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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5,711



  ≈ 137 ≈       하늘로서의 표적


  (본문 : 마태복음 16 : 1- 4)



  서 론 :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주님이 하시는 일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으며 주님을 끊임없이 시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사실을 표적으로 나타내 보이시기를 강요했습니다. 이 같은 표적을 원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야는 큰 권세와 영광으로 세상에 나타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표적을 구한 것입니다. 표적이란 말은 ‘세메이온’(σημεἰον)으로 증거, 기적 같은 놀라운 일을 나타내는 외적인 증표를 의미합니다.


  1. 하늘로서 온 표적


  하늘로서 온 표적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표적으로 모세처럼 예수가 메시야란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증거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소에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 병을 고치시는 일 등을 보았지만 그들의 완악한 마음은 그런 것 가지고서는 메시야의 표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이뤄지는 기적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예수가 참 메시야라면 하늘로서 오는 이적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우겨댄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모세가 홍해를 건너게 하고 하늘에서 만나를 먹게 했던 것과 같은 이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들을 칠 때 태양을 기브온 위에 머물게 하고 달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게 했던 것 같은 이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같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 바알 선지자들을 멸절시킨 것처럼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 군대를 전멸시킬 수 없느냐는 식으로 그같은 표적을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런 표적을 보고 주님을 믿으려는 마음에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를 배격하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시도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책망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굴러다니는 돌을 가지고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늘에서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그의 대적들을 불사를 수 있는 권능이 있다고 스스로 말씀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두 가지 면에서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고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그 날은 궂겠다”고 하는 일기는 잘 알면서도 왜 시대적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연구하면서도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사실에 대해서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시대적 표적이란 무엇입니까?

  (1) 그들은 단9장에서 예언을 통해서 메시야의 도래 시기가 왔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7이레와 62이레가 지나면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한 말씀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말씀하심으로 시대의 징조를 보고 주 재림의 시기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방에서 예루살렘에 찾아온 동방박사 일행은 메시야의 때를 하늘의 별의 징조를 보고 알고는 메시야를 찾아 경배했던 것입니다.

  (2) 그들은 메시야가 해야 할 사명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메시야의 사명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사53:4-5). 그들이 이처럼 메시야가 땅에서 당하실 고난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예수님께 어리석은 표적 같은 것은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3) 만약 그들이 메시야의 태어나심의 예언을 알았다면 그들은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미5:2절 말씀에서 메시야가 베들레헴 땅에서 나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예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찾아 갈 때에도 그들은 냉담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출현을 원치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왕 노릇하기 위해서였습니다.

  (4)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과 그의 행하시는 권능에서 그의 메시야 되심의 표적을 찾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을 향하여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1). 또한 주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권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가 행하신 표적은 모든 사람으로 그가 메시야 되심의 충분한 증거가 되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표적을 요구한 것은 그들이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증거에 대하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5:39).

  (5) 주님은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란 예수님이 생전하셨던 그 당시의 세대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실 때도 이에 포함됩니다. 악하다는 말은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가리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으로는 떠나 있는 신앙이 외식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하고 악한 것입니다. 음란하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세속된 신앙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벗된 것은 영적 간음에 속하기 때문에 음란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표적을 구하는 사람은 그 표적이 끝날 때 곧 떠날 사람들입니다. 표적은 또 다른 표적을 구하게 됨으로 표적으로는 만족할만한 증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종말에도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적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살후2:9-12).


  3. 주님이 말씀하신 메시야된 결정적 표적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야된 표적을 보여 줄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표적이 무엇인지 대단히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메시야된 표적을 끝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 표적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바다에서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사흘간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습니다(롬1:3-4).

  오늘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어떤 굉장한 표적을 보여 준다고 해도 그것이 메시야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나와 같은 표적만이 메시야된 참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그가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셨으며 이 사건이 바로 복음이 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사람들이 표적을 요구하는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표적을 요구하는 미련스러운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진리를 깨달아 믿음에 굳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 138 ≈       삼가야 할 누룩


  (본문 : 마태복음 16 : 5 - 12)



  서 론 : 예수님은 누룩의 비유를 두 가지 면에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는 천국이 온 땅에 번지는 역할로서의 누룩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 퍼지는 악의 교훈으로서의 누룩입니다. 누룩은 강력한 번식력을 가지고 순식간에 온 덩어리에 번지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어느 경우에도 합당한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신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과 같이 확장될 것임을 가리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한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한 집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이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면 그 씨앗은 마치 누룩처럼 번져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주의하라고 하신 누룩은 잠시 잠깐 동안에 사람의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가는 악한 누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누룩은 번지는 전염력이 강력하기 때문에 악에 있어서도 굉장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1. 제자들의 오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가두개인의 교훈을 삼가라는 교훈이신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누룩이란 말에 자기들이 떡을 가지고 오지 못한 일에 대한 책망인 줄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이 떡을 가져오기를 잊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주는 떡을 주의하라는 말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육신에 속해 있었으므로 육에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나 그 말씀을 해석할 때 몇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말은 영이요 진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영적으로 해석해야 할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로 해석하려다간 자칫 인본주의적인 해석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이 주십니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짝이 있습니다. 누룩이 악한 비유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닌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다른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
님의 뜻을 이해할 때 바른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후에 나타난 문맥을 무시하거나 그 말씀 속에 들어가 있는 오묘하신 뜻을 저버린 채 말씀의 낱말에만 치우치면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믿음이 적은 자들아


  주님은 깨달음이 적은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나무라셨습니다.

 (1) 적은 믿음이란 떡이 없으므로 염려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도 “믿음이 적은 자”에 대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2) 적은 믿음이란 영적 깨달음이 적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심령만이 결실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신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2:23).

(3) 적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쉬 잊어버리는 믿음입니다. 고침 받은 아흡명의 문둥이는 주님의 은혜를 잊고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제자들은 방금 전에 주님이 행하신 이적을 잊어버림으로 떡에 대하여 또 다시 염려하게 된 것입니다.


  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


  예수님이 여기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사람의 마음을 부패하게 하는 그들의 교훈을 가리킨 것입니다.

  (1) 바리새인의 누룩은 마23장에서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 그들의 누룩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생활입니다. 이같은 그들의 누룩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경종하시기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마23:1-3). ㉯ 그들의 누룩은 그들의 외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생활에 치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 그들의 누룩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신앙은 악한 누룩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므로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 바리새인은 표적을 구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 그리고 그들에게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누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조차 없는 장로의 유전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의 계명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다고 주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2) 한편 사두개인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사두개인은 바리새인들과 전 반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나머지 영의 존재도 부인하고 천사도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의 신앙도 없었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하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행23:8).

  이런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능히 모든 사람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악한 누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현실 생활에만 충실하여 세속화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적 축복에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교회에 번지고 있는 이 두 가지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보수적인 정통 신앙에도 누룩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면 그것이 생명을 죽이는 누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이처럼 경종하셨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번지는 누룩을 삼가야 하며 이 누룩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릴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 139 ≈       베드로의 신앙고백


  (본문 : 마태복음 16 : 13 - 20)



  서 론 : 사람이 예수를 누구로 알고 믿느냐는 문제는 그 사람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사람에게 올바른 신앙이 있느냐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단이냐, 아니면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는 판단도 역시 신앙고백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은 것은 제자들에게 과연 영생을 약속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여부를 시험해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 일반적인 그리스도관


  성경에는 주님을 대면한 사람,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 그로부터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판단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호감을 가졌던 유대인들의 무리 중에도 바른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1)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세례 요한과 같은 사명을 가진 선지자인 줄로 알았다는 것과 다른 한가지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헤롯왕처럼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역사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2) 더러는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말4:5절에서 엘리야는 메시야가 아니라 그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예언되어 있으며 이들은 주님이 바로 세례 요한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더러는 예레미아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옛 선지자 중에서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다시 그 사람을 보내시는 줄로 알고 그의 성격이나 그의 행하는 능력이 죽은 선지자와 비슷하면 그 죽은 선지자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성경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올바른 그리스도관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말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선 듯 나서며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 베드로는 주님을 “주”라고 했습니다. 주라고 한 말은 신구약에서 주로 주종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된 말로 신앙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올 때는 주란 말을 하나님과 결부시켰으며 신약의 주란 말의 ‘큐리어스’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을 “그리스도시요”라고 불렀습니다. 메시야란 말로 창세기15장에는 여자의 후손으로 나왔고 율법에는 모세를 통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란 말로 기록되었습니다(신68:15). 그리스도란 말에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모세가 율법에서 증거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선지자이어야 합니다. 이 일에 히브리서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1:2).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란 기름부름을 받은 자로 그에게 대제사장의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히6:20). 세 번째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위를 계승한 영원한 왕이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할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눅1:32-33).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추어진 이가 바로 메시야의 자격자입니다. 이런 분은 예수님 이외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보편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와 기원을 함께 하시고 영광이나 본체나 인격이 동격이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합니다. 상천하지에 이같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뿐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보편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아들이 아니라 그와 기원을 함께 하시고 영광이나 권세나 본체나 인격이 동격이신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아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3. 베드로와 천국 열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반석이란 이름을 주셨는데 이 이름이 주어지기 이전까지 그에게 부쳐진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우리가 반석이란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어에 나오는 두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이름은 ‘페트로스’(πἐτρος)로 이 단어는 작은 반석이란 뜻입니다. 반석 그 자체가 아니라 반석의 한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반석에 ‘페트라’(πἐτα)란 말이 있습니다. 이 반석이란 말은 거대한 반석으로써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고전10:4).
  그러므로 “너는 베드로라”고 하신 말씀은 ‘너는 너의 신앙 고백으로 그 반석의 한 부분이 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이지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우리도 모두 똑같이 한 머리에 붙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에 불과합니다.

  또한 주님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으로 인하여 오늘날 많은 신학적인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천국 열쇠란 구원의 열쇠, 생명의 열쇠를 말합니다. 여기서도 열쇠란 말을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3:7절에는 다윗의 열쇠란 말이 있습니다. 이 열쇠는 오직 예수만이 가지고 계시는 유일하신 천국 열쇠를 말합니다. 베드로라 할지라도 주님의 이 열쇠를 넘겨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게만 오직 구원의 열쇠, 천국의 열쇠가 주어집니다. 땅에서 맨다는 말은 교회에서 실시하는 합법적인 징계를 말하며, 땅에서 푼다는 것은 교회에서 맨 징계를 풀어주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라고 하신 대상은 베드로 한 개인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를 말합니다. 구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몸이 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계하시기를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전한다면 올바른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믿음이라면 우리도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신앙이며 이런 신앙에는 영생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 140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본문 : 마태복음 16 : 21 - 23)



  서 론 : 베드로는 주님께 칭찬들을 만큼 훌륭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백을 한지 얼마 못되어 그 주님으로부터 사탄이라고 하는 심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은 할 수 있었지만 그 신앙을 뒷받침할 만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주님의 신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긴 했지만 그러나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아직 이 같은 지식이 없는 베드로는 사탄의 대리자 노릇을 하게 됨으로써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1. 베드로가 들은 책망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의 발길은 죽음을 향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이 같은 고난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주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고난의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그 곳에서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죽음의 고난을 이기시고 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일에 대하여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사야53장에 나오는 고난의 메시야에 대하여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으로 오르시어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일에 대비하여 좀 더 높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은근히 서로간에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광을 누려야 할 주님께서 왕은 고사하고 잡혀서 죽게 된다고 하니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도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주여 그 같은 일은 하지 마소서 이런 일이 주님께 미쳐서야 되겠나이까”하면서 매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하시는 책망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2. 베드로의 메시야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붙들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이용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주님을 위하여 붙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붙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신 것은 이 땅위에서의 영광만을 생각해온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하셔야 할 사역을 몰랐기 때문에 왜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도 세상 마지막에 있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선생이 죽으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들의 부활관은 마르다의 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말했는데 주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말씀에 마르다는 이처럼 대답했던 것입니다(요11:24).

  (1)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이유는 그는 율법의 마침이 되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셔야 할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른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갈3:19). 이것은 우리의 의가 율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2)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인데 그 아버지의 뜻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죄인의 속죄 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몸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2:6-8).

  (3)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는 그는 그의 백성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치르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같은 주님의 고난에 대하여 이처럼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사53:5). 사도 요한은 이 일에 대하여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요일4:10).


  3.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로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영광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앞세웁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정욕에 의하여 그의 생각이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탄에게 이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마귀의 생각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서 탐심을 일으키고 우리로 그 탐심의 노예가 되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탄이 준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사탄의 대변자 노릇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는 준엄한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의, 식, 주 문제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 유익과 내 영광을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일이 그런 생각입니다. 그리고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생활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결론 : 사탄은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저를 대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생각을 하면 사탄은 그 때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나와 가까운 내 주변의 사람을 통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이 끊임없이 자라나야 하며 언제나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을 하여 영생의 결실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을 가져와도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가져옵니다.





  ≈ 141 ≈       주님을 따를 자의 결심


  (본문 : 마태복음 16 : 24)



  서 론 : 예수님은 자기를 따를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주님이 말씀하신 이 분량에 이르도록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대하여 베드로가 “그리 마옵소서”하고 간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란 심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십자가를 피하는 일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며 우리로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이 아니라 넘어지게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따를 자의 각오


  예수님은 자신이 짊어질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베드로가 간한 사단의 생각을 나무라신 후, 주님을 따를 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장차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같은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근거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고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에까지 높이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생활에 나타내야 할 첫 열매는 자기 부인입니다. 여기서 말한 자기란 성령을 거슬리는 육신의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옛 사람의 모습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옛 사람의 열매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 거역, 우매, 무정, 무자비” 등이라고 했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이란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은 영적인 말로 그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나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이런 사실을 믿을 때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2)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영의 생각에 지배를 받는 생활을 뜻합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의 생각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인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이런 생활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생활은 육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시키는 일입니다.

  (3)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육의 행실이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갈2:20). 바울의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해야 그 생활이 주님을 위한 생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에게 언제나 승리를 안겨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6).


  3. 그리스도인의 자기 십자가


  주님은 우리가 저야 할 십자가에 대하여 “자기 십자가”란 이름을 부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어떤 십자가이건 그것은 마땅히 자기가 저야 할 십자가란 사실을 알아야 의미합니다. 십자가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에게 오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생애에는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많은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에게 오는 십자가가 어떤 것이건 그것은 반드시 자기가 저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피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1) 십자가 중에는 자신의 죄 값으로 오는 징계의 십자가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같은 십자가를 졌던 많은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로 말미암아 그에게 돌아간 십자가는 그의 생애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삼손도 그러했습니다. 그의 방종한 생활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눈알이 빠지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이런 십자가는 징계의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이 기쁘게 저야 할 십자가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이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2) 다음에 연단을 위해 우리로 지게 하시는 시련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벧전4:12-13). 우리가 이 시련의 십자가를 감사히 질 것은 이에 따른 놀라운 약속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벧전4:13).

  (3)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길에 정해 놓으신 고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 십자가를 누가 면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까? 누가 이 십자가를 피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전7:13-14).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느 때 우리에게 어떤 십자가를 지게 하실 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하면 우리에게 많은 영적인 유익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평안은 십자가를 벗으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를 지는 데서 온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고난의 십자가가 온다해도 그것을 잘 지기만 하면 그 일이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하면 우리의 믿음이 놀랍게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42 ≈       생명을 얻는 비결


  (본문 : 마태복음 16 : 23 - 26)



  서 론 : 예수님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저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참 생명을 얻는 비결과 생명을 잃는 일에 대하여 경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영적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참 생명을 찾을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버리면 찾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일은 잃을 것이라고 한 목숨은 육신의 생명이요 얻으리라고 한 목숨은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1. 자기 목숨을 그리스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의 결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목숨을 구원한다는 말은 그의 삶의 목적이 육신의 생명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목숨이란 말은 ㉮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기의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은 흙에 속한 목숨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밝혀진 그리스도 밖에 버려진 생명을 의미합니다(요15:5). ㉯ 이같은 목숨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생명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목숨이요 죄를 좋아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목숨입니다. ㉰ 또한 이런 목숨을 가진 사람은 그 목숨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동시에 자기의 육신적인 유익을 위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생활이요 생명의 길에서 떨어진 생활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구원코자 하면 이라고 하신 말씀은 얻으면 이란 뜻입니다(마10:39). 이런 생활은 육신의 것을 심는 일입니다. 이처럼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이루는 일에 그의 생의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생애를 살아갑니다. 그들의 생활은 또한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육신을 심는 일이요 육신의 것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갈6:8).

  또한 잃을 것이라고 한 말씀은 자신의 참 생명인 영원한 생명을 상실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목숨을 죽이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참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구원코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참 생명을 잃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육신의 생각과 육에 속한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의 소중한 영적인 생명을 잃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육신적인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그 육신적인 목숨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다시 말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원치 않는다면 결국 그의 소중한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경종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신대로 살아서 얻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고 모두 잃는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2.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은 아무 거리낌없이 사람이 생명을 얻는 길이 어디 있는가를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이기 때문에 이처럼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자기 목숨을 잃는 일에 있어서 “나를 위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목적에 두어여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가 이런 목적에서 이탈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으려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면 이 지체를 가지고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너희 것이 아나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고전6:20). 자신의 목숨을 잃는 길을 택하는 사람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목적이 있을 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주님을 위한 것임을 가리킵니다. 이 목적에서 이탈하면 영생을 얻으려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하여 라고 한 또 한가지의 뜻은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뜻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2) 제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육신을 따르는 정욕과 탐심의 생활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육신적인 생활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잃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자기 목숨을 잃는 생활이란 말씀으로 바꾸어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세상으로 향한 육신의 생각을 주님을 향한 영의 생각으로, 육신의 정욕적인 욕망을 영원한 소망으로, 자기자신의 영광을 바라는 육신의 유혹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모든 문제가 근원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방향이 전환되어야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천하와 비교되는 우리의 생명


  잃으면 안되고 반드시 찾아야 할 우리의 생명은 영적 생명으로써 이 생명이야말로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우리의 생명은 천하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행복이 우리의 어디엔 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찾으려고 무던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런 가치 있는 것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은 대단히 짧은 기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찾아가시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가치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목숨은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목숨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되는 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유업을 받을 목숨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둔 목숨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같은 우리의 목숨과 바꿀만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목숨이 참으로 귀한 것은 이 목숨을 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벧전1:18-19).

  결론 :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생명은 이처럼 가치가 있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생활을 죽이고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생활에서 참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존귀한 생명을 이하여 자기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해 잃어버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143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본문 : 마태복음 16 : 27 - 28)



  서 론 : 예수님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주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때에 행한 대로 갚으시는 상급과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 말씀에 대한 심판을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달란트의 심판 비유와 유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후에 28절에서 하신 말씀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은 그 해석이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1.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의 심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심판은 행한 대로의 심판입니다. 행한 대로라고 하신 말씀은 각자가 심은 대로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을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7-8).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행한 대로의 심판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불신자의 심판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이니 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다른 하나의 심판은 믿는 자들의 심판입니다. 이 믿는 자들의 심판도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소위 마귀가 심어 놓은 가라지들의 심판입니다. 이 가라지의 심판은 세상 끝날에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① 이 가라지 중에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5:28-30). 이 사람이 이처럼 악하고 게을렀던 원인은 그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②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히6:7-8). 이들이 가시와 엉겅퀴를 낸 까닭은 그들이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성령이 내주하지 아니하심으로 복 받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③ 가라지 중에는 교회에서 진리를 대적하고 당을 짓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 좇는 자들에게는 노와 분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롬2:6-8). 이들이 교회에서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으며 당을 지어 진리를 대적한 이유는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구원받은 성도들에 대한 상급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고전5:10). 이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백보좌 심판 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급의 심판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하는 모든 일에는 이 자리에서 받을 상급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2. 왕권을 가지고 올 때에 볼 자가 있느니라


  예수님은 27절에서 그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라고 하신 후, 28절에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시므로 이 사건이 마치 그의 재림의 시기를 가리키는 듯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의 재림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 당시 이 말씀을 들은 주님의 제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주의 재림을 가리킨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17장에 나오는 변화산의 변화된 주님의 모습을 가리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변화는 잠깐 동안일 뿐 그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모습은 아닙니다.

  (2) 다른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과 결부시켜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한 몸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영화로운 몸이시지만 죽음에서 살아나신 모습이지 왕권을 가지고 오신 모습은 아닙니다.

  (3) 또 어떤 사람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대단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8-19).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의 재림이나 그의 부활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임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가 성령으로 다시 오실 일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으므로 예수님이 그들의 묻고자 하심을 아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6:16-22).

  이 말씀은 주님이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 말씀의 흐름을 보면 그가 큰 영광으로 오실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에 예수님은 인류의 종말에 친히 재림하십니다.

  오순절의 성령의 임하심은 예수님이 분명히 왕권을 가지고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오순절을 기점으로 그의 나라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친히 그 머리가 되시므로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미치는 주님의 왕권은 우리를 고아처럼 두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왕권으로 지켜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화난을 이길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생명을 그의 왕권으로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하신 말씀은 영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님은 분명히 왕권을 가지고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오순절을 기점으로 그의 나라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친히 그 머리가 되시므로 왕이 되셨습니다. 그는 왕권의 소유자로 지금 교회를 다스리시며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왕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결론 : 왕권을 가지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가룟 유다는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왕권을 가지고 오신 주님을 지금 우리의 심령 속에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왕은 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왕을 힘입어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왕을 의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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