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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6,486



  ≈ 162 ≈       주님이 쓰시는 그릇


  (본문 : 마태복음 21 : 1 - 11)



  서 론 : 주님께는 쓰시는 그릇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름 없는 나귀로 그의 하시는 일에 그릇으로 쓰셨습니다. 발람의 나귀도 그의 주인이 하나님의 명을 거스려 어그러진 길로 갈 때 그의 당나귀를 통하여 책망케 하심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셔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스가랴서에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슥9: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그에 게 하라고 하신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잡으려고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을 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26:55, 56)고 하셨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일은 스가랴의 예언처럼 왕으로 입성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선지자의 예언처럼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야만 했습니다.

  (1)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이 같은 일은 그의 태어나심에서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에 의하여 증명되었습니다(마2:1-3).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인정하셨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주님께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했을 때 주님은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마27:11)고 대답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들의 메시야로 이 메시야는 그들이 맞이해야 할 그들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스가랴는 예수님을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한 왕으로 표현했습니다. 스가랴의 어 예언은 예수님의 겸손한 왕으로서의 위치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 왕의 위치는 세상의 권력을 잡은 현세적인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왕이란 그의 백성을 섬기시는 왕의 위치를 말씀한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유월절을 앞두고 가장 겸손한 왕으로서의 그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스가랴서에 기록된 대로 그들의 메시야로서의 왕으로 영접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의도도 그가 잡히시어 재판을 받게 되자 기들이 바라던 메시야가 아니라고 판단한 그들은 그에게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안 후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하는 편에 가세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장차 실제적으로 그들의 왕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것입니다. 그의 재림하시는 그 날에 예수님은 영광의 메시야 만 왕의 왕으로 그곳으로 입성하실 것입니다(계19:11-13). 그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이 모습이 어디서 발견될 것이냐?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슥14:4)고 하셨습니다. 이 때의 모습은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한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백마를 타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인류를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영광의 메시야의 모습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모습은 장차 정말로
들의 왕으로 오시는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주시는 예표 적인 모습이십니다.

  (3) 예수님은 장차 예루살렘성에서 통치하시는 왕이 되실 것입니다. 장차 이 땅위에 세워질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예수님은 친히 왕이 되시며 그는 예루살렘성에서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계19:6,7). 여기서 전능하신 이의 통치는 예수님의 천년 왕국에서의 다스리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뱃바게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그의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일은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바라보게 휩니다. 하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져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시는 뜻대로 이루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미 자기가 예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 새끼를 타셔야 할 일을 아셨고 자기가 탈 나귀가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아셨으며 그 주인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면 즉시 보내실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 의하여 끌려 온 이 나귀 새끼는 주님이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쓰시는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쓰시는 그릇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한 목적에 사용하시는 그릇이며 다른 한 가지는 진노의 그릇으로 쓰시는 경우입니다. 선한 목적이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는데 이 그릇은 선한 일에 마련된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깨끗하게 단장한 그릇을 선한 일에 쓰십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항상 그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주님께 가까이 있다는 말은 주님이 하시는 계획에 합당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는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즉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을 당신의 그릇으로 쓰십니다. 인정의 표준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없는 사람을 절대로 쓰지 아니하십니다. 사울 왕이 불순종으로 기울어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습니다.

  결 론 :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의 환영을 받으시며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무리의 대부분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기도 하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란 지금 구원하소서, 원컨대 구원하소서란 뜻으로 자기들의 구원(정치적인)을 호소하는 찬양과 간구였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인줄로 알고 그를 높인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호소대로 “호산나”로 입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이 바라는 호산나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는 지금 고난의 메시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 163 ≈       내 아버지의 집


  (본문 : 마태복음 21 : 12 - 13)



  서 론 : 성경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신 일이 두 번 나옵니다. 이것은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 아니고 제각기 다른 시기에 별도의 사건으로 있었던 일입니다. 처음 나오는 성전 청결 사건은 요한복음 2장에 있습니다. 이 시기는 주님의 전도 초기였습니다. 이 때에도 유월절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돈올 바꾸고 짐승을 파는 무리들을 채찍으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상올 뒤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거의 마무리 지으시게 되는 시기에 다시 한번 성전에 들어가셔서 동일한 방법으로 성전을 청결하시게 됩니다. 이 때에도 유월절이었지만 이 유월절은 그가 하나님께 어린양으로 바쳐지는 마지막 유월절이 되는 시기였습니다. 예수님은 분격하시는 어조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성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가리켜 󰡐아버지의 집󰡓 또는 󰡐내 집󰡓이란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세 번째 세워진 성전으로 이방인의 주관자인 혜롯에 의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 세 성전이 세워진 것과 그것들이 파멸된 일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솔로몬의 성전 : 솔로몬이 세운 성전으로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된 제일 성전입니다. 성전 건축은 다윗이 그 마음에 원했던 일이었는데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 게 그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 73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성전이 세원진 자리가 바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린 모리아산 이었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속죄 제물로 드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대하3:1).

  이 성전은 기원전 967년경에 착공하여 7년 6개월만에 준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건축한지 400여 년만에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불사름을 당하였습니다. 이 성전이 이처럼 소멸된 일에 대하여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우상의 제물로 더럽혔기 때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대하33:4-7). 이 같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은 놀랍도록 그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울 헐며.............󰡓(대하36:15-20).

  (2) 스룹바벨 성전 : 스룹바벨 성전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사왕 고레스에 의하여 성전 건축을 허락 받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스 1:2-3). 이 성전은 제2성전으로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여 빈약한 성전이었고 법궤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메데바사의 통치하에 있었으나 그 후 헬라의 알렉산더에 의해 그 나라가 패망하게 되자 수리아의 통치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때 수리아의 가장 유명한 왕은 안티어쿠스 에피파네스로 이자가 예루살렘을 통치하게 되자 유대인중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자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나 할례를 행하는 자 또는 히브리어 성경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불잡아 사형에 처해 버렸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로 제단을 더럽혔습니다.

  이에 맛디아스란 제사장의 세 아들 유다, 요나단, 시몬이 일어나 수리아의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죽고 그의 아들 힐카너스가 대제사장겸 왕으로 올랐고 그후 힐카너스2세가 그의 동생 아리스토뷰로스2세에 의하여 축출되어 아라비아로 망명하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헤롯 1세의 아버지요 이두메 사람인 안티파터와 알게 되었습니다. 힐카너스 2세가 헤롯의 도움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안티파터의 가문(헤롯가문)은 팔레스틴의 정치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젊은 헤롯 2세는 로마로 가서 로마 황제인 안토니의 환심을 사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받아 로마의 힘을 빌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유대는 결국 로마의 속국이 된 것입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스룹바벨의 성전은 더럽혀지고 훼파되었습니다.

  (3) 헤롯 성전 :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 자기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 건축을 시도했습니다. 이 성전은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의 사역에 들어가신 첫 해(기원 27년경) 에도 아직 건축중이였는데 그때는 이미 이 성전을 건축한지 46년이나 지난 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에 대한 예언에서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녹21:6)고 하셨습니다. 그 후 로마의 디도에 의해 기원 70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고 결국 주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참 성전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는 이처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고 그들은 성전 파괴와 함께 2천 년간이나 성전이 없는 이방 땅에서 칼을 피하며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비록 헤롯에 의해 세워졌지만 그 목적이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곳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곳은 헤롯의 궁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을 때에는 그를 섬기는 성전을 허락하셨습니다. 고레스의 명에 의하여 스룹바벨의 성전이 건축된 것이나 헤롯의 손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한 것이나 그렇게 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시고 자주 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들을 정죄하시고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고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한다는 말과 경배한다는 말과는 같은 뜻의 말입니다. 기도해야 할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장사하는 무리들의 고함소리와 짐승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성전은 장사꾼으로 변신한 대제 사장들이나 바리세인들, 서기관들로 말미암아 외식으로 더럽혀졌습니다. 모여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  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해야할 것입니다(롬12:1, 요4:23).

  결 론 :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심령의 변화를 받고 거룩함으로 옷 입어 우리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여 늘 주님이 거하실만한 처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 164 ≈       성전 청결의 의미


  (본문 : 마태복음 21 : 12 - 17)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두 번 식이나 찾아가시어 심한 꾸지람과 채찍으로 청결하게 하신 일은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오늘 날 계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교회와, 세상풍조에 떠내려가고 있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경종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입니다.


  1.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성전은 지극히 거룩한곳입니다. 그런데 휴대인의 지도자들은 이곳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5)고 하셨습니다. 성전을 장사하는 집이 라고 책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이 지도자들의 손에 의하여 상업적으로 경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돈벌이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구실로 돈을 벌어 그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일은 분명히 장사꾼들이 하는 짓이며 그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1) 이것은 오늘날 물질적으로 타락한 교회를 책망하시는 소리입니다. 현대 교회는 두 가지 면에서 병적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병적 요소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물량주의로 그들의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예산을 맞추지 아니합니다. 구제하는 일에 인색합니다. 다만 교회를 미화시키는 일에 열중합니다. 자기 교회의 건물 확장이나 새 성전 건축을 위한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다른 한 가지는 교인의 병적 요소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기복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우리가 바라기를 원하시는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1:3-5)하셨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처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바라는 생활이 아니라 땅에 속한 세상적인 복, 물질적인 축복만을 바라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2) 이것은 또한 오늘날 진정한 예배가 없는 세속적인 교회를 책망하시는 소리입니다.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께 합당한 바른 제사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제사였습니다.

  ① 가증한 제사란 진리가 없는 예배를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예배는 무익한 예배입니다.

  ② 가증한 제사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예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회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1:7,8)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교인들도 온전한 예물을 드리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에도 인색하고 십일조도 온전한 것이 못되며 절기 현금도 그러합니다.

  ③ 가증한 제사란 회개가 없는 예배를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5,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죄에 대한 회개에 있습니다.

  ④ 가중한 제사란 희생 제물이 없는 예배입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회생 제물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회생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⑤ 가증한 제사란 사랑이 없는 예배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시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말씀 하셨습니다.


  2. 강도의 굴혈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올 만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예수님이 보시기에 마치 강도들의 소굴처럼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우두머리 격인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은 많은 뇌물을 받고 이 같은 불법적인 상행위를 방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두둔해 주었으며 신성한 예배 장소가 온통 난장판이 되어도 누구 하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제재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강도질하는 집단”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세상적인 명예심을 위한 싸움질, 분쟁, 욕설 등이 비일비재하므로 하나님의 예배 장소가 강도의 소굴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감찰해 보아야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죄가 주장하고 있다면 우리의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롬6:12-14).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옛 풍습을 따르는 옛 사람이 다스리고 있다면 그런 마음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는 마음입니다(롬12:2).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마음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는 마음입니다(고전3:16,17).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청결 시키시려고 우리의 마음 문을 노크하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하셨습니다. 내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성전 청결을 하신 다음 자기에게 나오는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전까지 찾아 나온 예루살렘의 어린 아이들이  수님을 보고 소리지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쳐 댔습니다. 이때 성전  에서 이 모양을 바라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분히 여기며 또 이상한 일로  겼습니다. 장사하는 장사꾼들의 눈에는, 강도질하는 강도들의 눈에는 이상한  이 아닐 수 없었으며 예수님의 청결의 채찍이나 예수를 높이는 일들이 분한  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불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며 그의 몸된 교회들을 일일이 살피고 계십니다. 그리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더러운 성전을 청결하시기 위해 징계의 채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린 우리의 교회를, 강도의 굴혈이 된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그는 여지없이 그의 채찍으로 청결하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히12:8-11).





  ≈ 165 ≈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본문 : 마태복음 21 : 18 - 22)



  서 론 :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계실 때 신성과 인성을 겸하여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다른 분이 아니라 말씀이 곧 육신이 되신 분이심으로 그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시든 그의 신성은 절대로 소멸될 수도 없으시고 변하실 수도 없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품안에 계셨던 영원하시고 독생하신 예수님이 성령의 권농으로 마리아의 봄에 잉태되어 직접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가 하늘에 계셨을 때에도 그는 독생하신 영원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땅에 계실 동안만은 그의 신성은 신비스럽게 감추어져 있었고 그의 인성만이 나타나 계셨기 때문에 그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겪어야 할 모든 육신적인 고통을 당하셔야 하셨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가실 때 시장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그에게 아첨 식사를 대접해 줄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1.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주님은 시장하신 몸으로 길을 거니시다가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시장 끼를 채울 수 있는 열매를 바라시고 나무 가까이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는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하시니 그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다고 했습니다. 이 기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이 교훈은 첫째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신 경종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찾으신 열매는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열매를 말합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외식적인 율법의 준수에만 열심이었기 때문에 생명의 주가 되시는 그들의 메시야를 배격하므로 그들에게 있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외식을 상징하는 잎사귀뿐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열매를 구하셨으나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다만 잎사귀뿐임을 아시고 그들을 저주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23:27-28).

  (2) 이 교훈은 둘째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하는 경종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 게 열매를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로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멸망 받게될 일에 대하여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마23:37-38).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다시 그 잎이 샘 돋을 때가 있음을 한 비유로 예언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마24:32)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 이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이 저주하시어 그 뿌리까지 말라버린 길거리의 무화과나무임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회복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3) 이 교훈은 셋째로그 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경종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이 열매를 찾으신 무화과나무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 열매이십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7: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열매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실 때 열매는 드리지 못하고 잎사귀만 무성한 것을 보인다면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란 말은 ‘우덴휴렌’으로 발견하지 못하셨다는 뜻으로 가까이 가셔서 애써 찾으신 결과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그 열매를 애써 찾으셔도 주님의 눈에 발견되지 못한다면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눅13:7)고 하시는 노여움에 가득 찬 책망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는 기도의 능력


  예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그의 말씀은 바로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창조주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그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습니다. 이 같은 광경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제자들의 놀라움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들은 이를 이상히 여기면서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나타난 한 가지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 게 기도에 관한 위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1) 응답 받는 기도의 첫째 조건은 믿음의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믿음은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이 믿음은 기도하면서 “믿습니다”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 생깁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 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담대한 기도입니다.

  (2) 다음에 응답 받는 기도의 둘째 조건은 의심치 아니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치 아니하려면 하나님의 분명 한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불잡고 요동치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기도였습니다(롬4:18-22).

  (3) 응답 받는 기도의 셋째 조건은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1-22)고 말씀했습니다.


  3.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중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에서 해석상 장벽에 부닥치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산이란 감람산올 가리키고 바다란 사해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기도로 가능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믿고 의심치 않는 기도의 능력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의 능력이 이처럼 기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깨닫고 믿음의 기도를 할 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그 열매가 없는 사실을 미리 아시지 못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이 전지 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는 그의 인성으로 인하여 그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이 제한을 받으신 사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도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적인 섭리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교훈을 받은 대로 열매를 맺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166 ≈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본문 : 마태복음 21 : 23 - 27)



  서 론 : 예수님은 그가 당하실 고난이 얼마 남지 아니하신 것을 잘 아셨지만 그의 복음사역은 조금도 중단됨이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성전은 강도의 굴혈처럼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고 그 안에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수다한 무리들로 진쳐져 있었지만 주님은 위축되심이 없이 담대하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책잡아 송사 하려는 독사의 손길이 다시 한번 주님에게 다가왔습니다. 일단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인가 그들에게 대답해 주셔야 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예수님께로 향하여 그가 과연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 큰 흥미를 가지고 주님의 입을 지켜 본 것입니다.


  1.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라고 묻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까지 주님을 책잡으려고 따라다닌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보다 훨씬 격이 높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는 결정적인 어떤 대답을 기대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주님을 향하여 질문한 내용 중 “이런 일”이라고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런 일이란 주님이 행하신 성전 청결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신 일은 그들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같은 일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자신들의 처사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면서도 다른 한편 분격을 금치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장 미워하고 트집만 있으면 당장에 라도 체포하려고 벼르고 있는 예수란 사람에 의해 망신을 당하였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직접 따져보고 일을 처리하려는 의도에서 이처럼 물은 것입니다.

  (2) 이런 일이란 주님이 성전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메시야를 대망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급한 심령 속에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권세 있는 교훈으로 들려졌으며 그가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하고 기대하는 수다한 무리들이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나 백성의 장로들은 이것이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예수로 말미암아 잘못 오도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네가 무엇이관데 무슨 권세를 가지고 성전에서 이 같은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미혹하느냐”고 공박하고 나선 것입니다.


  2.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의 도전에 물러서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자기에게 묻고 있는 근본적인 동기를 이미 아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올무에 잡히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말할 수 없는 놀라우신 지혜로 그들에게 어떤 대답은 하셔야 하실 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대답하기가 가장 어려운 질문이자 또한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신 가장 정확한 답변이셨습니다.

  (1)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내 뒤에 오시는 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마3:11)고 말했습니다.

  (2)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요 그는 또한 인류를 친히 심판하실 분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고 말했습니다.

  (3) 세례 요한은 그의 활동 초기에 예루살렘에서 그를 찾아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나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사람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을 향하여 네가 누구냐? 고 물었을 때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1:22-23)고 말했습니다.

  (4)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줄로만 알았다면 그들은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배척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3.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의 물으심에 역습을 당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입장이 난감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입장이 궁지에 몰리게 된 일에 당황했습니다. 그들이 잠시 구수 회의를 열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왔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율배반이 되는 것이 그들은 한결같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믿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세례 요한을 믿었다면 그가 증거한 메시야이신 예수님도 믿었을 것이기 때문에 하늘로서 라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또 세례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당장에 둘러싸인 군중들의 공격을 받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외식적인 대답이 나와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이란 존재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그들은 마치 우리 나라 속담에 있는 말처럼 ‘혹 떼러 갔다가 붙여온 격’이 되어 궁지에서 속히 빠져 나가려한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거짓된 말로 답변하는 외식자들에게 대답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고의적으로 올무에 잡아 낚으려는 그들의 음흉한 술책에 스스로 결박당하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바르게 말씀하셔도 그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그 말을 가지고 소송의 재료로 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저의를 아시고 지혜롭게 이 위기를 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시각각으로 그의 때가 가까이 오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그의 죽으심의 예언을 이루실 때가 오지 아니하셨으며 그의 잡히심도 그들의 말이 올무가 되어 잡히실 것이 아니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처럼 지혜롭게 피해 나가신 것입니다.





  ≈ 167 ≈       누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나


  (본문 : 마태복음 21 : 28 - 32)



  서 론 : 하나님은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51:6). 주님은 진실함이라고는 전혀 없고 언제나 외식과 꾸밈으로 의를 나타내려는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입과 겉으로 나타나는 모양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회칠한 무덤일 뿐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돗을 거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그들의 잘못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는 아버지의 명을 받은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뉘우침이 없는 그들의 신앙을 공박하신 것입니다.


  1. 맏아들의 경우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명을 받은 두 아들의 비유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지적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맏아들은 누구를 가리킨 것이냐?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믿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하심으로 지적하신 그 대상이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기로 이들은 그들에 의하여 죄인 시 되고 있는 사람들로 이방인들을 가리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이란 하나님의 나라, 교회를 상정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신 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맏아들에게 먼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의 대답은 “아버지여 가겠소이다”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그의 대답과는 다르게 가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1) 가겠소이다 라고 대답한 말은 진실성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장로들은 진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외식으로 진실을 가장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일에 적합하지 않음을 그들의 비 진실성으로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도 진실성이 없는 사람에게 시키면 대답과는 전혀 상이한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2) 가겠소이다 라고 한 말은 고난이 따를 것을 모르고 대답한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올 좋아하며, 권세를 좋아하고, 교만하기 때문에 고난이 따르는 일을 싫어합니다. 포도원에서 해야 할 일은 돈을 버려야 하는 일이며, 스스로 낮아져야할 일이며, 남의 종이 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대답은 가겠소이다 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가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은 좁은 길로 가야 할 길이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할 길이기 때문에 그들은 엄두도 못 낼 길인 것입니다.

  (3) 맏아들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눈앞에 있는 이익에 가려서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합니다. 자기가 죽을 것도 모르고 돈만 벌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이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의 떡이요 그를 믿는 자에게는 영원히 갈하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 예수를 믿는 일을 심히 어리석게 보았을 뿐 아니라 그를 믿는 유대인들을 출교하기까지 했습니다. 맏아들은 결국 가지 아니했습니다.


  2. 둘째 아들의 경우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싫소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결국은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과 대조적인 입장에 있는 창기와 세리를 가리켜 말씀하시면서 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에 대하여 우리에게 교훈해 주십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세리들과 백성들은 다 그에게 와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눅3:12-13, 7:29).

  이 둘째 아들의 경우는 탕자의 경우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던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문제는“싫소이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뉘우치고 갔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열매를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의 뜻이 43절에 와서 명백하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둘째 아들을 통하여 회개의 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싫다고 한말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몰랐으며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후에 뉘우쳤습니다. 그들이 뉘우친 경위를 보면 그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죄에 대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죄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의 표시로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회개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6:44)고 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은 뉘우치고 갔다고 했옵니다. 갔다는 말은 회개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했던 죄인이 이를 뉘우치고 그의 인생의 발 걸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이 올바른 회개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입의 말에서 진실성을 찾지 아니하시고 행함의 열매에서 진실성을 찾으십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8)고 말씀했습니다. 맏아들은 입으로는 가겠소이다 고 말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가장 잘 받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버림을 받은 것
은 그 말에 대한 행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지 아니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싫소이다 라고 말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 불순종한 아들이요 어느 모로 보나 쓸모 없는 자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후에 뉘우치고 아버지의 말씀하신 대로 포도원에 갔습니다.

  (3) 하나님은 일의 시작보다 월의 결국을 중히 여기십니다. 사람들은 일의 시작은 잘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의 결실을 잘 맺는 사람은 심히 적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결과에서 판단이 납니다. 초청은 받았지만 택함을 받지 못했다면 그 사람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며 많은 권능을 행했지만 그날에 가서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1-23)고 할 때에 그 사람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겔3:2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국을 중히 보시는 것입니다. 싫소이다 라고 말한 둘째 아들의 말은 결과가 아닙니다. 그 후에 뉘우쳐 갔다고 한 말씀이 그의 결과입니다. 가겠소이다 라고 한 맏아들의 말은 결과가 아닙니다. 그 후에 가지 아니한 것이 그의 결과인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의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시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버리고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죄인들 보다 오히려 더 더디고 어려울 것입니다.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는 자들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지만 죄인이 그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바로 회개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리가 성전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의롭다함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불순종으로 버림받는 자가 되지 말고 순종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 168 ≈       열매 맺을 백성이 받을 하나님나라


  (본문 : 마태복음 21 : 33 - 46)



  서 론 : 예수님이 말씀하신 또 하나의 포도원 비유는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인가에 대한 교훈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나라로 삼기 위하여 세계 만방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많은 배려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그들의 메시야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매를 바칠만한 백성이 못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백성에게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가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그 이유를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1. 패역한 이스라엘


  이 포도원의 비유는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이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포도원이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는 이사야 5장이 그 배경이며 또한 주석이 되기도 합니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포도원의 죄악상올 책망하시고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라”(사5:7)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포도원을 삼으신 것은 그들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거룩하신 뜻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포도원에서 바라신 것은 오직 그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맺은 열매는 하나님이 기대하신 열매가 못되었습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5:2)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이 포도원에 대하여 모든 배려를 다 하셨습니다. 산 울로 둘렀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산 울로 두르신 나라였습니다(시125:1-2). 그들이 계속하여 좋은 열매를 맺기만 하였었다면 이 같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또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순종에서 나온 열매는 그것이 그대로 그들의 무진장한 축복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망대를 지으셨습니다. 망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키심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이상 하나님의 계속적인 지키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사5:4)고 말씀하실 정도로 모든 것을 다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3)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다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26:19)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의 종들을 보내시어 열매를 맺히게 하시기 위해 때때로 경종하시고 패역한 행실을 책망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그 종들에게 순종하거나 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죽여 버렸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자기 종들이라고 비유하신 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끊임없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4) 그들은 마침내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내신 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서 “저희가 내 아들을 공경하리라”고 여겼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보낸 그의 아들은 마땅히 공경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 분은 자기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이 패역한 농부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아들을 어떻게 한 것입니까?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신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인즉 그들은 메시야의 지배가 아닌 자기들의 권세와 지배를 계속 누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메시야이심을 여러 가지로 증거 하셨지만 완악한 그들은 이를 듣지 않고 포도원 밖으로 내어  쫓아 죽인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기묘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의미하는바 참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듣고 합리적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 같은 대답은 자기들의 입으로 스스로 정죄한 말이며 자기들의 운명을 그들의 입으로 예언하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주인이 올 때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고 있지만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응해질 것입니다. 하나는 주후 70년에 그들은 이미 그들의 하나님의 나라가 문이 닫히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매 맺는 백성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또 한가지는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에도 그들은 그들의 패 역했던 죄악을 안고 많은 시련과 환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슥13:8-9, 14:1-2).


  3.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예수님은 자신들이 받을 운명을 스스로 대답하도록 만드시고 결론적으로 시편 118편에 있는 자신에 대한 말씀을 인용하여 무서운 심판을 경종하셨습니다.

  (1) 유대인들은 메시야 왕국의 머릿돌 되신 예수를 버렸습니다. 건축자들이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의 기둥으로 삼으시고 그의 아들을 이 나라의 영원한 왕으로 세우시 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그들의 왕을 쓸모 없는 돌로 여겨 버린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이 돌을 다시 휘하여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버린 돌을 하나님은 다시 살리심으로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신 일이요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이 돌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반석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돌을 거역하거나 이 돌을 대항할 수 없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권세자나 권력도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깨어질 것입니다. 또한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 세상 심판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를 거역한 무리들에 대한 심판은 한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결 론 :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맺는 백성이 차지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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