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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4,578


  ≈ 128 ≈         세례 요한의 순교


  (본문 : 마태복음 14 : 1 - 12)



  서 론 :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사역을 위하여 온 사람이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온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메시야의 영광을 취해서도 안되고 메시야의 대접을 받아서도 안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듯이 사명을 완수한 그의 할 일은 이제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증거 했듯이 여자가 난 자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으므로 당연히 그의 죽음도 가장 위대한 죽음이어야 했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죽음은 순교입니다. 세례 요한의 순교야말로 그의 당연한 죽음이요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니기에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됩니다.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유사점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불의를 책망하다가 헤롯왕에게 순교를 당한 것은 선지자다운 순교이며 사명자로서의 훌륭한 죽음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1. 헤롯왕의 인간성


  신약에는 헤롯이란 이름이 여럿 나옵니다. 마2장에서 베들레헴 지경의 어린아이들을 죽은 헤롯이 헤롯왕 혈통의 제1인자로 그의 이름을 대 헤롯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아래로 아들들과 손자들로 6명의 헤롯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유대 지경에 있는 여러 지방의 분봉 왕 직을 나누어 누리며 권세를 잡았던 자들입니다. 그 중에도 베들레헴 지경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대 헤롯이란 자는 뇌물을 주고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 왕으로 임명받은 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동안 퇴락한 스룹바벨의 성전을 재건하기로 하여 이 대공사를 주전 19년에 시작하여 주후 64년경에 마무리졌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헤롯왕이 건설 중에 있는 성전에 출입하셨으며 완공을 보지 못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대 헤롯은 난폭한 성품과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집념으로 그가 사랑하던 아내 마리암메와 그의 아내의 조부인 힐키너느, 부인의 동생 아리스토불러스 그리고 자기의 아들까지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은 이 헤롯왕의 아들로 사마리아 여인 말다게 사이에서 태어나 갈릴리, 베리아의 분봉 왕으로 헤롯 안디바란 이름을 가지고 행세했던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를 일컬어 여우라고 부르신 일도 있으며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일도 있으십니다. 이 헤롯왕은 세례 요한을 죽인 후, 늘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이 유다에 퍼지자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착각하리 만치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2. 헤롯왕의 죄악


  헤롯 안디바는 혈통적으로 부전자전의 유전을 받아서인지 그의 생활면이 도덕적으로 패륜했습니다. 그가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겉보기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 것처럼 꾸몄지만 그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가 세례 요한의 책망을 들은 것은 하나님의 책망이었건만 그는 오히려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고 그를 목을 베어 죽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1) 그가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은 도덕적으로 타기 받을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너는 형제의 아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고 하셨습니다(레18:16). 헤롯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무력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2) 헤롯은 세례 요한의 책망을 무시했습니다. 헤롯은 인물됨이 다윗과는 천양지차였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의 연고로 책망을 들었을 때에 요가 젖도록 밤새 회개하는 통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세례 요한의 책망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그를 옥에 가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죄로 더러워져 있었으며 완고하고 강퍅했으므로 선지자의 책망이 그의 마음에 들어갈리 없는 것입니다.

  (3) 헤롯은 경솔한 맹세를 하므로 인생 일대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맹세는 모든 일의 최종적 결정이기 때문에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는 헤롯은 맹세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고 함부로 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석에서 그 마음이 흥겨운데다가 헤로디아의 춤에 매료되어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는 약속을 맹세로 한 것입니다. 그 맹세가 올무가 되어 의인의 목을 베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4)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 후,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아니했습니다. 무모한 맹세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잘못 맹세한 그 맹세를 잘못인줄 알고도 지킨다면 그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헤롯이 자신의 맹세를 지킨 일은 그 연회석에 앉은 자들에게 자기의 맹세에 대한 체면을 세우기 위한 일이었으므로 그의 행위는 어떤 구실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5) 헤롯이 요한을 죽인 후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서도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 세례 요한이 살아나 역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더욱 그의 생애에 두려움을 안겨 준 것입니다.


  3. 세례 요한의 순교


  세례 요한의 순교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요한은 불의한 일을 책망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그 당시 권세와 위세가 당당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찾아가 그 앞에서 그의 패륜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메시야를 증거한 후, 그의 사명을 마치면 순교로서 하나님께 갈 줄로 아셨습니다. 요한은 한때 예수님이 자기를 옥중에 갇혔을 때 구해내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시험을 받기는 했지만 그 후 주님이 보내신 증거에 의해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순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요한을 옥중에서 건져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헤롯을 죽이고 세례 요한을 구해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일을 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순교는 요한에게 합당한 죽음이며 영광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순교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것은 그 인도하심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와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길을 그렇게 정하셨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습니다(잠16:9).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일은 그 인도하심이 우리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거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려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한낱 부도덕한 폭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이로써 요한은 그의 이 같은 죽음을 통하여 소망을 이루었으니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언제나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이 작아졌으며 예수님의 활동을 위해 자기를 희생했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는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주님을 위한 생애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 129 ≈         광야의 잔치


  (본문 : 마태복음 14 : 13 - 21)



  서 론 :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군중들을 피하여 배를 타시고 빈들에 가셨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는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이 빈들에 모인 사람들이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도 5천명이나 됐다고 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병을 고치려고 따른 무리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이한 이적을 보고 따르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따른 무리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따른 일에 대하여 주님의 책망을 듣고 주님이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흥미를 잃고 주님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떠나는 많은 무리들도 그때 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병고침이나 받으며 이적이나 바라고 어떤 물질적인 혜택이나 바라다가 그런 곳에 만족을 얻지 못하고 영적인 문제로 들어갈 때 주님의 곁을 떠나는 것입니다.


  1. 불쌍히 여기신 주님


  주님은 자기를 따라 빈들까지 좇아온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쉬실 틈을 주지 않고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를 살필 수 있습니다.

  (1) 주님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마9:36). 그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올바른 목자의 구실을 못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해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명예와 재물을 위해 목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삯군에 지니지 않았습니다.

  (2) 병든 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병 고치심에 대하여 “이사야로 예언한바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마8:17). 이런 사명이 주님에게 있기에 주님은 그 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보시고 모두 고쳐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처럼 병든 자를 불쌍히 보십니다. 우리들은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의 능력을 힘입어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3) 그들의 굶주린 것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영적 양식을 주시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주 생활에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말씀에서 우리에게 풍족한 생활의 비결까지 가르쳐 주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모여든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또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달라서 능력과 권 위가 따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군중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배고프고 지친 줄도 몰랐습니다. 어느덧 날이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마음이 조급해진 제자들이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는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어떤 소년이 가지고 있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 담겨진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말씀은 너희에게는 가난한 자들을 먹일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일깨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에게 네 손을 펴라고 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며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명하셨습니다(신15:7-8). 우리의 이웃이나 형제들의 굶주림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2) 우리 하나님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이 적어서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께 통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군중들을 배불릴 많은 떡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시시한 것 가지고서는 어림도 없다는 생각에 자신들이 도와주기엔 너무나도 벅찬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네 손에 든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눅6:38).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을 위함이 아닙니다. 주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복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신15:10).


  3. 그것을 내게 가져 오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내게로 가져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어느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1) 축복은 봉헌에서 만들어집니다. 주님은 없는데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에는 반드시 우리가 바치는 것을 통하여 축복의 재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심을 때 그 심는 자에게 심을 씨와 양식을 주십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고후9:10).

  (2) 기적은 전부를 바치는 데서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소년이 전달한 것을 모두 바쳤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운 기적이 창조되었습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하고도 5천명을 먹였습니다. 사르밧 과부 집의 가루 통에서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서 기름이 마르지 아니했던 기적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종에게 바쳤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성전에서 헌금궤에 돈을 낼 때 동전 두렙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바쳤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나드향이 든 값진 향유를 전부 쏟아 부었습니다. 이같은 일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3) 주님은 우리의 바친 것을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은 손에 받으신 제물을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축사란 말은 ‘올로게오’로 찬양한다 또는 축복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축복에는 넘치는 보답이 나타납니다. 그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결론 : 주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군중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풍성히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주님은 굶겨 보내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친 것을 축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손에 받으신 제물을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지고 오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것을 가져갈 때 그 곳에 축사하시는 주님의 축복에 의하여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130 ≈         고난 중에 찾아오시는 주님


      (본문 : 마태복음 14 : 22 - 27)



  서 론 : 주님이 명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그 제자들을 가게 하셨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고난 중에서 주님의 새로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주님이 그들의 배에 오르자 고난이 그친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우리의 인생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비록 그 길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요 주님이 명하신 길이라 해도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 고난 중에 찾아오셔서 그 고난에 동참해 주십니다. 그 고난 중에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1.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자 그 많은 군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들이 바라는 메시야가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압박과 고난에서 구원해 내는 영광의 메시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 인하여 이 분이 바로 그 분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잡아 억지로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로 추대하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행동에서 벗어나려고 군중들을 각기 집으로 흩어 보내시는 동안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자기 보다 앞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행동에서 몇 가지 영적 교훈을 찾아보게 됩니다.

  (1)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시어 종의 모습으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시고 아버지를 높이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간하였을 때에도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고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마16:23).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는 시간에도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하시면서 고난의 쓴잔을 마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 이외의 것은 결코 행치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하신 그 일만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 예수님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어떤 기도를 드리셨습니까? 아마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많은 군중들의 그릇된 바른 메시야관과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무리들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이런 유혹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하셔야 했습니다.


  2. 고난 당한 제자들의 배


  주님의 재촉하시는 명에 의하여 배를 탄 제자들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 바다 한 가운데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바람으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날은 어두워 캄캄한 밤중입니다. 밤은 영적 흑암의 권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어두움의 권세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주님의 말씀의 빛을 우리의 인생 길에 비취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일었습니다. 이것은 고난을 당하는 인생을 말해 줍니다. 바다 한 복판에서 어두움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더 암담했던 것은 그 배에는 주님이 안 계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주님이 타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육지에 놔두고 자기들만 온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와도 믿음만 있다면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 계시니 그들의 믿음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들 앞에 부닥친 이런 일만 바라본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롬8:34). 제자들이 고난 중에 실패한 이유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난 중에도 담대하게 주님을 의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실패를 가져오지만 주님을 의뢰하는 자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생활을 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항상 예수님을 모시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모신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내주를 의미하지만 성령이 내주한 사람이라도 적극적인 면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3. 환난 중에 찾아오신 예수님


  제자들이 바다 가운데서 한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찾으신 시간은 밤4시경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새벽 3시부터 6시경 사이를 말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있는 힘을 다 기울였지만 바람은 더 강하게 불고 파도는 점점 더 높이 흉용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안되겠다고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자포자기했을 그 때였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가가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용기를 내라는 뜻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사41:10). 우리는 어떤 고난에라도 “안심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당황하지 말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수1:9). 우리는 이 말씀에 힘을 얻어야 합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 내 가까이서 나를 붙드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바람과 풍랑이 잠잠해 지므로 평안과 기쁨과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 131 ≈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본문 : 마태복음 14 : 28 - 36)



  서 론 : 주님을 태우지 않고 배를 몰고 바다를 건너는 중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를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기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 가까이 까지 이르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에도 서슴없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유령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운 나머지 고함을 쳤습니다. 이 때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기뻐했지만 아직은 바람이나 파도가 잔잔해 진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반가운 나머지 주님께 빨리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는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1. 베드로의 믿음


  베드로는 성격이 좀 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가장 모범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감히 상상도 못할 모험적인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도전한 것입니다. 그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갔다고 하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그의 믿음인 것입니다.

  (1)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능히 바다 물위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물위로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상식 밖의 일이요 상상을 초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라”고 하신다고 하여 걸어갈 수 있다고 믿는 일은 아무에게나 통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가 믿었다고 하는 증거는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갔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2) 베드로는 물위로 내려가기 전에 주님의 오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만약 예수님께 가려고 무조건 물위로 내려왔다면 물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하소서”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만용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간구에 분명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응답을 받고 물로 내려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응답이란 말을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오라”고 하시는 직접적인 음성을 듣는 것으로 알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 같은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응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에서 들어야 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주실 것입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했을 때 믿음의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로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일5:14-15).

  (3)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물위로 내려 바다를 걸었습니다. 믿음은 순종이 따를 때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노라고 하면서도 순종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된 것으로 결실도 없거니와 응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나를 버리고 말씀에 자기를 던지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가 기도의 응답을 받자 그 말씀을 믿고 배에서 바다 물위로 내려와 걸었다는데 있습니다.


  2. 바람을 보고 무서워한 베드로


  베드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얼마간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이 주님을 떠나 다른 곳으로 돌려지는 순간 그의 몸이 바다 물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물 속에 빠지게 된 일에 대하여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표적은 주님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목표점을 주님께 맞추어 물위를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고 바람을 보자 그는 무서워했습니다. “보고”란 말은 ‘브레폰’으로 베드로의 눈이 주님을 떠나 바람과 파도를 보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히12:2). 그런데 베드로는 바람과 파도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고 믿음으로 나갈 때는 자신의 주변에서 위협과 두려움을 주는 환난이나 어려움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일사불란한 믿음으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려는 시험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그곳으로 돌려지면 두려움이 오게 되고 담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즉시 잔잔해 지는 것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나 응답은 바람이 여전히 불어오는 그 어려움 중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계속해도 환난의 바람이 계속 불어 대도 우리는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당장엔 실제적으로 받은 것은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근거로 믿음으로 받은 줄로 믿고 기다리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새겨야 합나다(히11:1-2).


  3. 손을 내 미신 주님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 때 주님은 그에게 손을 내 미시고 위기에 놓인 베드로를 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약한 그릇입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확신은 가져야 하지만 인간적인 자신감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교훈은 우리는 완벽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응답을 받고 믿음으로 하는 일에도 시험이 올 수 있고 언제나 실패는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주님을 향하여 소리지르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쳐댄 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그 간구 때문에 위기에서 내 미시는 주님의 손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론 :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것은 의심에서 나옵니다. 의심하였느냐는 말은 ‘디스타조’(διστἀξω)로 망설인다 주저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바람을 보고 무서운 나머지 주저한 것입니다. 다음에 믿음이 적은 자는 바람을 보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을 봐야 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는 무서워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되 두려움을 버리고 주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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