이들은 그들보다 더 중한 형벌을 받은 타락한 천사들로 볼 수 있겠습니다(눅8:29-31). 그러나 이들도 마지막날에 사단에 의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일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화로 나오는 환난은 무저갱 속에서 올라오는 악령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교회에 가해지는 핍박인데 이 핍박에는 사단과 그의 온 사자들이 총동원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계9:1-4).

  결 론 : 사단은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늘 보좌에서 가장 거룩하게 지으심을 받은 구릅 중에 하나였습니다(겔28:14, 계4:6). 그리고 사단의 사자들로 나오는 악령의 존재는 그의 휘하에서 그와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내어쫓긴 타락한 천사의 무리들입니다. 이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을 때 그들의 거룩함은 사라져 버리고 가장 더럽고 추한 존재로 떨어져 버렸으며 이들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미혹하는 악령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 53≈                믿는 자의 능력

  (본문 : 마가복음 9 : 21 - 24)

  서 론 :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불신의 현장에 도착하셨습니다. 귀신들린 한 아이를 가운데 두고 제자들은 서기관과 변론 중에 곤혹을 당하고 있었으며 아이의 아비는 자기 아들을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실망하고 혹시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이 국면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을 그때에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믿음이 없는 세대에 대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한탄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에게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메시야를 죽이려는 음모로 고소거리를 찾으려고 예수님을 좇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의 무리들도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것을 얻고 찾으려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에게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1.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란 말씀에서 예수님의 비분에 찬 탄식을 들을 수 있는데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는 말씀은 얼마 후에 예수님은 그들과 헤어질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얼마 후에 있을 예수님의 고난을 가리킨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는 말씀도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 머무실 기간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오랜 기간 그들과 함께 계실 것도 아닌데 그들의 이 같은 불신을 보셨을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그 아이의 아비는 예수님께 매달려 애원했습니다. 지금 그 아비는 자기의 아들에게 들어간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그 아이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며 땅에 엎드려져 굴며 거품을 흘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어릴 때에 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고 대답하면서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간구 했습니다.

  ‘그러나’라고 하는 말에는 한 가닥의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2)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란 말은 그 아이의 아비의 주님께 대한 믿음의 정도를 나타낸 말입니다. 그 아비의 이 같은 말은 그가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아들의 귀신을 쫓아내실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대하여 아마 선지자 중의 한 분이신 정도로 여기기는 했어도 인류의 죄를 지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메시야이심을 아직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만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것이면 그 무엇이라도 하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다만 어쩌면 고칠 수 있다고 하는 한가닥 요행을 바라는 기대감으로 “그러나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는 간구를 드린 것입니다.

  2.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옵소서”라는 그 아비의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먼저 그 아비의 불신에 대한 책망으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불신의 세대에서 지금 그들의 불신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는 예수님의 일차적인 말씀의 뜻은 “그러나 하실 수 있거든” 도와달라는 그 아비의 말에 대하여 “왜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느냐 ”는 뜻입니다. 만약 그가 내가 예수님께 대한 바른 믿음만 가졌었다면 “주여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내 아들이 낫겠나이다”고 아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실 수 있거든”이란 토를 다는 일로 하지 못할 수 도 있다는 불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그 아비의 불 신앙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불신에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 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늘 예수님을 만나고 그 앞에서 여러 가지 기사 이적을 목격하며 권위 있는 말씀도 들었지만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생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죽이라는 음모를 꾸미고 고소거리를 찾으려고 뒤를 쫓아다녔던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현실적인 메시야로 알고 그로부터 모세와 같은 권능과 하늘에서 내리는 떡을 원했지만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시면서 “내가 곧 생명이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실망하고 그 곁을 떠나 버린 것입니다(요6:48-71).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믿음도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할 고난의 메시야이신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도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기 위한 영광의 입성인 줄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고 물었는데 이 질문은 주님이 지금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실 시기냐는 딱한 질문인 것입니다(행1:6).

  귀신 들린 아들의 아비의 믿음은 이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대로 예수님은 아마도 이 선지자 중의 한 분으로 오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의 그 귀신을 내쫓아 온전하게 하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갖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간구한 말이 “하실 수 있거든”이란 말로 나온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뒤이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권능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① 이 믿음은 먼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아들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신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시발점이 됩니다.

  ② 이 믿음은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 아들과 연합이 되므로 아들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가 그를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③ 이 믿음은 예수님이 비유하신 한 겨자씨처럼 살아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7:20). 한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씨앗이지만 그 씨앗이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겨자씨 안에는 살아 있는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살아 있는 믿음은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하나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 속에 열매를 맺는 씨앗으로서의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④ 이 믿음은 의심치 않는 기도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1:21-22). 여기서 믿고 구하는 기도란 약속에 기초한 기도를 말합니다. 정욕이나 사역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죄를 버리고 순종하는 믿음의 생활 가운데서 구하는 기도입니다.

  결 론 : 예수님께서 하신 이 놀라운 말씀은 비록 그 아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이처럼 우리에게 금과옥조 같은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을 개발해야 합니다.




  ≈ 54≈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

  (본문 : 마가복음 9 : 23 - 29)

  서 론 : 귀신 들린 아이에 대한 문제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비가 예수님을 향하여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외치자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같은 말씀을 들은 그 아비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소리를 질러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1. 내가 믿나이다.

  그 아이의 아비는 처음에는 “내가 믿나이다”는 말로 대답하더니 곧 이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도움의 간청을 드렸습니다.

  (1) 이 아이의 아비가 처음에 한 “내가 믿나이다”는 말은 주님의 그 말씀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아이의 아비에게 하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그 아이의 아비에게 믿음이 적어서 아들의 병을 못 고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첫째로는 예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권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권능을 믿는 자에게도 이런 권능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이 아이의 아비가 “내가 믿나이다”고 외친 것은 자신에게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그 말씀을 믿는다는 뜻으로 “내가 믿나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2) 다음에 그 아비는 또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애처로운 호소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호소한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는 말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아비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믿나이다”고 대답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에게 그 같은 믿음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자기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하는 간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 아이의 아비에게 이런 믿음을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 같은 믿음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같은 믿음은 대단히 성숙한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0: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믿음의 씨앗입니다. 이 씨앗을 좋은 밭(회개한 심령)에 뿌려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 아이의 아비는 이 같은 능력 있는 믿음을 가질 만한 말씀을 들은 일이 없으며 열매를 맺으므로 믿음을 소유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믿음을 갈망한 나머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구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벧후3:1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합니다. 믿음의 성장이 없이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아이의 아비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할 만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비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란 간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3:21-22). 우리의 담대한 믿음은 ‘믿습니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 앞에서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때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비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3) 예수님은 이 아비를 불쌍히 보시고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보시고 그에게 들어가 있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란 표현은 그 귀신이 벙어리 되고 귀먹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악랄한 귀신이 그 아이에게 들어가 그 아이로 여러 가지 병을 유발시켰는데 그 아이로 벙어리 되고 귀먹게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때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한 경련을 일으킨 후, 나갔다고 했습니다. 귀신은 아이로부터 쫓겨 나가면서 최종적으로 그 아이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므로 고통을 준 것입니다. 사탄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을 괴롭히며 그 생명을 해롭게 하는 일에 온힘을 기울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귀신의 최후 발악적인 행동에 의하여 마치 죽은 것같이 비참하게 쓰러져 버린 이 불쌍한 아이를 손으로 잡아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2. 제자들의 질문

  이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어느 한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던 제자들이 주님께 종용이 물었습니다.

  (1)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그처럼 쉽게 거침없이 되는 일이 왜 자신들은 그처럼 애를 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심한 창피를 당하기까지 했는데 쫓아내지 못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들이 경험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12 제자를 부르사 둘씩 짝을 지어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막6:7).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부족했던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했습니다(막6:12-13). 그러면 왜 그들이 이 아이에게 들어가 있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쫓는 일에 한결같이 실패한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알아본다면 귀신을 쫓는 권세나 병 고치는 권세는 언제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의하여 전도대를 구성하여 복음을 전할 때 이 같은 권능을 받은 것인데 그들은 언제나 계속적으로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권능을 필요에 따라 회수하시기도 하며 자신들이 잘못 간수하므로 상실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이 실패한 원인에 대하여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해답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 없이 지난날에 소유하고 있었던 권능만으로 내쫓으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날의 권능을 계속 소유할 만한 기도의 계속적인 생활도 못했습니다. 계속적인 기도 없이 계속적인 권능의 행사란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권능만을 믿고 그 권능을 계속적으로 소유하게 하는 기도생활에는 나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결 론 : 이 아이의 아비의 신앙적인 자세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란 간구는 그런 성숙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호소입니다. 아마도 그 후 그는 이 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 아이의 아비처럼 연약한 것을 알고 무조건 권능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만한 마음을 가리지 말고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하는 겸손하므로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성숙한 기도의 생활, 열매맺는 순종의 생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 55≈                깨닫지 못한 이유

  (본문 : 마가복음 9 : 30 - 32)

  서 론 :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비의 아들을 고쳐주신 후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새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자신을 알리고자 아니하셨는데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현세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수행하셔야 할 메시야적 사역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이 같은 메시야적 고난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 이해하려고 하지도 아니했기 때문에 주님의 고난의 현장에서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님을 배신한 채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1. 깨닫지 못한 이유

  주님의 제자들은 그토록 오랜 기간 주님을 따르며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하시는 행적을 친히 보고 자신들도 복음을 전하면서 권능을 행했지만 그들은 참 구속의 도리에 대하여 캄캄했습니다.

(1) 예수님은 그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문제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 예수님은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상대하실 때는 고난과 부활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자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복음의 내용은 이스라엘에게는 비밀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해야 했습니다.

  인류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오랜 기간 영적으로 버림받는 상태에 놓여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래도록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그들로 충분한 회개의 기간을 주셨지만 그들은 끝까지 거역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패역한 길을 걸었습니다. 이 같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등장은 그들의 심판의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율법으로 자기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그들은 그들이 의지하는 율법에 걸려 넘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주체로 오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정죄의 표준이요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을 따랐습니다. 율법을 따르기 위해 그들은 복음을 배척하였고 율법으로 의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저주의 죽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나와야 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보내실 때에 이스라엘 땅에 나게 하셨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세상에 전파하게 되었으며 선택받은 유대인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려는 노력을 계속하셨고 예수님의 이 같은 노력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는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2)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가르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영적인 개념을 전혀 생각에 두지 않고 현세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이 이루실 구원 사역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율법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만이 의로운 백성이요 메시야는 이 같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오실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할 일이요 더욱이 자기들이 선생님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리라 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기들이 하는 일이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으로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이 자신이 죽으실 일과 다시 사실 일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다음에 그들의 메시야관은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가르침을 이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계시 받은 메시야 왕국의 약속이 유대인들에만 해당되는 것이요 그 약속에 메시야가 출연하므로 현실적으로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이전에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시고 또 부활하셔야 할 일에 대하여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 같은 계시가 구약에는 깊숙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님의 죽으심이나 부활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은 너무나도 당연했으며 그들은 오직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만 하면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누가 크냐고 하는 논쟁도 곧 실현될 메시야 왕국에서의 자신들의 지위에 대한 다툼이었으며 그들은 지금 이 같은 꿈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귀에 들릴 리 없었습니다. 호세아 선지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고 탄식한 일이 있습니다(호4:6).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같은 진리의 지식을 버리고 현실적인 영광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거치는 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핵심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그들의 이 같은 신앙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해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일에 대하여 이해하려하지 않습니다. 부활에 소망도 갖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의 기복적인 생활에 신앙의 중점을 둡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합니다. 이들은 복음의 진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믿음의 주체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더군다나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구원의 확신도 가질 수 없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2. 주님의 가르치심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그가 당하실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8:31절에서도 이미 말씀하셨고 9:9-12절에서도 언급하셨으며 연이어 또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제자들도 끝내 이해하는 일에 실패했지만 그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자 이 모든 가르침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믿음을 가지고 복음에 큰 일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천국 메시지는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 사건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의 죽으심이 없으면 우리의 속죄나 구원이 있을 수 없으며 영생도 천국도 허황된 약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새 생명이 존재할 수 없으며 부활의 소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집중적으로 설파하는 일이 설교의 구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듣던지 아니 듣던지 이 말씀을 전해야 하며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그 사람의 영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처럼 나타납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같은 주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깨닫지 못 했을 뿐 아니라 “묻기도 무서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질문을 무서워한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며 너무나도 의외의 말로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질문을 삼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는 일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른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그냥 모른 채로 묻어 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들이 누릴 영광의 소망에 찬물을 끼얹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묻기조차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한번 간하다가 몹시 책망들은 일이 생각나 다른 어떤 건의도 삼가 했습니다.

  결 론 : 예루살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만이 우리에게 참 소망을 줍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영광과 축복을 바라고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선한 싸움에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고난과 그의 부활에 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에 경주 장을 달려가야 합니다.




  ≈ 56≈                누가 큰 자냐?

  (본문 : 마가복음 9 : 33 - 37)

  서 론 : 누가 크냐는 문제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당면문제였습니다. 선생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터인데(메시아 왕국) 눈앞에 다가온 그 나라에서의 자신들의 지위에 관심을 갖는 일은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길을 거닐면서도 주님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자기들끼리 “누가 크냐”에 대한 문제를 안건으로 쟁론하고 있었습니다. 쟁론이란 말은 서로간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워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우기는 다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철없는 쟁론을 들으시고는 마음으로 탄식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노중에서 쟁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으심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리스인들의 겸손이 무엇이며 자신을 낮추는 일이 무엇인지, 그런 생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필요한가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1. 첫째가 되고자하는 자의 자세  

  예수님의 제자들은 땅에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 세상에서 첫째가 되고자하는 자는 땅엣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골3:2). 땅에서 첫째가 되고자하는 생각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다른 이에게 봉사하고 사회에 헌신하고 인류사회에 유익한 일꾼이 되기 위한 생각에서도 아니요 남을 지배하고 남의 머리가 되어 그들에게 존경을 받는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 같은 인간의 생각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들이 가장 높은 벼슬자리에서 남을 지배하고 영광을 누리고자하는 탐욕에서 누가 높으냐의 쟁론이 나왔기 때문에 주님의 책망을 듣게된 것입니다.

  땅엣 것은 썩어질 것입니다. 땅에서 첫째가 되려는 노력에 전념하다보면 주님의 일은 할 수 없으며 그 첫째의 자리에 올라가면 사랑과 헌신과 겸손과 충성스러운 성도의 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2)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역설적인 논법을 발견하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의도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는 일이 나쁘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첫째가 되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같은 그들의 첫째가 되려는 생각은 첫째는 고사하고 꼴찌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인식시키시려는 뜻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첫째가 되려면 먼저 그들의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① 첫째가 되고자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하신 끝이란 말씀은 ‘맨 끝’이런 뜻으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분적인 위치의 끝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신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맨 끝’까지 낮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종의 자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무슨 일이든 종의 자세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 뭇 사람의 끝이 되는 일이며 이처럼 행하면 첫째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눅17:10).

  뭇 사람의 끝이 되는 일은 겸손에서 열매를 내게 됩니다. 위선적이 아니라 진실한 겸손이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존경해 주는 일입니다.

  ② 첫째가 되려면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자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남에게 섬김을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려 왔다”고 하셨는데 그의 위대한 섬기심은 인류의 지도자의 면모를 보이셨습니다. 남을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첫째가 되는 사회는 독재자의 경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주님을 선생으로 그의 말씀을 본받으며 그의 생활을 본받아야합니다. 누구나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섬김은 외식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외식은 교만보다 더 가증스러운 죄악입니다. 사랑은 먼저 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주고 형제가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입니다. 내가 형제의 입장에 서서 그 형제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는 일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는 일은 정말로 첫째 되는 영광에 상급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과 연결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고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여기서 우리는 어린아이를 안으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안으셨을까요? ‘뭇 사람에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에서 어린아이에게 대하는 대접이나 관심은 적습니다. 인격적인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관심 밖의 전제로 제켜 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를 사랑하십니다. 많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한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신 주님의 모습은 아주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자를 섬기시는 진실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뭇 사람의 끝이 되는 사람은 이처럼 모든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는 형제들에게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못나고 소외된 형제들을 사랑해 주고 그런 사람들의 친구로써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사람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같은 사람들에게 첫째 되는 영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주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에 대한 놀라운 상급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둘 말씀은 ‘내 이름으로’란 대목입니다. 주의 이름으로란 말에는 주님의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그 같은 생활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생활을 하려면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결 론 : 만약에 우리가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으로 하면 그같은 우리의 일은 주님을 그처럼 공궤한 일로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최후의 심판대인 흰 보좌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주님의 선고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주님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마25:34-40).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주의 이름으로 뭇 형제를 섬기는 자가 되고 주 이름으로 뭇 사람의 끝이 되어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 나라의 커다란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9장 중 설교 57,58은 10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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