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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7,824



  ≈ 169 ≈       아들의 혼인잔치


  (본문 : 마태복음 22 : 1 - 9)



  서 론 : 예수님이 말씀하신 혼인 잔치의 비유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과 함께 즐길 장차 올 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그 그림자가 되는 오늘의 교회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처음 청한 사람들은 이 혼인 잔치에 오기를 도대체 싫어했습니다. 그는 처음 청한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들의 메시야로 보내신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인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사거리 길에서 만나는 대로 데려온 사람들은 복음으로 데려온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혼인 잔치란 말은 결혼식, 결혼 잔치를 말하는 ‘가모스’의 복수 ‘가무스’로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성격을 나타낸 말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을 주는 종교이며, 장래의 소망을 주는 종교인 것입니다.


  1.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의 교회의 목적은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골로새 서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화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골1:16).

  그 잔치에 초청 받은 우리는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으로 최종적인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비유에서 혼인 잔치에 초대되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혼인 잔치에 처음 초대된 이스라엘의 거역은 결과적으로 그 초대 범위가 넓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힘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롬11:19-20)고 했습니다.

  이 비유는 기독교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는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잔치는 언제나 인생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누구든지 아들의 잔치에 들어오는 자는 인생의 큰 즐거움을 누리 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자리입니다. 이곳에는 누가 들어와도 이것들을 먹을 수 있으므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기독교는 초청의 종교입니다. 청하다는 말은 ‘케크레메누스’로 하나님에 의하여 계속하여 이 혼인자리에 초청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혼인 자리에 초청을 받는 일에 아무런 장애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고 하는 주인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세 번째로 기독교는 선택의 종교입니다. 믿든지 아니 믿든지 그것은 주인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혼인 자리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리고 이 혼인 자리에 들어온 이후에도 누구든지 선태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고 하신 주인의 엄숙한 선언입니다.


  2. 혼인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를 마련하시고 손님을 초청하시는 어떤 임금은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위한 잔치에 인류를 초대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인자하심과 그의 사랑의 결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초청에서 이 혼인 자리에 오기를 싫어한 이스라엘의 완악한 모습을 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이 잔치에 초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혼인 잔치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흥 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흥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초청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찌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찌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18:30-31)고 하신 말씀도 선지자들을 통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같은 초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2) 두번째 초청에서 혼인 잔치의 신랑 되신 그의 아들과 사도들을 죽인 이스라엘의 패역한 죄를 바라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요한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시므로 유대인들을이 잔치에 초청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일음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요73738)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생명의 주를 그들의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들도 죽였고 모든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비유에서 말씀하신 살인자들에 대한 진멸은 이스라엘이 멸망 받을 일에 대한 하나의 예언이었습니다. 이 패역한 백성들은 주후 70년 베스파시안 황제의 아들 티투스( 디도장군)에 의하여 함락 당하고 진멸 됨으로 살인자에 해당한 보응을 받았던 것입니다.

  (3) 세 번째 초청에서 드디어 이 혼인 자리에 이방인을 초청하시는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이처럼 명령했습니다.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청하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를 스스로 거역함으로 이 축복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이미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

  이것을 시기적으로 말하면 이방인의 때입니다. 이방인의 때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11:25)고 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의 어 비유를 이스라엘의 경우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오늘날 우리 의 경우에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오기를 싫어한 사람은 복음을 거역하여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놀라운 축복의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우습게 여겨 오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세상일이나 사업상 핑계로 이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합니다.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갔다”는 말은 세상 일로 말미암아 영생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마13:22). 세상일이나 사업은 죄가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 170 ≈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


  (본문 : 마태복음 22 : 10 - 14)



  서 론 : 우리 기독교는 선택의 종교입니다. “청함은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는 이 같은 기독교의 특색을 나타내 보이는 예수님의 비유이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선택은 이방인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9:7-8).


  1.청한 사람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므로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에 청한 사람으로 합당하지 아니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라고 경종하신 것입니다(사5:5-6). 그러면 임금은 이 아들의 혼인 잔치에 어떤 사람들을 청해 오라고 하신 것인가? 임금은 그 들에게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임금의 말씀을 따라 그 종들이 데려온 사람들이 나와 있는데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고 나와 있습니다.

  (I) 청한 사람들이란 복음으로 부르는 모든 이방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후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일을 이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19-20). 사거리 길에 나가 모든 사람들을 청하는 기간을 이방인의 때라고도 합니다(마24:34, 롬11:24).

  (2) 청한 사람들 중에는 가라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이 비유는 예수님의 유명한 가라지의 비유입니다(마13:24-30).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온” 이 사람들 중에는 마귀가 덧뿌린 가라지도 많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3) 청한 사람들 중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는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다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님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 복음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사람,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 넘어지는 사람들은 청함을 받기는 했지만 결실이 없으므로 결국은 다 내어쫓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종들에게 명하시기를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열매를 맺고 맺지 못하고는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아들의 혼인잔치에 청하여 데리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선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고 하신 말씀에서 내 집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2.예복을 입지 않은 손


  마침내 혼인 자리에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혼인 자리에 들어온 임금은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임금은 그 손을 향하여 엄히 질책했습니다.󰡒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그리고 그 손에 대한 최후 조처가 내려졌습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이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초청된 손님들에게는 준비된 예복이 제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로부터 종교적인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준비된 예복을 나눠줌으로 예복을 미리 입게 한일이 있었습니다(왕하10:22).그러면 여기서 예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예복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말합니다.

  창세기에는 우리 인간이 입은 두 가지 옷의 모양이 나옵니다. 하나는 아담이 죄를 범한 후 입은 옷인데 이 옷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하여 엮어 입은 무화과나무 잎이었습니다(창3:7). 그리고 다른 한가지 옷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입혀주신 옷인데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가죽옷이었습니다(창3:21). 아담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은 옷을 입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두렵고 부끄러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사이에 숨었었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가죽옷을 입고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상징하는 옷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아들의 혼인 자리에 초청된 사람들은 마땅히 주 예수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롬1334).이 옷을 새사람이라고도 말씀하고있습니다.󰡒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엡4:24).

  여기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3:27).이처럼 이 잔치 자리에는 믿음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이 옷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 예복을 거절한 일이기 때문에 결과적인 책임은 입지 아니한 그 사람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이 자리에 믿음으로 참석한 사람이 아니며 또 계속적으로 믿음을 거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마땅히 그 혼인 자리에 더 머물러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임금이 들어온 후로는 놀라운 축복의 향연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22:1-5).

  이 사람은 결국 아들의 혼인 자리에서 쫓겨나 이 혼인 자리에 들어오지 못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사실을 가라지의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마13:30)

  결 론 : 아들의 혼인 자리는 그 문이 널리 열려져 있습니다. 누구나 그 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라도 그곳에 초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맡겨진 복음 전도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요는 그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만이 아들의 혼인 자리에 정식으로 초청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가리켜 “예정을 입은 자”(엡1:5), “택함을 받은 사람”(엡1:4)이라고 말하며 이곳에서 예수님은 “택함을 입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돼함을 입었다고 하는 이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 171 ≈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본문 : 마태복음 22 : 15 - 22)



  서 론 : 하나님의 지혜는 진리에서 나지만 사단의 지혜는 간교에서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그 뱀을 가리켜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하다고 했습니다. 간교한 마귀는 언제나 간교한 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간교한 지혜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또 하나의 간교한 지혜를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그 지혜야말로 틀림없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올무에 걸리게 할 줄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자기들의 계획을 수행하는 일에 중인이 되기도 하며 또 당장에 체포하도록 하기 위해 헤롯당원들과 함께 자기들의 제자를 예수께 보낸 것입니다. 헤롯당이란 헤롯왕의 권세와 그늘 아래서 헤롯의 뜻을 받들어 권세를 누리는 정치적인 무리들로 평소에는 바리새인들과 좋지 않은 사이였지만 예수님을 잡는 일에는 서로간에 배짱이 맞았던 것입니다.


  1. 바리새인들의 간교한 질문


  예수님께 파송 받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을 올무로 잡기 위하여 입술로 아첨하는 거짓 혀로 가까이 왔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선생님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그들이 이 같은 달콤한 말솜씨는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잡으려는 함정이요 입술로는 거짓 아첨인 것입니다. 외식에 젖어온 바리새인들은 이 같은 연구에도 훌륭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대한 이런 판단은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으로 꾸며 말한 것이었기 때문에 올무의 낚시 밥이었던 것입니다. 아첨하는 일은 스스로 패망을 이루는 일입니다(잠26:28). 아첨하는 자가 가까이 올 때에는 언제나 그 사람의 입술에 조심해야 합니다. 아첨하는 입술은 음녀의 입술과 다름이 없습니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럽다”고 했습니다(잠5:3).

  그들의 질문은 이제 본론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그들의 이 같은 질문이야말로 너무나도 기막힌 질문으로 어떤 대답이건 깊숙한 함정이 그 앞에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정부에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식민지에 대하여 사람의 머릿수대로 일률적으로 징수하는 인두세라고 하는 세금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해 이 세금을 로마 황제에게 바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에 대하여 유대인들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의 황제에게 이 같은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 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일어나 있었습니다. 만약 이 대답에서 예수님이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가이사의 정책에 동조하는 자라고 하는 딱지를 붙여 매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세를 바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가이사에게 반기를 드는 자란 죄명으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마음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책망하시고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셋돈이란 가이사에 게 세금을 바치는 화폐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온 한 데나리온의 셋돈을 받으시고 그 돈에 그려져 있는 형상과 글을 가리키시면서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화폐에는 한쪽에 로마 황제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가이사의 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화폐 그 자체를 가지고 따져도 그것은 분명히 십 계명을 어기는 우상의 형상이요, 자칭 신이라고 나타낸 그 글은 신성 모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물음에 서슴지 않고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이제 예수님의 대답이 나오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이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 쉽게 옮긴다면󰡒가이사가 받아야 할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그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절대로 혼돈하지 말고 제각기 의무를 바로 이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가이사는 유대인의 통치권자로 유대인들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통치권자의 법령을 지킬 것은 지켜야 합니다(롬13:12). 유대인들이 가이사에게 바치고 있는 셋돈은 가이사 황제가 자기의 소유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요구한다면 그에게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통치자와의 충돌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이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2:2).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지키는 범위에 있어서 ‘가이사’의 것에 한정 하셨습니다. 가이사는 이땅의 한정된 치리자로써 절대로 하나님의 영역에 있는 것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가이사에게 바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그가 통치하는 지역에서 선을 이루고 악을 응징하는 일입니다(롬13:4). 모든 통치자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마땅히 그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세와 국세에 대하여 가이사에게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3:7).

  (2)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통치자에 우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일은 금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가?

  ① 예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예배는 오직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그 주관자이신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를 신의 아들이라고 하여 그를 경배하는 일은 단연 거부되어야 하며 이스라엘은 가이사를 예배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② 경배와 영광도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가이사는 그의 피통치자들로부터 경배와 영광을 받아 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가이사에게 경배해도 안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사42:8).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대하여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4:10).

  ③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십일조를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결 론 : 가이사의 것은 국민된 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국가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바른 성경적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혁명가이거나 사회 개혁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가난한 백성들을 자본주의자들의 손에서 건져내 주어야 할 사명자들이 아니며 노동자들을 고용주의 착취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할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이사의 법에 순종함과 아울러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이 두 길에서 상충되는 일이 있으면 우리는 단연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순교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기이한 답변에 홈을 잡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놀라움을 나타냈습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사단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에 여지없이 판정패하는 것입니다.




  ≈ 172 ≈       부활에 관한 사도개인의 질문


  (본문 : 마태복음 22 : 22 - 33)



  서 론 : 유대교에는 두 종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이들입니다. 제사장이나 장로들로 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두개파는 그들의 신앙적인 특정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존재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심지어는 천사의 존재까지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평소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신앙적인 동지가 아니라 서로 원수처럼 지내오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송사 하는 일에 있어서 만은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어느 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기발한 질문을 가지고 찾아 왔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한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 살았던 일곱 형제가 부활의 날에 과연 누가 그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 사두개인들의 오해


  사두개인들의 이 같은 질문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시험이었지만 성경적인 문제였으므로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이 깨닫도록 자세히 가르쳐 주시는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선 그들의 이 같은 질문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다”고 가볍게 책망하시고는 부활에 관한 바른 지식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알지 못했다고 하신 말씀은 ‘메이돈테스’로 “보지 않은 고로”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한 부분만 보아서는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바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   다. 우리도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으면 진리에 대하여 잘못 판단한 나머지 오해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횡행하고 있는 모든 이단은 성경을 이처럼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1)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성경에서 참 진리를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요5:39). 우리가 성경을 원을 때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야 합니다. 성경에서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제해 버린다면 성경은 알맹이 없는 책으로써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 성경은 영생을 주시는 책입니다(요5:39).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영생이시기 때문입니다. ⓒ 성경은 믿음을 가지게 하고 그 믿음으로 영생을 갖게 하는 책입니다(요일5:13).

(2)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면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 거짓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줄 알아야합니다(눅1:37).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자체가 창조적인 능력이신 것입니다. @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실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롬4:17).


  2. 부활한 사람들의 상태


  부활시의 인간 상태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명쾌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이 말씀에서 나온 부활한 몸의 신비를 몇 가지로 열거할 수 있습니다.

  (1) 부활한 몸은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결혼은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적용되는 일이요, 또한 이성의 결합은 육체를 가진 이 땅의 생명체만이 작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그 자손을 번식시키는 일 때문에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번식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2) 부활한 몸은 천사와 같은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장가가는 일이나 시집가는 일이 없는 영적인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그들의 자손을 번식시킬 수 없습니다. 천사 하나 하나의 존재가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천사에게는 생식 기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천사는 그의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역자로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체가 되면 우리 역시 이 같은 천사와 같은 몸을 가지게 되는데 사실인즉 그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부활한 몸은 예수님과 같은 영화로운 부활의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믿음과 동시에 그와 연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부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중인이 되신 분이십니다.

  (4)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영생의 실체며 구원의 소망의 실현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롬8:24). 그 소망의 실현이 곧 우리의 부활인 것입니다. 오직 부활한 몸만이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육체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영화롭게 살기에 합당한 몸은 부활한 몸입니다.


  3.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예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였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세 제자들을 데리시고 한 산에 올라 가셨을 때 영광스런 몸을 가진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분명히 죽었지만 그의 영적인 생명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를 나타내실 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이미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죽은지 오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이 이들의 이름을 대시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1) 죽음은 인간의 소멸이 아닙니다. 죽음은 육신이 잠자는 것이요 그의 영적인 생명은 중단됨이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2) 죽음에는 육체적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이 죽는다해도 그 죽음 자체가 인생의 최후가 아닌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부활의 씨를 뿌리는 일에 불과합니다(고전15:35-38, 42-44).

  (3) 하나님이 스스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언약 관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는 이삭과 야곱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르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갈3:29).

  결 론 :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소망은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5:14-19).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산 표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될 뿐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될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불잡고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 173 ≈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본문 : 마태복음 22 : 34 - 40)



  서 론 : 예수님이 사두개인들과의 부활에 관한 논쟁에서 부활의 참 진리를 가르치심으로 그들로 감히 대답할 수 없게 하셨는데 이 일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려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부활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모인 것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사두개인들이 질문하지 못한 다른 율법상의 어려운 질문을 통하여 자기들이 승리하려는데 그목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 중에 한 율법사가 선발되어 율법적인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사란 말은 율법의 전분가란 뜻으로 그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에게 불려졌던 율법 교사란 말과 같았습니다.


  1. 한 율법사가 던진 율법 문제에 대한 시험


  이 율법사는 율법 문제에 관한 이상 자기 이상 가는 전문가가 없는 것으로 자부하고 자신만만하게 예수님께 도전해 온 것입니다. 그의 시험은 이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랍비 학교에서 율법을 배운 일이 없으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 같은 문제에 대하여 도저히 답변할 수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능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 놓고는 과연 예수님의 입에서 어떤 답이 나올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명쾌한 것이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아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의 이 대답은 질문해 온 율법사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율법의 진수를 들어내 놓은 일이었기 때문에 더 무슨 말을 내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율법은 문자로 나타난 조문보다 그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단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의 표본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율법 안에 있는 근본 정신을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율법에 나타난 조문만을 중시하는 그들에게 율법의 참 정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율법은 홈 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법이시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완전하신 법은 율법의 바탕을 이룬 사랑에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율법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은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을 버리고서는 율법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조문만을 강조하고 지키는 것으로 의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율법의 사슬에 스스로 얽매어 포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3) 율법은 정죄에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의 참 사람이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이 죄에 더러워졌으며 이기주의적인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한량없는 사랑을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아들을 통하여 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율법의 두 대지


  율법이 십계명으로 불리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두 대지로 나누셨습니다. 계명부터 4계명까지를 한 대지로 하여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풀이로 말씀하셨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또 하나의 대지로 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으로 풀이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사람에 대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란 ‘칼디아’로 중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먼저 중심에서 그 섬김이 나와야 합니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삼상16:7). 중심에서 나오지 않는 섬김은 헛된 섬김일 뿐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중심이란 곧 마음의 진실함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목숨을 다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숨이란 ‘푸케’란 말로 인간의 내적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나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에는 그 사랑이 그의 영혼 깊은 생명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인 그 어떤 사랑보다 더 우선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롤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

  셋째로 하나님을 사랑함에는 뜻을 다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뜻이란 ‘디아노이아’로 이해력, 깨달음, 생각 등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해력이나 생각을 다 바치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자신의 지성이 총동원되어야 합니다. “다하여”란 말은 전체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은 ‘아가패세이스’로 일시적 잠정적 사랑이 아니라 영구적 계속적 사랑은 가리키는 말입니다.

  (2)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이 누구냐? 고 하는 문제는 예로부터 궁금증이 되어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불한당을 만난 나그네의 경우를 비유로 들어 우리의 이웃의 범위를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유대인의 이웃은 이방인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원수까지도 내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몸과 같이’란 말은 ‘호스 세아우톤’으로 “네 자신과 같이” “네 자신처럼”이란 말입니다. 이웃을 내 자신을 사랑하는 만치 사랑하는 일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웃 사랑의 최고의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율법의 참 열매는 사랑에서만이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5:17)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그의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이 율법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로 율법의 정죄를 능히 이기게 하였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8:33).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율법을 지키신 모든 일은 그 이루신 일을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롬8:4).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새로운 계명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이루어 나가는 그리스도인만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그리스도 인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 174 ≈       다윗의 자손과 메시야


  (본문 : 마태복음 22 : 41 - 46)



  서 론 :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잘못된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참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 관을 성경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하여 성경을 잘 알고 있다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나”고 물으셨습니다.


  1.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 관


  성경에는 분명히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이 문자적인 사실만을 중요시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으로 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의 권농으로 태어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출생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헤롯왕에게 불려가 이스라엘의 왕의 출생지에 대하여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마2:1-6).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사렛이 고향이었으며 그 곳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나사렛 사람으로만 알려 졌습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 조차도 이처럼 말한 일이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2)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육신적인 다윗의 자손으로만 알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족보에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의 자손이 됩니다. 그러나 이 족보도 사실은 요셉의 족보지 예수님의 실제적인 족보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경 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영적인 뜻이 다분히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에 대하여 이중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명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렘23:5).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심을 보여주지만 다른 곳에 기록된 예언을 보면 다윗의 자손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고 하신 이 말씀에서 보여 주시는 바는 예수님이 다윗 왕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렘30:9).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위(왕)에 앉는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말씀이 이사야서에 있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 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명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고 하셨습니다.

  (3) 그들은 메시야야 말로 이스라엘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줄 왕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메시야는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올 얻겠고”라고 하신 말씀이나(렘23:5,6)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들은 확신했던 것입니다(사9:7).

  아마도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나타날 메시야란 말하자면 무한한 능력과 권농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 온 모세와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일 것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라면 그 증거로 좀 더 큰 표적을 보여 주어야 활 것이 아니냐고 이처럼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너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0-31).


  2. 예수님이 밝히신 메시야의 정체


  예수님은 우선 유대인들의 잘못 인식된 메시야 관을 근본적으로 부셔버려야 할 것이 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성경적인 증거를 보여 주므로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드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가장 밝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쉬운 질문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질문과 평범한 대답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물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야에 관한 말씀을 끄집어내어 이처럼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물음에 능히 대답할 바리새인들은 없었습니다. 성경에 관한 한 박사라고 자부해 마지아니한 그들이 이 너무나도 간단하고 분명한 성경적인 질문에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메시야란 다윗이 존재하기 그 이전부터 계신 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성령에 감동하여 메시야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적으로 바라보고 시편 110편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곳에서 “내 주”라고 가리킨 대상은 바로 메시야를 의미하고 있음을 바리새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주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명칭입니다. 만약 메시야가 과연 다윗의 육신적인 자손이라면 어떻게 다윗이 메시야를 가리켜 “내 주”라고 불렀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그의 자손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으며, 보았다고 해도 자기의 자손을 보고 어찌 주란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도 들어가 있습니다. 이 메시야는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말씀”으로 계셨던 분이요,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독생하신 하나님이시요, 다윗의 주라 불리우시는 분으로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계셨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로 이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으며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결 론 : 여기서 몇 가지로 메시야에 대한 구약적인 예언을 들어보면 다음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1) 메시야는 다윗의 뿌리에서 나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사11:1)고 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육적 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실 것이란 예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메시야는 그의 선재하심이 상고에, 태초에니라는 예언입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예언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메시야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과 동일하게 불려졌습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니라”(사9:6)고 했습니다.

  (4) 메시야의 이름이 독특하게 예언되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말의 뜻을 깨닫는 유대인들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메시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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