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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14,103


  ≈ 132 ≈       헛되이 경배하는 장로의 유전


  (본문 : 마태복음 15 : 1 - 11)



  서 론 :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은 다만 예수님의 교훈을 듣거나 그의 행하시는 이적을 보기 위해 그리고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주님을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율법적인 약점을 잡아 그를 모함하려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과 성경을 배워온 박사들이었기 때문에 배운 것이 없는 예수님을 상대로 능히 율법적인 토론을 벌려 책잡을 수 있을 줄로 자신했습니다. 그들은 그 날에도 예수님으로부터 율법적으로 고소할 만한 사건을 포착하고는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따지려 온 것입니다. 그들이 문제를 삼은 사건은 주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은 일인데 이런 일은 그들에게는 장로의 유전을 범하는 일로 율법을 범하는 사건과 똑같이 취급되어 왔습니다.


  1. 장로의 유전이라 무엇이가?


  유전이란 ‘파라도시스’(παρἀδοσις)로 이 말의 뜻은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적 교훈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장로의 유전을 정죄하기 전에 이 장로의 유전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장로의 유전이 나오게 된 동기는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성전 파괴와 바벨론으로의 포로가 자신들이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지 못한 까닭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고국에 돌아오자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일념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엄한 규율을 랍비들의 손을 통하여 만들었습니다. 이런 규율은 그들의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며 이런 규율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 이것을 지킬 것을 엄히 명했습니다. 이런 엄격한 규율을 생활화시키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알았으며 율법보다 더 앞세워 지키게 한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규례가 장로의 유전으로 불려집니다.

  (2) 장로의 유전 중 먹는 일에 대하여 세 가지 교훈을 세웠습니다. ㉮ 그 하나는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결한 의식을 따르는 것인데 이런 의식은 물론 율법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 다음에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 물을 몸에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했습니다. 이 역시 일종의 정결 의식인데 이들은 사람의 정결을 회개에 두지 않고 이런 형식적인 의식에 두고 그것을 실천하는 생활을 강요한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의 정결을 이같은 의식에 두고 교훈을 삼았으므로 그들의 신앙이 외식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 다음에 그들은 잔이나 주발이나 놋그릇을 씻지 아니하면 음식을 먹지 아니했습니다.

  이런 교훈은 율법에 없는 것을 장로들이 교훈으로 가르쳐서 유전으로 내려오게 한 것들입니다. 이런 복잡한 유전 외에도 많은 유전이 있는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지적했던 것처럼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도 무엇이든지 부모에게 드려 유익하게 될 것이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됐다고 하면 부모님을 공경치 않아도 된다고 하는 잘못된 교훈을 유전으로 가르쳐 온 것입니다.


  2.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바리새인들의 죄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보고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고 정죄했을 때 주님은 그들을 준엄하게 문책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려고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한가지 예로 부모님 공경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정죄하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명은 어떤 명목으로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이 계명을 범하는 자는 정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엄연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교훈을 만들어 장로의 유전으로 지키게 했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교훈이 예수님의 지적에서 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부모를 공경해온 태도는 장로의 유전을 표면적 이유로 삼아 실상인즉 하나님의 계명을 의식적으로 범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그 부모를 봉양할 책임이 있는 자녀라도 그가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의사 표시를 하면 부모님의 봉양 책임이 면제되며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고르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제물이란 뜻입니다. 제물은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니 그것으로 부모를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스스로 범했던 것입니다.


  3.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책망하셨습니다. 물론 이사야의 예언은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의 패역상에 대하여 책망한 것이었지만 그 책망이 또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1) 입술로는 가깝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생활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존경은 그들의 입술에만 있었고 그들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존경도 경외도 없었습니다.

  (2)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인해서 바뀔 때 그런 교훈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이처럼 경종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신4:2).

  (3) 이런 경배는 헛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헛되다는 말은 무가치하게, 혹은 쓸데없이 경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고 장로의 유전을 지키는 생활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생활을 한 것으로 자랑했지만 이런 경배는 하나님께 무가치한 경배, 헛된 경배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아니하시는 경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은 것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님을 인체의 자연적인 신진대사와 결부시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하는 사람의 교훈은 오늘에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으로 삼지 않고 사람의 가르침을 교훈으로 삼기 때문에 바른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퍼진 유전인지 교파간의 장벽을 높이 쌓아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간의 거리가 그 이웃에 있어도 교제가 없고 이방 종교와의 거리만큼이나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모함하고 찢고 양을 빼앗아가고 헐뜯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주일 낮 예배시간에만 교회에 출석하는 유전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예배 후엔 오락장에 가건 사업을 하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유전도 지금 팽배해 있습니다. 이런 유전을 누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까? 유전이나 사람의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게 하는 것들로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은 유전이나 사람의 교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 133 ≈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 : 마태복음 15 : 11 - 20)



  서 론 :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생활이 얼마나 외식적인가 하는 문제는 그들의 생활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먹는 일에까지 확대 해석하여 장로의 유전으로 내려오는 의식으로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그 먹는 음식으로 인하여 사람이 더럽혀 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1) 그 하나는 이제 의식에 따른 율법적 행위는 사람을 정결케 할 수도 없고 더럽게 할 수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율법적 정결 방식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람을 정결케 하는 일에 대한 하나의 모형으로 보여 주신 것일 뿐 그 의식으로 사람이 거룩하게 되거나 정결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케 하려고 오신 분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례의 의식의 뜻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의 죄를 깨끗케 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사죄인데 이 사죄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을 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2) 다른 또 하나는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선언이십니다. 레11장에서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에 대한 구분을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런 율법의 명령은 구약 시대는 사람의 정결이나 거룩함이나 성별을 언제나 육신적인 법을 만들어 실생활에 적용토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구별에 있어서 성별의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의식 역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구별에 있어서의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주신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갈3:19).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율법에 얽매어 살아온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는 가히 폭탄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사람이 더럽혀질 뿐 아니라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엄격히 구분하여 먹었으며 부정한 음식은 입에 넣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문제의 분명한 답변을 듣게 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신 말씀에서 그 이유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음식은 먹어서 소화기관을 통해 뒤로 배설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기 때문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음식이나 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구별한 일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잠정적인 육신의 법이었을 뿐, 하나님의 구별 방법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부터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의 구별은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먹은 사람은 성별된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이 생명의 떡을 먹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   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3:9).

  (2) 사죄의 은혜는 결코 율법에서 규정한 의식의 이행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의 자백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고 말씀했습니다(요일1:9).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2. 사람을 더럽히는 것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원인에 대하여 올바른 교훈이시며 아울러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 대하여 정죄하시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입은 마음의 출구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이 입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므로 이것이 그 사람을 의롭게도 하고 더럽게도 하는 것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들이 그 사람의 입을 통하여 나오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의 거울이 되며 인격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에 대하여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나 이런 것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사람을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더럽힌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정죄를 가리킵니다.

  (1) 우리가 이 같은 더러움을 이기려면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정결하게 한다는 말은 깨끗하게 씻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은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피로 정결하게 씻어 주십니다.

  (2) 우리가 더러움을 이기려면 육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롬8:5). 우리가 육신에 속한 자로 있었을 때에는 더러운 가운데 살았었습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22-24).

  (3) 우리가 정결한 마음을 가지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있는 이 더러운 것들이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사람을 더럽히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정결한 마음에서 새로운 말이 나와야 합니다. 이 새로운 말이란 그 입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기도입니다. 찬송입니다. 입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위로와 권면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내 마음에 임하셔서 내 마음을 주장하심으로 더러운 것들은 다 씻음 받아 정결케 해 주시고 우리의 입술에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와 찬송과 감사가 나올 수 있도록 늘 간구해야 합니다.





  ≈ 134 ≈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히리라


  (본문 : 마태복음 15 : 12 - 14)



  서 론 :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 선생님의 책망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오히려 더 큰 반발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좀 부드럽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십니까” 이 말의 뜻은 그런 주님의 교훈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두려워하여 그들의 생각을 바꿀 줄로 아십니까? 말하자면 천만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주님의 그런 말 때문에 더욱 격분하여 주님을 더욱 해치려는 악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들의 비위를 극도로 자극하는 그같은 말씀은 삼가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건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1. 뽑힐 것이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는 뽑혀질 존재가 많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심겨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뽑혀 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죄인도 있고 세리도 있으며 창기도 있고 바리새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축복된 혼인 자리에서 뽑혀 바깥 어두운 곳으로 던져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 중에 누가 뽑힐 것인가에 대하여 주님은 그 다음 말씀에서 소경된 인도자와 그를 따르는 소경들이 다함께 뽑혀질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1) “본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으로 뽑힐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소경인가”고 주님의 말씀을 경멸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있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본다고 하신 것은 빛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경이 바라본 빛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청년은 그 눈이 뜨여짐으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라본 빛은 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빛 되신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배척하면서도 그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빛 가운데로 다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보지도 못하고 본다고 하는 그들을 향하여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열매가 없는 자들은 영적 소경으로 뽑힘을 당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열매를 맺을 때 가능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열매가 없는 자는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의 결국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이처럼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끄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히6:7-7).

  (3) 외식하는 자들은 영적 소경으로 결국은 뽑힘을 당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고 소경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소경 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구덩이란 영적 소경이 필연적으로 바지지 않을 수 없는 영적 함정으로 두 말 할 것도 없이 지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믿기를 거절하는 자들을, 아무런 열매가 없는 자들을, 외식하는 자들을 영적 소경으로 만드십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들이 가는 길이 보일 리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보여 주시는 소망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자들에게 참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진리의 성령만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데 그들은 스스로 성령의 감동을 거역하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도 없고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심지 않은 것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밭에 반드시 알곡만을 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곡을 심는 과정을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심습니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오직 아들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 전에 그 아들 안에서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을 그리스도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심으실 때가 있습니다. 심는 것이나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왜 지금 이 세대에 태어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되었느냐에 대해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나의 전 인생의 과정이나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까지도 이 때에 맞추어 작정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깨들을 때 우리 앞에 어떤 장애가 오더라도 두려움이 없으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심는 역사는 그의 말씀으로 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심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주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1:23).

  하나님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히리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하여 주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뽑히는 과정을 보면 ㉮ 이들은 생명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이들은 원래가 육신에 속한 사람들로 그들의 이같은 생활은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에 크나큰 부담을 주며 고통을 줄 것이기 때문에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이들은 시험 중에 넘어질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시험을 감당할 능력이 없고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시험으로 인하여 넘어지게 됩니다. ㉰ 이들은 잘못된 지식으로 이단에 빠져 생명의 길에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이 없으므로 결국 사단의 조종을 받아 다른 진리, 다른 복음을 따르다가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에 굳게 서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순종의 열매를 맺고 자신이 자기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인하는 생활을 통해서 믿음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 135 ≈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


  (본문 : 마태복음 15 : 21 - 28)



  서 론 : 가나안 사람이란 율법도 하나님도 없는 이방인들입니다. 그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귀신들려 고통을 받는 딸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고 하시는 칭찬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나안 여인의 기도를 통하여 큰 믿음의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18장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이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불의한 재판관에게 호소하는 가난한 과부의 간구를 비유로 들려 주셨습니다. 기도에 믿음이 있어야 할 일에 대한 비유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17:20). 예수님은 이 가난한 여인의 간구를 통하여 큰 믿음의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큰 믿음이란 무엇인가?


  큰 믿음이란,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믿음을 말합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에게는 흉악히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어머니는 자기 딸이 측은하고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삶의 참 보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여인은 이런 자기 딸을 고침 받으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들 가정에 문제가 생겨도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자신의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1) 그 여인이 주님을 찾은 태도에서 이런 믿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부를 때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여인이 말한 주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주종 관계에 있어서의 하나님, 신약에서는 만물의 주되신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세 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하는 ‘데오스’(θεος)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신 ‘파테르’(πατἠρ)인데 이 말은 아버지란 뜻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이 사용한 ‘큐리어스’(κυριος)란 칭호로 이것이 “주”인 것입니다.

  가나인 여인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한 대명사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이 여인의 호칭은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 고백으로 이것은 마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방불케 하는 것입니다.

  (2) 이 여인이 외친 첫마디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호소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에 호소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의 긍휼 하심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호소해야 합니다.

  (3) 이 여인이 주님께 대한 긍휼의 소소가 그의 딸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여인은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고 아뢰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그 내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기 위해 분명한 목적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인 것입니다.


  2. “주여 옳소이다”고 하는 믿음


  이 여인은 자기 딸을 고침 받으려는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귀신들려 고통을 당하는 딸을 구원하려는 애절한 어머니의 간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응답 받기까지 많은 시간과 어려운 여러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이 여인은 이런 고비를 믿음으로 잘 넘겼습니다. 그의 큰 믿음이 여기서 나타난 것입니다.

  (1)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기도를 들으셨지만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 편에서 내려 주시기 때문에 그 시기와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포기하는 기도는 큰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가나안 여인에게는 훌륭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 말씀도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는 그의 간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인내를 말합니다. 기도하는 자가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는 자가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의 응답에는 두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하나는 꼭 응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결의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구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 이 여인은 드디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권면에 따라 단 한마디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응답이라기보다는 절망적인 거절이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여인에게 소망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 가나안 여인에게 메시야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는 낙심천만하여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믿음을 기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의 말씀에 위축되어 물러간 것이 아니라 한발자국 더 앞서 갔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그녀의 기도는 끈질긴 기도였습니다.

  (3) 그러나 이 여인은 모욕적인 말로 기도를 거절당했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도와 달라는 이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태도는 이 여인에 대한 최종적인 기도 응답의 관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이런 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미 그 여인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개들이란 낱말은 물론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이방인을 개로 여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이 여인의 믿음과 겸손과 인내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녀와 개의 구별을 인정했습니다. 자녀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고 이방인인 자기는 개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자비를 바라는 자신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칭찬을 받은 것은 “옳소이다”고 말한 그의 태도에 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옳소이다”는 말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으로 주님께 나가는 자들에게 우리 주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고 하는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결론 : 우리는 마땅히 이 가나안 여인의 기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그는 주님께 찾아 나온 후 한번도 후회하거나 주님 곁을 떠난 일이 없었습니다. 응답이 없었지만 간구를 중단한 일도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다고 외면 당했지만 더 가까이 나가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말할 수 없는 수모까지 당했지만 자신은 그런 수모를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옳소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주님의 응답이 내려진 것입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의 믿음을 따라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36 ≈       7병 2어의 기적


  (본문 : 마태복음 15 : 29 - 39)



  서 론 : 성경에는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기적을 이루신 일이 두 곳에 나옵니다. 마14장에 나오는 기적은 5병 2어의 기적으로 어린아이와 여자 외 5천명을 먹이고도 12바구니를 남기신 일이고 오늘 말씀에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아이와 여자 외 4천명을 먹이시고 7광주리의 남은 조각을 거둔 일입니다. 이 일은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어느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많은 병자들과 무리들이 주님을 따랐는데 그들이 그 때까지 사흘간이나 주님과 함께 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에게 떡을 먹이신 것입니다.


  1. 산상 심령 부흥회


  예수님이 강사가 되신 심령 부흥회는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어느 산에서 사흘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타난 세 가지 역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나타난 것이 말씀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피곤하신 몸을 이끄시고 이곳 저곳 다니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하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눅4:43-44).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삼위의 하나님이시며 땅에 내려오신 후에도 그의 이같은 위치에 하등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가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히1:1-2). 예수님을 따른 많은 무리들은 병 고침을 받으려는 생각으로 좇았을지라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사명에 충실하셨던 것입니다.

  (2) 다음에 나타난 것이 신유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증거하시는 그 자리에는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주님의 고쳐 주심을 바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모든 질병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질병은 인간이 범한 죄로 온 저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해 지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3) 그리고 나타난 것이 기적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원하시면 그의 뜻대로 모든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세상 만물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그의 창조적인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에 그 목표를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배가 고프셔서 새벽길에 무화과나무를 찾으셨지만 기적으로 떡을 만들어 떡을 만들어 제자와 함께 먹지 않으셨습니다. 사미리아 땅을 지나가실 때에도 제자들을 시켜서 들어가 먹을 것을 사오도록 하셨지 기적으로 떡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이나 공명심이나 영광을 위해서는 절대로 그 자신의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하나의 교훈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능력을 받았다고 자신의 공명심이나 유익을 위할 목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희한한 일들을 연출하므로써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이 올리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을 가리켜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7:22-23).


  2. 떡을 먹이시게 된 이유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며 또 병을 고침 받기도 한 무리의 수효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에 달했다고 했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셔야 했는데 그들을 굶긴 채로 보낼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1) 주님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며 항상 견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시는 분”이심을 알고 늘 그 분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시103:8-10).

  (2) 무리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시장 끼를 잊고 주님을 따른 지가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중에도 주님을 따르며 그를 위하여 헌신하면 주님의 인정을 받으며 이런 사람에게 주님의 기적의 손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무리들이 길에서 기진 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공수로 보내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을 굶겨 두시지 않습니다.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필요 적절하게 그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3. 7병 2어의 기적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이 같은 그들의 말은 참으로 미련하고 우둔한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우직하고 완악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를 건넜지만 그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까? 반석에서 물이 강처럼 흘렀건만 들은 얼마 후, 목마름을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몇 일 전에 5병 2어의 기적을 친히 목격했지만 이런 사실을 잊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같은 주님의 물으심은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에게 가진 것이 없는 것을 알아야 그 후에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에는 나에게 있는 것을 무엇인가 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신 말씀했습니다(고후9:6). 제자들이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여 주셨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완악한 것입니다. 우리도 지난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얼마 안가 잊어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치료와 축복은 한번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 이런 기적으로 인하여 그 곳에 있었던 많은 무리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나 거두었습니다. 여자와 아이 외라고 말한 것은 그 당시 사람의 수효를 셀 때 어린아이나 여자들은 수효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생활을 통하여 그로부터 불쌍히 여기심을 받음으로 이 같은 기적의 역사가 우리의 생활에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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