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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8,590


  ≈ 120 ≈       씨뿌리는 비유


  (본문 : 마태복음 13 : 1 - 23)



  서 론 : 주님은 천국을 설명함에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겉으로 듣기에는 누구나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찾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비유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비유하시는 뜻을 영적으로 깨닫는 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일에 하나의 설명이 되지만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배척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자에게는 그 뜻이 전혀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를 알기에 더 혼선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복 있는 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신 대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아니라 고의적으로 진리를 대적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를 허락 받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1. 길가에 떨어진 씨


  주님은 교회에 모인 사람의 심령 상태를 표현하심에 있어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오랜 기간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그들의 신앙이 여러 형태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밝혀 주심으로 끝까지 열매를 맺음으로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성도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씨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 밭에 심겨지는 생명의 씨앗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모든 복음 전도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아 이 씨뿌리는 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씨뿌리는 자의 사명을 받으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1:8).

  그런데 이 씨앗이 떨어지는 밭이란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는 곳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받아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마음에만 머무릅니다.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10:16).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한다”고 하셨습니다(사55:7). 할례나 통회란 말은 회개를 가리키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의 마음이 마치 길가와 같이 단단한 사람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길가라고 표현한 것은 마음이 강퍅하여 굳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 마음이 길가처럼 단단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마음에는 말씀의 씨앗이 들어갈 리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다만 건성으로 들을 뿐 아무런 흥미나 관심을 갖지 못하며 마음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이 이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는 죄를 회개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회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돌밭에 떨어진 씨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돌이 많은 밭의 특징은 처음에는 땅이 얇은 연고로 싹이 곧 나오면서 어느 기간 급속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좀 커지는 과정에서 따가운 햇빛이나 바람이나 더위에 견디지 못하여 그만 쓰러지고 맙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 드리고 어느 정도 신앙 생활을 계속하지만 그러나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는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뿌리가 없어서 말랐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인 신앙의 뿌리가 그들에게 는 없기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견디지 못한 환난이나 핍박에 대해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대개의 경우 이런 핍박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므로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의 생애에 신앙 생활로 인하여 많은 환난이 찾아옵니다. 예수냐, 세상이냐, 신앙이냐, 돈이냐는 문제에 있어 주님을 배신하고 세상이나 돈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돌밭이란 아직도 정결함을 받지 못한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같은 시련으로 끊임없이 연단을 받아 정결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인내와 시련을 통해서 정결하게 되고 신앙이 성장하며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롬5:3-4).


  3.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


  “더러는 가시 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씨앗이 가시 떨기에 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이유는 그 가시나 엉겅퀴가 복음의 양분을 다 도적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엉컹퀴의 뿌리는 번식력이 강하여 그 주변에 광범위하게 뿌리를 잡기 때문에 이같은 밭에 씨를 심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밭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가시 떨기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는 뿌리로써 우리의 신앙을 좀먹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평생 교회에 나오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가시밭에 해당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먼저 그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결론 :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대하여 주님은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심령이 깨끗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심으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열매를 맺는 좋은 땅으로 기경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밭으로 가꿔 나가야 합니다.




  ≈ 121 ≈       복 있는 귀


  (본문 : 마태복음 13 : 10 - 17)



  서 론 :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허락된 사람이 있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방치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듣고 깨닫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귀는 복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주님은 복이 있는 귀가 따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귀란 단지 듣는 일에 머물러 있는 귀인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귀를 가리킨 것입니다.


  1. 제한되어 있는 천국의 비밀


  복음은 두 가지 냄새를 품깁니다. 하나는 구원에 이르는 향기요, 하나는 멸망에 이르는 냄새입니다(고후2:15-16).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했습니다(고후2:15-16).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므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주님은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게 하시고 그들의 눈은 보지 못하도록 감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하심에서 라고 밝히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성품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므로 결국은 그 죄악의 상태에서 영영히 고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온전히 자신들의 죄악에 있는 것입니다.

  (1) 그들이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밝히시기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겨졌다”고 하신 것입니다. 완악해졌다는 말은 죄로 강하게 굳어진 상태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마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이 열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야 열립니다.

  (2) 할례를 받지 못한 귀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할례 받지 못한 귀는 여호와의 말씀을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즐겨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렘6:10).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주님이 증거하시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말씀을 자기들이 욕으로 돌린 것은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 목이 곧은 사람의 귀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하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항상 성령을 거슬린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행7:51). 목이 곧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교만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천국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 비유를 쉽게 해석하므로 사람들로 깨닫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도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진 사람들만이 깨닫게 되는 것이지 완악한 마음이나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나 목이 곧은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천국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귀


  주님은 9절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귀라는 말은 원어에는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귀는 ‘오우스’(οὐς)로 이 귀는 마음으로 깨닫는 기능으로서의 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귀를 말합니다. 이런 말씀은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말미마다 계속적으로 나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했습니다(계2:7).

  (1) 들을 수 있는 귀는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육신에 속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말씀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신29:4).
  (2)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주셔야 합니다. 우리들은 육적인 음성은 잘 듣지만 영적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의 귀가 신령한 음성을 들을 수 있으려면 하나님께서 그 귀를 열어 주셔야 합니다.

  (3) 주님의 양이 되어야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로써 그의 양들이 어떻게 목자를 따르는가에 대해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엉 도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0:3-5).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고 하신 말씀 가운데 허락되었다는 말씀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미치게 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성령의 역사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의 전달자는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중생케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성화 시키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하신 것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게 해 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고전2:10-12).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진리로 이끄시고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게 하시는 능력을 주십니다.

  사람이 만약에 성령을 훼방하고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그 같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전혀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의 죄가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만약 우리 마음속에 죄를 품고 있으면 성령이 우리에게 계시의 영을 어둡게 하시므로 들어도 깨달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의 활동을 마음껏 해드리도록 성령을 거역하거나 근심시키는 죄를 멀리하고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실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시지만 그렇다고 모든 비밀을 알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계시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론 : 귀로 들어간 말씀을 깨닫는 곳은 마음입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보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귀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보냅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지 못하고 인간의 지식으로 받아 드릴 때 그 사람은 바리새인들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 122 ≈       복 있는 눈


  (본문 : 마태복음 13 : 10 - 17)



  서 론 :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이런 주님의 말씀은 분명히 소경의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육신의 소경인 것이 아니라 영적 소경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바로 이 영적 소경임을 알려 주시기 위해 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이곳에 나와 있는 소경이란 원어는 ‘옵달모스’(ὀφθαλμὀς)로 마음의 눈, 통찰의 눈으로 해석이 됩니다. 이 눈이 열려 있지 못하면 신령한 것을 전혀 바라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많이 보았으면서도 그가 메시야이심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은 이 눈이 감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우리의 눈은 새롭게 열려져야 한다.


  우리의 눈이 새롭게 열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도 볼 수 없으며 신령한 것도 볼 수 없고 소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열려진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인간 본래의 눈은 인간이 죄로 타락했을 때 신령한 것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자마자 먼저 자신들의 몸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가졌습니다. 생령의 기능을 가졌던 눈이 범죄하므로 영적인 기능이 마비되어 육신에 속한 것만을 바라보게 됨으로 그들이 맨 먼저 서로간에 벗은 몸을 바라보았을 때 음란한 마음이 들게 되어 부끄러움을 느껴 무화과 잎으로 가리게 된 것입니다.
  (2) 타락한 인간의 눈은 탐욕의 눈이 되었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바라보는 탐욕의 눈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눈은 무엇이든지 정욕과 탐욕으로 받아 드리기 때문에 그 마음에 죄악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약1:5).

  (3) 타락한 인간의 눈은 음심이 가득한 눈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성루에서 이 눈 때문에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음란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벧후2:14).

  이런 우리의 눈이 새롭게 열려지지 않으면 이 눈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범죄 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죄악의 소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우리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 같은 신령한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눈을 주십니다. 누구의 눈이 신령한 것을 바라보는 밝은 눈이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2. 신령한 눈이 열려진 사람의 복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신령한 것을 바라볼 있는 눈은 어떤 복을 받는가?

  (1) 하나님의 약속을 액면대로 믿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그 눈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네 믿음대로 되리라”는 말씀에 따라 약속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생애는 언제나 소망이 있고 승리가 있으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2)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믿음의 기도를 들임으로 구하는 것마다 받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기도한 것을 받는 줄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약속이 더딜지라도 기다립니다. 받은 줄로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3)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온 몸이 밝아집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밝다는 말은 몸이 정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 일에나 거리낌이 없는 깨끗한 양심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간구하는 기도마다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요일3:21-22).

  (4)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보이는 세상에 눈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떤 역경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어떤 시험 중에도 인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소망은 현실적인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3. 신령한 눈은 어떻게 열려지나?


  영의 눈이 밝아지는 일은 인간적인 노력이나 수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① 첫째로 마음이 정결한 자의 눈이 열립니다. 영의 눈은 마음의 눈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맑지 않으면 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결한 마음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음 받은 마음입니다. 이 일은 회개하여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주님은 예수님을 거역하는 바리새인들의 무리들을 향하여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3:26). 바리새인들이 영의 눈이 감겨져서 신령한 하나님의 나를 바라볼 수 었었던 것은 그들의 안이 더러웠기 때문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깨끗하게 하면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② 다음에 영의 눈은 육의 눈이 소경 되었을 때 열려집니다. 세상 것만 바라보고 세상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의 눈이 열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③ 다음에 지혜자의 눈이 열립니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닌다”고 했습니다(전2:6). 지혜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사람을 말합니다.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 지혜가 그의 신령한 눈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④ 열매를 맺는 자의 눈이 열립니다. 입으로만 주여주여 할뿐 그의 생활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의 눈이 열려질 서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세사을 바라보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눈은 열매 맺는 사람들만이 열려져서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의 눈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확실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순종의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에 의해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눈이 열려져 있습니까? 영의 눈이 열리려면 세상 눈이 감겨져야 합니다. 영생, 소망, 천국, 언약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23 ≈       함께 자라는 알곡과 가라지


  (본문 : 마태복음 13 : 24 - 30)



  서 론 :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싹이 나고 결실 할 때에 밭에 가보니 가라지가 보였습니다. 주인 집 종들이 놀라 집으로 달려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는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이 비유는 먼저 네 가지 밭으로 비유하신 마음의 밭과 비슷한 내용으로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님이 알곡과 가라지로 비유하신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은 밭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으로 이 땅 위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 나가며 확장되어 나갑니다. 좋은 씨란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교회를 세우시는 일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대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씨를 심는 장소로 교회의 터를 닦아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알곡과 함께 가라지가 자랐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가라지의 발견


  우리는 36절 이하에서 이 비유를 설명하시기를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며 추수군은 천사들이요 밭은 세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밭을 세상이라고 하신 것은 복음을 뿌리는 곳을 말한 것이요 좋은 씨가 자라는 곳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라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라지를 발견한 종들은 심겨진 좋은 씨를 맡아 그들을 양육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씨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싹이 나고 결실 할 때에 보니 심지도 않은 가라지가 보인 것입니다. 그 종은 놀란 나머지 그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아주 뽑아 없애리라고 마음먹고 “뽑기를 원하시나이까”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주인은 뽑지 말고 가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그때 뽑으라고 하셨다면 불완전한 인간들은 가라지보다 더 많은 수효의 알곡을 다쳤을 것입니다.

  (1) 교회는 가라지도 자라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만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알곡만 자라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가라지가 발견되면 그것을 뽑아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시험은 이런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알곡도 자라고 가라지도 함께 자라는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2) 가라지를 덧뿌리는 자는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이 원수란 바로 마귀라고 39절에서 설명해 줍니다. 마귀는 교회에 가라지를 덧뿌리는 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라지는 중동지방에서 자라는 독보리를 말하는데 이 가라지는 줄기나 모양은 보리를 닮았지만 쓸모 없고 해로운 식물로 사람이 이것을 먹으면 구토증과 경련과 설사를 일으키며 사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마귀가 밭에 가라지를 심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해를 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3) 이 가라지는 사람들이 잘 때에 곡식 가운데 덧뿌린다고 하셨습니다. 잔다는 말은 영적 표현으로 마귀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심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마귀는 그 가라지를 심을 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심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게 처음부터 거짓과 외식과 속임수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이 가라지라고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결실하는 시기임으로 그 뿌리가 사방에 뻗쳐 있으며 많은 알곡들과 뿌리와 줄기가 엉켜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잠을 잘 때란 교회가 기도가 없을 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가라지를 덧뿌립니다.

  (4) 가라지는 싹이 나고 결실할 때 보였다고 했습니다. 가라지의 식별은 인간의 판단으로 진부를 가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눈에 가라지로 보이는 것도 가라지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눈에 가라지로 보이지 않은 것도 가라지일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엔 사도로 보였지만 가룟 유다는 분명히 가라지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처음부터 그가 가라지였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결실할 때란 그 가라지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났을 때를 말합니다. 죄악이 관용하여 머리를 쳐들 때입니다. 비 진리로 마귀의 도구로 머리를 쳐들어 자기 모습을 보였을 때를 말합니다.

  (5)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반드시 뽑혀야 할 존재지만 그것을 잘못 손대는 날이면 곡식까지 뽑힐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2. 가라지의 형태


  가라지는 마귀가 심은 것으로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했습니다.

  (1) 가라지는 거짓 형제의 너울을 쓰고 자랍니다. 거짓 형제란 진리에 대한 신앙고백이 다른 사람을 가리킵니다. 결실할 즈음에 이르러야 그 정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그 초기로부터 이단자가 등장했습니다. 이들 이단자들은 성장함에 따라 마귀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다른 이단자들에게 포섭되어 그와 한 무리가 되기도 하며 스스로 성경을 잘못 풀어 진리를 대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도 가장 위험한 거짓 형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무리들입니다. 이들 무리들은 우리의 구원을 송두리째 빼앗기까지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2) 가라지는 악한 누룩을 말합니다. 교회에는 악을 뿌리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악한 누룩이라고 부릅니다. 죄악으로 이 누룩을 번지게 합니다.  잘못된 교훈으로 만연시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케 합니다.


  3. 가라지의 처리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가라지의 처리는 하나님이 친히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추수 때까지 자라게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가 사탄의 가라지들에 짓밟히기까지 그들의 번성을 그대로 방관치 아니하십니다. 시험의 그물에 던져 뽑기도 하시며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핍박으로 견딜 수 없게 하심으로 처리하기도 하십니다. 혹은 세상 법으로 뽑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예리한 진리의 말씀에 견디지 못해 쫓겨나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최종적 처리는 장차 주님의 재림의 날에 추수군들에 의해 뽑아 불사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뽑을까 염려한다고 하신 것은 가라지의 식별이 어려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라지는 오랜 기간 교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랐기 때문에 그에게 동조하는 무리나 그의 혈육의 친척 중에 있는 알곡이 함께 뽑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우리들 눈에 혹 천사의 너울을 쓴 가라지로 보여도 우리의 손을 대기에 앞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손으로 뽑을 수 있도록 지혜를 써야 할 것입니다.

  결론 : 우리에게는 마귀의 권세를 능히 이길 만한 여러 가지 무기가 있습니다. 성령의 검인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검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기도가 있습니다.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는 믿음의 방패가 있습니다. 주님은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종국적 승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 124 ≈       천국의 생명력


  (본문 : 마태복음 13 : 31 - 35)



  서 론 : 예수님은 천국을 겨자씨와 누룩으로 비유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겨자씨로 비유하신 것은 천국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가장 놀라운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또 누룩으로 비유하신 것은 천국은 그 번식이 빠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1. 천국과 겨자씨


  여기서 주님이 천국을 겨자씨로 비유하신 말씀은 천국의 발생과 그 놀라운 성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의 특징은 그 씨가 지극히 작은 반면에 그 나무는 씨에 비해 지극히 크다는데 있습니다. 이 겨자씨는 그 길이가 긴 것은 4미터가 넘는 것도 있는데 가을철 그 가지가 견고해 질 때면 새들이 햇빛을 피하는 그들의 안식처로 혹은 폭풍우를 피하는 피난처로 깃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토록 작은 씨앗이 어떻게 큰 나무를 이룰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그 씨앗이 아무리 작아도 그 안에 생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복음 속에 깃들여 있는 생명력은 마치 이 겨자씨와 같은 능력이 있기 때문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요1:4). 이 생명의 역사는 마치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은 존재처럼 보였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온 세계를 뒤덮는 큰 겨자나무를 이룬 것입니다.

  (1) 예수님의 태어나심은 이 겨자씨의 등장이십니다. 아무의 관심도 없는 가운데 베들레헴 어느 농가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어린 작은 생명이 세계의 역사를 바꿔 놓았으며 인류의 운명을 변경시켰으며 새로운 인류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아기 예수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지 아니한 겨자씨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생명 그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생명이십니다.

  (2) 이 씨앗은 또한 복음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세계를 움직일 만한 위인들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들로 배운 것이 없고 기껏해야 자기 집안에서 한 가장으로나 여생을 마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나간 복음이 온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로 사도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졌습니다. 이것은 그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에 있었던 것입니다.


  2. 생명의 열매를 나타낸 겨자씨


  생명력이 있는 겨자씨는 내 마음속에 떨어질 때 놀라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1) 하나님의 생명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율법이나 양심이 아닙니다. 오직 겨자씨로 떨어진 복음의 씨앗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씨앗이 주는 놀라운 결실을 바라보지 못한 채 받지만 결과는 엄청난 결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신분을 가져다줍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줍니다. 우리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지만 이 지극히 작은 복음의 씨앗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4) 이 씨앗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하게 됩니다. 죄에 얽매었던 우리의 마음이 진리로 인하여 자유함을 얻습니다. 율법에 속박 받아 정죄에 빠졌던 것이 그 정죄의 사슬을 끊고 정죄에서 벗어납니다.

  (5) 이 씨앗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전에는 사망의 열매를 맺었지만 우리 속에 심겨진 이 씨앗으로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씨앗은 그 안에 있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놀랍도록 성장한다는 진리를 주님은 겨자씨의 비유로써 그 비밀을 밝히셨습니다.


  3. 누룩의 비유


  주님은 다른 또 하나의 비유로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을 가지고 천국으로 비유하신 것은 복음의 생명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누룩은 좋지 않은 교훈이나 죄악의 번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비유에 적용하신 대상은 반드시 그 적용목적이 동일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누룩이 가루 속에서 나타내는 능력이, 천국을 이루는 복음의 생명력으로 비유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누룩이 만약 가루 속에 넣었지만 그 가루를 부풀게 하지 못한다면 누룩은 이미 누룩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만약 복음이 누룩처럼 그의 생명력을 번식시킬 수 없었다면 복음은 이미 이 땅위에서 자취를 감추어진지 오랬을 것입니다.

  (1) 복음의 누룩은 먼저 온 가정에 퍼집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빌립보 간수는 그 후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떨어진 복음의 누룩은 자기 집안의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한 것입니다.

  (2) 복음의 누룩은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 아무리 악한 마음이라도 이 누룩이 들어가면 그의 생명력이 그의 인격을 지배하게 됨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롬12:2). 복음은 우리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일을 능히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누룩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최대한도로 발효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게 되고 소망 중에 살아가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충만한 생활입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의 극치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갈2:20). 사도 바울 속에 있었던 누룩은 그의 발효성이 대단히 컸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성령 충만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결론 : 복음이 겨자씨와 같이 그 안에 생명력이 있으려면 그 씨앗이 좋은 땅에 심겨져야 합니다.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면 그 말씀의 씨앗이 겨자씨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밀가루가 누룩으로 말미암아 부풀려면 그 누룩을 내 마음에 맞이해야 합니다. 누룩이 번지도록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 누룩이 구석구석에 미치도록 육신에  속한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누룩으로 부풀어오르도록 성령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겨자씨와 누룩의 역사를 통하여 나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나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도록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 125 ≈         보화를  사라


  (본문 : 마태복음 13 : 44 - 46)



  서 론 : 밭에 감추인 보화나 값진 진주는 해석이 구구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3:7-9절에서 예수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소유할 만한 분이심을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소유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보화로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천국의 비유로 말씀하신 밭에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는 바로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의 기쁨과 그의 생애의 새로운 변화를 가리킨 것입니다.


  1. 밭에 감추인 보화의 경우


  어느 한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구태여 농부나 나그네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밭은 사람이 씨를 뿌려 경작하는 장소를 말한 것이 아니라 곧 세상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밭은 세상이요”라고 주님이 그 전에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평소에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생의 길을 간절히 찾은 사람입니다.

  밭으로 표현된 이 세상은 이 보화로 비유된 영생도 진리도 소망도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드디어 이 보화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는 진리가 되시며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값진 인생의 보화가 되시는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보화를 발견했을 때의 감격에 대하여 이처럼 고백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한 것입니다(딤전1:15). 바울의 감격은 이토록 컸던 것입니다.

  누구나 이 보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보화의 진정한 소유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화란 ‘데사우로스’(θησαυρὀς)로 어느 한 덩어리뿐만의 보화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보배함을 의미하며 보배를 많이 쌓아 둔 창고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같은 보화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충만히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보화가 가득히 들어 있는 보배 창고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1) 이 보화는 감추인 보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세상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으로 그리스도야말로 감추인 보배로 어느 한 사람도 이 보화를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 온 비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1:26-27).

  사람이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려면 하나님께서 그 눈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의 눈을 열어서 이 보화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겸손한 자의 눈을 열어 주심으로 이 보화를 소유하게 하십니다.

  (2)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보화를 숨겨두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발견  했다는 말은 ‘휴론’(εὺρὠν)으로 ‘만난 후’란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 비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기뻐했다는 말은 이 보화를 소유한 마음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생명의 보화로 발견한 사람의 신앙적인 자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그 보화를 아무렇게나 버려 두지 아니합니다. 반드시 깊숙한 곳에 숨겨둡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마음에 간직해 두는 진실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집사를 선택할 때의 자세에 대하여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딤전3:9).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기 때문에 이 비밀을 마음에 깊히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숨겨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람들에게는 그의 생애에 놀라운 기쁨이 따릅니다.

  (3) 이 사람은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소유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이처럼 완전히 소유하려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마10:37-38).

  우리가 이 보화를 온전히 소유하고자 한다면 물질에 대한 욕심, 곧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는 이 보화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이 보화를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자기 부인은 정욕과 탐심을 이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기의 소유로 가지려면 우리는 그 분을 위하여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2. 값진 진주의 경우


  주님은 또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   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진주는 금은방에서 살수 있는 보화를 가리킴이 아닙니다. 이 진주는 심히 값진 진주로 영생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진주를 구한 이 사람은 영생을 얻기를 갈망하는 구도자처럼 보여집니다. 그는 많은 종교를 찾았으나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자기가 생각한 것과 같은 아주 귀한 진주를 구한 것입니다. 이떄에 그 진주장사가 기뻐한 그 기쁨이야말로 말할 수 없이 컸던 것입니다. 그는 지체치 않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 진주장사는 율법에서 영생을 얻으려고 애쓰는 어느 율법에 열심 있는 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온전한 종교를 구하기를 애쓰는 이방종교가일 수도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 보화는 보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 보화를 찾는 태도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보화를 발견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순탄한 가운데서 만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이 진주장사처럼 고생과 시련 끝에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한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역사하시는 은혜임으로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이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견했다고 해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의 경우도 있지만 36년간이나 앓았던 중풍병으로 인하여 주님을 만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결론 : 밭에 감추인 보화나 좋은 진주는 너무도 값진 보화입니다. 이것을 소유하는 일은 자기 소유를 다 팔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값싸게 이 보화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이 보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보화의 가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 보화 하나만으로 자기의 소유물로 대신하고 자기 인생의 소망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만이 이 보화의 참 소유지가 될 수 있습니다.





  ≈ 126 ≈         서기관의 책임


  (본문 : 마태복음 13 : 47 - 52)



  서 론 : 주님은 천국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시는 중에 본문에서는 물고기를 잡는 그물로 비유하셨습니다. 천국을 감추인 보화나 값진 진주와 비교하신 비유는 복음 속에 숨겨져 있는 생명의 가치를 나타내신 것이며, 이곳에서 천국을 물고기를 잡는 그물로 비유하신 것은 천국의 값진 보화를 가진 사람과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구별하여 심판하실 것을 나타내신 비유입니다. 그물을 친 바다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야 할 어부들입니다.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어디든지 우리의 발이 닿는 곳에 이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1. 그물에 가득 차야 한다.


  이 물고기의 비유는 종말적인 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비유의 뜻을 살펴보면 인류의 심판을 이루는 종말이 오려면 먼저 고기가 그물에 가득 차야 합니다. 그물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충만한 수효가 채워져야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주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14).

  (1) 이 물고기를 가리켜 각종 물고기라고 하셨습니다. 바다는 온 세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곳에 잡히는 물고기란 각종 물고기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에는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특별한 계층의 차별도 없으며 학벌이나 문벌의 차등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곳이요 가증 민주적인 곳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교회로부터 싹 텄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2) 교회는 물고기를 강권하여 채우는 곳입니다. 물고기들이 스스로 그물로 들어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고기 떼들을 고기 있는 곳으로 몰아야 하고 그물을 물고기 있는 곳에 쳐서 물고기를 그물로 잡아야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주님은 눅14:21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강권하여 채워진 물고기들은 모두 구원을 얻은 사람들만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택함을 입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청함만을 입은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2.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는 심판


  각종 물고기가 그물에 가득히 차면 반드시 고르는 작업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그물에 가득 차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 대하여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고기 중에는 좋은 것이 있고 못된 것이 있는 것처럼 교회에 나온 의인 중에도 악인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좋은 씨를 심은 밭에서 가라지가 보였을 때 그것을 뽑으려는 종들에게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일치되는 것으로 가라지를 뽑을 때가 된 것입니다.

  (1) 좋은 고기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백성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들이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7:4).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유업으로 받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못된 고기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버림받을 사람들을 말합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히6:7-8).

  이들은 주인이 원치 아니하는 들 포도 열매를 맺은 사람들입니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탄식하시기를 참 포도 열매를 맺히기 위하여 애쓰셨지만 그들이 결과적으로 맺힌 열매는 들 포도 열매였다고 하신 것입니다(사5:1-2). 이들은 불법을 행한 자들로 낙인이 찍힌 사람들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서기관의 책임


  이런 비유로 경종하신 주님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시기관이란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주의 종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서기관이 할 일은 중요합니다. 그물에 걸린 고기들을 잘 키우는 책임이 이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에 대하여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주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곳간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 것이란 신약 성경을 가리켰고 옛 것이란 구약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물에 든 물고기로 비유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곳간에 새 것과 옛 것을 양식으로 삼고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곳간에는 양식이 풍족합니다. 탕자는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고 탄식했습니다. 서기관들은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고 했습니다.
  결론 :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좋은 것과 악한 것을 가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가르는 심판에 좋은 것으로 천국 그릇에 담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맡아 양육의 책임을 진 하나님의 종들은 주인의 곳간에 있는 새 것과 옛 것을 부지런히 양 무리들에게 먹여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은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마24:45-46).




  ≈ 127 ≈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본문 : 마태복음 13 : 53 - 58)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에 내려가셨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이상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회당에는 많은 고향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며 그가 행하시는 능력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심히 놀라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그런데 그들이 놀랜 것은 지혜의 말씀이나 그가 행하시는 능력에 놀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그 동네에서 살아온 목수 요셉의 아들이요, 그 모친은 마리아,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니냐? 이들은 다 우리 중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이 사람이 행하는 이 기이한 일이 어찌 된 일이냐. 그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난 것이냐? 그들이 예수님은 배척한 일은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1. 예수를 배척한 이유

  
  고향에서 목수 요셉의 가정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가정입니다. 작은 고을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요셉의 가정은 목수의 가정으로 그리고 사랑과 평안이 넘친 복된 가정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아버지를 도와 목수의 일을 해 왔으며 그 동리에서 모범 청년으로써, 효자로써, 성실한 일꾼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아 온 처지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배우지 못했으며 다른 어떤 특별한 재간이 있었던 것도 아님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고향을 떠난 지 얼마 안되어 고향에 나타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이한 일을 행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생애를 어려서부터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가정에 관한 일도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인간적인 경험과 생각을 넘어서 예수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아무리 지혜가 출중하고 능력을 행한다고 해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오해하여 배척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 목수의 아들로 알고 있는 신앙


  우리가 예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는 문제는 그를 영접하는 일에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이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를 목수의 아들로 알고 그 이상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는 먼저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야 하며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이 일을 이루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육신의 생각이나 지혜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2:9-12). 그래서 그 고향 사람뿐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들까지도 그를 믿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요7:5).

  (1) 예수를 목수의 아들로 아는 것으로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의 태어남과 그의 가족 상황에 대해 너무나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생각은 그 어떤 정황에서도 예수를 목수의 아들 이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예수를 나사렛 땅에서 자라난 한 목수의 아들로서 그 이상의 가치를 부어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2)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의 안간으로 여기고 인격적으로 높이기는 합니다. 그리하여 그를 세계의 4대성현으로까지 우러러 받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타난 생애를 관찰하여 그의 위대한 생애를 성현의 자리에까지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물의 창조주이신 사실이라던가 그가 세상의 구주이신 사실이나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 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3) 기독교 안에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래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인되고 있습니다. 그의 동정녀 탄생이 부인되고 그의 이적 행하심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다만 인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전달한 하나의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로 보고 그 사랑으로 인류가 평화를 누리며 가난한 자의 해방자로 억압을 당하는 자들의 구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성령이 주시는 계시의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옛날 나사렛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3. 참 믿음을 소유한 자의 축복


  나사렛 사람들은 인간적인 면에서 생각할 때 예수와 가까운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자기 고향에서 나신 영광의 메시야로 인하여 기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므로 스스로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축복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했습니다(살후3:3).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행13:48). 이처럼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물인 것입니다.

  (1)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해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것은 모두가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받는데 아버지께서 주님 앞으로 이끄시는 사람들만이 이 은혜의 동참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보았고 그의 입에서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기적을 보기는 했지만 그를 배척한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에 이끄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2)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심이 없는 사람은 예수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없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참 믿음을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생이심을 깨닫게 하는 지식은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 풍조에 밀리거나 세상 학문에 현혹되어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지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을 자라게 하는 요소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얻을 수 있는데 이 지식은 바로 성경이 가르쳐 주십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벧후3:18).

  결론 : 이제 인본주의 신앙의 물결이 온 세상에 팽배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견고히 잡아야 이런 불 신앙의 물결을 거슬려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시의 정신을 받아 마음 눈이 밝아져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배움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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