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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9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6,172



  ≈ 154 ≈       이혼에 관한 교훈


  (본문 : 마태복음 19 : 1 - 9)



  서 론 : 마지막 시대의 두드러진 정조로 성경에서는 도덕적인 퇴폐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해지는 현상이 성도덕의 타락입니다. 이 같은 인간의 타락은 육적인 면에서도 그러하고 영적인 변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성도덕의 표준은 사회의 이혼율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근래에 나타난 통계에 의하면 선진국일수록 이혼용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혼율이 세계에서 단연 으뜸이고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덴마크조차도 이혼율이 많기로 미국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또 근래에는 실험 결혼이라고 하는 얼마간의 동거 생활을 전제로 한 예비 결혼이 유행되고 있어 가정의 순결은 땅에 떨어지고 이 사회는 점점 음란의 함정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1. 바리새인의 시험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바리새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이혼 문제를 가지고 도전해 온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는 문제입니다. 아내를 버리는 일이 가능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아마 이 질문에서 주님에게서 “안 된다”라는 말이 당연히 나올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고소하려는 문제로 예수님을 유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예상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고 물었습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은 이 질문에서 나오는 대답에서 올무를 잡으려고 예수님의 입을 지켜보았습니다.


  2. 하나님이 정하신 부부의 세 가지 원리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 같은 질문이 자기를 시험하려는 악의에서 나온 것인 줄 아셨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 회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기 때문에 남자나 여자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2)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부부를 이루라는 명령을 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 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얽지 못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원리는 원래가 둘은 두 몸이 아니요 하나로부터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갈라지게 하심으로 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도록 하셨고 ② 서로를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로 만드셨으며 ③ 이 같은 일은 둘이 다시 한 몸으로 합하는 일로써 이룰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부부생활은 이런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결혼을 금하는 일에 대하여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귀신의 가르침을 쫓는 자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라”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담전4:1-3).

   “아내에게 합하여”라고 하신 말씀은 세 가지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부부간의 육적인 결합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축복은 곧 남녀의 육체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지으실 때에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부부는 한 가정에서 서로 돕는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어 나갈 때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서로간의 영적인 결합입니다. 이것은 둘이 한 몸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창조목적이나 남녀가 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결혼 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려는데 있습니다. 이 목적을 이탈하게 되면 그같은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이 없는 금수의 생활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이혼의 불가 성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3. 율법에서 허락한 이혼의 경우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밝히심으로 이혼의 불가함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  그들은 모세가 준 율법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추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느냐? 율법에서는 허락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왜 허락할 수 없다고 하느냐? 당신의 말은 율법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냐? 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주장은 신명기에서 인용해온 것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신24:1-2)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어 남자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주어 버려도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이 같은 이혼증서를 써 주는 일을 허락하였는가?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질투심을 말합니다. 아내를 의심하거나 수치스러운 사실이 있을 때 이혼율 허락하지 않으면 그 여인에 게 더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완악한 마음이란 용서를 모르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용서에 인색합니다. 특히 자기 아내의 부정한 협의가 있다면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두 부부가 사랑으로 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는 특히 남자들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인을 넘나 보는 악한 마음이었습니다. 모세는 사람들의 이 같은 완악한 마음 때문에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허락한 모세의 이혼증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4. 이혼이 허락되는 경우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혼이 성립되는 한가지 경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행은 아내를 버리는 이혼이 성립된다고 하셨습니다. 음행이란 ‘폴네이아’로 매음, 음란, 부정, 간음이란 뜻으로 자기 몸을 다른 남자에게 파는 행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음행은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의 파괴입니다. 육적인 결합이 파괴되는 일이요 정신적인 결합이 파괴되는 일이요 영적인 결합이 파괴되는 일이기 때문에 음행은 곧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한 폼을 스스로 파괴하는 일임으로 이혼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은 어느 한 부분적인 면만 바라보면 올바른 해석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글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려고 했지만 이 말씀을 뒷받침 해 주는 창세기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했습니다(시119:10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를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 155 ≈       주님이 말씀하신 독신생활


  (본문 : 마태복음 19 : 10 - 12)



  서 론 : 예수님의 교훈은 새로운 교훈입니다. 그의 교훈은 율법적인 교훈인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분의 사랑의 교훈이심으로 그 당시 율법 생활에 깊숙이 젖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쉽게 받아 드릴 수가 없는 교훈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외에 자기 아내를 버리면 하나님 앞에 간음죄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자의  우월성을 믿어 왔으며 이 같은 우월성은 자기의 아내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임의로 버릴 수도 있다는데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성적인 문제나 이혼 문제에 있어서 온전히 남녀가 동등하기 때문에 남자들의 우월성이 조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는 말이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이토록 그들은 여자의 인권을 무시했으며 남자위주의 생활을 당연시해 왔었던 것입니다.


  1. 남자의 간음 죄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 함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에서도 남자들의 간음죄가 여자의 경우와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신 최초의 말씀이십니다. 어떤 이유에서이건 아내를 내버린 남자가 다른 여자를 아내로 취했을 때 그 사실이 하나님 앞에 간음죄가 된다고 하신 말씀은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 보내는 일을 당연히 여겼던 그 당시 유대인 남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남자로 태어난 것이 여자로 태어난 것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남자의 우월성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적으로 방종하고 싶고 더 많은 여자와 더불어 쾌락을 얻고자 하는 남자들의 추한 마음에 하나의 놀라운 경종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만일 아내에게 이처럼 대한다면 차라리 장가를 들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느냐고 한 말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에는 남자이건 여자이건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간음죄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원래 합한다는 말의 “합하여”는 ‘콜레데세다이’로 이 말은 ‘콜라오’로 밀착시킨다, 굳게 결합 시킨다의 미래 수동으로 계속하여 남자가 아내에게 하나가 되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부부간의 결합은 간음한 연고와는 사람이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간음이란 이미 이 부부간의 결합 상태를 포기한 일이기 때문에 한쪽은 마땅히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아야 하고 한쪽은 이혼이 허락되어 다른 데 장가드는 일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조건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남자는 간음함이라고 정죄하셨으니 이처럼 율법의 정신은 사랑을 이루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세 가지 경우의 독신생활


  차라리 장가를 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세 가지 경우의 남자들의 독신 생활의 가능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어미의 태로부터 난 고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고자란 생식기가 불완전하여 남녀간의 성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의 남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남자는 장가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이 남자의 경우는 어미의 태로부터 고자로 난 자의 경우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처럼 고자로 태어난 남자들은 장가를 들고 싶어도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고 하신 말씀은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결합의 원칙을 파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남녀가 결합하여 한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일은 남자들이 결혼을 원하고 원치 않는 것으로 좌우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원리이며 이 같은 원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는 오직 그렇게 타고난 자만이 가능하다는 말씀으로 틀려 주신 것입니다.

  (2) 다음에 고자 중에는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들도 역시 성 기능이 불완전하므로 남녀간의 결합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들도 장가들 수가 없도록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만든 고자란 신체적으로 거세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경우는 두 가지 경우를 뜰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평소에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하여 생식 기판이 상함으로 고자가 된 사람입니다. “곱사등이나 난쟁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찌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레21:20-21)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불알 상한 자란 곧 평소에 입은 상처로 고자가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경우는 사람의 손으로 고의적으로 고자를 만드는 경우인 것입니다. “또 왕의 몸에서 날 아틀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20:38). 이 말씀에서 나타난 대로 왕궁의 환관을 삼기 위하여 패전국의 왕자 중에서 인위적으로 고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고자들은 장가가지 못할 자로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3) 그리고 세 번째의 경우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경우는 그 동기가 매우 숭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스로 고자가 되었다는 말이 거세를 말하느냐? 신체적 고자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 표현이냐에 대하여 논란이 많지만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고찰해 볼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람이 만든 고자가 아니라 스스로 된 고자라고 말씀하신 점에서 극기 생활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성도의 금욕 생활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어떤 목사님은 이 말씀에 의하여 스스로 거세함으로 고자가 된 끔찍한 일이 있었지만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무시한 행위이며 너무나도 잔인한 행위로 이런 방법으로 하는 금욕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이 못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스스로 험자의 몸으로 다만 예수님만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생활이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라고 말했습니다(고전7:6,7).

  주님을 위한 독신 생활은 두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여자는 남편과 갈라지지 말아야 하는데 만일 갈리는 일이 있더라도 그냥 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독신 생활은 사명을 받은 자가 아니면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을 위한 사명감으로 한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녀간 서로 결혼하면 아내가 생기고 남편이 생기며 자녀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마음이 갈라지게 됨으로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충성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고전7:32-35).
  그러나 독신 생활이나 금욕 생활에는 견뎌내기 어려운 육신적인 결함이 우리 인간들에게 있기 때문에 아무라도 이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금욕할 수 없거든 차라리 혼인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극기 생활이 특별한 은사로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어렵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이 하신 이 모든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인간은 원래가 남녀의 결합으로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임으로 부부간의 사랑으로 잘 융화하고 한 몸을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156 ≈       어린이들에게 축복하신 예수님


  (본문 : 마태복음 19 : 13 - 25)



  서 론 :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이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는 일을 마땅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축북 기도를 받으려고 어린이를 데리고 자주 찾아 왔으나 그때마다 그들은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보내는 시간이 무의미하며 공허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선생님이 어린아이들의 접근으로 말미암아 피곤함을 느끼신다면 중대한 복음사업에 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심히 꾸짖으시면서 “어린아이를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이유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특별한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린이들은 성품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을 만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사람이 겸손하지 않으면 복음을 받아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은 온유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어린이들은 죄나 악에 아직 깊이 물들지 않은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은 죄를 고의적으로 계획하거나 죄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거나 죄 가운데서 살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생활은 어른들처럼 죄로 물들고 멍든 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것입니다.

  (3) 어린이들은 장성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에 일꾼들이 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일꾼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일꾼을 기르시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유용한 일꾼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적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린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2.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에게 어린아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1)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 받는 일은 그 어린아이의 구원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디모데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 같은 믿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사람이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운다면 일찍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모든 사람이 거듭나는 역사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 믿음을 가지기 쉬운 것은 어려서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어른이 된 후 보다 그의 성품상 구원을 받기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2) 어른들이나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을 반드시 그리스도 앞으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부모들은 예수님 앞으로 자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 같은 부모의 행실은 주님의 칭찬을 받을만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이로 인하여 주님은 그 어린아이들에게 축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주님께 나올 수 없습니다. 부모에 의하여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일이나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에 등한히 하는 일은 그 어린아이를 신앙적으로 키우는 방법이 아니며 그 어린아이의 영적인 생명을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3) 어린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받으며 자라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친히 안수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안수는 곧 축복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는 일은 그 아이들에게 신앙적인 성장을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안수가 그 받은 아이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되었던 것처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는 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부모들은 그들의 어린아이들의 영적인 축복을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4) 어린이들이 그리스도 앞으로 오는 일에 어른들이 방해 요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라도 어련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려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친히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뜻으로 어린이들을 실족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못 가도록 막는 일은 그들의 생명을 실족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지극히 조심해야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뜻으로 어린아이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들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일은 어른이나 어린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5) 어린이들도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어린아이들도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도 어린아이와 같이 되자


  예수님은 주어진 상황에서 언제나 적절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환영하시고 그들에게 축복해 주신 일은 우리들을 위한 교훈의 뜻이 다분히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너희는 어린 아이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어린아이들같이 단순하고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섬기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뿐 아니라 천국에서 가장 큰 자란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 론 :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무엇을 심든지 잘 받아 드려질 순결한 밭입니다. 우리는 이 어린아이들의 좋은 밭에 복음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우리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을 귀히 여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적으로 자라나도록 영적으로 보살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어린아이들과 같은 온유하고 겸손한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157 ≈       영생을 놓쳐버린 청년


  (본문 : 마태복음 19 : 16 - 22)



  서 론 :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영생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원래가 애초에 죽지 아니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었기 때문에 누구나 죽기를 싫어하며 영생을 갈망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이르기를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고 하셨습니다. 영생을 사모하는 한 젊은이가 주님 앞에 찾아 나왔습니다. 그 청년은 영생의 도리에 대하여 이처럼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그 청년의 물음이었습니다. 이 같은 물음은 세상 사람들의 공통적인 물음이요 똑같은 생각입니다.


  1. 부자 청년의 생각


  영생에 대한 길을 묻기 위하여 주님께 나온 이 청년은 이름 있는 청년이요 많은 재물을 가진 부요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경건한 율법적인 생활은 아마 사도 바울 만큼이나 율법에 홈이 없는 생활을 해 온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안한 마음을 버릴 수 없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생에 관한 일업니다. 어쩐지 그는 영생에 관한 한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선생님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고 그 길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러한 자신의 문제를 그에게 물어 보기로 마음먹고 찾아 간 것입니다.

  그가 물어 본 말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말한 선한 일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이란 ‘아가돈’으로 이 말의 뜻은 윤리적, 율법적인 일로 사람이 외모로 보기에 선한 일을 가리킵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사모하기는 했지만 그 방법을 몰랐습니다. “무슨 선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그 해답을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생의 조건이 오직 믿음에 있는 것으로 알고 영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 줄로 알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전념합니다. 이 사람들은 육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도덕적인 기준에 의하여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들 또는 영생을 바라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2.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무슨 선한 일”을 묻는 이 청년에게 예수님은 이처럼 답변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계명이란 물론 십 계명 곧 율법을 가리킨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율법의 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죄악성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명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합니다(롬7:12). 사람이 바라는 영생의 자격은 사실인즉 이 계명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명의 큰 뜻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것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뭇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요,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것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율법의 참 뜻을 사람들이 깨닫는다면 그 안에 복음이 있고 그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정신을 전혀 모르고 기록된 의문에 얽매이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외식함으로 정죄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청년은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계명을 지키라”고 하는 말씀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 계명이란 어느 계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갈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고 물었습니다.


  3. 청년에게 부족했던 한가지 일


예수님은 이 청년이 과연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생활을 했는가의 여부를 그의 입에서 확인하기 위하여 마지막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율법의 참 정신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기록된 계명에는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계명의 대 강령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정신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톰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런 주님의 물음에 대하여 그 청년이 “내가 다 지키었사오니”라고 말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인 거짓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으로 “선생님, 저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해 왔다고 하면서도 참으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생활을 못했나이다”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자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외식적인 거짓된 점을 그에게 알려 주시려고 의문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그의 생활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주님의 이 같은 말씀은 “네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면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생활을 하였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네 재물을 처분하여 가난한 네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그가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생활을 못해 왔음을 그의 양심에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영생이 가난한 이웃의 구제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청년이 율법을 지킨 일은 외식적인 것이요 온전히 지킨 것이 아님을 밝히시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청년이 정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진실한 생활올 해 왔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 론 : 이 청년은 영생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로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리고 자기가 바라던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분명한 길이 그에게 열려져 있었지만 그는 그 길을 따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영생의 길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선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청년은 자기가 하나님을 계명대로 사랑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시험에서 자기는 하나님보다 돈올 더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증거가 드러난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의 천국 문이 닫혀져 들어가기를 구하기는 했지만 영생의 문턱에서 근심하며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 158 ≈       부자와 천국


  (본문 : 마태복음 19 : 23 - 30)



  서 론 :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님 앞에 찾아 나오기는 했지만 재물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영생의 길을 버리고 근심하며 세상으로 돌아간 그 청년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이 물러간 후 제자들을 향하여 더욱 놀라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재물이 많은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마음은 영생을 원하지만 재물 때문에 그 길을 스스로 버린 그 청년의 경우가 그 증거가 된 것입니다.


  1. 부자의 실격 이유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말할 수 없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도 실격자가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심히 놀라면서 이처럼 물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의 이 말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부자란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 누구나 다 부자 되기를 원하고 힘쓰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부자 되기를 힘쓰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애쓰고 힘써서 돈을 벌면 누구나 다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 모두가 다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들의 놀램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1) 부자는 돈의 힘 때문에 자기 힘으로는 영생의 문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영생을 바라고 예수님을 찾아 나온 청년에게 만약 재물이 없었다면 주님을 따르는 일에 크게 구애받을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재물이 있었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물과 겸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마6:24).

  (2) 돈이 많은 사람은 두 가지 사실에 실격이 됩니다. 하나는 부자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못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의 비중이 하나님의 비중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 하여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소유한 돈 때문에 뒷전으로 쳐지는 일을 절대로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다른 또 하나는 돈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에 방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그가 순종할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언제인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문제의 선태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재물을 가진 사람은 단연코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덤전6: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은 인간의 마음을 잡아끕니다. 그럼으로 이것을 사랑하게 되면 미혹을 받게 되며 결국에는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2.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놀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의미 심장하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구원하실 수 있으니 너희는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은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면 다 그의 권능으로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1)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부자들은 천국에 절대로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과 동일하신 말씀이십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부자이면서 자신이 영생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면 이 같은 일은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나 매 일반으로 이 비유의 뜻은 절대로 불가능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들어 있는 뜻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이 부자를 구원하시고자 하실 찐대 그의 그 부요함을 끊으시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도록 만드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연단하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로 하여금 그가 의뢰하는 그 재물을 다 흩으시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로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을 받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욥처럼 그의 몸을 쳐서 그를 질병으로 병상에 눕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권능의 부르심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권능을 나타내시어 그의 마음을 강권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  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하늘에서 강한 빛을 받아 그의 마음이 자기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권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변화 받게 된 것입니다(행9:1-9).

  하나님의 권능 앞에는 그 누구의 마음도 돌이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베드로는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심판권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심판권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권은 오직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상급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된 자들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메시야를 거역함으로 이방인이 그들을 앞서고 그들은 나중이 될 것입니다(롬11:25-29).

  결 론 :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들에 대한 축복을 이생에서와 내세에서 똑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도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는 축복을 확실히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가지고 영생에 거치는 돌이 되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감사함으로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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