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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8,855



  ≈ 147 ≈       천국에서 큰 자


  (본문 : 마태복음 18 : 1 - 4)



  서 론 :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주님께 물어 볼만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천국에 올라갈 사람들인데 그곳의 생활을 전혀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과연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크냐는 문제는 우리의 흥미 있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점점 가까워지자 제자들은 그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메시야 왕국이 눈앞에 다가온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 나라에서 과연 자기들 중에 누가 큰 자가 될 것이냐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나라에서 제가끔 큰 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주님께 물어 보기로 하고 주님께󰡒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고 묻게 된 것입니다.


  1. 어린이와 같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 같은 질문에 대하여 누가 천국에 들어갈 자이며 누가 천국에서 큰 자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대답이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궁금해한 대답에 대하여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1) 어린아이란 육체적인 신체적인 요건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란 말은 ‘네피오스’로 이 말은 천진난만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이란 어린아이들의 성격적 특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어린이 란 말은 죄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다만 그 죄의 깊이나 부피가 어른과 같지는 않지만 그들도 의인은 아니며 더욱이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에게 내려온 원죄에 대해서는 어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2. 어린아이들의 성격적 특성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할 성격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특성을 지니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 어린아이의 특성이란 무엇보다 교만함을 모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특수층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아닌 대다수의 어린이들은 그들의 성격이 교만하지 않고 온유하며 겸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하다는 말에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① 겸손이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각기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죄도 없고 인격도 훌륭하고 성품도 좋은 것으로 자부하려고 하는 못된 성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 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들보를 빼리라”(눅6:42). 우리는 늘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② 겸손이란 남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법은 교만한 자를 물리차고 겸손한 자를 높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③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참으로 무익한 종임을 아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일을 한 후에 이에 대하여 자랑을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눅17:10)

  (2) 어린아이들의 성격적인 특성이란 쉬 뉘우친다는데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뉘우치는 일에 빠릅니다. 어른들처럼 숨기거나 변명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죄를 뉘우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에 대하여 뉘우치는 회개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련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죄에 대하여 회개할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뉘우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죄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독소이건만 우리의 육체는 이 죄와 친숙해졌기 때문에 좀처럼 그 올무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폼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우리의 이런 결연한 태도는 나의 무서운 죄로 말미암아 젊어지신 주님의 십자가롤 바로 바라볼 때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죄 값의 두려움을 알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취할 태도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주었습니다. 하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하였고, 다른 하나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3)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마음의 밭이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드립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7).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아직 죄로 인하여 단단한 길가를 이루지 아니했습니다. 아직 돌밭도 형성되지 않고 있습니다. 재리의 유혹을 상징하는 가시밭도 아닙니다. 씨를 뿌리면 뿌리는 씨대로 그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의심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의 마음속에 참 생명의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심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심는 대로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서로간 시기와 질투와 반목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각기 높아지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무를 것이라는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잡수실 때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어주신 그 겸손함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보람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를 보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 148 ≈       실족케 하는 자의 죄


  (본문 : 마태복음 18 : 5 - 10)



  서 론 : 남을 실족케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으로 범죄케 하는 일을 말합니다. 실족케 한다의 ‘스칸달리조’란 말의 뜻은 걸리게 한다, 넘어지게 한다, 범죄케 한다는 의미로 이것은 그 행위에 있어서 고의적인 뜻이 들어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유혹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한다든 가, 이단으로 이끌어 생명의 길에서 떨어지게 한다던가, 거짓 진리로 속여서 잘못된 길을 가게 하는 일 등은 다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1. 실족시키는 대상


  예수님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냐 라는 제자들의 물음에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셔 어린아이와 소자를 혼돈하기 쉽지만 이 두 단어는 같은 뜻이 아닙니다.

  (1) “어린아이”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문제에 대하여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 앞에 세워둔 어린아이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어린이들도 어른들과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토대로 하여 어린이들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에 포함되어야할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린아이를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그 어린아이에게 예수님의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소자” 예수님은 어린아이에게 관한 말씀 끝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소자란 말은 먼저 말씀하신 어린아이와는 구별된 말입니다. 주님이 나를 믿는 이 소자라고 하셨을 때 주님은 그 곳에 있었던 주님을 따른 무리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소자란 말의 ‘미크로스’는 어린아이처럼 보잘것없이 보이는 존재를 가리킨 말입니다. 이들은 생명의 길을 걸으려고 걸음마를 시작한 연약한 심령들입니다. 이들은 외부적인 유혹이나 작용에 의하여 쉽사리 넘어질 수 있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입니다. 이들을 어떤 이유에서이건 실족시키는 일은 차라리 그 사람의 목에 무거운 연자 맷돌을 매달아 깊은 바다 가운데 빠뜨려 버리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을 믿음에서 실족시키는 일은 그 사람의 참 생명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죽이는 죄보다 더욱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 소자를 실족시키는 일


  실족시킨다는 말은 고의적인 뜻이 들어 있습니다. 거짓으로 또는 어떤 계책으로, 속임수로 신앙이 연약한 사람으로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이 죄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영적인 살인 행위이기 때문에 극악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다음 네 가지 사항을 명심해야 합니다.

  (1) 우리는 다른 사람을 죄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비록 적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죄로 유혹 받도록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술을 많이 마심으로 부주의하여 벌거벗은 몸으로 자게된 것이 그의 아틀 함으로 하여금 죄의 킬로 유혹을 받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많은 함의 자손들이 저주를 받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신앙적인 본이 안 되는 일로 인하여 다른 사람으로 실족시키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종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의 모든 행실이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선한 일에 열심을 품고 덕을 세우며 다른 이에게 칭찬을 받을만한 행실을 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혹 잘못된 성경지식으로 다른 사람으로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올바른 교리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성경에서 증거하는 진리란 어느 한 구절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참된 증거에서 진리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 경홀히 여기게 함으로 실족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며, 생명으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존귀하게 여기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듯한 행동을 취함으로 그 사람으로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3. 죄에 대한 우리의 결단력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죄의 중함을 여러 차례 경종 하셨습니다. 이 죄는 세상에 화를 불러오는 죄라고 하셨습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을 실족케 하는 범죄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그렇지만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인하여 실족함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돌이키게 하심으로 다시 일으키심을 받을 수 있는 소망이 있지만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한 사람은 그 보응을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남을 실족시키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죄를 결연히 끊어버리는 결단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손이나 발이 범죄케 할 때에, 예수님은 몸의 한 부분이 범죄 했을 때 그 부분을 짤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온전한 몸으로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액면대로 받아 드릴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비유이신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롬6:11)는 말씀이 바로 이 비유에 해당되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버리려면 이 같은 결단력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은 눈이 너희로 범죄케 할 때에는 눈을 빼어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어찌 눈에서 나올 것인가? 마음에 있는 더러운 것이 눈올 통하여 범죄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뽑아버린다고 죄에 대한 용서가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이행해야할 회개에 따르는 결단력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회개란 이처럼 죄를 끊어 버리는 실행력이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삼가 이 소자 중에 그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연약한 심령들을 주님의 심정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말씀하심으로 그들도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저희 천사란 말은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에게 천사가 딸려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부리시고 계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까지라도 이들 소자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돌보는 책임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형제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고 그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존귀히 여기는 생활올 해야 합니다.





  ≈ 149 ≈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


  (본문 : 마태복음 18 : 12 - 14)



  서 론 : 소자의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우리 주님은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심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신 잃은 양의 경우는 너무나도 유명하신 말씀이십니다. 모든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아마 이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은 목자가 없을 정도로 우리의 귀에 익숙한 말씀이십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일 백 마리의 양파 한 마리의 양을 대조적으로 등장시키셨습니다. 일 백 마리란 한 교회의 온전한 교인 수효를 가리키신 것이고 잃은 한 마리란 목자를 잃은 양이며, 길을 잃은 양입니다.


  1. 누가 잃은 양인가?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심정을 살펴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한 마리의 양에게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잃은 한 마리의 양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1)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미혹을 받아 생명의 길을 이탈한 소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죄의 유혹을 받아 실족한 무리들입니다. 이 세상 우리 주변에는 실족케 하는 많은 무리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실족케 하려는 사단의 손길이 거짓 형제들을 통하여, 거짓 선지자들을 통하여,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을 통하여 그 틈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같은 일에 대하여 엄히 경계할 것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이들은 비록 잠시동안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실족된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인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잃은바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도 일시적으로 죄악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죄악 중에서 그대로 버림받아 멸망 받을 사람들은 아닌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귀하고 값진 그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한 생명도 버림 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아버지의 집을 나간 탕자도 잃은 양입니다. 탕자란 말이 우리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지만 탕자란 세상 유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품에서 떠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탕자는 궁극적으로 아버지 집에 돌아온다는 사실이 전제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복음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는 그들이 세상으로 떨어져 나갈 때에 그들에게 어떤 결과가 오느냐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언제인가는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나 돌아오기까지는 그 오랜 기간동안 말할 수 없는 영적인 방황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탕자는 가진 것을 다 잃은 후 인생의 패배를 철저하게 경험한 후에야 아버지 집을 생각함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아혼 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3) 목자가 우리에서 내어쫓은 잃은 양 무리들도 있습니다. 목자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양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들을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3:1-2). 이 같은 목자들에  게 스가랴 선지는 못된 목자라고 말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주 어두우리라”(슥11:17). 예수님은 이들을 삯군이라고 정죄하셨습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늑탈하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니”(요10:12-13).

  목자가 양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 양 무리들은 잃은 양이 되며 그 목자는 못된 목자 즉 삼군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①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는 목자가 양을 돌보아주는 참 목자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일일이 알아야하며 그 이름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② 양의 무리들을 잘 먹이는 목자가 양을 돌보아주는 목자입니다.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겔34:3)고 책망하셨습니다. 양의 고기는 먹고 그 털로 따뜻하게는 하지만 그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먹일 줄 모르는 목자는 양을 흩으는 못된 목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③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병든 자를 고쳐주는 목자가 양을 돌보아 주는 목자입니다. 하늘의 소망으로 믿음을 강하게 해 주며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해 줌으로 치료해 주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약 5:14). ④ 상한 자를 싸매어 주는 목자가 양을 돌보는 목자입니다. 양은 그의 성품이 단순하고 우직하기 때문에 적은 일에도 상처를 입게 마련입니다. 이들을 방치해 두면 잃은 양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들을 위로의 말씀으로 싸매어 주어야 합니다(겔344). ⑤ 쫓긴 자를 돌아오게 하는 목자가 양을 돌보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가 양을 돌보는 목자입니다(겔34:4).


  2.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을 갖자


  우리 주님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잃은 양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통하여 찾으시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 주님의 심정은 잃은 양을 찾으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앓은 양인 그를 찾으신 기쁨을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 삭개오 같은 앓은 양이 있는가 부지런히 살피면서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 다 찾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주님의 심정은 잃은 양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혼 아홉 마리의 양을 산 에 두시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신다고 하신 말씀은 찾은 한 마리가 아혼 아홉 마리보다 더 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찾은 그 기쁨의 정도를 목자의 입장에서 표현하신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잃은 그 한 마리의 귀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에 대하여 그 심정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생명의 가치를 주님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잃은 양 무리들에게 목자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이 목자의 음성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150 ≈       범죄자에 대한 교회의 태도


  (본문 : 마태복음 18 : 15- 18)



  서 론 : 우리는 성경에서 죄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죄라 하느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그 범위가 광범위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습니다. 죄란 말은 ‘하말티아’로 과녁을 바로 맞히지 못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죄란 하나님의 법에서 탈선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죄의 시발점은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다음 네 가지 성경 구절은 죄에 대한 명백한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②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③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3:11). ④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발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1. 교회의 권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놀라운 권위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천주교에서 이 교회의 권위를 악용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지만 교회의 권위를 바르게 행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권위에 굴복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로서 마땅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특히 주님은 교회에는 죄인의 죄를 책망하는 권위와 그 죄를 용서해 주는 권위가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은 정죄와 용서의 권위가 교회에 있음을 암시하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체로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권위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1) 직분을 세우는 권위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주님을 머리로 하여 그 밑에 여러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폼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직분을 세우는 일은 교회의 특권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로써 세우는 이 같은 교회의 직분을 두려옴으로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2) 죄인을 징계하는 권위가 있습니다. 죄는 점과 홈이 없어야 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손상케 하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이 같은 암적 존재를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룰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2:24-25)라고 했습니다.

  (3) 또한 교회에는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는 권위가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 앞에서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4) 말씀을 선포하는 권위가 있습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곳이 곧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강처럼 흘러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24:5)고 하셨습니다. 충성된 종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종을 가리킵니다.

  (5) 교회는 성례를 수행할 권위가 있습니다. 성례가 합법적으로 수행되지 못하는 교회는 하나님 의 교회가 아닙니다. 세례와 성찬식을 주님의 말씀대로 수행하는 권위는 하나님의 교회의 특권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고전11:23-27).


  2. 죄의 처리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세 가지로 구분하여 교회에서 처리 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1) 은밀한 권고로 회개시키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처리하는 죄의 문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문제를 확산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처리 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주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죄에 관해서는 은밀한 방법으로 권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권고란 죄를 깨닫게 하는 책망과 권면을 의미하는데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 권고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일은 이처럼 중요한 일입니다. 네 형제를 얻는다고 하신 말씀은 그의 생명을 건진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권고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 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최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3:18-19)고 하셨습니다.

  (2) 두 세 사람으로 증참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중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고 하셨는데 증참 하라는 말은 세운다, 제출 한다의 뜻으로 두 세 사람이 함께 권고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때라도 두 세 사람의 권고를 듣고 회개하면 한 형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교회에 말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교회에 말하라고 하신 말씀은 공개적인 권고를 말합니다. 이 교회의 권고라도 들으면 그의 생명을 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고도 듣지 않으면 이 같은 죄인을 주님은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공개적인 치리를 통해서 정벌하라고 하신 말씀이십니다. 교회의 말은 하나님의 정하신 권고의 최종적인 방법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 나라의 지상 최고 법정인 것입니다. 이 같은 교회의 결정이 땅에서 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어느 누구를 맨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매신 것이기 때문에 하늘에서도 매이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땅에서 푸는 일은 죄인이 회개할 때 교회에서 풀어주는 일로 해벌을 가리킵니다.

  결 론 : 우리는 교회의 권고나 치리가 얼마나 두려운 일이며 순종해야 할 일 인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교회를 업신여기거나 교회 앞에 교만하거나 교회를 대적하는 일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교인들은 교회의 치리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나쁜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출교조차도 대단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로 옮기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권위를 바로 인식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바른 신앙 생활올 해야 합니다.




  ≈ 151 ≈       합심 기도의 능력


  (본문 : 마태복음 18 : 19 - 20)



  서 론 : 예수님은 18절에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시고 19절에 와서는 땅에서 구하면 하늘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전자는 죄인을 정죄하고 용서하는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인정하시고 후자는 교회의 기도에 대한 하늘의 응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 또는 두 세 사람은 교회의 최저 구성원을 말하는 수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교회의 합심기도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1. 합심 기도의 두 가지 요건


예수님은 합심 기도에 필요한 두 가지 요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합심 기도의 최저 선이며, 또 응답 받는 기도의 가장 효과적인 수효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합심입니다. 합심이란 두 사람이 같은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교회에서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 드리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합심하다라는 말은 ‘숨포네오’란 헬라어로 일치한다, 어울린다, 조화가 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합주곡을 ‘숨포니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소리를 함께 낸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심포니라고 하며 원어로 풀이할 때의 합심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합주곡이 된다는 뜻입니다.


  2. 합심 기도란 무엇을 의미하나?


  합심 기도란 두 사람 이상이 어떤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그 문제를 위하여 오직 마음을 함께 하여 간절히 간구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한 사람의 골방 기도가 독창이라고 한다면 이런 합섬 기도야말로 기도의 심포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합섬 기도에 대하여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옛날에 하나님의 종들이 나타낸 위대한 기도의 능력은 합심 기도가 많았습니다.

  (1) 오순절의 합심 기도.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령을 받기 위하여 합심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고 했습니다.

  합심 기도는 우선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일치가 중요합니다. 서로 딴 마음을 가지고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겉치레로 하는 형식적인 기도도 아닙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두 사람 이상이 꼭 이루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이것을 응답 받기 위하여 간구하는 기도가 합심 기도인 것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문도 들은 기도하는 목적이 오직 하나였습니다. 이 목적에 그들은 오직 마음이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다만 성령을 받으려는 단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여럿이 모여 합심 기도에 들어간 것입니다.

  다음에 합심 기도에는 전혀 기도에 힘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자세는 목적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응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간구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전혀 란 표현은 간구하는 목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른 곳에 마음을 두거나 한눈을 팔거나 생각을 돌리거나 하는 일이 없이 오직 기도하는 일에만 모든 것을 기울이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런 기도에 대하여 주님은 약속하시기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오순절 날에 그들의 기도의 목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 “미스바의 경우”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후에 그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하여 모든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무엘과 더불어 금식하고 회개기도를 합심으로 드렸습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삼상7:6). 이때 불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미스바로 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레를 발하사 불레셋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매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폐하여 도망했다고 했습니다.


  3.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합섬 기도의 성공적인 원칙에 대하여 20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란 말씀은 내 이름을 위하여 란 뜻입니다. 합심기도란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되 반드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하신 말씀대로 합심 기도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욕적인 기도는 어느 경우에도 통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대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모일 때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합심 기도를 할 때에는 그 기도의 목적과 제목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먼저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확신의 토대 위에 서서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하면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리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은 언제나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이는 그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약속이시며 이런 약속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는 해답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일은 자주 있어야하며 특히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거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다면 그런 장소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축복의 장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응답이 약속된 합심 기도를 잘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합심 기도를 위하여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너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약5:14)고 했습니다.

  결 론 : 기도하는 일꾼은 교회에서 참으로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그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 자리에 반드시 함께 하셔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간구하는 진실한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며 주님의 이름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일꾼은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 하나님은 이 런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 152 ≈       용서의 원리


  (본문 : 마태복음 18 : 21 - 35)



  서 론 : 예수님은 교회에서 범죄한 자를 최종적으로 징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이 같은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것임을 분명히 하시기를“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약간의 혼돈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전 산상보훈 중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하신 말씀과 조금 전에 말씀하신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에서 이 두 말씀이 마치 이율 배반적인 말씀처럼 제자들에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대체 형제들의 죄를 우리가 얼마정도나 용서해야 합격점에 들것인가에 대하여 궁금한 마음을 금치 못했던 것입니다.


  1. 인간이 생각하는 사랑의 한계점


  21절에서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인간의 최대의 한계,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이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랑의 한계점올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해줄 수 있다고 하는 뜻에서 이 말씀을 물은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과연 자기에게 계속적으로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에게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인가? 사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일곱 번까지 내게 죄지은 죄인에 대하여 사랑으로 용서해준다는 일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너무나도 놀라운 답변을 들려 주셨습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혼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같은 용서의 원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까?

  (1) 첫째로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의 사람의 척도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숫자에 얽매인 사랑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형틀에 꽉 묶여 있는 사랑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깊이에 있어 끝이 없으시며 그 높이에 있어 미치지 못할 곳이 없으시며 그 넓이에 있어 한이 없으십니다. 만약에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무엇인가에 얽매일 수 있다면 죄인을 위하여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죄의 정도에 따라 속박을 받는 아주 연약한 사랑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2) 둘째로 이 말씀은 우리가 나타내야 할 사랑의 표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나타내고 베풀어야 할 사랑의 표준은 마땅히 사랑이신 하나님께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들에게 아무리 사랑을 베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여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랑인가? 얼마나 부족한 사랑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용서는 계속 되는 것이지 그것이 한 순간도 중단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용서의 횟수가 사랑의 척도는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혼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신 말씀은 490번의 용서가 사랑의 한계점이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십니다. 용서는 마음의 상태지 수효가 아님을 가르쳐 주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으십니다.


  2. 용서의 양면


  우리가 용서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면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기 쉽습니다. 죄를 범한 형제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는 경우 이런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같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한 죄도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  
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아니하는 형제들의 죄에 대하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 형제가 자신의 죄를 뉘우침도 없고 용서를 빌지도 아니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① 우리는 먼저 그런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② 그 죄의 쑥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③ 혹은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서 치리하며 심한 경우에는 사단에게 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출교, 고전5:5). 그러나 사랑이 끊겨서는 안됩니다. 그 형제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3. 두 빚진 종들의 경우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될 일에 대하여 어느 임금에게 그들의 빚을 탕감 받은 하나의 비유로써 교훈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신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탕감과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정죄는 용서의 원리에 대하여 교훈해 주시는 하나의 경종이 됩니다.

  달란트와 데나리온의 계산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숫자의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적인 사실은 일만 달란트란 액수는 우리 인간이 한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죄 값을 말하고 백 데나리온은 우리가 노력만 하면 쉽게 벌 수 있는 적은 액수를 말함으로써 이것은 우리들이 용서해 주어야 할 형제들의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갚아야 할 빚에 견주어 본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한 달란트를 육천 데나리온으로 계산합니다. 한 노동자가 일천 주일을 일해야 겨우 벌어들일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 한 노동자가 자기의 한평생에 10달란트의 수입을 올리기도 힘든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가 벌 수 있는 하루의 노임인데 요즘 액수로 5천원을 잡는다면 백 데나리온이란 불과50만원에 지나지 않는 돈입니다. 그 당시 사회제도가 돈올 빌린 후 지불 능력이 없는 경우에 채무자의 노예로 팔려 가는 일이 통례였으므로 그 빚을 탕감해 준다는 일은 노예에서 자유한 몸이 되는 일이어서 우리가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인용할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1) 자비를 간구하여 탕감 받은 종의 경우. 일만 달란트의 빚으로 자기는 물론 처와 자기의 자녀들까지 대대로 종이 되어야 할 이 빚진 사람은 임금에게 자비를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회개를 의미합니다. 죄인의 회개는 언제나 임금이신 하나님의 자비에서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임금은 그의 자비의 호소를 듣고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 일인가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2) 빚진 동관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했을 때의 경우. 빚을 탕감 받아 자유의 몸이 된 그 종은 이제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로 들어가야 합니다. 탕감해 주신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한 새로운 생활의 열매를 맺히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열매는 새 계명인데 주님은 이 계명이 곧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길에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동관은 갚을 돈이 없어 주인의 자비에 호소했지만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임금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와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받았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과 정죄와 복수와 미움으로 가득찬 생활을 하므로 자비를 입은 임금의 노여움을 사게된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비유는 형제들의 죄에 대하여 중심으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사랑의 원칙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네가 벌기에 내가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이 이 원리에 바탕을 두고 계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주님 앞에서 핑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 153 ≈       죄와 빚


  (본문 : 마태복음 18 : 33 - 35)



  서 론 : 이곳에 비유로 나타내신 어떤 임금과 두 종들의 경우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용서받은 죄의 탕감과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할 관계가 어떻게 이어져 나가는가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는 교훈으로 우리는 이 같은 용서의 법칙을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강력한 경종으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경우는 복음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상정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그의 생활에 사랑의 열매가 없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율법적인 정죄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마땅히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은 것이니라”(마7:2)고 하신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1. 죄와 빚


죄란 말의 뜻이 헬라원어로는 대개 아홉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홉 가지 낱말 중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하말티아’로 이 말은 표적이나 또는 목표점에 미달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정하신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페일레마’로 이 낱말의 뜻은 빚을 말합니다. 이 빚은 사람 상호간의 금전적인 빚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도덕적, 영적 채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3)란 말씀에 나타난 죄가 곧 ‘오페일레마’로 죄를 빚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죄의 빚은 얼만 달란트인 것입니다. 이 빚은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으로 다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탕감 받는 길 이외에는 별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갚아야 할 죄의 빚어 일만 달란트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인간의 양심적인 의나 도덕적인 선이나 율법적인 행위로는 죄를 씻음 받을 길이 전혀 없고 하나님의 정죄 하심을 면할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없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그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게 하시려는데 있으신 것입니다.


  2. 빚을 갚으로 오신 예수님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의 주인이 어떤 임금 또는 주인이란 말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란 바로 율법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 임금이 회계한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임금 앞에 가서 회계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 9:27에서 말씀하시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심판대 앞에 선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같은 심판이 반드시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미리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찾으시는 심판자 앞에서 죄 값의 심판을 면활 길이 없을 것입니다.

  (2) 이 회계는 엄중한 계산에 따라 합니다. 그 종에게는 빚을 갚을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종뿐 아니라 모든 죄의 종들은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주인은 명하기를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인간은 죄의 빚에 대하여 그 어떤 방법으로도 속전할 길이 없기 때문에 재산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게 속한 가족들의 생명까지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이 같은 죄 값에 대한 두려운 결과를 바라보고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 죄의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3) 그 종이 비로소 자신의 빚에 대한 두려운 심판을 깨달았습니다. 임금 앞에 끌려나와 빚에 대한 임금의 심판을 받는 종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종의 이 같은 말은 자신이 진 빚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개의 모습이라고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갚겠다고 말한 것은 주인의 자비에 호소하는 자신의 무력함을 들어낸 말이지 갚을 능력이 있어서 그처럼 말한 것은 아닙니다.

  (4) 그 종의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불쌍히 보시는 분이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33:11)고 말씀하셨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가 불쌍히 여기신 것같이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불쌍히 보시는 분이십니다.

  (5) 주인은 그 종을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죄의 종에서 놓임 받게 됩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고 죄의 종의 멍에에서 풀려납니다. 자비하신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보시고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죄 값은 오직 탕감 받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홈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 죄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우리의 영적인 빚인 죄 값을 모두 갚기에 풍족한 대가로 지불된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홈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3-14)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빚을 탕감해 주실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자신의 사명을 이처럼 밝히셨는데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 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38)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이처럼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죄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형제의 죄에 대하여 사랑을 베풀어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도 자기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의 형제에 대하여 반드시 갚으라고 말하고 율법적인 정죄에 까지 이르게 하였을 뿐 아니라 재판에까지 넘겼으니 그가 받은 탕감의 은혜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자의 죄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으시고 정죄 할 것이라고 경종 하셨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라”(요일2:9)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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