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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
 밤중소리  01-08 | VIEW : 884


  ≈ 38 ≈               헛된 경배

  (본문 : 마가복음 7 : 1 - 8)

  서 론 : 예수님의 주변에는 유대인들로부터 파송 받은 일단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율법에 어긋난 범죄를 찾아내어 고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가르침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참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자신들의 교훈에 비해 권능 있는 사실에 대해 시기했습니다. 또한 가는 곳마다 자기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적과 기사를 이루고 이 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일이 못마땅했습니다. 더군다나 반 율법적인 행사로 모세의 계명을 어기는 이 목수의 아들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 데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날도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다 하여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아니한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께 항의한 것입니다.

  1. 장로의 유전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아니한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었다는데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같은 행위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마땅히 정죄 받아야 할 일이라고 책망했습니다.

  (1) 장로들의 유전이란 랍비들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유전이란 말은 ‘파라도시스’로 전수(넘겨주다)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말은 율법의 해석을 뜻하는 말입니다. 랍비의 가르침은 그들의 율법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석하지 아니했다는데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잘못 해석한 율법의 교훈을 율법과 동일시하여 그것을 그들의 일상생활에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훈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위치에 두었습니다. 이럭 것들이 전례 적으로 내려온 것이 곧 “장로들의 유전”이 된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같은 유전은 예수님에 의해 정죄를 받았습니다. 유전으로 내려온 그들의 교훈은 비 성경 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율법의 해석은 인간의 지식에 두었기 때문에 그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빗나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해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단도 실인즉 성경해석의 오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여행, 식사, 금식, 규례, 상거래, 이방인과의 교제 등에 있어서 율법에 따른 행동 규범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613개의 독립된 법령으로 세분하기에 이르렀는데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이 장로의 유전의 의해 지켜 온 것입니다.

  (3) 그러면 왜 장로의 유전이 이처럼 예수님의 정죄를 받기까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까? 그들은 의의 표준을 율법에 두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므로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의로운 생활을 하려면 율법에 따른 많은 세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많은 조문을 만들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지키는 생활을 강요해 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생활은 의식에 얽매이게 되었고 종내에는 외식하는 자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그들은 맹세에 대한 율법적인 해석을 예물로 규정했습니다.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나 ...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재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 도다 ”고 했습니다(마23:16-22).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영적인 경배다 눈에 보이는 의식적인 경배에 치중했습니다. 이 같은 오류로 인하여 많은 의로운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이르렀고 많은 사람들을 잘못 오도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죄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고 하셨습니다(마23:15).

  (4)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에게 지적 받은 죄는 결례의 관한 것이었습니다. 결례란 물로 씻는 규례인데 율법에 의하여 부정하게 된 자에게 이 같은 결례를 시행하므로 정결케 하는 의식입니다 원래가 물로 몸을 씻을 수 있는 이 결례는 몸에 유출 평이 있는 자, 설정한 자, 피를 유출한 여인과 접촉한 자 등에 대한 정결 법으로 시행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확대 해석하여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볼 때 그들의 결례는 분명히 비 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12:32).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6).

  2. 예수님의 책망

  율법의 제정자가 되시며 그 율법의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이 같은 장로의 유전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1)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존경하는 방법이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입술로 존경하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인즉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참 존경은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의 갈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침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경종이 됩니다. 이런 방법의 경배는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외식에 지나지 않았을 뿐, 그들은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식은 마음이 따르지 않은 형식적인 모양에 불과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이제는 우리가 얽매었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에 묵은 것으로 아니할 지니라”고 했습니다(롬7:6).

  결 론 :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경배는 헛된 경배였습니다. 헛된 경배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침으로 사람의 유전을 지키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배는 마음의 변화함을 받아 사랑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 39 ≈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본문 : 마가복음 7 : 9 - 23)

  서 론 :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유전을 책망하시는 중에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장로의 유전으로 내려오는 결례가 사람을 능히 깨끗케 할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자들에게까지 충격적인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1.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는 장로의 유전이 얼마나 비 율법적인가에 대하여 5계명을 해석한 교훈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명한 재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랍비들은 이 계명의 해석을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랍비들의 이 같은 가르침은 겉보기에 매우 타당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교훈은 결과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게 하는 원인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할 것을 가지고 부모님에 대한 공경을 포기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이런 일은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 것이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져버리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다시 부르시고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시면서 놀라운 교훈을 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이것은 결례의 무익함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물로 씻는 의식인 결례란 하나의 거룩을 표방하는 이스라엘만의 의식이었습니다. 율법에 규정된 부정한 일을 범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부정을 씻고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 결례라는 의식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양이나 염소의 피가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없는 것처럼 물로 씻는 의식이 사람에게 의롭다고 선언하는 거룩을 안겨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결례는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대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는 그림자로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수건에 쌓인 모세의 얼굴을 보듯 성경에서 실상과 증거는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 보았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약에 규정되어 있는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차별이 없어졌다는 선언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규정이 매우 까다롭게 나옵니다. 그러나 이 규정은 실상인즉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로 주변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의 생활의 성별을 시키므로 이스라엘로 성별된 생활을 하도록 하시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성별은 음식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참된 성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이루어집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정결한 음식을 먹는다하여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빌3:9).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음식이든 모든 음식은 부정한 것이나 정결한 것에 차별이 없다고 하신 새로운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대에 관한 구약적인 율법의 규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구약적 의식법이 폐해지고 “믿음으로 의”를 얻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도덕적 율법’과 ‘의식적 율법’으로 구분됩니다. 도덕적 율법은 인간과 인간과의 도덕적 규범으로 십계명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5계명부터 십계명까지를 말합니다. 이 계명은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영원한 도덕적 규범인데 예수님은 이 규범의 근간이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도덕적 율법을 폐하려 오신 분이 아니심을 스스로 증거하셨습니다(마5:17-18). 하나님이 율법에서 인간에게 주신 도덕적 계명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율법의 의식적 규정은 완전히 폐해졌습니다. 이 의식법은 죄속함을 얻는 제사 방법, 음식의 규례, 물로 씻는 규례, 제사법에 따른 여러 가지 의식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장차 올 일들에 대한 그림자로서 예수님께서 온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에 폐해진 것입니다(롬3:27-28).

  2. 사람을 더럽히는 것

  예수님이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 가셨을 때 제자들이 이 비유를 물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과 율법적인 조항에 얽매어 살아온 그들에게 예수님의 새로운 교훈은 깨닫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은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사랑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든 먹으면 그 음식은 배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배 안은 더럽기가 그지없습니다. 음식을 소화시키는 배 안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부정한 것이건 정결한 것이건 소화과정에서 똑같이 더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뒤로 나오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관데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모든 생각은 다 악합니다. 노아의 시대 사람들이 홍수 심판을 받은 이유가 이 악한 생각 때문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창6:5).

  결 론 : 예수님은 이 악한 생각을 몇까지로 나누어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셨습니다.

  ① 음란이라고 하셨습니다. 음란이란 난잡한 성생활을 말합니다.
  ② 도적질과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기, 절도, 강도, 부정한 방법으로 버는 수입을 말합니다. 살인은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 죽이고자 하는 마음 등입니다.
  ③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생각 속에 성에 관한 것이 무려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음란, 간음, 음탕 등입니다. 간음이란 부부가 아닌 남녀간의 성 관계를 말합니다.
  ④ 탐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말합니다.
  ⑤ 악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도덕을 파기한 생활을 말합니다.
  ⑥ 속임과 음탕이라고 하셨습니다.
  ⑦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믿음으로 새로운 변화를 받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해야 했습니다(마5:20).




  ≈ 40 ≈              응답 받은 한 여인의 간구

  (본문 : 마가복음 7 : 24 - 30)

  서 론 :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 특별히 우리에게 교훈이 될만한 경우에는 그 이적을 행하신 자세한 상황이 의미 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여자라고 하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지방에 살고 있는 헬라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나왔습니다. 예수님 앞에 찾아 나와 간구하는 이 여인의 재치 있는 말과 변함없는 의뢰와 응답의 확신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이 같은 이 여인의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본문이 기록된 것입니다.  

  1. 딸을 위해 간구한 이방 여인

  이 여인은 딸의 병으로 그의 마음이 몹시 상한 처지에 있는 어머니였습니다. 자기 딸에게 악한 귀신이 들려 어머니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여인처럼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더 중하여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막5:25-27).

  (1)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만날만한 때가 있습니다. 은혜도 받을만한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사55:6). “내가 은혜 받을만한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8:2).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소문을 들은 직시 예수님께 달려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고장을 지나치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상실해 버릴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차후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2)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들은 예수의 소문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면서부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믿음을 가지고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여인의 기도는 믿음이 없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여인의 기도는 중언부언의 기도도 아닙니다.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 여인의 기도의 태도가 바로 이 같은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3) 이 여인은 남다른 자녀의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좋은 어머니였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녀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겠지만 이 여인의 사랑은 더욱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 어머니들이 이 여인처럼 그 자녀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 나와 이처럼 간구한다면 그 자녀의 장래는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있을 것입니까?

  2. 기도를 거절하신 예수님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이러했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여기서 자녀라고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첫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신 말씀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룰 큰 민족이란 바로 이스라엘을 가리킨 것입니다(창12:2).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만을 축복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아닙니다. 3절에 가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스라엘 중에 약속의 자녀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과(롬9:6-8), 또한 이방인들 가운데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참 이스라엘입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10:16).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갈3:27-29).

  그런데 예수님이 이곳에서 자녀라고 말씀하신 것은 구약적인 의미에서 우선권을 가진 유대인들을 가리킨 말입니다(마22:1-10).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어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의 언약을 주셨고 그들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들려준 설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을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행3:25,26). 예수님도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남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4:22).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한다”고 하신 말씀도 이 같은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2)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개라고 표현하신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최상으로 여기고 이방인들을 멸시하는 의미에서 하신 뜻이 아닙니다. 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을 나타낼 때 사용했던 비유적인 멸시 어로 예수님은 다만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이처럼 인용하신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이 말씀은 이 여인에게 응답의 가능성을 배제한 듯이 보입니다. 만약 이 여인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실망하여 간구하기를 그쳤다면 그는 응답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짐으로 응답 받을 수 있는 기도를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응답의 기회가 전혀 없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한다”고 하신 말씀은 개들에게도 줄 수 있다는 암시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3)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 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아뢰었습니다. 이 여인의 이 같은 간구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사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은 결코 유대인들만을 상대로 하신 편협한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결코 좌절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무익함과 죄인 됨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어 더욱 겸손해 질 수 있었습니다. 더욱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인내로 주님을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결 론 : 이 여인의 이 같은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결국 응답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개처럼 취급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믿음을 보시려고 시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 41 ≈              에 바 다

  (본문 : 마가복음 7 : 31 - 37)

  서 론 :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바쁜 발걸음으로 이곳 저곳을 누비셨습니다. 두로 지경에서 나오신 후, 시돈을 지나시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안수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이 탄식에 스며 있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귀먹고 어눌한 자

  이 환자는 두 가지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귀가 먹었을 뿐 아니라 말의 장애까지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환자에게 특별하신 방법으로 안수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불행한 사람은 귀머거리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무엇 때문에 이곳에 끌려왔는지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좀 조용한 여건 속에서 그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를 알 수 있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주님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으셨습니다. 그 후에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이하신 행동에 다른 해석을 달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귀 먹고 어눌한 그에게 말로 하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시청각적인 방법으로 본인이 알 수 있도록 기도해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손이십니다. 그 분의 손가락이 귀머거리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의 귀는 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에바다 하시니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고 했습니다. 에바다란 말은 아람말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이 에바다는 예수님의 명령이십니다. 예수님이 에바다란 명령을 내리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탄식이란 말은 어떤 원통한 일이 있을 때 입에서 나오는 한숨으로, 예수님의 이 탄식은 이 사람이 겪고 있는 생의 비극에 대한 깊은 인간적인 동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2. 예수님이 탄식이 의미하는 것

  주님의 탄식은 귀먹고 어눌한 그 사람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이 탄식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1)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할 때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3:14-15).

  ①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 깨닫지 못할 때 탄식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고 하신 것은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이십니다(호4:6).

  ② 우준하고 무지한 자는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하나  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이십니다(시92:5-6).

  ③ 다음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게을리 할 때 깨닫지 못하는 영적 귀머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병거에서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지만 그 읽고 있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곳에 기록된 고난의 종이 예수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행8:26-39). 하나님의 종에게 나아와 말씀의 가르침 받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영적 귀머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입을 가지고도 전하지 못할 때 탄식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①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1:8).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②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일에 분주하여 주님을 위하여 시간 받치기를 아까워하지 때문입니다.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혜가 있어야 하는데 세상 욕망과 정욕과 탐심이 가득 찼기 때문에 입을 열었다하면 세상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사람들에게 탄식하십니다.

  ③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하늘의 상급을 모르기 때문에 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셨습니다(단12:3).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안수를 받아야 합니다. 에바다의 명령을  받아 우리의 귀머거리의 귀를 열고 어눌한 혀를 풀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경계

  예수님은 이 귀머거리와 어눌한 자에게 안수하심으로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어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계하셨습니다. 이 경계에는 다음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1) 한가지는 예수님은 메시야로서의 소문이 퍼지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국을 당장에 세울 영광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예수가 메시야로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운동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6:14-15). 예수님은 물론 메시야의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메시야적 사명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있으셨습니다.

  (2) 다른 한가지는 예수님은 이적을 보고 자신을 따르는 일에 대하여 못마땅히 여기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고전1:22-23). 예수님께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2:39).

  결 론 : 그러나 이 일로 예수님의 소문은 더욱 많이 더욱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경계할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귀머거리 된 우리의 귀가 열리고 어눌한 펴가 풀릴 때 우리의  그 귀로 듣고 입으로 전파하는 복음이야말로 더욱 널리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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