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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7,247



  ≈ 191 ≈       옥합을 깬 한 여인


  (본문 : 마태복음 26 : 1 - 13)



  서 론 : 우리는 여기서 한 여자라고 밝힌 여인에 의하여 한 가지 아름다운 사건이 벌어진 일을 바라보게 됩니다. 매우 귀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데서 온 파문입니다. 만약 마태복음에서만 이 사건을 취급했다면 우리는 퍽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신 이 여인에 대하여 사도들 외에는 자신 있게 설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사건이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됨으로 우리는 이 미지의 여인이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리아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요 12:1-8).

  예수님은 유월절을 당하기 이틀 전에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푼 베다니 동네 문둥이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되실 분이신 지라 이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제 이틀을 지나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인자가 팔리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


  시몬의 식사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방안에서 식사하시는 중에 계셨습니다. 그 방안에는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도 함께 동석했습니다 (요 12:2). 그리고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는 접대하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분위기 가 한참 고조되어 있을 때 바로 그 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아주 귀하고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여인은 그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깬 후에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12:3). 머리와 발의 차이는 아마 한 근이나 되는 이 나드 향유를 처음엔 머리에다 붓고 또 나중엔 발에도 부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안색은 과히 기쁨에 찬 모습은 아닌 듯 보입니다.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린 일은 슬픔이나 눈물을 연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이 나드 향유는 그 값이 무려 300 데나리온에 상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으로 환산된 시기였기 때문에 300 데나리온이란 돈은 그 누가 생각하기에도 엄청나게 많은 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로 인하여 파문이 나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에겐 더욱이 굉장한 액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가난한 여인으로 이만한 돈은 그의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가난한 중에 주님을 섬기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막12:43).

  (2) 이 나드 향유는 결혼하는 신부의 지참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중동 지방에는 처녀들이 결혼할 때 신랑을 위하여 한 평생 자기 몸에 바를 향유로 이 나드향 한 근이 들어 있는 옥합을 준비했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한 마리아였지만 장래의 부푼 꿈을 안고 이 귀한 옥합을 장만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을 귀히 보는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섬깁니다.


  2. 이로 인한 제자들의 견해


  값진 나드향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일은 그 방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제자들이 나타낸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고 했습니다.

  (I)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무슨 의사냐”란 물음에서 제자들은 마리아가 나드향을 부어드린 그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그들은 이것을 왜 허비하느냐고 했습니다. ‘허비’란 말은 쓸 데 없는 곳에 돈올 낭비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값있게 쓰는 일에 대하여 허비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사랑으로 헌신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이해타산으로 주님을 섬겨 왔기 때문에, 참으로 섬기는 마리아의 헌신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허비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3) 그들은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말은 그들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말을 대표적으로 말한 가룟 유다는 “그는 도적이라 맡은 돈 중에서 홈쳐가기 훌 위함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요12:6).


  3. 예수님이 취하신 태도


  우리의 관심은 이런 상황에서 과연 예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결론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최종 판결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행한 일과 이 여인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바라보시고 예수님은 몇 가지로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1)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인을 괴롭게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분명히 주님께 가장 중요한 헌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을 나무란 나머지 그 여인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알아야 할 일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면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2)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한 일은 책망을 듣거나 괴롭힘을 당해야 할 일이 아니라 주님께 좋은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이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하신 그 좋은 일이란 다른 말씀이 아니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야 말로 예수께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이 같은 일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그에게 최종적으로 헌신한 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던 주님의 고난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늘 주님의 곁에서 말씀을 가까이 해 온 여자였습니다. 그 언니 마르다의 신앙도 대단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요11:27).

  이제 얼마후면 주님께서 고난올 당하실 줄로 알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진 가장 값진 향유로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리며 머리를 풀어 씻어드리며 눈물을 흘렸던 슬픔의 봉사였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최대의 칭찬과 상급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한 일에는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주님의 칭찬이 따르고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결 론 : 마리아의 옥합은 주님의 장례 전에 깬 것으로 인하여 참 가치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 헌신하는 일에는 가장 귀하고 값진 것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드리고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 192 ≈       랍비여 내니이까?


  (본문 : 마태복음 26 : 14 - 25)



  서 론 :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는 주님의 깊은 탄식을 들은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거짓 사랑한 한 표본 인물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신한자의 거울입니다. 가룟 유다는 진실한 믿음이 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거짓된 믿음의 본을 보여 준 사람입니다.


  1. 유월절에 지킨 최후의 만찬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옥합을 깬 사건은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스승에 대한 반발심을 강하게 가지게 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 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고 한 유다의 힐책에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는 책망을 주셨을 때, 무안을 당하자 그의 내심에는 예수님을 어떻게 제사장들에게 넘겨 줄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즉각 실천에 옮겼습니다. 유다는 그 틈에서 이탈하여 대제사장에게 찾아갔습니다. 유대인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이 같은 제의를 받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스승을 원수들에게 넘겨주는 일에 서로 마주 앉아 흥정을 한 것입니다. 그때 마침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하고 있을 그 때였습니다(2,3).

  가룟 유다를 맞은 그들은 이 놀라운 사실에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은 삼십을 달아 유다의 손에 꽉 쥐여 주었습니다. 은 삼십이 얼마 정도의 돈인가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지만 가룟 유다에게는 흡족한 액수였을 것입니다. 이제 유다와 대제사장간의 예수를 사고 파는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다가 할 일은 기회를 엿보아 예수를 그들의 손에 넘겨주는 일이요 그들은 유다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아 재판을 하여 죽이는 일입니다. 유다는 다시 제자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지금부터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함께 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손에 넘겨주기 위한 기회를 엿보기 위해 한 무리가 된 것입니다.

  (I) 무교절 첫날에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안에 있는 한 집을 지적하시면서 제자들로 그 집에 찾아가서 유월절 잔치를 준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저물 때에 예수님과 열 두 제자는 상에 둘러앉았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속히 예수님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으면 하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했을 것입니다.

  (2) 이때에 참으로 놀랍게도 예수님의 입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 말씀은 순식간에 그 자리를 숙연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에는 가룟 유다가 하는 일에 대하여 통분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운명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모르는 그의 완악함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면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은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같은 계획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아무런 이유도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틀이 지나면 주님은 기록된 대로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는 그 일을 이루심에 쓰임 받는 그릇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일에 자기 스승을 대제사장의 무리들에게 팔아먹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가 인류구원의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을 파는 일을 담당한다고 해서 그 책임이 그에게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은 화가 있으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유다가 배도자가 된 이유


  나를 팔자가 너희 중에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누구인가를 찾아내려는 듯, 자기는 결코 자기 선생님을 팔아먹는 배신자가 아님을 여러 사람 앞에서 확인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차례로 돌아가면서 주님을 향하여 “주여 내니이까”하며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1) 유다는 예수님께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배신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적인 두뇌가 남달리 명석했습니다. 스승이 죽게 될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눈치 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 더 소망을 둘 것이 무엇이겠는가?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육신의 소망이 살아졌을 때 가룟 유다가 되어 버립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골3:2).

  (2) 유다는 원래가 탐심으로 주님을 섬겨 온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유다는 애초부터 도적이었고 돈을 사랑하는 탐심 많은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돈올 사랑한 일은 자기 스승을 돈으로 팔아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딤전6:10).

  (3) 유다는 인간성 그 자체가 간교하고 뻔뻔스러운 자였습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주여 내니이까”하며 묻는 순서가 이제 유다에게 까지 왔습니다. 그는 “랍비여 내니이까”하며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유다의 인간성의 간교함과 뻔뻔스러움을 잘 나타낸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악당들의 길을 인도하여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에도 “선생님이여 안녕하시옵니까”라고 인사했습니다. 그의 이 같은 후안무치한 행동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성품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유다는 회개가 없는 자였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 결코 죄악 가운데서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여러 가지로 자신을 깨달아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하셨는데도 그는 마음을 강퍅하게 했습니다(요13:26).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도다”고 그에게 직선적으로 말씀하셨는데도 그는 그 마음을 더욱 굳혔습니다(마26:25). 예수님은 그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는데도 끝내 뉘우치기를 거절했습니다(요 13:27).

  결 론 : 가룟 유다는 돈에 눈이 먼 사람이요, 땅의 것으로 소망을 삼은 사람이요, , 탐심을 위해서는 비정의 사나이였지만 결국 돈도 써 보지 못하고 세상의 소망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하게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유다의 길을 걸으면 안됩니다.





  ≈ 193 ≈       새 언약의 피


  (본문 : 마태복음 26 : 26 - 30)



  서 론 :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가 속죄 양으로 죽으실 시기도 유월절이 가장 적합한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속죄의 언약을 피로 세우셨습니다. 구약 율법 아래서의 속죄 언약은 짐승의 피로써 세우셨지만 신약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로 만민의 죄를 속죄하는 새 언약의 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이 새 언약의 피를 흘리셔야 하셨기에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이 같은 속죄 양으로 고난을 받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 행사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게 하신 일은 새 언약의 참여자들에게 중대한 의의를 갖는 것입니다.


  1. 떡을 떼신 예수님


유월절 행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집안 식구들끼리 모여 양을 잡아 그 고기를 먹고 그 한 주간은 누룩이 없는 떡 즉 무교병을 먹습니다.

  (1) 예수님은 먼저 떡을 가지고 축복하셨습니다. 이 떡은 물론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이었지만 이 떡을 먹게 하신 참 의의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떡에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 시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주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축복한다는 ‘율로게오’란 말은 찬양한다, 축복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먹을 때 주님이 주신 축복에 감사하며 그를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을 가지사 그것을 내 몸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찢기신 그의 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몸은 누룩 없는 떡이십니다. 누룩이란 인간의 죄를 상징합니다. 죄인들인 인간은 그 누구도 누룩 없는 떡을 줄 수 없습니다. 이 떡이야말로 영생의 만나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누룩 없는 떡으로 그의 몸을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누룩 없는 먹을 먹고 참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묵은 누룩, 인간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다주는 묵은 괴악한 누룩을 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회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먹으로 하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5:7-8).


  2. 포도주를 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먹을 떼게 하신 후에 이번에는 잔에 포도주를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신 데 특히 인간의 죄를 피로 사죄할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1) 아담과의 언약에도 피로써 이루셨음을 알게 됩니다. 타락한 아담은 죄 사함을 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이 제사입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셨다고 했습니다(히11:4).

  (2)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에도 피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율법을 범한 자는 정죄함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 율법을 범한 자를 용서해 주시는 언약을 짐승의 피로 세우신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레17:11). 신약에 와서도 이를 증거하기를 “율법을 쫓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9:22).

  (3) 속죄의 언약은 그리스도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피 흘리는 모든 속죄 제사는 인간의 속죄를 위하여 대신 흘리실 그리스도의 피 흘림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요 상징이었습니다.

  ① 율법의 피는 언약의 피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놀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0:1).

  ②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속죄 양이 되심으로 언약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히10:12).

  ③ 예수님의 피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7:22).

  ④ 이제 이 새 언약의 피를 더럽히는 자들에 대한 속죄는 다시는 없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말씀했습니다(히10:29).

  (4) 그리스도로 완성하신 새 언약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5) 예수님은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이 잔을 저희에게 주시며 너희는 이것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잔이란 곧 포도주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자기의 피로 상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예수님께서 그 나무에서 짜낸 포도주를 그의 피로 상징하신 일은 매우 뜻 깊은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미지의 인물인데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줄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고 했습니다(창14:18. 히5:10). 여기에는 영적인 다분한 의미가 주어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행하라고 하신 일은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영적인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받는 떡과 잔은 주님이 축복하시고 사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찬에 참여함은 이 같은 주님의 축복의 잔에 동참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때는 먹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에 아니냐”고 했습니다(고전10:16). 십자가에서 그의 몸이 찢기시고 그의 피가 흘리신 바 된 것이 우리가 맥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것처럼 분명하여 이를 행하므로 내게 이루어진 구원의 사실을 영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기시키므로 그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몸에 채우는 일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신부들입니다. 우리는 그가 오실 때까지 주님이 축복으로 주시는 이 떡과 잔을 들면서 소망 중에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유월절은 구약적 언약의 상징으로 육적 이스라엘이 지켜온 명절입니다. 그러나 주의 성찬은 신약적 언약의 성취로 우리는 이를 행할 때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그의 구원을 영원히 찬양해야 합니다.




  ≈ 194 ≈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본문 : 마태복음 26 : 31 - 35)



  서 론 :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이 끝난 후 찬미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몇 시간 전에 만찬석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면서 제각기 “내니이까”하며 물었습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그들 가운데서 물러갔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범위를 훨씬 넓혀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본심에도 없는 이 말씀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맹세하고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이 주님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했습니다.


  1.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그 모든 말씀이 다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말씀은 창조주의 말씀이요 인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주인공의 예언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신 주님의 예언은 제자들의 안타까운 맹세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도 예수님은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틀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일이 이미 예언된 사실임을 밝히셨습니다(요13:18. 시41:9).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바로 스가랴서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근거로 하신 것입니다(슥13:7). 예언의 말씀은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으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의지하여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실 일에 대하여 알고 계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이 당하실 모든 일에 대하여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구약의 선지자 속에 예언의 영으로 역사하신 분이십니다(벧전1:11).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일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스가랴가 예언한 말씀에 따라 제자들에게 이 같은 말씀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은 바로 우리 인생의 걸음을 정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면 베드로의 인생은 그대로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나오시는 말씀이 헛된 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히1:3. 사57:19).

  (4)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처럼 작정하신 것인가? 첫째로 예수님에게는 매우 괴로우신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심에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야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이 증거 되기 때문에 주님은 그에게 예언된 모든 쓴 잔을 다 마셨던 것입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 53,54).

  둘째로 주님은 그들을 데려가시는 데 목적이 있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중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신 것입니다(요21:18. 요17:15). 세 번째의 이유는 그들로 세상에 남아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요17:18. 행1:8).


  2. 베드로의 호언장담


  (1) 베드로는 자신의 마음의 부패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탄식을 듣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약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못하고 육신의 일에 사로잡혀 범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던 것입니다(롬7:21-24). 예레미야 선지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렘17:9). 베드로는 이 같은 자기 마음의 더러움을 모르고 자기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영적인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을 자기 바로 옆에 두고 “다 버릴지라도”라고 하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교만한 말인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신앙의 우월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교만한자를 낮추신다고 하신 말씀대로 그의 그 방자한 교만이 꺾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3) 베드로는 독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의 결론적인 대답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몰랐습니다. 감정적인 기분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4) 베드로의 더 큰 잘못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더 믿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오늘 밤 닮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 앞에 그는 마땅히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는 지난날의 자신의 겸손과 무력함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눅5:8).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 주님의 말씀에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그 말씀보다 앞세우고 권위를 두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우리의 실수와 잘못은 늘 이 베드로와 같은 마음가짐에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가야 하며 말씀 앞에 녹아나야 하며 말씀 안에 자신을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5) 다른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맹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와 같이 말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무시하고 자신만을 내 세우는 베드로가 마땅치 아니했습니다. 아마 속으로 분히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제각기 나서며 “나도 베드로처럼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결 론 : 이들은 주님의 하신 말씀대로 주님이 붙잡히는 현장에서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날 밤 닭 울기 전에 주님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버림받지는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고 하신 말씀대로 이루신 것입니다(요 17:12).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을 아시고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마 26:29). 베드로에게는 이 실패가 그의 성공의 관건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졌으며 그의 평생을 통하여 다시는 주님을 부인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도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여 좌절하면 안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잠24:16).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 195 ≈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본문 : 마태복음 26 : 36 - 46)



  서 론 : 예수님은 언제나 앞에 다가올 큰 일을 두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에 들어가실 때에도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 기도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군중들로부터 왕으로 모시고자 하셨을 때도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도 밤 새워 기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은 그 때도 산에 오르사 밤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당하는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시50:15).


  1. 겟세마네에 올라가신 예수님


  이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처럼 촉박해 오는 고난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고민과 슬픔을 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마음의 고민을 아버지께 맡기고 새 힘을 얻어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일군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기도할 사명자를 뽑았습니다. 여러 명의 제자 중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기도의 협력자로 인정하시고 그들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는 곳으로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런 심정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그의 다가온 죽음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민이란 말은 ‘루페’로 이 말의 뜻은 괴로움, 고통을 말합니다. 주님은 괴로움으로 그 마음이 착잡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런 괴로움과 슬픔은 어디서 온 것인가? 잠시 후 유다가 길을 인도해 올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밀어닥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결국은 다 스승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은 그의 재판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견디기 어려운 수모를 당하실 일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셔야 할 그의 영 육간의 고통을 이때부터 몸으로 체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2. 주님의 기도하시는 모습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주님의 기도는 처절하신 기도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1) 주님은 그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피곤하심과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말해 줍니다. 주님의 비하는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신 것 뿐 아니라 그 머리를 땅에까지 대실 정도로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그의 얼굴을 땅에 가리우실 정도로 큰 비애를 안고 계셨던 것입니다.

  (2) 주님은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릎을 꿇으신 채로 엎드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앞에서의 그의 겸손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기도의 내용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버리심을 당하는 고통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죄인의 죄를 대신 젊어지시고 그 죄 값에 대한 심판을 받으셔야 하셨으므로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으신 이후의 그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은 하나님의 위로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고통은 바로 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고통의 잔에 대하여 그토록 애절한 호소로 아뢴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먼저 당신이 지금 당하고 계시는 그 고통을 아뢰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기도를 주님이 십자가를 피하시려는 뜻에서 하셨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 고통의 잔을 마시기 위해서였음을 아셨으며 그 잔을 마시지 않고는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12:27).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마음의 갈등에서 그의 인간적인 심정을 이처럼 표현하신 데 불과한 것입니다.

  (2)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기도를 곧 수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기도는 주님이 자신의 그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먼저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나 환난 중에라도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고 찾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이같이 동일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드렸습니다. 이런 기도의 반복에서 주님이 드실 이 쓰디쓴 잔의 괴로움을 우리는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마음에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얻기까지 반복적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4) 주님을 따라 함께 간 세 명의 제자들까지도 주님이 기도하실 시간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탄식하셨습니다.

  (5)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도 된다는 뜻이냐? 그러나 주님은 곧 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심으로 잠을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을 향하여 빈정대신 말씀이시냐? 주님은 가장 신실하시고 긍휼히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제는 올 것이 왔으니 이 문제에 대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주님은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어떤 응답을 받았다던가 어떤 음성을 들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에 대하여 다만 침묵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결단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더욱 굳게 확신하셨습니다. 이 기도로 더욱 큰 성령의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까지 이 기도로 계속 행진하셨습니다.





  ≈ 196 ≈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


  (본문 : 마태복음 26 : 47 - 56)



  서 론 : 예수님은 그의 때가 오셨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다”고 하셨습니다(요12:27). 기도하신 자리에서 일어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가실 새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를 데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가까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임전 태세를 갖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내리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 한 제자(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말고)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참으로 온 인류의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과 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들에게 큰 경종을 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는 말씀이십니다.


  1. 유다의 간교한 인사


  가룟 유다가 길을 인도한 무리들은 큰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의 조언에 의하여 완벽한 작전을 썼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결사적인 대항을 예상했습니다. 유다는 제자들이 자기 선생을 위하여 대담하게 싸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주여 내니이까”고 물으면서 어찌 그런 일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결연한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그의 주변에 주님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이 얼마간 있을 것으로 예견했기 때문에 큰 무리들을 동원했고 그들의 손에는 검과 몽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선생과 입을 맞추는 것으로 군호를 썼습니다. 입을 맞추는 인사는 서구적인 인사법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런 인사법을 오래 전부터 관습적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이 인사는 친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에 있었던 인사였는데 가룟 유다는 자기 선생을 잡으라는 군호로 이 인사법을 쓴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그리 스도인들은 바로 이 가룟 유다의 인사법으로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부르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잘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가룟 유다의 입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2. 친구여 !


  가룟 유다의 간교하고 음흉스런 인사를 받은 예수님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친구라는 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친구라고 하신 말씀에는 넘치는 사랑과 신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언제나 친구란 표현으로 불렀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2:4).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하셨습니다(요11:11).

  예수님의 이 말씀 중에는 유다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사단의 종으로 일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불쌍히 보셨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원수의 무리들의 손에 넘겨주는 자가 된 일에 대하여, 그가 하필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좋지 않은 그릇이 된 일에 대하여 그의 인생을 슬퍼하셨습니다.

  유다에게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주님은 유다를 사랑하시는 나머지 그가 행하려는 그의 행위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바라보게 하심으로 그를 회개시키시려는 뜻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때에 유다가 예수님 앞에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고 가슴을 치며 통회했었다면 예수님은 비록 그들의 손에 잡혀가셨을지라도 유다의 그 무서운 죄는 사유하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배울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죄를 범하는 죄인이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정죄하심을 받아 멸망 받을 사람이라 해도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심정으로 끝까지 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불쌍히 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 베드로의 검


  이곳에는 “예수와 함께 있는 자 중에 하나”라고 나와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그가 베드로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아마 마태가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베드로의 이름을 밝힐 시기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신상에 위험이 올 때 사용하려고 마련한 것일는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이제 자기 선생님의 위기가 온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자기가 예수님께 맹세한 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말했을 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선 주님의 말씀올 생각하면서 그들과 생명을 다하여 싸울 임전 태세를 갖춘 것입니다.

  베드로는 칼을 뽑았습니다. 그는 그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런 것이 그만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에 맞아 짤라져 떨어진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이제 예수님도 자기편이 되어 이들 무리들과 싸우실 것으로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려울 때 나타내신 권능이라든가 기적을 늘 보아왔기 때문에 아무리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들과 왔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칼을 휘든 그의 만용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꾸짖으시는 투로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예견했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이제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망갈 기회만을 엿보다가 자기 선생을 그 

   (1) 하나님의 뜻은 검으로 이루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검으로 죄인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면 예수님은 그 당시 자기를 거역하는 모든 사람들을 멸절시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말씀하심으로 베드로의 검을 도로 꽂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복음의 유일한 무기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인 검이 필요합니다. 이 검이야말로 사람의 심혼골수를 쪼개어 회개시키며 영생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검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엡6:17).

  (3) 이 말씀은 또한 검을 쓰는 자는 그 검으로 망할 것이라고 하는 만고 불변의 하나님의 법칙을 천명하신 말씀이십니다. 인간의 역사가 있어온 이래 아직까지 검을 쓴 자들이 그 검으로 망하지 않은 경우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잡으러 온 그 무리들이 받을 결과에 대한 경종도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대로 로마군의 검에 의하여 멸망을 받았습니다.

  결 론 : 예수님께서는 잠잠하셨습니다. 그들의 검과 몽치에 대항치 않으시고 순순히 그들의 손에 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에라도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이들을 하늘의 불로 소멸시키거나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는 말씀으로 아버지께서 주시는 쓴잔을 드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가 받으신 상급을 받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져야 할 얼마간의 주님의 고난을 남겨 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우리가 이 고난에 참여함은 놀라운 축복입니다(마5:11-12. 롬 8:17-18).





  ≈ 197 ≈       사형언도를 내린 종교재판


  (본문 : 마태복음 26 : 57 - 68)



서 론 :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잡으려는 큰 무리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가까이 올 때 그들을 대항하려고 베드로는 칼까지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쳤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그들의 손에 잡혀가시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자기들의 신상에 위기가 온 줄로 직감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그 곳에 둔 채 다 도망쳤습니다. 예수념은 그들에게 끌려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참람하다는 정죄와 함께 사형 언도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빌라도 총독의 재가만 얻으면 그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예수님께 대한 살인 음모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받으신 재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잡히신 그 시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루 동안에 여기 저기 왕래하시면서 무려 다섯 차례의 심문과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먼저 안나스의 집에 끌려 가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가야바에게로 갔다고 했지만 가야바에게로 가기 전에 안나스에게 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요18:12). 안나스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자 증경 대제사장으로써 실질적인 권세를 가지고 산혜드린 공회를 움직여 온 실력자였습니다.

  (2) 예수님은 다음에 가야바에게로 끌려 가셨습니다. 이 사람은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 곳에 서기관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곳에서 예수님을 정죄할 종교 재판의 준비가 다 갖추어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제는 최종적인 확인을 위해 빌라도 총독 앞에 서시게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 언도를 내렸어도 그 집행에 있어서는 총독의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빌라도 앞으로 끌려 간 것입니다.

  (4) 예수님은 헤롯왕 앞에 스셨습니다. 빌라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사실을 알게 되자 이 재판권은 헤롯왕에게 속한 것임을 알고 예수님을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는 헤롯에게로 보낸 것입니다.

  (5)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 앞에서 최종적인 재판를 받게 되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께 기대했던 자기 생각이 허망하게 되자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눅23:6-12).
  예수님은 전날 밤을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 몸이 몹시 지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신 이후 아무 것도 입에 대신 것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시장하시고 피곤하신 지치신 몸으로 그들의 손에 결박된 채 이처럼 끌려 다니신 것입니다.


  2. 참람한 죄목으로 정죄 받으신 예수님


  가야바의 뜰에 산혜드린 공회의 재판석을 베푼 이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유죄 판결을 위해 먼저 확실한 증거를 채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와 음모로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에게 증거가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1) 거짓 증인이 많이 왔다고 했습니다. 거짓 중인이란 사실이 아닌 증거를 내세워 죄 없는 사람을 정죄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거짓말은 일치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들 거짓 중인이 오기는 많이 왔지만 그들의 증거를 채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두 사람의 보다 확실한 증인이 왔다고 재판석에 알려져 왔습니다. 그 사람들의 증거는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올 수 있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들으셨지만 그저 잠잠하셨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답답하고 조급했습니다. 모처럼 예수를 잡기는 했지만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할만한 죄목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3)이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심문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었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고백 중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한 부분은 유대인들이 대망 해 온 확실한 메시야시라는 뜻입니다.

  가야바의 심문에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그리스도로 말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입에서 이처럼 자신을 분명하게 그리스도로 나타내신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자기를 분명히 나타내실 때가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밝히시고 그들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기들의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로서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도 이 같은 일은 필요했습니다.

  (4) 예수님의 이 말씀에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가야바가 자기 옷을 찢은 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람하였다는데 있었습니다. 옷을 찢는 일은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슬픔의 표시였지만 그러나 가야바는 속으로 이제 예수를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 되었다고 하는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참람한 말을 했다는 말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말함으로 하나님의 성호를 망령되이 일컬었다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공회 중에서 일어나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했습니다.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뇨” 공회 의장 가야바의 말을 들은 모든 공회원들은 일제히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산혜드린 공회의 종교 재판에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것은 ‘사형’입니다. 사형 언도가 내린 것입니다.

  결 론 :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사형에 해당된 자로 결정되었습니다. 재판을 끝낸 그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들 죄인들의 손에 의하여 얼마나 수모를 당하셨으며 부끄러움을 겪으셨는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화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12:2). 우리도 주님은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그 부끄러움을 참으면 그와 함께 영광을 얻게 됩니다(벧전4:14-16).





  ≈ 198 ≈       베드로의 실패와 회개


  (본문 : 마태복음 26 : 69 - 75)



  서 론 :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0:33). 이토록 무서운 죄를 범했던 베드로였지만 그는 눈물로 회개하고 오히려 그의 신앙에 유익을 주어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승리하신 것은 기도에 승리하셨기 때문이며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한 것은 기도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 기도하시는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잔다는 말은 깨어 기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때에는 반드시 베드로의 시험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1. 베드로가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게 된 이유


  아마 베드로의 마음에는 주님을 배반하거나 그 이름을 부인하려고 생각한 일은 한번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그는 정말로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임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왜 이 같은 자신의 생각을 저버리게 되었는가?

  (1)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쫓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8). 멀찍이란 말은 ‘아포마크로덴’으로 이 말의 의미는 보일락 말락한 먼 거리에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과 한 무리로 잡힐 것이 두려운 나머지 멀찍이 예
수님을 쫓은 것입니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다만 두려워하는 마음만이 꽉 차 있었습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의 결국을 보려고 주님의 뒤를 멀리 따라간 것입니다. “그 결국을 보려고 그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고 했습니다(58). 베드로가 주님을 뒤쫓아간 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 결국을 보려고 따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처럼 무력하게 잡혀가셨는데 그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바야흐로 어떤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서 그 많은 무리들을 헤치고 나올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력하게 그들의 손에 의하여 죽게 될 것인가? 그에게는 무척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국을 보려는 마음에서 슬금슬금 뒤쫓아 따라간 것입니다. 결국을 보고 믿으려는 믿음은 주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는 베드로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3) 베드로는 하속들과 함께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58,69).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깥뜰은 예수님이 서 계신 자리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받으실 고난의 동참자로서가 아니라 방관자, 참관자로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4) 베드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앞문까지 나아갔습니다. 베드로에게 또 한차례의 위기가 왔습니다. 한 비자가 그에게 나아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지적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자기의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는 도망치려고 앞문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 자기 눈앞에 서있는 계집종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지금 베드로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마10:28).


  2.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베드로의 부인은 한번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씩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사람이 한번 범죄하면 그 다음에는 저절로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처음에 물리쳐야 합니다. 처음에 넘어지면 그 다음에는 그 죄악의 끄나풀에 끌려 쉽게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1) 처음에 베드로는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앓지 못하겠노라”고 부인했습니다. 이 부인은 한 계집종의 물음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부인한 일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이 베드로의 부인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잘 명심해야 합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0:30).

  (2) 다음에 베드로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몸에 위험이 다가온다는 두려운 생각에 도망갈 차비를 차리느라 앞문까지 나아가다가 그 문턱에서 이번에는 다른 계집종에 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는 그 계집종의 말에 베드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맹세하고 부인한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도망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려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밖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에 그 곳에 있는 다른 한 사람이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에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한 말의 내용은 회가 거듭할수록 더욱 짙은 농도로 악해졌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알지 못하노라고 한 ‘우크 오이다’는 전혀 모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74절에 나타난 베드로의 저주와 맹세는 주님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만약 예수의 제자라면 나는 마땅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뜻과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님을 그 무엇으로도 맹세할 수 있다”는 의미가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는 부인입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부인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는 주님의 죽으셔야 할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이 왜 고난을 스스로 당하셔야 하셨는가에 대하여 정말로 몰랐던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주님이 고난 당하신 후 부활하실 일에 대해서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와 함께 고난받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몰랐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상태는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처럼 예수에 대하여 모르면 자기 생명이 위험한 시기에 가서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거나 배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베드로의 회개


  자기 입에서 세 번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자 곧 닭소리가 울려 베드로의 귓전을 뜨겁게 때렸습니다. 이 닭소리에 새 정신이 들게 된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게 되었습니다.

  (1) 닭이 울었다는 사실이 베드로의 결정적인 회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회개의 시기가 있습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회개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고 하셨습니다(호 14:2).

  (3)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때 비로소 바라보았습니다. 자기를 긍휼히 바라보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 눈길이 서로 마주쳤을 때 베드로는 더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아마 주님이 그가 나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가 밖에 나와 통곡한 것은 그의 회개를 말합니다.

  결 론 : 베드로의 시험은 우리의 시험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당하는 일은 거듭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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