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마태복음 27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7,265



  ≈ 199 ≈       가룟 유다의 결국


  (본문 : 마태복음 27 : 1 - 10)



  서 론 : 여기에 유다의 회개가 나옵니다.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적인 회개요, 하나는 복음적인 회개입니다. 양심적인 회개는 세상사람들이 하는 회개로 이 회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양심적인 회개의 표본 인물은 가룟 유다요 그는 결국 그 회개의 결과 목을 매어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적 회개의 표본 인물은 베드로인데 그는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 나갔습니다.


  1. 유다가 뉘우친 과정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고 했습니다(3). 여기서 뉘우친다는 ‘메타멜로마이’란 말은 후회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돌이켜 보고 양심의 고통을 받아 번민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후회하는 사람들의 열매를 보면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그런 사람은 마음에 괴로움을 받는 생애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그의 평생에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는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양심에 고통을 주게 됩니다.

  (2) 유다는 스승을 팔아 받은 돈을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회개하는 표로 자기가 얻은 부당 이익이나 남에게 손실을 준 물질적인 손실에 대하여 변상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적인 변제가 될 뿐 이것으로 하나님의 사죄를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유다는 결국 그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돈올 반납했지만 그들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은 네게 있으니 네가 당하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범 한 죄는 자기가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면 세상 사람들에게조차 짓밟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마5:13).

  (4) 유다는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죄 값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한 일이 이토록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자기의 배신이 주님이 죽기에까지 이르게 되자 유다는 비로소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죄를 범하기까지는 분별력이 약해지고 담대해집니다. 이것은 죄의 강한 유혹에 비해 인간의 의지가 너무나도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미 죄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롬6:12).

  유다는 스승을 판 돈 은 삼십을 성소에 던지고 목메어 죽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번 돈은 자기 소유가 되지 못합니다. 성수주일하지 않고, 십일조 없이 번 돈은 자기 소유로 쓰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돈은 마치 구멍 뚫린 전대에 넣음과 같고 “너희는 쌓으라 나는 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말 1:4).


  2. 유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유다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옵니다. 자기 죄도 고백했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결국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1) 유대의 회개는 양심의 회개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른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밖에 나아가 통곡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를 말합니다. 유다처럼 대제사장에게 자기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1:9).

  (2) 유다는 양심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양심의 인도를 받는 회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아마 그 사람의 도덕적인 행실은 바로 잡을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어느 정도 자기 마음의 위로가 될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매를 맺지는 못합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이 같은 회개는 양심의 인도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사유는 하나님의 아들을 힘입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3) 유다는 자살로 그의 인생을 마쳤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개과천선함으로 원상복귀를 하든가? 아니면 양심의 소리에 괴로워 자살을 시도함으로 인생으로서의 최고의 책임을 수행하던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입니다. 가룟 유다는 후자를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는 탕자의 경우처럼 그의 발걸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는 일입니다(눅15:17-20).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로 돌이킬 줄 모르는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닙니다.


  3. 토기장이의 밭을 산 피 값


  유다가 스승을 판 은 삼십을 피 값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대제사장들의 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유다가 그들에게 찾아와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는 후회의 말과 함께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성전고에 넣어 두기에 합당치 않은 것은 피 값으로 지불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의 성취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예언은 사실상 예레미야의 글에 있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차라리 스가랴의 글에 있는 말씀과 많은 유사점올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는 것인가?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아의 글은 사실상 스가랴의 예언과 같은 뜻으로 스가랴가 예언한 글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힌놈의 골짜기는 저주의 골짜기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 곳을 더럽혔는데 그것은 그 곳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한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렘19:1-4). 여기서 예레미야가 말한 이 곳이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이 자리가 곧 유다가 던진 피 값으로 산 토기장이의 밭인 것입니다. 4철에서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다고 하신 말씀은 무죄하신 자를 팔아 얻은 은으로 이 곳에 채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힌놈의 아들의 골찌기가 채워진 것처럼 그 아들의 피를 흘린 이스라엘도 이 힌놈의 아들의 골찌기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경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경종이 스가랴의 글에 와서 더욱 분명한 모습을 들어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슥11:12-13). 그러므로 마태가 스가랴의 글에 있는 예언을 예레미야로 말씀하셨다고 표현한 것은 스가랴가 예레미야의 글에서 예언의 근거를 삼은 것이기 때문이며 마태는 이 예언의 글을 가룟 유다와 연결시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결 론 :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회개에 있어서 마치 유다와 같은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회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회개에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매가 따르지 못합니다. 말씀을 따라 성령으로 이루는 회개만이 그리스도인의 참 회개임을 알아야 합니다.





  ≈ 200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본문 : 마태복음 27 : 11 - 14)



  서 론 : 빌라도란 이름은 역사이래 가장 잘 알려진 이름 중에 하나입니다. 빌라도의 이름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혹은 여러 행사의 예배 시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이름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불려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이름이 왜 이처럼 불명예스러운 악명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는가? 그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를 죽이는 일에 결정적인 재판을 집행했기 때문입니다.


  1. 빌라도의 인물


  빌라도란 인물은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1) 빌라도는 그의 권력에 비해 사람이 우유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은 알았지만 그 양심의 소리를 관철할만한 인물은 못되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 판결을 내리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헤롯 안디바에게 보내기도 하였고(눅23:5) 다만 매로 때린 후 놓아주자고 제의도 했습니다(눅23:16). 그는 명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를 놓아주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군중에게 압도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2) 빌라도는 민란이 나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빌라도의 노력이 아무런 효력 이 없고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24) 굽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민란이 일어나면 이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지 않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3) 빌라도는 민심 수습책으로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막I5:I5). 빌라도는 무리들에 게 만족을 주려고 했다고 한 것입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고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면 급기야 그 무리들을 다 잘못된 길로 오도할 것입니다.

  (4) 빌라도는 자신의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양심을 져버렸습니다. 그가 예수를 고소하는 무리들에게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고 물었을 때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외쳐 댔습니다. 이 말에 그는 예수를 방면하면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을 인정하는 모함을 받은 것이 우려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총독으로서의 현재 지위는 박탈당하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반역한 자로서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는 서둘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저희에게 넘겨주니라”고 했습니다(요19:15-16).


  2.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섰을 때 재판장 석에 앉아 있었던 빌라도로부터 맨 처음 심문 받은 내용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죄목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소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가서 고소한 고소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여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23:2).

  백성을 미혹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참 도리를 백성들에게 가르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생명 의 도리를 그들은 미혹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에 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고 말한 고소는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험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0:22-25).

  다음에 자칭 왕 그리스도라 말했다는 고소는 그 날 아침 가야바의 뜰에서 행한 산헤드린 공회 재판에서 가야바의 최종적인 심문에서 찾아낸 증거였습니다(마 26:63-65). 그들은 예수님의 왕적인 표현이 다만 메시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렇게 고소한 이유는 빌라도로 하여금 이 예수야말로 가이사에 반역하려는 민란 음모의 주모자임을 은근히 암시하려는 뜻에서 한 일입니다.

  (1) 벌라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의 명을 받들어 유다를 통치하고 있는 실질적인 지배자였기 때문에 그의 왕에게 도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은 과연 이 예수가 가이사의 왕권에 도전한 유대인의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예수가 고소자들의 말대로 왕이 되기 위하여 반란을 시도했는가? 이 예수는 정말로 유대인의 실질적인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인가? 예수는 정말로 왕이 되려고 가이사에게 반기를 들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네 말대로, 아니 이 무리의 고소한 대로 나는 유대인의 왕이니라”고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현세에서의 왕권을 의미한 것도 아니며 그의 정치적인 야망을 표현한 것도 아닙니다. 메시야로서의 그의 위치를 천명하신 것입니다. 메시야는 분명히 유대인의 왕으로 나와 있으며 다윗의 위를 이을 영원한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3) 빌라도는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가 결코 가이사에게 반역할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빌라도가 만약 예수의 세력이 강대하여 자기 눈에 능히 그가 가이사에게 반기를 들어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사려되었다면 용서해 주려는 마음조차 가짐이 없이 당장에 유죄 선고를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눈에 비취인 예수의 모습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초라했습니다. 동조자도 한 명도 없을 뿐 아니라 반란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이 문제는 애초부터 종교적인 문제인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고소하는 내용도 종교적인 문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문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의 시기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3. 잠잠히 입을 담으신 예수님


  빌라도에게 가장 기이하게 생각된 것은 피고로 서있는 예수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많은 불리한 고소에도 불구하고 잠잠히 입을 열지 않고 있느냐는 사실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이를 이상히 여겨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 하는지 듣지 못하느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그들의 고소에 대하여 대답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는 이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정죄를 받아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처럼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사53:7).

  (2) 예수님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셨지만 그가 지금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젊어지고 그 곳에 서 계신 것입니다(사53:4).

  (3)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재판을 받으시기를 원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53:5).

  결 론 :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왕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빌라도의 뜰에서 이처럼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그가 받으신 재판에서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그가 정죄 받으신 일로 인하여 정죄에서 영원히 풀려난 사실을 깨달아 한 평생 그의 사랑 안에 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201 ≈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들


  (본문 : 마태복음 27 : 15 - 26)



  서 론 : 빌라도 총독이 최후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선택권올 주었습니다. “바라바냐? 아니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이 물음에 그들은 한결같이 바라바를 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고의적으로 악의에 찬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는 피 흘림의 죄에 대하여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선택이 얼마 안가 실질적으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맹세한 서원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 흘린 죄를 그들과 그들의 자손의 머리 위에 내리신 것입니다.


  1. 바라바를 등장시킨 이유


  빌라도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매우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여러 과정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빌라도는 예수의 활동이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예수의 활동이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것이거나 민란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면 주님은 대제사장들의 손에가 아니라 빌라도의 손에 의하여 벌써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활동이 자기 자신이나 가이사의 통치에 하등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방관했던 것입니다.

  (2) 빌라도는 예수가 존경할만한 의로운 청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평소에도 예수에 대하여 죄가 있다는 평판을 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고소에도 죄로 재판 받을 만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고 물었고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고 손을 씻기까지 한 것입니다.

  (3) 빌라도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이 청년을 시기로 죽이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고 했습니다(1).

  (4) 빌라도는 예수가 무력한 죄 없는 죄인으로 재판 석에 서있는 모습을 측은히 여겼습니다. 빌라도는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 하는지 듣지 못하느냐”고 말함으로 답답하게 서 있지만 말고 자기의 무죄함을 좀 강력하게 주장하라고 암시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러면서도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의 비양심적인 판결이 신의 보응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빌라도는 아내로부터 꿈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많은 애를 썼으니 그 옳은 사람에 대하여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이때 빌라도의 머리에는 좋은 발상이 떠올랐습니다. 명절이 되면 무리의 소원대로 한 명의 죄수를 방면하는 관례가 전통적으로 지켜져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죄 받은 가장 파렴치한 죄인인 바라바와 연결시켜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선언한다면 그들 무리들은 반드시 이 청년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하게된 것입니다. 이것은 건전한 인간의 상식입니다. 빌라도는 이 상식이 통할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2. 너희는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빌라도는 무리들 앞에서 이 사실을 공포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즉각적으로 무리들을 충동하여 바라바를 달라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고 권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의 이 같은 권함을 받은 무리들은 “바라바로소이다”고 외쳐댔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예수를 배신한 무리들의 심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1)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들의 그리스도인줄 알고 예루살렘 입성을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기대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원하는 그리스도는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들의 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자 환영이 배신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2) 모든 판세는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만약 그들의 권고를 듣지 않는다면 나중에 어떤 화를 당하게 될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출회하기로 이미 결의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시세에 따라 유리 한 곳으로 폼을 옮기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연약한 피고로 빌라도 앞에 서있는 예수는 이제 기대해 볼만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능력도 사라지고 이적도 사라져 버리고 있는 것이라고는 묵묵한 침묵뿐입니다. 그에게 이제 또 무엇을 기대해 보겠는가?

  군중 심리는 순식간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여기 저기서 함성이 들려 왔습니다. 빌라도는 그의 모든 노력이 아무 효험이 없고 오히려 민란이 나려는 기미가 보이자 예수에 대한 구명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아오고 있는 유대인들은 지배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만 있고 그 곳에 군중 심리만 작용하면 쉽게 민란이 일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서 민란이 일어난다면 빌라도는 그 책임을 지고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빌라도의 마음의 생각은 반대쪽으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고 바라바를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려고 그들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의 판결은 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사형 언도가 내려졌습니다. 사형수에게는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채찍질의 형벌이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은 짧은 손잡이에 몇 줄의 가죽끈을 달고 그 앞부분에 작은 납덩어리로 뾰족하게 만든 뼛조각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이 채찍으로 후려치는 날이면 등뼈가 드러나기도 하며 살점이 묻어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형수는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 형틀을 젊어지고 형장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군인들의 잔인한 채찍이 그에게 사정없이 내려쳐진 후 이제 십자가의 형틀을 짊어지고 그 고난의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가셔야 하셨습니다.

  결 론 : 빌라도의 뜰에 있었던 많은 유대인의 무리들은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는 선택에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버리고 바라바를 택했습니다. 그 결과 민란의 주범 바라바는 석방되고 죄 없으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바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결코 바라바를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바라바를 선택한 그들은 메시야를 죽였고 그로 인하여 자신들도 죽은 것입니다. 아비나 어미보다 그리스도를 택해야 합니다. 아들이나 딸보다 그리스도를 택해야 합니다(마10:37). 그리고 재물보다 그리스도를 택해야 합니다{마6:24).

  



  ≈ 202 ≈       희롱을 당하신 예수


  (본문 : 마태복음 27 : 27 - 31)



  서 론 : 빌라도의 사형 언도가 확정되자 예수는 많은 무리들의 희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빌라도의 관정 안으로 예수를 데리고 들어간 총독의 군병들은 마치 이성을 잃고 광적으로 날뛰는 사육제의 주인공들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예수에 대한이 희롱이 우리의 신앙과 어떤 영적인 연관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I. 옷을 벗기고 흥포를 입히신 예수


  관정 안으로 끌려 들어가신 예수님은 후안무치한 무리들에 의해 말할 수 없는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먼저 그들이 주님께 행한 일은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일입니다. 홍포는 왕들이 입는 옷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단장하고있었습니다. 왕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희롱을 목적으로 그렇게 꾸민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으로 꾸미고 가짜 왕으로서 희롱을 했습니다.

  (I) 이것은 마치 주님을 입으로는 시인하나 그 행위로는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중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딛1:16). 행위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란 곧 순종이 없는 사람, 모든 선한 일을 버리고 자기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 섬긴다고는 하지만 실상인즉 총독의 군병들처럼 왕으로 꾸며 희롱하는 일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백성들은 그 왕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것은 마치 자기의 유익이 있을 때는 섬기고 유익이 없으면 저 버리는 일과 같은 일입니다. 주님을 따른 많은 무리들은 주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보자 그를 따랐습니다.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요6:12-15). 물질적인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물질로 인하여 예수님을 또 저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무리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26). 이들은 예수로부터 떡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물러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영광뿐 아니라 고난도 그와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빌1:29).


  2.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


  총독의 군병들은 홍포를 입힌 예수에게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웠습니다. 이 면류관은 왕들이 그 머리에 위엄과 권위로 쓰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관을 가시로 엮었던 것입니다. 고난의 그리스도이신 우리의 왕은 머리에 가시판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놀라우신 모습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실 때 그의 머리에는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면류관을 쓰실 것입니다.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가 오시는 날 그의 머리에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씌워드린 그들은 이 같은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가슴을 칠 것입니다(계1:7).

  (1) 주님 앞에 보이러 오는 신앙은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엮어 씌워 드림과 같은 괴로움을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사랑함이 없이 의례적으로 성전에 출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온다”고 책망하셨습니다(사1:12). 우리 주님은 당신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몸만 보이거나 제물만 보이러 오는 신앙은 가장 미워하시며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말1:10).

  (2) 성전 마당만 밟는 신앙은 주님께 괴로움을 드리는 신앙입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사1:12). 성전 마당만 밟는 사람은 종말에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밖 마당은 척량치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계11:1-2).

  (3) 헛된 제물을 드리는 신앙은 주님께 가시관을 씌워 드리는 고통을 안겨 드리는 일입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사1:13). 그들이 월삭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일도 하나님께 대한 경배나 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와 다툼에 있었습니다. 속죄 제물로 양을 잡아도 그 일이 헛된 것은 이로써 그들이 악행을 버리거나 회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회개 없이 드리는 모든 제물은 헛된 제물로 주님은 이런 제물을 가증히 여기실 뿐 아니라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1:14).

  (4) 병들고 병신된 제물을 드리는 신앙은 주님께 가시관을 씌워 드리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악행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하여 이처럼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회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1:7-8). 병든 제물이란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될 제물을 말합니다. 온존치 못한 십일조는 저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물인 것입니다. 인색한 헌금은 병든 것으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통하여 주님을 괴롭혀 드리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들의 면류관을 주님의 머리에 씌워 드려야 합니다. 보좌 앞에 둘러선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 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진 것”처럼 우리 의 가장 좋은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3. 갈대를 손에 들리신 예수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로 더욱 그럴듯한 왕으로 분장시키기 위해 그의 손에 갈대를 들렸습니다. 이 갈대는 임금의 손에 들린 홀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처럼 꾸민 왕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그리고는 그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를 도로 빼앗아 그것으로 왕의 머리를 쳤습니다.

  만약 이들이 희롱한 예수가 정말로 그들 앞에 왕으로 서 계셨다면 그들은 어찌 되었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왕으로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얼마나 놀리며 당황할 것인가? 그들은 왕이라고 말하면서 그 앞에 경배를 드렸지만 그들의 경배는 희롱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들처럼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희롱하는 무리들은 없는 것인가?

  결 론 :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같은 사람들은 주님을 끌고 십자가에 갈 사람들입니다. 다시 현저히 욕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무리들에 게 경종하고 있는 말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말씀했습니다(히6:4-6).





  ≈ 203 ≈       시몬의 십자가


  (본문 : 마태복음 27 : 32)



  서 론 : 예수님은 이제 그의 마지막 가실 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언덕 길을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희롱을 당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1).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하여 끌고 갔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끌려가신 것입니다. 끌려 가셨다는 말은 그가 십자가에 형틀을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실 힘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채찍과 희롱과 재촉에 의하여 끌려가다시피 따라가신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날 밤 밤새도록 기도하시느라 피곤하신 예수님, 이리 저리로 끌려 다니시며 재판을 받으시느라 지칠 대로 지치신 예수님, 그간 떡 한 덩어리도 물 한 모금도 드시지 못하신 고통,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런 고초를 그의 폼으로 겪으셔야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래 걸어가지 못하시고 그 자리에 쓰러지셨습니다. 당장에 그의 둥에 로마 군병들의 채찍이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어나라고 채찍을 쳐대도 땅에 쓰러지신 채 꼼짝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이 죄수가 십자가의 무거운 형틀을 지고 언덕까지 올라가기는 틀렸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1. 주님을 따른 무리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신 길에는 많은 무리들이 주님의 좌우와 앞뒤에서 따랐습니다. 실로 이들 중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1) 그 무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희롱하려는 무리들입니다. “왜 그토록 잠잠히 따라가느냐? 그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이리로 나오라”고 희롱하는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에는 많은 능력을 행하더니 지금은 왜 그렇게 무력해졌느냐?”고 조롱하는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유대인의 왕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빈정댄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2) 그 결과를 보려고 따라간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결국을 보려고 멀찍이 예수를 쫓아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갔었습니다(마26:58). 빌라도의 뜰에서 빌라도가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물었을 때 저희가 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고 외쳐댔는데 그들은 과연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이냐에 대하여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무리들도 주님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3) 주님의 주위에는 채찍과 검을 든 로마군병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다만 군인이란 우월감과 위세로 어깨를 흔들면서 무슨 큰 자랑거리나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치고 때리는 일에 열심했습니다. 차라리 이들은 유대인들 보다 나은 자들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의 참 모습을 찾은 사람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무리가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채찍으로 때리며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군병들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4) 주님을 뒤따르며 울부짖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른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발을 구르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그가 채찍에 맞을 때마다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끼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3:28).

  (5) 그 무리들 중에는 주님에 대하여 동정만 할 뿐 구경만 하면서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대신 지고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로마군병들의 채찍에 맞고 땅에 쓰러진 채 일어나실 줄 모르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도 두려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으로 주님 곁에 나서는 사
람이 없었습니다.


  2. 시몬의 등장


  예수를 끌고 간 로마군병들은 주님의 쓰러진 몸을 더 일으킬 생각을 포기하고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교적 순박하게 보이고 아주 건장한 체구의 한 청년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그 청년을 억지로 잡아 예수의 십자가를 지어 같이 가게 한 것입니다. 그 청년의 이름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몬은 원래가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태어난 곳은 구레네였으며 지금도 그 곳에 살아가는 그곳 주민이어서 유월절 명절을 당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것입니다. 구레네란 지금의 리비아를 말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근간에 일어난 사건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도 예수의 재판을 구경하려고 빌라도의 뜰에 갔다가 그의 유죄판결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자기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골고다까지 올라가 볼 흥미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이 예수를 좀더 가까운 곳에서 보려고 예수님 가까이 있다가 로마군병의 눈에 발견되어 예수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는 사람으로 붙잡힌 것입니다.

  (1) 시몬은 이 십자가를 억지로 졌습니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고 했습니다(32).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가 발견되지 않은 것을 무척 다행스러운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에게 저 사람은 억세게 재수 없는 청년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시몬의 생각 역시 “내가 오늘 왜 이처럼 재수 없지,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내게 이런 일이 걸렸지”라고 마음속으로 자기가 예수를 따른 일을 몹시 후회했을 것입니다. 시몬은 이 십자가를 져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도 아닐 뿐 아니라 평소에 예수를 따라 다닌 적도 없으며 예수에게 전혀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도 백지였고 그가 왜 십자가를 지시 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자기 옆에 있는 예수와 함께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라갔습니다. 시몬이 이 십자가를 짊어졌을 때 온 몸에 소름이 끼쳤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 형틀이란 저주스러운 사형 기구요 그곳에 매달려 죽는 사람이란 저주받은 극악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피가 낭자하게 묻은 십자가를 지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귀에 들으며 힘겹게 그 언덕길을 올라간 것입니다. 시몬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3) 그러나 시몬은 이 십자가로 인하여 그의 인생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① 시몬은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가면서 그 십자가를 짊어진 주인공인 예수를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온유하시고 인자하신 모습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억울하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로마군병이나 자기를 희롱하는 무리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모습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골고다에 올라가면서 이 청년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무엇인가 알고싶은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② 시몬은 그 후 주님의 제자가 되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했습니다(막15:21).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롬16:13). 이 구절을 보면 시몬의 아들 루포는 바울이 편지를 보낼 당시 로마에 살았으며 그 어머니는 이 사도 바울을 도와 준 여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결 론 : 아마 이 시몬은 자기가 주님의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간 일에 대하여 한 평생 감사히 여기며 영광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벧전4:14).





  ≈ 204 ≈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들


  (본문 : 마태복음 27 : 33 - 44)



  서 론 : 주님은 십자가에서 매우 목마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전날부터 물을 마시지 아니하신 탓도 있지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므로 그 몸에 수분이 갈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목마르신 고통에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요19:29). 그때 그 옆에서 주님을 희롱하던 무리들은 주님께 쓸개 탄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려 했습니다. 주님은 맛을 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는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 중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그 고통을 덜어 주는 하나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것을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마시지 아니하셨습니다.


  1. 십자가 아래서 벌어진 일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려고 모여든 잔인한 구경꾼들이 십자가아래서 가지각색의 모습을 들어내 놓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는 같은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당하는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도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기들 옆에 계시는 주님을 향하여 욕하고 희롱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방을 들으셨지만 십자가에서는 그 죄인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신 것입니다.

  (2) 십자가 아래에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들이 희희낙락하며 하나의 게임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 게임이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는 제비 뽑기였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은 죄수들을 마지막으로 지키기 위하여 그 자리에 앉아서 이처럼 제비를 뽑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십자가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했습니다. 이 비정한 인간들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고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말은 하나의 조롱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는 그리스도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 말은 “네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줄로 알았는데 십자가에서 죽느냐? 네가 그래도 이스라엘의 메시야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조롱인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네가 그리스도 여든 잔말 말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4)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했습니다. 이 백성의 지도자들은 가짜 메시야가 어떻게 죽는가? 그 모습이나 보려는 생각으로 득의 만만한 모습으로 골고다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띄우면서 승리에 취했습니다. 그들은 다 같이 이처럼 희롱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 얼마나 악의에 찬 희롱이며 자신만만한 면전 모욕인가?
남을 구원했다는 말은 주님이 많은 병자를 권능으로 고쳐 주신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친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같은 주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권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남을 구원하였다는 말은 하나의 희롱인 것입니다. 그런 일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룬 기적이었다면 너 자신은 어찌하여 그처럼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고 조롱했습니다. 주님의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쓰여진 죄패를 보고 그처럼 조롱한 것입니다(37).

  그들은 또 주님을 향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바라보고 그가 가짜 메시야이신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려 올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내려와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2.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한 이유


  주님은 목마르셨을 때 그들이 내민 잔에 쓴 포도주가 들어있어 그 맛이 쓰셨기 때문에 마시지 아니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마시면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그의 고통이 해소될 것이기 때문에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1) 주님은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의 죄를 사유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이 몸소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을 쓸개 탄 포도주로 피하려 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검을 빼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떨어뜨린 베드로를 향하여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주신 잔을 지금 마시면서 고통을 덜어 주는 쓴 포도주를 들지 아니하신 것입니다(요18:11).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 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24). 주님이 나를 위하여 이처럼 고통을 온전히 당하셨거늘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나에게 젊어진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십자가가 다가오면 이 쓸개 탄 포도주를 우리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대줍니다. 고통 없이 십자가를 지라는 유혹입니다. 십자가에는 고통이 따라야 그것이 참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면 말할 수 없는 축복과 영광이 오는 것입니다(벧전4:13-14).

  (2) 주님은 그가 겪으시는 고통까지도 죄인을 위한 대속 제물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고통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을 응해야하기 때문입니다(시22:1. 막 15:34). “그가 찔림은 우리 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씀했습니다(사53:5).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바로 이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가 당하시는 고통을 감하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빌2:8). 죽기까지 복종하신 이 복종은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고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에게는 이따금 십자가가 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의 믿음의 분량대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주십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로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는 훈련으로 주십니다. 우리는 이 인내의 훈련에 합격해야 합니다. 다음에 주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주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은 은혜를 받게 하실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시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빌1:29).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씀하고있습니다(롬8:17-18). 주님은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인내로, 기도로, 믿음으로 이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205 ≈       두 강동의 경우


  (본문 : 마태복음 27 : 44)



  서 론 : 주님의 십자가 곁에 두 강도가 등장합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했습니다(38). 예수님이 하필이면 강도범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왜 두 명의 강도가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달려 예수님이 그 중앙에 계시는지? 이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큰 의미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두 강도는 인류를 대표한 죄인들의 모습이다.


  이 두 강도는 바로 인류를 대표한 죄인들의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명의 죄인은 참으로 정죄 받은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인간들입니다. 이런 죄인이 죄 없으신 예수님과 나란히 좌 우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은 결코 우연이거나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I) 이 두 명의 강도는 이미 죄인으로 하나님의 정죄 하심을 받은 우리 인간들을 말해 줍니다.

  ① 우리 인간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아담 안에서 죄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2). 우리는 마땅히 아무 소망이 없는 이 두 강도처럼 하나님의 정죄 하심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그같은 저주를 받을 사람들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② 두 강도의 경우는 바로 죄 값은 사망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말씀했습니다(롬6:23). 우리는 이미 이 사망의 선고를 받은 인간들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인 되었기 때문이며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③ 이 두 강도가 인류의 죄를 말해준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로 의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롬3:10-12).

  (2) 이 두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가 두 길로 갈라진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강도에 대하여 누가 좌 우편에 서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구원받은 강도에 대하여 오른편에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멸망 받은 강도를 왼편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처럼 생각하는 일은 매우 성경적이라 보겠습니다(마25:31-46).

  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왼편에 있는 강도는 율법의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지 못하지만 율법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세례요한의 때까지만 존재 가치가 있지만 그 이후의 세대에 이 율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마5:17-18).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들은 율법의 정죄나 율법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롬2:12).

  ② 그리고 오른편에 달린 강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그 죗값은 한결같이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의를 소유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선포된 것입니다(롬3:21-24).

  우리는 영원히 정죄 받을 강도 같은 자들이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서실 때 그의 왼편 강도를 통하여 율법의 저주로 영원히 멸망 받을 인간의 길을 보여 주셨고, 오른편 강도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어 생명을 얻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세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들의 갈 길이 어느 길인가에 대하여 사망의 길이든지, 생명의 길이든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어 두 강도의 경우로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일은 모든 인류를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위한 특별하신 은혜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두 강도가 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중에 한 강도만 구원을 받은 사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생이 작정된 자가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13:48).


  2. 두 강도가 택한 길


  두 강도가 죄를 범한 일은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에 사형 언도를 받은 일도 같았습니다. 또 그들이 처음에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비방한 일까지도 마찬가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강도는 운명의 최후의 순간에 그들의 길이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1) 왼편쪽 강도는 끌까지 회개를 못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에 대한 비방과 조롱이 죽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스스로 거절하고 멸망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 강도처럼 예수를 믿을 기회를 스스로 거절함으로 사망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입니다.

  (2) 오른편 강도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 자기 인생을 의뢰했습니다. 이 강도는 그 한편 강도와 동일 범이요 그와 함께 예수를 조롱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얼마 후에 마음의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①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한 동료를 꾸짖으며 이처럼 말했습니다. “네가 통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회개했습니다.

  ②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③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④ 그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곳에 갈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간구한 그의 기도 내용에서 이것을 찾을 수 있  는 것입니다.

  ⑤ 그는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로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심령의 변화는 순간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십니다.

  결 론 : 우리는 이 두 강도 중 과연 어느 강도의 경우에 해당된 사람들인가에 대하여 자신을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13:5). 우리는 모두 이 강도들처럼 멸망을 받을 존재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온전히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 206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본문 : 마태복음 27 : 45 - 49)



  서 론 : 예수님은 아직도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채 달려 계십니다. 그의 고통은 날로 더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은 자기를 해롭게 한 무리들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자비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는 강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까지 많은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놀랜 나머지 어찌할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두움이 걷힐 시간이 이르게 되었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입에서 하늘이 찢어질 듯한 비통한 부르짖음이 적막한 공기를 가르고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주님의 고통의 외치심이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있어온 이래 이처럼 애절한 고통의 외침이 있었겠는가? 이 고통의 부르짖음은 아직까지도 온 세상에 메아리쳐 올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이 주님의 고통의 외치심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1. 세상에 임한 어두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제 삼 시였습니다(막15:25). 이 시간은 현재 시간으로 오전 9씨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난 후인 제 육 시(12시를 가리킴)에 이 세상에 어두움이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은 세 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제 9시에 걷히게 되었고(3시경) 그 때 주님이 운명하셨습니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향하여 무섭게 진노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는 곧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겨냥하여 죄인들에 대한 진노의 심판을 퍼부으셨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온 죄인의 죄를 대신 젊어진 온 인류의 죄의 대표자로서 이 진노를 당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진노의 심판을 그 아들에게 부으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같은 죄인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는 것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7-8).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요일4:10). 예수님은 이 어둠을 견디시기 어려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시는 순간이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셔야 할 고통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2.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 6시부터 제 9시까지 계속된 어두움이 가실 즈음인 그 시간에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곧 풀이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1)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주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도, 또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도 아들에 대한 사랑을 말씀으로 들려 주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예수님은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나타내심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에서 예수님 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는 존재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요1:18).

  (2) 하나님은 그의 아들과 항상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은 태초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요1:2).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중 제자들에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시는 말씀을 가끔 들려 주셨습니다(요6:16-29, 16:32). 예수님은 아버지의 보내신 자이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버리실 수는 없으십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으므로 아버지가 그와 함께 하셔야 했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인가? 그것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아들을 아들로 보신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순간적이지만 하나님은 이 때 예수를 아들로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할 죄인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실로 예수는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죄인으로서의 심판을 받았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요3:18. 롬6:6). 예수님이 이 때 버리심을 당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그의 아들까지라도 버리실 수 있었던 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 3:16절에 너무나도 명백하고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4) 주님의 이 외치심은 그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은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육적인 면에서 보다 영적인 면에서 더욱 심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말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 당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두움 속에서 그런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고 하는 순간적인 생각은 그의 영혼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외침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버리심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버리심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이처럼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셨을 뿐 아니라 우리 죄에 대한 완벽한 형벌(그의 피 흘리심과 사망의 고통)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다만 이 사실을 믿고 주님을 영접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사유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업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벌하셨으며, 우리가 받아야 할 죄 값을 다 치르게 하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우리 주님은 다만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그 모진 고통과 하나님의 버리심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 위의 고통은 모든 죄인들이 자기의 최 값으로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히 당해야 할 고통만큼이나 큰 것이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 값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예수님의 사랑을 거역한 죄 값으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 놀라운 우리 주님의 사랑이여, 사도 바울은 이처럼 감격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롬8:35-39).






  ≈ 207 ≈       찢어진 성소 휘장


  (본문 : 마태복음 27 : 50 - 56)



  서 론 : 영국에서 태어난 찬송 작가 해벌거 양은 “내 너를 위하여”란 찬송가185장을 작사한 사람입니다. 그가 몸이 심히 쇠약했을 때 아버지의 권유로 세계 여러 곳으로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독일 뒤셀돌프에 있는 어느 목사님 댁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녀는 목사님 서재에서 가시간을 쓰고 계시는 “엑케이 호모”란 이름이 붙여진 주님의 성화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화 아래에는 두 줄로 짤막한 좌우명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 너를 위해 이 일을 햇것만 너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 해벌거 양은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충격을 받아 그 순간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종이에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해벌거 양이 독일 목사님 서재에서 쳐다 본 ‘엑케이 호모’란 성화는 슈테른 베르크의 작품으로 그 그림의 이름인 ‘엑케이 호모’란 말은 라틴어로 ‘이 사람을 보라’고 하는 뜻입니다. 해벌거 양은 이때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는 찬송시를 썼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리시고 이제 큰 소리와 함께 영혼이 그 몸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의 영혼이 그를 떠나신 후에 더욱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겨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성소 휘장이 위로 아래까지 찢어지다.


  예수님의 운명하심과 함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겨진 일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성소 휘장이 찢겨진 일은 이제는 구약적인 희생 제물은 필요 없으시다 는 하나님의 선언이십니다.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간에 가로막힌 하나의 칸막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칸막이는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매해 한차례씩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속함 받기 위해 그 지성소 안에 들어가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때 대제사장은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갔으며 또 백성들을 위해서는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이곳에 들어가 속죄 제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죽으심으로 성소 휘장이 찢어져 지성소와 성소와의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이제 대제사장이 그 곳에 들어갈 필요도 없게 되었고 백성들의 죄를 위해 염소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필요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그 백성들의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2) 성소 휘장이 찢겨진 일은 땅 위의 지성소가 하늘로 옮겨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래가 땅의 지성소는 하늘의 지성소의 모형입니다(히8:5-6). 땅 위에 존재했던 지성소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의 지성소의 대제사장이 되실 때까지만 필요로 했던 곳입니다(히9:11-12).

  지성소에 들어가 일했던 이 땅 위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으로 등장하심으로 그 존재 의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 대제사장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었기 때문에 실체가 오신 후에는 모형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히9:1-10). 지성소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형으로 세우게 하셨던 땅 위의 지성소가 없어졌으며 그 곳에서 일하던 대제사장만이 없어졌을 뿐 우리의 참 지성소가 하늘로 옮겨졌으며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 대제사장은 영원히 변치 않으실 분이요 그가 가지고 들어가신 속죄 제물도 그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셨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 제물로 다시는 그 어느 무엇도 속죄 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히7:23-27).

  (3) 성소 휘장이 찢겨진 일은 하나님과의 원수의 담이 무너진 사실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골1:20). 그러므로 성소의 휘장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죄악의 담으로 인하여 절대로 하나님께로 넘어갈 수 없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담을 허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허신 것입니다(골1:20-22).

  (4) 성소의 휘장이 찢겨진 일은 아버지께로 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려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10:20).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서 찢어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리심으로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그가 친히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다른 길이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몸으로 찢어 놓으신 휘장 가운데로 가는 길만이 참 길인 것입니다. 휘장 가운데로 간다는 말은 그 휘장을 찢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화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히4:16).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만 들어 갈 수 있었던 그 자리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도 땅의 지성소가 아니라 친히 하나님이 계시는 그리고 우리의 대제사장이 계시는 은혜의 보화 앞에 나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다른 사건들


  주님이 운명하신 직후 일어난 사건은 비단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일만이 아닙니다.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는 지진이 있었고 무덤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는 일도 생겼습니다.

  무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난 사건은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 주석가들은 이 대목의 말씀에 대해 주석을 피하고 있습니다. 너무 난해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 안에서 이 문제를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시 무덤에 묻혀 있었던 사람 중 주님의 부활시 무덤에서 살아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성도들이란 물론 구약성도들을 의미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존시에는 그를 믿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만한 많은 성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들이 부활한 몸으로 살아난 것이 아닌 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며 그 다음에 부활할 자로는 주님이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들로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5:20-24). 그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무 말씀이 없으므로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끝까지 그 곳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곳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로마 군병의 지휘자인 백부장과 주님을 채찍으로 때리며 희롱하며 주님의 옷을 제비뽑은 무리들, 곧 로마 군병들과 갈릴리로부터 온 많은 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결 론 :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이제 우리의 지성소는 하늘에 옮겨졌다는 사실과 그 장소에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우리 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롬8:34. 히7:25. 요일2:1). 우리 인간의 구원의 길은 예수님께서 그의 몸으로 찢어 놓으신 휘장으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길이요 이 길만이 하나님의 보화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길을 열어 놓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어 고난을 당하셨고 그가 이 일을 다 이루었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그 길이 열린 것입니다.





  ≈ 208 ≈       예수님의 무덤


  (본문 : 마태복음 27 : 57 - 66)



  서 론 :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그의 무덤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던 충성스러운 제자, 요셉이란 사람이 등장하여 주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아름다운 모습이 나오는가 하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무리들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무덤을 지키는 일의 허락을 받아 무덤을 막은 돌에 인봉하고 파수꾼으로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1.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등장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가 반드시 생각되는 인물로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란 사람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그는 예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의 제자 중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서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한번의 동장도 없었던 제자 중에 이처럼 믿음이 훌륭하고 실천적인 사람이 있었는가? 생각되리 만치 그의 등장은 복음서를 마무리짓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라고 했습니다(막15:43). 공회원이란 이스라엘의 최고 재판 기관이요 종교적 의결 기관인 ‘산혜드린공회’의 의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빌라도의 재판 석에 스셨습니다. 이 기관은 이스라엘의 가장 존귀한 사람들, 대제사장, 서기관들,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 유대인들의 당면한 중대사들을 처리하는 곳이기에 그 회원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란 존칭을 받을 만 했습니다.

  (3) 그는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의 결의에 가타 아니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눅23:50-51). 예수를 잡아 공회에서 예수님을 재판할 때 그들은 관례에 의하여 다수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만장일치의 결의를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 요셉이란 사람은 분명히 부표를 던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쟁쟁한 유대인들의 무리 앞에서 예수를 정죄하는 표결에서 가타 아니한 것입니다(마 10:32-33).

  (4)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막15:43).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된 곳은 어떤 천국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대망하는 사람들의 영적인 믿음의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통하여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5) 요셉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눅23:50). 바리새인들이나 공회원들은 시기가 가득한 자들이었고, 외식하는 자들이었으며, 거짓 증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재판할 때 찾은 것은 거짓 증인들이었으며, 잡다한 거짓 증거로 예수님올 정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요셉이란 사람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고 있는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그들 무리들과 함께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요셉이 단신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관원들에게 잡힐 두려움으로 지금 어디 숨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요셉이 겹도 없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당당히 요구한 일은 그의 결사적인 각오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충성됨은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찾아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안일한 가운데서는 주를 위해 죽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했지만 그에게 위험이 왔을 때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평소에는 제자로 자신을 나타내지 아니했지만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가장 어려울 때 어느 누구하나 손을 쓰는 사람이 없는 그 위기에 그가 흔연히 나타나 그의 담대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2. 무덤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여인들


  (1) 가슴을 치며 졸아간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어두움이 세 시간 동안 깔렸을 때 많은 사람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눅23:48). 어둠이 세상에 깔린 일은 때가 한 낮이었습니다. 이 어둠은 골고다 언덕뿐 아니라 모든 언덕과 계곡에까지 덮였습니다. 온 세상이 어두움으로 캄캄해진 것입니다. 누구라도 장님처럼 더듬지 않고는 길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조롱하던 무리들의 입이 닫혀졌습니다. 제비를 뽑던 로마 군병들의 손이 내려졌습니다. 머리를 흔들며 주님을 모욕하던 무리들도 어리벙벙했습니다. 그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돌이켜 바라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저들이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2) 나중에 백부장과 그의 부하들인 로마군병들도 철수했습니다. 백부장은 그 된 모든 일을 친히 보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고백하면서 끝까지 지키고 있다가 부하들과 함께 골고다에서 철수했습니다.

  (3)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만이 끝까지 주님의 무덤 앞에 있었습니다. 이제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님의 시체는 십자가에 달린 채로 골고다 언덕 위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체를 그대로 두고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로 나온 몇 명의 여인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요셉의 하는 모든 일을 먼 거리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쫓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눅23:55).

  주님 곁에 끝까지 남은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잘 따르다가도 얼마안가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 주님의 곁을 떠나고 다만 열 두 명의 제자들만 그의 곁에 남았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요6:62).


  3. 무덤을 지킨 파수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제 예수가 완전히 죽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를 누군가에 의하여 무덤에 장사되어 있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 게 한 가지 걱정이 가시지 아니했습니다. 그 걱정이란 그들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로 예수가 평소에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사신다고 말씀한 일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 말을 곧이 들을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염려는 그의 제자들이 그 시체를 홈쳐간 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선전하면 뒤가 시끄러워 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한 후 빌라도를 찾아가 건의하기로 했습니다. 그 무덤을
 PREV :   마태복음 28장 설교 밤중소리 
 NEXT :   마태복음 26장 설교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