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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밤중소리  01-08 | VIEW : 464

  ≈ 32 ≈            고향에서 배척 당하신 메이야

  (본문 : 마가복음 6 : 1 - 6)

  서 론 :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그의 고향 방문은 개선 장군의 모습이 아니라 이상히 여김을 받는 바 되어 가장 환영 받으셔야 하실 분이 냉담한 대우를 받으시고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봄에 있어 그를 누구로 보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알았으므로 목수의 아들로 보았고 요셉의 대를 이은 목수 예수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근본을 이처럼 그의 태어나신 가정이나 직업이나 환경에 결부시키면 예수는 메시야의 자리에 머무실 수 없었습니다. 나사렛 사람의  배척은 바로 이 같은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1. 이런 권능이 어찜이뇨?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중에 고향으로 내려가신 일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고향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간 떨어져 있었던 가정도 살펴보실 겸 찾아가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안식일에는 부모나 형제들과 함께 회당의 예배에 참석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매우 지혜로우셨으며 성경에도 능통하셨기 때문에 회당에서도 동리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모범적인 청년이었습니다(눅2:52).

  (1)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순서에는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회당장이 지적한 사람에게 읽도록 하고 또 그 사람으로 말씀을 강론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습니다. 그곳 회당장은 예수님이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소문을 들었고 또 자기도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지적하여 말씀을 강론하도록 배려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언제나 안식일이면 회당에 가셔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강론을 하시곤 했습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많은 사람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고향에 있는 이들이 놀란 것은 그 말씀에 위엄과 침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심에 무리들이 그 가르침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마7:29). 그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가 그저 평범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의 돌연한 변화는 환영 대신에 고향사람들의 이상히 여김을 받아 배척을 받게된 것입니다.

  (3) 이 지혜와 이 권능이 어찜이뇨?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롭게 가르치셨습니다. 아직까지의 그들은 그같은 권위 있는 말씀을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곳에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권능도 행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기이히 보인 것입니다. 만약 이 같은 권위 있는 말씀과 주의 권능을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하셨다면 큰 환영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누구나 이상스럽게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그들은 주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시고 권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이상히 여긴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고 말하면서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인 근본에 대하여 그들은 너무나도 상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이요 뛰어난 지혜로 말씀을 가르칠 만한 위인도 못되고 더군다나 귀신을 쫓는 권능이나 병자들을 말씀으로 치료하시는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선지자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이 예수는 너무나도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일이 그들에게 수용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아들로 나온 것은 아버지 요셉이 이미 죽은 이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수가 아니냐고 말한 것은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이곳 나사렛 땅에서 목수 일을 하고 계셨음을 말해 줍니다.

  (4)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어떻게 판단하건 인간의 생각과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얼마안가 예수를 떠나게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초두에서 예수님의 근원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의 모습만을 찾으려면 예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입니다(요1:14). 예수로부터 하나님의 모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사람이신 예수를 믿기 됩니다. 이들은 다만 예수를 훌륭한 인격자 예수, 인도주의자 예수,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 예수로 바라보고 존경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예수를 알되 그의 근본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사람이 오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2.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으신 예수님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은 마음으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의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자기 친척들과 자기 집에서조차 배척 당하신 서글픈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그 당시 널리 인용되어온 속담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엄위가 있으며 능력과 권능을 행하는 데 자기 고향에서는 가까이서 오랫동안 너무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존경심을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는 아무 것도 행하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받을 줄로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예수님이 위로를 받으신 일은 얼마간의 믿음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쳐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데교회가 전혀 소망이 없는 것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그러나 사대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시리라”고 하셨습니다(계3:4). 그 몇 명 때문에 주님은 사데교회를 멸하지 아니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나사렛에서도 주님을 영접한 이 소수의 무리들 때문에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길이 좁고 협작하고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곳 사람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주님께서 놀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친히 듣고 친히 보는 바인데 어찌하여 믿지 못하는 것인지, 그들의 마음에 완악함을 인하여 탄식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이처럼 나타낸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믿음에서 오는 귀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 33 ≈             전도인의 자세

  (본문 : 마가복음 6 : 7 - 13)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인의 사명을 주셔서 각 고을로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 대한 전도 훈련인데 여기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내실 때마다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으로 불쌍히 보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를 열망하시는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고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35-38).

  1. 전도인으로서의 권세를 주신  

  예수님은 12 제자들을 불러 둘 씩 쌍쌍이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1) 두 명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둘은 증인의 수효입니다. 복음의 증거는 증인에 의해 전달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복음의 증인들입니다. 증인에게는 다른 또 한 명의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한 명의 행동은 불안하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서로 보충하고 합력하여 기도하고 위로해 주는 일은 복음 전도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2)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권세를 말합니다. 신약성경에 특히 귀신에 관한 기사가 많은 것은 그 당시 귀신에 눌려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때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는 특별한 권세입니다. 주님이 친히 주신 명령적인 권세였으므로 그들이 전도인으로 보내심을 받아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권세입니다. 이 같은 권세가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지속된 것은 아닙니다(막9:18). 마지막 환난 시 등장하는 두 증인은 1260일의 전 3년 반기간 불사신의 권능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한다고 했습니다(계11:1-7).   지금도 전도인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이 같은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가 성령의 권능의 역사이기 때문에 병을 치료하시는 권세가 성령에 의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같은 권능을 합법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이나 여러 가지 권능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의 복음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곳에 자랑이나 명예나 재물이 개입된다면 그런 일은 불법적인 일로 주님의 준엄한 문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7:22-23).

  2. 여행을 위한 도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자가 지니고 다녀야 할 것과 갖고 다니지 말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이며 신만 신 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행이란 말은 원어에는 도로란 말과 같은 낱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여행은 길을 떠나는 일이기 때문에 도로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도 역시 길을 떠나는 여행에 비결 수가 있습니다.  (1) “양식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생활습성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인들이 이 같은 양식문제에 염려하다 보면 맡은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인들에게 먹을 양식을 예비하십니다. 전도인은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일꾼이 삯을 받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2) “주머니나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머니란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여행용 가방을 말합니다. 전대의 돈은 여행에 사용하려고 챙긴 돈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거침돌이 되기가 쉽습니다. 이런 일에 집착하다 보면 복음 전파에 소홀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같은 명령은 그들의 모든 일을 주님이 친히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전제하신 말씀입니다.

  (3)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벌 옷이란 중동 지방은 주, 야의 기온 차이가 심하므로 밤에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하는 일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행자로서 필요한 것은 신과 단벌 옷과 지팡이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을 신지 않고는 여행을 떠날 수 없습니다. 옷을 걸치지 않고는 밖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지팡이가 없이는 사막에서 만나는 독사나 해로운 짐승으로부터 방어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전도자가 이런 모든 일에 마음을 쓰고 부족한 것이 없도록 준비하려면 맡은 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 하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눅9:62).

  3. 목적지에 가서

  예수님은 전도자가 그 전도지에 가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어느 곳에 가든지 한곳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인을 영접한 가정은 복 받을 가정입니다. 그곳에 유숙하고 있는 전도인들은 그곳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유숙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자들이 덕스럽지 못한 일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권능을 행하고 많은 무리들이 따를 때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부요한 가정의 초청을 거절하지 않고 응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일을 삼가야 할 것을 엄중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어떤 대접을 받던 감사히 받으면서 끝까지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2) “전도자를 배척하는 곳에서는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고 너의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거역한 지방에 대하여 주님은 화를 선언하셨습니다(마11:20-22). 복음은 구원을 얻을 사람들에게나 멸망 받을 사람들에게 다 같은 향기를 풍깁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라”고 했습니다(고후2:15-16).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란 말은 그 당시 나그네 영접하기를 싫어하는 집에 대한 저주의 뜻으로 했던 관습으로 보입니다.

  (3) 제자들이 파송되어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 복음은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회개 없이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냈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말씀의 권능 앞에 소리를 지르며 쫓겨 나갔습니다. 많은 병자에게도 기름을 발라 고쳤다고 했습니다. 기름이란 올리브유나 감람유를 말합니다. 이 기름에 대하여 그 당시 유대인들은 몸 속에 깊이 스며들어 사람들에게 힘과 건강을 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지금 말하는 민간요법의 한 방편으로 사용한 의료행위였습니다. 그에다 기름은 종교적인 의미도 포함돼 있어서 병자의 치료에나 안수기도 시에 기름을 바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 론 : 사도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헬라인이 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롬1:14-15).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이 같은 바울의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전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전도의 사명을 이루는 일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마10:8).
144 \ 마가복음 주석 설교



  (본문 : 마가복음 6 : 14 - 29)

  서 론 : 세례요한에 관한 기사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요한 이야말로 메시야에 앞서 그를 증거하는 마지막 선지자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활동과 그의 생애의 최후를 바라보면서 그의 너무나도 험난하고 어려웠던 인생 길에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주신 사명대로 이 세상에 왔다가 그 사명을 온전히 마치는 것으로 그의 인생을 마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한 생애를 보낸 복된 선지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아마 그의 마지막 운명을 구하는 시간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 같은 심정으로 기뻐했을 것입니다(딤후4:6-8).

  1. 헤롯에게 들린 예수의 소문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복음 활동은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와 세례요한의 활동은 겹쳐지는 기간이 얼마간 있었지만 예수님의 적극적인 활동에 따라 세례요한의 빛은 차츰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언젠가 이처럼 그의 제자들에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1) 예수님의 행적이 헤롯왕에게 들렸습니다. 여기 나오는 헤롯왕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통치하던 대 헤롯이 사마리아 여인 ‘말디스’에게서 난 아들로 그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었던 ‘해롯 안디바’를 가리킵니다. 분봉왕이란 로마의 분할된 영토 중의 한 지역의 지배자로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고 치리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세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 헤롯왕은 자신의 불의한 일로 의로운 세례요한을 죽인 죄로 인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과 기사이적을 행하시는 소문에 겁을 먹고 놀랬던 것입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여러 가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고 말하기도 말했습니다. 엘리야란 말라기가 예언한 선지자로 이 예언은 세례요한에 관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을 잘못 평가한 것입니다(말4:5-6, 마11:14). 어떤 이는 이가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실 분으로 모세가 율법에서 증거한 그 선지자이기는 하지만 이에 선지자 중의 하나 같다고 말한 것은 주님을 잘못 평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그들보다 더 엉뚱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죄인은 본능적으로 어떤 보복의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헤롯은 정신 분열증에 걸린 환자처럼 의로운 세례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하여 신의 보복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2. 헤롯에 대한 세례 요한의 책망

  헤롯의 조부는 에돔 사람으로 일설에 의하면은 할례를 받고 유대교에 위해서라면 어떤 악랄한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을 속여서 자신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가겠노라고 하여 그 아기를 죽이려는 음흉한 계획을 꾸몄던 이자는 동방박사들이 꿈에 지시를 받아 다른 곳으로 본국에 돌아가자 베들레헴 지역에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전부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이 자가 사마리아 여인인 ‘말디스’로부터 얻은 아들로 ‘헤롯 안디바’입니다.

  (1) 이 헤롯은 패륜적인 결혼을 한 까닭에 세례요한의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헤롯이 그 당시 데리고 살고 있는 아내 헤로디아는 원래가 자신의 배다른 동생이 되는 ‘헤롯 빌립’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주후 29년경 팔레스타인 연안 도시에 살고 있는 동생 헤롯 빌립을 방문했을 때 서로 불륜의 사랑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이때 헤로디아는 헤롯왕의 아내 ‘아레타스’(나바레아왕의 딸)를 추방한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약속하였고 헤롯은 자기 아내를 추방하므로 결혼이 성사되어 자신의 아내로 삼아 살아오고 있었던 처지였습니다. 이 같은 일은 율법에서 정죄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타기 받을 만한 패륜적 행위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왕궁으로 헤롯을 찾아가 이 같은 왕의 죄악을 지적하여 책망했던 것입니다.

  (2)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위하여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이 요한을 죽이지 않고는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뿐 아니라 또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헤로디아는 이 세례 요한을 남편으로 하여금 옥에 가두어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패륜적 행위에 대하여 선동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세례 요한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왕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이날이면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큰 연회가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헤로디아는 이때 자기 남편이 술에 취하여 흥겨워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기회를 포착하면 세례 요한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로디아는 한창 흥이 돋구는 그 시간에 전 남편에게서 태어난 딸 ‘살로매’를 연회석에 들여보내어 헤롯이 좋아하는 특이한 춤을 추게 했습니다. 과연 헤로디아의 예견대로 헤롯은 대단히 즐거워하면서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리라”고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딸의 말을 들은 헤로디아는 왕에게 급히 들어가서 세례 요한의 목을 소환에 담아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고 시켰습니다. 왕은 자신의 맹세와 또 그곳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인하여 시위병을 통하여 옥에 가서 세례 요한의 목을 가져오도록 명령하게된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는 간교한 계집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3. 세례 요한의 죽음이 뜻하는 것

  이처럼 세례 요한의 마지막은 한 음탕한 계집의 계략에 의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례요한의 죽음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1) 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특별한 사명자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빛이 아니라 이 빛에 대하여 증가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요1:8). 그의 사명은 메시야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었으며 예수님을 세상에 들어 내 놓는 사명을 이룸으로 그의 할 일이 다 끝난 것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습니다. 그가 무엇인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계속한다면 그는 메시야되신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2) 요한은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하나님께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위대한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십자가에서 죽어서도 안되고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혼돈 될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헤롯왕을 예비해 놓으시고 불의를 책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헤롯의 칼날에 순교 할 수 있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결 론 :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세례 요한은 가장 짧은 생애를 메시야를 증거하는 일에만 헌신하고 보람있게 죽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생애를 본받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 35 ≈             무리를 불쌍히 보신 예수님

  (본문 : 마가복음 6 : 30 - 43)

  서 론 :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항상 큰 무리들이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권세 있는 말씀과 메시야일는지도 모른다는 호기심 때문에 무리가 군중을 이루어 뒤따른 것입니다. 옹위하는 무리들이 많으니 주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자연히 분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자리를 옮기셨지만 그들도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한적한 들판에는 예수님을 둘러싼 많은 군중들로 가득 찼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참으로 놀라운 잔치가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1. 무리를 목자 없는 양처럼 보신 예수님

  예수님은 큰 무리가 따르는 것을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1) 주님은 왜 그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는가? 양은 자기 목자에 의해 키워집니다.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 꼴을 먹고 출입합니다. 인생은 아담이 에덴에서 범죄한 후 그의 생명을 보장해 주고 인도해 줄 영원한 목자를 잃었습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사망의 길을 해 매이다가 시랑의 밥이 되어 죽어 갑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겔18:4).

  (2) 예수님은 친히 이 같은 인생의 목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시면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11). 예수님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이전에는 인생의 참 목자가 없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0:8). 양의 문이란 양의 우리의 문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양의 우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시고 그 무리들로 자기 양으로 삼으시고 양의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문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가 아니면 그 우리 안으로 절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에 주고 있습니다(행4:12). 그러므로 우리의 문이 되는 인류의 목자가 예수님보다 먼저 올 수는 없습니다. 먼저 온 자가 있다면 그자는 절도요 강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인하고 진리를 거역하는 무리들이 양의 목자인양, 양을 유혹하지만 이들은 실인즉 양의 생명을 죽이는 절도요 강도들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대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1-2). 이들 절도요 강도의 무리들은 양의 생명을 위하여 우리 안에 들어온 자가 아니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인 것입니다(요10:10).

  (3)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양들을 위해 그 목숨을 버리신 목자”이십니다(요10:11). 우리는 그 당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닌 길 잃은 양 같았습니다. 생명의 길을 잃고 제각기 그릇된 길로 갔었는데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시어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사53:6), 예수님의 목자 적인 사명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고 했습니다(벧전2:25).

  목자로서의 예수님은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십니다(살후3:3, 유24). 또한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의 양 무리의 이름을 친히 부르시며 인도하십니다(요10:3).

  2. 오병이어의 기적

  잠깐 쉬기 위해 한적한 곳에 이르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찾아오는 사람의 무리들로 인하여 쉴 겨를도 없었습니다. 마침 때가 저물어 갈 때였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주님의 곁을 떠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곳은 한적한 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냥 보내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 지쳤습니다. 걱정이 된 제자들은 주님께 가까운 동리로 가 음식을 사먹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의 뜻을 헤아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바를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요6:5-6). 예수님은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라고 건의하는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려는데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많은 무리들을 먹이는 일은 그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고 하는 말과 “우리가 가서 일 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고 하는 빈정대는 어투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 중에 이 일을 하실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같은 일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하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했습니다.

  (2)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보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주님께 무엇인가 바칠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인가 바칠 때 그 바친 손길에 내려 주십니다. 십일조를 온전히 바칠 때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십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디선가 덕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어떤 한 아이가 안드레를 통해서 주님께 드려진 것입니다(요6:8-9).

  예수님은 그 떡과 물고기를 가지시고 무리를 앉히신 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축사하셨다는 이 축사란 말은 ‘율로게오’로 축사란 말 외에 축복하다, 복을 빌다라고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축사는 주님께 바친 그 제물을 위한 축복기도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제물이 이처럼 주님의 축복기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정성으로 드리는 재물에는 이 같은 주님의 축복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이 축사를 통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창조하셨습니다. 혹 백씩, 혹 오십씩 떼를 지어 앉은 무리들은 이 기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축복의 두 가지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있는 바를 받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다른 이에게 나눠주는 일입니다.

  결 론 : 주님의 기적은 많은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신대서 만들어졌습니다. 자기 생각에 따라 아무 때나 기적이 창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를 의뢰하고 그를 따르면 주님이 우리의 길을 형통케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축복은 충만한 축복입니다. 그 많은 군중들을 다 배불리 먹이고도 12바구니가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남는 축복입니다.




  ≈ 36 ≈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예수님

  (본문 : 마가복음 6 : 45-46)

  서 론 :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46절에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많은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은 이 무리들의 큰 동요를 보시고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내신 후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때때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오르셨는데 그 여러 형태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병이어 사건의 여파

  저녁 녘에 들판에서 벌어진 잔치는 그 잔치에 참여한 많은 무리들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게 되었습니다. “떡을 먹은 남자의 수효”만 5천명이었으니 이들은 가히 큰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이들이 큰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6:14-15).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그 큰 무리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킨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인이 된 남자의 수효만 5천명이라면 굉장한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같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야말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아임이 틀림없으니 그를 임금으로 삼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의 기도이며 폭동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관에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단일신론(單一神論)자들입니다. 단일신론이란 하나님을 단일 신으로 보는 신관입니다. 이 신관은 하나님의 3위를 부인합니다. 더군다나 삼위일체란 말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으로 판단합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그 단일신인 하나님만을 인정할 뿐, 한 하나님으로서의 아들, 한 하나님으로서의 성령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성경적인 많은 모순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눅24:20). 이스라엘은 그들의 메시야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신18:15). 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면 그가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으로 알았습니다(눅24:21, 행1:6). 그들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야 말로 하나님의 세우시는 영원한 왕국의 왕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단2:44). 그러나 이 같은 그들의 메시야관은 성경의 한 단면만 바라보는 오류에서 나온 것입니다. 메시야란 창세기 3장15절에서 밝혀주고 있는 대로 인류의 구속을 위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분을 말합니다. 그는 대속의 제물로 오실 메시야요, 타락한 인류의 생명의 구속자로 오실 메시야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메시야이십니다.

  (3)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억지로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이제 의심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의 교훈으로 보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보나 성경에 언약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할 일이란 이제 예수를 왕으로 세우면 이 땅위에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의중을 아시고 긴급히 조처를 취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무리들과 합류하면 안되겠기에 그들을 벳새다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각기 자기 집으로 가도록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신 것입니다.

  2.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벳새다로 가시지 않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이유는 무리들을 흩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제자들 함께 뱃새다로 가신다면 그들 무리들도 함께 딸아 나섰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는 이 일이 인간적인 하나의 큰 시험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마지막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간구하신 뜻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고난 없이 인류를 구속하실 수 있거든’이란 의미가 되겠습니다(눅22:42). 예수님도 그의 인성으로는 사람이신 지라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셨을 때 이 같은 생각이 그를 유혹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시험을 이기시기 위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봅니다.

  (1) 예수님은 중요한 일에 봉착할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12제자를 선택할 때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고”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눅6:12-13). 산상 설교를 하시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기 전에도, 공생애에 들어가셨을 때에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중 오랜 시간을 기도하시는 일에 보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중에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위기가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도 기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근심이나 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우리에게도 우리의 생애에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오랜 시간에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은 새벽 일찍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을 살펴보면 우리도 어느 때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일찍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새벽기도회를 갖는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의 유래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막1:35). 한날에 처음 시간을 주님께 바치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이란 아름다운 일입니다.

  (3)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라고 했습니다(눅6:12).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입장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버지께 기도하셔야 할 입장이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종으로 낮추셨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당하셔야 할 모든 일에 기도로 하나님의 도심을 받으셔야 하셨습니다(히5:7).

  (4)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라고 했습니다(눅22:39). 예수님께는 기도가 그의 생활에 없으면 안될 하나의 습관이 되신 것입니다. 기도야말로 우리 신앙 생활에, 몸에 깊이 익혀야 할, 그래서 하나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항상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결 론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했습니다(히12:2). 예수님의 하신 모든 일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본으로 삼으라고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에 나타난 적은 일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기도하심으로 문제 앞에 나가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기도를 본받는 생활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37 ≈             내니 두려워 말라


  (본문 : 마가복음 6 : 47 - 56)

  서 론 : 주님을 뭍에 두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벳새다로 가는 그들의 항로는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거슬림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항로는 마치 바다에 배와 같습니다. 배는 지극히 적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다는 매우 넓고 언제 사나운 바람이 불어닥쳐 파도가 배를 삼킬는지 모릅니다. 모든 인생은 누구도 목표하는 항구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 배에 동승하셔서 길잡이가 되어 주셔야 소망의 항구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괴로이 노를 저었지만 바다는 잔잔하지 못했습니다. 배는 점점 위험에 빠져들어 갑니다. 제자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1. 산에 계신 예수님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괴로이 노 짓는 것을 보셨다”했습니다.
  (1) 산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을 보여 주십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하늘의 지성소에 올라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히7:15-25). 대제사장의 직분은 1년에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희생제물을 드리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영원한 희생제물로 삼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롬8:34).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있는 그가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 그는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우리의 연약을 아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닻이 되십니다. 지금 우리와 주님은 끊어져 있는 사이가 아닙니다. 영혼의 탓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6:19). 배에 매여 있는 닻은 배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배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배를 풍랑에서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닻 같아서 우리를 놓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견고히 붙들어 주십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명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닻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일을 아시고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도 그것을 하나도 모르심이 없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입니까?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시139:1-4).

  (4)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장 어려운 시점에 처했을 때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밤 사경이란 새벽 3시 이후로 아침을 맞이하려는 어두운 새벽녘을 말합니다. 이 시간은 우리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말해 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함께 하시기 우리가 만나는 환난 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다음 말씀을 기억하여 시험 중에 힘을 얻어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고전10:13).

  2.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물위로 걸어서 그들 앞에까지 오셨지만 그냥 지나치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사를 무시하고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를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가 들어오시도록 우리가 문을 열어 들여야 합니다. 주님은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계3:20). 우리는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여 부를 때 주님은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시50:15).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내가 시험 중에 있을 때, 어려운 환난 중에 있을 때, 이런 시기가 예수님을 찾아야 할 가장 시급한 시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심하라는 말씀은 다만 위로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문제의 해결자가 아니면 안심하라는 위로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주님의 안심하라는 말씀은 이제 문제 해결자가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심은 우리의 모든 걱정과 염려를 맡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내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내 문제의 해결 자로 내게 오셨음을 믿는다면 이제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너의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벧전5:7). 권고란 말은 돌보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3) 예수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대적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조건과 환경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두려움을 안겨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언제나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듣고 낙심한 회당장에게 주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막5:36). 나사로가 죽은 무덤에서 “죽은지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하는 마르다의 절망적인 비탄에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말씀으로 마르다의 두려움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4) 예수님이 이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쳤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사납게 불던 바람도 예수님의 권능에 굴복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창조물을 당신의 뜻대로 섭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 하나 주님을 거역하거나 거슬릴 수 없습니다. 그 주님의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관계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하실 진데 이루시지 못하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담대히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빌4:13).

  결 론 : 이 일로 제자들은 마음에 심히 놀랬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 예수님이 그 많은 군중들에게 떡을 떼어주신 이를 바라보고서도 이 같은 일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가 가지신 권능과 창조적인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모든 그의 권세를 가지고 나를 돌보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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