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마태복음 12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9,340


  ≈ 112 ≈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본문 : 마태복음 12 : 1 - 8


  서 론 : 복음서에서 안식일에 관한 논쟁은 주님과 바리새인들 간에 신랄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은 그 법대로 집행한다면 사형에 해당되는 일임으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밝은 지식을 가진 랍비들을 예수님의 행렬에 끼게 하여 율법을 어기는 사례를 일일이 확인하므로 법적인 증거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셨습니다. 이 때 주님의 제자들이 매우 시장한지라 그 밀밭에 있는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1. 최초의 안식일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안식일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시고 하나님이 이 안식일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조주로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주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분입니다(골1:15-17).

  안식일은 이처럼 원래가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로 축복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축복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안식일을 율법에 정하시고 이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식하신 안식일의 참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의 엿새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안식의 축복을 주시려는 의도에서 이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아담과 그의 자손들로 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케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므로 이같은 안식의 축복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안식의 땅으로 특별히 만들어 놓은 에덴에서 내어 쫓겼습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면서 인간의 참 안식을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하신 가나안 땅이 그들의 안식의 땅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에서 결코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 안식일의 참 모습이 히브리서 4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히4:8). 제 7일에 관한 성경의 설명은 하나님의 안식으로 ‘내 안식’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며 순종하는 자들이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2. 구약의 안식일


  구약에는 모세의 율법에 처음으로 안식일에 관한 규례가 나옵니다. 율법에서 제 4계명으로 안식일의 규례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안식일은 절대적인 요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따라 지킨 안식일은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안식 후 첫날인 주의 날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원래 율법이란 이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이 사람을 주장하여 정죄하였고 심판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어기는 일은 곧 저주를 자초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대상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더 잘 지키려는 의도에서 율법에서 명한 것 외에도 소위 장로의 유전이란 것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결코 의의 전제 조건으로 주신 규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의를 얻는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문제에 대하여 갈라디아서에서 두 가지 분명한 교훈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했습니다(갈3:2).


  3. 신약시대와 안식일


  그러면 신약 시대에 와서 안식일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해답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골2:16절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치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월삭이나 절기처럼 안식일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월삭이나 절기가 율법적인 절기로 폐해졌다면 안식일 역시 율법적인 절기로 폐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것을 법대로 지키지 못할 때 율법이 규정한 온갖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 율법적인 절기도 함께 지켜야 하며 율법에 규정된 모든 법도 온전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실체가 되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림자인 안식일은 다른 율법과 함께 폐해졌습니다.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키는 날은 ‘주의 날’입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날을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안식의 완성입니다.

  안식은 쉼을 얻는 것인데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이 안식일의 대   용품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법에 얽매어 저주나 받을 안식일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그의 영원한 생명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이미 안식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주의 날’을 주셨습니다. 주의 날은 율법적으로 지키는 날이 아닙니다. 즐거움과 감사와 사랑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도덕률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4계명에 나오는 안식일은 이 도덕률에서 제외시켜야 합니다.

  주님은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성경적인 근거를 대시면서 다윗 왕의 경우를 예로 들어 공격하셨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제사장외에 먹지 못하는 전설병을 먹은 사례를 드시면서 아무리 율법이 금지시킨 성별된 떡이라도 배고파 죽을 지경에 이른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명을 건지는 일에 허용된다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한가지 사례를 들었는데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짐승을 잡는 일이나 떡을 진설하는 일 등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일은 율법이 정죄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드리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바리새인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폐해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구약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규례대로 주일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천국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면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이 날을 지켜야 합니다.    





  ≈ 113 ≈         안식일의 참 의의


  (본문 : 마태복음 12 : 9 - 13)



  서 론 : 예수님을 송사하려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주로 회당에서 지내셨기 때문에 회당까지 찾아 들어왔습니다. 회당이란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인데 예수님을 송사하려는 무리들은 율법적인 근거를 잡아 예수님을 송사할 목적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옳은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분명한 해답을 듣고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간계에서 그리한 것입니다. 랍비들의 안식일 해석에 따르면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은 하나의 의료 행위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런 질문에 예수님은 구덩이에 빠진 한 마리 양의 비유를 통해서 기묘하게 말의 올무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1. 무엇이 더 귀하냐?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람이 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안식일의 종을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사람들에게 즐거운 날이 되지 못하고 어기면 형벌 받는 날이요 지키려면 힘겨운 날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안식일의 종의 자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안식일의 멍에를 벗어버리게 하시고 저주나 정죄를 받음이 없이 하나님을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막2:27-28).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일에 지친 피곤한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감사와 즐거움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같은 목적에서 벗어나 안식일 때문에 사람들을 정죄하고 사람들이 지기에 곤비한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오히려 사람으로 더 큰 정죄의 멍에를 메게 만들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시며 안식일의 올바른 정의를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안식일관  만이 참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영적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분을 오히려 율법으로 정죄하기 위해 송사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더 귀한 것인가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 순서는 이렇습니다. 안식일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더 귀한 것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2.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을 송사하려는 무리들은 언제인가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진 동전을 가지고 와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은 것이냐? 고 질문한 일이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시므로 그들은 이 기이한 주님의 대답에 송사하려든 그들의 음모가 무산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주님의 입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에서 이 문제로 주님을 송사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를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은 일제히 주님께로 행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는 그들의 질문에 주님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이 가지신 특유의 지혜로 그들의 올무의 함정을 기묘하게 피하셨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들에게 명하신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처럼 물었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아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가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 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고 하셨습니다(출23:3-5).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안식일과 상관없이 따라야 할 명령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분명히 율법을 어긴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을뿐더러 합당한 일이란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가치를 참으로 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박 넝쿨로 인하여 뜨거운 햇살로 혼곤하여 하나님 앞에 불만을 토했을 때 요나를 향하여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만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죄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욘4:10-11).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육축의 생명까지 아끼시고 사랑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에 따라 합법적인 일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사람의 구하는 일에 안식일이 장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생명까지도 귀하 여기시어 구덩이에 빠져있는 것을 반드시 건져내야 하겠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이들 짐승보다 얼마나 더 귀한 것입니까?


  3. 안식일의 의의


  안식일은 그 규례를 어기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안식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 의식에 따라 하나님께 경배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이처럼 복음을 전하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안식일은 선한 일을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선의 표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데 있습니다. 구제하는 일도 안식일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날입니다. 누구라도 안식일 때문에 그의 신앙 생활이 속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안식일을 사람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하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일용할 양식을 얻는 일에 사용하고 육신의 정욕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고 세상 재미를 만족시키는 일에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지금 율법과 같은 어떤 의문에 쓴 법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메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강제적이요 정죄적인 율법은 이제 영원히 그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는 예수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날이 이런 날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주의 날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복된 날로 지켜야 합니다.





  ≈ 114 ≈       자기를 나타내지 아니하신 이유


  (본문 : 마태복음 12 : 14 - 21)



  서 론 :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명은 소리 없이 조용히 진행되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 것을 항상 당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 근거했습니다. 이 예언에서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특징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나의 택한 종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종으로 나와 있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택하신 종입니다. 종이란 말은 예수님의 비하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택한 종이란 사람의 몸으로 자기를 낮추어 세상에 오신 그의 독생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기까지 복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택한 종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가리켜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류 가운데서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하시고 그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6:8). 최초로 지으심을 받은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인간은 없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롬5:12). 모든 인류는 이처럼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나타내실 때 내가 기뻐하는 자란 말을 쓰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아들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우리 역시 그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혼자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생애에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강건함을 주시고 범사에 축복해 주시려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표현하심에 있어서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자라고 나타내신 ‘호아가페토스“란 말은 ”오직 유일하게 사랑하는 자란 뜻으로 하나님께 오직 한 분뿐이신 독생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말입니다.


  2.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하시는 사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이라고 하는 ‘크리시스’란 말은 정죄, 공의, 의를 가리키는 말로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정의하시기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심판 받을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신 그의 아들을 믿으면 우리는 모든 정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사실을 이방에 알리시기 위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성품


  19절부터는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성품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그가 다투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악의에 찬 모함을 들으셨지만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누구에게나 사랑과 진실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주님은 혹은 비유로 혹은 예화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시는 일에 성의를 다하셨습니다. 주님은 헤롯왕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아니하셨으며 빌라도 앞에서도 잠잠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이같은 성품에 대하여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땡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사53:7). “미움을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다툼을 일삼는 사람의 마음에는 시기와 증오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이 비록 그 원수의 무리들과도 다투지 아니하신 것은 그에게는 미움이 없으시고 사랑만이 충망하시기 때문입니다.

  (2) “들레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들렌다는 말은 큰소리로 떠드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언제나 많은 군중들을 피하셨습니다. 대개의 경우 주님의 주옥같은 진리의 말씀은 단 둘이나 아니면 몇 명 안 되는 조용한 곳에서 하신 말씀들이 많습니다. 빈 그릇이 큰소리를 낸다고 거짓된 일꾼일수록 큰 소리를 칩니다. 주님의 그 어느 말씀 가운데서도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는 생각이나 환심을 사려는 의도에서 야단스럽게 떠든 일이 없습니다.

  (3)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갈대란 허약한 식물입니다. 바람에 간들간들 나부끼는 존재입니다. 그 갈대가 상했다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란 죄인들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로 아무 소망도 없는 상한 갈대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그의 생명이 마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급한 상태를 말합니다. 꺼져간다는 말은 ‘투포메논’으로 계속하여 꺼져가며 빛을 잃어가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가라지까지도 심판의 날까지 남겨두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불쌍히 보시고 정죄치 아니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의 서신에서 교훈해 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벧후3:8-9).

  결론 : 주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이런 사랑은 최후의 심판 날 까지 변함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의 이런 사랑으로 인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며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죄인도 아무 두려움 없이 그 앞에 가까이 오기를 바라십니다. 그 날에 나가는 자는 그의 이같은 자비와 사랑을 힙 )입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 115 ≈       사단의 분쟁


  (본문 : 마태복음 12 : 22 - 30)



  서 론 : 사탄은 궤휼과 간교에 뛰어난 존재입니다. 이런 사탄의 간교와 궤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교회의 분쟁을 조장하는 일에 가장 유효하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사탄의 역사가 자신들의 나라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주님은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하심으로 그들의 나라에도 질서와 체계가 있고 엄격한 규율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치 범죄단체에 더욱 엄격한 규율이 있고 공상주의 국가에도 엄한 법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법적인 일을 수행하려면 그만큼 규율이 엄해야 하는 것입니다.


  1.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는 모함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사람을 주님께 데려 왔습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을 하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바라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말하면서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송사할 조건을 찾아 잡으려는 바리새인들은 고의적으로 주님을 비방하기를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힙 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일임을 증거하기 위해 주님은 몇 가지 예를 들어 그들의 경우와 결부시킨 것입니다.

  (1) 바알세불이란 귀신의 왕을 가리키는 말인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그 귀신의 힘과 능력으로 졸개 귀신들을 쫓아 낸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주장의 부당성에 대하여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분쟁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분쟁은 교회를 혼란케 합니다. 분쟁은 어떤 조직이던 파멸시킵니다. 사탄의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계율이 엄격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그 졸개들을 쫓아낸다면 귀신의 나라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두 번째 증거로써 그들 자신의 경우를 들어 반격을 시도하셨습니다. 너희 아들들이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귀신을 쫓아낸 일은 예수님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고 말했든데 이들이 누구였었는지는 모르지만 바리새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그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막9:38).

  그들에게 반격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만약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사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면 너희 제자들 중에 귀신을 내어쫓는 자들도 결국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과 결탁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한 바른 해석은 내가 아니라 너희 제자들이 들려줄 터인데 그들이 너희들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감히 한 사람도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3) 이처럼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하나님의 나를 세우기 위해 오셨으며 그의 복음을 통하여 그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일어지기 전까지는 이 온 땅에 사단의 지배아래 있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에게서 사단이 내어쫓기고 사단의 활동이 제산을 받으며 죄인에게 구원의 복음이 전달되어 죄에서 해방되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며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서 벌서 세워진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4) 성령의 권능에 의해 사단의 나라가 무너져 가는 모습을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강한 자라고 하신 대상은 바로 귀신의 존재를 말합니다. 그 집에 들어가 그 집세간을 늑탈한다고 하신 말씀은 강도처럼 그 집을 강점하고 있는 귀신을 쫓아내고 그의 생명을 거지려면 그보다 더 강한 존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으로 바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사단으로 구원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결론적으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만이 진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만이 생명 가운데 행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기적의 역사는 바로 성령의 능력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종의 모습으로 계셨지만 삼위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분이 하나님으로써의 권능을 행하시려면 육신으로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행하시도록 그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과 예수님은 한 본체를 이루고 있는 한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의 능력이나 권능은 곧 예수님의 능력이나 권능이십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에는 주님께 성령을 물 붓듯 부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한 이유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귀신의 왕과 결부시켜 모함한 것은 시기심과 고의적인 모함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능력과 권능으로 증거되는 주님의 메시야적 증거를 이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당황한 그들은 고의적으로 모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이 정말로 귀신의 왕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인 줄로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그를 메시야로 믿으려는 군중들에게 믿지 못하게 하려고 심술을 부린 것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행동은 두 가지 원인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시기심입니다. 하나의 천한 목수의 아들이 자기를 스스로 메시야로 나타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메시야적 예우를 받는 일에 시기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탄식하셨습니다. 바른 지식이 없을 때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결론적으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서 내 가정에서 그리고 내 교회에서 분쟁의 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분쟁은 황폐의 원인이요 멸망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조차 분쟁이 없는데 우리 주변에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는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온유와 겸손으로 단장해야 할 것입니다.





  ≈ 116 ≈       사함 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죄


  (본문 : 마태복음 12 : 31 - 33)



  서 론 :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대단히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선량한 성도들을 현혹시켜 자신들의 잘못된 은사를 정당화시키고 불법적인 능력 행사를 비판할 수 없도록 악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1. 성경에 기록된 무서운 세 가지 죄


  성경은 세 가지 죄에 대하여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할 수 없는 죄’라고 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없다”고 했습니다(히6:4-6). 이 말씀의 뜻은 은혜의 체험이 많은 사람이 그 은혜를 고의적으로 저버리고 계속적으로 타락하는 자리에 있으면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의미의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의 경우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요일5:16-17).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구하라 하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죄를 범해도 나중에 회개만 하면 될 것으로 여기지만 결과적으로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 세 번째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령 훼방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동안 죄를 멀리해야 하겠지만 특별히 성령을 훼방하는 죄보다 무서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이런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성령 훼방 죄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성령 훼방죄’에 관한 이 말씀이 왜 나왔는가에 대해 그 동기부터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신 일에 많은 사람이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분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뒤쫓으며 고소거리를 찾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그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는 능력을 행한다’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이 같은 고의적인 비방과 모함에 대하여 성령 훼방죄를 언급하시고 이 죄에 대한 두려운 사실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낱말에 대한 원어의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훼방이란 말은 ‘브라스폐미아’(βλασφημἰα)로 비방한다, 중상한다, 모욕한다 또는 명예를 훼손한다는 뜻으로 성령을 비방하고 모욕하고 명예 훼손을 하되 끝까지 비방하는 일을 말합니다. 다음에 성령을 거역한다고 하신 거역이란 말은 ‘카타’(κατἀ)로 정면으로 맞서 적대시하고 원수시하여 계속하여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1) 바리새인들의 비방은 알면서도 고의적인 행동에서 나왔습니다. 성령 훼방죄에는 고의성이 따릅니다. 고의성이란 알고도 고의적으로 계속적으로 비방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대적했습니다. 이처럼 잘못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계속적으로 비방하고 대적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무슨 구원의 소망이 있을 것입니까? 예수님의 능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이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런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알았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은 예수님이야 말로 그들이 기다려 온 메시야인 줄로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유독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권능을 눈앞에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악의적으로 모함했습니다. 이처럼 어떤 목적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비방한다면 그들에게 어떤 소망이 있을 것입니까? 결국은 멸망만이 있을 것입니다.

  (2) 바리새인들의 고의적인 비방은 무지와 시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천한 목수의 아들이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들에게 도전해 오는 일에 대하여 시기했던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르며 그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일에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시기심이 발동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일에 그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투기심이 솟구쳤습니다.

  이런 것들이 동기가 되어 그들의 마음에는 시긴의 불길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던 것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기심과 질투심에서 온 악의적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 까지도 바리새인들의 이같은 시기심을 간파하고 예수를 무죄 방면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러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27:17).

  (3) 그들은 교만하므로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그들은 교만하므로 자신들의 지식이 가장 숭고한 것으로 알았고 그들의 외식적인 생활이 가장 율법적인 생활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진리를 배우려고도 알려고도 아니합니다. 그들의 교만은 예수님까지도 율법으로 정죄했으며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마음이 계속적으로 교만하면 양심이 화인 맞아 옳은 일도 부인하게 되며 성령의 감화도 거역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리를 증거하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적을 수도 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무 것으로도 핑계 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22-24).


  3.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인자를 거역한다는 말은 인간 예수를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예수님을 하나의 인간이나 인간 중에 훌륭한 성현쯤으로 여깁니다. 그런 분을 비방하고 거역하는 일은 불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인 줄 알면서도 이 같은 일을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고 비방하고 고의로 대적하고 귀신의 왕이 행하는 일로 모욕한다면 그런 일은 용납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일이야말로 성령 훼방죄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을 행한 자에게 사하심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사하심이란 말은 ‘아피에미’(ἀπιἠμι)로 통감한다, 용서한다, 취소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성령으로 중생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죄의 사하심은 회개로부터 오는 것인데 이 회개 또한 하나님의 은사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강퍅하게 하실 자를 강퍅하게 하시고 회개케 하실 자를 회개시키십니다.

  결론 : 죄의 사하심은 회개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 회개야말로 하나님의 은사요 선물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이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훼방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항상 진리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 117 ≈       말에 대한 심판


  (본문 : 마태복음 12 : 33 - 37)



  서 론 : 주님의 권능을 귀신의 왕을 힙 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방한 바리새인들은 이제 그들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 앞에 져야 할 일에 대하여 주님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게 됩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은 마음의 거울이요 인격의 표현이기 때문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말은 자기의 선이나 악을 표면으로 나타내는 수단이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어쩌다가 악한 말을 낼 수가 없고 악한 사람이 어쩌다가 선한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비방한 말은 그들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성령을 훼방하고 성령을 말로 거역하는 일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1. 좋은 나무에 좋은 결실을 맺는 자연의 이치


  실과와 나무는 어쩔 수 없는 동반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무로 실과를 알고 실과로 나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과나무에서 포도 실과를 딸 수 없으며 포도가 사과나무에서 맺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대자연의 이치입니다. 이 이치는 그 무엇으로도 변결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나무와 실과의 이치를 사람의 마음과 마음에 비유해서 교훈으로 들려주셨습니다. 이 예화에서 주님은 좋은 실과로서 자신의 경우를 말씀하셨고 나쁜 실과로서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나 권능은 선한 열매임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귀신을 쫓으신 일, 모든 병자를 고치신 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일, 죽은 자를 살리신 일 등 그 어느 것 하나 나쁜 열매로 나타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선한 열매는 그 일을 행하신 분의 인격을 나타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이치에서 마땅히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에게 사로잡힌 사람으로 모함했고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방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바리새인들이 악하다고 하는 산 증거로 보이셨습니다.

  (2) 주님은 바리새인을 나쁜 나무에 결부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란 말에서 그들의 근본이 나쁜 나무란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란 독사의 후손들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나무가 나쁘니 그 곳에서 맺는 실과가 좋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에 잡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나쁜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2. 성경에 기록된 말의 책임


  성경에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책임에 대하여 엄중하게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말로)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라고 명하고 있습니다(레24:16).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증거하므로 그를 성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죽였습니다. 우리가 말로 주님을 부인하면 심판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인을 당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0:33). 다른 사람을 말로 판단하는 일은 자기를 스스로 정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롬2:1). 성령을 말로 거역하거나 훼방하면 그 같은 사람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 왜 이 같은 엄중한 책임을 지우는 것입니까? 그것은 말의 출처는 단순히 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의 바탕이 되는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말은 선한 사람에게서 나오고 악한 말은 악한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말이란 그 사람의 사람됨 그대로를 겉으로 나타내는 방편인 것입니다.


  3. 무익한 말에 대한 책임


  우리가 우연히 발설한 말이나 사소한 말이건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이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이 그 말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혀에 재갈을 먹이지 아니하는 자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나 만일 말의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약1:26). 죄인들인 인생 중에는 온전한 사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말의 실수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의 실수가 없도록 늘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할 것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했습니다(약3:6).

  그러면 무엇이 무익한 말입니까?

  (1) 다툼은 분노를 일으키며 분쟁을 가져옵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잠17:19). 다툼의 출처는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고 했습니다(잠13:10). 미련한 자의 입술이 다툰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잠18“6).

  (2)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방하는 말은 무익한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입을 무겁게 지켜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복이 있는 입이 될 것입니다.

  (3) 희롱의 말이나 어리석은 말은 무익한 말입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엡5:4).


  4. 선한 말을 낼 수 있는 비결


  사람이 선한 말을 하려면 먼저 마음의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마음이 선하지 않으면 그 입의 말이 선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은 그대로 두고 입술만의 변화로 말을 변화시켜 보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합니다. 입술을 조심하는 것만으로는 무익한 말을 삼갈 수 없습니다. 말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에서 나와야 온전한 변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잠4:23). 마음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새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마음은 성령이 임재 하심으로 이루러 집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말은 언제나 진실해야 합니다. 언제나 선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 마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나무는 좋은 나무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지난날의 입술에서 나왔던 악하고 무익한 말을 버리고 좋은 나무에서 좋은 과실을 맺도록 힘써야 합니다.





  ≈ 118 ≈       표적을 구하는 잘못된 신앙


  (본문 : 마태복음 12 : 38 - 45)



  서 론 :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출애굽 당시 하나님의 권능으로 많은 표적을 보고 체험했기 때문에 표적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애굽을 사모했습니다. 복음은 표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실패한 것은 복음을 표적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고 했습니다(고전1:22-24). 주님은 자기를 가리켜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는 자의 받을 무서운 심판을 경종하자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된 표적을 보여주기를 원한다고 요구했습니다. 표적이란 말은 ‘세메이온’(σημεἰού)으로 표시, 증거 또는 기적으로 이것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1.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중에 참으로 놀라운 표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을 때에도 그 곳에 있었던 군중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하면서 놀랐습니다(요6:14).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 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고 말하면서 믿었습니다(요7:31).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더욱 분명하고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요구한 표적이란 어떤 종류의 표적이었을까?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도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주는 것으로 메시야된 증거로 삼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우리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직까지 자신을 메시야의 증거로 삼기 위해 나타내신 표적은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거절하셨습니다.

  복음은 표적을 보여 주는 것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들 바리새인들도 주님의 표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불신했으며 오히려 그같은 기적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하는 것이라고 비방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큰 표적을 보여 주어도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인 것이 아니라 믿음의 종교입니다. 성경에 기적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오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나왔지만 믿음이 기적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믿음보다 기적을 바라고 그것을 따르는 신앙을 신비주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 신앙에 깊이 빠지면 신앙의 정상궤도를 이탈하여 거짓 예언, 거짓 은사, 거짓된 증거 등으로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표적으로 메시야의 증거로 삼으려는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대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2. 주님이 보여 주실 표적


  주님은 그가 보여주실 한가지 표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표적이란 곧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요나의 표적에 대하여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요 메시야이신 그의 참 표적이 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는 표적은 메시야가 아니라도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술객들 조차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는 술수를 썼습니다. 또한 종말에 등장할 거짓 선지자는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그 우상으로 말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하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되더라”고 했습니다(계13:13-15).

  이런 표적은 사람을 미혹하여 짐승의 우상 앞에 경배케 하려는 사단의 간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표방할 수 없는 메시야된 진실한 표적이 주님께 있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표적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죽으시므로 밤낮 사흘간을 땅속에 묻혀 있으실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메시야된 표적을 바로 이 표적에서 찾지 않으면 영원히 생명의 길을 찾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표적을 증거하는 진리입니다. “내가 받은 것은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고전15:3-4).


  3.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이 일어나 바리새인들을 정죄할 것임.


  주님은 죄악의 도성에 살고 있었던 니느웨 사람들이 오히려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로우며 이방의 남방 여왕이 오히려 그들보다 더 지혜로웠다는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에게 경종을 삼으신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그들이 기르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았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시기로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때 느니웨 사람들은 요나에게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표적을 보여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들 역시 요구에게 표적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전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바리새인들의 심판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 바리새인들이 잘 알고 있는 남방 여왕의 경우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왕은 단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그 멀리 남방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솔로몬 왕보다 더 큰 존재이심은 그는 메시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운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를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들은 심판 날에 남방 여왕이 증거가 되어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악한 세대를 비유하시기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있을 곳이 없으므로 다시 옛집을 돌아왔을 때의 경우를 들어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벌써 그런 귀신의 거처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의 신앙을 견고히 가지고 움직임이 없어야 합니다.  




  ≈ 119 ≈       천국민의 새로운 가족관계


  (본문 : 마태복음 12 : 46 - 50)



  서 론 : 어느 날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에 한 사람으로부터 그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 있다는 전갈을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느라 오랜 기간 집에 들리실 기회가 없으셨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모친과 형제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이나 그의 적대자들로부터 예수님이 귀신 들려 이상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은 듯 싶습니다. 모친은 아마 이런 풍설을 듣고 주님을 찾아 왔을 것입니다. 주님은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 왔다는 말을 듣고 앞에 모여 있는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교훈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민의 새로운 가족관계입니다.


  1. 인간 사회의 가족 제도


  우리가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이 나라는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의 생활이나 책임이 새롭게 부여됩니다. 교회란 하나님 나라의 하나의 거대한 가족입니다. 이 땅위의 가족제도는 한 집안에 부모와 형제들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낳아주신 분을 부모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비록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세상에 육신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분이 계심으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공경하고 섬기셨습니다. 5그리고 한 부모아래 같은 혈육으로 태어난 사람을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한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인간의 가족 관계는 영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같은 혈육의 한 가족이라도 신앙이 같지 아니하면 서로 미워하고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육은 가까워도 영이 서로 대적하는 입장에 있으면 서로가 원수가 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만 해도 그의 형제들이라도 믿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그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고 했습니다(요7:5).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만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남편이 죽은 후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롬7장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살던 사람들이 그 가족관계를 그대로 가지고 내세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일은 사두개인의 질문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일곱형제의 경우와 그들과 함께 살아온 한 여인과의 관계에서 장차 부활의 세계에서 과연 뉘 아내가 될 것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마22:30),


  2. 천국의 가족 제도


  천국은 혈육과는 상관없이 영적 결합체인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나 예수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 나라 사회에서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됐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한 형제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 영적인 형제자매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가족관계는 하늘나라에까지 미치므로 영원히 존속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하나님의 자녀로 한 형제들이 됐다면 한 가족을 하나로 결속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가족관계가 냉랭해 지고 끝내는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형제의 사랑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요13:34-35).

  사도 요한은 요일3:14절에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하나님의 가족 관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계급이나 남녀의 구별에 구애를 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 어떤 사회적 명예나 권세를 가지고 있어도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한 형제로서의 사랑과 교제를 나누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가족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요일3:16-18). 우리 예수님은 천국 가족관계에서 우리의 맏 형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롬8:29).


  3.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와 자매와 모친


  주님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신 후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맏아들로 하는 하나님의 가정의 가족이 될 수 있는 필수적인 자격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1) 아버지의 뜻은 첫째로 그의 아들을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회개하는 일입니다. 죄를 품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3)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순종이 없는 자녀는 자녀의 반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가족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비결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4)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엡1:4-5).

   일단 하나님의 나라의 가족이 되면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의 사랑은 혈육을 가지신 우리들 부모님 사랑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이나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사49:15).

  우리는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서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혹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도 이같은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주는 것입니다(히12:7-8). 또한 하나님 나라의 가정에는 맏형이 되신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16).

  결론 : 우리가 일단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가장이신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정의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아름다운 형제의 가족 관계를 지속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PREV :   마태복음 13장 설교 밤중소리 
 NEXT :   마태복음 11장 설교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