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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6,048



  ≈ 144 ≈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


  (본문 : 마태복음 17 : 1 - 13)



  서 론 : 예수님은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산의 위치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어서 보통 변화산이라고 말합니다. 이 산 이름이 이처럼 붙여진 이유는 예수님이 이 산에서 변형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는 12명의 사도들이 있었고 그 외에도 주님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받는 세 사람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였는데 이들은 주님을 위해 헌신함에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적극적이며 주님의 인정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1. 사랑을 입은 세 제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모두 똑같이 사랑하시거나 똑같은 사명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도 다른 제자보다 더욱 큰사랑을 받고 있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들을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1) 그 중에 하나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적극적인 성품을 가진 제자였습니다. 주의 일에 적극성을 가진다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는 무덤에 갔었던 여인들의 이상한 말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주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파도를 무서워하기는 했지만 바다 위로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칭찬 받을만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단연 제자들의 으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 요한은 예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입은 제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요한이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란 이름을 여러 번 붙이고 있습니다(요13:23, 19:26, 20:2, 21:20). 요한은 영적으로 가장 깊이 있는 신앙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그 뒤를 베드로와 요한이 따랐는데 요한은 담대한 믿음으로 끝까지 그 자리에 있었고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의 이름을 부인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요하은 끝까지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쓰라린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3) 야곱보는 요한의 형제로 최초의 순교자가 된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린 야고보가 주님을 위한 최초의 순교자가 될 줄 이미 아시고 그를 더욱 사랑하신 것입니다(마10:22-23).


  2. 예수님의 변형


  이들 세 명의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신 주님은 그 곳에서 변형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변형되신 모습을 보면 그 얼굴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모습은 그의 영광을 드러낸 모습입니다. 복음을 위해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던 그 영광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는 것은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같더라”고 하신 말씀과 같으며(계1:16),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하신 모습은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라고 표현한 단7:9절의 주님의 모습과 같으며 이런 모습은 그의 몸에서 그의 신성이 비취어진 모습입니다. 다니엘은 이 모습을 보았을 때 혼절하였고 사도 요한도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세상 종말에 온 인류는 재림하시는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애곡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띠고 주님을 찾아온 모세와 엘리야와의 상면을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의 영광의 모습으로 내려오는 그들과 상면하시기 위해서는 주님도 불가불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셔야 했습니다. 우리는 변화산에서 이루어진 모세와 엘리야와의 만남과 그 대화의 중심이 주님의 죽으심에 관한 것임을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자로 보내심을 받았을 것이며 아마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그리스도는 일찍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분입니다(롬3:21-22). 이 일에 대하여 누가복음에는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눅9:30-31). 아마도 이 자리에서의 대화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받으실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초막집


  졸다가 깨어난 세 제자들은 이같은 기이한 영광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심히 놀랬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여 이처럼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런 말에서 다른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이런 광경이 장시간 계속되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에 쌀쌀한 날씨에 이 분들에게 무엇인가 의지할 곳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 자신들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영광의 장면이 너무 황홀해서 그대로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란 말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3. 구름 속의 음성


  베드로가 이처럼 말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물론 이 소리는 하나님이 세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명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의 경험을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의 태어나심과 그의 말씀과 그의 생애를 통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신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 같은 체험은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인 것입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려는 음성은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믿고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이 음성을 들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4) 주님은 그들에게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두려움이 살아지고 기쁨과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결론 : 그들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두려움이 살아지고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 보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직 예수만 보이게 하시고 그의 말씀만 듣게 하십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생명의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후, 그들은 주님을 모시고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 145 ≈       겨자씨 만한 믿음의 능력


  (본문 : 마태복음 17 : 14 - 20)



  서 론 : 주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아래 제자들은 어느 어린 병자를 가운데 두고 매우 난감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귀신이 들려 간질로 고생을 하는 아들을 데리고 온 어느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그 아들의 병을 위해 기도했으나 아무런 효험이 나타나지 않자 그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면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지난날 복음을 위해 각 고을로 보내심을 받았을 때 주님으로부터 귀신을 쫓는 권세와 문둥이를 깨끗게 하는 권세를 경험했던 터라 간질병쯤은 기도로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마침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1. 주님의 탄식


  그 아들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 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고 간구 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심히 탄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주님의 이 탄식은 그 아버지를 향해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그 당시의 세대를 향하여 탄식하신 것입니다.

  (1)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선생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그를 모함하여 죽이려 하였으니 참으로 믿음이 없는 세대였습니다.

  (2) 패역한 세대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이 이처럼 탄식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3)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얼마 후에는 아버지께로 가셔야 합니다. 그가 오랜 기간 그들과 함께 있지 못할 일을 이처럼 표현하셨습니다.
  (4)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셨습니다. 그들의 패역은 주님으로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이 참으심은 이사야가 예언한 바와 같이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자비하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2.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예수님은 그 아들의 아비에게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고 하셨습니다. 데려 오라고 하신 말씀은 네 문제를 내가 해결해 주겠다는 응답이십니다. 이런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데려오라고 하신 것은 네 문제를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하시는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 갔을 때 모든 문제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는 말씀은 비록 그 아비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닙니다. 모든 인류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게 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2)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내게로 데려 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병자를 불쌍히 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누구든지 병든 자를 그에게 데리고 가면 그의 자비하신 손길로 고쳐주십니다. 우리는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주님께 데리고 나온 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죄로 고통을 당하는 인생들을, 갈급한 심령으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영혼들을, 질환으로 소망이 끊겨진 심령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 인생의 갈급함을 해결 받으려는 자들을 이리로 데려 오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요7:37-38).


  3. 너희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주님의 권능의 말씀에 그 아이에게서 귀신이 쫓겨 나가자 아이가 온전해졌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주님께 자기들은 어찌하여 내어쫓지 못했는가 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나 능력은 한때 받았다고 해도 믿음으로 유지하지 못하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적었다는 말씀에는 그들의 신앙 생활에 큰 믿음을 가질 수 없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1) 그들은 계속적인 은혜 생활을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생활이나 복음 사업보다 자신들의 처신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2) 그들은 기도 생활에 나태하고 등한했습니다. 그리스인의 기도 없는 생활은 믿음을 잃어버리기 쉬운 생활입니다. 주님은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기도의 습관이 없었고 스스로 기도하는 모습을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주의를 시켰습니다.

  (3) 그들은 땅에 일만 생각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누가 더 크냐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바라보고 신령한 일에 관심을 갖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은 적은 믿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그들을 향하여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항상 적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적은 믿음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신 능력이 나가려면 그 믿음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심히 적지만 그 안에는 그 겨자씨로 큰 나무를 만들 수 있는 생명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적어도 그 속에 겨자씨 만한 생명만 깃들여 있다면 무엇이나 믿음대로 이뤄질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믿음은 어떤 신앙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기도가 있는 믿음입니다. 다음에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셋째로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믿음입니다.

  결론 :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여러 가지 은사들을 잘 간직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익하게 하려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이 세대에서 우리 주님만을 믿고 그 말씀의 능력 안에서 아름다운 생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146 ≈       예수님이 내신 성전 세


  (본문 : 마태복음 17 : 22 - 27)



  서 론 :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의 날이 가까워짐에 따라 제자들에게 자신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자주 들려 주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 모일 때에 이 같은 수난의 두 번째 예언을 그들에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근심은 주님이 받으실 고난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이며 한편으로는 그같은 고난의 일이 오면 자기들은 어찌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말씀은 믿을 수 있었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신 말씀은 전혀 관심에 두지 아니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한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은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반 세겔을 받는 자들과 만나 성전 세를 내시는 문제에 대하여 주님이 취하신 아름다운 태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유대인의 성전 세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어느 날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성전 세를 징수하는 사람으로부터 성전 세의 독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하고 물은 것입니다. 20세 이상 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율법에 의 하여 매해 반 세겔의 돈을 성전 세로 의무적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찌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도 덜 내지 말찌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희망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출30:14-16).

  반 세겔이란 두 드라크마와 같은 액수이며 드라크마는 헬라의 은전으로 로마의 데나리온과 동일한 화폐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반 세겔은 이틀간의 노동임금에 버금가는 액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중 이십 세 이상 된 남자들은 한 해에 한번씩 니산월 초일이 되기 전에 의무적으로 내야하는 일종의 세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이 성전 세를 제 때에 내시지 못하셨던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 세를 징수하는 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이것을 받으려고 그가 고향 땅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을 찾아와 베드로에게 왜 안 나시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이 같은 논란을 이미 아신 예수님은 집에 들어가신 후 베드로에게 한가지 문답을 시도하셨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이 물음에 베드로는 “타인에게 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물으신 이유는 주님은 바로 이 성전이 되신 분이시며 이 성전의 주인이시며 이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6).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8). 주님의 이 말씀은 주님이 하나님의 성전의 주인이시며 그 성전에서 경배를 받으실 분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성전은 자신의 집이시며 자기가 주인이시며 자신이 그 곳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분이신 데 그런 분이 성전 세를 내신다는 것은 세상 법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건덕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 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세례 요한이 극구 말려 오히려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할 것이라고 거절했을 때에도 주님은 그에게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권위나 체면을 돌아보시지 않고 스스로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놀라우신 건덕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나를 희생하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덕을 세우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I)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으로 오해케 하시는 일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오해시키는 일은 그 사람으로 실족케 하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오해케 한다의 오해란 말은 ‘스칸달리조’로 이 말의 뜻은 걸리게 한다, 넘어지게 한다란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문제라고 할지라도 혹 다른 사람으로 오해케 하는 일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믿음이 약한 자 앞에서 덕을 세우라고 말했습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2,13)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당연한 주장이나 권리도 행사하지 아니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시기 위하여 세상 법을 따르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시는 일에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며 장로의 유전으로 지키는 일을 비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태여 율법의 굴레에 얽매이실 분이 아니시지만 그는 창조주로써 인간에게 주신 그 율법을 스스로 온전히 지키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3. 주님이 바치신 성전 세


  이처럼 예수님은 성전 세를 바치셔야할 입장에 있었지만 예수님이나 베드로에게는 성전 세를 바칠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하신 일에는 이적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다른 사람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필요했습니다.

  (1)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내실 성전 세는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예비 되어 있었다고 하신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모든 되어질 일을 아셨기 때문에 성전 세에 필요하신 돈도 이 같은 방법으로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넓은 바다에 수없이 많은 물고기 중에 한 세겔의 돈을 물고 있는 고기를 아셨을 뿐 아니라 그 고기가 베드로의 낚시에 걸리게 하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결 론 : 우리에게는 사회에서 또는 교회에서 마땅히 바쳐야할 헌금과 세금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우리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한 나라에 소속되어 있는 국민들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이한 국민으로서 마땅히 준수해야할 세금 문제에 대해서도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13:7)고 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교인으로서 하나님의 것도 제대로 바치는 신앙생활을 해야하며, 국민으로서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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