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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
 밤중소리  01-08 | VIEW : 502

  ≈ 42 ≈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본문 : 마가복음 8 : 1 - 10)

  서 론 : 주님의 공생애 중 주님 곁에는 항상 큰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물론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목적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순결한 목적으로만 따라 다닌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를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믿음으로 따른 무리는 언제나 심히 적었습니다. 세상적인 기복, 육신의 질병, 당장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큰 관심을 가지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그같은 목적의 기대를 얻을 수 없으면 아주 쉽게 그 곁을 떠났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고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1. 내가 불쌍히 여기노라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기를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말할 수 없는 긍휼을 의미합니다.

  (1)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의 그 심정은 그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은 언제인가 주님으로부터 화의 선언을 받은 바리새인들이요 서기관들이요 제사장들의 무리였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눈물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이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8).

  (2)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 곁에 있는 수다한 무리들은 주님과 함께 머문 기간이 이미 사흘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흘간 굶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흘이 지나매 먹을 것이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들 중에는 멀리서 온 무리들도 있으므로 만약 그대로 보낸다면 그들은 결국 길에서 기진 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의 이 같은 정경을 불쌍히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식생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식생활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취해야 할 양식입니다. 이 일에 어려움을 겪으면 사람이 기진 하기도 하고 어려운 고통도 당하게 되는데 주님은 우리의 이 같은 처지를 낱낱이 살피시고 불쌍히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마6:31-32).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르밧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엘리야를 그곳에 보내시어 극한 가뭄 중에서 그 가족들을 먹이시므로 그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아들마저 빚쟁이 손에 넘어가게 된 한 선지자의 아내를 불쌍히 보신 하나님은 그녀에게 엘리사를 보내시어 빚을 갚게 하셨을 뿐 아니라 먹을 양식까지 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이나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리시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인류의 종말에도 그의 백성들에게 극한 가뭄과 식량난의 어려움 속에서 먹을 양식과 마실 음료에 대하여 염려 없도록 약속해 주셨습니다(계6:6, 7:15-17).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일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이처럼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형제들에 대하여 그같은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는 일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잠19:17).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심문하실 내용에 대하여 적은 한 부분을 밝혀 주셨는데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냐”는 것입니다(마25:36-37).

  2.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은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문제만 제기하고 해결의 방도가 없다면 그런 대상에게는 아무 것도 바랄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문제가 있는 곳에 반드시 그 해결 자로 나타나시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1) 제자들은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기진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어리둥절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문제의 해결을 자기들에게 하라는 말씀인줄 알고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 신들 현재의 입장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도 이 같은 질문 식 대답을 통하여 주님의 책망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빈들에서 많은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데 주님은 이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우리가 가서 2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는 말로 그같은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조로 항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곳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어 5천명의 군중들을 먹이시고도 12바구니에 남은 조각을 거두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몇 일전의 일이었건만 이 같은 주님의 기적을 잊어버리고 또 불만조의 대답을 하게 된 것입니다.

  (2)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쉬 잊어버립니다. 주님이 내게 베푸신 사랑에 대하여 제자들처럼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시103:2).

  제자들처럼 이전에 베푸셨던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잊어버리면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의뢰가 살아지게 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셨는데도 주님의 이 돌보심의 권고를 망각하고 염려를 주께 맡기지 못하는 일은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쉬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은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사 축복하시고 4천명의 무리들에게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에는 그 축복을 감사할 수 있는 제물을  바칠 것을 명하십니다. 사르밧 과부의 경우에도 그러했습니다. 한 선지자의 아내의 경우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님께 드릴 제물을 남겨야 합니다. 극한 가난 중에도 한 가난한 과부는 그의 생활비 전부를 주님께 드릴 제물로 남겨두었었습니다. 주님께는 무엇인가 축복을 해 주실만한 봉헌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만 옆에 모시고 있는 생활을 한다면 늘 나를 돌보시는 목자의 입장에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돌보시는 것입니다. 내게 양식이 없을 때에 내가 기진 할까 걱정해 주시고 내 몸이 병으로 쇠약할 때에도 몸의 고통을 긍휼히 여기사 베데스다 연못가로 36년 된 병자를 찾아오신 것처럼 나를 찾아오시어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우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하므로 주님이 늘 내 곁에 머무시도록 그와 함께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 43 ≈         표적을 보이지 아니하신 예수

  (본문 : 마가복음 8 : 11 - 13)

  서 론 :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흠을 잡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그가 행하시는 이적 등에 문제될 만한 요소만 발견되면 힐난하면서 대들었습니다. 이날도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제기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예수께 힐난했다고 했습니다. 힐난이란 공격적인 논쟁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인줄 알고 따르는 많은 무리들을 예수의 미혹에서 건지고자 하는 의도로 결정적인 시험을 시도했습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1. 하늘로서 오는 표적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선지자나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교훈도 정통적인 바리새인들이 따르는 장로들의 유전과 달랐으며 무엇보다 안식일을 자기들의 율례대로 지키지 아니했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는 자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에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눈의 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들이 이 불법적인 무명청년을 마치 메시야인양 추앙하면서 따르는 것을 볼 때 참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이 일로 예수께 대한 시기심이 극도로 달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흠을 잡아 법적인 조치를 취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게 죽일꼬 하는 음모까지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1)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표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신 표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문둥이를 고치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까지 보이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인 이 사람의 행한 것 보다 더 많으랴”고 말하고 있었습니다(요7:31). 하루는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많은 표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밤에 주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어떤  표적을 바란 것입니까? “하늘로서 온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메시야된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험입니다.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마치 예수님이 공생애 초두에 40일간 금식하신 후,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던 시험과 동일한 시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정말로 예수가 메시야인가?의 여부를 알려고 이런 질문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마음을 격앙시켜 무리들 앞에서 품위를 손상시키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2)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표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그의 많은 표적을 보고 그같은 이적을 다각도로 검토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린 결론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이적을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자기들 가운데서도 행하고 있는 보편적인 신유의 능력정도로 여겼습니다. 또 주술적인 방법으로 평가절하 하여 나타난 사실대로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미혹하지 말고 어떤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 힐문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표적을 행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바로 왕 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린 표적, 홍해를 육지처럼 가른 표적, 반석을 쳐서 생수의 강을 내게 한 표적,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게 먹게 한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모세가 오실 메시야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희 가운데서 세우신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 먼저 모세와 같은 표적에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모세와 같은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이 그들의 주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이 그런 표적을 보일 수 있다고 믿지 않고 있었으며 설혹 나타내신다고 해도 그로써 예수를 자시들의 메시야로 믿을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2. 너희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은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의 요구를 들으시면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의 탄식은 진리를 믿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그들의 완악한 마음에 마음속으로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끼고 있는 상태를 의미해 줍니다. 그들의 완안한 마음의 상태는 주님이 부활하신 후, 그의 부활을 확인한 후에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탄식은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에 대한 탄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의도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오직 진리를 대적하기 위해 시험하려는 의도로 나왔다는데서 나오신 탄식이십니다.

  (2)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신 표적은 설교나 하고 병자나 고치는 것으로 군중들을 미혹하지 말고 메시야여든 메시야를 증거 할 만한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주어 그것으로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찾는 표적은 그의 표적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놀라운 표적의 체험자이면서도 몇 일이 못되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만나를 먹으면서도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반석의 물을 마셨으면서도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당시에도 패역한 자들이었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세대에서도 역시 패역한 자들이었으며 지금도 패역한 무리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패역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신 말씀은 지금 우리의 이 세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패역한 세대에는 말씀으로 전파되는 진리가 배척을 당하고 오직 표적이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표적을 구하는 믿음의 세대가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팽배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이를수록 이 같은 상황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유혹의 영을 보내시어 그들의 표적으로 유혹하시어 심판하시겠다고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며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살전2:9-12).

  (3) 표적은 결코 믿음의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표적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롬10:17). 말씀은 믿음의 씨앗이며 생명의 씨앗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1:23). 예수님도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요5:24). 표적은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혹은 생활의 축복으로 혹은 질병의 치료로 혹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지 믿음의 증거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자색 옷 입은 부잣집에 나타나 그들에게 자신을 증거하게 한다고 해도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시리라”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으로 믿기를 구하거나 표적으로 예수의 메시야된 증거를 구하려는 자들에게 결코 표적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표적으로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신앙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님을 탄식시킵니다. 오직 말씀을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믿음입니다.  




  ≈ 44 ≈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

  (본문 : 마가복음 8 : 14 - 21)

  서 론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그 제자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육적인 사고방식으로 판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시기에 앞서 영적으로 자세히 풀이해 들려주시므로 그들로 영적인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교훈이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교훈이며 가르침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도 역시 그들처럼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선상에서 제자들에게 한가지 교훈을 들려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이 영적인 경계가 제자들에게는 떡으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고 말하면서 주님께 드릴 떡이 없는 일에 대하여 근심했습니다.

  1. 주님이 말씀하신 누룩

  누룩이란 떡을 만드는 일에 필수적인 물건입니다. 빵을 부풀게 하는 발효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일찍부터 밀가루를 누룩으로 발효시켜 빵을 만들어 그것으로 그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온 사람들입니다.

  (1)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떡과 연결시킨 이유는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란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엉뚱하게 전개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보편적으로 이 말씀의 뜻을 바리새인들이나 헤롯 당원들이 먹는 떡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므로 자신들이 떡을 가지고 오지 못한 일에 대하여 후회하면서 근심하게 된 것입니다.

  (2) 제자들은 방금 전에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고 약 4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의 남은 조각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남은 일곱 광주리의 남은 조각을 가져오지 못하고 들에 두고 온 사실에 대하여 근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에게 있는 양식이라고는 배에 뒹굴고 있는 떡 한 조각밖에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선생님이 남은 조각의 떡을 찾으실 때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으로 염려하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제자들의 행동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생활 중에 금과옥조처럼 지키는 장로의 유전이 그러했습니다.

  (3) 예수님은 그들의 둔한 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웅성거림을 들으셨습니다. 그들이 떡이 없으므로 의논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영적인 무지를 탄식하시면서 바른 이해에 이르도록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누룩이 떡이 아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떡으로 염려하는 그들의 생활자체에 대하여 실증적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문답법으로 지난 일에 대하여 기억시키고 스스로 해답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5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열 둘이니이다”고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물으셨습니다. “떡 일곱 개를 4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일곱이로소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 조로 되물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물으심은 제자들로 좀더 깊은 영적인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단단한 것을 취하지 못하고 젖만 먹고 자라기 때문에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히5:13). 신앙이 성장하려면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히5:13). 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란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여 스스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체험이 없는 신앙은 장성한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언제나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제 이 같은 체험적인 말씀이 그들의 생활에 적용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먹을 것에 대하여 왜 염려하느냐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능력을 보았으면 그 능력을 행하시는 분을  믿고 그를 의뢰해야 할 것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책망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책망하셨습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치 못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둔하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이 없는 것은 마음이 둔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둔한 사람은 영적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의 마음이 둔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마음을 베는 것으로 회개를 뜻합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생활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의 생활이 곧 영적인 생활로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생활입니다(롬8:14).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빠릅니다. 회개가 없는 심령에는 온갖 죄악이 가득 들어차 있으므로 영적인 감각이 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당한 교회를 향하여 이처럼 경종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덧과 같이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눅21:34).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조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조심한다는 말은 육적인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고 오히려 육적인 생활에 빠진다면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를 가져오게 되고 마음이 둔하여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둔한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또 신령한 일을 기억치 못하고 쉽게 진리에서 떠나며 동요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떡에 대한 주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분명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떡이란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양식에 대한 염려는 그것이 적든 많든 사람의 마음을 영적으로 둔하게 만들고 어둡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산상보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것은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마6:31-34).

  (2)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교훈을 말합니다. 누룩이란 떡을 팽창시키고 썩히고 부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누룩의 비유는 영적으로 사람에게 해를 주는 교훈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출12:15, 레2:11, 고전5:6).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주로 장로의 유전을 가리킵니다. 장로의 유전은 유대인들의 일상생활의 규범이 되어 왔는데 그들은 율법보다 한술 더 떠서 엄격한 규율을 정하므로 이것이 오히려 그들의 올무가 되어 그들의 모든 행위가 외식으로 흘러 버렸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같은 의식을 이스라엘 전체에게 누룩으로 번지게 하여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구원의 길이 막혀 버리고 그들의 참 메시야를 거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그들의 누룩을 주의 하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또 헤롯에 누룩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종교적인 것이라면 헤롯의 누룩은 정치적인 미혹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헤롯을 옹립하고 왕정에 협력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신앙을 세속화시켰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이 같은 헤롯 당의 누룩이 이스라엘간에 번져서 많은 유대인들로 헤롯 정권에 아첨하고 하나님이나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갖는 신앙에서 떠나게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예수님을 해치는 일에는 바리새인들과 한통속이 되어 예수님의 율법적인 약점을 찾는 일과 정치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는 일에 힘을 합쳤던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같은 누룩이 그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번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들의 누룩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도 우리들의 영적인 생명의 치명타를 가하는 악한 누룩들이 많이 번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잘못된 효도라고 하는 누룩이 조상 숭배에 대한 악한 교훈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토속 신앙이라는 누룩이 기독교를 하나의 민족적인 종교의 테두리 안에 가두고 기독교를 무속 신앙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현대신학에 누룩은 기독교의 특유한 가치관을 스스로 폐기하고 하나님을 범신적인 인격체로 만들고 모든 종교를 기독교와 동일시하는 다원 종교 신학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 45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본문 : 마가복음 8 : 22 - 32)

  서 론 : 예수님이 벳새다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후 침을 뱉어 그의 눈에 바르시며 안수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치병과정은 다른 곳에 나오는 치병의 경우와 약간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수를 두 번 해 주신 일이라든가 눈을 단번에 밝히 보이게 아니하시고 단계적으로 보이게 하신 일 등은 그의 치병의 능력이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특이하신 방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죽은 자도 당장 살아나게 하시는 기적도, 문둥병 자도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시는 권능도 나타내신 분입니다.

  어느 날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의 일입니다. 들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에 대하여 물으시고 또 제자들 자신에게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1.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일은 제자들에게 보다 확실한 메시야관을 심어 주시기 위한 공부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대단히 잘못된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받아야 할 메시야 상”에 대하여 가르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먼저 세상 사람들 곧 유대인들에 대한 메시야관에 대하여 알려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외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 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는 모습을 세 가지로 말씀 드렸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얼마 전에 헤롯에 의해 목 베임을 받은 세례 요한으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생각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이미 예수님은 공생애에 들어가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셨을 때입니다. 그러나 헤롯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오해를 받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세례 요한이 죽은 후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는 사실에서 혼돈이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성이나 그의 행하시는 여러 가지 기적 등이 그때로부터 더욱 많이 퍼진데서 나온 일종의 과장된 유언비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또 다른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엘리야라고 부른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엘리야라고 지칭하는 인물은 장차 여호와의 두려운 날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엘리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신 말씀에 나타난 엘리야를 의미합니다(말4:5).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도 이 엘리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에 대하여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셨습니다(마11:9-10). 유대인들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바로 말라기로 예언된 선지자 엘리야인 줄로 믿었던 모양입니다. 이 엘리야에 대하여는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하신 것으로 이 같은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메시야가 아니라 메시야를 소개하며 회개를 경종하는 것으로 세례 요한에게 적용되는 사역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편 인류의 종말,예수님의 재림 때 그의 오심을 경종하고 회개를 외치는 두 증인에 사역에 결부시킬 수 있는 예언이기도 합니다(계11:3).

  (3) 세 번째로 예수님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생각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오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종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이나 그의 교훈 등은 과연 그를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길 만 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경향이 많았을 것입니다.

  (4) 그러면 여기서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않고 이처럼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잘못된 메시야 사상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보편적으로 안정된 사회를 이루고 있었을 당시에는 여자의 후손(창3:15), 아브라함의 씨(창22:18), 실로(창49:10), 모세와 같은 선지자 중 하나(신18:15), 한 별(민24:17) 등으로 나타나 있고 이들이 누구이며 또 어느 시기에 등장하여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 후 이사야를 통하여 다윗의 자손에 대한 언약으로 유대인의 메시야가 다윗의 뿌리에서 나올 것이라는 사상이 자라나 메시야를 부를 때는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으로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BC 586년을 전후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로 계속하여 바벨론, 메데바사, 로마 등 열강들의 지배 아래서 많은 종교적 핍박과 피지배자의 고난을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이 머리에 그리고 상상한 메시야는 예루살렘에서 침략자를 물리적으로 물리치고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는 정치적 메시야 사상이 대두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 신학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같은 형태의 메시야가 아니면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예언된 모든 메시야의 언약도 이 같은 방법으로 풀이했고 다른 형태로 예언된 모든 메시야의 관한 예언은 메시야의 예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메시야”는 고난을 당하는 이사야나 그가 아니면 다른 하나님의 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결코 메시야의 고난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는 고난을 당하실 분이 아니라 권능을 가지고 그들 중에 오셔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제자까지도 예수님의 고난이나 그의 죽으심이나 부활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했던 이유가 그들도 이 같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 대하여 물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인즉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듣기 위해 같은 방법으로 물었던 것입니다.

  (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물음에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다른 복음서에는 약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원래가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야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의 경우,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이 같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신정 체제 아래서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의 그리스도에 대하여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와는 차원을 달리한 민족적 구원자로서의 메시야를 부르는 호칭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라 할 때는 이런 의미에서 해석했던 것입니다.

  (2) 그러나 제자들 역시 유대인들에 전통적인 메시야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다른 유대인들과 예수님에 대한 메시야관에 대하여 다른 점이 있었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여기지 않고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 하나로 여긴데 비하여 그들은 메시야로 인정했었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역시 메시야가 할 일에 대한 사역에 대해서는 다른 유대인들이나 인식이 같았습니다.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메시야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고 물어볼 정도로 민족 회복에 대한 정치적 메시야의 집념이 강했던 것입니다.

  결 론 : 올바른 신앙은 먼저 올바른 메시야관부터 정립되어야 합니다. 바른 메시야관이야 말로 믿음의 뿌리요 신앙고백의 첫 걸음입니다. 모든 이단이 바로 이 메시야의 신앙고백의 잘못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영적 체험 신앙을 통해서 확고한 메시야관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때부터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려면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적으로 바로 믿는 그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 46≈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본문 : 마가복음 8 : 31 - 34)

  서 론 : 주님은 베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고 하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매우 흐뭇해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 일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자신을 유대인들 앞에 메시야로 공개할 시기가 아니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는 이유로 사형언도를 내릴 것이기 때문에 아직은 그의 죽으실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입에서 자신을 메시야로서의 신분을 나타내시면 안되셨던 것입니다(마26:63-66).

  잠시 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결국 장로들과 대제시장과 서기관들의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셔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게 되었는데 이때 이 말씀을 곁에서 들었던 베드로는 재빨리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1.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고 하는 주님에 대한 고백은 완벽한 신앙고백은 아닙니다. 주님의 그리스도란 면에서만 바른 고백이었을 뿐,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는 엉뚱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을 심어주시기 위해 이시야의 예언을 들려주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르들과 대제시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같은 메시야의 사역은 메시야가 받을 고난과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메시야의 참된 사역은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그리스도처럼 영광의 주로 오셔서 이 땅위에 그의 왕국을 건설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 이사야로 예언하신 고난에 메시야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신원 미상의 하나님의 종의 고난은 장차 이스라엘에 나타날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 바로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가리킨 것입니다(사53:1-6). 적어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이 같은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고난을 당하신 이후, 그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제자들로 이 모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심으로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실제적인 교육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2) 이때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무엇을 간했다는 표현은 이곳에 나오지 않았지만 마태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16:22). 간했다는 단어는 책망하다, 꾸짖다, 비난 하다는 의미의 ‘에피티마오’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같은 표현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님, 그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선생님은 우리의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회복하고 이 땅위에 당신의 왕국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그처럼 약한 말씀을 하심으로 우리로 실망케 하시나이까? 뒤에는 우리가 있으니 힘을 내시고 메시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는 권고가 이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다. 이 같은 간언을 마친 베드로는 이제 자기야말로 주님께 보람있는 충언을 들였다고 속으로 흐뭇해했을 것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칭찬은 고사하고 대단히 격한 꾸지람을 내리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는 말씀으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경우처럼 사단이 베드로에게 직접 들어간 상태에서 사단의 조정에 의하여 한 말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지칭한 것도 아닙니다(요13:27).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이라고 부른 것은 베드로가 바로 사단이나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으로 영광의 메시야의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마4:8-9). 베드로의 간언이 왜 사단의 일이냐?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일은 그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메시야의 사역이 없이는 인류의 구원도 없고 장차 나타날 메시야 왕국의 실현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 앞에서 사단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단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베드로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며 모든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의 메시야관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이 같은 간언을 하게 된 것입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는 말씀이 그 해답이 되겠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인류의 구원이나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추후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회복이 그들의 급선무였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유도 이 같은 사람의 생각에 있었으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도 이런 생각에서였습니다. 메시야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일은 사단의 일입니다. 교회의 일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업은 사단의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책망은 제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 마귀에게 선언하신 말씀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런 사단의 소리는 다시는 하지 말라는 명령이시며 그 같은 간언은 메시야를 넘어지게 하는 일이 되므로 내 앞에서 떠나가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사건 이후 그들은 주님에 대한 사역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2) 이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불러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이 말씀을 이 시기에 하시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그의 기적, 그의 인기, 그의 권능은 이제 얼마 안되어 메시야 왕국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하였으며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오직 영광만을 생각한 나머지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실 것을 간구하기도 했습니다(마20:20-22).

  (3) 예수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처럼 그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초림의 예수를 영접하는 성도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로 주님의 길을 쫓아가야 하며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때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아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라고 표현하신 신분은 육신 적인 신분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 육신 적인 생각 때문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했습니다(롬8:8). 이 육신의 생각을 부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매일 죽노라고 한 말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의 생활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 같은 생활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로 가능합니다(롬8:13-15).

  그리고 “자기 십자가”란 자기가 짊어질 자기 인생의 고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특히 이 같은 고난은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 그에게 부닥치는 시련을 의미해 줍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내가 져야합니다. 이 십자가를 벗어버리고는 주님을 쫓을 수 없습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바울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저야 할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의 메시야적인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바른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메시야만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영광의 생활 많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주님을 생각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장차 나타날 그날에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 47≈            목숨을 얻는 일과 잃는 일

  (본문 : 마가복음 8 : 35 - 37)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제 35절 이하의 말씀은, 이 말씀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해 주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의 명예나 물질이나 인간적인 처세를 중요시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자신들의 육신 적인 생명보다는 덜 중요하며 그리고 사람들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참 생명에는 비길 수 없다는 뜻으로 교훈 해 주신 것입니다.

  1.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는 생명

  예수님이 하신 이곳의 말씀은 문장 적으로는 역설의 극치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한번 그 뜻을 깊이 음미해볼 만한 말씀입니다.

  (1)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제 목숨이란 육체적인 생명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제 목숨이란 단어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나 마음, 영혼 혹은 생명을 뜻하는 ‘프뉴마’가 아니라 육체적 생명 혹은 현재 누리고 있는 땅의 생명을 뜻하는 ‘프쉬케’를 말합니다. ‘푸쉬케’란 오직 이 땅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기 생명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조에’나 ‘프뉴마’와는 당연히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 목숨을 구원한다는 말은 자신의 육신 적 생활을 위주로 살아가는 생애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푸쉬케’를 위해 살아갑니다. 적어도 그들의 인생은 아무리 고상한 목표를 세우고 아무리 위대한 포부를 지녔다고 해도 그 궁극적 목적은 자기자신의 영광을 누리는 일에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고 해도 그런 일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광에 있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밝혀주는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생활은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이루고자 하는 생애를 말합니다. 육신의 사람이 잘 되려고 하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모두 자신의 정욕을 위한 생활입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의 정욕을 위한 생애를 보내는 한, 그의 모든 노력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인생의 최고의 지경에 이르렀던 솔로몬 왕은 그가 원하는 일을 다 성취한 후, 그 허무함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후에 내가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전2:10-11).

  (2) 잃을 것이라고 한 말씀은 참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잃을 것이라고 하신 생명은 ‘프쉬케’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조에’를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육체적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인즉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의 시대의 사람들이 바로 이 같은 생애를 살다가 멸망을 당했다고 경종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눅17:26-29). 이들의 생활은 온전히 ‘프쉬케’에만 목표를 두었습니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생활에 열심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잃는다고 하신 대상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의 기업을 말합니다. 이 땅위에서 누리려는 영화로운 자신의 생애는 결과적으로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의 기업의 상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중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하고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3:44).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애를 이 보화를 위해 살아갈 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신 것으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얻기 위해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는 ‘프쉬케’적인 생애를 버려야 할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2.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얻는 생명

  예수님의 역설적인 설명은 그 반대 입장에서도 적용 시키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제 목숨이라고 하는 이 ‘프쉬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원한 삶의 가치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구원받을 생명은 ‘프쉬케’가 아니라 ‘조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역설적인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육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생애를 살아야 할 것을 권면 하는 말씀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프쉬케’를 희생해야 할 대상에 대하여 “나와 복음을 위하여”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양심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또 사회에서 칭송 듣는 정의적인 일도 아닙니다. 이 같은 일이 아무리 고상하고 세상에서 높이 평가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프쉬케’에 속한 것이지 ‘조에’에 속한 일이 아닙니다. 오지 “나와 복음”을 위한 희생만이 영원한 생명을 이루는 가치를 가집니다.

  나와 복음을 위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이중적으로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복음을 하나로 본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일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일은 또한 복음을 위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의 상이 큼이라 너의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1-12).

  (2) 여기서 제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자기 희생을 뜻합니다. 잃는다는 말을 순교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순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죽는다고 한 그의 고백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날마다 자신의 ‘프쉬케’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프쉬케’의 생애를 보내면서 반면에 ‘조에’를 위한 생애를 동시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조에’를 위한 생애는 오직 ‘프쉬케’의 희생에서만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 적인 희생이 따르지 않는 영적인 열매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로마서에서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했습니다(롬8:5-6).

  결 론 :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천사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온 천하를 얻는 육신의 최대의 영광을 얻는다고 해도 만일 자신의 육신의 생명을 잃으면 그 같은 영광이 무엇에 소용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적의 생명과 대체할 대상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처럼 필요한 생명을 가치 없는 이 세상일에 사용하므로 그 생명을 잃어버리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 48≈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본문 : 마가복음 8 : 38)

  서 론 : 예수님은 이 시대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세대는 어느 역사적인 한 시점을 가리킨 말씀이 아니라 인류의 전 역사적인 과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인류의 총결산은 그 값을 치르게 될 날이 오게 되는데 그 날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오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날에 인류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바로 그날을 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날은 먼 훗날인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의 사람이건 바로 자신의 생애 앞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날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1.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예수님은 이 세대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타고 정죄 하셨습니다.

  (1)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사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생활에서 하나님을 내어쫓았습니다. 죄의 종의 자리로 스스로 타락하였고 죄의 길을 택하였으며 정욕과 탐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의 마음을 타락한 그대로 방임해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시고 그 결과 인간 사회에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능욕, 교만, 자랑, 배역, 무정, 무자비 등이 팽배한 사회가 된 것이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롬1:28-32). 성경에는 이 세대를 비유하기를 소돔, 애굽, 바벨론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계11:8).

  (2)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특히 종말에 살아가는 인류 사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대하여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은 노아 시대의 인류의 생활상이 음란하고 죄 많은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37-39).

  여기서 음란하다는 말은 인간 사회의 타락한 성도덕과 아울러 영적 음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도덕의 타락은 언제나 영적 진리의 타락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음란은 그 가운데서 빠져 나올 수 있지만 영적 음란은 좀처럼 돌이킬 수 없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등장한 음녀 이세벨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길을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계2:21). 진리를 버리고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도 회개하지 못하며 결국은 배도 자로 주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3)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표현은 이 세상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난 육신 적인 생활에 만족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음란이며 이 영적 음란이 우리를 영적으로 타락시키고 종말에는 적 그리스도와 손을 잡는 배도 세력으로 형성되고 세상을 혼취케 하는 음행의 포도주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4) 이 같은 사회가 바벨론 입니다. 인류의 종말은 이 바벨론 사회가 완전히 형성된 사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회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종 하십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으며 땅에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계18:2-6).

  2.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35절에 있는 말씀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잃는 제 목숨이란 육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육신은 영적인 생명을 추구하는 일에 헌신할 때 고귀한 것이지 그의 육적인 생활에 만족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갈 때는 가장 추한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자신의 참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일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을 믿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죄악이 세상에 관용한 세대입니다.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임을 떳떳하게 나타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빛을 발산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빛을 숨기려 하고 향내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 동화되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성결된 생활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의 구성원 속에 숨어 있기를 원합니다.

  이 같은 생활은 결국 사람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인하는 중대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어떤 어려운 여건이나 무서운 핍박이나 혹은 환난 가운데 처하게 될 때 주의 이름을 부인한다면 예수님도 그 사람을 아버지 앞에서 부인할 것이라고 경종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는 일을 꺼려합니다.

  (2)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결코 주의 이름을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서두에 있는 2,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기는 자”가 될 것을 권고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교회로서 크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나도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를 파수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이 종말에 이를수록 진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악랄한 방법이 동원됩니다. 온 세상을 음행의 포도주로 취하게 하는 음녀의 세력이 등장하여 금잔 안에 담긴 포도주로 취하게 합니다. 진리를 지키는 일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말씀 가운데 믿음으로 굳게 서서 그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죄악을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죄의 물결에 휩싸여 탁류에 떠내려가는 나약한 성도가 아니라 영으로 육의 사람을 죽이며 지배하는 생활로 육의 사람을 이기는 영적 생활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생활은 성령의 충만함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사모하며 순종하는 생활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이런 무장을 단단히 하고 자신을 지키고 사탄을 대적해야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결 론 : 모든 결론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올 때”  결판나는 것입니다. 이날은 주님의 재림의 날을 의미하면서 또 한편 마지막 인류의 심판 장소인 흰 보좌 심판대 앞에서의 심판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흰 보좌 심판대는 그 중간에 천년 동안의 천년 왕국의 기간이 개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마지막 심판의 시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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